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권의 성장
동서교회의 분열
그리스도교는 로마황제들의 거듭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교세를 확장하였고 마침내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AD 313년 정식으로 공인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AD 392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교세를 확장할 수 있게 된 교회는 로마 제국의 속주총독제도를 모방하여 체제를 정비하여 로마 교회 전체를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다섯 교구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1의 사도였던 성 베드로가 순교한 땅으로 하나의 성지로 인정받는 만큼 다른 교구보다 중요하게 여겨졌고, 로마의 주교는 교회 조직의 최고의 권위를 지닌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에 다음가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더욱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슬람 세력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세 교구가 점령된 이후부터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위가 로마 교황에 도전할 정도가 되면서 동서교회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가 로마 교황에게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배경은 바로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이후 비잔티움 황제는 로마와 이탈리아 지배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내세우며 로마 교황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로마 교황으로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력에 맞설 힘이 없었기에 비잔티움 황제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AD 751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자신의 왕위계승을 인정받는 대가로 로마와 중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이를 교황의 영토로 기부하면서 사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AD 800년에 피핀 3세의 아들 카롤루스 1세를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천명하고 황제로 임명하여 로마 교황청의 수호자로 내세우면서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속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이후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의 지배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한편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대립한 두번째 문제는 교황의 수위권 문제였다. 로마 교황은 대대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았다는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8~19절의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의 후계자들인 자신들이 전 교회에 대하여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교황수위권을 주장하였다. 이를 근거로 로마 교구는 로마 교황이 교회 내부에 발생하는 여러가지 분쟁과 대립을 중재하고 심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에서는 로마 교구의 명목상 수위는 인정하나 이것이 지역 교회에 대한 간섭의 권한이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러한 의견을 관철시켜 로마 교황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AD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이 서방에서 행사하는 권위와 똑같은 권위를 동방에서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서 교회의 대립은 교황 레오 9세(재위 AD 1049년 ~ AD 1054년) 대에 이르러 결정적이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에 노르만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교황 레오 9세는 비잔티움 제국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일 케롤라리오스가 완강히 반대하면서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였다. 어쩔 수 없이 교황 레오 9세는 단독으로 노르만족과 대결을 벌일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실패하면서 AD 1053년에 바리 근처에 감금되고 말았다. AD 1054년에 교황 레오 9세는 재차 비잔티움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프랑스 추기경 훔베르트을 비롯한 3명을 사절로 비잔티움 제국에 파견하였으나 총대주교 케롤라이오스는 교황 수위권을 주장하는 훔베르트 일행의 오만한 태도에 만남을 거부하였고 교황 사절들도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가 보여준 자신들을 무시하는 태도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비잔티움 제국과의 연대는 깨어졌고 그 사이 레오 9세가 병사하자 훔베르트는 교황이 공석이 된 것을 기회를 이용하여 케롤라이오스에게 복수하고자 하기아소피아 성당에서 케롤라이오스와 동방정교회 성직자 모두를 파문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총대주교 케롤라리우스도 3명의 교황 사절을 역으로 파문하면서 동서 교회에 회복할 수 없는 분열이 발생하였다.
비록 이전에도 비슷한 쌍방파문이 있었고 당시에도 화해의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지만 두 교회의 틈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고, 훗날 AD 1204년에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면서 동서교회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리고 교회는 로마 교황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이를 부정하는 동방정교회로 분리되게 된다. 이후 동방정교회는 초기 일곱공의회(AD 325년의 제1차 니케아 공의회, AD 381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AD 431년의 제3차 에페소스 공의회, AD 451년의 제4차 칼케돈 공의회, AD 553년의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AD 680년의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AD 787년의 제7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 만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게 된다.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
로마 교황은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지원을 바탕으로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었고 황제 지위 계승도 혼란을 겪었다. 동프랑크의 오토 1세가 독일지방을 장악하고 북부 이탈리아와 로마까지 진격하여 황제의 대관식을 받으면서 황제 지위계승의 혼란은 종식되었고 훗날 신성로마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오토 1세는 당시 교황 요한 12세와 로마 교황령에 대한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교황 즉위 전에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를 해야한다는 내용의 '오토의 특권' 조약을 체결하였고, 요한 12세가 이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자 무력으로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세웠다. 이리하여 교황 선출과정에서 황제의 권한이 막강해졌으며 한동안 교황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6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고 정치적으로 무능한 아그네스 황후가 섭정이 되면서 로마 교황에 대한 지배력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를 기회로 로마 교황청에서는 교황 선출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교황 니콜라우스 2세(AD 1058년 ~ AD 1061년 재위)가 AD 1059년 교황 선출권한을 추기경단에게 부여하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근거로 AD 106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개입을 배제한 채 최초로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선출되었다.
교황 선출과정에서 황제의 개입을 배제하는 데 성공한 교회는 이제 황제가 보유하고 있던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을 되찾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유럽은 로마 제국과 같은 효과적인 통치체제가 성립되지 않아 교회 조직망을 이용하고자 하였고, 황제 입장에서는 영지를 세습하면서 세력을 확대시키는 봉건영주보다는 기본적으로 지위가 세습되지 않는 교회 성직자에게 토지를 부여하고 이를 통치하도록 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하지만 교회 성직자가 교회 직무뿐만 아니라 세속 직무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점차 신앙심 보다는 행정능력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선임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 시작했고 이로인해 성직자의 도덕과 기강이 해이해지고 성직매매와 같은 부패가 만연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교회 내부에서 수도원 개혁운동 등의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교황권을 강화시키고 서임권을 세속권력으로부터 되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교회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서임권을 교회로 다시 가져오려고 노력하면서 서임권을 둘러싼 교황권과 황제권의 충돌이 발생했다.
AD 107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의 가신을 밀라노 주교로 임명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이에 반발하여 황제를 파문시키고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궁지에 몰린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카노사에서 회개의 옷을 입고 교황을 만나기 위해 성문 앞에서 2일간 기다리며 선처를 구하는 '카노사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권이 황제권을 제압한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AD 1084년 내란을 수습한 하인리히 4세가 로마로 처들어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로마에서 축출하고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웠고 그리고리오 7세는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노르만족 로베르 기스카르의 도움으로 겨우 살레르노로 피신하였다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한 채 AD 1085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하여 비록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당대에는 하인리히 4세와의 대립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로마제국을 제외한 나머지 그리스도교 국가들과 교섭하여 로마 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하였기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1차 십자군 원정
클레르몽 공의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뒤를 이었던 교황 빅토리우스 3세가 재위 2년만에 죽자 AD 1087년 우르바누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을 둘러싼 대립이 종식되지 않았고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가 건재한 상태였기에 신중하면서도 확실하게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정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르바누스 2세는 AD 1089년 멜피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평신도 성직 수여와 성직매매 및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하였고 AD 1095년에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재차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멜피 주교회의 때의 칙서를 더 강화하는 한편 앞으로는 그리스도인끼리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을 교회법으로 선포하였다.
무엇보다 제일 유명한 것은 성지 탈환과 분열된 동방 정교회와의 재일치를 주장하며 일으킨 십자군 운동이 선포하였다는 것이었다.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 모인 프랑스 기사들에게 투르크로부터 성지를 지켜달라고 설득하며, '하느님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이 말은 십자군 원정의 구호가 되었고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 의해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전대사(면죄부)를 주겠다는 선언이 반포되었다.
군중 십자군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운동을 설득하기 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하여 교묘히 전쟁을 선동하였다. 클레르몽 공의회에 의해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자 은자 피에로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발터와 함께 십자군 운동에 열광하는 많은 군중들을 이끌고 한발 앞서 떠났다.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 하는데 그들은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우선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방향을 몰랐기 때문에 무작정 예루살렘이 있는 대략 동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부족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원정길 곳곳에서 약탈행위를 벌였고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였으며 베오그라드에서도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헝가리 왕국의 기병대의 반격을 받고 군사의 태반을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의해 또다시 대패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였지만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군중십자군이 벌인 약탈행위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말썽을 피하고자 서둘러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로 데려다 주었다. 군중 십자군은 거기서도 계속 약탈을 거듭하다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한 셀주크 투르크 일파인 룸 술탄국 군대를 만났다. 제대로된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았던 군중십자군은 제리고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에서 룸 술탄국에게 일방적인 학살을 당해 거의 전멸당했다.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였고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목숨만 구해 달아났다.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
AD 1096년 베르망두아의 위그, 타란토의 보에몽, 생질의 레몽, 플랑드르의 로베르 같은 기사들에 의해 정식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명목상이긴 하나 총사령관으로는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대리자로서 아데마르 주교가 임명되었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셀주크 왕조가 분열된 상태로 지방 통치자들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십자군의 원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1차적으로 십자군 원정군을 맞이해야 하는 룸 술탄국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이 군중십자군을 상대로 한 손쉬운 승리때문에 방심하여 십자군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부 아나톨리아의 다니슈멘드를 침공했다. AD 1097년 5월에 십자군이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를 포위공격하자 킬리지 아르슬란은 급하게 군대를 돌렸으나 니케아는 점령당하고 말았고 술탄의 아내와 자식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 킬리지 아르슬란은 군대를 수습하여 퇴각하였고 수도를 코니아로 옮겼다. 포로로 잡혔던 아내와 자식들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와야만 했다.
십자군의 다음 목표는 안티오키아가 되었다.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교 사도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활동했던 성지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도교의 5대 교구 중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다. 안티오키아는 셀주크 왕조의 총독 야기 산이 다스리던 400여개의 탑과 성벽으로 이루어진 난공불락의 성채도시였으나 AD 1098년 6월 3일 반년간의 포위전 끝에 결국 함락당했다. 이 과정에서 십자군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소유로 선언하였다. 이후 보에몽은 당초 십자군의 목적인 예루살렘 원정군에는 참가하지 않은 채 새로운 국가 건설에만 매진하여 십자군 국가인 안티오키아 공국이 탄생하였다.
보에몽이 십자군에서 이탈한 이후에도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으나 이동중에 아데마르 총주교가 병사하였다. 비록 십자군에 참여한 귀족들은 모두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원정길을 떠났지만 사실은 당시 유럽에서는 장남 이외의 아들들에게 상속권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영지를 개척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면서 이런 모습은 이미 나타났으며 이전에도 이미 보두앵이 십자군 본대에서 떨어져 나가 에데사를 차지하고 에데사 백국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이에따라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던 아데마르 총주교가 사라지자 십자군에 참여한 귀족들은 서로 점령지를 차지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AD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는 성공했다. 이때 십자군은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십자군 국가의 성립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서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총 5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보두앵의 에데사 백국이 시리아 북부와 지금의 터키 동남부 영토지역에 세워졌고, 보에몽의 안티오키아 공국이 지금의 터키 남부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지금의 레바논 지방에는 레몽에 의해 트리폴리 백국이 건설되었다. 처음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고드프루아는 왕위를 거부하고 '성묘의 수호자'란 호칭을 사용했으나 그 뒤를 이은 동생 보두앵 1세가 정식으로 국왕이란 명칭을 사용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이 성립되어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국은 비록 십자군 이전에 세워졌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그리스도교 왕국의 지위가 부여되면서 십자군 국가로 편입하기도 한다.
본래 십자군은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된 제후들의 연합국이었기에 십자군 국가로 창립된 에데사 백국(블로뉴 백작 등 북부 프랑스 제후), 안티오키아 공국(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 제후), 트리폴리 백국(툴루즈 백작 등 남부 프랑스 제후)도 그것을 그대로 반영해 서로 대립한 채 단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요한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과 같은 기사 수도회의 지원을 받았기에 십자군 국가는 이슬람 세력과 어느정도 맞서 싸울 수가 있었다.
성 요한 기사단
AD 600년 예루삼렘에 순례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세워졌다. 이 병원은 이집트 파티마왕조의 알 하킴에 의해 AD 1005년 파괴당했으나 AD 1023년 이탈리아 아말피와 살레르노 출신의 상인들이 이집트 칼리프의 허가를 얻어 세례자 요한의 묘지 위에 재건되었다. 주로 성지 순례자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치중하였으나 AD 1099년 제1차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에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점차 군사집단화 되었고 마침내 AD 1113년에 교황 파스칼리스 2세의 명령에 의해 정식 기사 수도회로 재편되었다. 세례자 요한의 묘지를 근거지로 하였다고 하여 성 요한 기사단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본래 구호조직이었기에 구호 기사단 혹은 병원 기사단이라고도 불리웠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자신들을 서로 식별하기 위해 큰 흰색 십자가가 그려진 검은 겉옷을 갑옷 위에 걸친 것으로 유명하다.
성 요한 기사단은 처음에 순례자들의 구호와 경호를 목적으로 활동하였지만 점차 군대조직으로 확장되어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한 군사전력이 되었다. 성 요한 기사단은 AD 12세기 중반에 구호조직과 군사조직으로 양분되어 구호조직은 이슬람의 선진 의료기술을 받아들여 서유럽 각지에 병원을 설립하였고 군사조직은 성전기사단과 더불어 팔레스타인 지방의 양대 기사 수도회로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그 용맹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AD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이 예루살렘을 상실하고 AD 1291년에 아크레마저 함락당하자 성 요한 기사단은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해 키프로스 왕국으로 피난하였다.
AD 1309년 로도스 섬을 정복하여 근거지를 옮기면서 로도스 기사단으로 재편되었으나 AD 1522년 오스만 제국에게 로도스 섬을 잃어버리자 스페인 관할의 몰타 섬으로 이주하였다. 몰타 기사단이 된 후 주권까지 있는 나라가 되었지만 AD 178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그러나 몰타 기사단은 영토를 제외하고는 독자적인 헌법과 법원 등 국가요소를 대부분 갖춰 많은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현재까지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