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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 캄비세스 2세, 이집트 정복, 다리우스 1세

Jobs 9 2021. 5. 10.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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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비세스 2세 시대

 

즉위와 이집트 원정 준비

 

키루스 대제의 남은 목표는 옛 아시리아의 영토 중 정복하지 못한 이집트의 정벌 뿐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집트 정벌을 나서기 전인 BC 530년 키루스 대제는 북방을 침입한 '스키타이인(Scythians)'의 일파인 '마사게타이족(Massagetae)'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집트 정벌 숙원은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에게 이어졌다. 캄비세스 2세는 태자로서 바빌론을 포함한 '바빌로니아(Babylonia)' 북부의 통치자로 임명받아 제국 통치를 배웠고 키루스 대제가 사망하자 곧바로 왕위를 계승한 후 제국을 안정화시켰다. 그리고 이미 키루스 대제 시절부터 이집트 원정의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캄비세스 2세는 즉위한 지 4년 만인 BC 525년에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게 된다.

 

 

당시 이집트의 상황

 

당시 이집트는 프삼티크 1세(Psamtik I, 재위 BC 664년 ~ BC 610년)가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그 아들인 네카우 2세(Necho II, 재위 BC 610년 ~ BC 595년)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군사 원정을 떠났으나 아직 왕자 신분이었던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세력확장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아프리스(Apries, 재위 BC 589년 ~ BC 570년)가 시리아 지역에 개입하고 신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던 유다 왕국의 반란을 부추기는 등 끊임없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노리게 된다. 하지만 반란이 일어나면서 BC 589년 아프리스가 폐위되고 아흐모세 2세(Ahmose II, 재위 BC 570년 ~ BC 526년)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비록 아흐모세 2세의 재위시절 이집트는 번영하였지만 BC 526년 사망하고 그 아들인 프삼티크 3세(Psamtik III, 재위 BC 526년 ~ BC 525년)가 즉위하게 되었는데 캄비세스 2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침입한 시기가 바로 프삼티크 3세가 즉위한 지 6개월만의 일이었다.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정복

 

갑작스런 페르시아의 공격에 이집트는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비록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의 사막이 천연 장애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캄비세스 2세는 '아랍인(Arabs)'의 도움을 받아 이를 손쉽게 건넌 후 이집트 동쪽의 국경 도시인 '펠루시움(Pelusium)'을 공격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패배한 이집트군이 옛 수도인 나일강 하류의 '멤피스(Memphis)'로 후퇴하자 캄비세스 2세가 이를 추격하여 멤피스를 포위하였고 결국에는 함락시켰다.

 

프삼티크 3세는 생포되어 처음에는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혐의로 처형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의 제26왕조가 무너졌고 페르시아가 다시 오리엔트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정벌 후 스스로 파라오가 되면서 이전의 이집트 파라오와 동일하게 '상하 이집트의 왕(King of Upper and Lower Egypt)'과 이집트의 신인 '라(Ra)', '호루스(Horus)', '오시리스(Osiris)'의 후예임을 자처하였다. 그리고 캄비세스 2세는 7년 간 머물렀고 남쪽의 '누비아(Nubia)'와 서쪽의 '카르타고(라틴어 Carthāgō)'의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페르시아 궁중 반란과 캄비세스 2세의 갑작스런 죽음

 

한편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 오래 머물자 페르시아 궁정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누비아 원정에 실패하자 페르시아에는 캄비세스 2세가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페르시아 궁정에 퍼졌다. 급기야 가우마타(Gaumāta)에 의한 반란까지 일어나면서 캄비세스 2세의 죽은 동생인 바르디야(Bardiya)를 참칭하는 인물이 나타나 BC 522년 왕위를 찬탈하자 캄비세스 2세가 급히 귀국하려고 하였지만 도중에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캄비세스 2세와 동행했던 다리우스 1세(Darius I)가 다른 제후들을 규합하며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다리우스 1세 시대

 

즉위 과정

 

다리우스 1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대하여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먼저 다리우스 1세가 남긴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에 기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원정을 앞두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동생인 바르디야를 비밀리에 살해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마기(Magi; 사제)'인 가우마타가 스스로를 바르비야라고 참칭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캄비세스 2세가 귀국하는 도중에 사고로 사망하면서 가우마타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정벌군 중 근위군의 창병으로 참전 중이던 다리우스 1세는 바르디야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귀국하여 6명의 제후인 오타네스(Otanes), 인트라프레네스(Intaphrenes), 고브리아스(Gobryas), 히다르네스(Hydarnes), 메가비주스(Megabyzus), 아스파티네스(Aspathines)를 규합한 후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다리우스 1세의 즉위를 둘러싼 또 다른 이야기는 그리스 역사가들이 남긴 것이다. 여기에는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을 앞두고 파티제이테스(Patizeithes)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하였는데 파티제이테스는 자신의 동생인 가우마타가 캄비세스 2세의 동생인 바르디야와 닮았다는 것을 이용하여 바르디야를 암살하고 가우마타에게 바르디야 행세하도록 하여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캄비세스 2세가 귀국 도중에 사망하자 파티제이테스의 음모가 성공하는 듯이 보였지만 오르테스가 왕위에 오른 바르디야가 사실은 진짜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다리우스 1세를 포함한 다른 6명의 제후들과 함께 모의하여 가우마타와 파티제이테스를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이야기 모두 가우마타가 바르디야를 사칭하였고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서 페르시아로 돌아가던 도중에 사망한 것은 공통적이지만 가우마타를 축출하는 주체를 두고 베히스툰 비문은 다리우스 1세라고, 그리스 역사가들은 오타네스라고 각각 다르게 기록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후 페르시아의 정치체제를 두고 다리우스 1세와 다른 6명의 제후가 토의하였는데 오타네스는 민주정을, 다리우스 1세는 군주정을, 메가지부스는 과두정을 각각 주장하였으나 다리우스 1세가 나머지 제후들을 설득하여 군주정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누가 차기 왕이 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으나 가장 유력한 제후였던 오타네스가 왕위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나머지 6명의 제후가 모두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가 새벽에 해가 틀 때 가장 먼저 운 말의 주인이 왕이 되기로 합의하였는데 이 때 다리우스 1세는 마부에게 미리 암말을 이용해 자신이 탈 말을 잔뜩 흥분시켜 놓도록 하였고 동이 트기 시작하자 자신의 말에게 암말의 냄새를 맡게 하여 가장 먼저 울게 만들었다고 한다. 향후 그리스를 공격하게 되는 다리우스 1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 헤로도토스가 의도적으로 다리우스 1세의 교활함을 부각시켜고 한 기록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치세 동안 용맹한 군사령관보다는 노련한 행정가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다리우스 1세의 성격을 잘 들어내는 일화이기도 하다.

 

 

 

재위 초기의 반란 진압

 

비록 베히스툰 비문과 그리스의 역사 기록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리우스 1세의 즉위과정이 투명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에 다리우스 1세는 베히스툰 비문에 자신의 가계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남겨놓게 되는 데 페르시아인이 안샨과 파르스로 서로 나뉘어 있던 시절에 파르스 지방을 통치하던 아리아람네스의 아들인 아르사메스가 왕위를 포기하고 키루스 대제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페르시아가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키루스 대제는 아르사메스를 페르시아 제국의 왕족으로 인정하고 '사트라프(Satrap; 총독)'로서 여전히 파르스를 통치하도록 했고 아르사메스의 아들인 히스타스페스(Hystaspes)는 박트리아의 사트라프가 되었는데 히스타스페스의 장자가 바로 다리우스 1세였다. 이 때문에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 제국의 방계 왕족으로서 페르시아의 왕위 계승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다분히 다리우스 1세의 왕위 계승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현재까지도 정통성 여부가 불분명한 다리우스 1세의 즉위였던 만큼 동시대의 페르시아인들도 죽은 가우마타가 진짜 바르디야로서 정통성있는 계승자이고 오히려 다리우스 1세를 왕위 찬탈자로 여기며 많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다리우스 1세가 즉위 직후 페르시아의 발상지인 파르스를 비롯하여 엘람, 바빌로니아, 메디아, 아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2년 동안 무려 19번이나 반란을 경험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리우스 1세는 징병제 실시와 군대에 대한 봉급 지급 등의 군제 개혁을 통하여 체제를 정비하고는 대규모 토벌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9명의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였다.

 

그 중에서도 다리우스 1세를 가장 힘들게 한 지역은 바빌론이었다. 다리우스 1세가 오타네스에게 대군을 맡겨 다른 지역의 반란을 토벌하러 보낸 사이에 바빌론에서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네부카드네자르 3세(Nebuchadnezzar III)가 바빌로니아 왕국의 재건을 선언하였다. 이에 다리우스 1세가 남은 군대를 모두 모아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본래부터 높은 성벽으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바빌론이었던 만큼 1년 반 동안이나 함락되지 않았다. 단순히 무력만으로 바빌론을 점령할 수 없음을 깨달은 다리우스 1세는 키루스 대제가 바빌론을 함락시켰을 당시의 책략까지 사용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던 중 다리우스 1세가 또 책략을 꾸미게 되는데 메가비주스의 아들인 조피루스(Zopyrus)와 모의하여 그를 가혹하게 처벌한 후 바빌론에 거짓투항시킨 것이었다. 이후 조피루스는 바빌론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총사령관이 되자 다리우스 1세의 군대를 끌어들여 바빌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 공으로 조피루스는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임명받았고 생포된 네부카드네자르 3세는 바빌론 왕가와 무관하면서 왕을 참칭한 것으로 치부된 채 말뚝에 찔려 처형되었다. 이제 다리우스 1세는 2년동안 모든 반란을 진압해내면서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임을 표방할 수 있었고 이를 위해 베히스툰 비문을 세기도록 하면서 스스로를 아케메네스 왕조의 아르사메스의 손자였던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다.

 

 

 

대외 군사 원정

 

이제 다리우스 1세는 외부로 눈을 돌려 군사 원정에 나섰고 그동안 페르시아가 반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고 줄기차게 국경을 넘어 침입하던 스키타이인에 대하여 가장 먼저 반격에 나섰다. BC 519년 다리우스 1세는 스키타이인을 공격하여 북쪽으로 몰아냈지만 그 곳에서 새로운 스키타이 부족을 만나고 물러나야 했다. 또한 BC 518년부터 BC 510년까지 '북인도(North India)'의 '편자브(Punjab)' 지방을 정벌하면서 동쪽의 국경을 '인더스(Indus)' 강 유역까지 확장시켰다.

 

마지막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모두 점령하여 서쪽 국경이 에게해에 이르면서 그리스 문명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리고 BC 499년 이오니아 도시들이 그리스의 '아테네(Athens)'와 '에레트리아(Eretria)'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모두 토벌하였고 이제는 반란의 배후인 그리스에 대한 정벌을 결심하게 된다. BC 493년 다리우스 1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Mardonius)에게 원정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도록 하였다. 비록 해군은 폭풍으로 되돌아왔으나 육군은 그리스 북부의 '트라키아(Thracia)'와 '마케도니아(Macedonia)'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트라키아는 스키타이인을 막아내는 전초기지로서 다리우스 1세가 탐내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성공적인 원정이 되었다.

 

BC 490년 조카인 아르타페네스(Artaphernes)와 제독 다티스(Datis)에게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리스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목표로 그리스를 재차 침공하도록 하였다. 비록 '낙소스(Naxos)'에 무사히 상륙한 페르시아군이 6일만에 에레트리아는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마라톤(Marathon)' 평원에서 아테네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아테네 점령에는 실패하고 만다. 다리우스 1세는 아테네마저 점령하기 위한 세 번째 원정을 준비하였고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자 하였으나 BC 489년부터 수년간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원정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BC 486년 다리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그리스 원정의 마무리는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재위 BC 486년 ~ BC 465년)에게 맡겨진다.

 

 

다리우스 1세의 업적

 

다리우스 1세는 치세 동안 제국 내 모든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넘어서 영토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까지, 북쪽으로는 '캅카스(Kavkaz)' 지역까지, 남서쪽으로는 이집트까지, 북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부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역까지 이르면서 키루스 대제 시절의 영토를 넘어섰다. 또한 다리우스 1세는 정복군주 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광대한 영토를 20개의 속주인 '사트라피(Satrapy)'로 구분하고 자신이 직접 임명한 사트라프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왕의 귀'라고 불리는 순찰관들을 파견하여 사트라프를 감시하도록 하면서 사트라프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져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였다.

 

또한 다리우스 1세는 도로와 운하, 해로를 연결시켜 제국 내 무역이 활발해지도록 하는 한편 도량형과 화폐도 하나로 통일하여 단일 국가로서의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종교에 있어서는 그동안 신봉되던 마르둑 대신에 자신이 믿던 조로아스터교를 장려하였지만 피지배 민족의 고유 종교와 풍습을 그대로 인정해주었는데 BC 519년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궁전을 짓도록 허락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의 중심지로서 옛 메디아의 수도였던 엑바타나 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아시리아에게 파괴당한 엘람의 옛 수도인 '수사(Susa)'를 재건하도록 하고 페르시아인의 근원지인 파르스에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비록 다리우스 1세 자신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지만 페르세폴리스는 재건된 수사와 메디아의 옛 수도인 엑바타나, 바빌로니아의 옛 수도인 바빌론과 함께 페르시아 제국의 4대 수도로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하여 다리우스 1세는 치세 동안 영토를 최대한으로 넓히고 내부 통치 제제를 정비하며 페르시아 제국이 번영하는 토대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다리우스 1세에게는 대제의 칭호가 붙으면서 역사적으로 '다리우스 대제(Darius the Great)'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다리우스 대제는 스스로의 칭호를 '위대한 왕(Great King)', '페르시아의 왕(King in Persia)', '여러 국가들의 왕(King of the Countries)'이라고 하였고 특히 아시리아가 오리엔트 지방을 재패하던 시절에 사용되었던 '왕중왕(아카드어 šar šarrāni)'을 '고대 페르시아어(Old Persian)'로 번역한 '흐샤야시야 흐샤야시야남(Xšâyathiya Xšâyathiyânâm)'도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중세 페르시아어(Middle Persian)'의 '샤한샤(šāhān šāh)'가 유래하게 된다.

 

다리우스 1세가 통치하던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의 궁기병과 궁병 전술 

 

페르시아가 단기간에 오리엔트 지방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는 아시리아부터 시작된 철기와 기병의 활용을 극대화하였고 조직 구성도 상당히 균형이 잡혀있었다. 페르시아는 정복 지역으로부터 군대를 강제 징병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다국적 군인들로 혼성되어 있었는데 바빌로니아의 장창과 곤봉 부대, 박트리아의 활과 도끼 부대,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의 투창 부대, 심지어는 고대 그리스의 장창 부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병력 숫자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고대 전투의 특성상 병력의 질을 높이기 보다는 양을 늘리기를 원했고 이로인해 보병 대부분을 값비싼 중장보병 보다는 값싼 경장보병이 주를 이루게 하였다. 또한 손실된 병력은 정복지역에서 차출할 수 있지만 페르시아 중심을 이루는 본군은 소모되면 안되었기 때문에 원거리 공격 위주로 편성하였다. 이런 이유로 페르시아 군은 자연스럽게 활과 투창을 지닌 궁기병과 활과 짧은 병기를 지닌 궁병이 주력을 이루었다. 

 

페르시아는 보병을 중앙에 위치시키고 기병을 좌우에 포진시켰는데 이 진형은 오랫동안 보병과 기병의 기본 진형이 되었다. 페르시아 군의 기본적인 전법은 전투 초기 궁기병이 빠르게 접근하여 활과 투창의 원거리 공격으로 상대를 교란하고 궁병의 집중사격으로 적 병력 피해를 증대시키면서 경장보병 부대가 돌격하여 마무리 짓는 방식이었다. 비록 다국적군의 특성상 궁기병과 궁병, 보병의 협동이 완벽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균형이 잡힌 병종 구성과 다수의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항상 승리를 거두어 오리엔트 지방에서 불패의 군대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은 강력한 공격력을 보유한 장갑 타격 부대를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와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중장보병의 밀집 대형인 '팔랑크스(Phalanx)'에게 패하게 되고 중기병과 중장보병이 조화를 이룬 알렉산드로스 대왕(그리스어 Aléxandros ho Mégas)의 군대에게 완패하면서 멸망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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