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제국의 등장
세계 최초의 세계제국 페르시아, 세계 첫 종교 조로아스터교 발상지 이란은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제국이라는 세계 최초로 세계제국을 건설한 국가다. 페르시아제국 이후 몇 개의 왕조를 거치지만 페르시아의 화려했던 고대문명의 명성을 잇기 위해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그대로 이어받았다. BC 6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페르시아란 제국의 명칭은 계속되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번성했을 시기는 BC 5세기 전 후 다리우스 대왕 때다. 지금의 인도 서부와 그리스 동부 일부와 이집트까지 점령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란은 또한 세계 최초의 종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강력한 사상적 기반, 즉 통치이데올로기가 조로아스터교였던 셈이다. 조로아스터교 교리는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으로 요약된다. 페르시아 제국의 가장 번성기 였던 다리우스 대왕 때는 국교였다. |
초기 안샨왕 시대
인도-유럽어족의 '아리안족(Aryans)' 계통인 '페르시아인(Persians)'은 BC 700년 경 전설 상의 부족장인 아케메네스(Achaemenes)가 페르시아인들을 이끌고 '이란(Iran)' 북서부의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에 위치한 '우르미아 호수(Lake Urmia)' 근처의 '파르스(Pars)'에서 정착하면서 역사에 등장했다. '아시리아인(Assyrians)'들이 이들을 '파르사(Parsa)'라고 부르고 이들이 살던 지역을 '파르수아(Parsua)'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고대 '그리스인(Greeks)'들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다시 '라틴어(Latin Language)'로 변역되면서 '페르시아(Persia)'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이후 페르시아는 여러 대에 걸쳐서 서양에서 이란 민족 혹은 그 지배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진다.
페르시아인은 처음에 '엘람(Elam)'의 지배를 받았으나 엘람이 '아시리아(Assyria)'에 의해 쇠락해진 틈을 타고 BC 691년 아케메네스의 아들인 테이스페스(Teispids)가 페르시아인들을 이끌고 이란 남부에 위치한 엘람의 주요 도시인 '안샨(Anshan)'을 점령하면서 부친 아케메네스의 이름을 딴 작은 왕조인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 dynasty)'를 수립하였다. 테이스페스는 자신의 왕국을 둘로 나눈 후 장남인 아리아람네스(Ariaramnes)에게는 부족의 발상지인 북부의 파르스를, 차남인 키루스 1세(Cyrus I)에게는 부족의 새로운 터전인 안샨을 각각 남겼다. 이후 '메디아(Media)'가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과 연합하여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이란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자 키루스 1세의 아들인 캄비세스 1세(Cambyses I)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딸인 만다나(Mandane)와 결혼하면서 메디나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캄비세스 1세와 만다나 사이에서 장차 페르시아 제국을 만들어낼 위대한 제왕인 키루스 2세(Cyrus II)가 태어났다.
키루스 2세 시대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Hēródotos, 생몰년 BC 484년 경 ~ BC 425년 경)는 키루스 2세의 탄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을 기록하였다. 먼저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가 어느날 자신의 딸인 만다네가 오줌을 누는데 황금 강물로 변해 메디아 전체가 홍수가 일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사제들에게 해몽을 묻자 장차 만다네가 낳은 아들이 메디아를 크게 위협할 것이라고 하여 만다네를 변방의 작은 왕국이었던 안샨의 왕인 캄비세스 1세와 결혼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아스티아게스가 다시 만다네의 자궁에서 나온 포도 덩굴이 하늘을 뒤덮어 그늘지게 만드는 꿈을 꾸었고 만나네가 임신 중이라는 소식을 듣자 심복인 하르파고스(Harpagos)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하르파고스는 죽이지 않고 산기슭에 버렸고 이를 어느 양치기가 주워 키웠다는 것이다.
이후 키루스 2세는 양치기의 아들로 성장하였으나 뛰어난 자질을 보이기 시작했고 동네 아이들과 왕 놀이를 하던 중 왕으로 뽑히자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고위 관리의 아들을 두들겨 패는 일이 일어났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된 아스티아게스가 키루스 2세를 불러 자초지종을 묻자 키루스 2세는 비록 놀이이지만 왕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때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 2세가 자신의 외손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고 하며 하르파고스로부터 키루스 2세를 죽이지 못했다는 실토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아스티아게스는 이번만은 키루스 2세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부모에게 돌려보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내용은 헤로도토스의 저작인 《역사(Histories)》와 고대 그리스의 군인이자 저술가인 크세노폰(Xenophōn, 생몰년 BC 430년 경 ~ BC 354년 경)의 저술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에 나와 있지만 전형적인 영웅 전설의 일종일 뿐 역사적인 사실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메디아에 대한 반기
실제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키루스 2세는 BC 559년 아버지 캄비세스 1세의 뒤를 이어 안샨왕이 되었고 파르스의 왕이자 자신의 삼촌이었던 아르사메스(Arsames)로부터 페르시아인 전체에 대한 종주권까지 인정받으며 페르시아인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BC 554년 자신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의 지배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소국이었던 안샨이 '이란고원(Iranian Plateau)'에서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의 동부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던 메디아를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에 4년 동안의 전쟁에서 점점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BC 550년 아스티아게스가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하르파고스가 배신하면서 전황이 역전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하르파고스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키루스 2세를 살려준 것에 앙심을 품은 아스티아게스가 하르파고스의 어린 아들을 죽이고 몰래 그 고기를 먹이는 형벌을 가했는데 하르파고스는 아들의 참혹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아스티아게스에게 거짓 충성을 맹세했고 기회를 엿보아 키루스 2세 편으로 돌아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키루스 2세의 출생을 둘러싼 전설의 사실여부가 불분명하여 이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지만 하르파고스가 토벌군을 이끌고 키루스 2세에게 항복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결국 BC 549년 하르파고스의 군대까지 이끌게 된 키루스 2세가 메디아의 수도인 '엑바타나(Ecbatana)'를 점령하면서 아스티아게스로부터 메디나의 왕위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나라를 '이란 민족(Iranian Peoples)'이 세운 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 제국(Persian Empire)'으로 부르게 된다. 그리고 훗날 등장하는 '사산 왕조(Sasanian dynasty, AD 224년 ~ AD 651년)'의 페르시아 제국과 구별하기 위하여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First Persian Empire)',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게 되지만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은 바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를 의미한다.
리디아 정복
키루스 2세에 의해 메디아 왕국이 멸망당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메디아와 국경 분쟁을 벌이던 '리디아(Lydia)'의 왕 크로이소스(Croesus)는 키루스 2세가 아직 메디아를 장악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BC 547년 메디아 국경을 침략하였다. 헤로도토스는 크로이소스가 전쟁을 일으키기 이전에 그리스 '델포이(Delphi)'의 '아폴론(Apollo)'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면 거대한 왕국이 무너진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크로이소스는 국경인 '할리스(Halys)' 강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키루스 2세의 매서운 반격을 받고 수도인 '사르디스(Sardis)'로 퇴각해야만 했다. 이때 키루스 2세는 하르파구스의 조언에 따라 메디아의 기병부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낙타 부대를 전면에 배치하였는데 리디아 기병이 낙타 냄새에 익숙하지 않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르디스로 물러선 크로이소스는 겨울이 도래하자 이듬해 봄이 되기 전까지 전쟁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는 군대를 해산하였지만 키루스 2세는 매서운 추위를 뚫고 진격하여 BC 546년초에 사르디스를 함락시켰다. 결국 델포이 신탁에서 예언한 거대한 왕국의 멸망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리디아를 지칭하는 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리디아를 멸망시킨 키루스 2세는 여세를 몰아 리디아 왕국에 조공을 바치던 '에게해(Aegean Sea)' 해안의 '이오니아(Ionia)' 지역에 있던 그리스계 도시들을 차례로 공격하여 복속시키면서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메디아 동쪽으로 진출하여 중앙아시아의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있던 '박트리아(Bactria)'와 무르가브강 유역의 '마르기아나(Margiana)'까지 병합하면서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도 굳혔다.
신바빌로니아 정복
이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 키루스 2세의 페르시아를 상대할 수 있는 곳은 신바빌로니아 뿐이었다. 신바빌로니아는 초대왕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재위 BC 626년 ~ BC 605년) 시절부터 '이집트(Egypt)'의 군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재위 BC 605년 ~ BC 562년)가 왕위에 오른 후 시리아를 정복하였고 BC 586년 '유다 왕국(Kingdom of Judah)'을 공격하여 유대인들을 자신의 수도인 '바빌론(Babylon)'으로 강제로 끌고 오는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를 단행했으며 유대인들을 '지구라트(Ziggurat)' 건설에 강제 동원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전설 상의 '바벨탑(Tower of Babel)'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이렇게 하여 '오리엔트(Orient)' 지방의 중계무역을 독점하게 된 신바빌로니아는 수도인 바빌론을 중심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세계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Hanging Gardens of Babylon)'을 세울 정도로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BC 562년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죽자 왕위를 두고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아들인 아멜-마르둑(Amel-Marduk, 재위 BC 562년 ~ BC 560년)이 즉위 2년만에 기병대장이었던 네르갈샤레제르(Neriglissar)에게 피살당하였다. 그리고 네르갈샤레제르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딸과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역시 4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후 네르갈샤레제르의 아들인 라바시-마르둑(Labashi-Marduk)이 즉위하였으나 그 역시 다시 9개월 만에 살해되었고 나보니두스(Nabonidus)가 BC 556년 왕위를 찬탈한다. 비록 나보니두스는 스스로의 칭호로 '왕중왕(아카드어 šar šarrāni)'을 사용할 정도가 큰 위세를 자랑했으나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둑의 신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며 정치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마르둑(Marduk) 대신에 달의 신인 '신(Shin)'을 숭배하게 하면서 많은 반발을 샀다. 나보니두스는 나이를 먹자 자신의 아들인 벨샤자르(Belshazzar)를 섭정으로 내세워 대신 통치하게 하였는데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를 공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BC 539년 마침내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빌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빌론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난공불락을 자랑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공격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를 극복한 방안으로 2가지 기록이 있는데 먼저 헤로도토스는 키루스 2세가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의 물줄기를 돌려서 강바닥이 마르게 한 뒤에 군사를 우회시켜 바빌론의 문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와 달리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한 후 남긴 '키루스 실린더(Cyrus Cylinder)'에는 페르시아군이 바빌론을 포위하자 나보니두스의 폭정에 신음하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성문을 열었다고 되어 있다.
어찌되었든 키루스 2세는 많은 바빌론 사람들이 나보니도스에게 등을 돌린 덕분에 비교적 별다른 피해없이 바빌론을 점령할 수 있었다. 본래 키루스 2세는 정복된 민족의 고유 신앙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바빌론 점령 후 칙령을 통해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냄으로써 많은 유대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키루스 2세는 신바빌로니아가 점령하고 있었던 '시리아(Syria)'와 '팔레스타인(Palestine)'까지 빠르게 점령하면서 페르시아는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의 전역과 중앙 아시아의 박트리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이 되었다.
키루스 대제의 업적
키루스 2세는 이집트를 제외한 당대의 오리엔트 강대국이었던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연달아 무력으로 무너뜨리면서 페르시아를 명실상부하게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키루스 2세는 스스로를 '위대한 왕(Great King)', '페르시아의 왕(King of Persia)', '안샨의 왕(King of Anshan)', '메디아의 왕(King of Media)', '바빌론의 왕(King of Babylon)',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King of Sumer and Akkad)', '세계의 네 모퉁이의 왕(King of the Four Corners of the World)'으로 칭했고 역사서에는 '키루스 대제(Cyrus the Great)'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키루스 대제는 정복 군주로 군림했지만 정복한 이후에는 피정복지에 대한 자치를 최대한 허용하고 고유의 풍습과 신앙을 인정하는 유화 정책을 펼쳤다. 이 때문에 오리엔트 지방은 물론 이오니스의 그리스계 도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한 그리스인까지도 키루스 대제를 이상적인 군주이자 자비로운 왕으로 칭송하였고 유명한 저술가인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 등에 의해 군주의 모범으로 묘사되어 진다. 이러한 키루스 대제에 대한 평가는 근대까지 이어져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di Bernardo dei Machiavelli, 생몰년 AD 1469년 ~ 1527년)는 무력으로 통일을 이룬 군주의 전형적인 사례로 인용하였고 크세노폰이 저술한 《키루스의 교육》은 근대까지 널리 읽히는 그리스의 고전으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