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흐 앗 딘의 등장
아이유브 왕조 창건
살라흐 앗 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로 AD 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아났다. 살라흐 앗 딘은 아버지 나짐 앗 딘 아이유브가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부하가 되면서 다마스쿠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숙부인 시르쿠를 따라 이집트 공격에 나서면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AD 1169년 시르쿠가 이집트를 점령한 지 얼마 안되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살라흐 앗 딘은 3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집트의 군사령관이자 와지르로 임명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내었다. 우선 흑인 내시장인 네자흐가 궁정반란을 일으켰으나 큰 피해없이 이를 진압해 내었다. 다음으로 예루살렘 왕국와 비잔티움 제국 연합군이 해상으로 이집트 북부의 주요항구 중 하나인 다미에타로 처들어 왔으나 이를 효율적으로 방어하여 결국 수성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부와 외부의 적을 모두 막아낸 살라흐 앗 딘의 이집트 내 입지는 탄탄해졌다. AD 1171년 파티마 왕조의 시아파 칼리프 알 아디드가 병사하자 시아파 칼리프제를 최종적으로 폐지하면서 파티마 왕조는 공식적으로 멸망하였고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공식적으로 철회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왕국이라는 완충지대를 사이에 두고 시리아의 누르 앗 딘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살라흐 앗 딘에게 잇달아 행운이 찾아왔다. AD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한 것이었다. 누르 앗 딘의 아들인 살리흐 이스마엘 알 말리크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다마스쿠스는 위기를 맞이한 상태였다. 이에 살라흐 앗 딘은 신속하게 다마스쿠스로 행군하였으며 전란의 시대에 강력한 군주를 원했던 다마스쿠스 시민들은 살라흐 앗 딘을 환영하였다. 누르 앗 딘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다마스쿠스 지배의 명분을 얻었다. 누르 앗 딘이 지배하던 시리아의 다른 큰 도시인 알레포와 모술도 각각 AD 1176년과 AD 1186년에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서 살라흐 앗 딘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모두 지배하는 술탄이 되었다. 그리고 살라흐 앗 딘의 창건한 왕조의 명칭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딴 "아이유브 왕조"가 되었다.
하틴 전투 승리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이 살아있을 적에는 양 세력의 완충지대로 예루살렘이 존재하기를 원했으나, 누르 앗 딘 사후 살라흐 앗 딘 자신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어 십자군 국가에 대하여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특히 예루살렘 왕국은 아말릭 1세의 뒤를 이은 보두앵 4세가 어린 나이에 나병에 걸려 있었고 후사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상태였기 때문에 좋은 기회로 보였다. 그러나 AD 1177년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에서 약 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출병한 몽기사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과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기사단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살라흐 앗 딘의 피해가 상당하여 병력의 90%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AD 1178년 예루살렘 왕국과 휴전 협정을 맺고 후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는 사이에 예루살렘에서는 보두앵 4세가 죽고 그 후임이 되었던 보두앵 4세의 조카인 보두앵 5세마저 즉위 1년만에 사망하면서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 이에 보두앵 4세의 누나이자 보두앵 5세의 어머니였던 시빌라가 여왕이 되었고 시빌라는 보두앵 4세의 섭정이었던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 3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남편인 기 드 뤼지냥을 예루살렘 공동왕으로 내세웠다. 이로인해 예루살렘 왕국은 시빌라와 기,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의 "궁정파"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이끄는 "귀족파"로 나뉘어 전쟁직전까지 갔으나 이벨린의 발리앙의 중재로 간신히 무마되었다.
한편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흐 앗 딘과의 휴전협정을 깨고 함대를 동원하여 이슬람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하기 시작했는데, 급기야는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레날드의 약탈행위에 이슬람 세계의 분노는 커져 갔고 마침내 AD 1187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예루살렘의 기는 레몽 3세와 화해하고 아크레에서 레몽 3세 및 발리앙과 연합하여 갈릴리 남단의 세포리스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유럽 측 기록에 의하면 이때 십자군 연합군은 1,200명의 기사와 그보다 더많은 숫자의 경기병, 1만여명의 보병과 이탈리아 상단으로부터 지원받은 석궁병, 그리고 잉글랜드의 헨리2세가 지원한 군자금으로 고용한 다수의 용병으로 이루어진 대군이라고 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세포리스에서 공성전을 벌이기 보다는 십자군 연합군을 야전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주병력은 남겨둔채 친히 일부 병력을 이끌고 레몽의 요새 중 하나인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여 AD 1187년 7월 2일에 함락시켰다. 살라흐 앗 딘의 의도대로 십자군 연합군은 티베리아스를 구하기 위해 세포리스를 출발하였고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주병력을 투입하여 십자군 연합군의 진군로를 산발적으로 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십자군 연합군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는데 세포리아를 떠나 티베리아스를 향해 폭염 속에서 진군하면서 식수보급은 전혀 하지 않은 것이었다. 살라흐 앗 딘은 보급로를 차단하고 오하시스를 장악한 채 포위망을 형성하였고 십자군 연합군은 식수도 구하지 못한 채 하틴 근처의 구릉지에서 숙영지를 편성하였다. 십자군 연합군은 밤새 갈증에 시달렸고 살라흐 앗 딘은 전투를 위해 밤새 충분한 식수와 화살을 보급해 왔다.
새벽이 되자 살라흐 앗 딘은 연기를 피워 안개로 가려진 십자군의 시야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많은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십자군 연합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십자군은 정예 기사단을 투입하여 오아시스 방향으로 활로를 뚫고자 하였지만 살라흐 앗 딘은 몽기사르 전투에서 기사단의 돌파에 정면으로 맞서다가 큰 패배를 당한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기사단을 그냥 통과시킨 채 포위망을 재구축하였다. 이제 십자군은 기사단과 보병이 분리된 채 각개격파당하게 되었고 결국 십자군 연합군은 공황상태에 빠진 채 이슬람군의 공격에 차례차례 쓰러졌다. 전투가 종료되었을 때에는 대부분의 병력이 몰살당하고 말았으며 기와 레날드 등 많은 십자군 지휘관들도 포로로 붙잡혔으나 레몽 3세와 발디앙 만이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기를 예루살렘 왕으로 대우하여 포로로 다마스쿠스로 이송하였지만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슬람 성지까지 공격을 가했던 레날드는 직접 처형하였다.
예루살렘 함락
하틴 전투에서의 패배로 십자군의 주력은 붕괴되었고 살라흐 앗 딘은 아크레, 야파, 시돈, 아스칼론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9월에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다. 예루살렘이 항복요청을 거부하자 살라흐 앗딘은 이슬람 세계의 명예로운 방법인 검으로 점령을 맹세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여왕 시빌라를 중심으로 공성전을 벌였으나 전황은 절망적이었고 구원을 요청할 데도 없었다. 결국 예루살렘은 저항을 포기하고 협상을 제안하였지만 이번에는 살라흐 앗 딘이 거절하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이 3천에서 5천에 이르는 예루살렘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모스크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하자 살라흐 앗 딘은 어쩔 수없어 자신의 맹세를 깨고 협상에 임했다.
협상 결과 예루살렘은 살라흐 앗 딘에게 항복하되 몸값을 지불한 그리스도교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살라흐 앗 딘은 몸값을 모두 지불한 부유한 계층 뿐만 아니라 일부만 지불한 평민들까지 모두 예루살렘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허용하였다. 또한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에 대한 어떠한 약탈과 파괴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살라흐 앗 딘의 관용과 자비는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당시에 벌였던 학살과 비교되면서 살라흐 앗 딘을 이슬람 역사에 남는 명군으로 칭송받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예루살렘은 제1차 십자군에 의해 함락당한 AD 1099년으로부터 88년 만인 AD 1187년 10월 2일에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 사실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아이유브 왕조 군대
이집트를 장악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한 살라흐 앗 딘의 주요 군사전력은 삼촌 시르쿠가 누르 앗 딘에게 부여받은 아스카르(askar)로부터 선발한 2천명과 자신의 종족인 쿠르드 자유인 1천명으로 구성된 근위대였다. 그리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알레포, 모술 등을 점령한 후에는 전통적인 셀주크 통치방법에 따라 이 곳에 영주를 임명하고 병력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이들 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으므로 많은 용병들을 고용했으며 이들은 쿠르드 궁기병, 투르코만 용병, 수단궁병으로 이루어진 구(舊) 이집트군 등 그 소속과 출신이 매우 다양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어야 했던 살라흐 앗 딘의 전쟁 중 가장 큰 문제는 군대를 통제하는 일이었다. 지방 영주들은 자비로 전쟁에 참여해야 했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거리 원정이 어려웠다. 또한 고용된 용병들에게 충분한 보수를 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전투를 거부하거나 약탈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애를 먹어야만 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또다른 주요한 군사전력으로 노예 군사집단인 맘루크가 있다. 맘루크는 백인노예들 출신으로 어린시절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강도높은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을 일컫는 말로 아바스 왕조 시절 강성하였고 누르 앗 딘과 살라흐 앗 딘 시절에도 주요한 전력이 되었다. 맘루크는 기본적으로 고아였기 때문에 자신을 길러준 주인에 대하여 충성을 다했고 군사적 능력도 상당하여 아이유브 왕조 군대의 중추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특히 살라흐 앗 딘 사후에 벌어진 후계자들끼리의 내전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맘루크의 세력의 힘을 강성해지면서 결국 아이유브 왕조도 아바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맘루크에게 실권을 빼앗기기 시작했고 AD 1249년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인 아이유브가 죽은 후에 그의 미망인 사자즈 알 두르가 맘루크 사령관인 아이베크와 결혼하면서 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를 대신하여 맘루크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제3차 십자군 전쟁
제3차 십자군의 결성
예루살렘의 함락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큰 충격에 휩싸였다. 십자군이 지배하는 지역은 이제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레, 마르가트 만을 남겨뒀고, 그 마저도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성지 재탈환을 목표로 새로운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고 이에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잉글랜드까지 참여하는 사상 최대의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왕 헨리 2세는 프랑스 내 영토를 둘러싸고 전쟁 중이었으나 헨리 2세의 차남이 리처드가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 1세가 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함께 십자군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잉글랜드 및 프랑스와 합류하지 않은 채 AD 1189년 독자적으로 먼저 출병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붉은 수염 때문에 바르바로사로 불리웠고 유능한 황제로 알려졌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기대대로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하여 룸 술탄국의 수도인 이코니움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웠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킬리키아의 살레흐강을 건너다 미끄러져 익사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1세가 어이없이 죽자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일부만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지휘하에 계속 진군하였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해로로 출발하여 시칠리아 섬에서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관계가 악화되었기에 각자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리처드 1세는 도중에 비잔티움 제국령인 키프로스섬에 잠시 정박하였으나 총독 이사키우스 콤네누스의 무례에 분노하여 섬 전체를 장악하였다. AD 1191년 4월에 필리프 2세가 먼저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여 프리드리히 1세의 잔존병력을 흡수하고 아크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8일에 리처드 1세가 합류하였고 7월 12일에 결국 아크레는 함락당했다.
아크레 함락 이후 십자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는데, 우선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자신들의 깃발을 아크레에 나란히 꽂자 레오폴트 5세도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며 자신의 깃발을 꽂았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레오폴트의 깃발을 부러뜨려 성밖으로 던지며 모욕했고 이에 분노한 레오폴트 5세는 군대를 이끌고 회군하였다. 다음은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의 대립이었다. 아크레 점령 후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각자 예루살렘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서 전임왕 뤼지냥의 기와 몬페라토 후작의 코라도 1세를 내세웠다. 결국 코라도 1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즉위 직전에 암살되어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 모두의 조카에 해당되는 샹파뉴 백작 앙리 2세를 예루살렘 공주 이사벨과 결혼시켜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시켰다. 리처드 1세는 자신의 점령했던 키프로스 섬을 예루살렘 왕국의 전왕이었던 기에게 넘겨 체면을 차릴 수 있게 해주었다. 본래부터 예루살렘 탈환에 큰 의욕을 없었던 필리프 2세는 이로서 자신의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병에 걸렸다는 핑계를 대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제 리처드 1세가 십자군을 단독으로 이끌고 살라흐 앗 딘과 대결하게 되었다.
아르수프 전투와 휴전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가의 2번째 왕으로 그 용맹함으로 인해 ‘사자심왕(獅子心王, 프랑스어: Cœur de Lion, Richard the Lionheart)’이라는 별명이 불렸다. 이후 리처드 1세는 중세 기사 이야기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리처드 1세는 하틴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른 아침에 행진을 시작하여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자 하였고 숙영지도 반드시 오하시스 근처를 택했으며 대열은 안에서 밖의 순서로 보병, 기사, 보병이 밀집대형을 이루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은 전통적인 방법대로 십자군의 후위부대를 산발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아르수프를 결전의 장으로 선택했다. 살라흐 앗 딘은 처음에는 주로 리처드 1세의 후위 부대인 성 요한 기사단(구호기사단)을 집중 공격했지만 리처드 1세는 침착하게 군대를 통솔하여 저녁 때까지 반격을 금지시켰다. 리처드 1세는 대열을 유지한 채 이슬람군이 지치기만을 끊질기게 기다렸고 마침내 날이 저물자 총공격을 개시하여 살라흐 앗 딘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700명이 전사한 반면에 이슬람군은 32명의 아미르를 포함하여 7천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십자군으로서는 모처럼만의 대승이었으며 살라흐 앗 딘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매복을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이슬람군을 뒤쫓지 않았기 때문에 살라흐 앗 딘이 잔존병력을 모아 부대를 재편성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은 리처드 1세와의 정면대결을 피한 채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십자군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리처드 1세는 원정지에서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좀처럼 예루살렘까지 진격하지 못했다.
리처드 1세와 살라흐 앗 딘 사이의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리처드 1세와 살라흐 앗 딘은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리처드 1세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흐 앗 딘은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전투중에 말을 잃자 살라흐 앗 딘은 두 필의 말을 보내 그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살라흐 앗 딘은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고 호의에 감복한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흐 앗 딘의 동생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는 리처드 1세가 어차피 예루살렘을 점령해봤자 얼마가지 못하고 다시 이슬람군에게 빼앗길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결혼이야기는 취소되었지만 1년간의 교섭 끝에 양측의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아크레를 포함한 티레부터 야파에 이르는 해안부의 모든항구를 예루살렘 왕국의 관리하에 두는 대신에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도의 통치하에 둔다는 최종적인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때 리처드 1세는 휴전 조건으로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를 보장받았지만 이전부터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 순례를 제한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십자군의 중기병 전술과 이슬람의 경기병 전술
중세시대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문명과 오리엔트 지방의 이슬람 문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술을 발전시켰다. 서유럽은 중무장을 한 기사들이 주축을 이룬 집단돌격이 주요한 전술이었던 반면에, 사막의 뜨거운 기후 속에서 생활해야하는 이슬람교도들은 경무장의 기병이 주력을 이루며 유인과 기습으로 싸우곤 했다. 이 때문에 서유럽의 중기병들은 중무장을 선호하였고 그 덕분에 높은 방어력을 보여줘 뛰어난 근접전투 능력을 보여줬으나 장비가 무거운 만큼 속도가 느렸다. 이슬람의 기병들은 뛰어난 투르크 궁기병들이 중추를 담당한 이래 우수한 기동력과 활솜씨를 바탕으로 멀리서 화살로 공격하고 적이 접근하면 후퇴하는 히트 앤 런 방식의 전투를 수행하였지만 빈약한 장비 때문에 근접전투 능력이 떨어졌다.
십자군을 상대하는 이슬람군의 대표적인 방법은 사막으로 유인한 후 화살을 이용한 포위공격이었는데, 대표적인 성공사례가 바로 살라흐 앗 딘의 하틴전투이다. 당시 이슬람 군대를 이끌던 살라흐 앗 딘은 이미 AD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우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국가의 십자군의 강력한 중앙돌파에 무너진 적이 있었다. 이를 교훈으로 삼은 살라흐 앗 딘은 AD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사막 한복판으로 끌어들이고 오하시스를 장악하여 십자군이 중무장으로 인한 극심한 피로와 탈진을 겪도록 만들었으며 연기로 시야를 가려진 상태에서 궁기병과 궁병으로 엄청난 양의 화살을 쏘아내며 십자군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한편 십자군의 가장 강력한 전술인 중기병의 집단돌격은 직접 맞서지 않고 흘려보내는 방법으로 오히려 십자군의 중기병과 보병을 분리시키는 데 이용했다. 이러한 뛰어난 전술로 인해 살라흐 앗 딘은 하틴 전투에서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십자군 국가의 병력을 대부분 몰살시키고 예루살렘을 탈환하기에 이른다.
십자군에게도 이러한 이슬람군의 공격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이슬람의 화살공격을 상대로 진형을 유지한 채 버텨낸 후 역습을 가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1차 십자군 당시의 도릴라이움 전투와 제3차 십자군의 아르수프 전투이다. 제1차 십자군 당시 보에몽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나가던 중 도릴라이움 협곡에서 룸술탄국의 킬리지 아르슬란에게 기습공격을 받으면서 위기에 처했다. 엄청난 양의 화살공격으로 인해 무장이 빈약했던 2천명 이상의 보병을 잃어버렸고 기사들도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분은 부상을 상당수가 전투불능에 빠졌으며 많은 기마들도 상당수가 죽은 상태였다. 그러나 보에몽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형을 유지한 채 아데마르 추기경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 버텨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역습에 성공하여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다.
AD 1191년 아르수프 전투에서는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와 마찬가지로 리처드 1세의 십자군을 사막으로 끌어들여 전력을 약화시키려고 했으나 하틴 전투의 패인을 분석한 리처드 1세는 이른 아침에 행진하여 태양의 열기를 피하고 숙영지도 오하시스 근처를 택하는 방법을 통해 병사들의 피로와 탈진을 최소화하였다. 또한 전투 개시 후에 살라흐 앗 딘의 측후방 교란과 엄청난 양의 화살공격에 대해서도 뛰어난 지휘력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밀집대형의 방어진형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이슬람군이 지치기를 기다린 후 역습에 나서는 방법으로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십자군은 이슬람군의 공격에 대해 진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방어를 굳건히 해내기만 하면 역습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이 이슬람의 영토에서 이루어진 만큼 정면대결에 강한 십자군을 상대로 이슬람군이 궁기병을 이용한 후방 교란작전만 펼칠 경우에는 후방보급 차단이 우려되어 제대로 진군하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십자군의 전술은 지휘관의 뛰어난 지휘통솔 능력에 의존하는 바가 컸으므로 일반적인 십자군들은 이를 이행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결국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제3차 십자군 이후
리처드 1세는 귀국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난파되어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하였다. 리처드 1세는 레오폴트 5세와 불화 때문에 변장을 하고 이동하였지만 AD 1192년 12월에 신분이 발각되어 뒤른슈타인 공작의 성에 갇혔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졌고 결국 리처드 1세는 하인리히 6세에게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신성로마제국에게 왕국을 양도했다가 봉토로 되돌려받기로 하는 굴욕적인 조건을 수용해야만 했다. 몸값 지불이 완료된 AD 1194년 2월에 리처드 1세는 석방되었으며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동생 존에게 빼앗긴 왕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AD 1199년에 41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살라흐 앗 딘도 리처드 1세가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AD 1193년 3월 4일에 다마스쿠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살라흐 앗 딘 사후 그의 금고를 열어본 사람들은 그의 재산이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정도라는 점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살라흐 앗 딘은 이미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를 분배하였었고 살라흐 앗 딘이 직접 지배하던 나머지 제국영토는 세 아들에게 분배되었다. 큰 아들인 알 아프달이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면서 아이유브 왕조의 수장이 되었고 둘째아들 알 아지즈와 셋째아들 아즈 자히르에게는 각각 이집트와 알레포가 맡겨졌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흐 앗 딘의 동생인 알 아딜에 의해서 다시 통일되기도 하였지만 점차 분권화가 진행되어 봉건적인 가문연합체로 왕조의 성격이 바뀌었다. 아이유브 왕조는 AD 1250년에 술탄 살리흐 사후 그의 아내 사자즈 알 두르가 맘루크 총사령관 아이박과 재혼하면서 맘루크 왕조로 교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