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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
Yukio Mishima

본명
히라오카 키미타케 (平ひら岡をか公きみ威たけ)
출생
1925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영주 시내 2번지
(現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영주 시내 2번지)
사망
1970년 11월 25일 (향년 45세)
도쿄도 신주쿠구 이치가야혼무라초
국적
일본
직업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 사상가로, 독특한 인생과 작품 속의 심미관, 극우파에 몸담은 역사, 그리고 기묘한 최후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설국』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호평을 받고 1946년 등단했다. 가와바타는 《인간》의 편집장 기무라 도쿠조에게 미시마의 원고를 보여주며 게재결정을 내렸다.〈연초〉는 6월호부터 발표되어 이것이 미시마의 전후 문단으로의 발판이 되어주었으며, 그 이후의 가와바타와의 생애에 걸친 사제관계와 같은 강한 인연의 기초가 형성되게 되었다.미시마는 가와바타를 스승처럼 대했고 가와바타 역시 미시마를 아꼈다. 그 때문인지 1970년 미시마가 자위대를 선동하려다가 실패한 뒤 할복자살하자(미시마 사건), 가와바타 또한 1972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일본의 대문호들 중에선 단연코 최고 수준 집안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미시마 유키오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권력이 있었다. 그의 외가 조상 중에는 홋카이도 에조 공화국의 하코다테 지사였다가 메이지 시대의 고위공무원까지 된 나가이 나오유키도 있었다. 친가와 외가 모두 고위공무원이나 귀족 집안이다. 조부 시절부터 관료 집안으로 조부인 히라오카 사다타로(平岡定太郎, 1863~1942)는 제국대학(現 도쿄대학) 법학부를 거쳐 관료가 되었다. 참고로 증조부 히라오카 타키치(平岡太吉, 1833~1896)는 에도막부 시절 히메지번에 속한 하리마국(現 효고현)의 농민이었으나 아들 둘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뛰어난 머리로 단숨에 상류층으로 신분상승하였다.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의 큰 할아버지인 히라오카 만지로(平岡萬次郞)도 변호사 겸 정치인으로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 4선을 했었다. 

할아버지는 내무성 관료로 후에 제17대 후쿠시마현 지사와 가라후토청(樺太廳) 장관까지 지낼 정도로 고위 관료가 되었다. 또한, 부친인 히라오카 아즈사(平岡 梓, 1894 ~ 1976)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고등문관시험 수석 합격을 했는데, 그런 이들이 대개 초일류 관청인 대장성(現 재무성, 한국의 기획재정부 격)에 간 것과 달리 이류 부처인 농림성(現 농림수산성, 한국의 농림수산식품부 격)에 가긴 했으나 성내 최고위직인 수산국장까지 올라간 고위관료였다. 거기에 변호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던 엘리트였다. 할머니 나가이 나쓰(永井なつ, 1876 ~ 1939)는 무가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대심원판사(大審院判事), 어머니는 아나호번(宍戸藩)의 번주인 마쓰다이라 요리타카(松平賴位)의 서녀였기에 상당한 귀족집안 출신이었다. 귀족적인 배경을 가진 할머니는 미시마의 어린 시절 엄격한 훈육과 과보호를 했다고 한다. 미시마의 어머니인 시즈에(1905~1987)는 한학자이자 카이세이중학교의 교장을 지낸 하시 겐조(橋 健三, 1861~1944)의 둘째 딸로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미시마의 아버지인 히라오카 아즈사가 카이세이중학교를 거쳐 제1고등학교(現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거쳐서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던 인연으로 혼인하였다. 이 정도의 혈통과 인맥, 조부, 부친, 본인의 학력과 경력 등을 감안하면 혈통이 중요시되는 일본 사회/일본 정치 특성상 마음만 먹으면 N선 의원, 한 술 더 떠 총리도 가능할 정도로 일본의 상류층 중에서 황족 다음가는 권세와 스펙을 가졌다.  

미시마 유키오는 어릴 때부터 몸이 병약했는데 또래 친구들이 한창 뛰어놀 나이에도 몸이 약해서 아침조회를 하다가 살짝 어지러워 쓰러진 적도 몇번 있었다. 결국 병원에 찾아가자 의사가 직사광선을 웬만하면 피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원래 당시에도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 빨로 학교에서도 교장이나 평교사 할 것 없이 신경 쓰던 학생이 키미타케였는데, 이 의사의 진단 이후로 할머니가 학교에 직접 찾아가 교장선생에게 "몸이 약한 우리 키미타케에게 태양볕을 맞아야 되는 아침 운동장 조회 같은 것은 앞으로 절대 시키지 말라." 하고 면전에서 강하게 요구했고, 당연히 그때부터 미시마 유키오는 모든 선생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운동장 조회를 공식적으로 다 빠졌다.   
 
가뜩이나 왜소한 데다가 건강도 안 좋은데 의무적으로 햇빛도 자주 피하고 살다보니 얼굴색이 항상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기로 유명해서, 미시마를 안 좋아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별명이 "창백"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명문가 집안의 가오를 잃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는지, 당시 유키오의 동창들이 훗날 증언한 바로는 못된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도 기세에 밀린 적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덩치 크고 짓궂은 반 애가 방과 후 집에 가려고 하던 미시마 유키오에게 "야, 창백이, 넌 불알도 창백하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유키오는 기세 좋게 바지 단추를 풀어 그것들을 꺼내 "봐라! 봐!"라고 하면서 당당히 공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황한 그 아이가 뻘쭘해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하다가 집에 갔다고 한다. 

 

 

도쿄제국대학 입학 이후
앞에서도 상술했지만 조부때부터 3대가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학부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출신이었다. 우리로 치면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셈이다. 미시마 유키오 역시 조부와 부친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걸로 유명해서 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참고로 아직 대학생일때 일본이 패망해서 제국 칭호를 쓰지 않게 되었기에 도쿄제국대학으로 입학해서 도쿄대학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문학에 더욱 심취하여, 아들이 관료가 되기를 원한 아버지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미시마는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도 여러 잡지에 단편 소설을 출판하고 문학인들과 어울리며 문학도의 길을 착실히 걸어나간다. 그러나,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는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장관직에서 잘리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 이에 따라 미시마 역시 취업을 준비하게 되어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47년 여름에 유명한 은행 두 곳의 시험을 봤으나 탈락했다. 

결국 미시마는 아버지처럼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하여 졸업 직후인 겨울에 합격한 뒤 대장성에 입성해 관료가 된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공무원 생활 중에도 계속 글을 써 보내고 잡지사 등에서 출판하는 것을 병행했고 이런 겸업 체제가 길어지다 보니 원래 선천적으로 약했던 건강이 더 나빠지기까지 했다. 여기에 글쟁이들이 고위 공무원으로 잘 살 수 있는 자기 아들을 계속 배고픈 길로 부추긴다는 생각에 성질이 난 아버지는 1948년에 그전부터 아들의 글을 실어주고 있던 출판사 가마쿠라 문고를 찾아가, 출판사 편집자에게 "아니 지금 당신들, 이제 24살(만23세) 된 어린 내 아들 키미타케(미시마 유키오)가 남들보다 글 조금 더 능숙하게 쓴다고 게이샤처럼 너무 오구오구해 주는 거 아니오? 뭐 걔가 나중에 시이나 린조(椎名麟三, 1911 ~ 1973)라도 될 거 같소?"라고 항의했다.실제로 그리 됐다. 이에 편집자 기무라 토쿠조(木村德三, 1911~2005)가 "아사히 신문에 소설 연재할 실력은 될 겁니다. 화려한 (스타) 작가가 되고 말고 하는 거야 자기 운에 달린 거긴 합니다만, 최소한 일류작가가 될 역량은 충분합니다."라고 하자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작가로 등단 이후
그 후에도 미시마는 계속 문학 활동과 공무원 생활을 병행하며 몸이 약해졌는데, 하루는 출근길에 기차역에서 과로로 쓰러져 플랫폼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죽을 뻔했고, 이 일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미시마가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열 달 만에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가 1949년 가면의 고백으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이후 과거 그의 작품 활동을 지원한 기무라 토쿠조의 "일류 작가가 될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그 말대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일류작가 겸 최고 스타작가가 되었다. 그는 전후문학의 총아로 왕성하게 활동, 소설과 극본 외에도 방송이나 잡지, 영화 등에도 자주 출연하고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된다.  

한국 드라마 중 괜찮아, 사랑이야나 시카고 타자기 같은 작품을 보면 유명한 젊은 작가가 거의 연예인 스타처럼 나오기에, 한국에는 그런 스타일의 작가가 없는데 그렇게 표현하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당시 미시마 유키오는 고작 20대부터 정말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쓰는 작품마다 히트시키고 여러 문학상 수상으로 문학성의 인정까지 모두 받으며, 온 언론과 방송의 주목으로 진짜 연예인 스타 같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어쨌건 정말 어렵다는 대중성과 문학성 둘다 확실히 거머쥔,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대중적 스타작가의 계보를 잇는 아이콘.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다. 미시마는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입에 오르내리던 1960년대에 오에 겐자부로를 가리켜 "내가 상을 받은 다음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작 본인은 1970년 자살한 탓에 수상하지 못했지만, 오에가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예언은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천황주의자여서 좌파 학생운동의 전성기에도 언론을 통해 학생들을 마구 질타하기도 했으며, 기존의 우익 정치세력에도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국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자위대의 젊은 장교단, 정부 신진관료들과도 어울렸고, 자위대에 체험입대하여 공수부대 훈련을 받거나, F-104 전투기를 타는 따위 기행을 벌였다. 한국에도 수차례 비공식적으로 와서 휴전선을 시찰하거나 무장간첩들의 침투 루트 등을 탐방했고,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중엔 예비군의 공비 수색 작전을 참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한 경위로 나중에는 그와 뜻을 같이 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다테노카이(楯の會, 방패회). 천황의 방패란 의미다. 참고로 이웃나라 한국의 5.16 군사정변을 모델로 한 정변을 계획한 적도 있지만 무산되었다.  

1969년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들과 만나 청중 1천여 명 앞에서 2시간 반가량 대담을 진행했다. 전공투 학생 수백 명을 상대로 혼자 설전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대담에 참여한 것은 전공투 측의 패널 3-4명과 청중 중에서 발언한 몇 명 정도로, 대담집에 실린 전공투 측 발언자는 도합 8명이었다.# 그는 "천황만 인정하면 너희와도 함께하겠다." 라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넓은 배포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공투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가 있나. 그는 전공투가 지향했던 사회주의의 계급 타파에 대해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덴노'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 라고 말하며 천황제 인정을 양보로서 제안했다. 그리고 설전에서 전공투 학생들은 동의하지 못하면서 미시마에게 '그건 궤변이다'를 반복해서 외쳤다.

당시 전공투들과 벌인 대담은 일본의 극좌 vs 극우를 비교하는 자료로 등장할 때가 잦다. 특이한 건 서로가 일본의 현체제를 부정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면서 묘한 공감대를 보인다는 것. 미시마 본인도 이 대담이 매우 즐거웠다고 대담 후기에서 언급했고, 패널로 참가했던 전공투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본인 구미에 맞는 만족감을 얻고 간 모양이다. 이 대담은 이후 TBS 테레비에서 방영되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TBS 요약본: #1, #2, #3, #4, #5) 전공투의 증언으로는 대담집 출판은 미시마가 혼자 결정하고 진행한 일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미시마 유키오 對 전공투 1969-2000>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런 인간이면서도, 군대는 안 갔다. 2차대전 때 징병 소집장을 받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젊은 군의관이 청진을 할 때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결핵으로 오진하고 군 입대에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오진인 줄 알고서도 끝까지 그 결과대로 묵인했다는 것이다. 병역비리와 치킨 호크의 대표적인 예이다.

 

 

미시마 사건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을 따르는 방패회(다테노카이) 멤버들 중 4명과 함께 육상자위대 총감실을 습격하여 총감을 인질로 잡고 발코니에 올라 일본의 정치적 궐기를 촉구한 후 방패회 멤버들 중 모리타 마사카쓰와 같이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5세. 

 

 

 


작가로서의 평가


문학적 능력은 뛰어나 일본문학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 작가로서 작품들 역시 굉장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병약했던 시절에 썼던 탐미주의적인 작품들이다. 가장 유명한 게 금각사이다. 그 외에도 '가면의 고백'과 '파도소리', '우국'이 있는데 가면의 고백은 등단작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며 우국은 자기가 직접 영화로도 만들었다. 우국의 배경은 일본 2.26 쿠데타이다. 

그는 일본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질 정도로 유명한, 일본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의 대문호이며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해외 문학계에서도 많이 언급될 만큼 주목받는 엄청난 작품들을 쓴 사람이다. 그가 정치적 성향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영향을 줬던 것도 그의 작품들이 워낙 유명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정치활동을 한 것이지, 원래 정치활동으로 유명해진 작가가 아니다. 단순히 정치활동으로 책 팔아먹는 사람이었다면 노벨문학상 후보에 감히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심지어 한 번도 아닌, 도합 다섯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인물이다. 언어, 민족을 초월하여 미시마만큼 인간의 오묘하고 세세한 감성을 혼란스레 표현하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흐리지 않게 제대로 표현한 작가가 드물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탐미주의 문학에서 독보적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며 50~60년대의 일본문학을 대표하였던 작가이다. 

과격한 정치적 행보와는 달리 '파도소리'처럼 연애소설도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및 일본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은 좋아하고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도 동시대의 오에 겐자부로와 비교하면 미시마의 책이 더 쉽게 읽힌다. 갓 스물을 넘긴 작가가 묘사하는 중년 여성, 노년 남성의 심리와 그 심리를 상징하는 온갖 은유들을 읽으면, 문학에 천재가 있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

이 때문에 할복 자살만 아니었다면 아마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을지 않았을까? 하는 반응이 있을 정도로 명필이다.

한국에서는 일종의 밈처럼 보이는 이미지로 인해서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지만, 실제로 그를 이런 이미지가 아닌 소설로 먼저 접한 이들은 대부분 이런 저런 논란은 제쳐두고 글만 봤을 때는 틀림 없는 천재이며, 다시 나오기 힘든 문장가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의 소설들이 번역돼서 나온 시기에 접한 이들은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극우 사상가


미시마 유키오에게 천황이란 결국 자기 작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ー1969년 5월 13일 도쿄대, 미시마 유키오와의 토론 도중 한 전공투의 발언.

미시마 유키오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극도의 탐미주의에 기초한다. 즉, 미(美)의 중심을 정하고 이를 위하여 무엇이든 희생하고 행할 수 있는 사회를 우선적으로 여기는 초기 파시즘과 유사한 형태다. 

미시마 유키오의 독특한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시마라는 인물의 내면에 대해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미시마는 전쟁 당시에도 천황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감정을 평생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시마가 보기에 전쟁이 끝난 뒤 고속성장 시기에 접어든 일본은 과거의 전통적인 가치보다는 소시민적 행복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으나, 미시마는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었으며 또 하가쿠레 같은 옛 사무라이의 규범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던 일본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미시마가 꿈꾸던 일본은 천황이 군대의 통수권을 지니고 공화제와 비슷한 정치제도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천황이 절대권력을 가진 것과 진정한 공화제, 언론의 자유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미시마의 세계관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미시마는 '무사도'의 관점에서 군국주의를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사도란 '개개인이 대등한 관계에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대일로 대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그의 관점에서 파시즘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비판을 했다.

해외에서는 와패니즈의 영향으로 꽤 호감도가 높다. 유명 유튜버인 PewDiePie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미시마로 뽑았을 만큼 미시마가 이상향으로 그리던 죽음의 대한 철학과 신념을 행동으로 보인 결의에 존경을 표하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다만 미시마의 극우 민족주의적 성격 때문에 이런 반응에 대해 일본에서도 거부반응이 있는 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미시마 유키오를 언급하는 것을 두고 불쾌함을 비추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 답변을 한적 있다.
질문자: 일본의 전통적인 소설 양식인 사소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 오에 겐자부로 씨의 소설은 비교적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읽은 게 없군요. 작가로서는 아베 코보를 좋아합니다. 사소설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큼 싫어합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분야의 소설이에요. 일본의 문단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는 아베 고보,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 인데, 그들 가운데 나는 아베가 최고이고 미시마가 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2명의 미시마


미시마 유키오의 인생은 2가지로 양분할 수 있다. 50년대 중반부터 웨이트 트레이닝 같은 헬스로 근육질이 된 30대부터의 미시마와, 헬스를 하기 전 병약했던 젊은 히라오카 키미타케가 그것이다. 

20대 중반의 등단 초기에는 그야말로 작품 집필에 미친듯이 몰입하였고, 히트소설이 연달아 많이 나오자 TV와 신문에 자주 나오는 등 20대 후반~30대 초반부터는 문학계 원톱급 인기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인의 왜소한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어 운동을 결심한 것이다. 픽픽 쓰러지던 병약 체질을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관리로 몸을 단련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들었다. 

병약한 몸으로 금각사를 쓸 때만 해도 정치적인 성향은커녕 인간의 내면 자체에만 관심을 두었고, 권력이나 집단은 인간의 섬세한 가치를 단순화, 사물화하여 훼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이랬던 사람이, 극도로 자기 신념에 몰입하고 정치적으로 변해버렸으니...미시마의 표변이 어찌나 심했던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대체 어떤 게 미시마의 진짜 모습인지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건강해진 뒤에는 헬스 운동의 효과를 찬양했는데, 1958년에는 검도에 입문하여 일본 무도에 크게 심취했고, 이후 거합도와 공수도에도 발을 담갔다. 최종적으로는 검도 5단, 거합도 2단, 공수도 1단. 미시마가 자살할 때 쓴 세키노 마고로쿠라고 불리는 칼은 미시마와 검도로 친분을 쌓았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자 후나사카 히로시에게서 받은 것으로, 미시마 사건 3년 뒤인 1973년 후나사카는 『세키노 마고로쿠-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関ノ孫六―三島由紀夫、その死の秘密)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순박했던 시절 미시마 유키오와의 추억을 회고하며 미시마가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일화
어릴 적에는 할머니 나츠코의 극심한 과보호 속에서 자랐다. 겨우 생후 49일 정도 되었을 때 부모의 방이 아닌 조모의 방으로 옮겨져 자랐으며, 미시마의 어머니는 모유 수유를 할 때도 시어머니가 정해놓은 시간 동안만 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총이나 자동차 같은 장난감은 일절 금지였으며, 밖에서 또래와 노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지도 아래 귀족적인 문화를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중등과 진학으로 부모와 함께 이사하기 전까지 이런 할머니의 영향 아래서 지냈다.
천성적으로 겁이 많았던 미시마는 (주변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 중에 공습경보가 울리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방공호로 도망쳤다고 한다. 또한 정치 관료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도 훗날과 달리 이 시절엔 정치에 관심이 없어 11살 때 2.26 사건으로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을 친구로부터 전해듣고 '총리대신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게 공포증'이 있었던 미시마는 게 요리만 봐도 정색을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정작 게 통조림은 맛있게 잘 먹었다. 게의 사진만 안 보이면 OK라고.
그는 토론에는 언제나 일본도를 지참했는데, 토론 중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창백한 안색을 하고 상대의 두상에 칼날을 휘두르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극단적인 마마보이였던 그는 젊은 시절 2명의 여성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인 가슴 아픈 경험이 있는데, 그 이유가 가관인 게, 그토록 농밀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차마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미시마의 친구가 그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미시마의 어머니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 "어머니, 뭐? 어디? 어디?"라고 호들갑을 떨며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주물렀다고. 
젊은 시절, 쇼다 미치코라는 여성과 맞선을 본 적이 있었다. 미치코는 당시 가톨릭계 명문 여자대학교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인 미모의 여대생이었고, 그녀의 친가인 쇼다 가문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가,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이었다. 그러나 유키오와 미치코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유키오는 나중에 일본화가 스기야마 야스시(衫山寧)의 장녀 스기야마 요코(衫山瑤子, 1937 ~ 1995)와 결혼했다. 
둥근 얼굴의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이 이상형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결혼식 사진을 보면 아내 얼굴이 상당히 둥그렇고 통통한 체형의 전통 아내상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낳았는데, 자녀들을 상당히 아꼈다고 한다. 사건 당일 목적지로 가던 중 가쿠슈인 초등과 건물을 지나갈 때 "잠시 멈춰달라"고 부탁한 다음 건물을 바라보면서 "지금 딸이 저기에서 공부하고 있겠지"라고 말했다는 일화나, 장남 이이치로가 초등학생 때 수업참관 후 교장과의 대화에서 돌연 "아들이 귀엽다"고 3번이나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자녀들은 성인이 된 이후 아버지의 작품을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어머니 사후 아버지의 저작권을 두 사람이 담당하고 있다.
사춘기 시절에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고 감탄한 일이 있었다. 자세한 것은 최승희 문서 참조.
NHK 방송에 나가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현대문명 기준으로 보면 일본은 12살짜리 소년들의 나라다."라고 비웃은 것에 대해 "나는 일본이 너무 늙어서 지팡이를 써야 할 줄 알았는데 12살짜리라고 지적하니 너무 기뻤다. 오히려 일본을 칭찬한 게 아니냐? 그 말대로라면 2차 대전은 12살짜리 애들끼리 전쟁놀이를 한 것일 뿐이라서 당시 군부 지도자들을 전범으로 처벌한 것은 형사법상 부당하다!"라고 코멘트했다.
당시 일본의 대중문화에도 많은 관심이 두고 있던 미시마는, 내일의 죠의 열렬한 애독자이기도 했다. 하루는 영화 촬영 때문에 잡지를 구매하지 못해 주간 소년 매거진의 본사에 방문, 무료로 잡지를 받고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막상 내일의 죠가 후세에 전공투의 상징이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데, 실제로 작중 초기 주인공 야부키 죠가 잠시 보여준 정치적 성향은 매우 진보적이고 분배주의적이다. 물론 내용상 그냥 배운 것 없는 소년원 출신 불량배 고아 소년이 제대로 깽판 한 번 치는 김에 질러본 말들이라는 게 작중 설정이지만, 중학생 나이 소년 정도가 말하기에는 현실성 있는 진보 성향의 내용들이다. 또 한 번은 문예춘추에서 가장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에 대해 질문하자 "울트라맨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SF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어 1956년에는 일본 UFO 연구회에 가입, 실제로 아내 요코와 함께 UFO를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첫 SF소설인 <아름다운 별>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77년 우익 단체가 경단련 회장실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였는데, 이들은 미시마 유키오를 존경했기 때문에 아내 히라오카 요코가 가서 설득해서 자수시켰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버지 사카모토 카즈키가 미시마 유키오를 발굴한 편집자였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정치적으로는 정 반대였지만 작가로서는 미시마를 매우 존경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평소 누가 보는 앞에서 극적인 할복 자살을 연기하는 변태적인 성향이 있었으며, 손도 안 댄 채 발기 후 사정하곤 했다. 한때 그와 교제했던 남성은 미시마가 만날 때마다 할복과 사정 행위를 해대느라 질려서 헤어졌다고 한다.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을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일본이 한국 전쟁으로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미와 아키히로와의 관계

미와 아키히로가 애인이라는 설이 퍼져있지만 실제로 연인관계는 아니었고, 서로 친밀하게 교류하던 사이였던 것은 맞다. 미시마 사후 미와 아키히로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우정에 가까운 관계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16살때 바에서 노래하던 미와를 미시마가 불러내면서 만남이 시작되었는데, 미시마가 “별로 귀엽지 않네”라고 하자 “귀엽지 않아도 괜찮아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이 당돌함에 흥미를 느껴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고.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는 일명 미시마 사건으로 극우 소설가로 유명했던 인물인데, 미와 아키히로는 극우를 넘어 정치적인 행보를 보인 적은 없다. 여러 일화를 볼 때, 미시마는 미와의 연인이 아니고 미와와 친분을 나누고 후원을 해주는 후견인 역할이었던듯.

미와와 관련된 일화에는 재밌는 것이 많은데, 미시마가 "마루야마(미와 아키히로의 본명)군. 당신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시마는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영화 《검은 도마뱀》에 출연한 적도 있는데, 출연 동기가 '검은 도마뱀' 역으로 출연한 미와 아키히로와 키스하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더불어 미시마는 육체와 관련된 콤플렉스가 많았기 때문에 미와 아키히로가 이를 놀릴 때마다 화를 냈었는데, 미와와 무도장에서 춤을 추다가 미와가 미시마의 어깨, 팔뚝을 만지며 "어머나, 패드, 패드밖에 없네, 미시마 씨 어디 있나요??"라고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미시마는 버락 소리치며 "파트너 교체다, 나는 가겠다." 하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후 헬스클럽에서 육체미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링크 

1998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미시마 유키오는 작가인 후쿠시마 지로(福島次郞)와 1951년에 처음 만나,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2009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다. # 후쿠시마 지로는 문예지인 문예춘추에 실명 소설 <미시마 유키오―검(劍)과 한홍(寒紅)>를 발표해서, 자신이 미시마와 주고 받은 편지와 동성애에 탐닉했던 일을 고백했다. 이때에 후쿠시마 지로는 미시마가 자신에게 보냈던 연서의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1964년 2월, 미시마가 후쿠시마 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좌익에는 남자의 매력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0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인으로는 드물게 영어 실력이 좋기로도 유명했는데, 그 때문에 외신기자들과 여러 차례 영어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당시 영어공부를 위한 매체가 부족했던 시절인지라, 그는 매일 어학 LP판을 들으며 독학으로 회화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은 인터뷰를 들어보면, 윈스턴 처칠같은 당대의 상류층 영국인과 비교하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20세기 초중반 보수적 용인발음에 가까운 억양을 아시아인임을 감안했을 때 현대 기준으로도 꽤나 훌륭하고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어 인터뷰 영상 하지만, 1958년에 스스로 "저는 영어회화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인간의 가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항상 역설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영어 이외에도 중국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몸을 헬스를 통해 근육질로 만든 후 사진집까지 만들었다. 그것도 대부분 훈도시를 입고 일본도를 들거나 나무에 매달려 화살을 맞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화살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포즈를 취하는 사진은 서양에서 수없이 변주된 성 세바스찬 성화의 오마주다. 그런데 성 세바스찬은 일종의 BDSM 게이 클리셰로 쓰이는지라, 많은 이들이 그가 게이임을 주장한다. 게이바를 실제로 드나들었는데다가 자신이 연인이었다는 일본 중견 소설가의 증언도 있었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이라 여겨지는 가면의 고백에서도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성화를 보고 정신, 육체적인 최초의 사정을 경험한 걸로 묘사된다. 결혼한 것을 들어 양성애자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으나 사회적 압박 등의 이유로 결혼하는 성소수자도 있으므로 그것만으로는 단정하기 힘들다. 가면의 고백이 그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고백한 소설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영박물관에도 일부 사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대 미시마 유키오의 신체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163cm 밖에 안 되는 단신에다가 본격적으로 헬스를 하기 전까지는 깡마르고 병약한 허약체질이었다. 언젠가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 설문조사를 한 적 있었는데, 그 결과가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게다가 운동신경도 몹시 안 좋은 편이라서 아무리 운동을 잘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뻣뻣하고 어색했다고 한다. 늘 건강미를 동경했던 그에겐 이런 사실이 큰 컴플렉스로 작용했다고 한다. 

그는 거합도를 오랫동안 수련했는데, #1은 미시마의 거합도 시범 영상이고 #2는 평범한 거합도 1단의 시범이다. 검술에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도, 미시마가 휘두르는 검의 무게를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며 검으로 베는 동작과 검을 정리하는 동작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절도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수련한 거합도 시범에조차 닭 한마리 잡지 못할 정도로 힘 없고 어설픈 모습이 드러나니 누구나 쉽게 컴플렉스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배우로도 활동해서, 도쿄대 법학부 선배였던 마스무라 야스조가 연출한 《카라카제 야로》에서는 찌질이 야쿠자 역으로 출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소설 《우국》을 영화화 할 때에는 본인이 출연은 물론 직접 연출, 각본, 제작까지 했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 제작사로 유명한 아트 시어터 길드에서 배급됐다. 1969년작. 《히토키리》라는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이시하라 유지로와 함께 출연했다. 

에도가와 란포의 '검은 도마뱀'을 각본화하고, 박제로 출연한다.(1968년)

한동안 일본에서는 언급조차 하면 안 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앞서 쓴 것과 같이 정부 관료, 자위대 간부들과의 관계와 그의 주장 탓에 한동안 자위대내 쿠데타설이 불거질때마다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고 그때마다 일본 정치인들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하지만 2005년경, 즉 그의 탄생 80주년이자 사망 35주기부터 그를 동경하는 극우파들의 테러 가능성이 우려되어 다시 주목받았으나, 결국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그는 다자이 오사무가 살아있을때부터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혐오했는데, 다자이 오사무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우선 그의 외모부터가 마음에 안든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자 신나게 조롱하며 깠다. 그는 다자이를 향해 그의 우울증은 매일 라디오 체조만 해도 낫는 병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정작 자기도 할복. 다자이 사후 그의 제자가 따라 자살했는데 미시마의 사후에는 그의 스승이 자살(추정)했다는 것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 물론 그 의도와 차원이 다르게 할복이었기에 세계적으로 엄청난 뉴스가 되었다. 미시마가 생전에 다자이를 그렇게 깐 이유는 공교롭게도 그의 내면이 다자이의 내면과 비슷해 동족혐오가 들었기에 더 깐 것이라고 둘 사이의 지인들이 분석했다.

특히 그들의 소설 《인간실격》과 《우국》은 각자의 자살의 동기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 자전적인 소설 《인간실격》이 다자이의 자살동기, 즉 스스로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는 데 반해, 《우국》은 미시마의 컴플렉스, 즉 젊은 시절의 병역기피와 동성애성향을 극복하는 (그의 생각에는) 이상적인 죽음, 주인공인 젊은 장교는 사랑하는 아내와 검열삭제한 후 할복자살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해외에서는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고 하던 젊은 문인이 정치적 이유로 할복자살한다는 게 상당한 문화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나중에 폴 슈레이더 감독이 미국 자본과 함께 "미시마 - 그의 인생"이(1985년작)라는 그의 전기 영화도 만들기도 했다. 폴 슈레이더의 최고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로저 이버트, 레너드 말틴이 극찬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주요 외국어로 번역되었고 그의 드라마틱하고 쇼킹한 생애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들은 해외(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등의 유럽국가)에서 꾸준히 읽히며 좋은 평가를 얻어 오고 있다. 

생전에 미국의 SF 및 판타지 소설가인 A. E. 밴보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밴보트가 '전미 과학소설 및 판타지 작가 협회'로부터 <거장 상>을 받을 당시에 후배 SF 작가 리처드 체딕이 지은 헌정시에도 미시마 유키오가 언급되고 있다. 이 시는 황금가지에서 2004년에 출판한 <오늘의 SF 걸작선>에 실려있다.

디시인사이드 독서 마이너 갤러리에서 '갤주'로 추앙받으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존재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알몸 사진만 올리면 곧바로 념글로 직행할 정도.

대체역사소설인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환갑까지 살아 198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철권 시리즈의 미시마 가문의 성은 여기서 따왔으며, 특히 미시마 카즈야는 좀 더 직접적으로 미시마 유키오를 모티브로 했다.

고두익의 "숲속수학" 시리즈에서는 마신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5편에서는 선생님이 미시마의 날을 맞아 축구선수를 꿈꾸는 철수를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나오고, 8편에서는 두통을 겪던 태훈이의 대가리를 쪼개 경주빵을 꺼냈더니 태훈이가 미시마가 되었다. 부활한 미시마는 집단자위권에 기뻐하며 다시 배를 갈랐다. 그 외, 고두익의 작품 중 KATANA(감상주의) 및 중촌 산악회에서도 등장했다.

스페인의 미니어쳐게임인 인피니티에서 유징 제국이 일본을 세계 2차 대전 수준으로 비참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양반의 사상을 받아들인 극우 테러 조직들이 유징 제국에 대항한 테러를 일으켜서였다. 그 결과 유징 제국은 현재의 중국과 다를 게 없거나 더 심한 수준의 경찰 국가로 변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독립은 했으나 유징 제국은 이에 인정을 안 하고 있고, 사회상은 영락없는 중세 잽랜드다.

쓰레기와 안경과 문학소녀(가짜)라는 만화에서도 언급되었는 오리카와가 동성애에 관한 소설을 찾는다면서 모리야가 가면의 고백을 추천해줬다.

2019년 12월 부임한 주한 일본대사 도미타 고지의 장인이다.

거스 밴 샌트 감독이 2000년도에 만든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도입부에 주인공 자말 월러스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자다가 깨는 장면이 나오는데 책상 위에 미시마의 책들이 놓여 있다. 향연이 끝난 후, 파도 소리, 새벽의 사원, 오후의 예향 4권이다.

 

 

 

한국에서의 평가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극우적 사상과 충격적 최후로 인하여 부정적 인식이 매우 강하다.

 

김지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시 '아주까리 신풍-미시마 유키오에 대하여'를 다음과 같이 쓰며 평가절하 하였다.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 벼린 일본도란 말이여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비장하고
처절한 신풍(가미카제)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미쳐버린
네 죽음은 식민지에
주리고 병들고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역사의 죽음 부르는
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
벌거벗은 여군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

 


토지의 저자 박경리는 미시마 유키오를 예를 삼아 얄팍한 로맨티시즘이 한계에 도달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일본적 미학의 얄팍함의 표상이라며 비난한 적 있다. 

현 시점에서도 그는 극우 사상을 설파하고 할복하는 충격적인 최후를 맞은 탓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미치광이 극우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며 작품도 그리 대중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전부 우익사상에 찬동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금각사’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지 않은 행동과 그의 최후가 위반되는 만큼 청년시절의 미시마와 흑화한 내셔널리즘의 중년 미시마는 다른 사람이라는 문학적 분석이 많다. 오히려 찬양받던 청년시절의 그가 쓴 ‘금각사’의 주인공과 반대되는 활동을 한 것이다.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기존의 우익 세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좌익 학생들과 단신으로 토론을 벌이는 등의 기개나 논리의 치밀함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한편 한국의 작가 이문열이 자신이 좋아하는 단편소설들을 몇몇 주제로 묶어 '세계 명작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집을 내놓았었는데, 그 중 죽음을 주제로 한 소설집, '죽음의 미학'에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포함시키기도 했었지만 2020년에 나온 개정판에는 '우국'이 빠졌다 

소설가 신경숙이 '우국'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다. 이 표절논란이 크게 문제가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의 극우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표절(적어도 신경숙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그대로 배껴왔다는 점에 있다. 또한, 문학계는 이 논란에 적절한 비판이나 제재를 가하지 않고 제 식구 감싸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신경숙이 현대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던 위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학계 내부에서 일어난 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문학계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더군다나 한국 문단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 문제에 많은 비판을 가하는데, 자신의 문제는 등한시하며 어찌 사회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

한국어 번역본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신경숙이 표절한 시인 김후란의 역본이다. 시인 특유의 격조 있는 문장이 원문이 가진 힘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탁월한 번역이어서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문제는 이 역본이 80년대 후반에 학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출간된게 마지막으로 이후 재간이 이뤄지지 않아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높다. 어느 사이트, 어느 판매자건 기본 30만원부터 시작한다.

국회도서관에 절판도서 검색 후 제본 신청하면 4만원 조금 안 되는 가격으로 배송받아 읽을 수 있다. 

 

 

작품 목록
미시마는 일문학에서도 손꼽히는 다작 작가로, 45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단편소설 156편, 장편소설 36편, 희곡 및 시나리오 73편 및 기타 에세이와 비평, 대담 등을 400편 이상 남겼다. 그 외에 영화 출연, 작사, 사진집, 강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기에, 이를 전부 적는 것은 불가능하며, 장편소설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부 작품만 기재한다. 

 

 

장편 소설

한국어 번역본 존재 시[한] 이라고 표기


도적
盗賊
1948년
가면의 고백[한]
仮面の告白
1949년
순백의 밤
純白の夜
1950년
사랑의 갈증[한]
愛の渇き
푸른 시절
青の時代
나쓰코의 모험[한]
夏子の冒険
1951년
일본제
につぽん製
1953년
금색[한]
禁色
파도 소리[한]
潮騒
1954년
[74]
사랑의 수도
恋の都
여신
女神
1955년
가라앉는 폭포
沈める滝
행복호 출범
幸福号出帆
금각사[한]
金閣寺
1956년
너무 길었던 봄
永すぎた春
비틀거리는 여인[한]
美徳のよろめき
1957년
교코의 집
鏡子の家
1959년
연회가 끝나고[한]
宴のあと
1960년
아가씨
お嬢さん
짐승들의 유희[한]
獣の戯れ
1961년
아름다운 별
美しい星
1962년
사랑의 질주
愛の疾走
오후의 예항[한]
午後の曳航
1963년
육체의 학교
肉体の学校
비단과 명찰
絹と明察
1964년
음악
音楽
복잡한 그
複雑な彼
1966년
미시마 유키오 레터 교실
三島由紀夫レター教室
1967년
야회복
夜会服
목숨을 팝니다[한]
命売ります
1968년
풍요의 바다 연작
豊饒の海
봄눈[한]
春の雪
1967년
달리는 말[한]
奔馬
1968년
새벽의 절
暁の寺
1970년
천인오쇠
天人五衰
1971년

 

 

단편 소설


신문지(1955)[한]
우국(1961)[한]
황야에서(1967)

 

 

희곡


열대수
로쿠메이칸

 

 

비문학


문화방위론(文化防衛論) : 미시마 유키오의 정치논문들 및 학생들과의 대담 등을 엮었다. 
미시마 유키오 對 도쿄대 전공투 1969~2000 : 미시마 유키오와 도쿄대 전공투와의 대담 및 참석했던 전공투들의 후일담을 엮었다.

부도덕 교육 강좌
근대노우가쿠집
문장독본
소설독본
태양과 철
하가쿠레 입문
행동학 입문
소설가의 휴가

 

 

 

 

 

미시마 사건
三島事件(みしまじけん)



1970년 11월 25일에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헌법 개정과 자위대 궐기를 주장하며 인질극을 벌이다 할복한 사건. 그가 회장으로 있던 조직 다테노카이의 이름을 따서 다테노카이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저명한 문학인이었던 미시마의 명성이나 연설보다는 근현대에서 할복이라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멤버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 1925년 1월 14일 ~ 1970년 11월 25일): 다테노카이의 리더. 45세.
모리타 마사카츠 (森田必勝, 1945년 7월 25일 ~ 1970년 11월 25일): 다테노카이 멤버이자 2대 학생장. 25세.
고가 히로야스 (古賀浩靖, 1947년 8월 15일 ~ ): 다테노카이 멤버. 23세.
고가 마사요시 (小賀正義, 1948년 7월 31일 ~ ): 다테노카이 멤버. 22세.
오가와 마사히로 (小川正洋, 1948년 5월 15일 ~ 2018년 11월 26일): 다테노카이 멤버. 22세.

 

 

사건 전개

 

연설문


이하는 연설 전문. <>속의 글은 그가 떠드는 군중들에게 호통치는 대목이고 [ ]는 자위대원들의 항의다.
"이 상황에서 내가 자위대에 이야기해서 유감스럽다. 그러나 나는 자위대라는 존재를, 자위대를 믿었다. 일본은 경제적 번영에 몰두하여 마침내 정신적 공황에 빠지고, 정치는 모략(謀略)과 기오심(欺傲心)이………. 이것이 일본이다. 자위대만이라도 일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위대라는 존재에 ………." 
《조용히 들어라! 조용히 들어!》

"자위대가 일본의………, 일본의 큰 뿌리(大本)를 고쳐서 나쁠 것은 없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느꼈다. 일본 근본이 왜곡되어 있다. 아무도 이 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 근본이 왜곡되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자위대가 일본 왜곡을 바로 고쳐야 한다. 그래서………."

《조용히 들어라! 조용히 들으라고!》

"그 때문에 나는 자위대를 응원했다."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겠나? 조용히 해라!》

"그래서 말인데, 지난해 10월 21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지난해 10월 21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지난해 10월 21일, 신주쿠에서 반전 데모가 일어났는데 경찰력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그 일을 목격한 날에 나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다고 헌법이 개정되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소위 자민당이라는 것이, 자민당이라는 것이 경찰 권력을 가지고 어떤 데모든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치안 출동은 필요 없어졌다. 치안 출동이 필요 없어졌단 말이다. 치안 출동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은 곧 헌법 개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이해가 되는가?………."

"제군은 이미 지난 해 10월 21일 이후로 헌법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 자위대가 지난 20년간 피와 땀으로 기다린 헌법 개정 기회는 사라졌다. 헌법 개정은 이미 정치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다. 마침내 사라지고 말았다. 왜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는가?"

"나는 지난해 10월 21일부터 1년 동안 자위대가 화내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헌법 개정 기회는 없다! 자위대가 국군이 되는 날은 사라졌다! 건군 본의는 없다! 그것이 가장 개탄스럽다. 자위대에게 건군 본의는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일.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잘 들어라! 잘 들어! 조용히! 조용히 해! 얘기를 들어라! 여기 남자 한 놈이 목숨을 걸고 제군에게 외치고 있다. 알겠는가? 알겠는가?》

"지금 일본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위대가 일어나지 않으면 헌법 개정은 없다. 제군은 영원히 미국 군대가 되고 만다."

"시빌 컨트롤(civil control)……… 시빌 컨트롤에 중독되었다. 시빌 컨트롤이란 새 헌법 아래에서 억압받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 그래서 나는 4년을 기다렸다. 4년을 기다렸단 말이다. 자위대가 일어나는 날을……… 그랬던 자위대의……… 최후의 30분, 최후의 30분을……… 기다리겠다."

"제군은 무사(武士)다. 제군은 무사(武士)다. 무사(武士)가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는가? 왜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을 위해 일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에 순종하는가? 헌법이 존재하는 한, 제군은 영원히 구제받지 못한다."

"지금 헌법은 끝없는 정치적 모략을 통해 제군이 합헌(合憲)인 것처럼 위장했으나, 자위대는 위헌(違憲)이다. 자위대는 위헌(違憲)이다. 너희들도 위헌(違憲)이다. 마침내 자위대가 헌법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나는 제군이 그것을 부정하는 날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제군은 사소한 것에 눈이 어두워 진정 일본을 위해 들고일어날 때를 놓쳐버렸다."

【그럼 왜 우리 총감(總監)님에게 부상을 입힌 건가?】

"저항했기 때문이다. 제군이 일본을 허수아비로 만든 헌법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제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와 함께 들고 일어날 놈은 없는가?"

"…한 놈도 없군. 좋다! 무(武)는 칼이다. 자신의 사명이지………."

【그래도 무사인가! 그래도 무사인가!】

"이제 제군이 헌법 개정을 위해 들고 일어나지 않겠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이것으로 자위대에게 품은 내 꿈은 사라졌다. 여기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겠다."

"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사망


경시청 검사결과에 따르면 계획한 대로 할복 자살을 결심한 유키오는 상의를 벗고 자신의 배에 단도를 찔러넣었다. 원래는 할복하고 배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피로 유서를 쓸 생각이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서 글씨를 쓰는 것은 무리였다고 한다. 그 대신 칼로 배를 가른 뒤 스스로 내장을 꺼냈고, 이 고통을 이기려고 혀를 깨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 할복 자살은 미디어에서 비장하게 묘사하는 것과는 전혀 달라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일단 배를 단도로 찔러넣고 내장을 손상시켜야 하는 과정 자체가 두꺼운 지방층을 관통해야되는 것이라 웬만한 정신력이 있는 사람들도 할복자살은 시도하기 어렵다. 웬만한 일반인들은 조그마한 압정에만 찔려도 아파서 데굴데굴 구른다는 것을 잘 생각해보자. 

그리고 할복한 유키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유키오의 카이샤쿠로 예정된 모리타 마사카쓰는 유키오의 목을 내리치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결국 검도 유단자인 고가 히로야스가 유키오의 목을 내리쳤다. 이후 유키오를 가장 믿고 따르던 충신 모리타도 곧바로 미시마를 따라서 할복을 시도하고 "어서 목을 쳐!" 소리치고 나서 목이 내려쳐 사망했다. 

구글 검색 등 통해 볼 수 있는 유키오의 시신이나 자살 현장 사진을 보면 흑백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처참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당사자인 유키오는 그저 편안한 표정을 짓고 최후를 맞았지만, 할복 현장은 완전히 흥건한 피바다에다 엉망이 된 시신이 뒹구는 바람에 지옥 그 자체였다. 이후 참수된 유키오의 머리와 시신을 봉합한 뒤 장례를 치렀다.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유키오가 할복한 이유를 두고 갖가지 분석이 제기되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야 미시마가 외친 대로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지만 유키오 자신도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유키오는 "내가 나가이 가후(1879 ~ 1959)처럼 늙는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하겠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는 영웅주의에 심취해서 그랬다는 분석도 있다. 어떤 글에 따르면 미시마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50살에 영웅으로 죽었다. 지금의 나이(45세)라면 나도 영웅의 최후 연령에 도달한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일본과 일본인을 향한 애정이 자기애를 초월한 달관적인 경지에 도달해서 죽음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사건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총감실 현장을 방문했다. 유키오와 절친이었던 이시하라 신타로도 현장을 찾긴 했지만 총감실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미시마가 자살할 때 쓴 세키노 마고로쿠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자로 한때 미시마와 검도로 친분을 쌓았던 후나사카 히로시에게서 받은 것으로 미시마 사건 3년 뒤인 1973년 후나사카는 세키노 마고로쿠-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関ノ孫六―三島由紀夫、その死の秘密)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순박했던 미시마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동시에 미시마가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미시마 사건을 계기로 1973년에 자위관 복무선서에 '일본국 헌법 및 법령을 준수하며'라는 문장이 들어갔다. 자위대 내부에서 미시마의 의견 자체에는 공감하는 자위대원들이 상당수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위헌의 여지가 있는 자위대의 입장상 주저하고 있었지만 미시마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 덕분에 자위대가 헌법 준수를 확실히 하게 된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은 왜 미시마를 흠모한 것일까

 

결국, 신경숙의 <전설>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한 것으로 ‘자백’됐다. 하지만, 우리 문학이 가진 식민성과 후진성을 드러냈다는 우려가 시작됐다. 구로공단 여공 출신의 세계적인 소설가 신경숙은 도쿄제대 법학부 출신의 극우주의자를 왜 흠모한 것일까. 과연 신경숙에게, 우리 문학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 <우국>의 실패
사이토 마코토는 세 번째 조선총독으로, 3·1운동 직후인 1919년 부임해 1931년까지 최장기 재임했다. 그로부터 일명 문화통치가 시작됐다. 사이토는 도쿄로 돌아가 1932년 총리대신에 올랐다가 내대신(內大臣)이던 1936년 2월 26일 일본 청년장교들의 습격으로 숨진다. 이를 주도한 세력이 천황·황군으로 상징되는 정신을 지향하던 황도파(皇道派)다. 이들의 공격을 받은 사이토 마코토 등은 통제된 군대를 지향하는 중앙막료 집단인 통제파였다. 이것이 일본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2·26 쿠데타’ 사건이고, 결과는 황도파의 패배였다. 

1961년 발표된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은 이 사건을 그린 소설이다. 우국은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는 참된 마음’이라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그 우국이다. 주인공 다케야마 중위는 2·26 사건이 끝난 뒤,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한 일에 가책을 느끼고 아내 레이코와 함께 자살한다. 젊은 부부가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마지막 섹스와 자살 장면이 소설에 매우 길게 묘사돼 있고, 이것이 소설의 핵심이다. 일본에서 유명해진 것도 천황정신 때문이 아니라 탐미주의적 묘사 때문이라는 평도 있다. 이 소설은 미시마 자신이 감독과 주연을 맡아 1966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1970년 자살한다. 11월 25일 도쿄 이치가야의 자위대 건물에 들어가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자위대의 쿠데타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할복했다. 미시마의 죽음에 대해 세계적인 문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적었다. “미시마가 생각하기에 쇼와 천황은 1945년에 죽어야 했으며, 그래서 신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천황은 (맥아더 앞에서) 인간선언을 하고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목숨을 연장했다. 미시마는 이런 천황을 경멸했다. 전후에 환생한 천황은 가짜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미시마는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과 같다. 세계 최종 전쟁이어야 했던 전쟁 후에도 계속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절대적인 ‘미(의 신)’이기 위해서는 금각사처럼 불타야 한다. 그의 자살은 살아있는 천황에 대한 살해와 같다.” 

미시마 유키오의 본명은 히라오카 키미타케이다. 할아버지부터 3대가 도쿄제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대대로 고급관료의 집안으로 아버지는 농림성의 관리였으며, 미시마 본인도 1947년 고등문과 시험에 합격했다. 일본 최고의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대장성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퇴직하고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한편 그는 대학시절인 1945년 2월 군대 소집명령을 받았으나 군의관이 감기를 폐결핵으로 오진했다. 미시마는 이를 바로잡지 않고 곧바로 도망해 친척집에서 패전을 맞이한다. 이 기억은 미시마의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것이 <금각사>를 쓴 미시마의 진짜 이야기다.

 


2 <외딴방>의 성공
소설가 신경숙이 한국문학의 최정점에 ‘공식적’으로 오른 때가 1997년 가을이다. 이전까지 신경숙은 이른바 모너니즘 계열 평론가들의 지지만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1995년 문학동네에서 발표한 소설 <외딴방>에 대해 리얼리즘의 이론적 수장이랄 수 있는 백낙청 평론가가 인증하면서, 신경숙은 평단의 사실상 만장일치를 받아냈다. <외딴방>은 군사정권 시절(1978~1981) 구로공단의 전기회사에서 일하면서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니는 소설가 지망생 ‘나’에 관한 자전적 소설이다. 백낙청은 1997년 가을호 <창작과 비평>에서 이 작품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염상섭의 <삼대>, 홍명희의 <임꺽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외딴방>의 ‘나’가 탐독했고 필사까지 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물론 그런 부류가 아니지만, 문학에 대한 물음의 집요성이나 현실에 대한 탐구의 깊이에서 <외딴방>과 견줄 차원에 다다랐다고는 보기 어렵다. 다른 한편, 일견 낯익은 사실주의에 안주한 듯도 싶은 <삼대>가 한국문학에서 당대 현실을 처음으로 완숙하게 그려낸 장편답게 두고두고 신선함을 안겨주는 바 있는데, 그렇더라도 독자를 좀 너무 편하게 해주는 것은 아닌지? 또한 <임꺽정>은 결코 구수한 옛이야기식 서술만이 아니고 진지한 기법상의 성찰이 반영된 서사물이지만, 미완인 데다가 창조적 모색의 긴장이 풀어지는 대목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관점에서도 <외딴방>의 소중한 성취를 일단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외딴방>은 1999년부터 한 권으로 바꾼 2판을 내면서 기존의 남진우의 해설 대신 백낙청의 해설을 넣는다. 같은 해 신경숙은 평론가 남진우와 결혼한다. 남진우는 1994년 겨울 창간한 문학동네의 편집위원이었다. 비로소 신경숙은 문학과지성, 문학동네, 창작과비평(이후 창비로 개칭)이라는 3대 문학권력을 종횡하는 드문 존재가 됐다. 1993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풍금이 있던 자리>를 발표해 곧바로 스타가 되고, 1994년 문학동네에서 <외딴방>으로 문단의 총아가 됐으며, 2008년 창비에서 펴낸 <엄마를 부탁해>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3대 문학저널의 만장일치로 추대된 신경숙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릴 매체도 없었고, 사람들의 주목을 얻지도 못했다. 그런 가운데도 신경숙에 대한 과도한 평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따금 이어졌다. 평론가 하정일은 2004년 실천문학 겨울호에서 “신경숙의 소설은 비사회적 개인주의와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두 축으로 삼아 짜여 있다”고 했다. 그는 신경숙이 이름을 얻은 것은 1980년대의 질 낮은 민족문학에 대한 역작용이라고 봤다. “(신경숙에 대한) 과대평가는 1980년대 민족문학에 대한 혐오감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유주의문학이든 민족문학이든 1980년대 민족문학의 도식성과 단순성에 극도로 식상했고, 그것이 90년대식과는 다른 문학에 대한 정도 이상의 환호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3 미시마의 호출, 그리고 신경숙의 답신
2015년 6월 신경숙의 소설 <전설>이 미시마의 <우국>의 표절이라고 세상이 떠들썩하다. <전설>은 1994년 문학과지성의 계간지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실린 단편이다. 이후 199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만든 <오래 전 집을 떠날 때>라는 소설집에 묶였다. 누구가 <전설>을 읽으면서 <우국>과의 표절을 찾아내는 것은 문장을 기억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 분위기에서 유사성을 찾아내고 기억을 더듬어 천황주의에 탐미주의자인 미시마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두 소설을 직접 읽어보면 명확해진다. 가령 <전설>에는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남자들의 대의라는 게 도대체 뭐냔 말이에요. 여자는 벽장 안의 낡은 옷들을 집어던진다. 친구들이 다 떠났다구요. 거짓말이었어요.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고 엄지손가락을 자른 친구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구요. 쓰지 않고 쌓아두었던 그릇들을 집어던진다. 유리 파편이 여자의 흰 팔뚝에 팔뚝에 박힌다. 모기장이 찢어지고 책들이 뒤집어진다. 남자로서의 할 일이란 여자를 위험 속에 남겨두도 집 바깥으로 나가는 일들인가요?’ 무어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일제 식민지 이후 6·25 전쟁이 배경인 이 소설 때문에 미시마를 찾아본 사람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우국>과 <전설>의 문장을 대조해 논쟁을 벌이는 것은, 사소설의 역사와 정신을 일본에서 옮겨온 비루한 한국문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한가하고 아름다운 소동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소설이 팔리지도 않는 나라에서 이렇게 온나라가 들썩이게 소동이 벌어지는 것은 문학적 현상이 아닌 문화적 이벤트라는 것이다. 신경숙이 2013년 ‘힐링캠프’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표절 혐의 제기가 문화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얘기다. 비루한 현실에 비루한 관심이 덮친 셈이다. 

<전설>이 표절작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명인 평론가의 설명이다. “물론 문학적 영향이라는 것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0년대 유행하면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 장정일 소설가 같은 사람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시대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표절은 명백히 특정 부분을 훔치는 행위다. 본인이 모를 수 없다. 어디에서 봐서 영향을 받는 수준이 아니다. 절취하는 것이다. 소설가든 평론가든 자기 글이 아니면 파악이 된다. 메모를 참고했다고 해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그게 직업윤리다. (신경숙은)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신경숙 개인의 윤리문제이다. 허술한 윤리.”  

신경숙 개인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문학의 문제로 넓혀서 보는 의견도 있다. 김영찬 평론가는 신경숙 개인의 의도적인 표절이 확실하다고 전제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광수 시절부터 계속된 한국문학의 정신적인 식민성이 드러난 사건이다. (한국소설의) 정신적인 토대가 근본적으로 취약하다. 사상적 깊이나 독창적 사상이 얕다. 여러 측면에서 외국소설의 스타일이나 아이디어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문단의 제도적인 순환구조도 문제다. 특정 출판사에서 창작하고, 뽑아주고, 출판하고, 평론한다. 자정이 작동하지 못하는 구조다.” 세계 최하위 수준의 독서량을 보이는 척박한 한국 현실에서, 죽을 힘을 다해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신경숙에게만 손가락질을 하기 힘든 이유다. 

참고자료 :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우국(憂國)> 1961, 신경숙 <전설> 1994, 하정일 ‘개인과 가족의 기묘한 동거’ <실천문학> 겨울호 2004, 서은혜 ‘미시마 유키오 다시 읽기’ <일본어문학> 여름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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