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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忠烈王), 원종, 김약선, 순경태후, 장목왕후, 제국대장공주

Jobs9 2021. 5. 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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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제25대(재위:1274~1308) 왕.

 

재위 1274년∼1308년. 이름은 왕거(王昛), 초명은 왕심(王諶)·왕춘(王賰). 원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이다. 비는 원(元) 세조(世祖)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구비(舊妃)는 시안공 왕인(始安公 王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이다.

 

1260년(원종 1) 태자에 책봉되고, 1271년 원나라에 가서 세조에게 혼인 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귀국시에 몽고 풍속인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어 고려인들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1274년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 때 처음으로 치러진 대륙국가와의 왕실 혼인으로,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양국의 우호관계를 배경으로 역대 권신들에 억눌려 오던 왕실의 지위는 회복, 강화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 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 등이 퍼지기도 하였다. 즉위년 10월 일본 정벌이 원 세조의 강요로 실행되어 1차로 여원연합군이 합포(合浦)에서 출정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본토 정벌에는 실패하였다. 1281년에 감행된 2차정벌도 폭풍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원나라는 이후에도 두 번 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벌준비를 강요하여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1293년 왕은 공주와 함께 동정(東征)의 불가함을 직접 호소하고자 원나라로 갔는데, 이듬해 원 세조가 죽음으로써 동정은 끝이 났다.

1290년 원나라를 괴롭히던 내안(乃顔)의 잔여세력인 합단(合丹)이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왕은 원나라에 원군파병과 천도 허가를 요청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 합단은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와 양근(楊根)·원주를 함락하고 충주를 거쳐 연기까지 침입하였다.

이 싸움은 원충갑(元沖甲)·한희유(韓希愈) 등의 활약과 원병의 도움으로 1년 반 만에 끝났다. 이 밖에도 야인(野人)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으나 김방경의 활약으로 물리쳐 국운을 보존하였다.

원나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은 국토 보존에 힘을 기울였다. 1290년에는 최탄(崔坦)이 몽고에 반부(叛附)함으로써 설치된 동녕로(東寧路)를 원 세조에게 직접 요청하여 돌려받고, 여기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을 설치하였다.

또한, 삼별초(三別抄)의 최후근거지로 몽골에 함락되어 다루가치 총관부[達魯花赤總管府]가 설치되었던 탐라를 1294년에 원나라 성종(成宗)에게서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두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은 행정에 더 직접적으로 해악을 미쳤다. 관제(官制)가 지나치게 분수에 넘친다며 고치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275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고쳤다. 육부(六部)도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로 폐합, 변경하였다.

그리고 조(祖)·종(宗) 대신에 왕(王)으로 칭하고 충성을 뜻하는 ‘忠’자를 붙이게 되었다.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다. 게다가 일본 정벌을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어 내정을 간섭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밖에 몽골 직제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직도 있었다. 몽골식 기병이 야간순찰을 도는 순마소(巡馬所),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좇아 원나라에 질자(質子, 禿魯花)로 갔다가 순번제로 숙위(宿衛)의 임무를 맡은 홀치[忽赤, 忽只], 몽고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문관(通文官) 등이 그것이다. 관직은 아니지만 공주를 따라온 겁령구(怯怜口)주 01) 등도 있었다.

여기에 소속된 관원들은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사전(賜田)의 특권을 누리면서 당대 세력가들로 부상하였다. 부역에 시달려 도망친 양민을 모아 농장(農莊)을 경영하면서 조세를 가로채고 주현(州縣)의 부세(賦稅)를 좀먹는 등 양민을 괴롭혔다.

또, 특수임무를 띤 별감(別監)이 자주 주현에 파견됨으로써 지방민의 피해를 가중시켰다. 특히, 왕 자신이 세자나 공주가 말릴 정도로 사냥을 좋아하여 국고를 고갈시켰고, 이로 인해 매를 관리하는 응방의 적폐는 더욱 극심하였다.

1298년 왕의 총애를 믿고 세도를 부리던 궁인 무비(無比)가 그 당류와 함께 세자(뒤의 충선왕)에게 주살되었다. 이에 왕은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으며, 원나라에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駙馬上柱國逸壽王)의 호를 받았다. 이 해 8월에는 충선왕이 왕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무고로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가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부터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였다. 게다가 왕유소(王惟紹)·송린(宋璘) 등이 부자간을 이간질하면서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 왕전(瑞興侯 王琠)에게 개가시켜 왕위를 잇도록 책동하는 음모에 동조하였다. 1305년에는 이를 성사시키려고 원나라로 직접 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의 옹립에 공을 세워 원나라 조정에서 위치가 높아짐에 따라 왕유소 일당은 처형되었고 왕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 후 실권은 세자에게 빼앗기고 1308년에 죽으니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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