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리의 순이(順伊)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욱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왔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 핵심 정리
* 작자 : 임화(林和 1908-1953) 시인. 문학평론가. 본명 인식(仁植). 필명 청로(靑爐)․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성아(星兒)․임화(林華) 등이다. 서울 출생. 보성중학(普成中學) 중퇴, 잡지 <학예사(學藝社)> 주간을 거쳐 1926년 카프에 가입한 이래 조직 활동에서 줄곧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32년 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한 후 서기장이 되었으며, 1935년에는 카프 해소파의 주류를 형성, 카프 해산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8․15광복 이후에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그 후신인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후 월북하였고, 1953년 남로당 숙청 때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으로는 시집에 <현해탄(玄海灘)>, <찬가(讚歌)>, <회상시집(回想詩集)> 등이 있으며, 평론집에 <문학의 논리>가 있다.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경향시
* 율격 : 내재율
* 표현 : 극적 구조. 서사 지향적
- 대화체 사용 : 자신이 가진 이념이나 계급 투쟁의 목적을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함
- 시적 대상을 여성으로 택함
- 과장된 감상적 정서를 유발
* 성격 : 서사적, 선동적, 격정적, 호소적
* 구성 :
1연 애인을 잃은 슬픔과 오빠의 위로
2연 순이의 삶의 내력
3연 즐거운 연인 시절
4연 연인이 붙잡혀 감
5연 옥중의 여인
6,7연 새로운 투쟁 의욕
* 제재 : 일제 치하의 노동 운동
* 주제 : 일제 치하의 노동자들의 투쟁과 의지
* 출전 : <현해탄>(1938)
■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카프 계열의 대표적 시인인 임화의 대표작으로 이른바 ‘단편서사시’ 계열의 작품이다. ‘단편서사시’란 1930년대 초반, 평론가 김기진이 이름 붙인 시 양식으로 짧은 시형 속에 서사성을 압축시켜 표현한 일종의 ‘이야기시’이다. 여기에는 또 일정한 극적 인물이 등장해 대사를 읊듯이 시가 전개되기 때문에 ‘배역시’라고 하기도 한다.
임화는 그 대표적 시인으로서, “우리 오빠와 화로”를 비롯한 그의 단편서사시들에는 특유의 공통된 인물과 상황이 등장한다. 시 속의 상황은 ‘이별’이며, 극중 인물은 ‘떠나버린 투사’, ‘남은 동무들’ 그리고 오빠나 누이와 같은 매우 친밀한 관계의 인물이 화자로 등장한다. 이 시 역시 오빠가 화자로 등장하여 애인이며 노동 운동가였던 청년을 잃고 슬픔에 잠긴 누이동생을 위로하며 슬픔을 딛고 새로운 투쟁으로 나아갈 것을 격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첫 연은 누이동생 순이가 애인을 잃은 슬픔에 방황하는 것을 오빠가 타이르는 내용이다. 그런데 누이의 연인은 오빠가 ‘사랑하는 젊은 동무’이며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으로서, 누이의 슬픔은 노동자 계급 전체의 집단적 성격을 지님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연에서는 화자와 순이가 지난 봄에 어머니를 여의게 되고, 순이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 곳 청년’을 애인으로 가지게 된 사실을 제시한다. 2연의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라든지 4연의 ‘때 묻은 넥타이’라는 구절로 보아 오빠는 노동 운동에 동조하는 맑스주의적 지식인이고, 순이의 연인은 노동자 출신의 혁명적 동지임을 알 수 있다.
3연은 추운 겨울이나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청춘의 정열과 다정한 웃음으로 넉넉히 괴로움을 극복해 나갔던 즐거운 연인 시절을 보여 준다.
그런데 4연에서는 돌연한 사태로 순이의 연인이 어디론가 끌려갔다. 시 속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도적놈’이란 단어에서 유추해 볼 때, 부당한 일제 경찰이 노동 운동을 하는 연인을 잡아 갔다고 할 것이다.
5연에서는 그 잡혀 간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라고 하는 대목은 감옥 속에서 하루하루 날짜를 세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오빠의 ‘때 묻은 넥타이’는 오빠 역시 그 청년과 연관된 일로 쫓겨다니는 신세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누이의 슬픔을 위로하던 오빠는 6연에서 돌연 새로운 투쟁을 고무한다. 이 연으로 보아, 시의 상황은 지금 종로 네거리의 무슨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오빠가 누이동생과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로 네거리에 다다른 화자는 누이의 손을 잡고 그 청년을 위해, 그리고 내일을 위해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고 권유한다. 이 시가 처음 발표된 당시에는 ‘또 다음 일 계획하러’라고 되었던 부분이 시집 <현해탄>에 실릴 때는 더욱 폭압적으로 변한 일제의 상황 때문에 ‘내일을 위하여’로 변한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노동 운동을 하다 감옥에 들어간 청년과 그 연인인 순이의 이야기를 통해 열정적인 청춘을 살아 가는 노동 계급의 정당성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 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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