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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타이 한국, 티무르 제국

Jobs9 2021. 5. 2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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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타이 한국의 성립과 분열

차카타이 한국의 성립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은 AD 13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곳을 차남인 차가타이의 영지로 부여하였다. 차가타이의 이름을 따서 차가타이 한국으로 불리게 되는 이 영지는 일리강에서 시르다리아강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차가타이 자신은 일리 계곡의 알말리크의 막사에서 기거하면서 도시생활을 멀리하고 유목민의 풍습을 지켰다.

 

AD 1242년 차가타이는 임종이 다가오자 이미 호라즘 샤왕조와의 전투 중에 전사했던 아들 모에투겐을 대신하여 모에투겐의 4남이었던 카라 훌레구를 차기 칸으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차가타이 한국은 독립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몽골제국 대칸에 의해 칸의 지위가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카라 훌레구는 몽골제국의 제3대 대칸 구유크에 의해 칸의 자리를 숙부인 예수 몽케에게 내어주었다가 툴루이의 아들인 몽케가 제4대 대칸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칸으로 복위할 수 있었다. 카라 훌레구의 아들인 무바라크 샤도 몽케 칸 사후 벌어진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의 제위쟁탈전 도중에 아리크부카의 강요로 칸의 지위를 알루구에게 넘겨줘야만 했으나 알루구가 오히려 아리크부카를 적대하고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으면서 쿠빌라이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어느정도 독립성을 회복했다.

 

쿠빌라이의 대칸 즉위 이후 이번에는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의 반란이 일어나자 알루구는 오고타이 한국과도 적대하면서 쿠빌라이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AD 1266년에 알루구가 병사한 이후 차가타이의 장남인 무투겐의 손자 바라크가 정변을 일으켜 차가타이 한국을 지배하게 되자 그 틈을 노린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와 킵차크 한국의 베르케 연합공격으로 면서 차가타이 한국은 영토를 많이 상실하였다. 더욱이 카이두의 부추김으로 시작된 일한국 공격이 카이두의 배신으로 대실패로 끝나면서 세력만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결국 바르크가 AD 1271년에 사망하자 차가타이 한국은 오고타이 한국의 속국 신세로 전락하였다.

 

AD 1274년에 차가타이 한국의 제10대 칸이 된 두와 역시 처음의 30년간은 카이두에게 복종하며 지위를 보전해야 했다. 그러나 AD 1301년에 카이두가 죽자 쿠빌라이와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나갔고, 오고타이 한국을 공격하여 원나라와 그 영토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몽골제국의 가장 큰 가문 중의 하나였던 우구데이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키게 된다. 이후 두와는 남쪽의 인도 북부지방을 침공하여 델리를 약탈하면서 차가타이 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차가타이 한국의 황금시대는 두와의 아들인 에센부카와 케베크 대까지 이어지며 원나라와 일한국에 맞설 만큼의 강국이 되었지만 AD 1326년에 케베크가 죽은 이후에는 급격하게 분열되며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차가타이 한국의 분열

 

본래 차가타이 한국은 서부의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도시를 이루며 이슬람교를 믿고 사는 투르크 계열과 동부의 모굴리스탄에서 유목민을 전통을 지키며 주로 샤머니즘이나 불교를 숭상하는 몽골 계열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인종적, 지형적, 종교적 상이함은 차가타이 한국에게 항상 분열로 이어질 불안요소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케베크 사후 권력쟁탈전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타르마시린이 자신의 지지세력인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위해 스스로 이슬람교로 개종을 선언한 것을 계기로 대분열이 일어났다. 타르마시린이 칭기즈칸이 정한 율법인 야삭을 어겼다고 생각한 동부의 모굴리스탄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차가타이 한국은 동서로 나뉘게 되었다.

 

동(東)차가타이 한국을 장악한 투글루크가 AD 1360년 서(西)차가타이 한국를 침공하여 차가타이 한국을 일시적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AD 1363년 투글루스가 사망하자 다시 분열되고 말았고 이후 동차가타이 한국은 모굴리스탄 한국으로도 불리며 독자적인 정권을 이어나갔지만 서(西)차가타이 한국은 여러 투르크 부족들로 분열되어 서로 다투던 끝에 티무르에 의해 새로운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티무르의 침공을 받아 모굴리스탄 한국도 잠시 티무르 제국의 속국으로 지내야 했으나 AD 15세기 경에 티무르 제국이 분열되면서 독립하였고 AD 18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티무르 제국의 성립

티무르는 투르크화한 몽골부족인 바를라스 출신이었다. 바를라스 부족은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중앙아시아에 정착하였는데 티무르 가문은 한때 5대 선조 카라찰 노얀이 차가타이를 모시던 명문가였으나 티무르 대에 이르러서는 가문이 몰락하여 겨우 소수의 하인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티무르란 이름은 몽골어로 '쇠'라는 뜻으로 몽골인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

 

젊은 시절 티무르는 혼란한 서차가타이 한국 현실 속에서 가축을 약탈하는 도덕질로 시간을 허비하였지만 군사적인 재능으로 인해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AD 1360년에 모굴리스탄 한국의 투그르 티무르가 침공해 오자 티무르는 발빠르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부족의 옛 영지인 케시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곧바로 투그르 티무르를 배신하고 발흐의 영주인 미르 후세인과 연합하여 AD 1363년에 모굴리스탄 한국 세력을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쫓아내고 카불 샤를 명목상 군주로 내세웠다. 티무르는 이 기간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다리 한쪽을 다쳐 평생 절름발이로 살게 되었는데 이후 티무르의 별칭이 되는 티무리랑(Timur-i lang)이 바로 '절름발이 티무르'란 뜻이었고 서양에서 티무르를 지칭하는 '타멜랑(Tamerlane)'이라는 이름은 티무리랑이 와전되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티무르는 미르 후세인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며 잠시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결국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강성한 미르 후세인 세력 앞에 그에게 복종하는 척 하던 티무르는 기회를 틈타 미르 후세인의 근거지인 발흐를 기습공격하여 미르 후세인과 카불 샤를 죽이고 우구데이 가문의 슈르가드미슈 란을 새로운 군주로 내세우며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때 티무르는 차가타이 한국의 칸이었던 카잔의 딸로 칭기즈칸의 일족이 되는 미르 후세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스스로 칭기즈칸과 차가타이 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비록 명목상 차가티아 칸이 AD 1402년까지 존속하였고 티무르의 지위는 장군인 아미르에 불과하였지만 티무르가 트란스옥시아나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기에 이 때(AD 1370년)를 티무르 제국이 성립한 해로 보고 있다. 그리고 티무르는 여러 번 정벌 끝에 AD 1397년에 되어서야 모굴리스탄 한국을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차가타이 한국을 재통합한다.

 


이란 정복

 

트란스옥시아나를 완전히 장악한 티무르는 동쪽의 모굴리스탄 한국을 계속 공격하는 한편 칭기즈칸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평생동안 지속되게 될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티무르 제국의 서쪽에 위치한 이란 지방은 일한국의 마지막 칸이었던 아부사이드가 AD 1335년에 후계자없이 죽은 이후로 몽골계열의 추판왕조(타브리즈와 아제르바이잔 지배)와 잘라이르 왕조(바그다그와 이란 서부지역 지배), 수니파 이슬람 계열의 무파라즈 왕조(야즈드와 이란 동부지역 지배)와 인주 왕조(시라즈와 이란 남부지역 지배)로 분열된 채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후 잘라이르 왕조가 추판왕조를 멸망시키고 무파라즈 왕조가 인주 왕조를 병합하면서 일한국의 옛 영토는 잘라이르 왕조와 무자파르 왕조로 나뉘어졌다. 티무르는 AD 1385년에 헤라트와 호라산으로 진출하면서 기회를 엿본 후에 AD 1386년부터 무자파르 왕조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무자파르 왕조는 이란 중부에 위치한 야즈드의 유력가였던 무바라즈 알딘에 의해 AD 1335년에 세워진 나라로 AD 1357년에는 시라즈와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던 인주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 동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AD 1358년 무바라즈 알딘은 잔인한 성격으로 민심을 잃은 채 아들 샤 슈자의 반란으로 죽은 상태였고 샤 슈자 또한 형제 샤 마흐무트와 그의 아들 샤 야흐야의 반란으로 고생해야 했다. 아직 권력기반이 불안하였던 샤 슈자는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인 자인 알아비딘에게 동쪽의 신흥세력 티무르에게 충성서약을 하게 하였으나 자인 알아비딘은 즉위하자마자 티무르에 대한 충성서약을 철회하였다. 이에 티무르는 군대를 일으켜 무자파르 왕조로 진격하였고 자인 알아비딘은 도망치다가 샤 아흐야의 형제인 샤 만수르에게 붙잡혀 티무르에게 넘겨졌다. 티무르는 자인 알아비딘을 비롯한 각각 케르만, 야즈드, 시라즈를 지배하던 무자파르의 왕족, 이마드 앗딘, 샤 아흐야, 샤 만수르에게서 충성서약을 받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이후 무자파르 왕조 사이에 내전 끝에 샤 만수르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자 AD 1393년에 재차 침입하여 샤 만수르 군대를 격파하고 샤 만수르를 처형하였다. 이에 놀란 다른 무자파르 왕족들이 모두 다시 티무르에게 충성서약을 하였으나 이번에는 티무르가 이들 모두를 처형하고 이란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티무르의 다음 정벌 대상은 잘라이르 왕조였다. 잘라이르 왕조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산 부즈루그에 의해 AD 1336년에 세워진 나라로 제2대 군주인 우웨이스 1세 때에 타브리즈와 아제르바이잔을 장악하였던 추판왕조의 영토를 흡수하고 이란 지방까지 진출하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우웨이스 1세 사후 제3대 군주가 된 하산이 살해당하고 그 뒤를 이은 동생 후사인 1세도 또다른 동생 아흐마드의 반란으로 처형당하는 등 당시 잘라이르 왕조는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이 틈을 탄 티무르는 AD 1384년에 솔타니예를 점령하였고 AD 1386년에는 타브리즈를 약탈했으며 AD 1393년에는 바그다드를 차지했다. 그 중에서 바그다드는 특이하게도 티무르가 점령한 다른 도시와 달리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 

 

 

킵차크한국 토크타미시와의 대결

 

티무르는 이란지방을 정벌하는 중 킵차크 한국의 속국이었던 백장한국으로부터 토크타미시가 망명해왔다. 칭기즈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던 티무르는 토크타미시를 지원하여 백장한국의 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고 그 덕분에 토크타미시는 백장한국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AD 1382년에는 청장한국까지 병합하여 킵차크 한국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후 토크타미시는 러시아 원정까지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러시아 제후들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였고 아제르바이잔과 이란까지 진출하여 타브리즈를 약탈하였으며 코카서스에서 20만명에 달하는 노예를 끌고 올 정도로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티무르가 AD 1386년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까지 진출하자 양측이 충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토크타미시가 선공을 가해서 AD 1388년에 티무르의 근거지인 트란스옥시아나까지 침공하였으나 폭설 때문에 회군해야만 했다. AD 1391년부터 티무르의 반격이 시작되어 킵차크 한국의 수도인 사라이를 파괴하였고 토크타미시를 폐위시켰으며 테무르 쿠트루크를 꼭두각시 칸으로 내세운 채 부하인 에디구를 아미르로 임명하였다. 우크라이나 초원으로 도망친 토크타미시는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대공이 도움으로 AD 1395년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코카서스를 침략하였으나 티무르군이 오히려 보르스클라 강 전투(혹은 쿠르 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티무르는 러시아까지 진군하여 약 1년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다가 이란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비록 이후에도 킵차크 한국의 명목상 칸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영토는 카잔한국과 크림한국, 아스트라 한국으로 분리되어 나갔으며 킵차크 한국 자체도 티무르가 아미르로 임명한 에디구에게 실권을 모두 빼앗긴 채 티무르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킵차크 한국의 멸망은 토크타미시가 튀멘에서 살해당한 AD 1405년으로 본다.

 

이후 티무르는 러시아 원정 기간 동안 이란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회군하였고 대대적인 정벌에 나서 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도시들을 파괴했다. 이 때 살해된 주민들로 이란 지방은 도시마다 해골이 산을 이룰 정도로 유래가 없는 대학살이었다고 한다.

 

 

북인도 정벌

 

AD 1398년 티무르는 이미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원정을 계획하여 인도 방면으로 나섰다. 당시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의 구르왕조(AD 1187년 ~ AD 1215년)에게 북인도를 점령당한 이후 투르크계 이슬람교도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AD 1206년 최초의 이슬람 인도왕조인 노예왕조(AD 1206년 ~ AD 1290년)가 성립되었다. 이후 북인도 지방은 델리를 중심으로 한 할지왕조(AD 1290년 ~ AD 1320년)와 투글루크 왕조(AD 1320년 ~ AD 1414년)가 차례로 이어지며 이슬람교 술탄왕조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티무르의 인도정벌 명분은 투글루크 왕조의 힌두교도에 대한 통치가 너무 관대하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AD 1398년 9월 24일에 인더스강을 건넌 티무르군은 델리로 진군하면서 도중에 있는 많은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거침없이 진군한 티무르군은 같은 해 12월에 델리에 도착하였고, 이미 내부권력다툼으로 쇠약해져버린 투글루크 왕조의 술탄 메흐무드가 티무르군을 당해내지 못하면서 결국 티무르군이 델리에 입성했다. 델리 역시 다른 티무르군의 정복도시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행위를 당하고 폐허가 되어 버렸다. 이때 티무르는 10만명이나 되는 포로를 모조리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듬해 티무르는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사마르칸트로 돌아왔는데, 이때 90마리나 되는 코끼리를 데리고 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티무르가 델리의 웅장한 모스크에 감명을 받고 착수한 사마르칸트 모스크 건설을 위해 코끼리들이 이 때 돌을 나르는 데 이용되었다고도 한다.

  

 

오스만 제국 바예지드 1세와의 대결, 앙카라 전투

 

티무르의 마지막 상대는 소아시아에서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오스만 제국이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를 넘어 발칸반도까지 차지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는 한편 소아시아 장악에 나서면서 이미 티무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소아시아 지방의 많은 투르크 제후들에게 공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티무르와 마찰을 빚었졌지만 처음에 티무르는 먼 거리에 있는 소아시아 지방에 대하여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무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사신을 보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바예지드 1세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바예지드 1세는 오히려 티무르를 공격하겠다는 답변을 보냈고 이에 분노한 티무르가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격하면서 양측은 격돌하게 되었다.


AD 1400년 티무르는 소아시아로 가는 도중에 후방의 안정을 위해 시리아의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는 함락당했고 이에 놀란 이집트 맘루크 왕조는 충성을 서약했다. AD 1401년에 유일하게 학살을 피했던 바그다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티무르는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번에는 무자비한 대학살이 일어났다. 시리아와 바그다드에 대한 정리르 마무리한 티무르는 그루지야까지 이동한 후에 그 곳에서 겨울을 보내며 군대를 정비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 사이에도 티무르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많은 서신이 왕래하였지만 서로 비난하고 모욕을 주기에 바빠 사태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AD 1402년 7월 20일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앙카라 북방 초원에서 양 군은 격돌하게 되었다. 티무르는 인도에서 데려온 코끼리를 포함하여 20만 대군을 이끌고 있었고 이에 맞선 바예지트 1세는 약 2만명의 세르비아 중기병을 중심으로 총 12만 병력을 데리고 왔다. 전투는 아침부터 밤까지 진행될 정도로 치열하였으나 티무르가 주변의 쿠북강의 물길을 막아 오스만 제국군의 식수를 차단하면서 전황이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목마름에 지친 좌익의 투르크 계열 용병들이 티무르군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이었다. 위기에 처한 바예지드 1세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낙마하여 포로로 붙잡히면서 티무르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앙카라 전투의 승리 이후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부르사를 약탈하고 당시 로도스 기사단(옛 성 요한 기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스미르나를 포위공격하여 2주일 만에 함락했다. 스미르나에 대해서도 티무르의 다른 점령도시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학살과 약탈이 이어졌고 몇몇 기사들만이 간신히 도망쳤다. 스미르나 함락으로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에도 티무르의 악명이 알려지게 되었고 에게해 주변의 많은 도시들이 티무르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의 섭정 요한 7세도 어쩔 수 없이 티무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만 했다.

 

한편 포로가 되었던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가 이듬해인 AD 1403년 3월에 뇌졸증으로 사망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이후 왕자들끼리 내부권력투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국력이 매우 약해졌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발칸 제국의 완전한 점령을 한동안 미룰 수밖에 없게 된다.

 

 

최후의 원정과 죽음

 

앙카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술탄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부터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받은 티무르는 AD 1404년에 사마르칸트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티무르는 칭기즈칸과 그 자손들이 세운 몽골제국 중 서남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AD 1404년말에는 마지막으로 동쪽의 중국을 정벌하고자 군대를 다시 일으켰다. 이는 당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명나라에게 밀려 북쪽 초원으로 쫓겨나간 상태였기 때문으로 몽골 제국의 영광을 다시 세우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은 티무르였던 만큼 명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티무르는 총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였지만 고령으로 인해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을 얻으면서 원정은 중단되고 말았다. 티무르는 이듬해인 AD 1405년 2월 오트랄에서 병사했고 티무르의 시체는 썩지 않는 향유가 발라진 채 사마르칸트로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호화로운 무덤에 매장되었다.

 

비록 티무르는 살아생전에 중앙아시아와 이란, 시리아, 코카서스, 북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제국을 통치할 체제를 마련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D 1405년에 티무르가 죽은 뒤에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티무르 4남인 샤 로흐에 의해 수도가 잠시 헤리트로 옮겨지고 명나라 및 오스만 제국과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등 38년 치세동안 잠시 문화적 황금기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샤 로흐 사후에는 결국 티무르 자손끼리 벌어진 권력투쟁과 외부 반란으로 제국이 급격히 분열되어갔다.

티무르 군대의 특징

티무르는 칭기즈칸을 동경하여 몽골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칭기즈칸과 달리 항복하는 적까지도 살육하는 잔인함을 보여줬고 이슬람교도로서 지하드(성전)를 종종 전쟁의 명분으로 삼는 이율배반적인 면도 많았다. 하지만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서 제국을 세운 이후 평생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유능한 장수였는데, 이는 티무르가 기본적으로 몽골군의 전통을 계승하여 몽골군의 전술에 매우 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칭기즈칸 시대와 달리 티무르가 상대한 적들은 같은 유목민이 많았으므로 몽골군의 전술에 능했던 것만으로는 티무르의 계속된 승리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 보다는 오히려 티무르가 항상 전장의 선두에 위치하고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함으로써 병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더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첩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적의 내부분열의 틈을 잘 노렸다는 점과 외교술도 뛰어나 여러 명의 적에게 동시에 둘러싸이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는 점도 또 다른 성공요인으로 손꼽을 수 있다.


티무르 군대의 또 다른 특징은 점령한 도시에서 철저한 살육과 약탈을 벌임으로써 자신을 상대하는 적에겐 공포심을 조장하고 부하들에게는 정복욕구를 분출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티무르의 점령도시에 대한 대학살과 약탈, 파괴행위는 너무나 유명하였는데 AD 1387년 이스파한 점령당시에는 주민 7만명을 몰살시켜 성밖에 해골로 탑을 쌓았다고 하고, AD 1401년 바그다드 파괴 당시에도 약 9만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대학살은 시리아의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인도의 델리에서도 예외없이 일어났으며 일설에는 평생 티무르가 죽인 사람 수가 1,700만명이나 된다고도 한다. 일부에서는 티무르가 이러한 살육행위를 통해 앞으로 상대해야 할 많은 적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한편 부하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만족시켜 절대적인 충성심을 이끌어 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티무르는 칭기즈칸과 달리 전통적인 유목민의 전쟁방식대로 점령지에 대한 통치에는 별다른 관심이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약탈과 파괴, 살육에만 몰두하였기에 끊임없는 점령지의 반란과 이에 대한 진압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도 티무르가 제국과 군대를 유지하고자 의도적으로 끊임없는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에 부합되기도 한다.

 

티무르 사후의 제국의 축소와 분열

 

티무르의 뒤를 이은 샤 로흐의 아들이자 사마르칸트의 태수였던 울라그 베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티무르 제국의 새로운 술탄이 되면서 사마르칸트와 헤라트를 지배하였으나 호라산과 이란에서는 바부르와 술탄 무하마드가 각각 독립세력을 구축하여 울라그 베그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AD 1449년 울라그 베그가 장자인 압둘 라티프의 반란으로 살해당하자 바부르가 헤라트를 점령하였고 AD 1450년에는 술탄 무하마드와 바부르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바부르가 무하마드를 처형하고 이란 지방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배신한 투르크멘 부족연맹 흑양조(카라 코윤루)의 공격으로 바부르는 이란 지방을 모두 빼앗겼고 이후 이란 지방은 다시는 티무르 제국 영토로 편입되지 못하게 된다.

 

이제 티무르 제국은 헤라트의 바부르와 사마르칸트의 압둘 라티프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나, AD 1451년 티무르의 증손자에 해당하는 아부사이드가 우즈베크족의 지원을 받아 압둘 라티프에게서 사마르칸트를 빼앗고 여세를 몰아 바부르 사후 흑양조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헤라트마저 점령하면서 분열되었던 티무르 제국이 재통합되었다. 그러나 아부사이드가 AD 1469년 흑양조를 대신하여 새롭게 떠오른 투르크멘 부족연맹 백양조(아크 코윤루)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히고 결국 처형당하면서 제국은 다시 분열되고 만다.

 

분열된 티무르 제국은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에서 각각 내분을 일으키며 국력을 소모하였고 그 틈을 탄 우즈베크족의 수장 무하마드 샤이바니에게 AD 1507년 사마르칸트와 AD 1507년에 헤라트를 차례로 빼앗기면서 멸망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티무르가 중앙아시아 트란스옥시아나를 중심으로 세운 제국은 건국된 지 불과 약 140년만에 멸망하였고 이후 트란스옥시아나는 우즈베크족의 차지가 된다. 

 

한편 티무르의 5대 직계 자손으로 중앙아시아 시르강 상류의 소국인 페르가나를 지배하고 있던 자히르 웃 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우즈베크족에게서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페르가나마저 잃게되자 아프가니스탄으로 도망쳐 카불을 점령하였다. 이후 바부르는 카불을 기반으로 북인도를 침입하여 AD 1526년 델리를 차지하였고 마침내 북인도 통일을 이루면서 장차 인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는 무굴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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