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
松江 鄭澈
조선의 좌의정
《第 101 代》
본관
연일 정씨
출생
1536년 (중종 30) 음력 12월 6일
(그레고리력 12월 18일)
한성부 종로방 장의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사망
1593년 (선조 25) 음력 12월 18일 (향년 58세)
(그레고리력 1594년 2월 7일)
경기도 강화부 송정촌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재임 기간
제101대 좌의정
1589년 2월 8일 - 1590년 2월 1일
조선 중기의 정치가, 문인
요즘은 거의 문인으로 언급되지만, 사실 선조 중기 당시에는 정적들에게 자비 없는 잔혹하고 비열한 정치인으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로, 조선 정치사에 가장 잔혹한 피바람을 불러왔던 기축옥사를 주도했다. 물론 기축옥사는 무엇보다도 선조의 의중이 더 크게 작용했지만, 실제 이를 진행한 사람은 정철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에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거기에 실록에 기록된 심각한 직무유기와 무능력 때문에, 잔혹함과는 별개로 관료로서의 평판도 몹시 좋지 못한 인물이다. 차라리 관료가 아니라 서경덕이나 김삿갓처럼 일반 선비였으면 후대에도 예술가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가사 작품 4개인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은 현존 중인 당대의 흔치 않은 언문 고전 문학 작품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이 네 작품은 문학성과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적어도 한 편 이상 실리고 있다. 유감이지만 자동으로 수험 공부에 필수 코스 당첨.
모든 고등학생, 특히 고3 수험생들에게 불구대천지원수 취급을 받는다. 이유는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 쓴 관동별곡의 존재 때문이다. 남녀노소,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인 경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 수능 국어 문학 파트에서는 한번 나온 작품은 최소 3년은 출제하지 않으며 별로 유명하지 않은 건 다시는 안 나온다고 봐도 되지만, 유독 정철 작품만큼은 반드시 재출제된다. 비단 수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 및 모의고사에도 높은 확률로 100% 출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사 공부를 곁들이거나 국어(문학) 공부 때 정철 및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덤으로 공부하게 되면, 간신과 권신, 무능 이미지까지 겹쳐져서 정철에 대한 혐오가 더욱 극대화된다. 배우는 정철의 시조들이 전부 아첨하는 내용들 투성이라서 부정적 이미지가 안 생길 리가 만무하다.
흔히 가사 문학의 정석으로 알려졌지만, 원래 시조에 능했다. 흔히 배우는 조선 문학은 크게 한시, 시조, 가사, 고전 소설인데, 한시나 고전 소설은 현대 국어 해석을 중심으로 나오지만 시조와 가사는 토 나오는 원문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가사의 달인 박인로나 시조의 달인 윤선도와 달리, 정철은 두 분야 모두 정점이라 그야말로 답이 없다.
또한 조선 후기 유행했던 사설시조의 시조 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국문학의 작가들이 그렇듯, 현실에서의 인물상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서정적인 인간. 시조, 가사, 사설시조까지, 중시조 겸 시조를 맡고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위인. 물론 작품의 주 내용이 선조의 뒤 닦아 주는 내용이지만...
정철은 1536년 음력 12월 6일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집안의 자녀로 한성부에서 아버지 정유침(鄭惟沉)과 어머니 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누나는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었을 정도로 권력과 친밀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대부터 가문이 기운 후 그의 벼슬살이는 선조와 파벌들의 당쟁에 휘말려 계속해서 유배와 복직을 되풀이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으며 그런 와중에 정여립의 난(1589년)에서 선조의 부탁으로 위관이라는 수사 책임자로 활약했는데 이것이 피해를 입은 동인에게 악독한 인간으로 평가받는 데 영향이 컸다. 당초 기축옥사의 위관은 우의정이었던 정언신이었으나 그가 정여립과 9촌지간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정철로 교체되었다. 정철은 병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선조는 내관을 3차례나 보내 입궐을 재촉했으며 결국 선조는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목숨을 버리는 예를 들며 가마에 실려서라도 적을 토벌하라며 기어이 위관에 임명하는데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동인의 당대 영수이자 정철과 정적 관계였던 이발도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붙잡혀 죽게 된다. 전라남도 함평의 광산 이씨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이라 외칠 정도라서 지금도 기일에 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다만 정철 본인은 이발, 이길, 백유양 등의 이름이 여러차례 진술에 나왔지만 정여립과 역모를 꾀한 증거는 아니라고 이발을 변호하였다. 당시 일으킨 기축옥사에 의해 정여립은 물론 그와 관계한 호남의 유지들,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동인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1천여 명이 죽고 수백 명이 유배갔다고 <선조수정실록>에 명기되어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서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만들어졌으니 실제로는 더 많은 수가 희생되었을 수도 있다. 호남의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던 이발 형제들은 곤장을 맞다 참혹하게 최후를 맞았고 그의 어린 아들과 80살이 넘은 노모 윤씨도 곤장을 맞다 숨졌다. 이발과 친분이 두텁던 진주의 선비 최영경도 정여립의 두령 길삼봉이라는 누명을 쓰고 희생당했다. 이 때도 정철은 노인이라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 받은 사실을 잊어버렸으며 최영경이 선조를 비난했다는 시구도 최영경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변호했다. 정승까지 하고 있던 정언신은 사건 직후 "이게 다 율곡 이이의 제자들 때문이다!"라고 정여립을 옹호하다가 정여립의 역모가 기정사실화되자 버로우했고 정여립과 편지를 19장이나 주고 받은 사실이 들키고 만다. 이때도 정철은 정언신이 정여립과 친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대신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려 정언신은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생 양형이 정언신이 고변한 자를 죽이려 한다고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정언신을 사사하려 했고 이번에도 정철은 재상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정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체제 비판적 성향인 호남의 유력 인사 정여립이 모반을 꾸몄다고 조작하여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조선조 동인들의 시각이기도 했다. 당시 정철이 전라도로 사람을 보내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냈다는 식의 명백한 기록 또한 남아있다. 하지만 정철의 혁혁한 기여 덕에 전라도에는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는 건 완벽한 오해로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몰살당한 사람들은 이발을 위시한 호남 동인 강경 인사들뿐 사건을 부추기고 확대시킨 것 역시 정철을 위시한 같은 호남의 선비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호남에는 동인 세력의 씨가 말랐고 이후로 호남에는 서인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서인의 기호 지방(경기도, 충청도) 양반만큼은 아니지만 호남의 서인 양반들도 서인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득세한다. 그러나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결국 최종적 지휘자는 선조였다. 오히려 정철 본인은 이발, 정언신, 최영경 등을 변호하며 사건을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던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 논란이 있으나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에 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노인과 아이를 법에 따라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발 가문을 개박살 내고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고 최영경도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 정언신의 경우 선조는 처형시키려 했으나 정철이 재상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려서 유배로 감형한다. 후일 선조가 정철을 버린 과정을 볼 때 서인 강경파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고 조정의 절대 다수였던 동인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권력의 중심에 다시 오른 정철은 세자 책봉 문제에서 결정적인 판단 미스를 하고 만다. 후사 논의를 조심스러워하는 선조의 의중을 모르고 서둘러 광해군으로 세자 책봉을 해야 마땅하다는 읍소를 올린 것.(송강연보의 기록) 이를 정철의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 한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선조는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빨리 후사를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있었다. 이에 동인의 대표인 이산해와 서인의 대표인 정철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철과 원한이 있었던 동인 측이 도중에 빠지는 바람에 정철만 혼자 나서는 모양새가 되어 정치 생명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다. 이산해는 아예 나서지 않았고 류성룡은 나섰어도 입을 다물어 버렸는데 정철만 홀로 후계 책봉의 정당성을 열을 내며 주장했던 것이다.
정여립 모반 사건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인은 정철에게 카운터로 '신성군 목숨이 오락가락' 드립을 날린다. 물론 이전의 정여립 모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 그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정계의 밉상인 정철을 탄핵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선조는 이 절호의 찬스를 적극 활용해 세자 책봉 논의 자체를 막는 한편 정여립 모반 사건 이후 지나치게 입지가 커진 서인 세력을 손보기 위해 모르는 척 받아들이는데 이것 역시 정여립 모반 사건 때와 완전히 동일한 수순이었다.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 성혼, 윤두수, 윤근수, 이해수, 홍성민, 이산보, 박점, 황정욱, 백유, 유공진, 장운익 등 서인들은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동인이었던 이성중과 우성전도 건저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철을 밟아 버리기로 결심을 굳힌 선조는 정여립의 난에서 정여립의 수괴 길삼봉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남명 조식의 제자 최영경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철을 비난했다. 선조는 이 구실로 정철을 밟아 버렸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조회에서 정철을 가리켜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이라고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 또한 윤근수는 삭탈관직, 양천경과 양천회 등 최영경 등을 무고한 자들도 국문을 받다가 죽었는데 웃긴 것은 양천회와 양천경 등의 무고를 보고 선조는 처음에는 "이런 상소를 이렇게 늦게 올리다니!"라고 한탄할 정도로 띄워줬다는 것이다. 선조도 최후의 양심인지는 몰라도 역모 조작자로 몰릴 수도 있는 정철에게 추가적인 죄를 내리지는 않았다. 이 때 동인이었던 홍여순과 김성일이 어떻게든 정철을 죽이려고 했으며 특히 김성일은 양천경의 인척인 기효증에게 무고의 배후가 정철이라는 것을 밝히면 양천경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덕형이 정철을 옹호하였고 양천경과 강해가 끝내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만다.
이는 결국 참혹한 옥사인 정여립의 난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의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고는 곤장을 맞다 죽었으며 정작 정철에게는 죄가 더해지지 않았는데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당시 동인이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갈등하던 것은 이산해의 강경파이자 광해군의 지지 기반인 북인, 유성룡의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북인의 인맥은 조식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일대(호남+영남 서부)였고 남인의 인맥은 그보다 동쪽인 경상도 일대였는데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가 호남 동인 인사들의 씨를 말렸던만큼 크게 피해를 보았고 심하게 당한 북인이 정철을 더 괘씸하게 여겼음은 당연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을 간 사람들도 풀어주어 활용하기 위한 결정들에 의해 복직되었지만 임진왜란 중 선조를 수발하는 과정에서도 니나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술처먹고 긴급 작전 회의 불참 등 막장짓을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미움을 샀다. 인생 마지막에 초대형 사고를 치는데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면서 명나라 정부에 '일본군이 모두 철군했다'는 초특급 거짓 문서를 올려 버린 것이다. 이것 때문에 조선 정부와 명나라 파견군에서 난리가 났고,(선조 26년 11월 19일 기사) 정철은 이 사건으로 파직당했다. 결국 낙향한 정철은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강화도에 은거한 지 1달 만에 58세의 나이로 굶어 죽어 생을 마감했다. 통상적으로는 낙향한 관리에게는 주변에서 먹을 것을 대어주지만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은 터라 굶어 죽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임진왜란 관련 업무에서 사고를 쳤으니 백성들이 정철을 살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일 지경이다.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예전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감히 받지 않았는데,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못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도 약간의 것인즉 마음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격
정철은 강직한 성미로 인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 선조수정실록
기록에 따르면 한마디로 막장. 매우 아집이 강하고 속이 좁아 주변에 사람들이 다가서지 않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이렇듯 대인관계가 개판이었던 그에게도 온건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인배가 더러 있는데 하나는 율곡 이이, 또 하나는 서애 류성룡. 특히 류성룡은 당파가 남인이었는데도 정철과 무난한 관계였으니 류성룡이야말로 진정한 대인배일지도. 그 외에 노선이 일치하여 친밀했던 인물로는 같이 서인을 이끌어갔으며 정철과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정적들을 제거해 욕을 먹은 성혼도 존재한다.
한때 정철의 부관이자 지금은 의병장으로 유명한 중봉 조헌 역시 특기할 만한데 조헌은 그 다혈질에 성깔 더럽기로 악명 높은 정철이 자신의 상관으로 부임하자 사퇴를 청원했으나 정철은 "그럼 잠깐만이라도 같이 일해보고 그래도 싫으면 가라"며 조헌의 스승인 이이를 통해 극구 말린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이후 둘은 나름대로 원만한 관계가 되는데 그 이유는 조헌 또한 기축옥사 당시 앞장서서 정여립의 측근들과 동인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격파였기 때문. 이렇게나 정치적 노선이 비슷한데 으르렁댔다니 이건 아무래도 일종의 동족혐오인 듯 싶다. 또한 같은 서인으로 정여립을 혐오해 정여립을 중용하면 사림 전체의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한 이경중하고도 사이가 안좋았다. 심지어 이경중은 병사할 정도.
참고로 선조실록에서는 그를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卒)하였다. 【철은 논박을 받고 강화(江華)에 가 있다가 졸하였다. 】
사신은 논한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양호(兩湖)의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에는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전대(專對)에 잘못을 저지르는 등 죄려(罪戾)가 잇따랐으므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26년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선조실록이 쓰일 당시는 정철이 이미 몰락한 시점임을 염두에 둬야겠지만, 정철이 선조에게 그토록 충성을 바친 결과가 이 모양임을 생각하면 안습하기도 하다.
하지만 선조실록은 철저하게 동인, 그것도 강경파인 북인의 시각에서 쓰였으며 심지어 평생 동서인의 화합에 힘썼던 율곡 이이마저도 매우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정철에 대한 (서인의 시각에서 쓰인) 선조수정실록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전(前)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하였다. 과거에 정철이 부사(副使) 유근(柳根)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동로군문(東路軍門)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왜적이 이미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고 속여 말했으므로, 본국의 주문(奏文)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철(鄭澈) 등이 돌아온 뒤에 병부(兵部)가 주문(奏文)하기를,
"전에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역시 ‘왜적이 이미 철수해 돌아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유근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것은 실로 병부에서 속임수로 꾸며낸 말입니다. 사신 일행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변하여 먼저 정철을 제거하려고 하여 대간(臺諫)이 이를 인해 정철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상은 다만 체직시키고 추고하도록 명하였는데, 유근 및 서장관(書狀官) 이민각(李民覺)과 역관(譯官) 등은 모두 연루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유언 비어가 비등하여,
"정철이 북경에 가서 오로지 성궁(聖躬)의 과실만을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시켰다. 그러므로 황제 칙서 속의 추사(醜詞)들은 모두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였다.
정철은 강화(江華)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향년은 59세였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하였다. 그의 누나는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되고, 누이동생은 계림군(桂林君)의 아내가 되었다. 을사년의 화에 부형(父兄)이 관여되었으나 정철은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 때 동궁(東宮)을 드나들었는데,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 정철과 유희(遊戲)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정철이 장원에 등제한 방목(榜目)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액문(掖門) 안에서 특별히 주찬(酒饌)을 내리라고 명하니, 정철이 사양하기를,
"이미 출신(出身)한 이상 남의 신하된 입장에서 감히 이런 사례(私禮)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명종(明宗)이 주찬을 내릴 것을 중지시키고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나가도록 명한 뒤 누대 위에서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았으니, 은권(恩眷)이 특별하였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대중(臺中)에서는 바야흐로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사건을 논하면서 법대로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었다. 명종(明宗)이 친속으로 하여금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정철은 파면되어 광주(光州)에 돌아가 있게 되었는데, 여러 번 청망(淸望)에 주의(注擬)되었으나 3년 동안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당론이 갈라지자 그는 한쪽만을 극력 주장하다가 시론(時論)에 원수시되었는데, 상의 권애(眷愛)를 힙입어 구제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에 이르러서는 상의 권애도 식어서 거의 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이덕형(李德馨)이 구제해 준 덕분에 조금 완화되었다. 그 뒤 변란을 인하여 폐고(廢錮) 중에서 기용되었으나 또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는 처신을 너무나도 모가 나게 하였으므로 유성룡(柳成龍)이 평소에 그를 미워하였다. 정유년에 유성룡이 탄핵을 받았는데, 논자(論者)들이 뇌물을 탐했다고 무고하면서 미오(郿塢)에 비유하자, 유성룡이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논자들이 계함(季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도 탐비(貪鄙)로는 지목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처신이 저 계함에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 하였다.
언젠가 정철이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일에 대해 말하자 종사관(從事官) 서성(徐渻)이 그렇지 않다고 극력 변론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계함이 항상 떳떳하게 스스로 이 일을 해명하였으나, 나는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귀로 그 말을 듣고도 답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사람은 입이 곧아 자기가 한 일은 반드시 숨기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러니 그대의 말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흠(申欽)은 논하기를,
"정철은 평소 지닌 풍조(風調)가 쇄락(灑落)하고 자성(資性)이 청랑(淸朗)하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였다.
한때 정철을 논한 자가 간적(奸賊)으로 칭하자, 풍문이 퍼져 모든 사람이 뇌동하여 정철을 정말 소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평소 정철을 아는 자들도 여론에 현혹되어 그가 정말 소인인가 하고 의심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자고로 소인이라 칭할 때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고총(固寵)이요, 둘째는 첨미(諂媚)요, 셋째는 부회(附會)인 것이다.
정철이 적소(謫所)로부터 소환되어 언젠가 빈청(賓廳)에 앉아 있을 때 참판(參判) 구사맹(具思孟)과 지중추(知中樞) 신잡(申磼)이 동좌했었는데, 별감(別監) 한 사람이 안에서 주찬(酒饌)을 가지고 나와 말을 꾸며 이야기하기를,
"안에서 모든 재상들이 함께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구사맹과 신잡이 모두 궁금(宮禁)과 인척관계에 있기 때문에 귀인(貴人)이 다른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사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성중(李誠中)이 그 자리에 있다가 소반과 젓가락을 가져와 음식을 정승 앞에 나눠 드리도록 하자, 정철이 말하기를,
"이 음식은 구 참판과 신 지사가 먹어야 마땅하니, 대신이 참여해선 안 된다." 하고는 곧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말이 대내에 들리자 정철이 그 이튿날 체찰사(體察使)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첨미·고총을 하지 않았다는 밝은 증거라 하겠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는 한때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로서 정철은 그들의 친구였으니,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그러나 권간(權奸)과 적신(賊臣)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밝은 임금이 스스로 팔병(八柄)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산해·유성룡과 세 사람이 아울러 정승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해가 특히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었으니, 정철이 어떻게 권세를 부릴 여지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변론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선조26년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참고로 수정실록이 편찬되었다면 양쪽 다 봐야 한다. 어차피 시선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건 똑같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은 동인 강경파인 북인 중에서도 대북의 주도로 작성되어서 심지어 남인들 마저 비판하고 있고, 반대로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이후에 작성되어서 이쪽은 이쪽대로 자기들 편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얼핏보기에는 반대당파인 동인 일부인 남인도 호평해 준 수정실록이 괜찮아보이는데 이건 남인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 정국운영이 어려웠던 인조 시기 정세를 무시한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남인은 서인을 더 높이기 위한 장치로 동원된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단적으로 수정실록은 유성룡이 정철을 싫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런 유성룡이 정철이 청렴한 처신에 있어서는 자기보다 더 낫다고 하는 장면이나 역시 정철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을 넣어서 정철을 높이고 유성룡을 낮추고 있다. 이 때문에 양측이 모두 똑같은 평가를 했다면 양측 모두에게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위치가 아닌 경우 한정으로 명백한 사실인 것이고, 만일 특정 부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어느 쪽이 사실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 된다.
다만 수정실록 내에서 정철이 권신과 악독한 정치인이 아니라고 한 근거들은 전부 정철의 개인적인 일화나 사관의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검증이 불가능한 일화만으로 정철이 악독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거기에 실록에는 소인배의 요소로 고총(固寵 : 변하지 않는 총애를 받음), 둘째는 첨미(諂媚 : 아첨함), 셋째는 부회(附會 : 억지로 끌어대어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을 들면서 정철은 이에 해당하지 않으니 소인배가 아니라고 평가하는데, 사실 정철은 이 요소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행적을 보여준다. 다 제쳐두더라도 자기가 쓴 관동별곡 하나만 따져도 선조에게 지나치게 아첨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관람 때문에 벌어진 직무유기, 행정력 낭비를 자연에 대한 찬양과 조화로 합리화하고 있다. 같은 시대 같은 파벌의 조헌은 왕에게 지부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직했고, 좀 먼 뒷날이지만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관람 다니면서 직무유기나 백성들 방해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조선 시대 기준으로도 정철의 행동은 선비로서도 지방관으로서 완벽히 실격점이다. 그리고 이런 행보와 (비록 논란은 많지만) 기축옥사를 공식적으로 주도하고 진행한 인물은 정철 자신이었고 그 과정에서 10살짜리 어린애나 80대 여성이 고문사하는 등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악독한 정치가라고 볼 수밖에 없는 사건들과 행보들이 즐비했다. 때문에 수정실록에서도 정철을 세간에서 악독한 신하로 평가받는다는 점은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수정실록의 기록 중 명종과 경양군의 기록은 명종실록에는 당시 정철은 별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경양군 처벌 뒤에도 정철은 승진해서 홍문관 부교리라는 요직까지 승진한 점등 모순되는 기록이 너무나도 많다. 다른 것은 몰라도 승진 내역은 조작이 힘든 점을 생각해 보면 수정실록의 신빙성은 더 떨어진다. 거기에 원래 수정실록은 당파적 왜곡이 심각한 실록이고 그중에서도 정철 기록은 너무나도 왜곡과 은폐가 많아 평가도 믿기 힘든게 현실이다.
결국 정철의 평가를 모아보면, 유능한 문인이자 술주정이 심했던 무능한 관료이고 고집이 강했던 인물이라는 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양쪽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쪽의 차이는 정철이 권신이자 악독한 정치가였는가라는 부분으로 모아진다. 선조실록은 정철의 처신을 정치적 권력욕으로 규정하고 비난하고, 수정실록은 정철의 행동을 결벽증에 가까운 곧은 인사로 묘사하면서 실드를 친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건으로 따지면 기축옥사는 배후가 있긴 했지만 표면적인 주도자는 분명 정철이었고, 전쟁으로 한참 몽진하던 중에 술을 마시고 업무에 불참했던 행보나 본인이 쓴 시조들의 내용과 전후사정을 따져보면 악독한 정치가로 평가받을 만한 행보를 자주 보여주었고, 때문에 정철을 옹호하는 수정실록에서도 이런 세간의 평가는 인정하고 있다.
선조는 정철에 대해서 총애할 때는 한 마리 매와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한 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쳤다고 평가했다.
평가
임진왜란 직전 서인 중신들을 살펴보면 행정, 외교 등 실무관료로서 두각을 보인 쪽은 윤두수, 윤근수 형제고 정철과 성혼은 (정철의 문인, 성혼의 학자로서 위상은 별도로 치고) 목소리 높여 동인과 싸움박질하는 싸움꾼, 선봉대장에 가까웠다. 정여립 일파와 정적인 동인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탄압과 견제를 가하고 이후 서인의 분열에도 한몫을 한 사람, 정치적인 업적은 별로 없지만 정치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기묘한 위치에 있다. 또한 성격이 극단적이고 독선적이며 알콜 중독자이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가 틈만 나면 탄핵당한 이유는 정적의 모함 이상으로 그가 민심을 못 샀기 때문이다. 거기에 임진왜란 도중에는 술 처먹고 작전 회의에 불참하고 명나라 정부에 일본군이 철군했다는 가짜 정보를 뿌리는 등 초대형 사고들을 처셔 객관적으로도 높게 평가해 줄 수 없는 인물이다.
당대 사대부들의 유학적 세계관상 상소나 조정 회의에서 신나게 왕을 까는 것과는 별개로 사대부들은 왕을 찬미하는 시나 문학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정철은 뛰어난 글솜씨를 가지고 시를 지을 때 화려한 미사어구와 여러 수사들을 말 그대로 도배한 가사를 다수 남겼는데, 우리 역사에 남아있는 문학 작품이 희소하다 보니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문학적으로 평가를 받아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정철이 젊은 시절에는 나름 강직한 면모를 보여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수정실록에 따르면 정철이 젊은 시절이던 명종 21년(1566년)에 왕족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자신의 친척이 관여된 일이므로 정철을 설득시켜 조용히 넘어가려 했으나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하고 만다. 이로 인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하기도 했고… 허나 사실 이 기록은 선조수정실록 정철졸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정작 명종실록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당시 경양군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당시 우부승지였던 윤두수이고 정철은 일말의 기록도 없다. 그리고 수정실록에는 정철이 이일로 파면당했다고 말하는데 정작 명종실록에서 정철은 몇달 만에 빠르게 승진하고 병조참의로 함경도에 경차관으로 임명되는 등 나름 승승장구하다가 명종이 죽은 뒤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실록 편수관까지 담당한다. 선조수정실록의 정철 옹호 기록들이 신빙성이 극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그래도 선조에게 "아무리 청천벽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 적이 있기는 하다. (참고)선조수정실록 3권, 선조 2년 6월 1일 계유 3번째 기사 또한 서인 쪽의 변호에 따르면 정철이 자기 관리를 못해 망가진 것은 사실이나 간적이라 할 정도로 무슨 세도를 부릴 위상은 아니었다고 한다.
백성들의 악평
정치인으로서의 악명은 민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강원도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정철 관련 설화들에선 성질이 고약하고 사소한 것에 트집을 잘 잡는 쪼잔한 인간으로 나온다. 능력보다 인성을 중시한다는 유교와 그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는 가짜 선비. 예를 들면 어느 마을에 갔더니 주민들이 바위를 섬기니까 바위를 쪼개버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는데 왠지 강원도 관찰사 시절 강원도 백성들한테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정철 같은 놈은 한동안 탐관오리를 상징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웃기는 건 본인은 <관동별곡>에서 '급장유와 같은 좋은 정치를 하겠다'라고 큰소리친 전력이 있다는 것. '선정에 대한 포부'라고 배운 그 부분 맞다.
좋은 평가도 있기는 한데, 징비록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가 왜란 발발 후 5월 1일에 개성에서 몽진을 갈 때 길가의 백성이 "정철 정승을 불러 쓰소서." 해서 정철을 복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실은 개성의 유생들이 선조가 사람을 천거할 것을 명하자 정철을 청한 것으로 당시 개성은 유생들의 절반이 성혼과 이이의 제자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기호학파의 세가 강한 곳이었다. 정철이 성혼과 이이의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니 이 사건은 이를테면 '동인들 때문에 나라 꼴이 이렇게 됐잖음 우리 사숙어른 복귀 좀요 징징' 정도의 사건으로 이해 가능하다. 그러니까 양반(그나마 같은 당색의 유생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좋은 평가를 내렸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화다. 그리고 사실 백성의 청원은 전후 관계와 선조실록과 비교해 보면 완벽한 역사 왜곡이다. 임진왜란 직전 정철은 강계에 유배가 있었는데 당시 선조가 강계로 피난갈 계획을 잡았고, 이것 때문에 강계 지역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어서 강계로 유배 가있는 고위 관료인 정철을 부른 것이다. 실제 정철은 선조를 만나자마자 첫 어두부터 강계 이야기로 시작했으며 백성의 추천로 정철이 등용되었다면 무슨 정치적 전략적인 토론을 벌여야 하는데 정철과 선조는 만나자 마자 오로지 강계의 상황에 대해서만 묻고 답한다.
백성들에게 악평을 얻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말년에 강화도로 유배 가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되는데 나름 핵심 권력자이었던 양반이 강화도 주변에서 지원을 못 받아서 친구에게 구휼 요청을 보낸다. 백성들 입장에서 자기나 친인척이 왜구랑 죽도록 싸우는 상황에서 동맹국에 사신으로 가서 가짜 정보를 퍼트려 이적 행위를 저지른 인간을 결코 좋게 볼 리가 만무하다
술고래
정송강은 술에 취해 있어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 류성룡, 운암잡록(雲巖雜錄)에서
사헌부에서도 정철 관련해서는 술이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도승지 정철은 술주정이 심하고 광망하니 체직시키소서. 원접사의 종사관은 그 재주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때의 극선인 인물이어야 하는데 고경명은 전일에 권간에게 붙었었으니 다시 차임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연일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13년 9월 13일
사헌부가 아뢰기를, "예조판서 정철은 술을 좋아하고 실성하여 지난날 승진 발탁했던 일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물의가 많은데 반년도 채 못 되어서 또 갑자기 종백으로까지 초수하니 물정이 온편치 못하게 여깁니다.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16년 4월 1일
술 좋아하기로는 훗날 정조 임금과 더불어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로, 그 정도가 지나쳐 폭음에 따른 주사로 낭패를 본 일도 많았다고 한다. 작품 중에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라는, 장진주사라는 작품도 있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왕인 선조가 정철의 애주에 감탄(?)해 하사한 술잔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선조가 '그대가 술을 좋아하나 너무 과함이 걱정되니 앞으로 이 잔으로 하루에 한 번만 마시라, 즉 술 좀 작작 마시라는 의미로 하사한 은잔을 이 양반은 한 방울이라도 더 마셔보겠다는 집념으로 망치로 두드려 펴서 사발로 만들어 마셨다나. 이 이야기는 성종 시절의 재상이자 술고래 손순효가 원조이며, 정철이 이 이야기를 주워듣고 술잔을 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철과 친분이 있던 류성룡조차도, 정철의 술버릇에 대해 "정송강은 술에 취해 있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밤 이경에 급보가 평양으로부터 왔다. 임금께서 여러 대신을 빈청으로 불러서 회의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정철은 술에 취하여 오지 않았다.
이는 1592년 7월 25일자 선조실록 기록이다. 즉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의주까지 몽진을 온 상태로 조승훈의 명군이 평양성에서 패전했다는 급보가 왔는데도 저러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 놓고 관동별곡의 결사 부분을 보면, 신선이 화자에게 술 한잔 권할 때 한다는 대답이 "백성들을 먼저 마시게 한 후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 마시겠다."라며 선우후락인 듯 선우후락 아닌, 위선의 극치를 적어놓았다.
교과에서
후세에 남긴 대표작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이 있다. 관동별곡은 제7차 교육과정의 국정교과서 시절 고1 국어과정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등학생들을 괴롭혔다. 교사들이 얼마든지 이것을 꼬아서 기출문제로 낼 정도다.
얼핏 보면 사모하는 님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어 마치 그리운 연인을 묘사하는 게 아닌가싶지만 국어 시간에 졸지 않은 학생들이면 다들 알다시피 이게 전부 당시 왕인 선조에 대한 묘사다. 보통 유배를 간 선비는 본인을 다시 불러달라고 이런 식의 러브레터를 보내기도 한다.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절대자'로 표현하고 있는 중.
예시로 다음은 사미인곡의 일부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말아 가지고 이 시름을 잊으려 하여도
마음속에 맺혀 있어 골수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名醫)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데족족 앉았다가
향 묻힌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다시 말하지만 이거 왕한테 쓴 시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이 고평가했던 작품이다.
학교대사전에서는 수험생을 괴롭히는 사천왕으로 꼽기도 했다. 그가 쓴 시가의 극악한 난이도와 오글거림으로 인해 문, 이과 상관없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존재. 실제 7차 교육과정 시절 고1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관동별곡' 은 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며 7차 개정 교육과정 고 1 국어 교과서에서도 16종 중 8종에 관동별곡이 수록되어 있다.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강계로 유배되었을 때 만난 진옥이라는 기생과 나눈 화답시조가 있다. 꽤나 로맨틱하면서도 야한 시조다. '옥이 옥이라커든...'
그리고 위에 정철의 술고래 관련으로 언급된 장진주사도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걸 시조로 보는 입장과 가사로 보는 입장이 있는데, 시조로 보는 좀 더 보편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이 사설시조의 원형, 혹은 최초의 사설시조가 된다.
가사문학의 대가, 서인의 영수
1536년(중종 30) ~ 1593년(선조 26)
1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정철은 1536년(중종 31) 서울의 장의동(藏義洞)에서 정유침(鄭惟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이며, 호는 송강(松江)이다. 그의 유년기는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며 크게 요동치게 된다. 정철의 누이는 계림군 이류(李瑠)의 부인이었다. 을사사화 때 이류가 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의 부친 정유침 역시 계림군의 처부로 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의 큰형과 당시 어렸던 정철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정평(定平), 영일 등지를 전전하다 1551년(명종 6) 부친이 귀양에서 풀려남에 따라 창평(昌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부친이 야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정철 역시 재야에서 여러 인물들과 사승관계 및 교분을 맺게 된다. 1551년에는 김인후(金麟厚)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기대승(奇大升)과도 교유하였다.
17세 때에는 부인 문화 유씨와 혼인하였다. 1556년에는 훗날 함께 서인으로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게 된 이이(李珥)와 처음 만나 교분을 나누기도 하였으며, 1560년에는 역시 훗날 같은 서인의 주도자로 활동한 성혼(成渾)과 시로 교분을 나누었는데, 이전부터 성혼과는 교류가 있었다. 이처럼 어린 시절 재야에서 학문에 힘쓰며, 이이와 성혼 등 훗날 서인의 거두들과 교류하였는데, 이는 훗날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일들이었다.
26세 때인 1561년(명종 16)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는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비로소 관직에 나아가게 된다. 이후 실무직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아가 지방의 군사 문제에 대한 서계를 올리는 등 지방 사무와 관련된 활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는 을사사화 때 피화되었던 인물들의 신원을 요청하는 등, 젊은 관리로서 명종 말년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보였다.
2 출세와 동서붕당
선조[조선](宣祖)의 즉위는 정철과 같은 젊은 선비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정철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선조 즉위 이후 32세 때 수찬이 되었으며, 실록청 낭청을 지내는 등 젊은 관료들이 역임할 수 있는 주요 관직들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다.
그 밖에도 이황(李滉)에게 시를 지어 전송하고, 이이와는 사가독서를 함께 하며 성혼과도 꾸준히 시를 주고받는 등 사림과의 교유는 지속되고 있었다.
이조의 낭관으로, 관리 등용에 관여하며 사류를 등용하려 하자 김개(金鎧), 홍담(洪曇) 와 대립하는 등, 이이와 함께 사류의 선봉으로 조정에서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정철의 정계 활동은 두 번의 부모상으로 인해 다소 주춤하게 되는데, 35세였던 1570년(선조 3) 부친을 여의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38세 때인 1573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 역시 삼년상을 치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모친상을 탈상한 40세 때까지는 대부분의 정계 활동을 중단한 상황이었다.
모친상을 마친 1575년(선조 6) 정철은 다시금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 해는 조선 중기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리고 정철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해였다. 이미 전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열이 점차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미 앞서부터 이이와 깊은 교분을 맺고 있던 정철은 이이와 함께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김효원(金孝元) 일파를 정치적으로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며 점차 동서 대립의 중심인물로 부상해 나갔다.
붕당의 와중에 사당(邪黨)으로 배척되는 등 정쟁에 휩쓸리기도 하였으나, 이이가 그를 옹호하는 등 정철은 대립에 점차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가 단종[조선](端宗)의 묘소를 개수할 것을 아뢰는 등 지방관으로서의 활동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기간은 그의 문학활동에도 중요한 시기였다.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며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관동별곡(關東別曲)〉, 연시조의 하나인 〈훈민가(訓民歌)〉를 지으며 문학 면에서 손꼽히는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문학의 성취와는 별개로, 붕당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정철 역시 복잡한 정치 대립을 이어나갔다. 정인홍(鄭仁弘) 등 동인과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으며, 이이와 함께 정철은 계속 동인의 공격을 받았다.
3 지속된 부침 : 동서 대립의 한 가운데 서다
선조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던 이이가 사망하고 난 이후, 정철은 박순(朴淳)과 함께 정여립(鄭汝立) 등 남인의 거센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사직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비록 조헌(趙憲) 등이 상소를 올려 이이와 정철 등을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이이 사후 정국은 지속적으로 동인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때의 은거생활 역시 정철의 문학활동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다.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있던 사이 정철은 자신의 충성을 강조하고자 임금을 그리는 가사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이다. 이러한 시조들은 정철 자신의 정치적인 상황을 은유하는 한편 임금을 향한 마음이 드러난, 양면적인 성격을 지니는 대표적인 가사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철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온 것은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였다. 정여립의 모반에 대한 비밀 장계가 들어오자 정여립을 둘러싼 일대 옥사가 벌어지게 되었다. 정철은 이 때 비밀리에 이들을 체포할 것을 아뢰었으며, 이내 우의정이 되어 옥사를 주관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기축옥사는 그 발단과 전개, 처리에 있어 당대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온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의 입장 차이에 따라 사건 자체 및 주요 인물에 대한 평이 지금도 엇갈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 이후 정철과 서인은 동인과 원수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은 후대에까지도 동인이 정철을 비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기축옥사 이후 좌의정에까지 오르며 정국을 주도하던 정철이었으나, 1591년(선조 24) 동인의 탄핵과 선조의 분노로 인해 정철은 파직을 당한 후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 정철의 탄핵 이유에 대해서는 남인과 서인이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남인은 정철이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지고 사당(私黨)을 만들어 국권을 농락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서인은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정철이 이산해(李山海)의 농간에 의해 선조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당시 국정을 주도하던 이산해, 유성룡(柳成龍) 등이 파직되자 정철은 임진왜란 수습을 위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조정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후 정철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경험을 살려 북방의 방어에 대한 계책들을 올렸으며, 서울 수복 이후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사은사로 갔을 때 적이 남쪽에 머무르고 있는 사정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언관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강화도로 물러가 있다가 1593년(선조 26)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정국의 변동에 따라 관직의 삭탈과 신원이 반복되는 등 여전히 부침을 겪었으나, 서인 정권이 안정화된 1694년(숙종 20) 이후 더 이상의 지위 변동은 없었다.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고, 1705년(숙종 31) 창평(昌平)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4 정치가 정철과 문인 정철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정철은 16세기 후반 동인과 서인의 대립의 중심에 서 있었던 정치가였다. 그는 김효원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에서 비롯된 동인과 서인의 대립의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일 뿐 아니라, 기축옥사와 같이 양 붕당의 대립을 극단으로 몰아간 사건의 처리를 주도하였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사후에도 관직 삭탈과 신원, 추증이 반복되었던,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정치가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처리를 놓고 동인이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으로 나뉘는 계기까지 제공하는 등, 당대 정치적 논란은 그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처럼 정치가 정철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을 뿐 아니라 반대세력의 원색적인 비난까지 받을 정도로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지만, 문인으로서의 정철은 뛰어난 가사문학을 남긴 인물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17세기 후반의 뛰어난 문인이었던 김만중(金萬重)은 그가 우리말을 섞어 가사를 쓴 것을 높이 평가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18세기의 문인인 박창원(朴昌元)은 김만중과는 달리 정철이 한문으로 작품을 쓰지 않은 것은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관동별곡〉의 의미의 뛰어남과 어조가 유려함을 칭찬하며, 한문으로 번역을 남길 정도로 정철의 시가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처럼 정철의 가사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조우인(曺友仁)은 〈관동별곡〉에 영감을 받아 〈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을 지었으며, 김춘택(金春澤)은 〈사미인곡〉을 본따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을 짓는 등 정철의 영향으로 유사한 작품을 남긴 후대 문인들이 있었다.
다만 정철의 가사들은 그가 중앙 정계에 있지 않았던 시기, 예컨대 지방 관찰사로 나아가 있을 때, 혹은 낙향해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시가 내에 있는 국왕에 대한 사모와 그리움에 대한 해석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것으로, 정철에 대한 호평은 대부분 서인, 노론계 인물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철이 중세 국문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정과 상반되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시가 작품은 정철이라는 인간이 살았던 시대의 느낌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역사적 인물 정철의 복잡하면서도 다면적인 내면을 음미해보게 만드는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1552~1608년, 재위 1567~1608년)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극단적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급급했던 군주, 전쟁 영웅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고 이순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도 했던 비겁한 군주라는 부정적 평가가 일반적이다. 반면 ‘목릉성세(穆陵盛世·선조가 이끈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라는 표현에서 대표되는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는 상반된 평가도 있다.
이황, 이이, 이준경, 정철, 윤두수, 이산해,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조선을 대표하는 참모형 학자들이 대거 배출된 시대가 선조 때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조에 대한 긍정적인 리더십도 엿볼 수 있다. 여러 참모 중 선조와 애증의 관계를 가졌던 대표적인 인물이 정철(1536∼1593년)이다.
정철은 부친 정유침과 죽산 안씨 사이에서 1536년(중종 31년) 태어났다. 지금 종로구 청운초 앞에는 정철의 탄생을 알리는 여러 표시가 있으며 그의 작품이 담벼락에 실려 있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정철은 맏누이가 인종의 후궁이 되고 막내 누이는 성종의 아들인 계림군(桂林君)에게 출가하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는다.
어린 시절 왕자들과 어울렸으며, 인종의 동생이자 세자였던 경원대군(후의 명종)과 친분을 맺었다. 그러나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발생하면서 계림군이 역모 혐의로 처형당하고 계림군의 장인인 부친과 처남인 맏형이 유배길에 올랐다. 1547년(명종 2년)에는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이 터지면서 부친이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됐다. 정철 또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했다.
1551년(명종 6년) 정철이 16세가 되던 해 부친이 7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정철의 가족은 전라도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정철은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호남 지역의 대학자 김인후와 기대승을 스승으로 삼는 기회를 얻었다. 정철은 김인후와 기대승에게서 학문뿐 아니라 문학적 영향도 크게 받았고, 이것은 훗날 정철이 조선을 대표하는 문학가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됐다. 정철은 그와 뜻이 맞는 사람들과도 두루 사귀었는데 훗날 서인의 학문적 원류가 되는 이이, 성혼과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다.
16세부터 약 10년간 수학 과정을 거친 정철은 1561년(명종 16년) 26세가 되던 해 과거에 응시해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 해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됐다. 유년 시절 궁중을 출입하며 쌓았던 명종과의 친분은 정철의 관료 생활을 순탄하게 했지만 위기도 있었다. 사헌부 지평 시절 정철은 명종의 사촌 형 경양군의 처남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왕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명종은 정철을 요직에서 배제했고, 한동안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567년 선조의 즉위는 정철의 정치 인생에 큰 돌파구가 됐다. 선조는 즉위 후 학문적 능력을 갖춘 사림 세력을 적극 등용했고, 이런 흐름 속에서 정철은 홍문관 수찬을 제수받았다. 1568년(선조 1년) 최고 요직 중 하나였던 이조좌랑에 임명됐으나, 1570년 부친상을 당한 후 1572년까지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시묘살이(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간 묘소 근처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는 일)를 했다. 1573년에는 모친상을 당해 다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1575년(선조 8년) 정철은 시묘살이를 끝내고 관직에 복귀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시기는 동인과 서인의 분당(分黨)에 따른 당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철은 서인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1578년(선조 11년) 대사간에 제수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수수 사건 처리 문제로 동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했다. 정철은 낙향 후에도 여러 관직에 제수됐지만 관직을 받지 않고 창평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년) 선조는 정철이 동인이 득세하고 있는 중앙의 관직에는 뜻이 없음을 알고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한다. 관동 8경을 유람하면서 느낀 감회를 노래한 ‘관동별곡’은 이 시절 탄생한 그의 대표 작품이다.
1581년 외직에서 돌아와 다시 내직을 맡았지만 다시 동인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만큼 동인 측에서는 정철을 서인의 강경 정치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정철은 다시 창평으로 돌아갔지만 정철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계속됐다. 같은 해 12월 정철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하면서 관직에 머물게 했다. 이후 정철은 1585년(선조 18년)까지 도승지, 함경도 관찰사, 예조판서, 대사헌 등의 직책을 지내면서 선조의 최측근 참모로 활약했다.
하지만 정치적 입장이 강하고 반대파에 대한 공격 성향이 강했기에, 동인들이 집권하면 정철은 늘 정치적 표적이 됐고, 창평으로 낙향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한편으로 낙향 시기는 정철로 하여금 정치적 긴장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시간을 갖게 만들어줬고, 그의 문학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과 같은 작품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 일이다.
1589년(선조 22년) 10월 ‘천하는 공물(公物)’이라고 주장한 정여립 역모 사건이 일어나 조정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정치적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정여립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들은 줄줄이 체포돼 처형을 당하는 ‘기축옥사’로 이어졌다. 기축옥사는 정치적으로 서인이 동인에 대해 정치적 반격을 가하는 사건으로 비화됐고, 동인 탄압의 주역으로 활약한 인물이 정철이었다. 처음 역모의 수사 책임자는 동인 정언신이 맡았으나, 정언신이 정여립과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낙마했다. 그리고 이해 11월 정철이 우의정에 제수되면서 위관(委官), 즉 수사 책임자가 됐다. 정철이 위관이 된 후 정여립과 왕래한 자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거세지면서 다수 대신들이 뚜렷한 근거 없이 심증만으로 무분별하게 죽임을 당했다. 동인들은 서인, 특히 옥사를 주도한 ‘원흉’ 정철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게 됐다.
기축옥사에 대한 강경한 진압은 정철에 대한 선조의 신임을 더욱 굳건히 했다. 이듬해 2월 정철은 좌의정에 승진하고, 7월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책봉되면서 인성부원군의 봉호를 받았다. 하지만 정철의 승승장구는 채 1년도 가지 못했다. 선조에게 왕의 후계자인 세자를 세울 것을 건의한 ‘건저(建儲)’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1591년(선조 24년) 2월 좌의정 정철은 당시의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은 선조에게 함께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고 했다. 선조가 여러 차례 양위(讓位) 파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의 공론은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 광해군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정철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함께 건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선조의 의중이 다른 왕자에게 있다는 것을 파악한 이산해와 류성룡이 자리를 피했고, 성질이 급한 정철이 경연에서 홀로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샀다. 이후 정철은 선조의 노여움과 더불어 ‘평소 주색에 빠져 생활이 문란하고, 당을 꾸며 경박한 무리를 모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됐다.
이후 정철은 진주를 거쳐 평안도 강계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결과적으로 정철이 선조의 참모로 다시 복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선조가 자신의 피난길을 함께할 인물로 ‘충직한’ 정철을 불러들인 것. 정철은 선조의 부름을 받아 1592년 5월 평양에서 선조를 만나고, 6월 11일 평양성을 떠나는 선조를 호위해 의주까지 피난길을 함께했다. 이해 7월 정철은 양호(兩湖·호남과 호서) 체찰(體察·변란이 있을 때 왕을 대신해 그 지역의 군무를 살피는 일)의 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했으며, 1593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반대 정파의 공격 또한 워낙 극심해 명나라에서 돌아온 직후 다시 동인이 중심이 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선조에게 사면을 청한 후 강화의 송정촌으로 물러난 정철은 이후에는 더 이상 선조 곁을 지키지 못하고 1593년(선조 26년) 12월 18일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정철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국문학이나 한문학 분야에서 정철은 최고의 인물로 손꼽힌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정철은 크게 조명받지 못할 뿐 아니라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당쟁 시대에 서인의 핵심으로 활약하고, 1589년 기축옥사를 주도한 인물이란 점 때문이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그만큼 선조에게 정철은 정국 돌파에 매우 필요한 정치적 참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