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소(Sacred Cow): (특히 부당하게) 그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생각, 관습, 제도
먹기 좋게 일정 크기로 가공된 새하얀 닭가슴살 팩, 다양한 크기의 소시지와 베이컨 등을 집 근처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지금, 우리는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다. 식량 생산 방식에 변화가 있기 전, 그러니까 앞마당에서 돼지를 키우고 뒷마당에서 닭을 키우던 때와는 달리 오늘날 치킨이나 스테이크를 먹는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고기가 실제로 살아 숨 쉬는 동물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일부에서 유리되어 나쁜 것,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 채식의 논리를 점검하고 육식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책 《신성한 소》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살아서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당연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또한 식량 시스템에서 육식을 배제하고자 하는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 단순하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인류가 수백만 년 동안 의존해온 식량원이 어쩌다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불쾌한 식량으로 전락했을까?”
편견을 넘어선,
지구를 위한 새로운 논의
고기반찬을 노골적으로 찬미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났다. 대체육으로 만든 비욘드 버거, 치킨을 사용하지 않은 치킨 너겟, 채식주의자를 위해 동물성 원료를 배제한 채식라면 등이 활발히 유통되고 있는 지금, 채식은 문화이자 트렌드일 뿐 아니라 폭력과 살생으로 얼룩진 세상에 대항하기 위한 신념의 일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는 곧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먹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학교 급식에 채식 식단을 선택할 권리를 달라는 진정이 인권위원회에 제출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5세 미만의 어린이 50만 명가량이 비건 식단으로 영양분을 섭취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채식과 육식에 관한 논의는 감정적으로 흐르기 쉽다. 건강을 이야기하면 환경이 튀어나오고, 환경을 가라앉히면 윤리적 측면에서 불씨가 지펴진다. 그러다 보면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쓴 영양사 다이애나 로저스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생화학자 롭 울프는 그런 식의 토론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성한 소》에는 이리저리 널뛰는 쟁점들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제별로 한곳에 모았다. 두 사람은 건강의 관점에서, 환경의 관점에서, 윤리의 관점에서 우리의 식탁에 도대체 어떤 음식들이 올라와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이들의 논의에는 단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 유기체를 포함한 지구 전체의 안녕이 달려 있다.
부유한 백인 엘리트의 식탁에서
고기가 빠진 이유는?
영양학적 관점에서는 사실에 근거한 육식의 효용과 채식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조명한다. 육식이 암, 당뇨병, 심장질환 등 만성질환을 유발한다는 결과를 도출한 많은 연구는 인과관계와 상관관계가 혼동되어 부풀려지거나 왜곡되었음을 밝힌다. 적색육을 포함한 동물성 식품은 줄곧 우리에게 소중한 에너지원이자 효율이 좋은 식량이었다. 채식만으로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현저히 많은 칼로리를 섭취해야 하는 데다가,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비타민 보충제를 섭취해야만 영양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개발도상국의 사정을 고려하면 선진국의 부유한 엘리트들이 추구하는 식단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조명한다. 한편, 환경적 관점에서는 소의 방귀와 트림이 메탄가스를 과도하게 발생시켜 지구 온난화를 부추긴다는 흔한 오해와 더불어, 소가 물을 너무 많이 마시거나 사료를 너무 많이 먹어서 자원을 낭비한다는 염려를 사실에 근거한 분석을 통해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오히려 지구를 망치는 것은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투여해 단일 작물을 생산하는 줄뿌림 농업일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조심스럽고도 세심하게 서술된 부분은 윤리적·철학적 관점에서의 육식과 채식에 대한 고찰이다. 저자는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에 대한 소개를 통해 종교와 채식주의가 결부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한편으로 채식을 포기한 블로거에게 가해진 협박이나 조롱, 정육점에 대한 시위와 테러 협박, 비건 부부가 생후 6주에 접어든 아이에게 사과주스와 두유만 먹인 끝에 아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등을 조명한다. 작은 농장에서 코요테에게 공격당한 양의 시체를 보고 충격에 빠진 아이들에게 자연이 어떻게 순환하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엄숙한 감동마저 느껴진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은 순환한다. 인간은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층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포함된 네트워크 속에 산다는 점, 무언가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간곡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을 수 있고 없는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생산하고 먹어야 하는가’이다.
비합리적인 잣대를 향한 일침
‘신성한 소’를 ‘자연 그대로의 소’로
고기를 먹는 행위는 어느덧 식탐, 살생, 힘, 권력 등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고기를 많이 먹으면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에 일조하게 된 것만 같다. 반면에 채식주의는 건강, 깨우침, 교양, 순수함, 바른 생활을 대변하는 인도적인 결단이자 윤리적인 선택으로 여겨진다.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이 핵전쟁에 반대하거나 여성의 인권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처럼 보인다. 이 책은 묻는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 과연 좋은 사람일 수 있을까?”
채식과 육식에 대해 단단히 굳어진 인식은 어느덧 ‘그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관습이나 제도’를 뜻하는 ‘신성한 소’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책은 ‘신성한 소’를 ‘자연 그대로의 소’로 되돌리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부유한 백인 엘리트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나누는 오만함을 지적하면서 식탁에서 고기를 배제하는 것이 생태계와 인류의 미래에 가져올 암울한 파급효과를 설명하고 있다. 《신성한 소》를 통해서 지속 가능한 식량 시스템과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지구의 안녕을 위해, 당장 오늘 저녁 한 끼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먹어야 할지 생각해볼 때다.
책 속으로
우유, 날고기, 동물 피, 꿀은 케냐와 탄자니아 북부 지역에 사는 마사이족의 전통 식품이다. 마사이족은 채소는 거의 안 먹는다. 식단의 3분의 2가 동물성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도 심장 질환에 잘 걸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통알곡과 케일을 먹으라고 말해야 할까? 이미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채소가 잘 자라지 않는 땅에 식물을 심으라고 서양식 도덕을 강요하는 것이 윤리적일까? 이런 사람들에게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전통적인 식단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도덕적이지 않다면 왜 그런 행동이 서구화된 사회에서는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농산물을 생산할 때도 생명이 죽고 자연에 해를 많이 끼치게 된다. 최소한의 해를 끼친다는 개념을 식탁에 살이 올라가느냐 안 올라가느냐로 판단할 수는 없다.
여러 서양 사회가 지탄받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위계질서가 너무 뚜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식량을 개인의 순수함을 시험하는 기준으로 삼으면 또 다른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사다리가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여러 가지 차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자연에는 위계질서는 없고 배고픔만 있다. 우리는 피라미드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속에 산다. 인간은 네트워크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살아남으려면 네트워크에 있는 다른 모든 부분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벌, 새, 뱀, 물고기, 초원, 강이 모두 필요하다. 인간은 생물이 최대한 다양하게 있어야 번성할 수 있다. 우리의 산업적인 식량 시스템은 생물 다양성을 말살해버린다. 동물을 없애버린 식단은 산업적인 농법에 완전히 의존하는 식량 시스템과 맞물려 있다.
실험실 배양육은 건강, 윤리, 환경보다는 지적 재산권과 수익에 관한 것이다. 많은 식물성 식품 예찬론자가 실험실 배양육을 지지하는 상황은 그런 지적 재산권과 수익을 노리는 사람들에게는 잘된 일이다. 사람들에게 이런 식품이 ‘깨끗하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찌 됐든 실험실 배양육은 ‘가짜’ 고기다.) 고기 대체품의 생산은 원재료를 더 가공해서 환경에 대단히 파괴적인 농사법을 이용해 수익을 더 많이 올리는 방법이다. 화학 물질이 이렇게 많이 필요하고, 토양의 건강을 망가뜨리고, 소비자와 식량 생산자의 거리를 더 멀어지게 하는 시스템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도덕성도 따져봐야 한다. 결국, 우리는 생물 반응기에서 만들어진 고기가 실험실 배양육을 생산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콩과 옥수수를 고기로 전환하려면 자연에서는 동물만 있으면 되지만 실험실에서는 에너지가 훨씬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이 모든 행동이 환경에 ‘최소한의 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7장에서 살펴본 ‘초원’ 실험을 기억하는가? 실험실 배양육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정반대 방향에 놓여 있는 식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