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오행이라는 거대한 농담, 위험한 농담’을 쓴 이지형은 음양설이 요즘 세상에선 통용되기 어려운, 몹시 단순한 이분법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음양설에 따르면, 우주와 삼라만상은 음과 양으로 구성돼 있고, 만물은 이 둘의 변이 속에 생성하고 발전하고 소멸한다. 세상은 어둠과 밝음, 밤과 낮, 고요함과 움직임,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수동과 능동, 추위와 더위의 교대로 설명 가능한데, 이를테면 지진은 음기에 짓눌린 양기의 폭발적 발산으로 해석된다.
음양의 기원은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태양과 달로 최종 수렴한다.” 태양과 달, 거기서 비롯되는 낮과 밤을 겪으며 고대 중국인들은 음양의 프레임을 떠올렸다. 45억년 전에 만들어진 ‘태양-지구-달 시스템’이 음양설의 바탕이니, 138억년 전 빅뱅으로 생성된 우주의 원리는 이 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음양은 “아무리 그 의의를 인정해준다 해도 ‘지구적 차원의 쇼’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 음양의 관념을 지구와 사람에 적용한 <주역>은 또 어떤가. <주역>은 “추상적 특성의 음양을 거꾸로 세워, 현실로 진입시킨 것”이라고 이지형은 규정한다. <주역>은 64괘(卦·기호)로 이뤄져 있는데, 하나의 괘는 6개의 음 또는 양의 효(爻·가로 막대기)로 이뤄진다. 아래서 위로 “음이나 양을 6층으로 쌓는다. (…) 2×2×2×2×2×264, 64개 기호가 만들어진다. 이 64개 기호와 64개를 이루는 384(64×6)개 막대에 우주 삼라만상이 들어 있”어 그중 어떤 괘나 효를 골라내면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해왔다.
추상적인 64개 기호(괘)들에 초창기 <주역>의 주역들이 옛날 원시적인 점괘의 기록을 참조해 개별 이름과 짧은 해설을 달고, 다시 공자를 위시한 유학자들이 ‘십익’(十翼)이라는 이름의 해설 텍스트를 붙이면서 <주역>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괘 또는 효와 그에 대한 유학적 언급들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가령 “왜 <주역>의 15번째 지산겸(地山謙) 괘가 겸손을 뜻하는 겸(謙)의 괘여야 하며, 이 괘의 다섯 번째 효에 관한 해설이 ‘침범하는 게 이롭다는 것은 복종하지 않는 지역을 정벌한다’라는 뜻이 돼야 하는지 음양적 근거 따위는 없다”. <주역>을 두고 이지형은 “무의미한 음양 막대기 6개씩의 조합과 유학자들의 사유가 자의적으로 결합된 무질서한 텍스트”라고 단언한다.
그는 사주의 근간이 되는 오행 역시도 낭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세상 모든 물질이 물(水)·불(火)·나무(木)·쇠(金)·흙(土) 다섯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는 이 오래된 생각은 118개 원소 주기율표 앞에서 이미 설 자리를 잃었음에도 사주에서는 상생·상극 개념을 빌려 수명을 연장했다. ‘목인내, 화다혈질, 토포용, 금냉정, 수유연’이라는 애초 도식을 독립심(정치인), 표현력(작가·연예인), 돈(사업가), 통제력(관료), 지식(학자) 등 새로운 풀이 기준과 연결시켜 사람의 생몰 시기, 가족관계, 인생의 시기별 형국까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행이 허구인 만큼 사주 또한 같은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름깨나 알려진 지식인들이 이 비주류 문화 콘텐츠를 쉽게 해설하는 데서 멈춘다면 긍정적일 수 있지만, 인문학에 필요한 새로운 지식이라고 정색하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냥 넘어가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지형은 말한다.
‘역법이 달라지면 운명도 달라지나’를 기고한 안상현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사주·명리의 기본 자료이자 근거인 책력의 허술함을 파고들어 결국 사주는 심심풀이 이상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려 든다.
일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절기 등을 날의 순서대로 적은 책력은 기실 “미신과 점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날그날의 점괘에 해당하는 역주(歷注)는 “자의적이고 비과학적이며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예컨대 조선시대 책력 작성의 매뉴얼 격인 <작력식>만 봐도 약 29.5일인 삭망월 주기에다 일진, 육십화갑자, 이십팔수, 십이직을 조합해 점술적인 역주를 달았다. 그중 하나인 복단일(伏斷日)의 경우 화장실(측간)이나 제방을 만들기엔 길한 날이지만, 장례나 혼사를 치르기는 흉한 날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왜 그런지는 설명이 없다. 그저 책력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식이다. 게다가 역법은 천체에서 가장 큰 오차를 일으키는 달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시로 고쳐야 했고, 아예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새 책력에 옛 역주를 달아 혼란이 가중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안 연구원이 책력과 역주를 집중 겨냥한 이유는 이른바 “명리학의 운용 방식과 동일”해서다. 참과 거짓을 가릴 수도, 검증을 할 수도 없으니 명리학은 학문이 될 수 없는 “유사과학”의 일종일 뿐이다. 음양오행과 사주의 논리구조가 단순해서인지 두 글은 비교적 간결하다. 2천여년 장구한 세월을 견뎌낸 끈질긴 ‘생명력’을 반박하기엔 너무 짧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긴 해도 두 글은 풍부한 논점과 과학적 근거를 담아 ‘논쟁 유발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음양설과 오행설은 원래 독립되어 있었으나 대략 기원전 4세기 초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결합되기 시작하여 여러 가지 현상들을 설명하는 틀로 사용되었다. 제(齊)나라의 추연(騶衍)이 체계적으로 결합시켰다고 전해오나 입증할 만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한대(漢代)가 되면서 두 관점이 하나의 정합적인 이론으로 통합된 것은 확실하다.
어원으로 보면 음(陰)·양(陽)이라는 두 문자는 각각 어둠과 밝음에 관련되어 있다. 음이라는 글자는 언덕[丘]과 구름[雲]의 상형(象形)을 포함하고 있으며, 양이라는 글자는 모든 빛의 원천인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원래는 가장 오래된 천문기계인 구멍 뚫린 구슬 원반 소유자를 나타내거나 비스듬히 비치는 태양광선 또는 햇빛 속에서 나부끼는 깃발을 나타내고 있었다. 결국 음은 여성적인 것, 수동성·추위·어둠·습기·부드러움을 뜻하고, 양은 남성적인 것, 능동성·더위·밝음·건조함·굳음을 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두 개의 상호보완적인 힘이 서로 작용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을 발생시키고 변화, 소멸시키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음양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3세기에 편집된 듯한 『국어 國語』에 나타나 있다.
주(周)나라 태사(太史)인 백양보(伯陽父)의 지진에 대한 설명으로 양기(陽氣)가 숨어서 나오지 못하면, 음기(陰氣)가 눌려서 증발할 수 없으므로 지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역경』 계사(繫辭)에 “일음일양 그것이 도이다(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하여 우주에는 두 가지의 힘 또는 작용이 있어 때로는 한쪽이, 어느 때는 다른 쪽이 물결과 같이 계기적으로 우세하게 된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묵자 墨子』·『장자 莊子』 및 『도덕경 道德經』에도 음양에 관한 언급이 보인다.
음양사상에는 상반(相反)과 응합(應合)의 논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상반은 +와 -의 대립이고 응합이란 상반이 단순한 대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상호의존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반응합의 사상은 음양사상에 이르러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강유(剛柔)의 이론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강유의 이론을 소급해 올라가면 『역경』의 십익(十翼)으로부터 『도덕경』을 거쳐 『서경』의 홍범(洪範)에 이르게 된다.
「홍범」 구주(九疇)의 여섯번째에 삼덕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삼덕의 사상이 강유의 이론으로 강과 유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음양설은 주로 『주역』과 연관되어 있는데, 효(爻)와 괘(卦)에서 획선(劃線) ○은 양을, 절선(絶線) ○은 음을 나타낸다.
팔괘(八卦) 중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는 각각 ○과 ○로서 양과 음의 특별함을 상징하고, 나머지 6괘는 음양의 효가 조합되어 만들어진다. 이것은 음·양 교역(交易)의 과정을 도획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천지 만물의 생성을 나타내고 있다.
계사에 “천지의 기운이 서로 감응합일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번영하며 남녀의 정기가 결합되어 인간이 화생한다.” 하는 구절이 있는데, 천지와 인간이 서로 구별되지 않고 대우주-소우주의 상관관계로서 서로 밀접하게 묶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행설의 기원은 서기전 4세기 초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행설의 최초 언급이라고 하는 옥검(玉劍)의 손잡이 새김글에 “오행의 기가 가라앉으면 응축(凝縮)을 발생시킨다……(行氣宎則○).”라는 구절의 연대와 같은 시기이다.
오행설에 관한 또다른 근거가 되는 출처는 『서경』의 홍범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문헌은 은왕조의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전한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지금은 여러 시대에 걸친 단편적인 글들로 이루어져 있음이 밝혀져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오행에 관하여 그 첫째는 수(水)이고, 둘째는 화(火), 셋째는 목(木), 넷째는 금(金), 다섯째는 토(土)이다. 수의 성질은 물체를 젖게 하고 아래로 스며들며, 화는 위로 타올라 가는 것이며, 목은 휘어지기도 하고 곧게 나가기도 하며, 금은 주형(鑄型)에 따르는 성질이 있고, 토는 씨앗을 뿌려 추수를 할 수 있게 하는 성질이 있다. 젖게 하고 방울져 떨어지는 것은 짠맛[鹹味]을 내며, 타거나 뜨거워지는 것은 쓴맛[苦味]을 낸다. 곡면(曲面)이나 곧은 막대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신맛[酸味]을 내고, 주형에 따르며 이윽고 단단해지는 것은 매운맛[辛味]을 내고, 키우고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것은 단맛[甘味]을 낸다.”
이와 같이, 오행의 개념은 다섯 종류의 기본적 물질이라기보다는 다섯 가지의 기본 과정을 나타내려는 노력의 소산이며, 영원히 순환운동을 하고 있는 다섯 개의 강력한 힘을 나타낸다.
음과 양은 교대로 계기(繼起)하는 두 가지 흐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 계기의 순서를 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나, 오행설이 발전하면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진(秦)나라 이래 우주의 사물을 다섯 가지로 나누게 되어 사계(四季)의 순서나 공간적인 방위(方位), 신체의 기관, 색깔·냄새·맛 등에 모두 적용했다.
이에 오행을 여러 가지 경우로 배열할 수 있는 두 개의 중요한 방법이 나타났다. 하나는 자연계의 운동을 음양이 서로 소장(消長)하는 다섯가지 단계의 과정으로 생각한 것이다. 제1단계에서는 양이 성장하고 제2단계에서는 양이 성숙의 경지에 도달한다.
제3단계에서는 양이 소모되나 음이 아직 움직이지 않아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제4단계에서는 음이 성장을 시작하며, 제5단계에서는 음이 성숙하여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순환이 반복되나 양이 다시 성장하기 전의 균형상태를 이루는 부분은 생략되어 있다.
이 도식은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이라고 불리는데 오행과 관련시키면 [그림] 과 같다. 두번째의 입장은 각 물질의 개별적인 힘을 강조한 것으로, 각 물질과 각 단계가 선행자를 정복한 결과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하므로 오행상승설(五行相勝說)이라고 한다.
목은 금에 지고, 금은 화에 지며, 화는 수에, 수는 토에 지며, 다시 토는 목에 지므로 순서는 목·금·화·수·토의 배열로 이루어진다. 이 입장은 물질세계를 이루는 각 요소간에 끊임없는 갈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포괄적 도식에 맞추어 자연물이건 인공물이건 모든 사물은 다섯 범주로 구분되었다.
따라서, 동서남북은 각기 목·금·화·수에, 중앙은 토에 각각 배정되었고, 춘하추동은 목·화·금·수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명확하게 다섯으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에는 자의적인 구분과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오행설은 역사관에도 편입되어 추연은 종시오덕설(終始五德說)과 음양주운설(陰陽主運說)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오행의 덕의 실현이 왕도(王道)의 규범이며 오행의 속성을 군주가 지녀야 할 덕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으로, 예컨대 수덕(水德)의 왕은 윤하(潤下)를, 화덕(火德)의 왕은 염상(炎上)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왕조의 교체도 오덕의 계승과 합치된다고 하여, 황제(黃帝)의 토덕(土德)을 하조(夏朝)의 목덕(木德)이 극복하고, 하조의 목덕을 상조(商朝)의 금덕(金德)이 이기며, 상조의 금덕을 주조(周朝)의 화덕이 이기므로 주왕조 다음 왕조는 반드시 수덕을 가지게 마련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라 진시황은 모든 면에서 수의 색인 흑색(黑色)을 숭상하여 황하의 이름도 흑수(黑水)라고 바꿀 정도였다. 이러한 음양주운설은 『관자 管子』의 사시편(四時篇)과 유관편(幼官篇)에 전해지고, 이 두 편이 다시 『여씨춘추 呂氏春秋』에 채용되어 『회남자 淮南子』의 시측십이기(時則十二紀)에 이르러서 마침내 『예기』 월령(月令)의 성립을 이룬 것이다.
월령이란 군주가 일반 백성들에게 내린 월중행사표로서 매달마다 그 달에 알맞은 시령을 행하지 않으면 천시(天時)에 영향을 주어 괴변이 생긴다고 여겼다. 이러한 작업은 정치적·사회적 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으로 음양오행론의 이론과 유가적인 정치철학을 결부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교도덕적인 오상(五常), 즉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 오행과 관련된다. 구체적으로 인은 목과 동에, 의는 금과 서에, 예는 화와 남에, 지는 수와 북에, 신은 토와 중앙에 연결된다.
음양오행설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이 시기에 음양오행설이 전래된 흔적은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사신도(四神圖), 즉 현무(玄武)·주작(朱雀)·청룡(靑龍)·백호(白虎)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신라 황룡사 9층탑의 심초석(心礎石) 아래의 적심석(積心石) 사이에서 청동거울에 사신(四神)이 양각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 밖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오성(五星)에 관한 기사나 고구려의 오부제(五部制) 등을 통해서도 전래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참위설과 풍수지리설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과정도 음양오행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동월륜 신라여월신(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이라는 참구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참위설을 믿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면 참위설과 풍수지리설이 결합된 도참설(圖讖說)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당시 승려였던 도선(道詵)은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및 비보설(裨補說)을 주창함으로써 도참사상을 크게 유행시켰다. 그 요지는 지리에는 곳에 따라 쇠왕이 있고 순역이 있으므로 왕처(旺處)와 순처(順處)를 택하여 거주해야 하며, 쇠처(衰處)와 역처(逆處)는 인위적으로 비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도참사상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훈요십조 訓要十條」와 묘청(妙淸)의 양경지덕쇠왕설(兩京地德衰旺說)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조선의 건립을 정당화하고 천도문제를 정착시키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난 때에는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일어난다(木子亡, 奠邑興).”는 참설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후일 『정감록 鄭鑑錄』이라는 비기서에는 이러한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으며, 절대 안전지대라는 십승지지사상(十勝之地思想), 역성혁명관에 입각한 말세사상 등도 모두 음양오행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민중들의 심성을 지배하면서 홍경래의 난 등 숱한 민란과 봉기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어온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풍수지리설이나 참위설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세계관에도 음양오행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중국 송대에 성립된 유학사상으로 우주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성리학은 음양오행설을 수용하여 우주만물의 법칙과 원리를 규명하고 있는데, 고려 중기 이후 성리학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나라도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성리학이 이른바 1―2―5의 구조를 수용하고 있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음양오행설의 영향은 성리학의 대표적 고전 중 하나인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 太極圖說』에 잘 나타나 있다.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 움직임이 극도에 이르면 고요하게 되는데, 고요하여 음을 낳는다.……양이 변하고 음이 합치되어 수·화·목·금·토를 낳는다.”라고 하여 ‘태극―음양―오행’의 구도를 정립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지배 사상으로 되면서 생활 구석구석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보급되었다.
조선 중엽에 일어난 일련의 철학 논쟁들, 즉 이언적(李彦迪)과 손숙돈(孫叔暾)의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사단칠정 논쟁 및 서경덕(徐敬德)과 조식(曺植) 등의 철학적 주장 등을 통하여 음양오행설이 이미 세계관의 기본원리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음양오행의 작용을 세계의 원리로 인식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은 이후 실학자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비판되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말엽까지 유교적 세계관과 동일시되면서 우리 민족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쳐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