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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레구의 이슬람 정벌, 일한국의 건국과 몽골제국의 분열

Jobs9 2021. 5. 2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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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 정벌

 

훌레구의 이슬람 정벌군 출정

 

AD 1251년 차가타이 가문과 우구데이 가문을 누르고 대칸의 지위에 오른 몽케 칸은 이후 몽골제국을 다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대상은 정벌이 진행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의 서아시아 지역이었다. 이슬람 지역에 대해서는 이미 AD 1243년 장군 바이주에 의해 룸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점령한 바 있었다. 몽케 칸의 명령에 의해 몽골전체에서 싸울 수 있는 남자 중 10분의 1을 모집하여 총 13만명이라는 몽골제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정벌군이 조직되었고, 지휘관으로는 바이주로부터 군대를 인계받아 투르키스탄 지방을 공략하고 있었던 훌라구가 임명되었다. 훌라구는 칭기즈칸의 4남인 톨루이의 아들로 몽케 칸과는 형제지간이었다. 다른 형제로는 몽케 칸 사후에 대칸의 지위를 두고 다투게 되는 쿠빌라이, 아리크부카가 있다.

 

훌라구의 일차 목표는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이슬람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아이유브 왕조가 차지하고 있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몽케 칸은 훌라구에게 항복하는 적에게는 관대히 대해주는 대신에 저항하는 적은 모두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슬람 아사신파 괴멸

 

훌라구는 AD 1256년 1월 2일에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를 빠르게 점령하고 이슬람의 아사신파와 만나게 되었다. 아사신파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원류로 하는 이스마일파의 한 일파로 적대자를 암살하는 것을 교리로 삼는 과격한 종파였다. 특히 아사신파는 하시시라는 마약을 복용하고 환각상태에서 유력인사를 암살한다는 점과 대체로 암살현장에서 도주하지 않고 태연히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영어에서 암살자를 뜻하는 '어쌔신(assassin)'은 아사신파라는 이름이 십자군에 의해 유럽에 전파하며 유래한 것이었다. 아사신파의 악명은 이슬람 세계에 자자하여 셀주크 왕조의 명재상이었던 니잠 알 물크를 암살하기도 하였고, 십자군 시대 이슬람의 영웅이자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한 살라흐 앗 딘도 여러 번 아사신파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들을 위협하였던 아사신파였지만 훌라구가 이끈 몽골군의 앞도적인 군세 앞에는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AD 1256년 11월 11일에 아사신파의 수장 알딘 쿠르샤가 메이문디즈에서 항복하였고 같은 해 12월 20일에는 아사신의 알라무트 요새의 수비병력마저 항복하면서 아사신파는 괴멸하였다. 일부 아사신파가 시리아로 도망쳤으나 훗날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 1세에 의해 완전히 소멸당하고 만다. 이후로도 일부가 생존하여 비록 오늘날까지도 시리아와 이란, 중앙아시아에서 아사신파가 일부 발견되고는 있지만 소수 이단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바그다드 함락

 

아사신파를 무너뜨린 훌라구의 몽골군은 AD 1257년 11월에 바그다드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당시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인 알 무스타심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비록 이슬람 세계에 대한 칼리프의 세속적인 지배력은 사라진 채 상징적인 종교적 권위만 유지되고 있었지만 바그다드는 여전히 이슬람 세계의 중심도시였다. 몽케 칸은 훌라구에게 만일 이슬람 칼리프가 몽골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면 바그다드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한 상태였기에 훌라구는 우선 알 무스타심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알 무스타심은 만일 자신을 공격한다면 알라의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는 무모한 호기를 보이며 항전의사를 밝혔다.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몽골군에는 이전에 점령된 그루지아 및 아르메니아에서 징병된 부대와 안티오키아 공국의 지원군을 비롯하여 다수의 그리스도교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부터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동방에 거대하고 풍요로운 그리스도교 왕국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다스리고 있는 사제왕 요한(프레스터 존)이 언젠가는 성지 탈환의 원군으로 올 것이라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몽골군이 등장하여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자 몽골군과 사제왕 요한을 동일시하는 착각도 있었다. 이후 몽골군도 역시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이교도임이 밝혀졌지만 훌라구의 경우에는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인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훌라구의 몽골군을 사제왕 요한의 현신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훌라구 군대는 다수의 그리스도교인의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바그다드의 칼리프 알 무사심은 비록 몽골군에게 항전을 선언하였지만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를 모으거나 바그다드 성벽을 보수하는 행위 중 어느 하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공격하기 위해 부대를 둘로 나누자 먼저 선공을 취하고자 나갔다가 몽골군이 티그리스 강둑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많은 손실만 입고 말았다. 훌라구는 공성전을 위해 중국출신인 구오 칸에게 명령하여 공성장비를 마련한 상태였는데 바그다드에 대한 공성전은 1월 29일에 시작되어 약 1주일만에 끝났다. 그 사이 전황이 불리해진 칼리프가 항복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몽골군은 바그다드 함락후 저항하는 도시에 대한 응징의 의미로 매우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바그다드 시민들은 대학살을 당했으며 수많은 도서 보유로 유명한 바그다드 도서관이 파괴되고 자료들이 강에 버려졌다. 훌레구는 왕족에 대해서는 피흘리지 않도록 죽이는 몽골족 전통에 따라 칼리프 알 무스타심을 융단에 둘둘 말아 그 위로 말이 짓밟고 지나가게 하여 죽였다. 이로 인하여 아바스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고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칼리프가 존재하지 않는 공백의 시기가 발생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교도만은 훌라구의 아내의 요청에 의해 무사히 바그다드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시리아 정벌

 

바그다드를 점령한 훌라구의 다음 목표는 시리아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의 앗 살리흐 나짐 앗 딘이 AD 1249년에 사망한 이후 이집트는 맘루크 왕조의 차지가 되었으나 시리아는 여전히 아이유브 왕족인 안 나시르 유수프가 통치하고 있었다. 처음에 안 나시르 유수프는 몽골군을 지원하여 잃어버린 이집트를 되찾을 계획을 세웠으나 몽골군이 주종관계를 맺도록 요구하자 이번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집트에서 원군이 출발하였으나 몽골군이 먼저 알레포에 접근해왔기 때문에 안 나시르 유수프는 가족들을 이집트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다마스쿠스로 도망쳤다. 알레포는 AD 1259년 12월에 공격을 받기 시작하여 7일 만에 함락당했고 몽골군에게 저항한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 파괴행위가 일어났다.

 

알레포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안 나시르 유수프는 다마스쿠스마저 버리고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달아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마스쿠스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였다. 팔레스타인으로 달아난 안 나시르 유수프도 결국 따르던 부하들이 모두 떠나버린 채 하인 중 하나에게 납치되어 훌레구 앞으로 보내졌다. 이후 안 나시르 유수프는 같이 붙잡힌 아들과 동생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가 AD 1260년 몽골군이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이집트 군에게 대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훌레구에게 처형당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에 의해 세워진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멸망당했고 이제 몽골군에 점령당하지 않은 이슬람 세력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만이 남게 되었다.

 

 

훌라구의 철수와 아인잘루트 전투 대패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훌라구는 곧바로 이집트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투르크메니스탄 지방에서 발생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야만 했다. 훌라구는 자신의 친우이자 다마스쿠스 점령에 공을 세운 장군 키부카에게 1만명의 몽골기병을 남기고 떠났고 키부카는 남은 팔레스타인 지방을 공략하여 나블루스와 가자, 아즐룬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남쪽의 아스칼론과 예수살렘까지 함락시켜 이집트의 국경지대까지 진출하였다. 이어 훌라구는 시리아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몽케 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면서 몽골제국으로 회군해야 했다. 훌라구 자신도 차기 대칸 후보의 자격이 있었으므로 차기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 시리아에는 키부카의 지휘하에 약 2만 병력만을 남게 되었다.

 

몽골군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시리아로 공격을 나왔다. 이동로 중간에 있던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세력인 아크레의 십자군들은 비록 여전히 맘루크 왕조를 적대하였지만 몽골군의 위협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에 이집트 군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묵인해주었다. AD 1260년 9월 3일에 양군은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지방에서 격돌하였고, 아인잘루트 전투라고 불린 이 전투에서 몽골군이 괴멸당하고 키부카도 전사하였다. 몽골군으로서는 유래가 없는 대패였다.

 

AD 1262년 몽골제국의 새로운 대칸으로 훌라구가 지지한 쿠빌라이가 최종적으로 선출되자 훌라구는 서아시아로 돌아왔다. 훌라구는 즉각 아인잘루트 전투의 복수를 위해 이집트 공략에 나서고자 하였으나 다시한번 방해를 받고 말았다. 킵차크 한국의 새로운 칸이 된 베르케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같은 몽골족이면서도 훌라구의 바그다드 약탈을 비난하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공공연히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훌라구는 베르케와의 내전으로 인해 이집트에 대한 공격에 병력을 집중하지 못했고 지배영토가 티그리스 강 동쪽만으로 한정되고 말았다.

 

 

 

일한국의 건국과 몽골제국의 분열

 

일한국의 건국


몽케 칸 사후에 차기 대칸 자리를 두고 벌어진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의 분쟁은 훌라구가 지지한 쿠빌라이의 최종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훌라구는 서아시아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가 쿠빌라이의 종주권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고 말았다. 차가타이 한국까지 카이두에게 동조하면서 훌라구는 몽골제국과의 연결이 차단되자 결국 훌라구도 자신이 정복한 이란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하여 일한국을 세웠다. 일한국이라는 이름은 훌라구와 그 후계자들이 사용한 '일한(혹은 일칸)'이라는 칭호에서 유래했는데, 일한은 투르크어로 '왕'이란 뜻으로 본래 몽골제국 대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낮추어 부르던 말이었다. 훌라구는 몽골기병 유지를 위해 아제르바이잔 초원이 가까운 타브리즈를 제국의 중심으로 정했다. 이후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와 티벳불교를 보호하면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는 계속해서 시리아를 두고 다퉜다. 또한 맘루크 왕조에 대한 공격을 방해하는 킵차크 한국과도 계속해서 분쟁을 벌였다.

 

일한국은 AD 1234년에 훌라구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 아바카(재위 AD 1234년 ~ AD 1282년) 치세까지 안정되었으나 아바카가 죽은 이후에는 일한국 칸의 지위를 둘러싼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며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승리한 마흐무드 가잔(AD 1295년 ~ AD 1304년)이 일한국의 제7대 칸으로 즉위하면서 일한국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가잔 마흐무드 통치시기에 일한국은 세제와 군제, 토지제도가 개혁되었고 중앙집권정치가 확립되었다. 무엇보다 가잔은 수니파 이슬람교도로서 왕위를 얻는 과정에서 이슬람 군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란 지방에서 수니파 이슬람교가 다시 융성하게 되어 이슬람 문화의 부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잔 칸은 이슬람 개종 이후에도 여전히 같은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시리아를 두고 전쟁을 벌였고 비록 일시적으로 시리아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곧 맘루크 왕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일한국의 성세는 가잔 사후 그 아우인 울자이투칸(재위 AD 1304년 ~ AD 1316년)과 그 아들인 아부사이드(재위 AD 1305년 ~ AD 1335년)까지 이어졌지만 아부사이드가 후계자없이 사망하면서 일한국은 몽골계열과 투르크계열, 이란계열의 다양한 부족에 의해 분열되고 말았다. 이중에서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잘라이르왕조와 아베르바이잔을 중심으로 한 추판왕조가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AD 1357년에 추판왕조가 잘라이르왕조에게 멸망당했고, 잘라이리왕조도 투르키스탄 서쪽에서 발흥한 흑양조(카라 코윤루)에게 바그다드를 빼앗긴채 이라크 남부로 쫓겨갔다. 이후 이란 지방은 티무르 제국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했지만 티무르 사후 흑양조(카라 코윤루)와 백양조(아크 코윤루)에게 차례로 점령당한 끝에 AD 1501년에 이르러서야 이란 전역을 장악한 토착왕조인 사파위 왕조가 등장하게 된다.

 

 

몽골제국의 분열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은 칭기즈칸의 네 명의 아들에 의해 영지가 분할되었으나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있는 대칸의 종주권만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케칸이 죽자 몽케 칸의 아우인 둘째 동생인 쿠빌라이와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 사이에서 대칸의 지위를 둘러싼 대립과 그 이후 발생한 우구데이 가문 카이두의 반란으로 인해 몽골제국은 급격하게 분열되었다.

 

AD 1259년 몽케 칸이 사망할 당시 쿠빌라이는 남송 공략을 위한 군대를 이끌고 있었고 아리크부카는 수도에서 몽케 칸의 대리자격으로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쿠빌라이가 먼저 행동을 개시하여 AD 1260년에 자신의 지지자들만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해 몽골제국의 새로운 지배자로 추대받았고 이에 맞서 아리크부카도 별도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이 대칸이 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동시에 자신이 대칸임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몽골제국 전체도 둘로 나뉘어졌다. 우선 킵차크 한국과 오고타이 한국, 차가타이한국이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고, 훌라구의 일한국은 쿠빌라이의 편에 섰다. 결국 4년간의 내전 끝에 쿠빌라이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고 이후 쿠빌라이는 제국의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여 기존의 몽골족 대칸이 아니라 중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구데이의 손자이자 몽케 칸 즉위 당시 대대적인 숙청으로 몰락한 우구데이 가문의 후예로서 오고타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카이두의 반란을 일어났다. 처음에 카이두는 킵차크 한국과 연합하여 차가타이 한국을 지속적으로 공략한 끝에 속국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쿠빌라이에 대한 수차례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카이두와 쿠빌라이 사이의 내전은 두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카이두의 뒤를 이은 아들 차바르가 차가타이 한국의 두와 칸에게 영토를 빼앗긴 채 AD 1310년에 원나라로 망명하면서 쿠빌라이 측의 최종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약 40년에 걸친 몽골제국 간의 내전으로 인하여 몽골제국은 완전히 분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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