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5대 고궁,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서울 5대 고궁은 우리 역사와 전통, 문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함축한 곳이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법궁(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고유의 단아함과 서양의 미가 어우러진 덕수궁, 청빈한 매력을 지닌 창경궁, 아담하고 소박한 경희궁 등 5개 궁궐이 각기 다른 매력을 지녔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매년 시즌별로 특별 야간관람도 실시한다. 약 한달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예매가 진행되는데 시작과 동시에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경희궁을 제외한 4개 궁과 종묘에서는 오는 7일까지 궁중문화축전도 개최된다. 문화유산 축제, 각종 재현 행사, 체험, 공연, 전시 등이 다채롭게 펼쳐질 예정이다.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에 기대고 남쪽으로 청계천을 품은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에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고종이 즉위한 뒤 흥선대원군이 주도해 중건했다. 주요 전각으로 정무 공간인 근정전(국보 제223호), 왕의 침전이자 휴식 장소인 강녕전,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과 후원 아미산, 휴식과 풍류를 즐기던 향원정 등이 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정규 해설은 정해진 시간에 무료로 진행되며 예약하지 않아도 된다.
강녕전 서쪽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외국 사신 접대, 연회 등에 쓰였던 경회루(국보 제224호)도 놓치지 말자. 본래 경회루는 일반 관람이 제한되지만 4월부터 10월까지 특별 관람 기간에는 2층까지 올라가 탁 트인 사방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단 문화재 해설사와 동행해야 하며 사전에 인터넷 예약을 해야 한다.
세계유산 창덕궁 & 아픔이 서린 창경궁
창덕궁은 5대 고궁 중 가장 아름다운 궁으로 꼽힌다. 1610년 광해군이 정궁으로 쓰기 시작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가장 오래 왕이 머물렀다.
최근까지 사용한 궁이니 만큼 어떤 궁보다 원형이 잘 보존됐고 자연과의 조화도 빼어나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창덕궁 관람은 일반관람과 후원 특별관람으로 나뉜다. 비밀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후원 특별관람은 해설사가 동행해 제한된 인원으로 진행되므로 사전예약이 필수다.
창경궁은 1418년 즉위한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 당시 이름은 수강궁이었다. 그 뒤 1482년(성종 13)에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를 위해 옛 수강궁 터에 규모를 갖춘 궁을 짓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바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복구했으나 또 다시 소실과 복구를 거듭하다 일제강점기에 심각한 훼손을 입게 된다. 조선 궁궐의 위상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전각 대부분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꿔버린 것. 지금은 복원 공사로 옛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별도 관람권으로 연계 관람할 수 있다.
궁(宮)과 궐(闕)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애초 지형 위에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는 한반도를 강제점령한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가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