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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참배, 신사(神社), 12만 곳, 토리이(鳥居), 신사참배 고집, 야스쿠니 신사

Jobs 9 2024. 12. 2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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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참배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神道)의 신사(神社)를 찾아 참배하는 행위.

신사는 신도의 사당(祠堂)이다. 신도는 일본 고유의 사상으로 조상 숭배나 일왕 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국수적인 일본 토착 종교였다. 이러한 신도가 천황제를 지탱하는 국가신도(國家神道)로 변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정치 질서가 등장하면서 자국민을 통합할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신도를 통해 일왕을 중심으로 자국민의 단결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는 타민족을 지배하고 동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일제가 점령한 곳마다 신사를 세운 것은 이러한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 강점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신사를 세웠다. 특히 1917년에는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이 “조선통치상 가장 긴요한 것”이라며 서울의 남산에 일본 황실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일왕을 제신으로 하는 조선 신궁(朝鮮神宮) 설립을 추진하였다. 조선 신궁은 1925년에 완성되었는데, ‘동화주의’와 식민 통치를 한국인들에게 보여 주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신사 참배는 1920년대에도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대륙 침략을 전개하면서 강화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1935년부터는 한국인 학생들에게 조선 신궁 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했다. 개신교 학교의 선교사들과 학생들은 처음에는 신앙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총독부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 학교장 신사 참배 거부 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는 분열되었다. 1937년부터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상당수의 개신교 계통 학교는 결국 폐교되는 등 큰 불이익을 받았지만, 일부는 ‘순응’하고 신사 참배를 하였다. 

신사 참배를 정책적 차원에서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6년 6월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미나미 총독은 부임 직후 「신사규칙(神社規則)」을 개정⋅공포하였다. 전국에 57개의 신사를 새로 건립했을 뿐만 아니라 ‘1면 1신사(一面一神社)’ 원칙을 세워 산간벽지의 면 단위까지 신사를 건립하도록 했다. 일제 말기에는 전국의 신사가 약 1,000여 개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신사 참배가 정책적으로 강요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일본이 전시 체제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표어 아래 한국인을 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원하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사 참배가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이는 일왕 숭배를 통해 일왕 및 일본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하고 확인하려는 행위였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 이후에는 황민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신사 참배는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강요되었다. 미나미 총독은 1937년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한 후 매월 6일에 애국일 행사를 갖도록 했다. 애국심 고취를 위한 행사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왕에 대한 숭배를 요구하였고 신사 참배는 그런 행사의 주요한 의례로서 행해졌다. 또한 신사 참배와 마찬가지로 일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도 한국인들에게 강요했다. 신사 참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일왕에 대한 숭배를 통해 일제의 지배력을 공고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 일제는 신사 참배를 통해 한국인의 동화와 자발적 전쟁 참여를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던 신사는 한국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신궁은 일본인들에 의해 스스로 철거 소각되었으며, 그 터에는 현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신사(神社じんじゃ)

 

일본 민속신앙 신토(神道)의 신을 모시는 종교 시설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려 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종교 시설이다.

 

위치


신사는 대도시 도심에서는 민가 사이에 있기도 하지만 보통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짓는다. 번듯한 신사는 교외 외곽에 있지만 주택가나 시가지에 자리잡은 신사도 의외로 많다. 이런 신사는 땅값 문제인지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다. 문이 없다시피 한 열린 구조가 특징. 대부분 24시간 무료개방이다. 밤에 가면 의외로 무섭다. 신사에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지역유지와 지역단체의 관계자들이 관리하는 곳도 많다. 그런 이유로 어린이들이 낮에 놀이터만큼이나 많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따금 한국에 있는 절의 삼성각이나 산신각처럼 절에 신사가 딸렸거나, 반대로 신사에 절이 딸린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빈도는 한국과는 달리 매우 낮다. 게다가 한국의 사찰에 있는 삼성각 등은 크기가 작긴 해도 제대로 된 건물 1채는 되는 반면, 일본에서 이런 부속시설은 감실이나 큰 석등만 한 크기일 때가 많다. 단, 큰 신사 안에 다른 신사가 딸리는 경우 제법 구색을 갖추기도 한다. 

일본에서 신사는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곳만 따져도 2010년대 기준으로 최소한 8만 8천 군데, 조금 범위를 넓히면 12만 군데에 달한다는 조사가 있다. 동시기에 일본 전역의 편의점 수가 약 5만여 곳이라고 하니 신사가 편의점보다 훨씬 많다.  

일본의 도도부현에서 신사가 가장 많은 곳은 니가타현이다. 2018년 기준 니가타현에서 집계된 신사만 4753군데에 달한다. 니가타현이 농사 짓기에 좋아서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인구가 제일 많았고, 인구가 많았으니 당연하게도 신사를 많이 세웠기 때문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에 정책적으로 신사 합병 등을 권했을 때에도 어째서인지 니가타현은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 

반대로 가장 적은 곳은 오키나와현이다. 십여 곳에 불과하다. 이곳은 애초에 일본 본토의 신토 문화권이 아니라 독자적인 류큐 신토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신사가 아니라 성소(聖所)인 우타키(御嶽)가 역할을 대신한다. 우타키는 딱히 건물이 세워져있지는 않고 일정한 바위나 수풀 등의 자연물을 성스러운 곳으로 지정해둔 형태이다. 그러나 류큐왕국시대에 일본 본토와 교류를 통해 몇 곳에 일본식 신사가 지어지기도 했으며, 현지 류큐 신토 문화와 융합하기도 했다.

 


분포


2010년대 기준으로 일본 내의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신사는 약 8만 8천 곳에 이른다. 2017년 기준 문부과학성의 「종교 연감 헤이세이 28년도판」에 의하면, 전국 신사·사원의 수는 편의점(약 5만 5699곳)의 3배가 되는 약 16만 2141곳으로 집계됐다.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신사들까지 포함하면 20만-30만 군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신사와 절의 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어 2040년에는 약 40%가 소멸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인 일부에게도 일본에 관광을 가면 지역마다 꼭 들르는 유명한 곳들도 있다. 

 

 


건축 양식


입구에는 신사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토리이(鳥居)를 세운다. 한국의 홍살문과 비슷하게 생겼다. 신사 건축양식은 보통 일본 전통건축양식과 많이 달라서, 일본 전통건축을 전혀 모르는 한국인이라도 조금만 보면 다른 (불교 사찰 같은) 전통건물과 신사를 쉽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정형화되었다. 현대의 신사 건축은 에도 시대 유행하던 신사건축양식인 복고 양식이 점차 고착화된 것이다. 즉 '고대의 건축은 이렇게 짓지 않았을까.' 하고 에도 시대에 추측하면서 정립된 모습이다. 

 

 

토리이(鳥居)

 

신사의 입구에 세우는 기둥문이다. 신토에서 신의 영역과 일반 세계의 경계를 이루는 일종의 관문 내지는 결계 역할을 한다.

어원
토리이는 鳥(새 조)와 居(살 거)를 사용해 '鳥居'라 쓴다. 다만 '토리이'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닭이 머무르는 자리'를 의미하는 한자어 鶏居(계거)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신토에서 닭을 신의 전령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통과해 들어가다'는 뜻인 通とおり入いる(토오리이루)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설립 목적


고대 일본에서 신사는 지금처럼 하나의 독립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 아니었다. 숲이나 동굴, 바위 등 특정장소를 신성한 장소로 지정하고, 의식을 거행할 때 신이 그곳으로 찾아오도록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처럼 신사 건물을 짓고 신을 모신 뒤 사람이 찾아오는 식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에 들어온 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불교에서 사찰을 세워 불상을 봉안하고 신자들이 찾아오는 것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신을 모시는 곳이나, 일본 신화에 내려오는 신 외에 지역고유의 토속신, 국가나 지역에 크게 이바지한 위인을 모시거나 심지어 악령을 위안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우기도 한다.

신사는 정치적 목적으로 세워지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 이 신사에서는 메이지 유신 지사들이나 군인 등, 근대 일본 제국에 기여한 인물들을 모시므로 국립묘지(한국으로 따지면 현충원) 같은 성격이 강한데, 이 중에는 유족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한국인이나 대만인, 류큐인 전사자들도 있어서 거센 항의를 받는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의 전범들도 포함되어 있어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때문에 A급 전범들을 모두 분사하라는 목소리가 크다.

 


오쿠미야(奥宮)


일본의 신사에는 드물게 오쿠미야(奥宮)라고 불리는 시설들이 있다.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오궁'인데, 여기서 오(奥)는 원래 방의 제일 안쪽, 후미진 곳을 가리키는 한자이다. 마치 월경지처럼, 신사의 본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지만 본전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곳을 따로 '오쿠미야'라고 부른다. 대개는 해당 신사에서 중요한 곳이지만 어떤 이유로 신사 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어서 간이시설을 세워둔 곳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후지산 정상에는 후지산을 신령으로 숭앙하는 센겐 대사(浅間大社)의 오쿠미야가 있다. 후지산 정상에 센겐 대사의 본전을 세울 수 있을 리 없으니 후지산 아래에 본전을, 정상에는 간이시설을 세우되 간이시설 또한 본전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이다.

 

 

신직(神職)


신사의 관리와 의식진행을 맡는 사람을 신직(神しん職しょく) 또는 간누시(神主)라고 부른다. 한 신사에 신직이 여럿인 경우도 있는데, 그 중 최고 책임자를 궁사(宮ぐう司じ)라 하고 그 아래로 예의(禰ね宜ぎ), 권녜의(権ごん禰ね宜ぎ) 등 직책을 둠이 일반적이다. (아버지 사당 녜{禰} 자는 한국식 한자음으로 '녜' 또는 '선'으로 읽는다.) 물론 이는 신사에 따라 다르다. 궁사 이외의 다른 신직이 없는 신사도 있고, 궁사 아래에 권궁사(権ごん宮ぐう司じ)라는 직책을 두는 신사도 있다. 

신직은 대개 남성이지만 여성 신직도 일부 존재하며, 이들은 무녀와 다르다. 신직이 되려면 대학교의 관련 학과에 진학하여 신토를 배운 뒤 시험을 보는 방법이 가장 흔하다. 일례를 들자면 2014년 노리코 공주와 결혼한 센게 구니마로(千家國磨). 그는 고쿠가쿠인대학 신도학과를 졸업하여 쭉 이즈모타이샤에서 신관으로 봉직하였다. 
8. 신체(神體)와 신앙[편집]
신사 안에는 위패가 아니라 신체(神體)로 신상(神像)이나 거울, 또는 기타 물건을 안치한다. 여기서 '신체'란 신령이 깃들어 사람들이 경배하는 대상이 되는 물체를 뜻한다. 신체가 둥근 거울(신경 神鏡)인 경우가 특히 흔한데, 이는 태양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꼭 거울이 아니라 다른 물건인 경우도 흔하고,[9] 산이나 바위 같은 자연물이 신체인 경우도 있다. 자연물이 신체라면 건물 안에 봉안하기 어려우므로 보통은 해당 자연물 앞에 배전을 짓게 된다.

신토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만신사상에 가까운 신앙이다. 개인의 악행이나 선행도, 해당 개인이 악하거나 선한 것이 아니라 신이나 악귀가 깃들어서 저지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죽은 후에는 정화하는 의식을 거쳐 신이 거하는 사당에 안치하며, 이 때 해당 사람의 죄나 악행이나 선행, 관련된 모든 과거에 대해 용서하고, 그 자리에는 이승의 삶에서 만들어진 인과에서 벗어난 순수한 혼을 묻는다고 여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전통에서는 이질적인 존재이며, 야스쿠니 신사가 정착하자 기존의 일본 전통과 충돌하였다. 기존 일본 전통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는 제사를 지낼 권리가 없다.


일본의 남성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 등 최상위 신사를 참배할 때 관습적으로 연미복을 전부 갖춰 입고 참배하는 경우가 많다. 구체적으로, 검은색 무지 재킷, 검은색 바탕에 회색 세로줄이 들어간 양복 조끼, 흰색 셔츠, 은색 넥타이, 회색 바지를 입는다. 이는 1890년 일본 국회 개원 당시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의 영향을 받아 국무대신 및 관료들의 정장이 유럽, 특히 영국의 연미복을 본땄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보면 촌스러운 회색 바지는 그 당시 런던의 최신 유행 모드였다. 마찬가지 이유로 국회의원이 내각총리대신의 부름을 받아 국무대신으로서 내각에 입각할 때 보면 이 연미복 복장을 하고 있다.[18] 물론 일반인이 참배를 하러 가는 경우라면 무언가 특별한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아닌 이상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가면 된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거나, 츄리닝을 입고 참배를 하러 가도 상관없으며, 실제로 신사 근처에 사는 주민이 참배를 하러 오는 경우라면 정말 편하게 입고 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사격(社格)


일본의 신사에는 흔히 등급이 있다. 물론 아무 등급도 없는 신사들이 더 많긴 하지만, 역사가 오래된, 또는 규모가 큰 신사 시설 관련 자료를 모으다 보면 흔히 '등급'이 나오곤 한다. 이러한 제도는 일본 조정이 영토 내의 신사들을 통제하는 한 가지 수단이기도 했다.

크고 오래된 곳인데도 이런 신사 등급을 받지 못한 시설들도 있다. 이런 등급, 사격(社格)을 받는 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정치적 요소가 관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이런 등급을 받았던 신사는 유서 깊고 주변 지역에서 중요하다고 인정받은 곳임은 분명하다. 

 

 

식내사(式內社)


927년에 일본 조정이 편찬한 《연희식(延喜式)》[19]이란 법령의 〈신명장(神名帳)〉 항목에 기록된 신사 시설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바꾸어 말하면 식내사는 최소한 10세기 초에는 존재했고 규모도 있으며 당시에 어느 정도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유서 깊은 곳이라는 뜻이다. 신명장에 기록된 식내사는 총 2861곳, 모신 신령들은 총 3132위인데, 당시 일본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오늘날의) 교토부, 나라현, 미에현 등에 특히 많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 조정은 식내사를 선정하면서 정치적인 요소를 많이 고려했기 때문에, 당시부터 존재했고 대중적 인기도 있었지만 식내사가 되지 못한 신사들도 많았다. 

식내사를 중요도에 따라 관폐대사(官幣大社) - 국폐대사(國幣大社) - 관폐소사(官幣小社) - 국폐소사(國幣小社) 등 4등급으로 나누고 공적으로 신령들에게 예물(폐백幣帛)을 바쳤다. 여기서 관폐사와 국폐사는 예물을 바치는 주체에 따른 구분이다. 관폐사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신기관(神祇官)이, 국폐사에는 조정이 각 지역으로 파견한 국사(国司: 지방관)이 예물을 바치도록 했다. 

19세기 메이지 시절에 제정한 근대사격제도는 연희식신명장에서 사용한 이러한 구분과 용어들로부터 많은 부분을 따갔다.

 

 

명신대사(名神大社)


8-9세기에 식내사 중에서도 특별히 영험한 신령(명신名神)을 모신 곳이라고 조정이 공인한 신사. 전부 식내사 중 관폐대사/국폐대사였기 때문에 '명신대사'라고 하였는데, 이들을 기록한 목록이 따로 있다. 일본 조정이 특별히 신령의 영험을 구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명신대사에 사람을 보내어 제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기록에 따라 구체적인 수가 좀 다르지만, 대체로 2백여 곳이 있었다. 명신대사는 후에 이십이사로 축소되었다. 

 

 

 

 

 

 '야스쿠니 신앙'을 버려라 
 
8월이 되면 한.일 관계에서 연례행사로 불거지는 것이 야스쿠니(靖國)신사 문제다. 올해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15일을 골라 참배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외교 마찰의 불씨가 모락모락 타오르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야스쿠니 참배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합사돼 있는 A급 전범 때문이다. 전범을 참배하는 것은 곧 침략전쟁을 긍정하는 행위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는 야스쿠니의 본질을 비껴 갈 위험이 있다. 지엽말단에 흥분한 나머지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먼저 분명히 할 게 있다. 야스쿠니는 전몰자 추도를 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추도'란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야스쿠니는 전사를 슬퍼하지 않는다. 비통해 하지도 않는다. 거꾸로 전사를 찬미한다. 전사하면 신(神)이 돼 야스쿠니에 모셔지는 영광을 누린다고 했다. '천황이 주신 목숨을 천황에게 바쳤으니 그보다 더한 명예가 없다'고 가르쳤고, 다들 그렇게 믿었다. 이게 '야스쿠니 신앙'이다. 그 세례를 받은 유족들은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했다. 병사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며 죽어갔다. 야스쿠니는 그렇게 일본 국민을 세뇌하며 전의를 고양시켰다. 

이는 추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려운 말을 쓰자면 '현창(顯彰)'이다. 공적을 뚜렷이 기려 찬미한다는 뜻이다. 야스쿠니에 딸린 전쟁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에 가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온통 제국주의의 영광과 일본군의 공적을 찬양하고 있다. 공적이란 다름아닌 전쟁과 식민지 개척이다. 그래서 야스쿠니엔 군인과 군속의 위패만 둔다. 민간인 전몰자는 야스쿠니의 관심사가 아니다. 침략전쟁에 공적을 못 남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야스쿠니의 속성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야스쿠니를 비판하려면 바로 이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또 야스쿠니는 순수한 종교기관도 아니다. 전시엔 군이 직접 관리했다. 패전 후에도 음으로 양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예컨대 일본 후생성은 전범을 포함한 전사자 명단을 야스쿠니에 전달해 합사하도록 했다. 1956년엔 일본 정부가 국고 480만 엔을 야스쿠니의 합사 작업에 지원했다. 이쯤 되면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는 종교활동이라고 볼 수 없다. 한국.중국의 비판이 내정간섭이라는 일본 측 반응도 총리의 참배가 국사(國事)이자 고도의 정치행위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본의 정치적 의도를 의식하면서 야스쿠니 문제를 봐야 한다. A급 전범의 분사만 요구해서 될 일이 아니다. A급 전범은 야스쿠니의 정체를 보여주는 상징일 뿐 본질이 아니다.

만일 야스쿠니가 한국과 중국의 요구대로 A급 전범을 분사한다고 치자. 총리가 참배해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스스로 야스쿠니의 국수주의를 사면해 주는 꼴이 된다. 총리의 참배를 정례화한 다음 일왕의 참배를 실현하는 게 일본 우익의 의중이다. 이 경우 '야스쿠니 신앙'의 거국적 포교활동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야스쿠니가 분사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우리가 지켜봐야 할 게 또 있다. 야스쿠니가 일본 청소년층을 파고들고 있다는 점이다. 야스쿠니는 2000년부터 청소년을 위한 역사 스터디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덕에 느슨해진 황국신민의식을 다잡으려는 의도다. 99년엔 영령의 공적을 기리는 연구사업에 대한 재정지원 제도도 만들었다. 교과서 왜곡의 주범인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지원을 염두에 뒀다고 한다.

참 딱한 일이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에서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황국신민의식이 재생산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결과다. 이런 상황에선 외국인이 아무리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일본인들의 건전한 시민의식이 '야스쿠니 신앙'을 고사시키는 수밖에 없다. 일본인 스스로 방법을 찾고, 실천하고, 국제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를 못하면 일본은 과거사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 신사참배를 고집하는가?   야스쿠니 신사

일본 도쿄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중심부의 치요다(千代田)구 구단시타(九段下)역에서 내려 5분 가량 걸어가면 야스쿠니(靖國) 신사라는 곳이 나온다. 1869년에 건립된 이 야스쿠니 신사는 당시에는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라 불리웠다. 이 도쿄초혼사는 막부말 유신기에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던 초혼사들의 센터였다.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의 내항으로부터 시작된 서구 열강들의 위협에 맞서 도쿠가와 막부를 옹호하는 존왕양이파와 막부 타도를 외치는 개항파 사이의 유혈 정쟁으로 어지러웠던 에도시대 말기의 일본에서는 ‘초혼‘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된다. 여기서 ‘초혼‘이란 ‘위령‘(慰靈) 즉 죽은 자의 영을 불러내어 위로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초혼의례의 배경에는 ‘어령(御靈)신앙‘이라고 하는 민간적 종교관념이 깔려 있다. 어령신앙이란 중세 이래 생전에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한 자 혹은 원한을 품고 죽은 인간이 사후에 탈이나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신으로 모시게 된 일본 특유의 현상을 가리킨다.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며 따라서 전사자들을 신으로 모셔 위령제를 올려야만 탈이 없을 거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야스쿠니 신사에는 오늘날 막부말기 이래 무진내전(1868년), 서남내전(1877년),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에서 죽은 군인과 군속 등 245만여명이 제신으로 모셔져 있다.

‘야스쿠니’란 곧 ‘평화로운 나라’를 뜻한다. 그 누가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지 않겠는가? 미국인들이 전몰장병 추도식을 마치 하나의 종교의례처럼 거행하는 것이나 야스쿠니 신사에서의 제사나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야스쿠니 신사가 역사적으로 일본 군국주의 및 천황제 국가신도체제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총리를 비롯한 14명이 모셔져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유족회와 신사본청 및 우익진영에 의한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의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상당수의 일본인들은 가령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느끼지 않는 듯 싶다. 그들은 심정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의 존재에 대해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군의 학자들, 기독교계를 비롯한 종교계, 재일조선인 단체, 사회당과 공산당 등에서는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

오에 시노부의 ‘야스쿠니 신사’도 이런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대표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예민한 문제의식과 꼼꼼한 작업으로 이 책을 펴 낸 역자에 의하면, “일본 군사사와 종교사 분석을 통하여 야스쿠니 신사가 패전까지의 일본 국민을 ‘천황의 군대’에 밀접하게 결부시켰던 고리 역할을 담당한 군국 신사였고, 따라서 국민통합을 위한 강력한 이데올로기 수단이었음을 규명한 역작”이다. 매년 광복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신문지상을 장식해 온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고자 할 때, 이 책은 무엇보다 충실한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군국주의(軍國主義 Militarism)

군사적 가치를 다른 사회적 가치보다 우선시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일체를 군사 목적에 따르게 하려는 주의나 정책.

군인은 직업적으로 군비의 확대와 군인의 우월권을 주장하며 대외적으로 호전주의, 대내적으로는 파시스트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군인들, 즉 군사력을 좌우하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실권을 쥐면 군국주의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체제나 독일의 나치 독재,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 예다.

 
군도이론(群島理論 Theory of Archipelago)
= 인도네시아나 피지와 같이 근접한 몇 개의 섬(島)으로 구성된 군도국가의 영해(領海)에 관한 이론.

이 내용은 ①군도의 외단(外端)을 연결한 선을 군도기선(群島基線)으로 하고 영해와 경제수역은 그 기선에서 바깥쪽을 향해 설정된다. ②기선내의 군도수역(群島水域)에서는 군도국가의 주권이 미쳐 깊이나 거리에 관계없이 해저·해중(海中)공간과 그 자원은 모두 군도국가의 주권에 속한다.

다만 군도수역 안의 국제통항(通航)에 사용되는 수역을 군도항로(群島航路)로 지정, 군도국가는 이 항로의 통항을 막아서는 안된다. 제3차 유엔해양법회의에서 피지 대표에 의해 공식으로 제창돼 유엔해양법조약에 명기되었다.  (자료 : 동아일보. 2001.05.26,토요일,제24834호,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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