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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고구려, 살수대첩, 고구려-수 전쟁, 영양왕, 乙支文德,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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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乙支文德

 

주군
영양왕(嬰陽王)
직위
대신(大臣)[ / 국상(國相)
출신지
고구려 평양

을지(乙支) / 을(乙)
이름
문덕(文德)
출생
6세기
사망
7세기 전반 추정
사당
청천사(淸川祠)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을지문덕

을지문덕 석상

 



을지문덕은 영양왕 대에 일어난 고구려-수 전쟁 당시 고구려를 지킨 명장이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수나라와 고구려가 국가의 존망을 걸고 맞붙었던 제2차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살수대첩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를 거둔, 고구려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자 전쟁 영웅으로 부르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이 승리로 위진남북조시대를 최종적으로 평정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던 수나라가 멸망했다는 점에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던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신에 대하여
조선 시대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의 인물이었다. 이 기록이 맞다면 을지문덕은 평양 출신이었던 셈이다. 현 행정구역으로는 대한민국 이북 5도 기준 평안남도 강서군 적송면 석삼리, 북한 행정구역상 증산군 석다리에 비정된다.

국내에서 을지문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을지문덕의 출생지와 가문의 계보 등이 불확실해서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수서》에 기록될 만큼 위대한 전쟁 영웅인 을지문덕의 선대 계보 및 이후 행적이 기록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나 고대 한국의 남은 기록은 정책은커녕 임금의 이름조차 기록이 뜸할 정도로 부족한 실정이다. 알다시피 고구려의 역사서는 현존하는 것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중국의 역사서를 검토해 봐야 하는데 중국의 역사가들이 일부러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을 배제시킨 것은 아닐 테고 또한 수양제가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양제는 이미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추론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이처럼 간략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굳이 자신들을 대파한 이민족의 영웅 을지문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할 이유도 뜻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을지문덕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그의 출생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이는 대단히 아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정설은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 출신으로, 을씨에 고대 한국어에서 존칭사로 쓰이는 지(支)를 붙여 을지문덕의 이름이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국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을파소 외에도 대무신왕 때 좌보를 지낸 을두지 등 을씨가 고구려의 대귀족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는 을지문덕의 후손인 목천 돈씨 가문의 기록인 《목천 돈씨 가보》에 의하면 원래 을씨였다가 을지문덕 전후로 을지씨로 바꾸었으며, 이후로 을지씨를 계속 쓰던 후손들이 고려 시대에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때 의병으로 공을 세워 평양 근처 돈산 일대를 식읍으로 받은 후 돈씨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1979년 고고학자 김원용 교수는 <전해종 박사 회갑기념논총>에서 을지문덕의 가계가 이주민 계통의 귀화 가문일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따르면 먼저 을지문덕의 성씨인 '을지(乙支)'가 선비(鮮卑) 귀족의 성씨 가운데 하나인 '울지(尉遲)'와 음가가 비슷한 데서 그가 귀화인이거나 귀화인의 자손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데 울지씨는 본래 선비족 탁발부(탁발선비)와 함께 북위를 건설하는 데 공헌한 울지부의 성씨이다. 실제로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에 울지 성씨를 가진 이들의 활약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 시대를 다룬 중국 역사서에 울지씨는 울지해, 울지강(尉遲鋼), 울지형(尉遲逈), 울지경덕 등 여럿이 보이는데 을지문덕의 집안인 울지씨 가문은 580년에 수문제 양견이 찬탈을 꾀할 당시에 울지형이 이를 막다가 죽자 화를 피하기 위해 고구려로 망명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원용은 을지와 울지의 발음이 비슷한 점, 《자치통감》 <고이> 8권의 주석에 을지문덕을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고 했던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처럼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해서는 견해가 충돌하는 편이다. 근본적으로 한자의 음가가 비슷하다 하여 乙과 蔚을 동일시 하는 것 자체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편 조선 후기의 문인 홍양호는 자신의 저서인 《해동명장전》에서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한다. 다만 홍양호가 《해동명장전》을 쓴 시기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지 한참 후인 조선 후기였으며, 참고한 자료가 쓰여있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평양 일대에 전해지던 을지문덕에 대한 전설을 옮겨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는 명나라의 장일규가 찬(撰)한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확언하였다고 하나, 고려가 몽골과 싸우던 시절 인물인 이규보가 명나라의 장일규의 책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누군가가 가필한 것일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본기>에도 을지문덕을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대신이란 관직명이 아니다.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으로 관(冠)을 만들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푸른 비단관(靑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진홍색 비단관(絳羅冠)을 썼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 후기 귀족 계급의 관모는 소골(蘇骨)에서 발전한 관모로서, 왕(王)과 대신(大臣) 그리고 신(臣) 등 계급 간의 구별을 좀 더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을지문덕의 관직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대신이라 했으니 고위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평안도 일대에서 구전돼 온 야사로 을지문덕의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을지문덕의 아버지가 을지문덕이 태어났을 즈음 명망 높은 도인에게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를 물었는데, 그 이름을 '문덕'이라고 지으라 하자 그 아버지가 '제 미천한 아들에게 어찌 문덕 선관 님의 이름을 붙인단 말씀입니까'라며 거절했고, 이에 도인이 '이 아이는 훗날 고구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아이이니 반드시 아이의 이름을 문덕이라 하되, 자라면 무예를 가르치라'고 말해, 아버지는 결국 도인의 뜻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문덕이라 지었는데 정말로 고구려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후대 각색'의 형태를 띤 야사로서 신빙성은 0에 수렴한다.

을지문덕을 본명이 아닌 칭호로 해석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와 동일인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역시 근거가 빈약한 편이다. 애초에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을 엮는 역사적 서술이 그 어떤 사서에도 전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자세한 사항은 연태조 문서 참고.

 

 

정체에 대한 논란
을지문덕은 그 엄청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출생과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무하여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수나라와의 전쟁에 나타나 수군을 끔살시키고 종전 뒤에는 다시 종적을 감춘 것이다.

국내에는 을지문덕에 대한 독자적인 전기조차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긴 하지만 《수서》의 <우중문·우문술전>과 《자치통감》의 관련 내용을 조합하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귀족연립정권 체제 내에서 한 나라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외교 협상권을 갖출 정도였으면, 당시 귀족 내부에서도 최고위 직책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수양제가 수하 장수들에게 을지문덕을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명을 내린 걸 보면 외국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문제는 왜 이 정도의 인물에 대해 생몰년도는커녕 당대 인물들을 언급할 때 대부분 적시하는 출생지마저 기록이 없냐는 점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을지문덕이 전쟁 당시 높은 벼슬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문이 정말 한미했거나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어 상당수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위의 타국, 타민족 출신이라는 설과 일부 통하는 점이 있다. 대귀족 가문들이 언제나 득세하고 관직을 차지하던 당대 고구려에서 관리가 출신 '부(部)'를 표기하지 않는 것도, 생몰년도도 기록되지 않은 것도 집안 배경이 워낙 없었던 탓이라는 것. 집안 대대로 높은 관직에 있었으며, 그 출신과 연고지에 대해 상당 부분 추적이 가능한 연개소문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이 어떻게 귀족이 아니면 대접 못받는 세상에서 그 정도의 지위에 올랐는가? 이에 대해서는 평원왕대부터 고구려 왕들이 추진한 신진세력 등용 정책 덕분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한 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수혜자가 바로 온달. 그러나 이 설 또한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목천 돈씨(頓氏)의 《돈씨 가보》에서는 고구려의 명문가인 을씨(乙氏)가 을지문덕의 대에 와서 을지로 성이 바뀌었다가 묘청의 난 때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삼형제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고, 돈뫼(頓山)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곳에 정착해 살면서 돈씨를 성씨로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해당 인물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돈씨의 연원이 다르게 기록되어있으며 족보에만 나오는 가문의 연원은 부풀려지는 경우가 흔하기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본다.

단재 신채호는 이 족보 기록과 일본인 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의 "퉁구스어로 사자(使者)를 '일치'라고 한다"는 지적을 근거로 을지문덕의 '을지'는 관직명이고, 고구려 때의 관직인 울절(鬱切)이나 삼한의 읍차(邑借)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이름에 대한 논란
이름인 을지문덕에서 성으로 여겨지는 을지(乙支)는 논란이 좀 있다. 乙(을)은 고대어에서 '이리'라고 읽혔으며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支(지)는 관직명인 대막리지(大莫離支),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씨'와 같이 일종의 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을지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존칭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지(支)를 '이공순신(李公舜臣)'의 공(公)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보고 성을 을(乙)씨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기도 한다.

支(지)의 발음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그 자음이 c 혹은 ch로서 당시의 자음에는 없던 발음이라 ㄱ, ㅅ, ㄷ 등으로 한국에 전래되었다. 그래서 을지의 원래 발음은 '이리기' 혹은 '이리시(이리씨)'로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능성으로 연태조와 동일인설이 나왔는데,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을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로 칭하고 있으므로, 카스미가 개소문(蓋蘇文)의 음차이고 이리가 연(淵)에 해당하여 같은 성씨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왕"을 쿠다라노 코니키시(くだらのこにきし)라 불렀는데, 이 중 코니키시라는 말이 건길지(鞬吉支)의 당대 발음인 것으로 추정되어 백제에서는 접미어 "지"가 시로 읽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의 곤지(昆支)와 직지왕(直支王)의 경우 코니키, 토키오우로 훈하고 있어 지(支)가 시로 읽혔다고 확정할 순 없다. 신라, 가야 지도자층의 호칭인 간지(干支)의 이표기로 한기(旱岐)가 있으므로 支(지)는 기로 읽혔다고 볼 수 있다.

 

 

을지문덕 생애


《삼국사기》에서 그와 관련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제2차 고구려-수 전쟁 당시다. 고구려의 총지휘관으로서 맹활약하며 수나라군을 대파해 고구려를 승리로 이끌었다. 

612년 기세좋게 출전하였으나 맥철장이 전사하고 한 달이 넘도록 요동성조차 함락시키지 못하자 겨울을 앞두고 조급해진 수양제는 30만 병력의 별동대를 평양성으로 보내 함락시킬 전략을 짰다. 일단 수나라의 별동대는 요동성-압록강 방어선을 돌파해 평양 인근까지 육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별동대에게 100일 분의 식량을 짊어지도록 하여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한 병사들이 식량을 내버린 탓에 보급이 바닥나 버렸고 평양성에 접근하는 동안 고구려군의 집요한 게릴라전에 시달려 도착했을 때는 고구려군을 당해낼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군의 게릴라전은 별동대가 압록강 인근에 도달했을 때 항복을 위장하고 적진을 정찰한 을지문덕이 이러한 사정을 이미 파악하고 계획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을 해 줘야 할 내호아의 수군은 이미 패배한 상태였다.

별동대를 지휘하던 우중문과 우문술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조효재, 위문승, 장근 등 수나라군이 물러나자 고구려군은 태세를 전환하여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다. 그러다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군이 전력을 다해서 총공격을 가하였다. 강을 건너느라 수군이 반으로 나뉘었던 시점에서 고구려군이 맹공을 가했고 수나라의 군대도 이를 예견하고 방진을 치고 저항하였지만 지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설세웅은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고 왕인공이 일시적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추스려오지는 못했고 30만 5,000명 중 압록강에 다다른 병사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2,700명도 건제를 유지하고 철수한 것이 아니라 '하루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도망쳐왔다'는 사서의 기록을 볼 때 갑옷이고 창검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친 오합지졸 패잔병 수준. 특히 수나라의 제8군은 전사한 지휘관 신세웅을 포함하여 모두 전멸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기록이 현전하지 않는 관계로 고구려-수 전쟁 이후에 을지문덕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이전의 사서들이 그렇듯이 고구려의 사서들이나 기록물들이 이후의 전란에 의해 평양성과 국내성 일대가 황폐화되면서 대부분 불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신라에 다수의 고구려인들이 유입되었고,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한 발해에서도 당연히 구국의 영웅으로 여겼을 만큼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오는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해놓은 역사 기록들이 어느 정도 있었을 테지만 이마저도 후삼국시대와 여요전쟁 등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상당수의 역사 자료가 소실되었고 결국 을지문덕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궤적에 대해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삼국사기》가 편찬되었을 당시에 이미 당대의 기록들이 부실하고 특히 고구려 후기는 더 부족해서 중국 측 사서를 빌려써서 조공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이처럼 을지문덕도 기록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을지문덕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아마 살수대첩 시절처럼 당나라와 신라에 대항했을 것이다. 고구려-당 전쟁 당시의 대단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안시성주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을지문덕 혹은 을지씨 가문이 휩쓸렸을 가능성이 있는 사건으로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이 있다. 이 때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중신 180명을 살해했고, 수뇌부 빈자리를 연씨 친인척으로 채웠다. 살수대첩과 몇십년의 시차가 있는데 전쟁영웅 을지문덕이 그동안 살아있었다면 180명의 중신 반열에 들었을 가능성이 높고, 혹은 본인은 그 전에 사망했더라도 이후 을지 성씨를 쓰는 인명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아 집안이 이 때 몰락하고 가계가 실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자 을지문덕은 신라로 설인귀는 거란으로 망명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설화는 설화일 뿐이다.

애초에 댓구가 되는 설인귀부터 강주 용문 사람으로 원래 오리지널 중국인으로 당나라에 그냥 임관한 것이므로 망명하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었으니, 을지문덕 역시 이야기의 아귀가 안 맞다. 무엇보다 을지문덕 정도 되는 인물이 신라건 당이건 망명을 했다면 그건 무조건 기록된다. 그러나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라 알 길이 없다. 

현재로서는 연개소문의 정변 이전에 사망했을 추측이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평가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000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 
신채호

을지문덕은 수나라라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대국의 압도적인 군세를 맞아 그냥 물러가게 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회전에서 적군의 야전 병력을 전멸시켜 고구려의 대승을 이끌었다. 불세출의 전쟁 영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할 군공이자 업적이다. 현대 대한민국이 미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 대한민국의 어느 장군이 미군 중에서도 최정예로서 선별된 미군들을 맞아 싸워서는 그저 막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전멸시켰다고 생각해 보라. 당시 중국이 고구려를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서 가지는 위상은 현대 미국에 버금가는 정도였고 동시대 다른 지역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수나라 주변의 다른 세력들은 수나라에 의해 일거에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이 나라가 괜히 천자를 운운하는 천조국이었던 게 아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그런 나라의 군대를 말 그대로 전멸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인류 전쟁사 최대 기적이라 봐도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업적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고 국군의 무공훈장도 강감찬까지 포함한 세 인물에서 따왔다.

수나라군에게 항복하겠다면서 혈혈단신 적진에 들어가 정찰을 하고 나오는 생사를 넘나드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나오는 강심장인 데다가 뛰어난 지략을 발휘해 적을 무찌르는 혜안도 가지고 있었으며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어서 수나라군을 농락할 정도의 문장력도 지니고 있었던 명장이었다. 종합하면 적을 기만하고 조롱하는 고도의 심리전, 적의 수가 많음에도 확실히 이길 수 있을 때라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야전을 거는 판단력, 보급이 전쟁 승패의 본질임을 파악한 정확한 진단, 목숨걸고 적의 정보를 직접 캐내려고 하는 용감함을 갖춘 희대의 걸물이라 일컫기에 손색이 없다.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역사적 기록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쉬울 따름. 세계 전쟁사에서 한민족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명장이었기 때문에 훨씬 후대인 조선 시대 숙종도 숙종 33년(1707)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리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도록 지시하였다. 호를 받고 사우에 향사된 것은 이순신,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과 함께였으나 조선 이전의 시대 인물은 을지문덕이 유일하다.

 

 

김부식의 평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도 <을지문덕 열전>에서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을지문덕을 칭송하면서 엄청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김유신 열전> 다음이 바로 <을지문덕 열전>이다.
을지문덕은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었고, 아울러 문장을 짓고 해석할 수 있었다.

양제가 요동의 전쟁에서 동원한 군대의 규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대단했다. 고구려는 한쪽 지역의 작은 나라였지만, 이를 막아냈다. 스스로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나라 군대를 거의 섬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춘추좌씨전》에서는“군자(君子)가 있지 않으면, 그 어찌 나라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기록의 부재로 인해, 을지문덕과 관련된 기록을 《수서》에서 그대로 옮겨왔으나 어떻게든 을지문덕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고자 포장했음을 알 수가 있다.  

 

 

신채호의 평가
단재 신채호의 <을지문덕전>은 “땅의 넓이는 그 십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인구는 그 백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가 저 수나라를 대적하여 하였으니, 그 기개는 비록 장하나 그 방도는 심히 위태로웠다. 그 당시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는 국외자(局外者)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을지공은 홀로 의연히 그러한 비판을 못 들은 척하고 적국에 대항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믿고 그러하였던가? 말하자면, 오직 독립정신(獨立精神) 단 한 가지였다”면서 을지문덕을 자주의식(自主意識)의 상징적 인물로 표현하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000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라고 칭송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국체(國體)를 보존할 수 없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조선 시대의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신채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이란 역사인물은 민족자존(民族自存)과 독립정신(獨立精神)의 표상이었고,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합리화하려고 내세운 한국인들의 타율적(他律的) 종속성(從屬性) 이론을 논파하는데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안창호의 평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을지문덕전》의 <서문(序文)>에서 “내가 해외 각국을 여행해보니, 그 나라 영웅이 칼을 휘두른 곳에서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를 노래하고, 그 영웅이 피를 흘린 곳에서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춤을 추는데, 몸이 있는 자는 그 몸을 영웅에게 바치고, 재주가 있는 자는 그 재주를 영웅에게 바치며, 학문이 있는 자는 그 학문을 영웅에게 바쳐서 한 나라 전체가 영웅을 부르면서 같이 나아가기 때문에 영웅이 배출되어, 워싱턴 이후에도 허다(許多)한 워싱턴이 나왔고, 나폴레옹 이후에도 허다한 나폴레옹이 나왔던 것이다”고 했다. 이는 을지문덕을 본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그와 같은 영웅들이 많이 나와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안창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은 모든 이가 표상으로 삼아야 할 영웅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을지문덕의 위대함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을지문덕의 이름을 기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을지"란 이름이 붙은 것들은 전부 을지문덕에게서 유래했다고 보면 된다.
무공훈장 중 하나인 을지무공훈장은 바로 을지문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
대한민국 육군 제12보병사단의 이명이 을지부대다.
대한민국 해군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2번함(DDH-972)의 함명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을지문덕함이라 명명되었다.
서울의 번화가인 을지로의 이름 역시 을지문덕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름은 '코가네마치(황금정 : 黃金町)'였는데 이 거리는 구한말 밀려들어온 청나라 화교들의 중심가였다. 덧붙여 근처의 명동(메이지초), 충무로(혼마치)를 중심으로는 19세기 말부터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에 구한말 중국인들의 거주지에는 중국의 기를 누르기 위해 을지로, 일본인들의 중심지에는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합동 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실드 연습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을지문덕이 유래이다. 이렇다 보니 미군들도 을지문덕을 알고 있다고. 
사회복무요원, 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 등 비전투 대체복무요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육군훈련소 25연대의 정식 호칭은 을지문덕 연대이다. 

한편 살수대첩의 무대가 되었던 청천강이 자리잡은 평안남도 안주시에는 을지문덕이 수군을 유인하기 위해 일곱 명의 승려들로 하여금 거친 살수를 건너게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승려들이 먼저 강을 건너자 수군이 이를 보고는 안심하여 급히 살수를 건너다가 을지문덕의 계략에 휘말려 몰살당했다는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목숨을 걸고 수군을 살수로 유인한 승려들을 기리기 위해 그 지방 사람들이 청천강 근처에 칠불사(七佛寺)라는 절을 세우고 그곳에 일곱 승려의 상을 세웠다고도 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을지문덕의 조각상도 있는데 1932년에 현진건이 쓴 기행문인 《단군성적순례》에도 등장하며, 북한의 문화재 보존급 제746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만들어진 시기는 현진건의 기행문에 따르면 '숭정기원(崇禎紀元) 220년 을미'로 조선 헌종 13년(1847년)으로 보이며, 원래는 을지문덕의 사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사당이 없어지고 땅에 파묻혔다가 다시 파내 백상루 밑에 갖다 둔 것이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 '을지'라는 성을 쓰는 사람은 없다. 을지문덕의 후손의 성씨는 목천 돈(頓)씨. 드라마 나인룸의 주인공으로 '을지해이'가 등장한 적은 있지만... 그런데 북한에 놀랍게도 을지씨를 쓰는 사람이 있다. 2018년 1월 6일 로동신문 기사에 국가과학원산하 기계공학연구소 실장인 '을지기호'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이 한 번도 아니고 같은 달에 우리민족끼리 기사에도 나오니 오타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을지라는 성이 존재하는지는 불명. 족보가 사실상 사라진 북한 특성상 을지문덕의 후손으로 알려진 목천 돈씨를 을지씨로 바꿔버린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을지문덕과 관련된 기록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는 한국사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전투로 적군에게 가장 많은 병력 손실을 일으킨 장군이었다. 이순신,강감찬과 함깨 한국사 3대 대첩 주인공이지만 기록이 단편적이고 사실여부도 미스테리라서 대중적 인지도는 바닥을 치고있다. 수나라 멸망에 큰 기여를 했다는점을 생각하면....

 

 

소설
을지문덕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자 미상의 고소설 《홍의동자(紅衣童子)》가 있다. 조선 시대의 고소설 《흥무왕연의》에는 강남 땅에 큰 별이 떨어진 것을 보고 신라에 인걸이 태어날 조짐을 예측하고 자객을 보내 찾아내 죽이려 하지만 자객은 7년이 넘도록 김유신을 찾지 못한다. 이후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온 김춘추가 옥에 갇히자 그를 번번이 죽이려 하지만 실패한 채 끝내 숨을 거둔다. 
김성한의 1969년작 소설 《요하》에도 등장하며 침착하고 노련한 면모가 엿보인다.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서는 젊고 야심있는 장군으로 나오는데, 그야말로 진정한 먼치킨이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젊은 나이에 지략과 무력 등 모든 면에서 작중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최강을 달리는 엄청난 인물. 심지어 《삼한지》의 진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김유신도 을지문덕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작중에서는 살수대첩을 치러 수나라군을 무찌르고 심지어 중원까지 평정할 원대한 꿈을 세우나, 너무 큰 전공을 세운 나머지 영류왕에게 찍혀 장군직에서 반강제로 쫓겨나 이후로 초야에서 살게 되었다고 묘사된다. 이후로 아직 어린 시절의 연개소문과 만나 그를 제자로 삼고 중국 땅을 여행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을지문덕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김진명의 소설 《살수》에서는 지덕체를 모두 갖추고 있는 먼치킨으로 등장한다. 결말 부분에서는 살수에서 죽은 적군들을 위해 산에 들어가 제사를 지내며 살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을지문덕의 사망년도 미상을 해결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모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무협소설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 것이 판타지소설스러운 설정들이 많긴하다. 을지문덕 장군의 무기는 치우검이라는 설정, 중간중간 등장하는 일기토 장면 등. 
임동주의 소설 《우리나라 삼국지》에서도 먼치킨으로 등장한다. 살수대첩을 예견하고 주변국과 우호를 단단히 하는 등 그야말로 포스가 넘친다. 

 

 

음악
한국의 프로그레시브 밴드인 시나브로는 국풍81 당시에 개최되었던 "젊은이 가요제"에서 을지문덕을 소재로 동명의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암시하듯이 가사 자체는 상당히 국수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한 편이라 지금 보면 다소 오글거린다. 이 곡은 가요제에서 연주상을 수상했으며 가요제 음반에도 실렸다. 역설적이게도 작곡가는 시나브로의 멤버이자 제5공화국 주제가를 만든 안지홍. 

 

 

드라마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원로배우 김길호[가 연기했다. 백발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선인과 같은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젊은 시절의 연개소문이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안시성에는 철이 많이 나니 반드시 지키라는 조언을 남긴다.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이정길이 연기했다. 배우의 연기력은 출중했으나 유사역사학과 서토정벌에 함몰된 주제의식에 캐릭터 붕괴가 판을 치는 각본 때문에, 수나라군의 보급문제 및 장군들 간의 갈등을 철저하게 이용하며 화전양면전술을 활용했던 명장이었음에도, 자국의 전쟁 수행 능력과 보급, 작전, 전선에 대한 대응 등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서토 정벌과 전쟁만 외쳐대는 호전적 전쟁광으로 묘사되고 말았다. 이는 강이식도 마찬가지이며 작가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상을 선역 캐릭터들에게 투영하는 것에 가깝다.
초반부의 수나라 파트에서도 벌써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대모달 벼슬을 직책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나라 군대를 박살냈다. 5화부터 시작되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영양왕과 함께 출전하며 한왕 양량의 군대를 대파했으며 영류왕이 태제 자격으로 정사를 관할하기 시작하자 강이식과 함께 잠시 물러나 향후 수나라와 전쟁을 대비하였다. 막리지였던 연태조가 극에서 퇴장한 시점인 왜국으로 떠난 이후 재상직인 막리지를 맡게 된다. 살수대첩이 무슨 수공으로 수나라 군대를 쓸어버린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살수대첩 당시에 수공으로 수군을 물리쳤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는 강이식 대장군과 더불어 조정 내 강경 주전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굳이 추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태제인 영류왕에게 "왜 추격하지 않았느냐"며 불만을 대놓고 드러낸다.

이후 수나라의 4차 침입 때 곡사정을 돌려보내며 수나라와 화친하려는 영류왕에게 화친하지 말 것을 간언하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분사(忿死)한다. 영류왕에게 마지막까지 한 말은 작중 초반에서 한 "역사에 죄를 짓지 마십시오."였다. 을지문덕이 분사한 이후 요동성에서는 강이식, 양만춘, 온사문 등의 장군들이 슬퍼했고 강이식은 항복을 전하러가는 사신들의 얼굴도 보기 싫다고 말하였다. 곡사정을 서부 욕살 사비류가 수나라 군영으로 데리고 가 을지문덕의 죽음 등을 거짓 항복의 이유로 내세웠고 수양제는 그의 죽음을 듣고 강이식처럼 보고 싶은 인사였다며 안타까워하면서도 회군할 명분을 얻게 되었고 이를 끝으로 고구려-수 전쟁도 마무리로 접어들며 1부에서 영양왕이 승하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고구려 파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이다. 
2007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안시성주 양만춘이 을지문덕의 후계자로 나오고 안시성에 을지문덕의 사당이 있어서 양만춘이 을지문덕을 기리며 고민하는 묘사도 나온다. 안시성 전투 직전 양만춘은 당나라군을 안시성에 묶어 둘 방책을 찾는데 그 방법은 피로 물든 옛 수나라 깃발과 여수장우중문시를 보내 도발하는 것이었으며 사신으로 보낸 대중상을 통해 "당나라 황제의 목을 연개소문에게 뺏길 생각은 없다."라는 독설까지 보냈다. 당연히 당태종은 크게 분노하고 안시성 공격을 결정한다. 다만 당태종도 무작정 분노해서 홧김에 결정한 것은 아니고 "이런 도발을 해서 내 판단력을 흐리게 할 정도면 이 양만춘이란 자는 참으로 뛰어난 자다. 이런 자를 배후에 두고 평양성으로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위험하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른 결정으로 나온다. 실제 안시성 전투 당시 당나라군은 안시성 공격과 평양성 진공을 두고 고민하였으나 안시성을 배후에 두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장손무기의 주장을 당태종이 따라서 안시성 공격을 강행한 것인데 이를 살수대첩 및 을지문덕과 연결해서 각색한 것이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열전 제4권
저자: 김부식 삼국사기/권45→


을지문덕
을지문덕(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 與九軍至鴨淥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則執之, 仲文等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議,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淥而歸, 述與仲文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羣議, 遂進東濟薩水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방진(方陣)을 만들어 나아가니,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 至薩水軍半濟, 文德進軍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度遼, 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거칠부
거칠부(居柒夫)또는 황종(荒宗)이라 한다는 성이 김(金)씨이다. 내물왕의 5세손이고, 祖仍宿角干, 父勿力伊湌, 居柒夫少跅弛有遠志, 祝髮爲僧, 사방(四方)을 유관(遊觀)하고, 便欲覘高句麗, 入其境聞法師惠亮開堂設經, 遂詣聽講經, 一日, 惠亮問曰, 沙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 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鷰頷鷹視, 將來必爲將帥,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好者, 有如皦日, 遂還國, 返本從仕, 職至大阿湌,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湌,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比台角湌耽知迊湌非西迊湌奴夫波珍湌西力夫波珍湌比次夫大阿湌未珍夫阿湌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領其徒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거도
거도(居道)는 그 일족(一族)의 성(姓)씨(에 대한 정보를) 잃어버려, 어느 곳 출신의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을 섬겨 간(干)이 되었을 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은 인접한 경계에 끼여 거주하고 있었으니, 상당히, 나라의 근심이 되었다. 거도가 변방의 관리가 되자, (두 나라를) 병탄(倂呑)할 뜻을 몰래 품고, 매년 한번 장토(張吐)의 들판에 많은 말을 모아두고, 병사들로 하여금 이 말을 타게 하여 말달리는 것을 놀이와 즐거움으로 삼았다. 시인(時人)들이 이를 마기(馬技)라 칭하였다. 두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늘 보았고, 신라의 통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괴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 병마(兵馬)를 일으켜, 그들을 불의(不意)에 공격하니, 이로써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김양
김양(金陽)의 자(字)는 위흔(魏昕)이고, 태종대왕의 구세손이다. 曾祖周元伊湌,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湌,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太和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太守, 尋拜中原大尹, 俄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開成元年丙辰, 興德王薨, 無嫡嗣, 王之堂弟均貞, 堂弟之子悌隆, 爭嗣位, 陽與均貞之子阿湌祐徵均貞妹壻禮徵, 奉均貞爲王, 入積板宮, 以族兵宿衛, 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 陽陳兵宮門以拒之, 曰, 新君在此, 爾等何敢兇逆如此, 遂引弓射殺十數人, 悌隆下裴萱伯射陽中股, 均貞曰, 彼衆我寡, 勢不可遏, 公其佯退, 以爲後圖, 陽於是, 突圍而出, 至韓歧【一作漢祇】市, 均貞沒於亂兵, 陽號泣旻天, 誓心白日, 潛藏山野, 以俟時來, 至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徵收殘兵入淸海鎭, 結大使弓福, 謀報不同天之讎, 陽聞之, 募集謀士兵卒, 以三年二月入海, 見祐徵與謀擧事, 三月, 以勁卒五千人, 襲武州至城下, 州人悉降, 進次南原, 迕新羅兵與戰, 克之, 祐徵以士卒久勞, 且歸海鎭, 養兵秣馬, 겨울에 혜패(彗孛)가 서방(西方)에 나타났다. , 芒角指東, 衆賀曰, 此除舊布新, 報寃雪耻之祥也, 陽號爲平東將軍, 十二月再出, 金亮詢以鵡洲軍來, 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六將統兵, 軍容甚盛, 鼓行至武州鐵冶縣北州, 新羅大監金敏周以兵逆之, 將軍駱金李順行以馬兵三千突入彼軍, 殺傷殆盡, 四年正月十九日, 軍至大丘, 王以兵迎拒, 逆擊之, 王軍敗北, 生擒斬獲, 莫之能計, 時, 王顚沛逃入離宮, 兵士尋害之, 陽於是, 命左右將軍領騎士, 徇曰, 本爲報讎, 今渠魁就戮, 衣冠士女百姓, 宜各安居勿妄動, 遂收復王城, 人民案堵, 陽召萱伯曰, 犬各吠非其主, 爾以其主射我, 義士也, 我勿校, 爾安無恐, 衆聞之曰, 萱伯如此, 其他何憂, 無不感悅, 四月, 淸宮奉迎侍中祐徵卽位, 是爲神武王, 至七月二十三日, 大王薨, 太子嗣位, 是爲文聖王, 追錄功, 授蘇判兼倉部令, 轉侍中兼兵部令, 唐聘問, 兼授公檢校衛尉卿, 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 薨于私第, 享年五十, 訃聞, 大王哀慟, 追贈舒發翰, 其贈賻殮葬, 一依金庾信舊例, 以其年十二月八日, 陪葬于太宗大王之陵, 從父兄昕, 字泰, 父璋如仕至侍中波珍湌, 昕幼而聰悟, 好學問, 長慶二年,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昕, 太宗之裔, 精神朗秀, 器宇深沈, 可以當選, 遂令入朝宿衛, 歲餘請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 及歸, 國王以不辱命, 擢授南原太守, 累遷至康州大都督, 尋加伊湌兼相國, 開成己未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 敗績, 自以敗軍, 又不能死綏, 不復仕宦, 入小白山, 葛衣蔬食, 與浮圖遊, 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 感疾終於山齋, 享年四十七歲, 以其年九月十日, 葬於奈靈郡之南原, 無嗣子, 夫人主喪事, 後爲比丘尼 


각주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종래의 모든 판독에서는 ‘기(技)’자를 ‘숙(叔)’으로 읽어 많은 해석이 있었다. 성암본(誠庵本) 《삼국사기》에서 ‘수(手)’변이 분명히 확인되고 ‘지(支)’자의 윗 부분이 마모되었으나, 아래의 ‘우(又)’자 획이 분명하므로 《역주 삼국사기》 1 校勘 原文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에서는 ‘기(技)’로 판독하였다. 또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동사강목》의 탈해이사금 23년조에서도 이를 ‘기(技)’자로 판독한 바 있다. 중종 임신간본 및 주자본 《삼국사기》를 최초로 이용한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에서부터 ‘마숙(馬叔)’으로 판독되었고(그 내용 및 의미에 대하여는 윤경열, 「자료·신라의 유희」, 《신라민속의 신연구》, 신라문화선양회편, 1983 | 李基東, 「신하상고의 전쟁과 유희」, 《소헌남도영박사화갑기념논총》, 1984 참조), 그 영향을 받아 현재의 인쇄본에서는 모두 ‘마숙(馬叔)’으로 판독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6~697쪽).  

 

 

 

 

 

 

<살수대첩>. 박각순. 1975년 작

 

 

살수대첩(薩水大捷)

 

612년(영양왕 23) 7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의 하나

612년 7월 24일에 을지문덕이 지휘한 고구려군이 우중문과 우문술 등이 지휘한 수나라군을 살수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


고구려 측의 지휘관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고, 수나라 측의 지휘관은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 등이었다. 612년 7월 살수(薩水)에서 전투하였는데,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다. 

612년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113만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육군은 40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는데, 각 부대를 군(軍)이라고 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40개의 군 중에서 9군을 지휘하였다. 9군의 병력 수는 30만 5천 명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9군은 노하진(潞河鎭)과 회원진(懷遠鎭)에서 출진하였다. 노하진과 회원진은 랴오허강〔遼河江〕 서쪽에 설치된 수나라의 군사 거점이었다. 처음 그들의 집결지는 압록강 서쪽이었다. 출발할 때 인마(人馬) 모두 100일치의 식량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별도의 군수 보급 없이 압록강 서쪽까지 빠른 속도로 행군하도록 한 것이다. 압록강 서쪽에 먼저 집결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이후 양제가 이끄는 수나라 주력부대가 도착하면 합류해 남쪽으로 나아갈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612년 전쟁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것은 3월부터였다. 랴오허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도하를 저지하며 방어에 나섰던 것이다. 수나라 군대가 도하에 성공한 것은 4월 중순이었다. 이때부터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 고구려의 여러 성은 수성전(守城戰)을 전개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도 4월 중순 이후 랴오허강을 건넜다고 파악된다.  

우중문이 이끈 부대의 경우 오골성(烏骨城), 즉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봉황산성(鳳凰山城)을 경유하였다고 한다. 9군의 이동경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는데, 대체로 랴오허강을 건너 압록강 하구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서안에 집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6월 중순까지 랴오닝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성은 건재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식량 부족에 직면하였다. 9군은 처음 노하진과 회원진에서 출발할 때 100일치의 식량뿐만 아니라 무기와 각종 군수물자를 보급받았는데, 병사마다 3섬 이상의 무게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동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식량을 버리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장수와 병졸 모두 장막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미 식량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이때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을 상대한 것이 고구려의 을지문덕이었다.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건너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군영으로 갔다.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살펴본 것이다. 다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온 을지문덕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우중문은 기병을 선발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는데, 을지문덕은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고 한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계책은 지리를 통달해 알았네.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면 멈추길 바라노라[神䇿究天文, 妙筭窮地理. 戰勝功旣髙. 知足願云止].”

우중문은 편지를 보내 회유하였지만 을지문덕은 거절하였다. 을지문덕은 압록강 동쪽에 설치한 울타리를 불태우고 도망쳤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을 유인하고자 한 것이다. 우문술은 양식이 부족하므로 회군하고자 하였지만, 우중문은 추격해 전공을 세우고자 하였다고 한다.

둘 중에 양제에게 보다 큰 권한을 위임받은 우중문의 견해가 채택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지점까지 왔다. 산에 의지해서 군영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來護兒)의 수군(水軍)과 합류할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내호아는 대규모의 선단을 이끌고 동래(東萊), 즉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대동강 입구까지 왔다. 그리고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포구에서 주둔하였다. 내호아 수군의 주된 역할은 식량 운송이었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의 부대로부터 식량을 보급받으면 평양성 공격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내호아의 부대는 포구에서 고립된 처지였다. 고구려군의 거짓 패배에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부대만으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가 대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내호아의 수군(水軍)에 합류할 수 없었다. 식량 부족에 따른 압박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때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파견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회군한다면 영양왕을 모시고 가서 수 양제에게 조회하고 알연하겠다고 한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 측에 회군할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결국 회군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곧 그들을 추격하였다. 9군의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설세웅(薛世雄)은 평양성에서 퇴각하면서 백석산(白石山)까지 왔는데, 고구려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었고 사면에서 화살 공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간신히 탈출하였지만 잃은 병력이 많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전투는 살수에서 전개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7월 24일 살수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은 그들이 살수를 반 정도 건넜을 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뒤에서부터 후군(後軍)을 공격하였다. 수나라 장군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시켰다. 수나라의 여러 부대를 모두 무너뜨리고 마비시켰다. 

수나라 여러 부대의 장수와 사졸은 달아나 도망치기 급급하였다. 만 하루 만에 압록강까지 도망쳤다고 하였다. 살아서 랴오닝성에 귀환한 자가 불과 2천7백 명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이 퇴각하자 포구에 고립되어 있던 내호아의 부대 역시 퇴각하였다. 수 양제 역시 9군의 패배를 보고받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수전투의 큰 승리로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종결된 것이다. 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의 결정적 전투였다. 








살수 대첩
薩水大捷
살수전투 | 薩水戰鬪

시기
612년 (영양왕 23년) 7월 (음력)
장소
고구려, 식성군 살수 유역
원인
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
교전국
고구려


주요 인물
지휘관
고구려 군기 을지문덕 (대신)
지휘관
우중문 (대장군)
병력
병력 규모 불명
수나라군: 305,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원정군 몰살
- 사상자: 302,300명
결과
고구려의 대승
영향
수의 멸망

612년(영양왕 23년)에 일어난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이다.

살수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의 주도 아래 이루어낸 대첩이자 한국 전쟁사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승전 중 하나이다. 흔히 강감찬의 귀주 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으로 불린다.

 

배경
612년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13만여 명에 달하는 수(隋)나라군은 음력 3월 15일, 요하에 도달했다. 수나라 침공군의 전 병력이 탁군을 떠나는 데만 40일이 걸릴 정도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대규모의 군대였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진군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는 데만 2개월이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요하를 건너 요동성 공성전을 시작했지만, 수나라군은 또 다시 1개월이 넘도록 요동성 함락은커녕 큰 손실을 입고, 음력 6월을 맞이했다. 

게다가 병력과 물자의 손실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시간이었다. 수양제는 지나치게 거대한 병력을 이끌고 와서 (설령 요동성을 바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해도) 겨우내 보급을 받으며 요동에 계속 주둔하기는 힘들었기에, 곧 겨울이 다가오면 힘들여 함락한 성들을 모두 뱉어내고 도로 본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요동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3개월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 당시로서는 더더욱 답이 없었다.

이에 수양제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타개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다. 전군에서 정예병을 추려 300,000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의 지휘하에 평양성으로 직행시키는 한편, 황해를 건너는 내호아의 수(水)군과 합류하여 한 방에 평양성을 함락시키려는 대담무쌍한 작전이었다. 

 

 

전개

고구려의 병사


양제의 계획은 성공한다면 위협적이었겠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당시 수나라군은 300,000명에 달하는 별동대에게 100일 분의 식량과 피복, 병장기, 야전천막 등을 분배하여 운반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렇게 군장을 분배한 결과, 병사 1인당 군장의 무게가 무려 석 섬(약 50kg)이나 된 것이었다. 이 정도면 현대의 보병 기준으로도 꽤 무거운 수준이다. (실제로 40kg의 군장을 메고 구보 등 군기훈련을 받던 훈련병이 사망한 사건이 2024년에 있었다.) 참고로 한국군 기준의 완전군장이 최소 25kg, 무거우면 40kg+@ 정도다. 이쯤이면 현대군에서도 신체능력을 열심히 단련한 전투원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다. 거기에다 당시의 영양 상태를 감안한 평균 신장과 체력을 생각한다면, 징집된 수나라 병사들 입장에서는 지고 가다가 당장 죽는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무식한 짐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 수나라 병사들은 무구는 버리지 못하니 식량을 비롯한 다른 보급품을 길가에 버렸다. 나중에 인근의 주민들이 주워서 잘 써먹었다는 얘기가 있다. 당연히 수나라 장수들은 군수품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어버린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작정하고 오밤중에 몰래 천막 안에서 구덩이를 파서 묻는 행위를 일일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별동대는 행군 중에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게 되었다. 

한편 수나라군이 압록강 근처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에서는 을지문덕이 항복을 구실로 홀로 적군의 본진에 다다랐다. 그리고 별동대가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있어 작전을 실행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직접 확인했다. 일찍이 수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을 만나거든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몰래 명령했으나, 참군(參軍) 유사룡이 사신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며 을지문덕을 그냥 보내주자고 주장했고 이에 우중문도 할 수 없이 보내주었다. 물론 수나라 장수들이 마음을 바꾸어 을지문덕을 다시 불러오려고 했으나 을지문덕은 그대로 유유히 압록강을 건너가 버린 뒤였다. 

우문술은 군량 부족을 이유로 퇴각을 건의했지만 우중문은 아니었다. 수양제가 이미 우중문을 대장으로 삼아 지휘계통을 정리했기 때문에 그의 의견대로 수나라군은 평양을 향해 진격했고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의 피로를 가중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전을 강요하면서도 수나라 군대가 발을 빼지 못하도록 짐짓 패배하는 척 더욱 깊숙이 끌어들였다. 어느 날은 우문술의 군대를 상대로 하루에 7전 7패, 즉 7번 싸우고 7번 도망가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고구려군은 게릴라전만 열심히 해대며, 수나라 군대의 체력을 빼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고구려군의 계획대로였다. 결국 을지문덕은 지속적인 유인 끝에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앞 30리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평양성은 견고하여 수나라군은 지친 상태에서 함락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다를 통해 상륙하여 호응하기로 했던 내호아의 수군은 왕제인 고건무에게 탈탈 털린 상태라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神策究天文신 책 구 천 문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깨달았고
妙算窮地理묘 산 궁 지 리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지리)을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전 승 공 기 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 족 원 운 지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입조(入朝), 즉 항복을 약속하는 듯한 거짓 항복 문서를 보냈다. 이때 을지문덕은 한 편의 시를 같이 보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이다. 언뜻 보면 띄워주는 내용 같지만, 당시 수나라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철저한 티배깅이었다. 

우중문은 답신을 보냈으며, 을지문덕은 이에 대해 다시 답신을 보내기를
'수나라가 군대를 물리면, 자신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
는 확인 서한을 보냈다. 물론 그만한 지위에 올라간 우중문이 정말로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이게 거짓말이라는 건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퇴각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체면치레, 즉 수양제에게 변명할 거리 하나를 간신히 챙겼다고 생각한 우중문은 그제야 퇴각을 결심했다. 물론 이것 역시 수나라군을 조금이라도 더 철저하게 파멸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준비 시간을 벌려는 을지문덕의 치밀한 계획일 뿐이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이 퇴각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고는 병력을 준비해 놓았다. 즉 이 시점에서 수나라군 별동대 300,000명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수나라군의 별동대는 힘겨운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평양성 코앞까지 유인하기 위해 거짓 후퇴만 거듭했던 그 때까지와는 반대로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갔다. 사방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를 쳐부수기를 반복했으며, 수나라군은 방진을 치며 맞섰다. 

고구려군의 계속되는 공격속에 약화될 대로 약화된 수나라군 별동대는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간신히 도착했다. 수나라군이 도하를 시작하여 총병력의 절반쯤이 강을 건너는 순간,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 병력을 집중시켜 최후의 총공격을 개시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지상군이 제일 취약한 순간 중 하나가 도하 중일 때였으니 을지문덕의 전투 개시 시점이 절묘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수나라 후군이었다. 수나라의 후위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고, 지휘관인 우둔위 장군 신세웅마저 전사할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났다. 그리고 후군의 이런 참담한 붕괴로 인해 300,000명의 대군 전체에 극도의 공포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패닉에 빠진 수나라군 장병들은 살기 위해 서로 도주하면서 연쇄적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수나라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혼란 가운데서도 몇몇 수나라군 부대는 감투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별동대의 지휘관들 중 설세웅은 백석산에서 빗발치는 화살비와 포위망을 돌파하며 고구려군 일부를 격퇴하는 무용을 떨치기도 했고, 또 다른 지휘관 왕인공도 고구려군 일부를 물리치는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전으로는 전황을 뒤집기에 턱없이 부족하여 거의 의미가 없었다. 305,000명 중 살수(청천강)에서 빠져나와 압록강에 도착한 장병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비율로 따지면 생환률이 고작 0.89%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그 2,700명도 하루 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177 km)를 도망쳐 왔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기병의 진격속도가 하루 100km가 최대였음을 고려하면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수나라군 패잔병이 대형을 유지하기는 커녕 장비도 다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도망쳤다는 것을 과장법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결국 패전의 책임으로 유사룡은 처형당했고, 우중문은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에 화병으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자택에서 죽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수나라 입장에서는 돈과 인력을 말 그대로 다 때려부었음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전쟁이었다. 

 

결과

살수대첩


수나라군 별동대 300,000명이 2,700여 명밖에 못 살고 모조리 증발했다. 남은 수나라군 총병력은 즉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대전으로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종결되었다.

잔존 병력들이 간신히 본진에 도착하자 수양제 양광은 큰 충격을 받았고 대노하여 패장인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포박하여 서도인 장안까지 끌고 갔다. 이후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서인(庶人)으로 전락시키고 감옥에 가두었다. 다만 우문술은 제3차 고구려-수 전쟁 때 복권되어 참전했다. 특히 유사룡은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패전의 원흉으로 규정되어 참수되었고, 머리가 효수되었다. 사실 패전에 가장 큰 책임이 있었던 내호아는 정작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우중문과 우문술도 죽음은 면했으니 괜히 애꿎은 유사룡만 패전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한편 별동대의 지휘관들 중 한 명이었던 설세웅은,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종횡무진 활약한 공으로 포상을 받아 승진하기도 했다. 

수양제는 이후 제3차, 제4차 침공을 계속 이어나갔으나 끝내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한 원정 탓에 그 끝을 모르던 수나라의 국력은 어느새 고갈되었고,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며 대규모 반란이 거듭 일어나 수양제는 강남의 강도에서 근위병들에 의해 교살당하고, 수나라는 멸망했으며 양씨 황족들은 돌궐(쾩튀르크)로 도망친 어린 황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멸당했다. 이로 인해 살수 대전 한 번으로 대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교과서나 위인전에서는 살수 대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넘어가느라 수나라군을 무력하고 가벼운 오합지졸로 묘사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보급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대병력을 동원했다는 것 외에는 실제 수나라 측에서 큰 전술적 오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사람들 모두 중국 대륙의 통일 과정 중 벌어진 수많은 전투들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역전의 지휘관들이었다. 

특히 1,130,000명이라는 역사상 초유의 대군 앞에, 고구려가 요하 일대에 주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속에서 정예병 305,000명으로 수도 평양성을 번개처럼 직공하고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수군(水軍)이 이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압도적인 병력수의 이점을 활용한 꽤 훌륭한 구상이었다. 내호아의 수군이 고건무에게 궤멸되는 등의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하여 최악의 결과가 나왔지만 훗날 불세출의 명장인 이세민과 그 휘하의 당나라 장수들이 요하 인근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이정과 함께 수나라군의 전략으로 회귀한 것을 생각한다면 구상 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수나라 군대의 기동 또한 매우 훌륭했다. 이 대전략을 위해, 별동대 305,000명은 가려 뽑은 최정예병답게 요하 서쪽에서, 요동 천산산맥, 압록강, 청천강 등이 놓여진 수백 km를 1개월 만에 주파하여 평양에 도달했다. 고구려측 입장에서도 실로 최악의 국가적 위기였던 건 분명하며, 자칫하면 별동대 305,000명에게 평양이 참수작전을 당하여 그대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괴력을 발휘한 우중문 휘하 별동대의 활약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지친 상태에서 험준한 평양성을 함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내호아의 수군(水軍) 역시 미리 상륙했으나 고건무에게 이미 박살난 상태이다 보니 호응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우중문과 우문술에게는 또 다른 기회도 있었다.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으로 정탐하러 왔을 때, 예의고 나발이고 팽개치며 그를 잡았더라면 수나라군의 입장에서는 유리한 양상이 되었겠지만 참군 유사룡이 만류하는 바람에 우중문과 우문술은 그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다만, 이건 을지문덕이 독단으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파견나간 상황에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건 접대 관습의 영향이 가장 큰데, 적국의 사람이라도 일단 손님으로 찾아오면 쌍방이 서로 해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며, 이 덕분에 사신이 적국에 비무장으로 가더라도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유사룡이 말린 것도 사신으로 찾아온 을지문덕을 죽였다간 당장에는 이득이 될지 몰라도 이후에는 국제적으로 접대의 관습을 어긴 나라로 찍혀 타 국가들이 빈번하게 쳐들어올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당시 최강대국 수나라가 이런 관습 하나 안 지켰다고 공격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수나라 내부에 있을 우중문 등의 경쟁자들이 "이런 비겁한 짓을 해서 이긴 것은 의미가 없다." 라는 식으로 정치적 공격을 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요약하자면 수나라 군대는 후대에 비해서도 고구려군의 맹점에 대해 의외로 높은 이해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 수뇌부는 수•륙 양면으로 뻗쳐오는 수나라군의 양 팔을 최대한 끌어들여 절묘한 시간차를 두고 잘라냈으며, 살수대첩은 이를 갈무리하여 섬멸하는 통쾌한 일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해: 수공
고구려군이 보(댐)을 이용하여 수공(水攻)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한때 역사적인 정설로 알려졌다. 그래서 지금도 살수대첩이 수공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이자 날조이다. 역사상 막았던 물길을 터뜨려 적의 진군을 방해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무장한 300,000명의 대병력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인위적인 수공은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다. 

《삼국사기》, 《수서》, 《당서》 등 1차 사료 어디에도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기록이 없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1948년 책으로 출간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최초로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서술이 등장한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을지문덕의 지시로 고구려군이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아 놓았고,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로 뛰어들었을 때 이를 터뜨렸다고 되어 있다. 이후 우리나라에는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것이 정설로 알려지게 되었고, 을지문덕 위인전이나 여러 역사 서적에 을지문덕 장군이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았다가 터뜨린 이야기가 거의 빠짐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이야기는 어떠한 역사적 근거도 없이 근대인 신채호 개인의 기록일 뿐이다. 

고대의 토목기술로는 전쟁 중의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격류를 만들어낼 댐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대에도 댐공사는 외딴 산골에 시멘트나 콘크리트 등 물량과 공사 인원, 그리고 건설장비들을 대량으로 투입해야 하는 난공사로 악명이 높다. 현재 국내 최대 규모의 댐인 소양강댐의 용수 조절량은 약 5억톤인데, 전근대의 저수지는 그 규모가 커 봐야 100만톤 정도가 한계였다. 하물며 소양강보다 규모가 큰 청천강의 하계 유량을 견뎌낼 만한 댐을 서기 7세기의 기술력으로 단기간에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거기다가 만약 대규모 댐을 어찌어찌 만들었다고 해도, 폭약도 없던 그 시대에 타이밍을 맞춰 물을 흘려보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훗날 제3차 여요전쟁 초반인 1018년에 일어난 흥화진 전투에서 강감찬이 수공을 썼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도 얼어 붙은 삼교천 강물 위에 잠시 동안 물을 흘려 거란군 기병의 대열을 흐트러 뜨리고 진군 속도를 늦추려는 정도였을 뿐, 무장한 인마(人馬)들을 무더기로 멀리 쓸고 갈 정도의 대규모 수공은 결코 아니었다. 

즉,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수공으로 물리쳤다는 통설이 성립하려면, 고구려가 최소 억톤 단위의 댐을 건설할 수 있는 오버 테크놀로지를 갖추어야 하고, 수나라군의 도하 지점을 의도한 방향으로 한치의 오차없이 몰아넣어야 하며, 물이 흘러가는 시간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수나라군의 종심을 타격해야 하는데 이런 식의 절묘한 수공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다.  

이후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수공 덕분이 아니라 보급 문제로 곤죽이 되고, 진격보다 어렵다는 후퇴 상황이었으며, 《손자병법》에서도 강조할 정도로 가장 위험한 상황인 도하 중 대규모 결전이 벌어지는 등 수나라군으로써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들이 모두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거의 모두 을지문덕과 고건무에 의해 통제된 것이었다. 역사상 수많은 명장들이 그러했듯, 이미 싸우기 전에 이길 판을 완벽하게 깔아놓고 시작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영향과 의의
살수대첩은 한국사의 모든 전투 중 가장 큰 대승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적군에게 입힌 전투였다. 또한 단순히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화 문명의 팽창 한계선이 확인된 상징적인 의미로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기원전인 전국시대의 연나라때부터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꾸준히 요동-서북한 일대에 세력을 투사하며 예맥계 정치체제에 영향을 미쳐 왔었다. 비록 이민족의 침입과 분열로 한동안 이 지역에 세력을 확장시키지는 못했으나, 다시 통일된 이후 수나라는 만주와 한반도에 세력을 투사하기 위해 이전 중국 왕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국력으로 물량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살수대첩으로 인해 수나라의 최정예 병력이 증발해 버렸고, 이는 수나라의 멸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단순히 수나라의 멸망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후의 중국인들이 한국계 국가들의 군사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근거가 되어, 후대 한국 왕조들의 외교적인 입지에도 커다랗게 기여했다.   

손실률은 그야말로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기록에 따르자면 305,000명 중 2,700명만 살아 돌아왔으니 99.11%가 손실된 것이었으며, 이는 앙가우르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도 능가하는 세계 전쟁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철저한 "단순 궤멸 정도를 넘어선 괴멸"이었다. 심지어 앙가우르 전투는 괴멸당한 쪽이 압도적으로 머릿수가 적었고, 토이토부르크 전투 역시 두 군대간 머릿수 차이도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명량 해전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초강대국이였던 당나라라서 막심한 피해에 그쳤던 것이지, 다른 나라였으면 민족의 존망을 진지하게 논해야 할 정도였다.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총병력은 197,700여 명, 정유재란 때는 141,400여 명이었다. 이순신, 권율, 곽재우 등 여러 명장들의 6년 동안의 전과를 다 합쳐도 살수대첩 단 한 번에 못 미치는 수치인 셈이다. 물론 두 전쟁의 배경과 전투의 성격이 너무도 다를 뿐더러 애초에 전쟁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긴 하지만, 숫자만 놓고 보면 살수대첩의 규모가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옴이여,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을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기순(祁順)<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 중에서.

후한 이후 지속된 위진남북조시대라는 난세를 종식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대제국 수나라 앞에서 고구려는 (제 아무리 전성기라 할지라도)일개 지역강국들 중 하나에 불과했는데 압도적인 국력 차이를 극복하고 끝내 중화 대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했으니, 직후 당태종과 당고종의 고구려 멸망에 대한 무서울 정도의 집착, 그리고 훗날 귀주 대첩으로 얻어낸 고려-요-북송의 100여 년 동안의 국제정치적인 균형 시기를 거쳐, 더욱 훗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시대나 명나라 초기, 명나라 중후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한반도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 및 예민한 반응을 오래도록 이어나갔다. 

살수대첩은 당시에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중화인들에게 강렬한 기억이자,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낸 트라우마요, 흑역사 취급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살수대첩으로부터 20여 년 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이전에도 고구려의 대수 전쟁 전승탑인 경관(京觀)을 철거하라고 주구장창 요구하여 끝내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후 요동으로의 침공길에서는 요택에 무더기로 버려진 수나라 장병들의 유골을 추려 모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당시 당나라 장병들이 다함께 크게 울었다는 기록도 있다. 앞선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당태종 또한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 매우 촉박한 일정이었음에도, 굳이 이런 추모행사를 가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한국사에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는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주에 있었던 칠불사(七佛寺)라는 사찰에 대해 수나라 병사가 청천강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배가 없었는데, 문득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7명의 승려가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는 것을 본 후, 물이 얕은 줄 알고 군사를 지휘하여 다투어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내에 가득하여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이후 이곳에 절을 짓고 칠불사라 했으며 그 7명의 승려를 기려 7개의 돌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또한 일제 시대의 문인인 현진건이 1935년에 쓴 《단군성적순례》라는 기행문을 보면 안주 현지에 수나라 군사들의 수몰(水歿)과 관련된 오도탄(誤渡灘)이니 골적도(骨積島)니 하는 지명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평안도_살수대첩이 있었던 곳에 자리잡은 안주읍성(펜저의 국방여행). 또한 조선시대에는 을지문덕의 석상이 안주에 세워지기도 했는데, 현진건이 《단군성적순례》에서 언급하기도 했으며, 아직도 북한에 남아있기는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단군성적순례》에 따르면 만들어진 시기는 '숭정기원(崇禎紀元) 220년 을미'로 조선 헌종 13년(1847년)으로 보이며, 원래는 을지문덕 사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사당이 없어지고 땅에 파묻혔다가 다시 파내 백상루 밑에 갖다 두었다고 한다.# 단, 백상루는 미군의 폭격으로 없어졌고, 북한이 다시 세운지라 을지문덕 석상의 보존 상태는 알 수가 없다.

살수대첩으로부터 800년 가까이 지난 후, 여말선초 시대의 대신인 조준이 수많은 중원 젊은이가 고구려에서 물고기밥으로 사라졌다며 살수대첩을 얘기하는 칠언절구 시를 남기기도 했다. 명나라 사신과의 연회 자리에서 즉석시를 지어 양국 간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겼다는 설화도 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명나라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정도전, 정몽주에 비견될 정도로 똑똑했던 조준이 굳이 그런 어리석은 어그로를 끌 리 없다는 주장도 있다. 1391년 경, 조준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薩水湯湯漾碧虛살 수 상 상 양 벽 허 살수 강물 파도치며 허공에 출렁이니,
隋兵百萬化爲魚수 병 백 만 화 위 어 수나라 100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것다.
至今留得漁樵話지 금 류 득 어 초 화 지금까지 어초들의 얘깃거리로 남아,
不滿征夫一笑餘불 만 정 부 일 소 여 지나는 나그네의 한바탕 웃음거리 되고도 남네.
#《세종실록》154권, <지리지> - 평안도 - 편 <안주회고>(安州懷古). 관련 사전

조준이 지은 시는 안주의 백상루(百祥樓)라는 정자에 걸려 있었고, 수십 년 후 태종 시기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축맹헌이 이 시를 보고 답시를 남겼다. 수십년 후 당나라가 끝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들어 수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면 성공했을 것이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축맹헌의 호기어린 장담과는 달리 수양제는 이후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2번이나 더 군사를 일으켰으며, 결국 그것조차 다 말아먹고 수나라는 멸망했다는 게 함정이지만. 축맹헌은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정자에 이런 시가 대놓고 걸려 있으니 굴욕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도 사대의 예 운운하며 노발대발 안 한 거 보면 타국에 와서 어느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북한의 관점


북한 살수대첩
남북간 생각이 대체로 일치하지만, 살수대첩이 요동 일대에서 일어났다고 본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는 북한판 국사 교과서인 《조선력사》의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적들은 겨우 대오를 수습해가지고 살수(소자하)를 건너 봉황성 30리 지점까지 다다랐다…수나라 침략군이 살수를 건느기 시작하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일제히 떨쳐나서 전후좌우에서 적들을 무리로 족치는 통쾌한 섬멸전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서 고구려 군대는 침략군을 거의다 섬멸해버렸다. 살수 전투에서 살아돌아간 적들은 겨우 2,700명뿐이었다. 이것을 우리 나라 력사에서는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고 자자손손 긍지 높이 불렀으며 그것을 고구려의 강대성과 민족적 기개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조선력사》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조선시대 이래의 칠불사 역시
"봉건사가들이 청천강에 날조된 역사 이야기를 갖다 붙이면서 칠불사 전설도 꾸며 놓은 것"
이라고 격하했고, 이름도 김일성이 '칠렬사'(七烈士)로 고치게 했다고 한다.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있다.
김진명의 소설 《살수》
김성한의 소설 《요하》
SBS 드라마 <연개소문>

사극 <연개소문>에서는 46화에 묘사된다. 기존의 수공설을 쓴 문제도 있지만, 드라마 연출 자체도 총체적 난국이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전투씬(북한산성 전투)을 재활용하는 바람에 분명 강가에서 벌어지는 야전임에도 성이 등장한다. 심지어 잘못된 편집 때문에 신라군이 잠시나마 등장하기까지 했다. 살수대첩의 수공 묘사는 이후 고구려-당나라 전쟁때의 사수 전투 파트에서 또 재활용되었다. 

그 어떤 전투와 비교해도 역대급이지만 창작물에선 정작 거의 다뤄지지 않는데, 이는 고구려 시기에 있었던 전쟁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제대로 묘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KBS 대하 사극 <고려 거란 전쟁>에서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전쟁신을 영상으로 송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살수 대첩도 빠른 시일내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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