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개척시대
The Wild West
미국사에서 미국의 독립을 전후하여 유럽인의 문명이 닿지 않고 독자적인 원주민 문화가 존재하던 서부 황무지로 미국이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를 말한다.
1607년에서 1912년까지 계속된 개척과 이주, 전쟁으로 미국 영토가 완성되는 시기를 아메리칸 프런티어(American frontier)라고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직접적인 서부 개척이 이루어진 시대는 미국이 프랑스(루이지애나 식민지)와 멕시코(누에바에스파냐 북부)의 방대한 영토를 매매계약 형태로 얻어 지금의 미국 영토가 거의 완성된 뒤인 19세기 중후반인 185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이며, 후기 서부개척시대까지 포함하는 '서부 신화'에서는 미국 서부 지역의 자본주의가 완성된 1924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미국의 통치권이 서부로 뻗어나가며 금광 개발을 위해 대량의 사람들이 이주하던 시대이며, 개척자들의 탐욕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인권유린 및 학살 등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대중문화의 무대로, 카우보이, 총잡이, 무법자, 아메리카 원주민, 황금, 보안관 등으로 대표되는 시대다. 남북 전쟁과 함께 미국을 무대로 한 극에서 자주 다뤄진다.
동시기 유럽은 벨 에포크 시대에 해당한다.
특징
초기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은 동부 해안에 상륙했기 때문에 미국은 동부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도 보스턴이나 뉴욕 등 미국의 전통적인 대도시들은 동부에 집중되어 있다. 지도상 미국 내 주들끼리의 경계도 동부는 복잡한데 중부 서부는 상당히 단순한 곳이 엄청 많은 이유도 작위적으로 소수의 미국 고위정치인들이 빼앗은 땅에 서로 협의하면서 펜으로 막 그어서 주 영토를 정했기 때문이다. 동부 해안의 극히 일부분(건국 13주)을 제외한 나머지 땅은 대부분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역이거나, 멕시코의 영토, 프랑스의 식민지 등이었다.
당시엔 영국의 식민지인이었던 미국인들은 눈 앞에 있는 땅을 서서히 이른바 개척이라는 명목으로 점차 장악하면서 땅주인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대립했다. 영국 정부는 불필요한 대립을 막고,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우호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인들은 정부의 규제를 어기고 무단으로 야금야금 개척을 하고 있었고,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는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서쪽으로 개척을 나간다(명백한 운명).
그리고 나폴레옹이 미국에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팔아버림으로써 동부 식민지 확대의 장애물이던 프랑스 영토가 사라지고, 그 길을 가로막고 있던 미국 남쪽의 멕시코와도 미국-멕시코 전쟁의 승리를 통해 멕시코를 텍사스 바깥으로 쫓아내면서, 동부의 미국인들이 중부와 서부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영국에게서 독립을 하려면 국가를 발전시켜야 하고, 국가를 발전시키려면 인구가 많아야 하고, 인구가 많으려면 땅덩이가 넓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지속적으로 미 대륙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서진한다. 시기를 나누면 초기가 유럽 식민지군과의 전쟁, 중기가 멕시코와의 전쟁이라면, 후기는 주로 서부에 산재한 원주민들과의 전쟁이었으며 바로 이 마지막 시대를 흔히 '서부개척시대'라고 부른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른바 한국어로 홈스테드법이라고 불리는 "Homestead Act"를 통해 이민자들에게 저렴하게 서부의 땅을 나눠주는 한편 유럽 일대에 일명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면서 많은 백인들을 미국으로 이주하게 만들어서 서부를 "식민화"하기 시작한다.
이때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을 두고 갓 독립한 멕시코와 충돌이 벌어지는데 결국 전쟁을 벌여서 승리하여 멕시코를 몰아내고 텍사스 공화국,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독립시킨 다음 연방으로 가입시켜서 서부지역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 시기 즈음해서 등장한 것이 '명백한 운명'이라는 주장으로 미국 땅은 신이 자기들에게 준 축복이고, 이걸 먹는 것은 당연하고 올바르다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미국의 확장에 도덕적·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명백한 운명은 서부 해안에 닿고도 끝나지 않아서 하와이 침략, 쿠로후네 사건, 신미양요, 미국-스페인 전쟁 등으로도 이어진다.
서부에서 많은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 러시 시대로 돌입했고 수많은 동부인들이 금을 찾아서 서부로 이주를 하기 하면서 서부개척시대는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서부는 동부와는 달리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서부 해안은 예외) 가축을 방목하여 기르는 목장이 많이 세워졌는데, 이 때 목장에서 가축을 돌보던 사람들을 카우보이라고 불렀다. 실상 동부의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서부에서는 그야말로 힘센 놈이 짱먹는 약육강식의 무법지대였기 때문에 수많은 무법자와 도적들이 활개쳤고 또한 서부개척으로 인해 영토를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들을 공격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는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저렴하고 넒은 땅과 금이라는 두 가지 이점 덕분에 그 위험을 무릅쓰고 서부개척을 하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문화적인 측면에선 비록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었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유럽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독립 초기 미국으로 건너오던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서유럽, 북유럽 출신의 유럽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서부개척시대가 한창인 19세기에도 계속되지만 이후 점점 개척자 정신과 다양한 지역과 광활한 영토가 개발되어가면서 점점 독자적인 미국의 문화적 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버팔로 빌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윌리엄 프레드릭 코디의 와일드 웨스트쇼는 광활한 서부시대를 진취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백인들에게는 "개척시대"였을지라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겐 학살, 강제이주로 점철된 어두운 시기였다. 로렌초 베라치니(Lorenzo Veracini)가 저술한 <식민자 식민주의:이론 개관(Settler Colonialism: A Theoretical Overview)>에선 서부개척시대라는 역사관 자체를 식민자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 원주민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교묘한 신화 만들기로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말 존슨 카운티 전쟁이라는 미국사에서 더러운 내전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개척지를 엄청 차지한 선이주민들이 후발 개척자들을 협박 및 강압적으로 내쫓으면서 이들과 갈등으로 용병 및 온갖 갱조직까지 고용하면서 미국 육군 기병대까지 참전한 내전이다. 이 와중에 미국 유력 언론들이나 정치권은 당연히 강자인 부유층 선이주민들을 편들면서 폭동이라고 규정하여 연방군을 파견해 재산을 지키고자 총을 든 이들을 학살 및 체포하면서 미국사에서 수치스러운 역사(백인들끼리 벌였던 일이니)로 남아있다. 이 사건에 대하여 가장 잘 다룬 작품이 바로 저주받은 걸작 천국의 문이다.
치안 체계
서부 개척 시대는 단기간에 광활한 미개척지에 많은 사람이 퍼져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심각한 치안 체계의 부재가 크게 대두되었다. 범죄자들이 많았지만 각종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것 같이 범죄자들이 휩쓸고 다니던 무법천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식민지인들의 고향인 유럽에서는 이미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재 우리가 아는 경찰 시스템이라는 게 정립된 지 오래라 그런 듯.
사실 범죄자와 민간인의 구분도 어려웠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돈없고 빽없어서 서부로 온 미국인이며, 손에는 총 하나씩 들려있었으니까. 먼저 온 사람이 알박으면 민간인 마을이고, 나중에 온 사람한테 꺼지라고 하면 민병대고, 살려서 털면 강도, 죽여서 털면 도적이었다. 광활한 서부에서는 마을사람이 행인을 쏴죽여도, 행인이 마을사람을 쏴죽여도 알 방법이 없었으니, 피해자와 가해자는 그때그때 달라졌다. 이런 구도는 인구가 늘고 정착지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안정되었다.
사실 무법자도 의식주를 해결할 필요는 당연히 있었고, 얼굴이 알려지면 어디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디 숨어지낼 돈이라도 털 수 있는, 최소한 어느 정도 정착이 이루어지고 물류가 통하는(그리고 은행을 털어도 어음이 증발할 일이 없는...)지역 근처라도 가게 마련이다. 그조차도 안 되는 개척 일선지역은 25센트 소설에나 나오는 무법자 그딴 거보다 오늘 먹을 양식을 구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빡세고 팍팍했다.
이런 식으로 서부개척시대 외따로 살아가던 개척자들 사이에서 번졌던 신경증을 흔히 프레리 광증(Prairie Madness) 혹은 프레리 열병(Prairie fever)라고 부른다. 서부 프레리 지역에 사실상 홀로 떨어져 살아가야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나타났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극단적 상황을 버텨나가다 생기는 우울증, 폭력성의 증가, 행동의 변화,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자살까지를 넓게 포함하기 때문에 병리학적 명칭보다는 특정 시대의 현상을 설명할 때 쓰는 명칭이다.
먹고 살기조차 힘든 사람들에게 범죄를 저질러봐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으니 행정력과 치안유지능력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무법자들이 창궐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정착지에서는 최소한의 치안을 위한 노력이 행해졌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범죄에 대항하려는 수단으로써의 경찰력만 유지가 되었을 뿐, 범죄자를 제도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은 많이 역부족이었다.
판사와 법원 수도 턱없이 모자라 순회 판사가 마을을 돌며 잡아놓은 범죄자들을 재판했으며 마을에서는 범죄자들을 오랫동안 가두어 놓는 것을 다양한 문제로 꺼렸다. 범죄자를 먹일 밥값 문제도 있거니와, 화가 난 마을주민들이 저 놈 당장 안 매달고 뭐하냐며 집단으로 몰려와 린치를 가할 위험에, 수감된 범죄자의 동료들이 구출하러 무력 급습을 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법원으로 가지도 못하고 제대로된 법리 검토 없이 즉결심판을 받는 일도 십상이었는데, 흉악범들을 빨리 치워버려야 했기 때문에 과실범이나 좀도둑 수준이면 의외로 별 처벌 없이 넘어가거나 피해자와 합의하여 손해를 배상하는 조건으로 사건을 덮기도 하지만 명백한 범죄자라면 거의 무조건 사형이었다.
추가로 이 시기에는 말을 훔치는 것은 높은 확률로 교수형 등의 강력한 형벌이 집행되었는데, 미국의 땅덩이가 어마어마하게 넓은 수준인데다 당대의 말은 자동차가 나오기 전에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라 매우 중요한 가축이었기 때문. 말이 없다면 단순히 다른 곳으로 못 가고 끝이 아니라 마을 유지에 필요한 보급품을 구할 수 없게 되고, 마을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큰일이 나도 다른 지역에 알릴 수가 없어 그대로 개척지가 몰살당하는 사태까지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교통수단에 더해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유목 사회나 개척 사회등 영역이 아주 넓고 인구밀도가 몹시 낮으며 구성원의 유동성이 높은 사회, 특히 행정력의 한계가 명확했던 현대 이전 사회에서 자주 나타났던 현상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범죄자가 도주해버리면 수배하고 추적해봤자 붙잡기도 쉽지 않고, 안 그래도 인프라가 부족한데 감옥 인프라라고 충실할 리 없다. 즉 사람을 감옥에 가둬두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불편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징역형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하면 이는 곧 '중간 수준'의 처벌을 적절히 가하기 곤란하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을 감옥에 가둬두는 것도 번거로우니 비 흉악범에 대해서는 별 처벌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거나 끽해야 즉시 집행 가능한 수준의 벌금이나 우리네 멍석말이 같은 신체형, 처벌받는 이가 굳이 탈옥까지 시도하지 않을 단기간의 구금 정도로 가볍게 처벌하되, 흉악범은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는 식으로 형벌의 양극화가 나타나기 쉽다. 또한 장거리 이동이 잦은 사회적 특성상 말도둑 등 이동수단에 대한 범죄를 엄격히 처벌하는 것도 이런 문화권의 특징이다.
제도화된 치안 시스템을 들자면 우선 마을 주민들이 선출하거나 마을 시장이 임명해 마을에 머무르면서 법질서를 유지하는 보안관(Sheriff)이 존재했다. 영화에서는 스토리 진행을 위해 보안관이 악당에게 힘없이 쓰러지고 개척 마을 주민들이 숨거나 굽신거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서부로 진출한 개척민들 역시 적지 않게 전쟁을 겪은 베테랑들이었고 무법자들이 말을 타고 총을 휘두르며 나타나면 개척민들 역시 엽총이나 권총을 들고 나와서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맞서 싸워 주민들에게 사살당한 무법자도 제법 많았다. 이렇게 주민들이 알아서 치안을 지키던 경험이(겸사겸사 짜증나는 놈을 쏴버리는 경험도) 현대로 이어져서 미국에서 개인의 총기 소지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되는데 한몫 했다.
그리고 특정 범죄자가 너무 설치면 연방보안관(United States Marshals Service)이라고 쓰고 인간백정이라고 읽는 국가 공인 살인전문가들이 들러붙었다. 이들은 연방정부 상원의 심사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 연방정부 사법부를 대표하는 공무집행관으로서 파견되는 일종의 특수용병인데, 경찰이 아니라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전장의 살인에 이골이 난 퇴역군인 출신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애초에 연방보안관이 파견될 정도의 범죄자라면 이미 극악무도하거나 수 차례 범죄를 저지른 중범죄자라는 뜻이므로 일반 경찰처럼 수사나 치안유지 등 다른 업무도 같이 처리하지 않고, 중범죄자를 체포하거나 시체로 만들어서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임무만 맡으므로 연방보안관들은 말 그대로 밥 먹고 전투 훈련만 한 인간흉기였다.
주로 남북전쟁 당시의 북군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당대 기준으로는 고성능의 권총과 소총을 소지하고 다니면서 무법자들을 사냥하듯이 쫓아다녀 소탕했다. 참고로 이 무법자들 역시 상당수는 남북전쟁 당시 연맹군(남부) 소속의 민병대나 의용군 출신이었으므로, 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전쟁이 아직 안 끝난 것'이었다. 당시 유명했던 무장강도단 두목 제시 제임스의 경우도 이 경우에 속했다. 게다가 미군까지 파견되어 치안을 잡았기 때문에 범죄자들은 대놓고 설쳐대지 못했다.
다만 미국 정부의 치안력이 광활한 미국 영토 전역을 커버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핑커톤이라 불리는 일종의 현상금 사냥꾼들을 고용하여 범죄자들을 추적 하기도 했다. 물론 뛰어난 총잡이들로 이루어진 소수의 현상금 사냥꾼들도 존재했지만 압도적인 정보망, 각종 지원 문제로 대부분 핑커톤 사무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러한 현상금 사냥꾼들은 남북 전쟁 이후 어수선한 정세로 인한 미국 연방정부, 주 정부의 치안부재와 막대한 인원의 참전 군인들이 핑커톤 사무소로 유입되면서 한 때는 미국 군대와 보안관보다 그 숫자가 많다고 할 정도로 최전성기를 겪게 되면서 미국의 악명 높은 범죄자들을 추적하였다.
이로 인해 범죄자들이 핑커톤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와일드 번치 같은 악명 높은 유명 갱단들을 소탕하면서 그 명성이 더 높아져서 미국 정부의 사설군대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핑커톤은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창작물에서 무법자, 보안관과 함께 등장하는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치안의 부재를 악용하여 부유한 지주들이 위와 같은 용병들을 고용하여 이미 정착한 이들을 무력으로 쫓아내는 일들도 있었다. 바로 와이오밍 주의 존슨 카운티 전쟁.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미국 전역이 개척되어 개발되는 시대의 변화로 서부개척시대가 마무리 되면서 막대한 자금과 무장을 갖춘 핑커톤은 미국 정부를 위협하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결국 미국 의회와 연방 정부, 주 정부 주도로 국가 공권력인 미국 경찰의 현대화가 진행되며 경찰의 규모와 권한이 크게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핑커톤의 이권이 줄어들어 쇠퇴하게 되었다. 무법자와 함께 서부개척시대의 야만을 상징했던 현상금 사냥꾼들도 문명의 발달이 고도로 이루어진 이때를 기점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현대의 미국 경찰의 시스템이 성립되었던 시기도 바로 서부개척시대가 마무리되는 시기로 1905년에 펜실베이니아 주 경찰 기관이 미국 주 경찰 최초로 미국 연방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1908년에는 FBI의 전신인 BOI(Bureau of Investigation)가 설립되면서 현재와 같은 주 경찰 - 연방 경찰의 관할권이 설정되었다.
서부 개척시대의 막바지를 배경으로하는 헌트 쇼다운에서도 등장한다. 서부 개척시대의 무기가 많이 나오고 1900년대로 넘어가면서 나오는 신형 무기들도 많이 나온다.
20세기에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게된 미국에서 이 시기를 각종 영화나 음악을 통해 그려냈다. 미국에서는 시어도어 루즈벨트나 존 F. 케네디 등이 '개척자(프론티어) 정신'을 미국을 대표하는 미덕으로 홍보했기 때문에 더욱 이 시대가 낭만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이 만든 서부극이 크게 흥행하자 이를 벤치마킹한 이탈리아에서도 서부극을 만들기 시작한 것. 너무 많이 나오다 보니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로 불리울 지경. 아이러니하게도 스파게티 웨스턴 작품들이 실제 서부개척시대의 고증에 미국산 서부극보다 더 충실한 경우도 많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많은 나라에서도 서부극을 즐겨 보았고, 태국이나 일본, 러시아, 아르헨티나, 칠레 영화에도 서부극이 있다. 대한민국, 중국에서도 만주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내세우며 서부극을 변주시켰다.
서부개척시대의 유럽 -
벨 에포크(Belle Époque)
벨 에포크(Belle Époque)
유럽사의 시대 구분 중 하나로,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보통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가 급속하게 발전한 태평성대를 뜻한다.
비슷한 시기로, 팍스 브리타니카 시기인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까지 아울러 '백년 평화(Century of peace)'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시작과 끝
정확한 연도를 따지자면 벨 에포크의 끝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벨 에포크의 시작을 정확히 몇 년도로 잡는지는 역사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역사학자 도미니크 르준은 1896년으로 잡고 또다른 역사학자 도미니크 칼리파는 1900년으로 잡으며(출처), 크리스티 경매의 공식 웹사이트의 벨 에포크 시기 미술품 소개 페이지에서는 프랑스 제2제국의 붕괴(1870년)를 시작으로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로 팍스 브리타니카(1815~1914)가 있다. 1차 대전 발발 이전의 평화롭던 시기라는 것은 비슷하나, 팍스 브리타니카는 정치외교적 의미가 강한 시대 구분인데 비해 벨 에포크는 단순히 평화 뿐만 아니라 경제와 과학기술, 문화적 양식이나 스타일까지 포함한 의미의 시대구분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두 시기 모두 역사상 전쟁이 별로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벨 에포크와 팍스 브리타니카 두 용어를 혼용하는 편이며, 따라서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종결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까지의 시기를 '백년 평화'라고 역사학계에서는 지칭한다.
평화로운 국제관계
백년평화라고 지칭된 이 시기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존속한 시기(1804 ~1918), 독일 제국이 존속한 시기(1871~1918)와 거의 일치한다. 이 시기의 평화가 메테르니히와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메테르니히는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 유럽에 다시는 나폴레옹과 같이 유럽의 균형을 뒤엎는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고 애쓴 인물이다. 그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잘 조율해서 유럽에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평화로운 체제를 만들었다. 그와 프랑스의 탈레랑 등 당대 명외교관들의 노력으로 인해 형성된 체제는 빈 체제라고 불리워지며 향후 백년평화의 토대가 된다. 그렇기에 1800년대 초중반은 메테르니히 체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180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이 평화롭던 체제의 균형이 한번 휘청이는데, 각국에 민족주의가 팽창하고 시민계급이 성장해서 전근대적인 귀족 세력이 주도해서 만들었던 빈 체제에 여러 불만을 제기했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국력이 빈 체제 형성 시기보다 강해지면서 균형의 무게추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 주 원인이었다. 프로이센은 자신의 팽창을 억제하려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러시아는 오스만과 영국을 상대로 갈등을 키워나갔다. 이런 갈등은 결국 보오전쟁, 보불전쟁, 크림전쟁 등으로 터져 나온다. 하지만 이런 갈등이 대전쟁으로 확전되지 않게 빠르게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균형을 되찾은 것에는 비스마르크의 기여분이 컸다.
비스마르크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외교적 수단을 더 선호하고 외교적 수단을 다 써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쓰는 최종 수단으로만 전쟁을 했다. 독일 제국 성립 후의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확보에 대해서 회의적인 편이었던 데다가 아직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동시에 싸우기에는 독일의 힘이 부족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최소한 대립관계는 만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
특히 그는 전쟁을 외교의 연장선으로만 여겼기에 전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한계를 명확히 이해했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승전했음에도 패배한 국가들도 납득 가능한 수준의 평화조약을 제시해 빠르게 종전하고, 그들이 독일에게 쉽사리 보복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하도록 영국,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어 대국적인 판세를 독일에게 유리하게 조성해놨기 때문에 유럽의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또한 크림전쟁에서도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을 조율해 종전을 빠르게 끌어내는 협상자 역할을 잘 수행했다. 게다가 독일 국내에서 성장한 시민계급들이 주장하는 복지 정책, 의회 개편 등의 의견도 잘 수용해서 체제 내부 갈등도 무마했다. 그렇기 때문에 1800년대의 후반기는 비스마르크 체제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걸출했던 두 사람을 포함한 당대 집정자들과 외교관들의 노력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 1815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이전까지 약 100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도 전쟁은 있었지만 대부분 발칸 반도 등 동남유럽이나 유럽이 아닌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 일어났고 주요 열강(영, 프, 독, 오, 러) 사이의 전면적 전쟁은 거의 없었다. 있었다 해도 크림 전쟁,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정도였으며, 다 합쳐도 44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민주주의와 여러 사상의 발전
이 시기에 시민혁명이나 참정권 확대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과 2월 혁명,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스트 운동이 있다.
또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유럽에서 꽃핀 시기이기도 했다. 그 결과, 1830년에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고,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분열된 상태를 끝내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독일에서는 1834년에 프로이센 주도로 관세동맹이 체결되었으며, 1848년에 독일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의회가 열렸고, 1867년에 북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독일 통일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전개된다. 결국 1870년에 이탈리아의 통일이, 1871년에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반면,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의 대두로 인해 위기에 빠졌고,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는 1867년에 헝가리와 대타협을 하여 이중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만들게 된다.
사회주의가 대두된 것도 이 시기이다. 당시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잉여 자본으로 인한 엄청난 빈부격차는 사회주의 사상이 대두되는데 좋은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상을 총집대성하여 자본론을 집필하고, 공산당 선언을 만듦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각국은 사회주의 사상가와 단체에 대해 엄청난 탄압을 가했으며,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이후 사회주의 탄압 정책이 한계에 달하자 러시아 혁명, 스파르타쿠스 봉기 등의 형태로 사회주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가 등장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는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으며,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고, 미국이 조용히 힘을 키워나간 시기이기도 했다.
산업과 기술 발전
이 시기에 엄청난 양의 혁신적인 기술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진보적 사상에 많은 이들이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책없는 낙관주의라고 탓하기도 뭐한게, 수세식 화장실부터 전화, 무선통신, 철도, 엘리베이터, 자가용, 여객선,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의 초기형태가 이 시대에 만들어져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관광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보고 자란 노인들이 자기 손자가 주말에 기차타고 바캉스를 가는 걸 보고 있으면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두운 이면
식민지 착취
아동 노동
인간 동물원
식민지 착취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한 산업혁명, 그리고 민주적 절차를 형성한 시민혁명으로 유럽은 세계를 선도하는 지역이 되었으나 이는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런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제국주의 경쟁을 펼쳤고, 백인의 짐과 같은 식으로 이를 정당화했다.
식민지들은 서구 열강에게 자원을 강탈당하고 대신 종주국의 상품을 떠맡는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술과 아편의 제조 및 판매를 독점했듯이 돈이 되는 상품들은 서구 열강이 독점하는 사례 역시 있었다.
식민지의 문화와 관습, 사상은 야만으로 묘사되었고 식민지인들은 외양이나 협력 여부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졌다. 당연히 미개하고 열등한 인종이 되는 이들은 서구 열강의 지배에 저항한 민족들이었다. 영국 인도청이 인도 내 민족들의 사진집을 발간한 적이 있는데 영국인들은 이 책에서 세포이 항쟁에 가담했던 민족들은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야만인이라 묘사한 반면 동인도회사에 호의적이고 세포이 항쟁에 가담하지 않은 민족들은 그나마 문명화된 민족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럽인들의 시각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된 사회진화론이 보편적인 기저 사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식민지들이 독립할 수 있던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기존 식민제국들의 힘이 어느 정도 빠지고, 완벽한 열강인 미국과 소련이 모두 식민 경제 자체를 파괴하는 것에 동의한 뒤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절 상전이었던 유럽 국가들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는 것과 유럽의 인종차별 문제 역시 이 시기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벨 에포크 시대에 식민지와 유럽에 드리운 어둠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
비단 식민지 지역뿐 아니라 열강 역시 자국 내에서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렸다. 하층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십수시간에 달하는 노동과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했음에도 주어지는 돈은 푼돈에 불과했고 이는 사회주의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러시아 등지에서 반정부 혁명과 뒤이은 러시아 제국 정부 전복 등으로 나타난다.
토마 피케티는 1789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의 상속문서와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부의 불평등정도를 조사했는데 1789년 프랑스 혁명이란 대사건이 있었음에도 프랑스의 부의 불평등도는 줄기는 커녕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늘어만 왔다는 것을 증명했다. 특히 이 불평등은 벨 에포크 시대(1880~1914년) 때가 정점이었다고 하며 1900년대 기준으로 프랑스 상위 1%의 전체 부의 점유율은 55%에 근접했고 파리의 경우는 1%의 점유율이 1910년 기준 68%에 근접했었다. 1789~1914년까지 상위 10%에게 평균적으로 국부의 80~90%가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복지 제도, 고용보험 등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독일, 영국 등 몇몇 국가에서 서서히 시작되긴 했지만 제대로 갖춰져 있지는 않았던 시대라 유럽 내에서도 노동자들에겐 매우 힘들었던 시기이며, 이 때문에 곳곳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공산당 선언을 쓴 카를 마르크스 또한 이 당시 사람이다. 차티스트 운동 등의 치열한 투쟁 끝에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권은 인정받게 되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정치적 참여에서 배제되었으며 시간이 지나 1차대전이 끝나서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이마저도 전쟁 이후 풀려나온 자본에 의한 잠시의 호황기 때문이 아니라, 1차 대전으로 공장에 남자들이 비어버리자 그 자리를 급하게 대체한 여성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요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남성 노동자들은 그래도 그나마 벨 에포크 이전 시기보다는 대우가 좋아지고 사회적 인식이 향상된 시기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이전 시대와 견줘 나아졌을 뿐 여전히 절대적인 삶의 질 개선은 미미하고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 남성 노동자 못지 않게 노동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지만 여성들의 임금은 낮았고 그들의 노동 역시 하찮게 취급되었다. 아동 노동자 역시 이전보다는 법령상 보호규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높은 강도의 노동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혹사당했다. 3D산업 노동자들은 온갖 산업재해로 다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보상을 받았으며, 심지어 사망하더라도 제대로 보상조차 받을 수 없었다. 이처럼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였기에 파업 등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무섭게 벌어지고, 그 결과로써 공산주의 담론이 대두되게 된 것이다.
사회에 반대한 가시적인 사회운동들도 벌어졌으나, 대부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당했고 주동자들은 처형당했다.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 19세기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열악한 환경은 매한가지였다.
이 당시에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에서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로의 이민이 성행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며 이들 후예는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인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