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전기 제11대(재위:1046~1083) 왕.
재위 1046∼1083. 이름은 왕휘(王徽), 초명은 서(緖), 자는 촉유(燭幽). 고려 현종(顯宗)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金氏)이다. 형인 제10대 왕 정종(靖宗)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상속의 형태를 취해 1046년(정종 12)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1비(妃)는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의 딸인 인평왕후 김씨(仁平王后 金氏)이다. 인평왕후의 어머니는 현종의 제3비인 원성태후 김씨(元成太后 金氏)로 문종의 어머니인 제4비 원혜태후와는 자매지간이었다. 따라서 문종과 인평왕후는 왕과 왕비의 관계 이전에 이복남매지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근친혼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는 혼인관계이다.
또한 이자연(李子淵)의 딸들을 비(妃)로 맞아들였는데, 인예태후(仁睿太后)·인경현비(仁敬賢妃)·인절현비(仁節賢妃)가 그들이다. 이밖에 인목덕비 김씨(仁穆德妃 金氏)가 있다. 문종의 아들로는 인예태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順宗)주 01)과 선종(宣宗)주 02), 그리고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등이 있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봉해지고,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책봉되었다. 1047년(문종 1) 시중 최충(崔冲)에게 명해 법률가들을 모아 종래의 율령(律令)·서산(書算)주 03)의 분명치 않거나 의문 나는 점을 상세히 점검해 밝히도록 했다. 이 결과 고려의 형법(刑法)이 크게 정비되었다.
1049년(문종 3)에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을 정하였다. 이것은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한 토지를 지급해, 양반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050년(문종 4) 재면법(災免法)을 마련하고,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보충하였다. 재면법은 농사의 피재액(被災額)에 따라서 피재액이 4분 이상일 경우 조(租)를 면하고, 6분일 경우 조·포(布)를 면하고, 7분일 경우 조·포·역(役)을 모두 면제해주는 제도였다. 답험손실법은 현지의 농사상황을 관(官)에서 잘 조사해서 피해의 정도에 따라 조세를 경감·조절해 주는 장치였다.
1062년(문종 16)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을 마련하였다. 이는 죄수를 신문(訊問)할 때 반드시 형관(刑官)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범죄의 조사가 공정히 이루어지도록 한 조치였다. 1063년(문종 17)에는 국자감에 고교법(考校法)을 제정해 학생의 재학연한을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유생(儒生)의 재학기간은 9년, 율생(律生)은 6년으로 제한해서 자질이 부족해 재학 기간 중 학업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켰다.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규정해 결(結)의 면적을 확정하였다. 이에 의하면 양전(量田)의 단위는 보(步)로써 정하되 6촌(寸)을 1분(分), 10분을 1척(尺), 6척을 1보로 하고, 방(方) 33보를 1결, 방 47보를 2결로 하여 이하 10결에 이르기까지 그 면적을 명시하였다.
양전척(量田尺)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고주척(古周尺, 19.8㎝)은 아닌 듯하다. 이것에 의해 산정된 결의 면적은 약 1만 7,000평·6,800평·4,500평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들이 서로 대립되어 있다. 이해에 또 종래 1결에 대해 5승(升)을 징수하던 전세(田稅)가 7승(升) 5홉(合)으로, 10부(負)에 대해서는 7홉 5작(勺)으로 각각 인상되었다.
고려의 전품(田品)에 관해서는 1054년(문종 8)에 3등급의 전품제(田品制)가 마련되었다. 해마다 경작하는 불역지지(不易之地)를 상전(上田), 1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일역지지(一易之地)를 중전(中田), 2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재역지지(再易之地)를 하전(下田)으로 하였다.
전품제가 산전(山田)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혹은 산전·평전(平田)에 고루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가령 전품제가 산전에만 적용되고 평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면, 평전에서는 이미 세역휴경(歲易休耕)이 아닌 상경연작(常耕連作)의 농법이 시행되어 있었다는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 더 깊은 연구를 거쳐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1069년(문종 23)에 면적이 확정된 전결(田結)이 재래와 같은 동적이세(同績異稅)의 면적단위를 말하는 것인지, 혹은 조선시대와 같은 이적동세(異積同稅)의 수세단위를 말하는 것인지의 문제도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이해에 경기(京畿)지역이 확대되었다. 경기지역은 종전의 13현에서 50여 현으로 팽창되었다. 이러한 팽창은 종래 양반전시과의 개편을 앞두고 양반의 전시지(田柴地)를 경기지역의 땅 안에서 확정·지급하기 위한 조처를 전제로 했던 것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는 양반에 지급된 과전(科田)은 경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하도(下道) 전역에 걸쳐 지급되었으리라는 견해가 유력시되어 있다. 따라서 경기지역 확대의 이유와 동기는 앞으로 다른 각도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1076년(문종 30) 양반전시과가 다시 정해져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최종적으로 완비되었다. 또한 녹봉제도가 문무 백관 및 유역인(有役人)들에게도 실시되었다. 이것은 모두 집권적 지배체제의 물질적 토대가 정비되어 감을 의미한다. 1077년(문종 31)에는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되었다. 향리(鄕吏)의 자제를 서울에 인질로 보내어 출신 지방의 계문(啓聞)주 04)에 대비한 것인데, 이 제도 역시 집권적 지배체제의 강화·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종대에는 남반직(南班職)주 05)의 최고위가 종래의 4품위(品位)에서 7품위로 떨어져 격하되었다. 이것은 문무 양반에 비해 남반이 천시된 결과이며 양반관료의 신분적 우월성이 정착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대외관계는 1050년·1052년·1064년·1068년·1073년에 각각 동여진(東女眞)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여진과의 관계는 대체로 평온해 여진이 토산을 바쳐 내부(內附)할 정도였다. 훗날에 보이는 여진과의 갈등은 당시에는 예측되지 않았었다.
재위 37년 동안 문물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흔히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한다. 불교·유교를 비롯해서 미술·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이것은 신라 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나라 문화를 수용, 창조적인 고려 문화를 형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가 다시 정비되고 관제가 개편되었으며, 백관의 서열과 녹과(祿科)주 06)가 제정되는 등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 정치·경제제도가 완비되었다. 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송제(宋制)를 모방·수용한 흔적도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고려의 실정에 맞게끔 수정·실시되었다. 실제로 하부구조인 사회·경제의 상태가 송나라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전시과제도와 같은 고려 독자의 토지법이 여러 번 개편되어 실시되었던 것이다.
지방통치체제도 성종(成宗) 때 처음 외관(外官)이 설치된 이래, 현종(顯宗)을 거쳐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양계(兩界)에 방어사(防禦使)·진사(進士)·진장(鎭將)의 수가 늘어났고, 남쪽의 여러 도에서는 지주부군사(知州府郡事)·현령(縣令)이 증설되어 수령의 관료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 정비는 역시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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