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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청동기, 아카드 제국, 엘람, 아시리아 고왕조

Jobs9 2021. 5. 10.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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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의 청동기 군사 혁명

 

수메르인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후 우르, 키쉬, 우르크, 니푸르, 라가쉬와 같은 여러 도시 국가들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연합하거나 전쟁을 벌이면서 공존해 나가면서 무기 면에서도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메르인은 청동 판금 갑옷, 투구, 만곡도, 찌르는 도끼 등을 차례로 탄생시켰고 초기 형태의 전차까지 개발하였다. 당시의 전쟁은 석창과 나무 방패를 든 보병들의 대결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때 등장한 수메르인의 신무기는 동시대인들에게 가히 청동기 군사 혁명이라 할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먼저 수메르인이 만들어낸 구리검은 역사상 최초의 살인용 검이었다. 수메르인은 후기에 등장하는 철보다는 구하기 어렵지만 제련이 용이했던 구리를 이용하여 전쟁시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구부러진 모양의 만곡도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구리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판금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내었다.

 

무엇보다 주변 문명과 구분되는 수메르의 무기는 전차였다. 비록 수메르의 전차가 4개의 통나무 모양의 바퀴를 이용하여 4마리 말이 끄는 형태로 형태는 투박하고 기동은 오직 평지에서만 가능했으며 그 속도도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수메르인은 전차를 보유하면서 주변 민족과 차별화 된 전술이 가능해졌다. 수메르인은 전차를 이용하여 상대 진형을 유인하며 멀리서 투창을 던지고 접근한 적을 창으로 찌르는 등의 공격을 했다. 무엇보다 실용성을 떠나서 전차는 상대에게 겁을 먹게 할 만한 외형을 자랑하였기에 전의를 상실케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수메르인의 전차는 후에 아카드인에 의해 개량되어 이집트 등으로 퍼져나갔다.

 

수메르인은 무기의 발달 이외에도 세계 최초로 상비군을 두면서 보병의 밀집 대형을 만들어 내었다. 도시 국가 간의 분쟁이 일상화되면서 각 도시들은 600~700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상비군의 보유로 인하여 상당한 훈련도와 단결력이 필요한 밀집 대형이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 수메르 인들은 전쟁을 벌일 때 기존과 같은 산발적인 개인 대결이 아니라 밀집 진형을 이루고 1열이 무너지면 2열이 그 자리를 메꾸면서 조직력을 발휘하는 집단 전술을 이용하여 주변 민족들을 압도해 나갈 수 있었다.

 

 

아카드 제국

 

사르곤 1세 시대

 

수메르가 지배하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아카드인(Akkadians)'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아카드(Akkad)'는 수메르 도시 중 키쉬 근방을 이르는 말로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아카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아카드인들은 자신의 남쪽에 사는 사람들을 수메르인으로 부르며 구분하였다. 아카드인의 유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함족(Hamites)', '아리안족(Aryans)'과 함께 유럽 3대 인종 중 하나인 '셈족(Semites)' 계열의 일파로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노아(Noah)의 맏아들인 셈(Shem)의 자손으로 전해진다. 수메르의 도시 북쪽에서 선사 시대부터 거주하였던 아카드인은 BC 2350년경 사르곤 1세(Sargon I)에 의해 통일되면서 주변의 수메르의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고 역사상 최초의 다민족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사르곤(Sargon)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고 어머니는 여사제였다고 전해진다. 사르곤의 어머니는 사제의 신분으로 몰래 사르곤을 낳은 후 바구니에 담아 유프라테스 강에 떠내려 보냈으나 강에서 물을 길던 키쉬의 한 정원사가 사르곤을 우르크의 하늘의 여신인 '인안나(Inanna)'로 여겨서 데려다 기르게 되었다. 참고로 인안나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이슈타르(Ishtar)'와 동일시되는 여신으로서 미와 연애, 풍요와 다산, 전쟁, 금성을 상징하여 그리스 신화의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원형이 된다. 

 

이후 사르곤은 키쉬의 왕인 우르-자바바(Ur-Zababa)의 총애를 받아 술잔을 받드는 시종이 됐고 나중에 키쉬의 왕위를 빼앗았다. 그리고 궁병대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정복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수메르를 지배하던 움마의 루갈-자게-시를 포로로 붙잡으면서 수메르 전체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수메르를 넘어서 티그리스 강 동쪽의 '엘람(Elam)', 오늘날 '시리아(Syria)'에 있던 '마리(Mari)'와 '에블라(Ebla)', 북쪽의 '수바르투(Subartu)', 나중에는 '아시리아(Assyria)'까지 정복하면서 남쪽으로는 페르시아 만, 북쪽으로는 토로스 산맥(Taurus Mountains),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쪽으로는 엘람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역사적으로는 후대의 아시리아의 사르곤과 구분하기 위해 아카드의 사르곤을 '사르곤 1세(Sargon I)'로, 아시리아의 사르곤을 '사르곤 2세(Sargon II)'로 각각 부르게 된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사르곤 대왕(Sargon the Great)'이라고 부르게 된다. 사르곤 1세는 내정에도 힘써서 '아게이드(Agade)'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사르곤 1세는 56년 간 제국을 통치하면서 중계 무역을 독점하여 재정의 기반으로 삼고 도량형을 정하였다. '셈어(Semitic languages)'의 방언인 '아카드어(Akkadian language)'를 국제 공용어로 만들었는데 아카드어는 아카드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오리엔트 지방의 공용어가 되어 외교 문서에 사용된다.

 

리무쉬와 마니쉬투슈 시대

 

아카드 제국은 사르곤 1세 말년부터 각지의 반란에 시달려 한때 수도까지 포위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BC 2334년 사르곤 1세가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인 '리무쉬(Rimush)'가 왕위를 이어받은 뒤에는 반란이 더 심해져서 수메르 지역 뿐만 아니라 동쪽의 엘람 지역에서도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리무쉬는 이를 진압하느라 치세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리무쉬가 재위 9년만에 암살당하자 그의 형인 '마니쉬투슈(Manishtushu)'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마니쉬투슈는 키쉬의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수메르 신화에서 대홍수 이후 최초로 등장한 도시였기 때문에 수메르인에게 그 상징성을 이용한 것으로 본다. 마니쉬투슈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쳐 이란 지방인 엘람의 '안샨(Anshan)', '수사(Susa)'와 바다 건너 오만 지역인 '마간(Magan)'까지 군사를 보냈다.

 

 

나람-신 시대

 

BC 2255년에 마니쉬투슈가 죽고 그의 아들인 나람-신(Naram-Sin)이 즉위하였다. 나람-신도 즉위 초 속국의 반란을 경험해야 했는데 가장 먼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키쉬와 우르크가 봉기하고 많은 수메르 도시들이 동참하였으나 이를 진압하였다. 또한 동쪽의 엘람 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으나 오래지 않아 모두 토벌했다. 반란을 모두 토벌하자 나람-신은 정복 활동도 활발히 벌여서 서쪽의 시리아 지방의 '아르만(Arman)', '에블라(Ebla)', '아마누스(Amanus)', '삼나무 산(Cedar Mountain)'으로 진출했고 남쪽의 오만 지방을 지배하던 마간의 왕을 격파하여 영토를 넓히기도 했다. 특히 나람-신은 이란 자그로스 산맥의 '룰루비족(Lullubians)'이 침입해오자 이를 격퇴하고 자신의 전적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이란의 시파르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프랑스어 Musée du Louvre)'에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아카드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한 나람-신은 스스로를《세계의 네 모퉁이의 왕(아카드어 šarru kibrat 'arbaim)》, 《우주의 왕(아카드어 šarru kiššat māti)》이라고 불렀고 자신의 이름에 달의 신 이름인 '신(Shin)'을 붙여 스스로를 신격화하였다. 하지만 나람-신이 죽자 아카드 제국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BC 2150년경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 살던 산악 민족인 '구티족(Gutians)'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아카드 제국의 전차와 복합궁

 

사르곤 1세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정복하게 된 큰 무기는 개량된 '전차(Chariot)'와 '복합궁(compound bow)'이었다. 최초의 전차는 수메르인에 의해 개발되었으나 이것은 육중하고 느려 전술적인 활용도가 크지는 않았다. 아카드인들은 수레 바퀴를 개발하면서 이를 이용하여 바퀴를 둔중한 4개의 통나무 바퀴가 아닌 2개의 수레 바퀴를 이용한 전차를 개발하였다. 아카드인들의 이륜 전차는 수메르인의 사륜 전차에 비해 더 가볍고 튼튼했고 속도가 빨라졌으며 좀더 다양한 지형에서 활용이 가능해져 전차의 장거리 원정이 가능해 졌다. 아카드인의 전차는 두 마리 말이 끄는 한 대의 전차 위에 궁수, 마부, 창병이 각각 한 명씩 탑승하는 것을 기본 편제로 구성했다. 아카드인의 전술은 궁수는 장거리에서 적을 상대하고 도끼, 창, 단검, 몽둥이 등 각종 접근 무기로 무장한 창병은 전차가 적진을 돌파하거나 퇴각하는 적을 뒤쫓을 때 활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3명이 한 조를 이루는 방식의 전차 운용은 이후 지중해 동부, 인도, 중국 등 세계 주요 문명국에서 활용하는 전차의 원형이 된다.

 

전차 이외에 아카드인들은 목재와 동물의 힘줄, 뼈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적절히 사용한 복합궁을 개발해 내었다. 기존의 수메르인이 살던 지역에는 나무가 귀해 활이 잘 이용되지 않았고 그나마 사용되던 활도 단일 재료로 만든 단순궁이었기 때문에 사거리가 50~100야드(45~90m) 정도밖에 되지 않은 데다가 가죽 갑옷 조차 뚫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약했다. 그러나 아카드인이 만든 복합궁은 4가지 재료를 만들어 탄력이 강화되면서 사거리가 200~300야드(180~270m)로 월등하게 늘어났고 초기의 청동갑옷도 관통할 정도로 상당한 위력을 보여줬다.

 

사르곤 1세의 치세 시절부터 아카드 제국은 궁병대와 전차를 전쟁의 주력으로 선택하면서 청동기 시대의 전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특히 전차와 복합궁의 결합은 그 위력이 상당했는데 전차의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이동하면서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붇다가 상대 보병의 진형이 무너지면 돌격하여 상대를 격퇴시키는 전술이 가능하였다. 기동력과 원거리 공격능력 모두 부족하였던 당시 보병들은 전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사르곤 1세는 무기의 개발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상비군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수메르의 도시 국가들이 각기 600~700명의 상비군을 두었지만 사르곤 1세 시절의 아카드 제국은 5,000~6,000명 정도의 상비군을 유지시켰다. 이들 상비군은 왕에게만 충성하는 친위대로서 대규모 원정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정복된 영토에서 군대를 징발할 경우에는 수만 명의 군대를 보유할 수도 있었다.

 

 

 

아카드 제국 이후의 혼란

 

우르 제3왕조

 

구티인은 이란 북서부의 자그로스 산맥 일대에서 살던 산악 민족이었다. 비록 구티인이 아카드 제국을 무너뜨리고 약 100년간 지배하는 '구티 왕조(Gutian dynasty)'를 세웠지만 라가쉬의 왕인 구데아(Gudea)의 기록 등으로 볼 때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아카드 제국이 무너지면서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수메르 도시들이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BC 2130년경 우루크의 우투-헤갈(Utu-hengal)이 구티 왕조의 마지막 왕인 티리간(Tirigan)을 물리치면서 구티 왕조가 멸망하였다. 그러나 우투-헤갈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하여 BC 2100년 우르의 우르-남무(Ur-Nammu)가 우투-헤갈을 암살하고 수메르의 '우르 제3왕조(Third Dynasty of Ur)'를 창건하게 된다.

 

우르-남무가 우르 제3왕조를 세우면서 수메르 문명이 일시적으로 부흥하였다. 우르-남무는 아카드 제국 멸망 이후 혼란의 시기였던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정복에 나서 '이신(Isin)','라르사(Larsa)', '에쉬눈나(Eshnunna)' 등의 도시를 세력권에 포함시켰고 특히 가장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던 라가쉬를 정복한 이후에는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수메르어 lugal-ki-en-gi-ki-uri)'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Abraham)의 출신지인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도 우르 제3왕조에 속해 있었다. 우르 제3왕조는 약 100년간 유지되었지만 BC 2004년경 이란에서 온 엘람의 침입으로 5대 왕인 입비-신(Ibbi-Sin) 시대에 멸망하였고 이후 수메르인은 셈족과 동화된다.

 

 

 

엘람

 

고대 이란 지방에는 BC 4000년경부터 인류가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이란인의 조상인 아리안족이 이동해 오기 전에는 엘람이라고 불리는 민족이 살았다. 이란 지방의 발굴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발견된 유물도 적어 비슷한 시기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록과 성경에 의존하여 겨우 그 윤곽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엘람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그 성격이 달랐는데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농업을 주로 하였던 반면 엘람 지역은 광물질과 지하 자원을 주로 수출했다. 엘람은 그 세력이 오늘날 이란의 후제스탄(Khuzestān) 주, 파르스(Fars) 주, 부셰르(Bushehr) 주, 케르만(Kehrmann) 주의 일부분, 쿠르디스탄(Kurdistān)과 로레스탄(Lorestan) 지역까지 확장됐고 정치적으로는 연방제 성격을 띄었으며 '수사(Susa)'를 수도로 삼았다.

 

엘람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뉘는 데 그 중에서 제1기인 고대 엘람(Old Elamite period, BC 2700년경 ~ BC 1500년)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비해 힘이 미약하던 시기였다. 수메르 키쉬 왕조의 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에게 정복당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엔메바라게시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므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엔메바라게시의 이름이 나오는 고고학적 유물이 존재하므로 어느정도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이후로도 라가쉬의 에안나툼과 아다브의 루갈안네문두와 같은 수메르의 강력한 왕들도 일시적으로 엘람을 지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엘람의 첫 왕조는 BC 2700년경에 나타난 '아완 왕조(Awan dynasty, BC 2400년경 ~ BC 2100년경)'이지만 아카드 제국의 전성기 시기가 겹치므로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1세 혹은 나람-신에게 지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카드 제국이 구티인에게 멸망당한 후 엘람의 아완 왕조가 독립하였으나 아완 왕조 역시 구티인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고 말았다. 이어서 '시마시키 왕조(Sukkalmah Dynasty, BC 2100년경 ~ BC 1970년경)'가 일어나 구티 왕조 및 그 뒤를 이은 우르 제3왕조와 대결을 벌이게 되었고 시마시키 왕조의 제6대 왕인 킨다투(Kindattu)가 BC 2004년에 우르를 침공하여 우르의 왕인 입비-신을 사로잡으면서 우르 제3왕조가 멸망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수메르의 다른 도시인 이신에 의해 밀려나면서 엘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시마시키 왕조의 뒤를 이어 '에파르티 왕조(Epartid Dynasty, BC 1900년경 ~ BC 1500년경)'가 엘람을 지배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바빌론(Babylon)'의 함무라비(Hammurabi)와 대결을 벌이다가 패배하여 그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이신-라르사 시대

 

우르 제3왕조가 엘람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유프라테스 강 중류에 살던 셈족 계열의 유목 민족인 '아모리족(Amorites)'이 엘람을 몰아내고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지배 민족이 되었다. 우르 제3왕조의 마지막 왕인 입비-신의 신하인 이쉬비-에라(Ishbi-Erra)가 이신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우르 제3왕조가 무너지고 입비-신이 포로로 붙잡혀 엘람으로 끌려가자 이쉬비-에라가 엘람을 몰아내고 우르를 되찾았다. 그리고 문화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우르크까지 장악하면서 이쉬비-에라가 '이신 왕조(Dynasty of Isin)'를 세우고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아모리족을 이끌던 나플라눔(Naplanum)이 라르사를 포함한 라가쉬 지역을 장악하였다. 처음에 나플라눔은 이쉬비-에라의 지배를 받아들였으나 라르사의 5번째 지배자인 군구눔(Gungunum)이 우르를 정복하면서 이신 왕조와 대등한 힘을 보유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이신과 라르사가 서로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이신-라르사 시대(Isin-Larsa Period, BC 1950∼BC 1700년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신-라르사 시대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빠르게 장악한 아시리아에 의해 세력이 위축되었고 최종적으로 아모리족이 세운 또 다른 도시인 바빌론의 함무라비에게 모두 멸망당하게 된다.

 

 

아시리아 고왕조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던 BC 3000년 경에 셈족 계통의 유목민이 가세하면서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 국가인 '아슈르(Assur)'가 건설되었다. 사실 '아시리아(Assyria)'란 이름도 바로 아슈르에서 유래한 것이다. 초기 아시리아는 아슈르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도시 국가와 작은 셈족의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샴시아다드 1세(Shamshi-Adad I, 재위 BC 1813년 ~ BC 1781년)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정치적인 통일을 달성하고 주변을 정복하며 메소포타미아 북방의 강국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샴시아다드 1세는 아슈르를 정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번영하던 시리아의 마리를 점령하는 등 재위 기간 동안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거의 다 장악하였다. 그러나 샴시아다드 1세가 급사하면서 아시리아는 그 사이 급성장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에게 아슈르를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후 아시리아는 약 1세기 동안 바빌로니아의 속국으로 남아 있다가 BC 1378년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침입한 '후르리족(Hurrians)'에게 정복당하면서 '아시리아 고왕조(Old Assyrian Empire)'가 멸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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