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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마르 샤흐트, 히틀러 2차 세계대전 비용 해결, 전쟁 비용, 메포(Mefo)

Jobs 9 2024. 3. 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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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2차 세계대전 비용 해결, 얄마르 샤흐트


현금의 '지급보증서'인 '어음'은 '신용경제의 역사적 산물'이다. 대금을 발행자가 직접 지불하는 '약속어음'과 제3자가 지급하는 '환어음'으로 진화해 왔다. 이자는 없고, 만기는 있고, 타인에게 넘길 때 배서(背書)를 해야 한다는 점 등에서 어음은 수표나 채권, 화폐와 다르다. 또 만기 전에 현금으로 바꾸려면 '할인'을 해야 한다는 점도 어음이 갖는 특성 중 하나다.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 1933년 3월 그는 중앙은행 총재가 됐다. 히틀러가 수상이 된 뒤 두 달 지난 후였다. 5개월 뒤에는 경제부 장관까지 꿰찼다. 그야말로 독일 경제에 관한 한 그가 '대통령'이었다.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 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데 대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미션을 하나 부여받았다. 실업을 이겨내고 재무장을 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나라 몰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샤흐트였다. 그는 이미 한 차례 '샤흐트 매직'을 보여 준 적이 있다. 1924년 '땅본위제 화폐' 렌텐마르크로 독일 경제를 짓누르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잠재웠던 것이다. 이제 또 한 차례 '샤흐트 매직'을 보여줄 때가 왔다. 그의 마술봉이 가리켰던 것은, 이번에는, 화폐가 아니었다. 어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술봉으로 '어음'을 한 차례 '탁' 쳤다. 그러자 어음은 황금이 됐다. 그것도 다른 나라들은 볼 수 없었던 '투명 황금'이었다. 

그는 도대체 '어음'을 어떻게 처리했던 것일까? 샤흐트의 '어음 매직'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환어음(Bill of Exchange)'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환어음은 '무역업무'를 보다 간단하고 분명하게 처리하려는 과정에서 발명된 고안물이다. 이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하지만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원거리무역이 발달한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당시 금융업을 하던 유대인이 발명했다는 것이다.
 
어음인데 이자를 준다고?

논리는 이렇다. 나는 물건을 팔고 싶다. 마침 해외에서 내 물건을 사겠다는 이가 나섰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얼굴을 마주 보며 물물교환을 할 수도 없는 상대였다. 선뜻 물건부터 내 줄 수는 없었다. 돈을 먼저 받으면 좋겠지만 구매인이 물건을 받기도 전에 선불로 돈을 내줄 리도 없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였다. '환어음'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보자.   

➀ 먼 나라에서 서로 물건을 '팔려는 사람(매도인)'과 '사려는 사람(매수인)' 사이에서는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다. 자칫 물건을 주고 돈을 못 받거나 돈은 주고 물건을 못 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럼 낭패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역 거래상들은 서로에게 신뢰를 주고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는 방법 또는 체계를 개발해 냈다. 

➁ 우선 움직여야 할 주체는 '매수인'이다. 그는 자신의 주거래 은행으로부터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는 내용의 증서를 받는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용장(L/C, Letter of Credit)'에 해당되는 '신용증서'다. 이 증서에는 당연히 "매도인의 활동 지역 내 특정 은행(지정은행)에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➂ 물건을 팔려는 '매도인'은 이 '신용장'을 근거로 환어음을 발행한다. 환어음에는 매도인(환어음 발행인)과 매수인(최종 대금 지급인), 신용장 발급 은행(개설은행), 매도인에 대한 대금지급은행(지정은행) 등 거래 주체는 물론 지급 금액과 어음 만기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점에서 '매수인'이 '어음 발행인' 겸 '대금 지급인'이 되는 약속 어음의 형태와 다르다. 

➃ 그럼에도 환어음 역시 '어음'이어서 어음의 특성을 갖는다. 만기가 있다는 점에서는 수표나 현금과 다르고 만기가 짧고 이자가 없다는 점에서 채권과 다르다.  

이처럼 '환어음'의 특성은 복잡하다. 물론 운영하기에 따라서는 지정은행과 개설은행이 같을 수도 있어 좀 더 단순한 형태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원거리 무역에 주로 이용되는 탓에 '약속어음'에 비해 다소 복잡한 것은 피할 수 없다. 특히 발행인과 지급인의 관계가 약속어음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혼돈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환어음에 대한 특성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페이퍼컴퍼니 '메포(Mefo)'를 설립한 4개 중공업 기업.
자, 이제 우리는 '환어음'의 특성을 살펴봤고 정리가 됐다고 본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샤흐트의 어음 매직'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가 보자. 그는 원거리 무역이 아닌 자국 내 상거래에서 환어음을 발행한다. 

(Metallurgische forschungsgesellschaft mit beschränkter Haftung)'를 설립하게 한다. 약칭 '메포(Mefo)'로 통용되는 이 유한회사는 지멘스, 크루프, 라인메탈, 구테호프눙스휘테 등 4개 철강ㆍ중공업 기업이 25만 라이히스마르크를 출자해 만들었다.  
페이퍼컴퍼니 '메포(Mefo)'를 설립한 4개 중공업 기업들이 발행한 메포어음.



➁ '메포'는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로 요즘 말로 치면 '유령회사(shell company)'였다. 하는 일이라고는 환어음의 취급이 전부였다. a)방위산업체나 건설기업이 어음의 발행자(drawer)가 되어 환어음인 '메포어음'을 발행하면, b)메포는, '형식상', 어음을 최종 인수(accept)하고 대금을 지급하는 지급인(drawee)의 역할을 담당했다. '어음'에 해당되는 독일어 단어는 '벡셀(Wechsel)'이다. 유한회사 '메포'에서 취급하는 '어음'이 '메 포어음' 또는 '메포벡셀(Mefo-Wechsel)로 불리는 이유다.

➂ 메포는 어음을 두 가지 용도로 관리했다. 하나는 물품을 구입하는 용도인 '진성어음'으로, 또 하나는 자금을 융통하는 용도인 '융통어음'으로 썼다. 즉, 메포는어음 발행 기업을 통해 한편으로는 무기 등을 구입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찰을 마련했던 것이다. 무기와 현찰은 당연히 히틀러의 손에 들어갔다. 어음 발행 기업을 통해 한편으로는 무기 등을 구입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찰을 마련했던 것이다. 무기와 현찰은 당연히 히틀러의 손에 들어갔다. 
 
➃ 그럼 돈은 최종적으로 누가 지급했을까? 바로 이 대목이 '샤흐트의 매직'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메포는 독일의 많은 시중은행을 지급은행으로 정했다. 메포어음의 발행자 또는 발행자로부터 인수받은 어음 소지자(bearer)는 독일 내 정해진 민간은행에 가서 어음을 현찰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만기 전이라면 할인을 했을 테고 만기 뒤라면 할인 없이 전액을 받았을 것이다. 

➄ 그렇다면 왜 민간은행은 고작 페이퍼뿐인 유령회사 메포가 지급자 역할을 하는 '메포어음'을 받고 그 소지자에게 돈을 내줬을까? 이 대목이 핵심이다. 형식적으로는 유령회사가 지급을 책임지게 돼 있는 환어음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이를 중앙은행이 보증했고 실제로 어음을 받은 민간은행들은 중앙은행을 통해 재할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➅ 어음은 만기가 있다는 점에서 수표와 다르고 만기가 짧고 이자가 없다는 점에서는 채권과 다르다. '메포어음'은 '어음'이다. 만기가 있고 그 기간 또한 짧다. 이런 특성은 어음을 보증하고 대금을 지급하는 중앙은행에 곤란한 문제를 일으킨다. 변제 대상 어음이 빨리 돌어와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어음 발행액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부담은 더욱 커진다. 

➆ 그래서 샤흐트는 이 대목에서 또 한 번의 '매직'을 부린다. 만기를 늘리고 대신 이자를 주겠다는 얘기였다. 할인율은 4.5%, 이자율은 4%로 책정됐다. 당신 같으면 어음을 받자마자 4~5%를 손해보고 은행에 어음을 넘기겠는가, 아니면 몇 개월 더 갖고 있다가 이자 4%를 챙기겠는가? 답은 뻔했다. 이로써 메포어음에 대한 1년 이상의 장기 보유자가 늘게 됐고 중앙은행은 그만큼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샤흐트의 어음 매직'은 이런 구조로 짜였다. 이 '매직'은 샤흐트의 첫 번째 매직인 '렌텐마르크 매직'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외견상 다르다. '어음 매직'은 마법의 소재가 '어음'이요, '렌텐마르크 매직'은 '화폐'다. 그러나 핵심은 같다. '중앙은행=국가'가 이를 보증하고 책임진다는 것이다. 국가는 '힘'이 있다. '힘'은 '권력'이요, 권력은 또한 '합법적 폭력'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 '힘' '권력' '합법적 폭력'을 믿고 또 의지한다. '돈'에 대한 '신뢰'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트코인에 대한 필자의 시각이 부정적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얄마르 샤흐트는 정반대 성격의 경제위기를 모두 해결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대공황)을 진정시켰다. 
‘정책 실탄(Policy Bullets)’이 바닥나고 있다.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들이 쓸 정책 수단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위기 상황은 여전하다. ‘양적 완화(QE)의 아버지’인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가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적한 ‘대응 능력 상실’이다. 그는 “능력 상실이 바로 진짜 위기”라며 “일본이 잃어버린 10년, 아니 20년을 겪은 이유”라고 말했다.   

 ‘닥터 둠’인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정책 실탄의 고갈 때문에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내년에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유럽·중국 경제가 동시에 위기에 빠지는 험악한 상황을 말한다. 

 정책 담당자들이 한계상황에 놓여 있다. 마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요즘 각국 정책 담당자들이 먼지 쌓인 서고를 뒤지고 있다”고도 했다. 역사에서 정책 대안을 찾아볼 요량이다. 

 그 바람에 역사 속 인물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통화 이론·정책의 개척자인 월터 배지헛(1826~77) 전 이코노미스트지 편집장, 대공황 직전 숨진 벤저민 스트롱(1872~1928) 전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 1920~40년대 영국은행(BOE)을 쥐락펴락한 몬테규 노먼(1872~1950년) 전 총재 등이 그렇다. 


 새삼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 여성 경제학자인 조앤 로빈슨은 “존 케인스가 대공황의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기도 전에 히틀러는 대공황을 치유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히틀러가 매우 빠르게 대공황을 해결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런 히틀러의 경제·통화 정책 사령탑이 바로 샤흐트였다. 

 지금까지 샤흐트는 망각의 그늘에 철저히 유폐돼 있었다. 『히틀러의 경제』를 쓴 댄 실버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앵글로색슨 전문가들이 히틀러와 그의 충복들이 개발해 실시한 대공황 대책을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외면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위기는 메시아를 갈급하게 한다고 했다. 요즘 글로벌 경제 상황이 망각의 그늘에 유폐된 샤흐트를 되살려내고 있다. 

 샤흐트는 33~38년 라이히스방크 총재와 경제장관을 맡아 독일 경제를 소생시켰다. 그는 34%에 달하던 실업률을 5%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산업생산은 60% 정도 늘렸다. 국민총생산(GNP)은 40% 증가시켰다.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그 바람에 그가 2차대전 직후 전범으로 지목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됐다. 무죄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의 기억에 그가 전범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샤흐트가 만든 대공황 대책의 핵심은 네오플란(Neoplan:신계획)이었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New Deal)을 떠올리게 하는 용어다. 하지만 내용은 완전 딴판이다. 뉴딜은 루스벨트가 실시한 모든 대공황 대책을 뭉뚱그려 부르는 말이다. 반면에 네오플란은 정책 패키지가 아니라 비상대권을 뜻한다. 정부가 필요할 경우 상거래·무역·관세·자본시장·외환거래 등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다. 

 샤흐트는 34년 네오플란을 법으로 만들었다. 그는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장관을 겸해 독일인들의 모든 경제활동을 자신의 손으로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됐다. 루스벨트도 비상권한을 갖기는 했지만 샤흐트만큼 폭넓은 권한은 아니었다. 베르너 사우샘프턴대 교수는 “히틀러가 정치의 독재자였다면 샤흐트는 경제의 독재자였다”고 평했다. 

 샤흐트가 포괄적인 비상권한을 확보하려고 한 이면엔 그 나름의 대공황 진단이 있었다. 20년대 후반 독일 금융인과 기업인들이 1차대전을 계기로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떠오른 미국에서 흘러든 값싼 자본을 이용해 머니게임을 벌인 결과 거품과 공황이 일어났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67년 펴낸 회고록인 『돈의 마술(The Magic of Money)』에서 “대공황 이전 독일 금융인과 기업인들은 넘쳐나는 돈 때문에 용감했다”며 “생산적이지 않은 곳에 거액을 베팅하는 일이 잦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 피해는 은행가나 기업인보다 독일 국민에게 더 많이 돌아갔다”고 아쉬워했다. 


 샤흐트는 자금지원 대상을 생산적인 곳과 비생산적인 곳으로 구분했다. 융자 대상 부문이나 기관, 회사 등을 그 자신이 결정했다. 일자리 창출이 이뤄지는 부문이 최우선 자금 지원 대상이었다.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한 산림녹화, 주택개량, 아우토반(고속도로) 건설, 황무지 개간 등이 대표적인 예다. 샤흐트가 ‘관치금융의 원흉’ 또는 ‘금융(신용)의 독재자’로 불리는 이유다. 

 샤흐트는 35년 “비생산적인 곳으로 돈이 흘러드는 것을 막지 않은 루스벨트 뉴딜은 자원낭비가 될 수밖에 없다”며 “독일처럼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자본이 부족한 곳에선 뉴딜은 부적절하다”고 했다. 미국을 방문해 루스벨트와 면담한 직후에 한 말이다. 

 실제 샤흐트는 자금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만성적인 무역적자 문제도 해결했다. 미국과 영국의 비판에도 관세 장벽을 높였다. 이는 수입을 억제하면서 농민과 중소기업을 보호해 실업 증가를 막는 효과도 냈다. 

 동시에 그는 향수 등 사치품 수입을 막기 위해 수입업자들이 달러·파운드 등을 살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외환보유액을 유지하기 위해 남미·아프리카·동유럽 국가들과 협정을 맺어 원자재 수입대금을 마르크화로 결제할 수 있도록 했다.

 샤흐트는 경제학의 통념을 깼다. 위기 순간 경기부양 때문에 국가의 재정 상태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상식을 뒤집었다. 샤흐트 시절 독일 재정은 히틀러의 엄청난 공공 투자에도 균형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샤흐트의 페이퍼 컴퍼니(가공회사) 마술이었다. 그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공 투자를 확대해야 했지만 미국처럼 공격적으로 통화량을 늘릴 수 없었다. 재정 상황도 녹록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라이히스방크 휘하에 가공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 이름으로 증권(Mefo)을 발행하기 위해서다.  

 그 증권은 사실상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독일 정부가 지급을 보증한 채권이었다. 5년간 4% 수익이 보장돼 있었다. 명목상으론 가공회사가 발행해 정부의 빚으론 잡히지 않았다. 샤흐트는 이 증권을 팔아 조달한 자금을 공공 사업에 투입해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최악의 순간 그는 채권을 부도내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을 요량이었다. 

 샤흐트는 비상권한을 이용해 임금과 물가도 통제했다. 그 덕분에 통화량 확대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같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다. 또 주정부 등 지방정부의 재정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시중은행들을 반강제로 참여시켜 워크아웃(채무 구조조정)도 실시했다.

 눈부신 성과에도 샤흐트는 1937년 11월 경제장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39년 1월엔 라이히스방크 총재 자리도 내놓아야 했다. 10년 정도 이어진 히틀러와의 밀월 관계가 끝났던 것이다. 발단은 점령 전쟁이었다. 히틀러는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2차대전을 시작하려고 했다. 샤흐트는 히틀러와의 논쟁에서 “독일이 국가다움을 되찾기 위해 재무장하는 것은 적극 지지하지만 전쟁은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 둘은 정치적 동지가 아니었다. 히틀러는 최고 경제 전문가가 필요했고, 샤흐트는 조국 독일을 강한 리더십으로 이끌 수 있는 인물을 바랐다. 샤흐트는 하나씩 자리를 내놓았다. 경제장관 자리는 괴링에게, 라이히스방크 총재 자리는 골수 나치인 발터 풍크에게 넘어갔다. ‘해결사’의 마지막 모습치곤 너무나 쓸쓸했다. 그가 대공황뿐 아니라 1923년 살인적인 인플레이션도 해결했다. 당시 그는 통화청장으 로 새 마르크화를 발행해 미국 달러화와 페그제(특정 통화와의 고정 환율 시스템)를 실시한 게 주효했다.

 그의 전기를 쓴 존 와이츠는 “샤흐트는 통화청장, 라이히스방크 총재 두 차례, 경제장관을 지내며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대공황)을 모두 해결하고 재정위기를 막은 인물”이라며 “성과를 중심으로 중앙은행가 순위를 매긴다면 1등에 오르기에 충분하다”고 평했다. 히틀러 부역자라는 점만 빼면 요즘 같은 시대에 가장 많은 영감을 줄 경제정책가인 셈이다. 

 
한국·일본에 영향 준 샤흐트의 관치금융
패전 일본 부흥 이끈 이치마다 총재가 수제자 … 한국선 박정희가 이어받아

얄마르 샤흐트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 총재에 임명된 직후인 1924년이었다. 일본의 30대 초반 젊은이가 베를린 라이히스방크를 들어섰다. 이치마다 히사토(1893~1984년)였다. 바로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은행(BOJ) 총재가 돼 전후 부흥을 이끈 인물이다. 청년 이치마다는 2년 동안 라이히스방크에서 연수했다. 그는 샤흐트의 금융통화 정책 철학과 테크닉을 철저히 흡수했다. 심지어 샤흐트를 숭배했다. 이치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샤흐트를 일본에 초대해 최고의 대접을 한 데서 알 수 있다. 
 
 이치마다는 샤흐트의 관치금융에 반했다. 1920년대 일본에서도 만개한 자유방임적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피부로 느낀 탓이었다. 그는 ‘투자 대상이 생산적인지, 아니면 비생산적인지를 시장의 판단에 맡겨두자는 얘기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이나 다름없다’는 샤흐트의 말에 공감했다. 창구지도를 통해 시중은행들을 어떻게 통제하는지도 배웠다.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대공황으로 은행들이 파산하자 미국이 세계 각국에 뿌려놓았던 자금 회수에 나섰다. 독일만큼이나 미국 돈을 많이 썼던 일본도 대혼란에 빠졌다. 이치마다가 나서 자본을 통제하고 수입을 조절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 임시자금조정법을 만들어 샤흐트처럼 자금 융자를 통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엔 이치마다의 관치금융이 더욱 만개했다. 그는 엔화를 찍어내 패전으로 쌓인 은행의 부실채권을 털어내준 대가로 은행들의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이른바 금융단 협약을 맺도록 했다. 은행 간 과당 경쟁을 하지 않고 정부 채권을 우선 매입하도록 한 약속이다. 이치마다는 시중은행이 시장원리에 따라 고수익을 좇아 자금융자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어디에 얼마를 대출할지는 일본은행과 대장성이 결정하도록 했다. 

 이치마다의 정책은 고스란히 한국 박정희 정부에 의해 수입됐다. 금융단 협약과 자금 조정정책 등이 대표적인 예다. 샤흐트의 철학과 정책, 노하우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도 전래된 셈이다. 이런 관치금융 체제는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한 1997년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 거의 동시에 와해됐다. 
 
 
얄마르 샤흐트=독일 제국 형성기인 1877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에서 태어났다. 독일과 덴마크의 접경 지대다. 대학에서 저널리즘과 경제학을 공부한 뒤 신문사에서 일하다 은행으로 전직했다. 청년 시절 그는 개혁 주창자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인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란을 통해서는 민주주의의 무기력함을 절감했다. 결국 보수적인 정당을 창당해 정치활동을 하다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 그는 히틀러의 강압적인 리더십이 위기의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나치 당원이 된 것은 아니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능지수가 높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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