인문학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왕소군, 중국 4대 미녀, 흉노, 평성의 치

Jobs 9 2021. 3. 12.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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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昭君

양귀비, 서시,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

기원전 1세기경의 인물로,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처로 원래는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정확한 생몰연도는 불확실하다. 다만 호한야 선우와 결혼한 시기 등을 통해 출생 년도를 추정할 뿐이다.

본명은 장(嬙)으로 성과 합쳐 왕장이 본명이지만, 자가 소군이기에 흔히 왕소군이라 불린다. 또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녕호 연지(寧胡 阏氏)로 봉했다. 훗날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양귀비나 초선 등에 비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인물. 그러나 중국에서는 지지가 확고한 미녀이다. 포사, 양귀비 등 대부분 중국사에 등장하는 미녀들이 국가의 멸망에 관여하는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비해, 왕소군은 평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숭고한 여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소군이 자의로 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정말 자신을 희생한 것인지는 불명.

한서 원제기에서는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년) 봄 정월에 호한야 선우가 입조하여 위와 같이 혼인을 요청하자, 대조(待詔) 액정(掖庭) 왕장(王檣)을 신부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경잡기>에 의하면, 평소 한원제는 후궁이 많아서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그걸 보고 누구와 동침할지를 결정했다. 당시에는 후궁으로 들어가서 황제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죽는 여자도 많았기 때문에, 후궁들은 화공인 모연수에게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쳐댔다. 하지만 왕소군만이 뇌물을 주지 않아서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없었다.[1]

당시 흉노와 전한은 당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 지도자인 대선우 호한야가 한족 궁녀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여 적당히 후궁을 보내게 되었다.[2] 원제는 그래서 초상화만 보고 흉노로 보내도 아깝지 않을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가기 전날에 왕소군을 만나보았더니 웬걸, 왕소군이 천하절색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접하고 넋이 나갔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왕소군을 흉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흉노에게 보내기 전에 하룻밤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초상화를 그린 모연수는 당연히 분노한 원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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