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여태후, 묵돌선우, 평성의 치, 성희롱

Jobs 9 2021. 3. 12. 05:45
반응형

기원후 1세기 쯤이라면 욱일승천하며 한나라를 쥐락펴락했던 흉노가 한무제의 반격을 받고 북으로 북으로 쫓겨난 시기였다. 흉노의 전성기는 기원전 200년~기원전 100년 사이였다. 흉노는 특유의 기마전법으로 진나라 말~한나라 초 어지러운 중원의 상황에 힘입어 강성해졌다. 특히 두만 선우(?~기원전 209)에 이어 정권을 잡은 묵특(돌) 선우(기원전 209~174)가 흉노를 강대국으로 키웠다.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 고조도 묵돌선우에게 무릎을 꿇고만다. 즉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기원전 202년 겨울, 한고조 유방은 흉노 묵돌선우의 계략에 말려 평성(산서성 대동시·山西省 大同市)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당했다가 겨우 목숨을 보전한다. 

이것이 중국역사가 일컫는 ‘평성의 치욕’이다. 한나라는 흉노의 계속된 침략에 ‘한나라 공주를 선우의 연지로 보내고, 해마다 일정량의 무명과 비단, 술, 쌀 등을 바치며, 형제의 맹약을 맺어 화친한다’는 내용의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 한나라는 흉노 왕에게 종실여인과 조공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형제의 연, 아니 사실상 동생이 되기를 약속한 것이다. 흉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한고조가 죽고. 그의 부인 여태후(?~기원전 180)가 정권을 잡자 묵돌은 일종의 연애편지까지 보내 한나라를 한껏 조롱했다. 

“당신도 홀로 됐고, 나도 혼자이고…. 뭐 둘 다 즐거운 일도 없고…. 어떠신가요. 있는 걸로 없는 것을 바꿔보심이….”(陛下獨立 孤분獨居 兩主不樂 無以自娛 願以所有 易其所無)”

당시 한나라의 ‘사실상’ 황제인 여태후(?~기원전 180)가 흉노의 묵돌 선우(왕)로부터 받은 이 외교서한은 곧 “당신도 과부, 나도 홀아비이니 함께 만나 즐겨보자”는 것이었다. 한나라 조정은 흉노족이 안긴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여태후는 지금으로 치면 장수들을 총동원,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다. 일각에서는 이참에 흉노족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진나라 역시 흉노 때문에 망했는데, 이제 갓 개국한 한나라는 더욱 감당할 수 없다”는 신중론이 개진됐다. 그 무렵 흉노는 누란과 오손, 호계 등 26개 인접국까지 모조리 병합하면서 더욱 기세를 떨쳤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