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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한국 발라드 모더니즘, 이문세, 유재하

Jobs9 2023. 5. 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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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한국 발라드 모더니즘, 이문세

 

한국형 발라드의 원형을 만든 故 이영훈 작곡가 
이영훈은 대한민국의 작곡가, 작사가다.

유재하와 함께 '한국형 팝 발라드의 개척자'라고 평가받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당시 국내 발라드계에서 전설적인 작사가, 작곡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영훈 선생이 그렇다고 발라드를 발명한 건 아니다. 그는 없는 것을 창안해낸 게 아니라 있어온 것을, 있어야 할 것을 비로소 있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난 아직 모르잖아요', '사랑이 지나가면', '그女의 웃음소리뿐', '광화문 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과 같은 낯선 패턴의 선율이 어찌 그토록 통렬한 전파대첩을 일궈냈겠는가. 당시 한 여기자는 말했다. '바라던 노래가 이제 비로소 나온 것'이라고...(중략)...1980년대 말에 와서는 급기야 가요와 팝의 위대한 역전이 이뤄졌다. 이영훈 선생의 업적 중의 업적은 서러움과 멸시의 굴레에서 허덕이던 가요가 당당하게 대중음악의 주체로 상승하게 된 밑거름을 제공했다는데 있다. 만약 새로운 패턴의 발라드 곡 쓰기가 그의 개인적 성공이라면 팝과 가요의 우선 순위 바꿈은 그가 쾌척해낸 사회적 성공일 것이다. 
―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작곡가 이영훈 1주기〉   


이영훈은 일련의 작업들을 통하여 통속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는 말로 격하되지 않을 '격이 있는 사랑노래'를 썼다. 과장과 위악과 오만 없이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를 풍성한 선율과 혼잣말과 같은 가사에 저며 냈다. 그러면서도 자기연민과 감정과잉 속에 허우적대지 않는 담담함이 잃지 않았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살다보면 다른 가능성이 두려워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곤 한다. 그리고선 '그래 차라리 잘됐어'라고 중얼거린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베어져 저만치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 대중음악 평론가 나도원,〈故 이영훈을 말하다〉




이영훈은 1960년 3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굉장히 엄숙하고 엄중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편을 잡은 교사였고, 형은 의사였다고 한다. 조용하고 공부만 했던 집안으로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건 상상할 수가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영훈이 음악을 너무 하고 싶어 해서 그의 어머니가 70만원 되는 월급으로 58만 원짜리 피아노를 사줬다고 한다. 그는 그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했다. 무엇이든지, 어떤 음악이든지 그 피아노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고 했다. 중학교 때 이 피아노로 그의 히트곡 ‘소녀’, ‘사랑이 지나가면’을 작곡했다고 한다. 이영훈은 정규음악 수업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독특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고 바이엘, 체르니를 혼자서 독학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음악하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 쪽 공부를 하기를 원했기에 집에 기타 소리가 나거나 하면 무척 화를 내기도 했으며, 기타를 부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영훈은 밖으로 많이 맴돌았다고 하며 집안에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아니고 '공부하라, 공부하라' 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유일하게 그를 지원해줬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피아노도 사줬고, 형이랑 누나가 공부하다가 조금 쉬고 있을 때 유일하게 이영훈이 피아노를 조금이나마 연주하게끔 가족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을 음악가로 만들어 준 사람이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유난히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앞날을 위해 늘 골방기도를 했고, 가족 모두 반대했던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음악을 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결사반대했던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과 달리 남몰래 늘 격려했다. "영훈아, 나는 네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네가 선택한 만큼 네가 책임져야 해. 그래도 엄마는 네가 착해서 참 이뻐."라며, 어머니는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하는 아들의 부탁으로 70여만 원 되는 월급에서 서슴없이 58만 원 하는 피아노를 사 주었다. 그래서 믿어준 어머니에게 자신의 성공을 보여 드리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영훈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꼬박 3년을 투병하였다. 그가 처음 발표한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10주 동안 각종 가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을 때 어머니는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있었다. 그는 잠깐 의식이 돌아온 어머니를 붙잡고 성공 소식을 알려드렸더니, "이젠 피아노 사준 돈 다 갚아"라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 그러나 결국 어머니는 2주 후에 운명하였다. 그는 어머니가 사주신 그 피아노로 곡을 만들었고, 골든디스크상을 세 번이나 받을 수 있었다. 

이영훈은 원래는 연극, 방송, 무용 등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비교적 순수예술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작곡가였다. 이영훈은 데뷔하기 전까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주제가를 작곡하거나 피아노 세션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84년 김의석 감독의 데뷔작인 단편 '창수의 취업 시대' 영화음악을 맡으며 작곡가로서의 서막을 올리며, 1985년에 대중음악 작곡가로 데뷔하게 된다. 작곡가로 데뷔하기 전, 이영훈은 영화와 미술 음악을 하면서 클래식 감성을 쌓아왔다. 그런 배경에서 나온 감각은 대중음악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지속됐다. 

 

Q. 이문세 씨를 처음 만난 날은?

이영훈: 제가 녹음하던 킹레코드라는 녹음실에 놀러왔었어요. 그 당시엔 그곳이 메카였어요. 조용필 선배님, 나훈아 선배님, 김추자 선배님 등이 다 그쪽 출신이신데, 이문세 씨가 놀러 오셨더라고요. 당시 저는 아르바이트로 선배님 밴드의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었는데,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선배님께서 이문세 씨와 저를 소개시켜주셨어요.

한편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1977년 가수 겸 MC로 데뷔한 이문세는 1집과 2집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과 '파랑새'를 발표하지만, 가수보다는 오히려 라디오 DJ로서 명성을 더 얻고 있었다. 1985년 어느 날, 이문세는 신촌블루스의 엄인호를 만난 자리에서 새 앨범 작업을 위한 작곡가를 부탁하였다. 이때 엄인호는 마침 그의 연습실에서 작업하고 있던 신인 작곡가를 소개하게 된다.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이문세가 작곡가 이영훈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굉장히 수줍어하는 그에게 곡을 좀 들려 달라고 했다. 그가 마지못해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첫 멜로디가 내 심장을 쳤다. 지금의 '소녀'였다. 나한테 곡을 줄 수 있느냐고 묻자, 자기는 아마추어여서 히트도 안 될 거라며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해 서울 수유리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6개월에 걸쳐 8곡을 완성한 이영훈은 "쉬운 노래를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니 30분 만에 한 곡을 만들었다. 그 곡이 바로 '난 아직도 모르잖아요'였다. 이문세의 3집 대표곡이 된 이 노래는 KBS의 '가요 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였으며, 동시에 라디오 인기가요 차트에서 10주 연속 1위를 거머쥐는 대히트곡이었다. 이 히트로 이영훈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사가, 작곡가로 부상하게 된다.  
이문세에게 이영훈은 구원의 손길 그 자체다. 처음 낸 두 앨범은 이렇다 할 눈길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3집에서 '난 아직 모르잖아요', '휘파람', '소녀'가 연달아 많은 사랑을 받음에 따라 이문세는 한순간에 스타 대열에 들었다. 1987년에 발표한 네 번째 앨범에서도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가을이 오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등 다수의 노래가 인기를 얻어 이문세는 가수로서 탄탄대로를 걷는다.
서정가요의 발전을 추동한 이영훈과 이문세를 이러한 발라드 집착과 연결짓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앨범은 다채로운 색을 지니고 있었고, <이문세 4>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이 지나가면'을 시작으로 고급스러운 현악연주가 수놓인 '밤이 머무는 곳에'와 '이별 이야기', 신스 팝과 록을 반영한 '그대 나를 보면'과 포크송 '가을이 오면'으로 채워진 A면은 물론, '깊은 밤을 날아서'와 '슬픈 미소', '굿바이'와 '그녀의 웃음소리뿐'으로 이어지는 B면까지의 모든 곡들이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영훈은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다듬어 써 내리듯 앨범을 만든 완벽주의자였다. 이들의 성공은 잔뜩 부푼 풍선에 바늘 끝을 갖다댐으로써 이루진 것이 아니었다. 이영훈은 화성적인 안정성과 구조적인 완결성을 중시했으며, 대중성을 획득하면서 품격을 유지하는 대중음악의 조형방식을 제시했다. 어렵지 않으면서 틀이 잡힌 곡들의 저변에는 바흐의 숨결이 남은 클래식과 팝의 새로운 조류를 수용한 감각이 흐른다. (중략) '이문세 3'부터 이문세 5'까지 연이어 성공하면서 이영훈과 이문세는 하나의 정석이 되었다. 가뜩이나 천편일률적이었던 대중음악의 소재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묻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 나도원 (대중음악 평론가), 〈故 이영훈을 말하다〉


기존에 없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어딘가 모를 막연한 느낌의 친화력, 한국인이라면 즉각적으로 호응할 듯한 그 친밀감은 숨길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20대와 30대 여성은 물론 참신한 유행에 민감한 10대 여고생들은 특히 그랬다. 그들은 너도나도 ‘빠르게’ 이문세 노래에 흡수되었다. 실은 그의 보컬에 실린 이영훈의 멜로디에 속속 포박된 것이다. 한마디로 곡이 너무 좋아서였다. 

이영훈이 국내 대중음악 역사에서 ‘게임 체인저’가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들의 성원에 있다. 팝 발라드가 고통 속에 주류에 안착한 게 아니라 무혈입성이라고 할 만큼 부드럽게 착지하게 된 것 또한 그들 덕이다. 이것도 게임을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영훈은 더 큰 게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중략) 하지만 이영훈의 곡들이 음악수용자들에게 어필하면서 판은 다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팝을 들어야 했던’ 그들 사이에선 ‘이제 우리 가요도 들을 만하다’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졌다. 이것은 ‘가요를 듣는 애들은 수준이 낮아!’라는 이전의 무시를 고려하면 거의 천지개벽이었다. 팝 프로는 하향세, 가요 프로는 상승세가 이어지더니 1988년에 가서는 마침내 팝과 가요의 역전이 이뤄졌다. 게임 체인지, 가히 혁명이었다.  

이영훈의 진정한 업적은 멸시의 늪에 허덕이던 가요가 팝을 넘어 유행음악의 주체로 거듭나는 기초를 마련한데 있다. 이영훈의 궤적을 단지 예술적 측면에서가 아닌 시대적 사회적 측면으로도 해석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K팝이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성공을 쾌척해낸 우리 대중가요가 서구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한 서막을 이영훈이 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이영훈은 3집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필두로 '휘파람', '소녀'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팝 발라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인기의 절정은 1987년에 발표한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그녀의 웃음소리뿐' 등이 수록된 이문세 4집은 그야말로 '발표는 곧 히트'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며, 그해 골든디스크 대상과 작곡가상을 휩쓸며 최고의 작곡가로 등극한다. 무려 285만 장이나 팔린 4집은 그때까지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사상 최다 음반판매기록을 세우는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1988년에 나온 이문세의 5집 앨범은 선주문만 수십만 장에 달했다. 5집에 실린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광화문 연가', '붉은 노을' 등은 10~20대의 입에서 저절로 흥얼거리게 만들었고, 전파를 탄 이문세의 노래는 온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 음반으로 이문세는 골든디스크상 3연패를 이룩하게 되었고, 이영훈이 추구했던 고품격의 팝 발라드는 대중가요에 대한 이전 인식을 바꾸게 하였다. 그들의 인기로 그동안 라디오 음악의 전성기를 누렸던 팝송 프로그램들이 서서히 사라지며, 가요 프로그램들이 대거 편성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팝 발라드의 태동은 대중가요 변화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현대 한국 발라드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각각 1989년에 발표된 이문세 6집과 1991년에 발표된 이문세 7집에도 변함없이 참여하여 본인의 역량을 발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문세와의 갈등으로 이문세는 8집을 이영훈이 아닌 다른 작곡가와 작업을 했고, 둘은 1995년 발매된 9집에서 재회하게 된다. 9집은 예전처럼 전곡을 이영훈이 맡았는데, 이 앨범이 다소 부진한 뒤, 10집과 11집에서 이문세는 이영훈의 곡을 한 곡 씩만 불렀다. 또 다시 모든 노래를 작사/작곡하게 된 이문세 12집에서 이영훈은 1987년부터 만들기 시작해 2001년에야 발표하게 된(가사를 쓰기 전 이미 연주곡으로는 한 차례 발표했었다.), 스스로 꼽는 최고의 작품 '슬픈 사랑의 노래'를 발표한다.  

이영훈은 이 시기부터 이문세와의 작업 이외에도 드라마,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고 히트한 자신의 곡을 편곡하여 관현악으로 구성된 소품집들을 발표한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ABBA의 히트곡으로 구성된 뮤지컬 맘마미아처럼 자신의 히트곡들로 구성한 광화문 연가라는 뮤지컬을 구상했지만 대장암 판정을 받은 후 투병하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한 바람은 이영훈과 함께했던 제작진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고 마침내 2011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렸다.   

고인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몇 편의 글을 남겼는데(본문도 그 글을 많이 참고했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첨부한다.
제목 : 또 일주일...
작성자 : 작곡가 이영훈
작성일 : 2007-12-20 17:20
아마 몇 일간 내 모습이 궁금들 하지 않았어?
퇴원하고 닷새 만에 또 입원했다가 그저께 퇴원했습니다.
나도...
할 말이 없어.
지쳤구.
지겹구.
한편으론 웃기기도 하구.
그러다가도 고통이 밀려 오면 ..
아무소리, 못하지. ^^
병원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이야.
나를 보는 사람들이 또 얼굴 본다해서...반갑다고 웃을수도 없고
병원에선 서로 가 다시는 보지 말자고들 다짐들 하고 퇴원들 하잖어.
그러다가 뜻밖에 또 얼굴을 보게 되니 얼마나 민망들 하겠어? ^^
아...
이제 병원 좀 제발 안갔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약한 말 하고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는 것 처음이지?
이제 많이 힘이 드는구나.
아들 이정환: 혼수상태에 빠지셨을 때인데, 가끔씩 의식이 돌아오셨었어요. 그럴 때마다 허공에 대고 지휘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정말 아플 때인데도 옅은 미소 띄시면서 너무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었다고….그때 들은 멜로디 모티브를 노트에 힘겹게 적으셨던 메모가 있어요. 밑에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쓰셨더라고요. 천국에 정말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넘쳐나고 본인 음악은 쓰레기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신기했죠. 나중에 할아버지가 정말 묵묵하신 분인데, 오셔서 병상에 계신 아버지 손을 잡더니 너 같은 대단한 아들을 둬서 정말 자랑스럽다고 처음 칭찬해주셨다고 해요. 저희도 보면서 굉장히 감동스러웠죠.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문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룩한 그의 노래들은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에 길이남을 걸작들로 칭송받는다. 유재하와 함께 통칭 발라드라 불리는 한국적 팝음악의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작곡뿐만 아니라 직접 작사까지 한 노래들은 현 세대 가수들을 통해서도 리메이크 되어서 지금까지도 불려질 만큼 생명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디지털 음원이 음반 시장의 주도권을 잡은 뒤로 가요계의 순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발매와 동시에 음원차트 1위에 오르는 노래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루 만에, 혹은 하루도 채 안 돼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노래도 흔하다. 세대를 막론한 다수에게 오래 기억되는 노래는 많지 않다. 

그에 반해 이영훈의 노래는 음원차트에서 볼 수 없을 뿐 우리 주변에 꾸준히 흐른다. 이문세의 목소리로, 후배 가수들의 음성으로, 더러는 연주자들의 손이나 숨결을 타고 빈번하게 나타난다. 끊임없는 애창 때문에 그의 부재는 좀처럼 실감되지 않는다. 이영훈이 떠난 지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이름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뚜렷하게 빛을 발한다. 
― 한동윤 (대중음악 평론가), 〈작곡가 이영훈을 추모하며〉, 멜론매거진
그러고 보면 이영훈 음악만큼 새로운 대중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음악도 흔치 않다. 이영훈은 그렇게 유행가임에도 시대불변의 명작을 써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자랑이다.
―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가 이영훈 생전에 했던 인터뷰가 읽어볼 만 하다. 인터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이영훈이 강박에 가까운 태도로 작곡을 했다는 사실이다. 하루 종일 피아노 앞에만 앉아 커피 40잔, 담배 4갑을 피우며 밤을 새가면서 곡을 써냈다는 이야기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그는 이런 행동이 건강에 크게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작곡에 대한 일념으로 몸을 해치며 곡을 써냈으며 결국 47세라는 짧은 생을 대장암으로 마치는 데도 이 점이 분명히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뮤지션으로서의 이영훈

'음악'이란 인간의 가장 깨끗한 상태의 '영감'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논리'와 '방법'이 만든 음악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쓰레기일 뿐이다.
― 이영훈, 1986년 9월#
이영훈 씨는 클래식에 기반을 둔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로 대중음악의 품격을 끌어올렸다.
― 임진모#
이영훈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동시에 스테디셀러’인 이문세의 전성기 음반들의 작곡가라는 이유만으로도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이다.
― 한국대중음악 최고의 작곡가 10인

 

작곡가로서
악상은 영화적으로 잡아요. 뭔 곡을 써야 되겠다 싶으면 피아노 앞에 앉아서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면서 명상을 하죠. 어느 장면을 생각할까, 젊었을 때 대학로나 시청 앞에 섰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버스를 타고 이런 구체적인 장면을 생각하면 그 배경음악이 떠올라요. 그럼 그걸 바로 쓰는 거죠.
이영훈의 음악을 내게 감히 정리하라고 한다면 다름 아닌 바로 그렇게 정리하고 싶다. 그의 음악은 실로 만든 이와 듣는 이가 같이한 음악이라고, 그래서 존귀한 음악이라고. 1980년대 중반 이문세의 목소리로 전해진 이영훈의 곡은 얼핏 혁명적 경이로 다가왔다. 당시 청취관행으로 볼 때, 그의 음악이 대중과 쉬 동화되기는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다. 그의 멜로디 패턴은 이전까지 음악계를 지배해온 트로트적(음악계에선 이를 '뽕'이라고 한다) 접근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클래식의 영향이 느껴지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그러면서도 예쁜 코드워크와 선율로 발라드의 새 장을 연 것이다.

기존 문화와의 충돌이 예상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정반대로 대중들에게 가뭄 속의 단비처럼 환호되고 빠른 속도로 수용되었다. 특히 그들 감수성에 부합한 가요가 없어서 허전하던 20대와 30대 여성들에게는 축복 그 자체였다. 당대의 음악시장이 판매량 100만장 신화에 도전할 정도로 몸집을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소비의 가장 큰 고객인 이 20대와 30대 여성이 (처음으로) 대거 음악시장에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영훈선생의 역사적 스탠스가 거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80년대에 새로운 발라드 스타일의 창조로 가요계 전성기를 일궈낸 것은 '이문세 노래'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이영훈 곡'의 각별한 위업이다.
― 임진모, 〈작곡가 이영훈 1주기〉
그 이전의 발라드가 트로트적인 과장된 창법과 신파조의 멜로디로 이어져왔다면, 이영훈의 발라드는 팝 팬의 취향까지 자극할 수 있는 세련된 애수의 노래였다. 그래서 이영훈은 한국 발라드의 모더니즘을 확립한 작곡가였다.
― 김작가, 〈이영훈이 갔습니다, 팝 발라드가 웁니다〉, 시사IN

이영훈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적 기초는 바흐, 쇼팽, 베토벤, 라흐마니노프의 느낌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클래식을 가요에 대입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 방식으로 그만의 '팝 발라드’ 스타일을 주조해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음악은 클래식에 우리 정서를 섞고 휘젓고 새롭게 빚어낸, 일종의 ‘퓨전’이다. 이를 통해 한국 고유의 팝 발라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영훈 음악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회고적이나 당대의 감성을 아우르는 서정적인 곡, 감정 극대화에 의한 슬픈 감성의 곡, 그리고 상대적으로 빠른 리듬에 살짝 격정을 머금은 곡. 대표적인 서정적인 곡은 ‘광화문 연가’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이문세 노래를 접한 지금의 기성세대가 가장 추억에 매몰되는 노래들이다. 두 번째 애조와 비감(悲感)은 그야말로 이영훈의 특장 정서인데, 여기선 ‘소녀’, ‘슬픈 사랑의 노래’가 해당될 것이다. 세 번째 스타일은 ‘깊은 밤을 날아서’와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붉은 노을’과 같은 속도감 있는 리듬 터치를 들으면 이게 과연 같은 작곡자의 곡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이영훈의 눈부신 업적은 우리만의 팝 발라드를 굴착해낸 것과 더불어 상기한 것처럼 음악의 다양성을 구현했다는 데 있다.

이영훈의 작법에 대해 한국인 특유의 이른바 '뽕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비판도 있으나, 오히려 클래식적인 작법을 대중음악에 훌륭하게 접목시킨 데다가 당대에도 히트할 정도로 시대 흐름에 앞서가는 곡을 써 낸 훌륭한 작곡가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 '뽕끼'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이영훈의 음악이, 특히 초기에 그런 멜로디적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는 많은 공감이 있다.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대표곡으로 삼는 '슬픈 사랑의 노래'에 이르면 그런 점도 많이 희석되고 순수한 이영훈의 색깔이 더 잘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는 유재하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되지만 유재하의 음악이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었다는 점을 가지고 이영훈의 트렌디함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당대의 맥락으로는 이영훈의 작법이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에 호소력이 짙은 방법론이었음을 평론이나 음반 판매량 모두가 입증해 주고 있다.

말년에 그가 밝힌 바로 그의 음악적 지향점은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의 빈 자리를 메우는 음악이었다고 한다. 이문세가 밝혔듯 이영훈의 음악은 보컬이 빠지고 오케스트라만 들어오면 그대로 클래식이며, 이문세라는 보컬의 독보적인 음색과 기교를 빼고 부르는 창법이 더해지면서 대중음악의 영역까지 넓어지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이영훈은 자신의 의도한 바의 음악을 해 낸 것이다.
Q. 음악작업 하실 때의 모습을 기억하시는지요.

아들 이정환: 제가 기억하기로는 흰 벽 앞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놓으시고 흰 벽을 바라보면서 작곡을 하셨어요.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모티브를 잡으신 후에 전개, 구성 같은 것들을 작업하신다고 하셨어요. 작업할 때는 주로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예쁘게 깎아 놓고 악보를 고치면서 다듬어 나가셨어요. 평소에 모티브는 정말 빨리 나오는데 비해 곡을 완성하기까지는 굉장히 오래 걸리셨어요. 한 곡, 한 곡 심혈을 기울여서 만드셨거든요. 지우고 또 쓰고. 후렴구에 바리에이션(variation)도 많고요. 1년에 한 열다섯 곡 정도를 완성하셨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굉장히 신성하게 생각을 하셨던 분이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아요. 20대 때는 혜화동 로터리 아카데미극장 2층에 작업실을 두고 하셨어요. 주로 조용한 새벽에 편한 마음으로 작곡을 하다가 해가 뜨면 가로수 무성한 동숭로를 거닐면서 영감을 받았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결혼하신 후에는 아파트에 사니까 전자 피아노를 사셔서 주로 밤에 헤드폰 끼고 조용히 작업을 하셨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작업하실 때는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돼요. 그리고 밤늦은 새벽에 도둑질 하듯 곡을 쓰셨던 분이에요.

Q. 어디서 음악적 영감을 받으셨을까요.

아들 이정환: 아버지는 음악을 잘 듣지 않으셨어요. 대신 소리에 민감하셨던 분이고 오감에 민감하셨던 분이죠. 창 밖 많이 내다보시고 바람 소리를 비롯해서 자연에 많이 집중하고 영감을 받았던 분이에요. 가사를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서울 하늘을 정말 좋아하셨고 떨어지는 낙엽, 바람 소리, 새벽의 그 고요함 같은 것들에 되게 집중하셨어요. 거기서 지난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을 그런 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멜로디도 떠올리고 그러셨던 것 같아요. 평소에 일기를 쓰셨어요. 그림도 많이 그리시고. 어머니한테 사랑 고백하는 편지 많이 쓰셨죠. 곡을 완성하면 보컬 트레이닝, 믹싱, 마스터링을 해야 하니까 녹음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녹음실 갔다 늦게 들어오는 게 미안하셨는지 그렇게 고백 같은 메모를 적어 놓고 나가셨었어요. 어렸지만 훈훈했죠. 가정적이고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작사가로서
그의 팝 발라드가 이전 가요와 구별된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가사였다. 생전에 그는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가사 쓰기가 선율 만들어내는 것보다 한 50배는 어려워요. 멜로디는 못 써도 하루에 다섯 곡을 쓰지만 가사는 한 달에 하나를 쓰기가 벅차고 ‘슬픈 사랑의 노래’처럼 10년 만에 하나 나온 경우도 있습니다. 가사 때문에라도 곡을 조금밖에 쓸 수가 없었죠.”#
가사에 정말 공을 많이 들이셨어요. 가사를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하셔서 작업할 때 그렇게 담배도 많이 태우시고 커피도 많이 드셨어요. 멜로디보다 가사를 만들 때 음악적 고통이 크게 왔던 것 같아요. 박목월의 ‘나그네의 은빛 수첩’이라는 책을 가지고 다니셨다 하더라고요.#
― 이정환
발라드는 아름다운 서정시에 멜로디를 붙인 것인데 이영훈씨는 정말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 이문세#

작곡가로서의 이영훈이 이룬 성과도 어마어마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작사가로서의 재능이다. 작사적인 탁월함이라는 면에서도 이영훈이 유재하와 공통점을 보인다.

이영훈의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그가 생전에 남긴 자기 곡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아쉽게도 '옛사랑'의 가사에 대한 평가는 없으나 그의 치열한 작곡 과정이나 삶에 대한 생각 등 여러 가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글들이다. 이영훈의 가사에 대해서는 작사가 스스로의 평가처럼 '옛사랑'을 듣고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이다.

이영훈 작곡가의 아들인 이정환이 말하길, 이영훈이 음악을 만드는 데 공을 많이 들인 게, 작사였다고 한다. 가사 만드는 것을 진짜 어려워했고, 창작의 고통을 느끼며 몇번이나 수정에 수정을 반복하면서 가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유재하와의 비교


이영훈은 유재하와 더불어 1980년대 한국 팝 발라드를 완성한 작곡가다.
― 시사IN#

유재하가 현대 한국의 발라드 음악에 끼치는 영향도 어마어마하지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제외한 작곡/작사가로서의 유재하와 비등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이영훈이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활동 시기, 클래식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가미한 독특한 작법, 작사가로서의 뛰어난 재능 등 유재하와 여러모로 비교될 만하며 어떤 면에서도 여타의 작곡/작사가들에 비해 압도적인 결과물을 보여 준 인물들이다. 유재하의 활동 시기가 너무 짧은데다가 유재하가 재평가되기 시작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라 이영훈과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두 뮤지션은 비슷한 점 만큼이나 다른 점도 많다. 성향도 약간 다른데, 유재하는 다룰 수 있는 악기도 많고 작법에서도 참신하고 창의적인 방안을 만들어내고, 편곡까지 도맡아 하는 등 전형적인 천재형 음악가인데 비해 이영훈은 깊은 성찰을 거쳐 피땀을 짜내듯 가사를 써낸다거나, 피아노 앞에 담배와 커피만 가득 놓아둔 채로 밤새워 곡을 써낸다거나 하는 등 수양에 가까운 작곡을 해 내는 인물이었다.



《이영훈 소품집》
소품집은 1992년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있는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의 음악가들과 수회의 연주와 녹음과정을 거치어 완성했고, 이십대초에 쓴 곡들과 33살까지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그해 모스크바의 겨울과 당시의 환경들이 이 앨범의 음악들에 남아 있어 전체적으로는 겨울을 느끼게 하는 그런 감상이 있습니다.

- 이영훈 소품집 '사랑이 지나가면' <머릿글>중에서

7집까지 함께 해왔던 이문세와 잠시 떨어져서 그는 자신의 개인 작품집에 몰두하게 된다. 러시아로 건너가 볼쇼이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소품집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1993년 애절한 스트링 선율이 돋보이는 1집을 필두로 이듬해 이문세의 히트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2집을 내고 이 앨범들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세계 최대 음악박람회인 미뎀(MIDEM)에 출품, 자신의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까지 경주했다. 그해 세 번째 앨범이 마저 나오며 소품집 작업은 마무리된다. (이 세장의 음반은 1997년에 한꺼번에 다시 묶여져 재발매되으며, 2003년에는 '사랑이지나가면'이라는 부제로 2장의 앨범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국내 최초로 인터넷 전시회를 개최했던 고 박건희가 디자인한 이 소품집에서 그는 발라드 음악이 이룩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창출하며 거장으로 가는 길에 여러 발걸음을 보탰으며 선율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맘껏 실험했다.

이영훈 소품집 1 < A Short Piece > 발매일 1993년 10월 15일
이영훈 소품집 2 < Collection > 발매일 1994년 7월 5일
이영훈 소품집 3 < A Short Piece > 발매일 1994년 7월 31일
작품집 《옛사랑-The Story of Musicians》
이영훈이 작곡한 곡들을 신세대 가수들이 다시 불러 만든 앨범이다. 《옛사랑1》이 2006년 9월에 나왔으며 2007년 4월 《옛사랑2》가 발표되었다.

이영훈 옛사랑-The Story of Musicians: 발매일 2006년 9월 14일, Cat.No : SRCD3915
이영훈 옛사랑 2- The Story of Musicians: 발매일 2007년 4월 17일, Cat.No : SRCD-3990
유명곡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 이문세 (2005년 이승철, 2006년 임재범, 2010년 장재인)
가을이 오면 - 이문세 (2004년 서영은, 2006년 박선주)
광화문 연가 - 이문세 (2004년 이수영, 2007년 성시경)
다시 만나리 - 이문세 (2006년 박완규)
빗속에서 - 이문세 (2007년 리쌍, 2010년 존 박, 2011년 YB)
사랑이 지나가면 - 이문세 (2001년 이수영, 2005년 이은미, 2010년 김지수, 2014년 아이유)
소녀 - 이문세 (2004년 성시경, 2006년 SG 워너비, 2011년 먼데이 키즈, 2015년 오혁)
영원한 사랑 - 이문세 (2006년 이승철)
애수 - 이문세 (2006년 클래지콰이)
옛사랑 - 이문세 (2007년 브라운 아이즈, 윤종신, 윤민수)
붉은 노을 - 이문세 (2003년 유리상자, 2004년 신화, 2006년 버블시스터즈, 2007년 엠씨 더 맥스, 2008년 빅뱅)
이별 이야기 - 이문세 (2004년 서영은, 2004년 신혜성 이지훈 이수영, 2007년 윤도현 오렌지라라, 2010년 왁스, 2010년 박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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