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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신왕조, 아다드 니라리 2세, 사르곤 왕조, 센나케리브 시대

Jobs9 2021. 5. 1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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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신왕조 시대

아다드 니라리 2세 시대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Tiglath-Pileser I, 재위 BC 1115년 ~ BC 1077년)의 재위 시절에 영토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부까지 이르렀던 '아시리아 중왕조(Middle Assyrian Empire)'도 서쪽의 '아람인(Arameans)'과 동쪽의 산악 민족의 압력에 시달리며 쇠퇴하였다. 그러던 중 아슈르 단 2세(Ashur-dan II, 재위 BC 934년 ~ BC 912년)가 즉위한 후 아람인과 산악 민족의 준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번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아슈르 단 2세의 아들 아다드 니라리 2세(Adad-nirari II, 재위 BC 912년 ~ BC 891년)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아시리아 신왕조(Neo-Assyrian Empire)'가 시작되었다. 아다드 니라리 2세는 남쪽에서는 바빌론 제9왕조의 사마스-무담미크(Shamash-mudammiq) 및 그 뒤를 이은 나부-수마-우킨 1세(Nabu-shuma-ukin I)와 연이어 싸워 '바빌로니아(Babylonia)'의 북부 영토를 빼앗았다. 또한 서쪽으로도 정벌하여 아람인이 차지하고 있던 도시인 '카드무(Kadmuh)'와 '니시빈(Nisibin)'을 정복하면서 옛 아시리아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 시대

 

BC 891년 아다드 니라리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투쿨티-닌우르타 2세(Tukulti-Ninurta II, 재위 BC 891년 ~ BC 884년)가 잠시 재위하였다. 그리고 BC 883년 마침내 아다드 니라리 2세의 손자인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 재위 BC 883년 ~ BC 859년)가 즉위하면서 아시리아의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집권 초기 6년 동안 아시리아의 여기저기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고 속주들을 재편하였다. 또한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기존 보병과 전차부대 이외에 역사상 처음으로 기병대를 도입하는 군사 개혁을 이루기도 하였고 오랫동안 아시리아의 수도 역할을 한 '아슈르(Aššur)'를 대신하여 새로운 수도인 '님루드(Nimrud)'를 건설하였다. 님루드는 구약성경에서는 '칼후(Kalhu)'로 알려져 있다.

 

내부 정비를 마친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이후 17년 간 대외 군사 원정에 치중하여 시리아 북부에 건설된 아람인의 '비트 아디니(Bit Adini)'를 정벌하였고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고대 도시인 '카르케미쉬(Carchemish 또는 Karkemish)'까지 진출하였으며 지중해 연안에 있는 페니키아(Phoenicia)의 도시로부터 조공을 받아내었다. 한편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일부러 공포심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 '아르벨라(Arbela)'의 '니슈툰(Nishtun)' 총독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후 살가죽을 벗겨 공개 처형해 버린 것이 있다. 또한 정복한 영토에 대해서도 현지의 왕에 공납을 부과하는 당시의 일반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직접 총독을 파견하는 방식을 사용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반란 주민에 대하여 창에 꿰어 죽이고 살갗을 벗기는 등의 잔혹 행위와 함께 대량 강제 이주를 일삼아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살만에세르 3세 시대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뒤를 이은 살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재위 BC 858년 ~ BC 824년)도 즉위 직후에 아람인의 비트 아디니 왕국을 정복하면서 부왕의 대외 팽창 정책을 이어받았다. 이러한 아시리아의 팽창에 위기를 느낀 '다마스쿠스(Damascus)'의 아람인 왕 하다데제르(Hadadezer), '하마테(Hamath)'의 왕 이르훌레니(Irhuleni), '이스라엘(Israel)'의 왕 아합(Ahab), '아랍인(Ahab)'의 왕 긴디부(Gindibu) 등을 중심으로 11개 왕국이 반(反) 아시리아 동맹을 이루고 반격을 가하면서 잠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BC 853년 '카르가르 전투(Battle of Qarqar)'에서 승리를 거뒸다. 다만 실제로는 카르가르 전투를 무승부로 보기도 한다.

 

이후 살만에세르 3세는 바빌로니아마저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이스라엘, 페니키아의 각 도시국가에 대해서는 비록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공납을 받는 우월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말년인 BC 827년에 왕자 아슈르-다인-아필(Assur-danin-pal)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BC 824년 사망하면서 아시리아 제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살만에세르 3세의 다른 왕자인 샴시-아다드 5세(Shamshi-Adad V, 재위 BC 824년 ~ BC 811년)가 후사를 계승하여 반란 진압을 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을 환관과 장군들이 장악하면서 아시리아는 수십년 간 쇠퇴기에 들어가고 북방 영토의 상당 부분과 시리아를 상실하고 만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시대

 

내정 정비

 

아시리아의 내부 혼란은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BC 744년 ~ BC 727년)가 군사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 오르면서 수습되기 시작한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속주와 복속 국가에서 모집하여 훈련시킨 상비군을 유지하고 철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군제 개혁을 실시하였고 아슈르 등의 대도시의 면세특권을 폐지하는 재정 개혁과 속주를 더욱 세분화하여 지방 총독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중앙집권화를 동시에 추진하였다. 다만 속국에 대해서는 개별 자치권을 인정하면서도 '아시리아인(Assyrians)' 관리를 파견하여 각 지역의 통치자를 감시하도록 하였다.

 

 

대외 정복 활동

 

이렇게 하여 아시리아의 국력이 크게 신장되자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본격적인 대외원정을 시작하였다. 먼저 동쪽의 '만나이인(Mannaeans)'을 토벌하고 아제르바이잔 지방까지 진격하여 '메디아(Media)'의 일부를 장악하였다. 그 다음 목표는 지금의 아르메니아를 차지하고 있던 북방의 '우라르투(Urartu)'가 되었다.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의 국력이 쇠퇴한 사이에 이란 고원과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계 무역을 장악하였고 시리아에 위치한 '히타이트(Hittites)'의 잔존 도시들과도 동맹을 맺으며 아시리아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에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BC 743년 동맹국의 중심 도시인 시리아 북부의 '아르파드(Arpad)'를 공격하였다.

 

아시리아의 아르파드 포위전은 3년이나 이어졌고 BC 740년에 마침내 아르파드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3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포위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시리아가 상비군을 보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르파드가 아시리아의 수중으로 들어가자 시리아와 우라르투 간의 연결이 끊어졌고 시리아 북부의 '다마스쿠스(Damascus)', '티레(Tyre)', '실리시아(Cilicia)' 등이 앞다투어 공물을 바치기 시작했다. 또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 지역으로 가는 길이 열렸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통해서 히타이트가 멸망한 이후 분열되어 있던 히타이트 잔존 도시와 '프리기아(Phrygia)', '킬리키아(Cilicia)', '콤마게네(Commagene)', '타발(Tabal)', '코르듀엔(Corduene)', '카리아(Caria)' 등을 모두 정벌하였다.

 

 

남서쪽의 '북이스라엘 왕국(Northern Kingdom of Israel)'과 '유다 왕국(Kingdom of Judah)'은 아시리아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었지만 BC 734년 북이스라엘 왕국과 다마스쿠스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유다 왕국은 이에 동조하지 않아 이스라엘과 다마스쿠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유다 왕국의 왕인 아하스(Ahaz)가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자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우선 해안 도시부터 점령하여 '이집트(Egypt)'의 지원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를 2년 동안 공격하여 무너뜨리는 한편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친(親) 아시리아 성향인 호세아(Hoshea)의 반란을 지원하여 호세아가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만들었다. 다만 호세아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에게는 공물을 바쳤지만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죽은 이후에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마지막 정벌은 남쪽의 바빌로니아 왕국이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바빌론(Babylo)'을 공격하여 바빌로니아의 왕인 나부-무킨-제리(Nabu-mukin-zeri)를 토벌한 후 스스로 바빌로니아의 왕위에 올라 바빌로니아를 아시리아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이렇게 하여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동쪽의 메디아, 북쪽의 우라르투, 남서쪽의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왕국, 유다 왕국, 남쪽의 바빌로니아 왕국을 모두 정복하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 지방 대부분을 통치하게 되었다. 

 

또한 타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정복 군주로서 뿐만 아니라 유능한 행정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군현 제도를 확립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정복지에 아시리아인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이민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상비군 체제를 유지하고 공성구를 비롯한 많은 병기를 창안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아시리아 신왕조의 사실상의 창시자로 평가받게 된다.

  

 

 

사르곤 왕조의 성립 

 

사르곤 2세 시대

 

정복 군주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뒤를 이은 샬만에세르 5세(Shalmaneser V, 재위 BC 727년 ~ BC 722년)는 재위 기간 동안 반란에 시달려야 했는데 아시리아의 팽창에 위기를 느낀 이집트와 엘람(Elam)의 지원 때문이었다. 더욱이 샬만에세르 5세가 재위 5년 만에 북이스라엘 왕국의 호세아가 일으킨 '사마리아(Samaria)'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갑자기 사망하면서 아시리아 제국의 후계 구도에 문제가 발생했다. 바빌로니아의 왕위는 '칼데아인(Chaldeans)'인 마르둑-아플라-이딘 2세(Marduk-apla-iddina II)가 엘람의 지원을 받아 차지했고 아시리아의 왕위는 사르곤 2세(Sargon II, 재위 BC 722년 ~ BC 705년)가 이어받았다. 

 

사르곤 2세의 가계는 불분명하였는데 티글라트 필라세르 3세의 아들은 커녕 왕족이었는지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았고 그의 비문에서 스스로를 새 인물로 꾸미고 전임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사르곤 2세는 자신의 왕명을 고대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대왕으로부터 차용하였는데 본래 '사르곤(Sargon)'이라는 말은 '정통 왕'이란 뜻의 '샤루 킨(Sharru-kin)'을 히브리어로 번역하여 구약성경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사르곤 2세 이후의 아시리아는 '사르곤 왕조(Sargonid dynasty)'라고 별도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르곤 2세는 즉위 직후에는 통치의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의 마르둑-아플라-이딘 2세와 화평을 맺었다. 그리고 각지의 반란을 토벌하였고 모든 도시의 사원에게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렇게 내분을 수습한 뒤 이반된 속주의 지배권을 재확립하기 위한 대외 원정에 나섰다. 먼저 BC 721년에 팔레스타인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인들을 아시리아 제국의 각지로 강제 이주시킨 대신에 이스라엘에는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정착시켰다.

 

이듬해인 BC 720년에는 엘람의 침입을 맞이하여 '데르 전투(Battle of Der)'에서는 승패를 가르지 못했지만 시리아 지방의 연합 세력을 '카르가르 전투(Battle of Qarqar)'에서 격파하고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시리아 전체를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북방의 우라르투에 대해서는 여러번 원정을 떠났으나 영토만 빼앗았을 뿐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지만 BC 714년 '킴메르인(Cimmerians)'에 의해 우라르투가 쇠약해지자 그 틈을 타고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복하지 못했던 남쪽의 바빌로니아에 대해서도 BC 710년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이듬해 바빌론을 함락시키고 바빌로니아의 왕위마저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사르곤 2세는 아시리아의 내우외환을 모두 제거하고 모든 영토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BC 713년 '니네베(Nineveh)'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새로운 수도인 '두르샤루킨(Dur-Sharrukin; 사르곤의 요새라는 의미)'을 건설하고 거대한 왕궁을 짓도록 하였다. 또한 자신의 칭호로 '위대한 왕(Great King)', '강력한 왕(Mighty King)', '우주의 왕(King of the Universe)', '아시리아의 왕(King of Assyria)', '바빌론의 왕(King of Babylon)',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King of Sumer and Akkad)'을 사용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사르곤 2세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BC 705년 북쪽의 킴메르인이 처들어와 우라르투와 프리기아 일대를 파괴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도중에 사망한 것이다. 사르곤 2세가 사망하자 북쪽의 우라르투가 세력을 회복하였고 남쪽에서는 도망쳤던 마르둑-아플라-이딘 2세는 재기에 성공하여 바빌로니아의 왕위를 되찾게 된다. 

 

 

 

센나케리브 시대

 

대외 원정

 

BC 705년 왕위를 이어받은 사르곤 2세의 아들 센나케리브(Sennacherib, 재위 BC 705년 ~ BC 681년)는 반란 토벌에 힘쓰는 한편 수도를 다시 두르샤루킨에서 옛 도시 니네베로 옮긴 후 새로운 궁전을 건설하고 관개 수로와 운하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그러나 센나케리브가 즉위하자 사르곤 2세 시절에 숨죽이고 있던 바빌로니아와 페니키아 도시들이 각각 엘람과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대대적으로 일으켰기 때문에 이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으로 치세 대부분을 보내야 했다. 

 

우선 센나케리브는 반란에 대한 응징으로 BC 694년에 엘람을 공격하였고 BC 689년에는 바빌론으로 처들어가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최종적으로 반란의 배후인 이집트를 침공하고자 하였으나 원정 도중 퍼진 전염병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Jerusalem)'을 포위하였으나 물러났다. 구약성경에는 '야훼(히브리어: יהוה)'가 천사를 보내주어 아시리아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되어 있으나 아시리아의 기록에는 유다 왕국의 왕인 히즈키야(Hezekiah)가 금과 은을 조공으로 바쳐서 철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계자를 둘러싼 내전

 

센나케리브는 말년에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암투에 휩싸이게 되는데 장자인 아슈르-나딘-슈미(Ashur-nadin-shumi)가 BC 694년 엘람과의 전쟁 도중에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센나케리브는 막내 아들인 에사르하돈(Esarhaddon)을 후계자로 삼았으나 그의 두 형들이 이에 반발하였고 결국 BC 681년 센나케리브를 살해하고 만다. 참고로 구약성경에는 이를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에 대한 징벌로 묘사하고 있다. 센나케리브가 암살당하기 이전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부로 도망쳤던 에사르하돈은 센나케리브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각 거병하면서 내전이 약 6주 간에 걸쳐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에사르하돈이 형들의 군대를 모두 물리치는 데 성공하면서 수도인 니네베로 돌아온 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에사르하돈은 즉위 직후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유랑민을 토벌하였고 부왕 센나케리브가 파괴하였던 바빌론과 신전을 재건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다음으로 에사르하돈은 북방의 유목민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국경에 인접한 킴메르인에 대해서는 BC 679년에 대대적으로 토벌을 감행하는 한편 북방의 새롭게 등장한 유목민인 '스키타이인(Scythians)'에 대해서는 공주를 시집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또한 바빌로니아를 침공한 엘람의 군대를 물리쳤고 BC 673년 우라르투와도 전쟁을 벌였다.

 

 

에사르하돈 시대

 

에사르하돈의 치세 중 최대의 군사 원정인 이집트 침공은 BC 671년 단행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상하 이집트가 서로 분열되는 '제3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의 혼란이 이어졌으나 '누비아(Nubia; 지금의 수단 북부)'의 '쿠쉬(Kush)'의 왕인 피이(Piye)가 BC 744년 '제25왕조(Dynasty XXV)'를 창건하고 이집트 전역을 정복하면서 그 후손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집트의 제25왕조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지원하고 있었고 센나케리브 치세에 일어난 유다 왕국의 반란의 배후에도 이집트가 있었다. 이 때문에 센라케리브가 이집트 침공을 계획하였으나 도중에 퍼진 전염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에사르하돈이 부왕이 못다 이른 이집트 정벌을 이루고자 직접 아시리아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막강한 아시리아 군의 공격에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타하르카가 견디지 못하고 나일강 상류의 누비아 지역으로 도망쳤고 아시리아군은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을 지나 이집트의 옛 수도인 '멤피스(Memphis)'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까지 장악한 에사르하돈은 스스로 '이집트와 쿠쉬의 왕중왕(King of the kings of Egypt and Kush)'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나 에사르하돈이 BC 669년 1월 갑자기 병사하면서 아시리아의 이집트 원정은 미완의 상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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