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배울 게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_이탁오, <분서>
‘교학상장(敎學相長)’
중국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에 나오는 말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이다. 교학상장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잘 표현한 말이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성장하고, 제자는 배움으로써 진보한다. 교학상장처럼, 스승은 가르치고 제자는 배우면서 함께 성장해 나가는 관계야 말로 최고의 사제지간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스승으로부터 계속해서 ‘배우기만’ 하는 제자는 좋은 제자라고 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배움만 받는 사람은 좋은 제자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있다. 독일철학자 ‘니체’다. 니체는 자신의 자서전 성격의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니체는 영원히 제자로만 머무는 사람, 다시 말해 스승을 뛰어넘지 못하고 배우기만 하는 제자는 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니체의 주장에 동의가 되는가?
'군사부일체'나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교훈하는 유교적 가르침을 충실히 받은 사람일수록 니체의 주장에 대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니체의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도 아니다. 심지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만약 인류 전체가 '제자는 절대 스승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치자. 이런 상황에서는 인류에게 발전이 있을 수 있을까? 절대 발전할 수 없다. 가령,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열심히 배운다. 하지만 그는 스승보다는 약간 못 미친다. 왜? 스승을 넘을 수 없으니까. 다음에는 그 제자가 스승이 되어 누군가를 가르친다. 제자의 제자는 또 그 사람보다도 약간 못 미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 보면 결국 제자는 점점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 교육을 받아도 계속 스승보다 못한 제자만 양산될 뿐이다. 요컨대,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어야만 인류에게 발전이 있을 수 있다.
결국 니체는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라는 말을 통해 제자들이 자신을 넘어서기를 바란 것이다. 스승을 넘어서지 않는 한, 인류에게 발전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니체의 교육관은 매우 진취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 니체가 있다면, 동양에는 순자(荀子)가 있다. 아마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고사성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청출어람은 <순자>라는 책의 맨 앞에 나오는 말이다. '푸른색은 쪽[藍]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라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한 표현이다. 순자는 굉장히 개방적인 사상가다. 비록 제자일지라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스승을 능가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나 순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이가 아니라 나중에는 제자가 더 뛰어나서 오히려 배울 수도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가 진정한 사제지간이란 뜻이다.
스승과 제자가 학문을 하는 사이의 용어라면,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요즘 말로는 ‘멘토(mentor)’라는 표현이 있다. 멘토란 말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Mentor)’에서 유래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하면서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를 친구인 멘토르에게 맡겨 돌보고 가르치게 했는데, 이처럼 미성숙하거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조언과 도움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멘토’다. 이 때 도움을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라 부른다. 사람이 성장하는데 있어 스승이나 멘토가 있는 게 좋을까, 아니면 아무런 도움없이 스스로 배우는 편이 좋을까? 당연히 스승이나 멘토의 가르침을 받는 편이 유리하다. 하여, 스승이나 멘토를 둘 여유가 있다면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다. 청출어람을 강조했던 순자도 “학문하는 방법으로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더 편리한 것은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확실히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학으로 터득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옆에서 깨우쳐주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이처럼 자신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푸는 사람은 그 자체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이나 멘토에게 기꺼이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우리가 스승의 날을 축복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를 돌봐 주고 가르침을 주는 멘토의 존재는 영원할까? 해병대식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한번 멘토는 영원한 멘토’일까? 물론 호칭이야 영원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간의 관계마저 영원해서는 곤란하다. 멘토가 멘티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영원히’ 해야 한다면, 이는 멘티가 독자적으로 살아갈 힘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상황은 가르침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배움이 잘못되었든지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인 경우일 것이다. 한마디로 올바른 멘토-멘티의 관계는 아니다. 이 상황을 니체식으로 말하면,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이 된다. 진정한 사제관계, 멘토-멘티 관계는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고 배움을 얻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오디세우스도 친구인 멘토르에게 어린 아들을 맡기면서 부탁한 것은 ‘영원히’ 맡아 달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아들이 혼자 살아 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질 때까지’ 였다. 결국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관계는 제자나 멘티가 아직 미성숙한 단계일 때만 해당된다. 제자나 멘티가 성숙해지면 이제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무술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무술 수련을 하던 제자에게 스승이 “이제 하산하거라!”하고 명령을 내린다. 하산하라는 지시는 아무 제자에게나 하는 말이 아니다. 스승이 보기에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거나 제자의 수준이 스승과 비슷하다고 인정한 경우에만 하는 말이다.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는 제자에게 하산을 명함으로써 기존의 사제관계를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사제관계를 마무리한다고 해서 사제관계 자체를 완전히 없애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가르침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각자 스스로 깨우치는’ 관계로 발전했다는 뜻이다. 스승은 이제 제자의 독립성을 인정함으로써 기존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제자가 스스로 깨우친 내용에 대해서는 스승이 오히려 배울 수도 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스승이라면 이러한 상황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중국 명나라때 사상가 이탁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배울 게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이탁오도 최고의 사제관계는 친구와 같은 사이라고 보았다. 일방적으로 배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같은 관계가 진정한 관계라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스승은 필요없다’거나 ‘스승을 존경하지 말자’라고 해석하지 않았으면 한다. 제자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으로부터 많이 배워야 하고, 또 그러한 스승을 당연히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더욱 좋은 관계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가 성장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서 가르침을 받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조언과 도움을 주는 위치에 있다. 해서,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주고,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관계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이탁오(李卓吾), 분서(焚書)
이지(李贄, 1572~1602)는 탁오(卓吾)라는 호로 더 유명. 그만큼 중국철학사에서 저주받았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유학자로부터 출발했던 이지가 공자나 맹자, 그리고 주자라는 유학의 철학자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존의 사유로부터 벗어나서 자신만의 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고독한 철학자였다. 자신의 사유가 당시에는 읽히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니체처럼, 그도 자신의 책이 ‘불태워져야하는(焚)’혹은 ‘공개되지 않고 숨겨야할(藏)’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그의 책들이 불같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은밀히 소장되어 읽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
1.이지(李贄)의 삶
1.이지의 탁월함은 그가 위대한 인물을 흉내 내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고 결단했다는 데 있다. 공자를 만세의 사표로 생각하는 평범한 유학자라면 감히 하기 힘든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임제나 니체의 기개가 보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다라서 잘한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였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속 분서(續焚書)>「성교 소인(聖敎小引)」
2. 1555년(29세) 하남성(河南省) 교유(敎諭)라는 벼슬에서부터 시작된 이지의 관직 생활은 1580년(54세) 운남성(雲南省) 요안(姚安)의 지부(知府)라는 벼슬로 마무리가 된다. 이때까지 이지는 유학에서 요구하는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62세의 이지는 1588년 여름 지불원(芝佛院)에 들어오기 전날 머리를 깎게 된다. 그는 자신이 머리를 깎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집안의 한가한 사람들이 때때로 고향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때때로 천리를 멀다 않고 나를 찾아와 세상일에 관계하도록 나에게 강요합니다.
그래서 머리를 깎음으로써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세상일과 관계하지 않겠다는 것을 결연하게 보여주려 했습니다. 또 요즘에는 견식이 없는 사람들이 나를 이단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이단이란 이름에 맞추려 합니다. 위의 이 몇 가지로 이유로 갑자기 나는 머리를 깎았는데, 그것이 본래 내 마음은 아닙니다.” <분서(焚書)>「여증계천(與曾繼泉)」
3.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지가 머리를 깎았던 해 6월 그녀의 부인이 고향 천주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그녀의 부인 황영, 즉 도화(桃花)라고 불렸던 그녀의 부인 황영(黃英)은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고 장녀를 제외한 나머지 딸들을 병으로 여윈 박복한 생애를 보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이지의 사랑은 절절한 데가 있었다. 새 여자를 들이자고 했던 부인의 의견도 단호하게 거절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지의 상심은 컸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혈연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자유인으로서 삶만이 남은 것이었다.
여기서 이지의 잔혹성(Cruelty)이 빛을 발한다. 어찌할 수 없었던 과거의 모든 인간관계, 즉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었던 인간관계가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그는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가족들이나 자신에게나 이토록 잔인한 행동도 또 어디에 있을까.
3. 신종(神宗, 재위기간; 1572-1620)은 1602년 마침내 76세의 이지를 잡아들여 처벌하라고 교지를 내리게 된다. 노령인 데다가 지병이 있고 또한 이지를 변호하는 상소도 있어서, 당국은 그를 고향 천주(泉州)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지는 스스로 자살을 결심한다. “내 나이 지금 76세인데 여기서 죽을 뿐이지, 어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마침내 3월 15일 이지는 머리카락을 깎겠다는 명분으로 시종하는 사람을 부르게 된다.
머리를 깎는 와중에 그는 갑자기 칼을 빼앗아 스스로 목을 찌르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바로 죽지 않아 이틀 동안 고통스런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비록 그가 시종하는 사람의 손바닥에 “아프지 않다”고 손가락으로 글씨는 썼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지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미 <분서>에서 그는 미래에 있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숙고하고 있었다. “이미 목숨을 바쳐도 좋을 지기(知己)가 없다면, 나는 장차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죽음으로써 나의 분노를 씻어낼 것이다.” (「오사(五死)」)
2. <분서>의 구성
1590년 64세의 나이로 이지는 마성(麻城)에서 저자 서문을 붙여서 <분서(焚書)>를 처음 간행한다. 그 뒤 1600년에 <분서>는 그 사이 10년 동안 이지가 지은 것을 추가하여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판본으로 다시 편집되어 간행된다.
<분서(焚書)>서문 “나에게는 네 종류의 책이 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장서(藏書)>인데, 고금 수천 년 동안의 시시비비 중에서 육안으로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바를 말하였다. 이 때문에 책을 숨겨두려 했으니 장서라는 책 제목은 응당 깊은 산 속에 숨겨서 후세의 자운을 기다리겠다는 심정을 말한 것이다. 또 하나는 <분서(焚書)>인데, 마음 맞는 벗들의 편지 물음에 대한 답장으로 요즘 학자들의 폐단을 자못 절실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고질병을 정면에서 꼬집었으니, 그들은 필시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책을 태우려 하였으니, 응당 불태워 없애야 하고 남겨두면 안 되는 사정을 말한 것이다. 분서 뒤에 별록을 두어 <노고(老苦)>라고 명명하였다. 비록 <분서>에 속하기는 하지만 별도로 묶어 목차를 매겼으니, 책을 태우고 싶은 자는 이것도 태우려 할 것이다. 오직 <설서(說書)> 44편만은 진실로 좋아들 할 만한 것으로 성인 말씀의 핵심을 드러내고 일상의 평범한 이치를 천명하고 있어서, 독자들이 한 번 보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사실과 출가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무릇 내 글을 태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람의 귀를 거슬린다고 말할 것이고, 내 글을 출간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쏙 들어온다고 말할 것이다. 귀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나를 죽일 것이니 이것이 두려워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내 나이 64세이다. 혹여 어느 한 편이라도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나를 알아줄 사람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기대가 충족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이다.” |
<분서>는 크게 다섯 부분, 즉 ‘서답(書答)’, ‘잡술(雜述)’, ‘독사(讀史)’, ‘시가(詩歌)’, ‘증보(增補)’로 구성되어 있다.
‘서답’ 부분은 이지가 동시대인들에게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밝힌 답신들이 실려 있다. ‘잡술’ 부분은 일관된 주제로 쓰인 이지의 논문들, 다양한 책들의 서문들, 다양한 고문(告文)들로 구성되어 있다.
‘독사’는 이지 특유의 사유가 구체적으로 반영된 역사 논평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가’는 자유인 이지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감정에 젖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증보’ 부분은 이지가 다시 편집하여 수록한 ‘답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3. <분서> 내용
1. 배움에 어찌 방법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는 그대가 항상 강조하시는 고명한 말씀이고, 그대가 공자에게 배워 깊이 믿으면서 가법으로 삼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공자의 말씀이니,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무릇 하늘이 한 사람을 나게 하면 저절로 그 한 사람의 쓰임이 있게 마련이니,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사람으로서의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반드시 공자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과거 멀리 공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제대로 된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공자의 학설을 배우기 원했던 것이야말로 맹자가 맹자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됩니다. 저는 바야흐로 그의 사내답지 못한 나약함을 통탄하는데, 그대는 제게 그것을 원한다고 여기십니까? <분서>「답경중승(答耿中丞)」
2. 어제 내려주신 커다란 가르침에는 부녀자의 소견은 좁아서 도를 배울 수가 없다고 써 있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무릇 부녀자는 문지방을 나갈 수 없고, 남자들은 활이나 화살을 들고 나가 사방으로 사냥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소견의 좁고 넓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소견이 좁다는 것은 부녀자가 본 것이 안방문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소견이 넓다는 것은 밝고 넓은 벌판을 깊이 살펴보았기 때문입니다. <분서>「답이여인학도위견단서(答以女人學道爲見短書)」
3. 남편과 아내는 인간의 시작이다. 남편과 아내가 있은 다음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은 다음에 형과 동생이 있고, 형과 동생이 있은 다음에 아래와 위가 있다.
부부가 바르게 된 다음에야 온갖 일이 모두 바르게 시작된다. 부부는 이와 같이 만물의 시초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하늘과 땅도 하나의 남편과 아내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 있은 다음에 만물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하의 만물은 모두 ‘둘[兩]’로부터 생긴 것이지 ‘하나[一]’로부터 생긴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하나’가 ‘둘’을 낳고 ‘이치[理]’가 기(氣)를 낳으며 태극(太極)이 음과 양을 낳는다고 말하는 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애초에 사람을 낳을 때 단지 음과 양이라는 두 기나 남자와 여자라는 두 생명만이 있었지, 이른바 하나라든가 이치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찌 태극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분서(焚書)>「부부론(夫婦論)」
4. 무릇 동심(童心)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모습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분서>「동심설(童心說)」
5. 아! 심상이 어떻게 비워질 성질의 것이겠는가! 그래서 ‘남보다 곱절이나 미혹에 빠졌다’라고 말한 것이다. 어찌 알겠는가, 나의 색신이 밖으로 흘러 산과 강에 이르고 대지를 두루 덮으며 눈에 보이는 커다란 허공 등과 어우러지는 이 모든 것은 나의 오묘하게 밝혀진 진심(眞心) 가운데 한 점 물상(物相)일 따름인 것을! 이는 심상(心相)의 자연스러운 양태일 뿐이니, 누가 그것을 비울 수 있겠는가! 심상이 결국 진심 가운데서 보이는 물상이라면, 진심이 어떻게 진실로 색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겠는가!
무릇 모든 상(相)들은 결국 나의 진심 가운데 들어 있는 한 점 물상이어서, 이것은 물거품이 결국 망망대해 한가운데의 한 점 포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바다에서 한 점 포말을 없앨 수가 있다면 진심에서 또한 한 점 상을 제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미혹에 빠질 것인가! 순서대로 정리해 살펴보면 어둠으로 공을 삼는 미혹은 깨뜨려야 할 뿐이다. 게다가 진심은 이미 색신을 포괄하여 산하, 허공, 대지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상(相)으로 삼고 있다면, 상이 마음이고 마음은 색신 안에 존재한다는 그 미혹 또한 깨뜨릴 수 있다. <분서>「해경문(解經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