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점 | 수니파( Sunnis ) | 시아파( Shiis ) |
지지자 | 94천만 | 12천만 |
무슬림 중 비율 | 85~90% | 10~15% |
예언자의 대리인(후계자)에 대한 관점 예언자=무함마드 |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고 믿으며,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범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가 슈라(Shura)라는 협의 과정을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지정했다고 믿으며, 무함마드의 친족만이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
칼리프에 대한 관점 | 예언자는 무함마드의 장인인 아부 바르크를 시작으로 하는 4명의 정통 칼리프를 인정합니다. |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며, 4명의 정통 칼리프 중 마지막 칼리프인 '알리'만이 진정한 칼리프이며, 따라서 알리의 후계자들만이 진정한 이슬람의 지도자라고 봅니다. |
지도자에 대한 관점 | 절대적인 종교적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많은 권위 있는 학파들이 공존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이맘은 기독교의 목사나 신부처럼 평범한 지도자일 뿐이지요. | 알리의 혈통을 이은 이맘들을 정통의 후계자들로 보기 때문에 이들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교황에 맞먹는 권위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코란에 대한 관점 | 코란을 영원하다고 보고 그 해석에 충실합니다. | 이맘을 무함마드에 버금가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보고 그들의 코란해석을 신봉합니다. 이란에서 종교 지도자가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절대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도 이맘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제도에서 비롯되죠. |
세력 | 거의 전 세계적. 동남아시아, 중국, 남아시아, 아시아, 그리고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등 대부분의 아랍권에서 주류는 수니파 | 이란(전 국민의 90%정도), 이라크, 레바논, 아제르바이잔, 바레인 등 |
무함마드(예언자): 이슬람에 있어서 기독교의 예수와 비슷한 위치를 가진 존재
칼리프: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이슬람 교리의 순술성과 간결성을 유지하고, 종료를 수호하며,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모든 일을 관장.
이슬람교를 따르는 무슬림은 크게 두개의 종파,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로 나뉜다. 오늘날 전 세계 약 18 억 무슬림 중 약 85%가 수니파고 15%는 시아파다. 시아파는 이란,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등의 이슬람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수니파는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40 개 이상의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한다.
종파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니파와 시아파는 1400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 동안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함께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중동 여러 국가와 종교 세력들이 종교적,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며 수니파와 시아파 간 분열이 심화되었고, 서구(미국)의 개입에 지역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며 이 분열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걸쳐 복잡하디 복잡한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에 대해 알아보자.
분파의 유래
이 두가지 이슬람의 최대 종파 간 차이는 아들이 없던 무함마드의 계승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서 발생한다.
632년,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였던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다수인 수니파는 선출된 칼리파(대표자)가 후계를 이을 수 있다고 본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혈통, 알리를 계승자로 여겼다. 4대 칼리파였던 알리는 쿠데타 세력에게 암살당했고, 그러자 알리의 추종자인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 만이 칼리파의 자격이 있다'면서 새 지배자들에게 저항했다.
결국 1400년 이전의 지도자 계승 문제로 갈린 종파지만, 현대의 갈등 관계는 단순 교리의 차이를 넘어서 국가 간 세력 다툼과 직결되어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오랜 기간 평화와 분쟁 사이를 오가며 지냈지만, 20세기 들어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갈등, 석유, 초강대국의 개입을 비롯한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현대사
이란 이슬람 혁명, 중동 내 시아파 권력의 부상
분란의 조짐: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란의 국왕 무하마드 리자 팔레비(Reza Pahlavi) 는 미·소 냉전 체제에서 미국에 의지하며 국내 민주주의를 억압해 왔다. 1970년대 미국의 이란 중시 중동 정책 하에 이란의 석유 수출이 급증했는데, 일부 국왕 측근 만이 경제 붐에 편승하여 부를 누렸고, 일반 상공인과 농인 대부분은 파산하였다. 이렇게 국정운영의 비민주성,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 서구화 과정에서의 성직자 불만 고조로 왕정 체제의 위기가 가중되었다.
Ruhollah Khomeini
종교 혁명: 계속된 노동자의 파업과 반국왕 시위가 이어지면서 결국 국왕 팔레비는 이집트로 탈출했고, 추방되었던 시아파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 1979년 2월 11일 혁명정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혁명에서 공적이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이 이슬람 의회로 진출했고, 이들에 의해 채택된 이란이슬람공화국 헌법에 의해 최고지도자 호메이니는 삼권분립을 초월한 지위를 가졌으며, 종교 지도자로 이루어진 초의회적인 헌법감시평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로써 이란에는 시아파 이슬람 신정 체제에 공식적으로는 대통령 공화제가 덧붙여진 독특한 정치체제가 성립되었다.
이슬람 혁명의 파장: 1979년은 이슬람 세계에 추요한 시기였다. 이란에 시아파 정부를 수립한 호메이니는 자신이 단지 한 나라에서 혁명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 통치 이데올로기와 서양 식민 유산에 대한 거부 의식이 무슬림에게 보편적으로 통할 메시지라고 느꼈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단순히 시아파와 이란과 페르시아인의 지도자가 아닌 전체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수니파 지도층의 반발
아랍권의 수니파 종교·정치 지도자들은 호메이니의 이러한 급진적 사상이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이란의 군주를 무너뜨린 혁명을 목격하며 다수의 무슬림 대중은 이미 현혹되어 버렸다.
급진적 수니파 집단들 등장: 시아파의 자라나는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국가의 종교 지도자들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사상적 차이를 강조하며 시아파에 대해 편협한 경향이 있는 강경하고 급진적 수니파 정치·테러 단체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알 카에다(Al Qaeda), 탈레반(Taliban), ISIS(The 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와 같은 급진적이며 폭력적인 정치 테러 집단이었다. 이 집단들의 목표는 세속적 정부 체제의 전복과 이슬람 국가의 설립 뿐만 아니라, 시아파를 억압하는데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1980~1988): 이란의 시아파 혁명에 대해 가장 폭력적으로 반응한 국가는 이웃나라 이라크였다. 당시 이라크의 수니파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1980년, 이란의 유전을 장악하고 호메이니의 혁명을 파괴하기 위한 침공을 명령했다. 이라크의 침략과 후세인의 잔혹한 정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아랍 전역의 수니파 무슬림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전쟁은 또한 이라크 내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과 차별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1982), 헤즈볼라(Hezbollah) 설립: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의 게릴라 공격을 막는다는 명목 하에 레바논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슬람 혁명 수비군에 의해 레바논에서 창설된 헤즈볼라는 시아파 무장 조직으로,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지배에 맞섰다. 헤즈볼라의 설립은 레바논을 비롯한 중동 지역에 대한 시아파 이란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라크의 시아파 숙청 (1990년대): 시아파 대 수니파 분쟁이자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사이 분쟁이었던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 국민은 2급 시민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이러한 차별적 대우에 불만을 터뜨린 시아파의 시위대는 무참히 묵살되었다. 심지어 이라크 내 시아파 종교 지도자와 그들의 가족이 후세인 정권에게 차례로 숙청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렇게 이라크 정권에게 처참히 짓밟히는 시아파 시민을 보호하러 도와주는 세력은 이웃의 사우디 아리비아도, 시위를 명목상 지지하던 미국도 아닌,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정부였다. 이렇게 이라크에서는 점차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에 되돌릴 수 없는 정치적 감정의 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구 세력의 개입으로 더욱 불안정한 중동의 종교·정치 역학
이라크 전쟁 (2003~2011):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 시아파 분열을 조장하려는 계획은 없었지만, 그것이 이 전쟁의 가장 파급력있고 장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미국 정부는 이라크인들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심증'으로 일방적으로 바그다드를 폭격한) 미국을 점령자가 아닌 해방자로 볼 것이며,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고, 이라크가 평화로 돌아갈 것이라고 스스로와 세계에 말했다. 그러나 그 장밋빛 예언은 이라크의 빈번한 종교 폭력과 비극적인 역사, 특히 잔인하게 핍박 받던 시아파 다수의 열망을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은 전쟁 기간동안 사담 후세인의 정권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이라크에 아랍 국가로는 최초로 시아파 정권이 들어섰다. 물론 대다수 페르시아인으로 이루어진 이란에 시아파 무슬림 정부가 이미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시아파 아랍 정권이 처음으로 성립되면서 중동 지역의 시아파 아랍 무슬림들에게 강력한 정치적 구심점이 생긴 것이다. 또한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이어 이란에게 강력한 시아파 동맹국이 생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중동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 권력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게 되었다.
수니파와 시아파 국가간 21세기 냉전: 국경을 넘어 시아파 민병대와 정당을 지원하는 이란의 정책에 맞서 수니파 정권들도 자신들의 정치적·종교적 견해를 대변하는 단체를 지지한다. 그래서 오늘날 중동 지역의 많은 분쟁은 강한 종파적 성격을 띄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여전히 이란의 군대, 헤즈볼라, 그리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민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시아파 주도 정부가 수니파 야당과 맞서 싸우고 있다. ISIS를 비롯한 수니파 테러 단체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있는 시아파와 그들의 예배당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2016년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지지한 저명한 시아파 성직자가 처형되면서 중동 전역에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란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외교 관계는 현재까지도 단절된 상태다.
정리
14세기 간 존재했던 이슬람의 종파 분열은 중동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전략적 쟁점의 기저에 깔려있는 긴장 관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사안이다. 여기서 핵심은 표면적으로는 종파 갈등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이 실제 종파 간 신념 차이보다는 국가를 비롯한 이해 집단의 정치 권력 투쟁으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두 나라인 수니파 사우디 아라비아와 시아파 이란은 최근 들어 종파적 분열을 이용해 치열한 권력 투쟁을 하고 있다. 중동의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갈등은 앞으로도 이 두 대국의 경쟁 구도, 그리고 특히 소수 시아파가 정권을 차지하고 있는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의 내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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