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기원전 27년~1453년 서로마 제국 395년~476년 동로마 제국 395년~14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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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최종 분할 | |
로마 공화국 | 서로마 제국 | |
동로마 제국 | ||
초기 국호 |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 Senatus Populusque Rom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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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로마(기원전 27년~476년) 콘스탄티노폴리스(330년~1204년) 니케아(1204년~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1261년~14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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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라틴어(서방 공용어/ 610년 이전 국어) 그리스어 (동방 공용어/610년 이후 국어) 기타 지방 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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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황제 |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년~14년) 티베리우스 (14년~37년) 클라우디우스 1세 (41년~54년) 베스파시아누스 (69년~79년) 도미티아누스 (81년~96년) 트라야누스 (98년~117년) 하드리아누스 (117년~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138년~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년~18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93년~211년) 아우렐리아누스 (270년~27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284년~305년) 콘스탄티누스 1세 (306년~337년) 테오도시우스 1세 (379년~395년) 테오도시우스 2세 (408년~450년) 마요리아누스 (457년~461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475년~476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 (491년~518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527년~565년) 이라클리오스 (610년~641년) 레온 3세 (717년~741년) 레온 6세 (886년~912년) 로마노스 1세 (920년~944년) 니키포로스 2세 (963년~969년) 요안니스 1세 (969년~976년) 바실리오스 2세 (976년~1025년) 알렉시오스 1세 (1081년~1118년) 요안니스 2세 (1118년~1143년) 마누일 1세 (1143년~1180년) 테오도로스 1세 (1205년~1221년) 요안니스 3세 (1221년~1254년) 미하일 8세 (1261년~1282년) 안드로니코스 2세 (1282년~1328년) 안드로니코스 3세 (1328년~1341년) 콘스탄티노스 11세 (1449년~14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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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원수정 → 절대군주제 | |
국교 | 고대 로마 다신교 (380년 이전) 니케아파 기독교 (380년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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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2,750,000km² (기원전 25년) 5,000,000km² (117년) 4,400,000km² (3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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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56,800,000명 (기원전 25년) | |
현재 국가 | 이탈리아 산마리노 바티칸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오스트리아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모나코 프랑스 영국 안도라 스페인 포르투갈 헝가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북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알바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튀르키예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몰타 키프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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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 ||
라틴어 | Imperium Romanum | |
고전 그리스어 | 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 |
중세 그리스어 |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
정말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면, 로마가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53년만에 전세계를 장악했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이전에 없었다. 이것 이외에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주제가 어디 있으며, 누가 다른 주제를 연구할 수 있겠는가?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폴리비오스, <역사> 중
고대사는 모두 로마사로 흘러들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개울이 호수로 흘러들어 가듯이, 그리고 근대사는 다시금 로마사에서 흘러나옵니다. 로마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저는 과감히 주장합니다.
1854년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2세의 사학 강의 중
로마 제국은 로마 공화국 이후로 등장한 기원전 27년부터 1453년까지 이어진 고대 로마의 제정 체제, 혹은 왕정, 공화정, 제정을 모두 포함한 고대 로마 전체 역사를 말한다.
로마의 임페리움은 지중해 전반에 걸쳤으며, 지중해 세계를 빠르게 정복하며 당대에도 강대한 제국으로서 로망스어군, 로마자, 키릴 문자, 로마법 대전 등등 유럽 문화와 사회 체제에 광대한 영향을 준 국가로 평가된다. 근동과 이슬람 문화권 역시 로마의 문화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에 고대 그리스와 함께 유럽 문명의 기초를 닦았다고 여겨지며, 현대까지도 그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 끼친 영향
유럽 문화권에서 '황제'라는 칭호는 그 Imperium(통치권)이 로마의 것을 계승했다는 최소한의 족보가 있어야 했다. 따라서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황제를 칭했던 모든 나라들은 로마의 Imperium을 평화롭게 계승한 것이든 신성 로마처럼 교황이 날조라도 하거나 오스만처럼 로마를 멸망시켜 뺏은 것이든 러시아처럼 결혼이라도 하든 간에 어떻게든 인정 받아야 황제 칭호를 쓸 수 있었다.
그 강대했던 대영제국조차 로마 Imperium을 계승하거나 뺏었다 할 건덕지가 없어서 유럽 세계 바깥 인도 제국의 황위(즉, 무굴 제국 황제의 후임자)를 겸하는 수준이었다.
명칭
용어 혼란이 있는데, 오늘날 '로마 제국'Roman Empire로 번역되는 Imperium Romanum(로마의 통치권)은 원래는 고대의 왕정 시절부터 후기 중세인 1453년까지 2,206년을 존속한 로마國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러나 Imperium의 번역인 Empire(제국)가 오늘날에는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로 의미가 바뀌었기에, 좁은 의미에서는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기존 공화정이 사실상 폐지된 후의 로마만을 말한다. 끝으로 잡는 시점 또한 엄밀하게는 1453년까지로 보는 게 맞지만, 관습적으로는 476년 서로마의 멸망 이전까지로 보고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위주의 동방만 남은 뒤는 비잔티움이나 동로마로 따로 분류하는 시각이 통상적이다. 단 최근에는 변화된 독자적 성격보다도 고대와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시각이 늘어나면서 1453년으로 보는 의견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러한 로마의 강력한 영향력이 드러나는 단어로, 흔히 영어 ecumenical과 한국어 '보편적인'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oikoumenikos(명사형: oikoumenē)가 있다. '거주지'를 어원으로 하는 이 단어는 본래 그리스인들이 오랑캐Barbaroi와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문명인 거주 구역'을, 곧 '그리스어권'을 일컫는 말이었고, 때로는 그냥 '온 세상'을 의미하기도 하는 복합적인 뉘앙스의 단어였다. 즉 '문명 세계' 혹은 '세계'라는 상반된 두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단어였고, 그런 의미에서 oikoumenikos, 곧 ecumenical의 의미는 전통시대 중화권의 화이론(華夷論)적인 천하 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로마가 지중해 세계 전체로 임페리움을 확장하면서, oikoumenē의 의미에 '로마 제국'이 추가되어버렸다. 그래서 제정 초기에 저술된 루가 복음서 2장 1절에서는 oikoumenē를 '로마 제국'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흔히 '보편' 공의회 내지는 '세계' 공의회라 번역되는 oikoumenikos 공의회란, 고대에는 '로마 제국' 공의회를 의미했다. 즉 로마 제국이 곧 oikoumenē(보편)인 것이었다. 물론 로마의 이 oikoumenikos 개념은 마치 현대의 미국마냥 모든 문화권의 다양성을 이념적으로는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고, 화이론적인 천하 개념에 더 가까운 의미였지만, 아무튼 이 로마식 천하(oikoumenē) 개념은 이후의 유럽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로마 제국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지를 다스린 보편 제국이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공화정을 폐지하면서 등장하였고, 이후 3세기의 군인 황제 시기까지는 여러 속주들을 통합한 형태의 원수정이었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를 유일한 수도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 황제 시기에 이르자, 여러 장군들이 황제를 자칭함에 따라 로마 제국은 밀라노와 라벤나 등지에 수도를 둔 서로마 제국과 니코메디아와 안티오크, 콘스탄티노플 등에 수도를 둔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었다. 로마는 476년까지 서로마와 동로마의 공식 수도였으나,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퇴위시키고 야만족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자치 왕국들을 세우자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수도로 남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게 망한 이후, 동쪽의 동로마 제국은 점차 그리스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고대 로마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로마 제국의 전신은 기원전 6세기경 왕정을 몰아내고 세워진 로마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은 여러 차례의 내전과 전쟁을 거치며 불안정해졌고, 기원전 1세기에는 뛰어난 장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면서 거의 명맥이 끊겼다.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취임하여 1인 독재 구조를 굳혀나갔으나, 기원전 44년 즈음에 공화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카이사르 사후에는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악티움 해전에서 기원전 31년에 승리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로마의 원로원은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에게 '프린켑스', 즉 로마의 제1시민이라는 칭호를 수여하였고, 아우구스투스는 사실상의 황제로 즉위하여 군림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로마 제국은 기나긴 평화를 맞았다. 이를 팍스 로마나라고 칭한다. 로마 제국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전 지중해 세계를 통합하면서 선진 문명을 유럽 각지에 전파하였다. 허나 이러한 번영기도 점차 끝났고, 제국은 콤모두스 황제 시기부터 불안정해지기 시작하더니 3세기에는 군인들이 서로 황제를 칭하고 각지에서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 등이 로마에 반기를 들며 완전한 혼란기로 들어섰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제국의 재통일에 성공하였으며, 후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전제정과 사두 정치를 실시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치세에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기독교가 빠르게 세를 불렸고, 비잔티움 지역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한 후 그곳으로 천도하였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 치세에는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95년 테오도우스 1세 사후에 제국의 구획은 동방 황제가 다스리는 동로마 제국(동방 제국)과 서방 황제가 다스리는 서로마 제국(서방 제국)으로 분할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북방의 야만족들이 대거 훈족을 피해 제국의 서방 국경 내부로 도망쳐 들어오면서 서방 제국이 급격히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게르만족 출신의 오도아케르가 서방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고, 당시 동방 황제였던 제논은 480년에 공식적으로 서방 황제직을 폐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지배자들은 종종 정통성과 권위를 빌리기 위하여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서방 제국이 사라진 이후에도 동방 제국은 약 1,000여 년간 지속하며 번성하였는데, 전성기에는 서방 고토 상당수를 회복하며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방 제국도 시간이 흐르자 쇠퇴하였고,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이 워낙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 오랫동안 번성했기에, 로마의 문화는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 각지에 퍼지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언어, 종교, 예술, 건축, 철학, 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로마의 입김이 미쳤으며, 특히 로마에서 사용되던 라틴어는 로망스어로 분화되며 유럽 거의 대부분의 권역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한편 제국의 국교로 채택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등으로 나누어지며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현재 세계 제1의 종교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크다. 로마의 건축도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는데, 로마네스크 양식, 르네상스 양식, 신고전주의 양식 등이 로마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이슬람 건축 양식도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로마의 체계적인 법률은 후대에까지 널리 이어지며 나폴레옹 법전, 미국 헌법 등에 계승되었으며 전세계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며 널리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 역사
오늘날 우리가 제정 또는 프린키파투스라고 부르는, 아우구스투스(이르게는 카이사르) 이후의 고대 로마를 '로마 제국'이라 부른다. 이는 동시대, 후대 로마인 사가들의 생각도 비슷했는데,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에 스스로 취임하고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한 년도부터를 공화정 체제의 종식, 실질적 제정의 시작으로 봤다. 2세기 후반 ~ 3세기 초의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 역시 이런 로마인의 시각을 적으면서,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힘을 제압했을 때부터 우리가 왕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군주와 같은 1인(황제)이 등장했다는 것을 적고 있다. 다만, 디오는 오늘날 로마사 연구자, 근대 이후 시각처럼 우리가 로마 제국이라고 부르는, 제정(프린키파투스)의 시작을 옥타비아누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숙적인 그를 엘리트 독재자로 매도하고, 로마의 내전을 막은 것을 내세워 스스로 막강한 권력을 쥔 다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아 사용했을 때부터 시작됐고, 그 완성은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이후 그의 두 혈육(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가 그 자리를 계승했을 때부터였다고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디오의 동료이며 친구인 마리우스 막시무스도 비슷했는데, 그의 저서는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 간접적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로마 제정 시대를 카이사르가, 혹은 아우구스투스가 개막시켰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 제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프린키파투스로 부르는, '아우구스투스~카리누스' 시대까지의 로마 황제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도미나투스(전제정) 아래에서도 로마 중앙 정부와 로마 원로원이 결합된 형태를 유지한 로마의 정식 국호는 여전히 S.P.Q.R.,즉 공화국이었다. 심지어 중세의 로마 제국을 부르는, 동로마 시대에도 공화국의 흔적이 있었다.
그 전 공화정 시대의 로마 또한 '로마 제국'이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공화정인데 웬 제국?'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전적 의미로 '제국'은 '황제국'과 '다른 민족을 통치·통제하는 정치체계'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비슷한 경우로 분명한 공화정이었던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 역시 '아테네 제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카이사르 내전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
BC 56년 루카 회담에 따라 BC 55년 집정관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나란히 선출되고 이듬해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로 각각 원하는 속주의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삼두정치 일원 중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진압 이외에는 별다른 군사적 업적이 없던 크라수스가 동방의 파르티아 원정을 야심차게 추진하였으나 BC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져버렸고 더욱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연결해주던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이미 전년도에 병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결혼동맹도 깨져 있었다.
비록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퇴역병사에 대한 토지지급을 승인하지 않은 원로원에 대한 반감으로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정치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술라의 원로원 중심 통치체제를 옹호하는 벌족파이고 갈리아 전쟁을 통해 얻은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을 시기하고 있었다. 집정관 임기 종료 후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의 속주 총독으로 임명받았으면서도 부임지로 가지 않고 로마에 머물며 부관을 통해 대리통치를 하고 있었고 그 사이 원로원 보수파에 설득당해 점차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삼두정치는 붕괴되었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마침내 충돌하게 된다.
내전의 전개
로마 진군
갈리아 전쟁 동안 카이사르는 계속된 승전보로 로마 시민들 사이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지만 제1차 삼두정치를 이용하여 로마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위험인물로 취급되고 있었다. BC 50년에 카이사르의 속주 총독 임기가 만료되자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카이사르로서는 만약 자신이 군사 지휘권을 내어놓고 로마로 돌아온다면 차기 집정관에 선출되기 전까지 아무런 공직을 갖지 않은 채 무방비로 적들을 상대해야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더욱이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원을 받아 이미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군대 지휘권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중재안으로 BC 49년 1월 1일 폼페이우스와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는 안을 원로원에 전달하였으나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고 카이사르에게 지휘권을 내놓지 않으면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겠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내렸다.
평화적인 해결책이 사라지자 카이사르는 주저없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카이사르는 신속성을 위해 갈리아 군대 중 이탈리아에 가장 가까이 주둔 중이던 제13군단만 이끌고 BC 49년 1월 10일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 Alea Jacta Est)”라는 말과 함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넜다. 당시는 아직 군사행동에 적합하지 않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북이탈리아에서 숙영지를 편성하고 겨울을 보낼 것을 생각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러한 로마 원로원의 예상을 깨고 신속하게 남하했다. 이와 함께 로마 안에서 호민관의 지위로 카이사르를 돕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원로원 최종권고 이후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와 합류하자 카이사르는 이 둘에게 각각 군사를 나누어 주어 안토니우스에게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초를 공격하도록 했고 쿠리오에게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페사로, 파노,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갑작스럽게 카이사르가 진군하고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이 카이사르에게 호응하여 쉽게 항복하자 놀란 로마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황급히 로마를 버리고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남하 중에도 지속적으로 폼페이우스에게 회담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아직 휘하에 제13군단 밖에 거느리지 못한 카이사르와는 달리 숫적으로 폼페이우스가 훨씬 우세함에도 허를 찔린 폼페이우스로서는 군대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브린디시에서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뚫고 그리스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내전을 해결하고 싶었으나 이제 내전의 장기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히스파니아 정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떠난 뒤 3월 25일 베네벤토와 3월 26일 카푸아에 입성하여 남이탈리아 평정을 마무리하고 4월 1일 수도인 로마에 입성했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모두 폼페이우스를 따라갔기 때문에 로마에는 최고 통치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법무관으로 선출시켜 수도 로마의 통치를 맡기고 카이사르 자신은 뒤쫓아 온 3개 군단과 합류하여 4월 7일 히스파니아로 떠났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세력은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동방 속주에 걸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그 전에 배후의 안전을 먼저 확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폼페이우스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호민관 자격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군권을 맡기고 그의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전함 40척을 이끌고 이탈리아와 그리스 사이의 아드리아 해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히스파니아로 출발한 카이사르는 엄청난 속도로 행군하여 4월 17일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있는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갈리아의 나머지 군단과 합류하는 한편 로마 점령 후 확보한 막대한 국고를 이용하여 군함 12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달 정도 마실리아를 공격하던 카이사르는 마실리아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게 3개 군단을 맡기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새로 건조된 군함들을 맡겨 각각 지상과 해상에서 마실리아를 공격하도록 한 후 자신은 나머지 6개 군단, 보병 27,000명과 기병 3,000기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6월 22일 바르셀로나에서 서쪽으로 130km 떨어진 일레르다에 도착했다. 당시 일레르다에는 히스파니아의 두 속주 총독인 폼페이우스를 대신하여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가 부총독으로 부임해 있었고 5개 군단과 현지 병력 48,000명을 포함한 총 78,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일레르다 전투]) 카이사르는 세그레 강에서 급작스런 홍수를 만나 보급선이 차단당하면서 고전하였으나 작은 배를 연결한 다리를 이용하여 세그레 강을 건너면서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이후 카이사르는 일레르다 바로 아래쪽에 흐르는 슈리스 강의 물줄기를 일부 바꾸어 자기 진영으로 흐르도록 만들어 이번에는 폼페이우스 군의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이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폼페이우스 군의 탈영병이 급증했고 형세가 불리해지자 후퇴하였으나 카이사르의 추격을 받아 8월 2일 결국 항복해야만 했다. 이후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다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으나 이를 어기고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에 합류하게 된다. 9월 6일 오랫동안 버티던 마실리아가 함락되고 카이사르가 9월 17일 남쪽 끝의 카디스에 도착한 후 다시 북상하자 9월 25일 타라고나에서 2개 군단을 보유했던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였다. 이로서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카이사르의 수중으로 떨어졌고 카이사르는 로마로 되돌아가 폼페이우스와의 직접 대결을 준비하게 된다.
북아프리카 원정 실패와 디라키움 공방전의 패배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난 동안 쿠리오에게 2개 군단을 맡기며 폼페이우스의 추종 세력이 있는 속주 총독으로 있는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정벌을 지시했고 안토니우스에게는 40척의 군함을 맡기며 그의 동생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함께 폼페이우스와의 직접적인 대결에 앞서 아드리아 해에 대한 제해권을 유지하도록 지시한 상태였다. 처음에 쿠리오는 시칠리아의 방어를 담당하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그리스의 폼페이우스에게 도망가는 바람에 별다른 전투없이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그 곳의 2개 군단을 흡수하였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는 원로원파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온 누미디아 왕인 유바 1세와 BC 49년 8월 24일 바그라다스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쿠리오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또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도 폼페이우스의 노련한 해군제독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에게 패해 보유했던 군함 40척을 모두 잃어버렸다. 히스파니아 원정 성공으로 고무된 카이사르 측에게는 뼈아픈 일격이었다.
히스파니아 원정을 마친 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법무관인 레피두스에 의해 독재관에 취임하여 로마의 민심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10일간 각종 조치를 취한 뒤 BC 48년 집정관에 선출된 뒤 곧바로 독재관 지위를 사임하고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을 위해 브란디쉬로 향하여 병력을 집결시킨 후 BC 48년 1월 4일 마침내 그리스로 향했다. 이때 선박이 부족하여 카이사르 자신이 제1진으로 보병 15,000명과 기병 500기를 이끌고 먼저 출발했고 다음날 폼페이우스 측의 감시를 뚫고 그리스 해안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의 출발을 위해 되돌려 보낸 선박들은 폼페이우스 측 함대에 발각되어 모두 침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 1월 5일에 오리쿰을, 1월 7일에 아폴로니아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제2진으로 편성된 보병 10,000명과 기병 800기가 천신만고 끝에 아폴로니아 북쪽의 닌페움에 상륙해 4월 3일 카이사르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로마의 영토 중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가 카이사르의 지배를 받았고 나머지 그리스, 북아프리카, 동방 속주들이 폼페이우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태였다. 그 중에서 폼페이우스가 차지한 속주들이 카이사르의 속주보다 더 부유한 편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세금이 폼페이우스 측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물러날 때 데려온 군단과 동방의 각 속주에서 불러모은 군단을 포함하여 무려 11개 군단이 넘는 대병력을 보유하여 카이사르의 병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호기롭게 폼페이우스 군에 대한 대규모 포위망 구축에 나섰지만 폼페이우스도 직접 대결 대신에 소모전으로 일관하면서 전투가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3개월 간의 소모전 끝에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 군에 의해 포위망이 돌파당했다. 본래부터 병력의 열세를 보이던 카이사르 군은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패배하면서 거의 괴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은 채 테살리아로 후퇴해야만 했다.
파르살루스 전투의 결정적 승리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공방전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를 뒤쫓지 않고 여전히 소극적 태도를 일관했다. 이러한 폼페이우스의 소극적 태도 덕분에 카이사르는 테살리아를 손쉽게 장악하였고 흩어진 병력을 모으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뒤늦게 폼페이우스도 추격을 시작하면서 디라키움 공방전의 2달 뒤인 8월 9일에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2번째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 군은 약 22,000명이었고 폼페이우스 군은 그 2배가 넘는 45,000명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우측면을 집중공격하기 위해 정예기병 7천기를 좌익에 배치하고 그 지휘를 티투스 라비에누스에게 맡겼다. 라비에누스는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의 부하로 참전하였으나 내전이 시작되자 폼페이우스 측으로 전향한 상태였다. 이에 대항하여 카이사르 역시 자신의 우측면이 취약한 것을 눈치채고 갈리아 전쟁 당시부터 활약한 고참 병력을 우익의 기병 뒤에 배치하고 카이사르 자신도 우측면에 위치하였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시작되자 처음에는 폼페이우스의 예상대로 카이사르의 우익 기병대를 손쉽게 물리쳤다. 그러나 그 배후에 대기하고 있던 카이사르의 고참 병사들은 당황하지 않고 반격에 나섰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중장보병으로 하여금 먼 거리를 달리게 하여 지치도록 만든 후 역습에 나서고자 하였으나 7년간 카이사르와 함께 갈리아의 수많은 전장을 누빈 카이사르의 고참 병사들은 스스로 진격을 멈춘 후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은 뒤 재차 돌격에 나섰다. 이에 폼페이우스가 기병대를 투입하였으나 이번에도 카이사르의 고참 병사들은 기병을 막지 않고 그대로 통과시킨 뒤 배후의 다른 카이사르 군과 함께 포위해버렸다. 이로서 폼페이우스가 처음에 계획하였던 기병대를 좌익에 집중하여 카이사르 군의 배후를 돌아서 공격하는 전술이 봉쇄되고 말았다.
초반 열세를 딪고 우익의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 군은 그대로 폼페이우스 군의 좌익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폼페이우스의 좌익 기병대가 모두 괴멸된 상태였고 카이사르의 고참 병사들이 교묘하게 폼페이우스 군의 오른쪽 배후로 돌아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전황이 점점 폼페이우스 군에게 불리해져 갔다. 결정적으로 카이사르가 최후방에 남겨 둔 예비병력까지 투입하자 폼페이우스 군도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 이미 오랜 전투를 벌이며 지칠데로 지친 폼페이우스 군으로는 후방에서 대기하며 힘을 비축한 카이사르의 예비병력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폼페이우스도 견디지 못하고 라리사로 달아났다. 폼페이우스 군은 15,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나 카이사르 군의 피해는 200명에 불과할 정도로 카이사르의 대승이었다.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밀회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하자 동방 속주들이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섰고 카이사르는 그라에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3개 군단을 맡겨 동방 속주를 수습하도록 하였다. 동방 속주마저 돌아서자 폼페이우스는 시리아 속주로 향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북아프리카로 가서 재기를 도모하고자 우선 이집트로 향했다. 당시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BC 55년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복위를 도운 적이 있었다. BC 51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누나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공동통치자로 즉위한 상태였으나 폼페이우스는 여전히 이집트가 자신을 지원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9월 28일 폼페이우스가 도착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들이 폼페이우스를 살해하고 만다.
폼페이우스를 추적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참수된 머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는 동안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에 권력다툼이 발생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의 세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접근했고 이에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공동통치자로 이집트를 지배하도록 중재했다. 이에 반발한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병력이 적은 카이사르를 공격하였고 이에 카이사르는 동방 속주에 파견보낸 도미티우스의 3개 군단 중 2개 군단을 이집트로 차출했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버티는 동안 지원병이 도착했고 결국 BC 47년 3월 27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군대는 패배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도망치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이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2달 동안 나일강을 유람하는 등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나중에 진짜인지 의심스러운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폰투스 정벌과 폼페이우스 잔당 토벌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사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폰투스가 로마 내전의 혼란을 틈타 세력 확대에 나섰다. 처음에는 시리아 속주를 맡은 도미티우스가 폰투스 군을 공격하였으나 카이사르가 이집트 내란에 개입하면서 2개 군단을 차출했기 때문에 결국 폰투스 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BC 47년 6월 이에 카이사르가 직접 아나톨리아 반도로 향했고 BC 47년 6월 파르나케스 2세의 폰투스 군을 젤라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에 보고하는 승전보고서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는 또 하나의 명언을 남겼다.
폼페이우스가 죽은 이후에도 북아프리카는 여전히 카이사르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속주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그리고 히스파니아에서 카르사이에게 거짓약속을 한 후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했던 페트레이우스와 아프라니우스가 있었다. 이들은 10개 군단에 달하는 병력과 누미디아 왕국의 지원까지 받고 있었지만 BC 46년 4월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누미디아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들을 모두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즉각 누미디아로 처들어 가 누미디아 왕국도 멸망시켰다.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페트레이우스, 카토는 자살하고 누미디아의 왕인 유바 1세도 자결을 선택했으며 아프라니우스는 도적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북아프리카의 폼페이우스 잔당을 모두 토벌한 카이사르는 로마로 되돌아 가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이듬해 히스파니아에서 탑수스 전투에서 살아남은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부하장수였다가 폼페이우스 편으로 돌아섰던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모아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카이사르는 다시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났고 문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모두 토벌했다. 그나이우스와 라비에누스는 전사하였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만이 겨우 시칠리아로 도망칠 수 있었다. 탑수스 전투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내전은 끝났고 로마는 이제 카이사르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암살
이제 명실상부하게 로마의 1인 지배자가 된 카이사르에게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부여되었다. 카이사르는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을 추진하고 달력을 율리우스력으로 개정하는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BC 53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인에게 당했던 참패를 당했던 카르하이 전투를 설욕하고자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카이사르 반대파를 자극했다. 카이사르에게 이미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많은 사람들이 왕위를 탐내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또다시 엄청난 군사적 명성을 얻게 된다면 카이사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앞세워 BC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서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만다.
카이사르가 죽은 다음날인 3월 16일에 암살자의 대표인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의 정당성을 호소했으나 성난 카이사르파 군중들에게 공격당했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유언장에는 당시 18세인 카이사르의 조카, 옥타비아누스가 제1후계자로 지목되어 있었고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또 다른 브루투스인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제2후계자로 적혀 있었다. 군중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암살파와 카이사르파는 종신독재관 지위를 제외한 나머지 카이사르의 정책은 모두 그대로 이어받기로 합의하였고 3월 18일 카이사르는 화장되었다. 그러나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갔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무덤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카이사르는 역사 속에서 퇴장하고 이제 로마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약관의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를 주목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 내전, 로마 제정의 시작
옥타비아누스의 등장과 제2차 삼두정치의 성립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후계자로 갑자기 언급된 옥타비아누스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으로 그 가문은 증조부 대부터 대대장, 로마 공행정 서기, 지방 행정관을 지낸 은행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바로 카이사르의 조카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였고, 외조모는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 카이사리스, 외조부는 폼페이우스의 고종사촌동생 아티우스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노부스 호모(신참자)로 법무관을 거쳐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가 네살에 불과했던 BC 59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던 중 객사했다. 친부가 40살도 되기도 전에 사망하자,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는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누나 옥타비아와 함께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에게 양육이 맡겨졌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12살이던 BC 51년, 유일한 보호자였던 외할머니마저 사망하면서 카이사르가 후견인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외가에는 더 이상 그를 돌봐줄 어른이 없어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가 살고 있던 집에 들어가 자랐다. 이때 그는 외종조부 카이사르 밑에서 군복무를 원했는데, 어머니와 계부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성년식 이후에는 군복무를 허락받아,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전한다.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당시에 옥타비아누스는 19세의 나이였는데, 외종조부의 명에 따라 동갑내기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로 떠나 함께 유학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자신이 제1상속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때 어머니와 계부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로마가 위험하니 돌아오지 말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대담하게도 비무장 상태를 유지한 채 친구 아그리파 등 극소수와 함께 이탈리아로 귀국 후 로마로 향했다. 이때 그는 로마로 귀국해, 안토니우스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키케로 등과도 접촉을 시도했다. 이는 그가 카이사르가 남긴 재산의 3분의 2를 상속받는 것보다 카이사르의 정치세력을 이어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카이사르의 측근 조차도 옥타비아누스를 카이사르가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는 키케로도 비슷했는데, 그는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햇병아리, 풋내기 등으로 불렸다.
어려움 끝에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장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때 그는 카이사르 가문의 후계자가 되면서 관례에 따라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카이사르로 지칭해 불렀다.
로마에 돌아온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고 능력에 대한 검증도 부족했지만 카이사르의 병졸들은 그가 카이사르가 지목한 후계자라는 사실만으로 열렬히 지지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자금을 자신의 세력을 넓이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대담하게도 동방 속주에서 보내온 세금도 가로채어 카이사르의 병졸들에게 나누어지면서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로서 19세의 풋내기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어느덧 카이사르가 남긴 막대한 자금력과 병력을 모두 이어받은 세력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세력 확대와 안토니우스와의 분쟁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넓히고 있던 사이 로마는 카이사르 암살의 정당성을 두고 정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카이사르 암살파는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 했다는 점을 강조하였지만 카이사르의 부하이자 카이사르와 함께 기원전 44년 공동 집정관직을 수행 중이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암살범들의 주장을 반박하였고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복수를 외쳤다. 여기에 많은 로마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여론이 역전되었고 이미 로마 원로원이 카이사르 암살범들을 특별 사면한 상태였으나 암살범들의 신변이 불안해졌기 때문에 숨어지내야 했다. 로마 원로원은 주요 암살범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마케도니아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시리아로 각각 속주 총독 자격을 부여하여 로마를 떠나가도록 조치했다.
안토니우스는 BC 44년 6월 자신의 집정관 임기종료 후 갈리아 코마타 및 갈리아 키살피나의 5년 임기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전횡이 심해지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격렬히 비난하기 시작했고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반대했기 때문에 민심도 잃었다. 더욱이 어리다고 무시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가 새롭게 부상하여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군대를 모두 차지해 버렸다. 이렇게 점점 로마 안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고 집정관 임기로 거의 만료되어가자 안토니우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탈리아 가까이에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빼앗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무티나를 포위했다.(무티나 내전) 이에 로마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의 군사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BC 43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도록 하였다. 또한 카이사르의 옛 군대로부터 인심을 얻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좋은 기회로 여기고 이에 응했다.
로마 원로원은 아무런 공직 경험이 없던 옥타비아누스를 BC 43년 1월 1일부로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고 추가로 군사지휘권도 부여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판사 및 히르티우스와 함께 출병하였고 BC 43년 4월에 벌어진 포품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하여 안토니우스가 도망치게 만들었다. 다만 전투 도중에 2명의 집정관 모두 전사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포위에서 벗어난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전사한 두 집정관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넘기도록 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거절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비록 안토니우스와 전투를 벌였지만 자신은 카이사르의 암살범을 도울 생각은 없다며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홀대하였고 단독으로 안토니우스를 추격하라고 냉담하게 말했다. 결국 병사들 역시 카이사르의 암살범을 따를 수 없다며 버티자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절망하여 마케도니아를 목표로 달아났지만 도중에 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던 갈리아 부족에게 붙잡혔고 안토니우스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암살범 중 최초의 처형자가 되었다.
제2차 삼두정치 체제 구축과 반 카이사르파 토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사라지자 옥타비아누스는 전사한 두 집정관의 군대를 흡수하였고 로마 원로원에게 공석이 된 집정관의 권한까지 요구하였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이 이를 거절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직접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하여 행진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BC 43년 8월 19일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공석이 된 집정관 자리에 선출되었다. 한편 도망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히스파니아의 속주 총독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게 몸을 의탁했는데 레피두스는 일찍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의 내전 중에 로마의 통치를 맡겼을 정도로 카이사르가 신임하던 사람이었다. 레피두스의 도움으로 안토니우스는 패잔병을 수습하였고 이에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 군대를 합쳐 거대한 세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대립하고 있던 시기에 카이사르 암살범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그리스에서 병졸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여 BC 43년 11월 보노니아(지금의 볼로냐)에서 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회담을 통해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 안토니우스는 그 옛날 카이사르가 조직했던 제1차 삼두정치를 모방한 제2차 삼두정치 동맹을 5년 기한으로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제1차 삼두정치가 비밀리에 조직되어 운영된 것에 반해 제2차 삼두정치는 민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조직으로 인정받았다. 이제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재건을 위해 원로원과 민회의 승인없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초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제2차 삼두정치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로마에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한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공동으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레피두스는 배후에서 로마 본국을 관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로마 원로원 의원 300명과 에퀴테스 2,000명을 국외로 추방하거나 숙청하였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격렬히 공격했던 키케로를 살해하며 개인적인 복수도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몰수한 자금을 이용하여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상대할 군대를 편성하였고 공석이 된 로마 원로원 의원자리는 각각 자신들의 지지자들로 채웠다. 이렇게 새로 구성된 로마 원로원은 BC 42년 1월 1일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선포하였고 이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로 격상되는 부수이익을 얻었다.
BC 42년 10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28개의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의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기 위해 아드리아 해를 건너가면서 필리피 전투가 벌어졌다.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군대를,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군대를 각각 상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투에 있어서는 백전노장인 안토니우스의 활약이 대단하여 10월 3일 벌어진 첫번째 전투에서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군대의 기습에 옥타비아누스가 패배하였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카시우스는 자결하였고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진영에 틀어박히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20일 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협공에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진영도 무너졌고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자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카이사르의 암살범이 모두 사라졌고 이제 로마의 권력을 놓고 벌이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이 시작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
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갈등과 화해
필리피 전투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새로운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히스파니아를,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 속주를 통치하도록 합의되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옛 연인인 클레오파트라 7세가 반 카이사르파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소환하였지만 곧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아예 눌러 앉아 버렸다. 그러던 중 BC 40년 초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안토니우스의 세번째 부인인 풀비아가 공모하여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는 일이 벌어졌고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공모한 혐의로 로마 원로원 의원 300명을 대거 숙청해버렸다. 이때 죽은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해적단을 조직하여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 반도로 향하는 식량수송을 방해하고 있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섹스투스폼페이우스의 처제인 연상의 이혼녀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기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다.
이집트에 머물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자신의 동생과 부인이 축출되고 자신의 파벌 사람들이 대거 숙청된 사실과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굴욕적인 휴전을 맺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이때 오리엔트 지방에서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의 시리아 속주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지만 안토니우스는 먼저 옥타비아누스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 역시 이탈리아의 브룬디시움에 병력을 집결시켰지만 내전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우려한 양 군의 백인대장들도 종군을 거부하였다. 때마침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재혼하는 조건으로 극적인 화해가 성사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속주를 다시 나누기로 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서방 속주를, 안토니우스가 시리아를 비롯한 동방 속주를 통치하는 대신에 레피두스에게는 북아프리카 속주가 그대로 맡기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토벌과 제2차 삼두정치의 붕괴
BC 38년 1월 옥타비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와 재혼하였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부하 중 한 명이 옥타비아누스 측으로 전향하여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넘기는 일도 일어나면서 옥타비아누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사이의 휴전이 깨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많은 해군을 보유한 안토니우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고 안토니우스 역시 카이사르의 유업인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옥타비아누스의 병력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은 타란툼에서 만나 BC 38년으로 기한이 종료되는 제2차 삼두정치 체제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함 120척을 제공하는 대신에 옥타비아누스는 20,000명의 병력을 안토니우스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했던 병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000명 밖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사이가 다시 나빠지게 된다.
BC 36년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까지 끌어들여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비록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옥타비아누스가 고전하였지만 카이사르가 일찍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 자문으로 붙여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나우로쿠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대활약을 보이면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세력은 몰락하였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자신도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거점으로 삼았던 시칠리아를 두고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가 대립하였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의 군대를 돈으로 매수하여 오히려 레피두스를 몰락시켜 버렸다. 이후 레피두스는 세력을 잃은 채 허울뿐인 최고 제사장 지위만 유지한 채 강제로 은퇴해야만 했고 이로서 제2차 삼두정치 체제의 한 축이 무너지고 이제 로마의 패권을 두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본격적인 대결이 불가피해지게 되었다.
최후의 대결, 악티움 해전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하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야심차게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기대했던 만큼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고 그 자신의 작전 실패도 겹치면서 파르티아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연인이 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의 도움으로 군사를 다시 보충하였고 이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한 후 로마로 돌려보내고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였다. 비록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 7세의 힘으로 군대를 재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인 배우자를 부정하고 동방의 정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안토니우스의 로마 내 인기가 매우 추락하였다.
BC 34년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정벌하고 자신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삼았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겐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을 부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더이상 충성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고 이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 결정적으로 안토니우스의 비밀 유언장을 보관 중이던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에게 유언장을 공개하도록 강요하였는데 그 유언장에는 로마가 정복한 영토를 자신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줘 왕이 되도록 하고 장래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7세의 무덤은 알렉산드리아에 호화롭게 건설하라고 되어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버렸다고 생각한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안토니우스의 BC 34년 집정관 지위도 박탈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는 이집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BC 31년 초 아그리파의 함대가 로마군을 수송하여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횡단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곧 벌어질 큰 전투의 예비 단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을 받은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본대를 그들의 해상 보급 경로에서 차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푸 섬 맞은편에 위치한 본토에 도착,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바다와 땅 모두에서 막히자 안토니우스군 내부에서 탈영병이 발생하여 계속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상 차단 해제를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 서쪽 해안의 악티움만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아그리파의 함대가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대보다 수는 많지만 더 작고 조종하기 더 쉬운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BC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여 옥타비아누스군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의 죽음과 내전의 종식
안토니우스와 남은 군사들은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함대가 막판에 노력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추격하였고 BC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살하였는데 독사가 클레오파트라 7세를 무는 사이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로 몸을 찌르고 클레오파트라 7세의 팔 쪽으로 쓰러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에 보존되어 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를 참배했는데 그때 만진 코가 일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다른 왕들의 유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나는 시체가 아니라 왕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잘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카이사르가 있으나 하나로 족하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훗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독립국가로서의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막을 내렸고 이제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막대한 보물을 압수하여 병사들에게 나누어주면서 그들의 변함없는 충성을 얻어냈고 이후 풍요로운 이집트를 자신의 개인 소유로 삼으면서 막대한 경제적 기반도 얻게 된다.
로마 제정의 시작
프린켑스의 지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는 내전의 최종 승리자로서 로마 군단의 절대적인 지지와 이집트를 비롯한 막대한 부를 손에 넣고 있었고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후광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로마는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공화정이었고 로마 시민은 왕정이나 독재관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술라는 독재관이 되어 무자비한 대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면서 은퇴 후에도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술라가 구축한 로마 원로원 중심의 통치 제도는 이미 거대한 제국이 된 로마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어 로마 원로원의 힘을 누르고 효율적인 통치체계를 갖추고자 했지만 반대파를 숙청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면서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도 술라가 추구한 로마 원로원 중심의 과두제의 한계를 잘 알았지만 카이사르처럼 암살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원하는 것들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였다.
먼저 옥타비아누스는 독재관의 지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내정의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BC 31년부터 BC 23년까지 9년 연속으로 집정관의 자리를 맡으며 권력을 독점했다. 9년 연속 집정관의 연임은 매우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5년 연속 집정관을 연임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내전 당시 소유한 로마 군단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고 금화와 은화의 발행권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가 왕위에 오르려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했지만 현실적으로 옥타비아누스의 권력을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 다만 BC 29년 로마 원로원은 '로마 제1시민(princeps civitatis)'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는데, 흔히 프린켑스라고 알려진 이 칭호는 로마 원로원 중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원로의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부여하던 명예직에 불과한 것이었다. 로마 원로원으로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왕이 아닌 로마의 시민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여한 것이었으나 로마 공화정의 껍데기는 유지한 채 사실상 제정을 추진하던 옥타비아누스는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아우구스투스 등극
BC 27년 옥타비아누스는 갑자기 이제 내전이 종결되고 그 혼란이 수습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다시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공화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으므로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vgvstvs)"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BC 23년까지는 집정관의 자격으로, 그 이후에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여전히 로마 군단의 최고지휘권을 보유하였고 로마 공화정의 개선장군에게 부여하던 호칭인 '임페라토르(Imperator)'를 카이사르가 독점하던 사례를 이어받아 그 역시 독점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군단의 총지휘권이 있으므로 로마 군단이 거두는 모든 승리의 영예가 옥타비아누스로 향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개인의 소유가 된 이집트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걷어 들이면서 로마 제일가는 부자이기도 하였고 이를 이용한 금화와 은화의 화폐 발행권도 반납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종종 자비를 털어서 공공건물과 가도를 건설하고 도로를 유지 보수하였으며 그 사실을 화폐에 새겨서 선전하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지니고 있던 또 다른 권력은 로마 속주 총독에 대한 임명권이었다. 본래 로마 속주 총독은 로마 원로원이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내전 종결 직후 로마 원로원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처럼 지리적으로 멀고 로마에게 점령당한 지 얼마되지 않은 속주에 대해서는 대규모 로마 군단이 주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군통수권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에게 10년 기한으로 통치를 위임하였다. 이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이들 속주에 대한 총독을 임명권을 가지게 되었고 속주 총독의 권한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유지하고 외국과의 선전포고와 강화를 자신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주요 식량공급처였던 아프리카 속주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칠리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에 대해서는 로마 원로원이 여전히 총독을 임명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마찰을 피했다. 이러한 속주 총독 임명권의 구분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기한이 갱신되면서 이후 '황제령 속주'와 '원로원령 속주'로 구분되는 것이 고착화되었고 옥타비아누스의 중요한 권력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옥타비아누스의 지니고 있는 권력은 대부분 기존 로마 공화정에 존재하던 합법적인 권한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예외적으로 BC 23년 집정관직을 더이상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대신에 호민관 특권만 추가적으로 요구하였다. 호민관은 평민 출신만 출마할 수 있는 직책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귀족이 되었기 때문에 자격이 없었지만 본래 옥타비아누스가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다. 호민관 특권에 따라 신체불가침을 인정받아 옥타비아누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고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과 다른 호민관이 내린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지니게 되었으며 민회와 평민회, 로마 원로원을 소집하고 법률도 발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 경력자로서 풍기 단속과 정무관 감찰, 인구 조사와 같은 감찰관으로서의 역할도 부여받았는데 로마 역사상 단 한명이 감찰관과 호민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적이 없었다.
로마 제정의 시작
비록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공화제가 유지되고 있었고 옥타비아누스는 법률상 직책은 명예직에 불과한 로마 원로원의 프린켑스 지위 뿐이었다. 다만 BC 12년 최고 제사상이었던 레피두스가 사망하자 그 후임자가 되면서 최고 제사장이 되었는데 최고 제사장은 종신직이고 단 1명만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상징성이 매우 컸지만 여전히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로마 원로원의 프린켑스로서 옥타비아누스의 발언은 가장 큰 권위를 지녔고 호민관 특권을 이용하여 로마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하고 민회를 소집하여 법률과 칙령을 반포할 수 있었으며 BC 19년부터는 집정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식석상에서 집정관의 상징을 사용하고 두 집정관 사이에 앉을 수 있는 권리도 부여받았다. 또한 여전히 임페라토르로서 로마 군단에 대한 최고지휘권을 보유했고 황제령 속주에 대한 총독 임명권을 보유하였으며 호민관 특권에 따라 신체불가침이 법률적으로 보장되었다.
이처럼 옥타비아누스는 황제로서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으나 여전히 프린켑스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구축한 통치체계를 '원수정(Principatus; 프린키파투스)'라고 부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정'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공식적인 칭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Avgvstvs)"였고 이 칭호를 대대로 옥타비아누스의 후계자들이 이어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황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임페라토르(imperator)'는 영어의 "엠퍼러(emperer)', '카이사르(Caesar)'는 독일어의 '카이저(Kaiser)'와 러시아어의 '차르(tsar)'의 어원이 되며 모두 황제를 뜻하게 되었다.
팍스 로마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정사에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처럼 로마를 한 세기동안 지배한 세습왕조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굵직한 이름의 현군, 암군, 폭군이 두루 있는 만큼이나 그 영향력도 존속기간 내내 상당했다.
300년 뒤 등장할 콘스탄티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 등장 전까지 창건자 부부 주도 아래 가장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세습왕조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아헤노바르부스)로 이어졌다.
로마인 사가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를 비롯해, 서양 고대 로마사 기본서 중 하나를 저술한 프리츠 하이켈하임 등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사를 설명할 때, 다음 4대를 각각 26년 6개월의 시기 및 그 공통점을 묶어 아우구스투스 시대/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시대/클라우디우스 및 네로 시대로 기술하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문서에서는 이 서술 방식에 따라 기술한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시대는 이전의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의 소위 은(sliver) 시대로 불리는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와 달리 특유의 경직되고 차가운 두 세대로 보통 설명된다. 이는 학자들의 일관된 설명처럼 두 황제의 냉혹한 성격,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나타나기 시작한 제정 초기의 정치적 특성과 그 그림자, 두 황제 아래 진행된 점증된 프린켑스 지위와 권력의 확립 등이 거론되며, 실제 문학적 빈곤과 스토아주의자와 황제 간의 대립 등이 나타났다. 반면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는 이전 시대와 다르게 문화적 활기가 나타나고 제정 안정화로 인해 속주 내 도시화가 진행되고 본국과 속주 간의 문화, 경제적 격차 완화 등이 나타나는 등의 이유로 종종 은 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 기본적으로 포에니 전쟁 이후로 계속된 로마의 급격한 팽창이 이제 한계가 왔음을 인정하고 내실을 기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경선의 안정을 위해 라인강, 도나우강, 시리아 같은 주요 국경에 요새를 짓고 로마 군단을 주둔시켰다. 다만 내전과정에서 40개까지 늘어난 군단을 예산문제로 28개로 감축하는 대신에 28개 군단을 상비군화하였고 부족한 병력은 로마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병으로 메웠다. 로마 군단은 로마시민권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20년 동안 복무했고 보조병은 로마시민권이 없는 속주민으로 구성되어 요새수비, 국경 경비, 투사무기 발사병 엄호 등의 임무를 25년 동안 수행하는 대신에 제대 이후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수도인 로마 내부에는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대와 경찰 및 소방관 역할을 하는 '비길레스(vigiles)'를 창설하였고 유사시 예비군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는 내실을 다지는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렇다고 영토 확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히스파니아(이베리바 반도)의 북부지역,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과 노리쿰, 도나우 강 남부의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BC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아나톨리아 반도 중부)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였고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도 병합하여 2개의 속주로 나누었다. 다만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의 게르만 족은 AD 9년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이 전멸하는 고전 끝에 결국 굴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또한 동방의 강대한 영토를 보유한 파르티아 제국과는 직접적인 충돌을 자제하고 주로 외교교섭에 나섰다. 그 결과 BC 20년에 협정을 체결하고 양 국의 완충지대로서 아르메니아를 보호령으로 삼게 되었고 또한 일찍이 카르하이 전투에서 빼앗은 크라수스의 군기도 되돌려 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통치체계는 겉모습은 공화정을 유지한 채 교묘하게 여러 가지 권한을 뒤섞은 것이었고, 그의 통치술은 본국과 속주, 도시와 시골, 육지와 섬에 따라 그 방식이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교묘한 형태의 1인 독재체제였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의 신체제는 공화정 복구 선언 이후에도 기원전 29년도의 '로마 여신과 디비 율리우스(신격 카이사르) 봉헌' 명령 서한을 비롯한 황제 개인우상숭배와 아우구스투스 부부 및 두 양자, 조카 권한 강화 조치 등으로 인하여, 당대부터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 형태(공화정 체제) 복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상당히 강했다. 따라서 그의 정적 외의 추종자들까지 '밀실정치', '족벌주의 연합의 전통 공화정을 가장한 실질적인 왕정' 등을 끊임없이 주장하거나 의심했다.
더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위와 각종 명예들이 옛 공화정 체제의 전통 아래 이뤄진 합법적 틀 속에서 진행됐다는 것에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지위는 명확한 법적인 지위보다는, '로마 공화국 수호자', '내전을 종식시킨 영웅'과 같은 개인의 명성과 영예 그리고 내전 과정에서 얻게 된 군사적 기반과 병사들의 충성심에 사실상 기반했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계승시키는 명확한 원칙도 없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그 명분 역시 상당히 애매했다. 더 큰 문제는 아우구스투스 본인에게는 후계자로 삼을 친아들이 없음에도, 그가 꾸준히 자신의 지위를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르는 친혈육'에게 물려주고자 한 개인적 열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개의 로마귀족들처럼 자신의 가장 가까운 남자혈육, 즉 조카나 외손자 등을 양자 또는 사위로 삼아 가문을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후계구도를 짠다. 그 첫 번째 후보가 바로 친누나 소(小) 옥타비아의 아들로 자신의 유일한 남자조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라는 소년이었다. 마르켈루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신분은 플레브스(평민)이지만 씨족 전체에서도 공화정 후기를 주름잡은 씨족 내 지파 마르켈루스 가문 태생으로, 아우구스투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친아들(티베리우스, 드루수스)과는 같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면서 먼 친척이고 어린 나이부터 동고동락한 친구 사이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의 지지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조카 마르켈루스를 자신의 딸 율리아와 결혼시켜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BC 23년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충복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장군에게 율리아를 시집보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남자 아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지위를 물려주려고 계획을 바꾼다. 이때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자신을 지지해준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리고 옛 안토니우스파까지 배려하고자 누나 옥타비아의 막내딸 소 안토니아의 남편이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두 양자 중 친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던 대 드루수스를 그 후계자로 생각해, 아그리파가 호민관 특권을 선사받기 전부터 꾸준히 이를 동료 원로원 의원들과 측근들에게 언질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아그리파는 외손자들이 아주 어린 나이에 급사했고 정식양자로 입적시킬 계획을 착실히 세워둔 누나의 사위, 자신의 양자 대 드루수스까지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을 앞두고 낙마사고로 29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고령인데다 평소 골골대는 약골이라서 크게 절망한다. 더 큰 문제는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에 태어난 두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는 각각 AD 4년과 AD 2년에 차례로 요절한데다, 드루수스와 안토니아 부부 사이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형제까지 지위를 물려받기에 너무 어렸다는 현실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일단 게르마니아 전쟁을 이끌고 있던 아내의 큰 아들 티베리우스를 로마로 소환해, 그를 외동딸 율리아의 새남편으로 결혼시켰다. 하지만 율리아의 끝없는 방종과 고부갈등,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티베릴루스가 요절한 일련의 사건이 터지면서, 견디다 못한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특권 등 자신이 가진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로도스 섬으로 떠난다. 이 기간은 무려 7년이었는데, 그 사이 두 외손자가 연이어 요절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다행히 티베리우스가 아들의 성년식을 핑계로 로마로 복귀하게 되면서, 후계 문제는 일단락되게 되는데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남자혈족 중 가장 후순위로 결정한, 아내의 큰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후계자로 삼았다는 것이 일관된 평가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한 리비아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들 중 한명으로, 불과 12살의 나이부터 동갑내기 친척 마르켈루스와 그 후계수업을 받아온 준비된 후계자였다. 또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는 의붓남매이면서도 부부였으며, 요절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실질적 후원자이자 계부이며 외삼촌이었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남에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 아니었고, 성격 역시 폐쇄적인데다 인기가 진짜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고령이었고,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남편이자 누나의 외손자 게르마니쿠스는 이제야 성년식을 마친 갓 18살의 소년이었다.
AD 4년 아우구스투스는 가족 회의를 열고 오랜 이야기 끝에 티베리우스를 정식 입양하고 그에게 자신의 지위와 가문 전체를 물려주기로 한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되어 그의 아들 소 드루수스와 나란히 율리우스 가문에 입적하면서, 카이사르의 성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남자혈육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차차기 후계자로 못박으며 두 친혈육까지 자신의 가문에 공식 입양시키며 실질적인 후계자는 자신의 남자혈육 게르마니쿠스임을 분명히 한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으며, 로도스 은퇴 전의 모든 지위에서 복귀했다. 이후 AD 13년, 티베리우스는 로마군 절대지휘권과 종신 호민관 특권 등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특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공동 황제가 되었다. 이 시기 두 사람은 인구조사 등을 부자의 이름으로 진행해, 제국 전역에 세습을 사실상 공포한다.
이렇게 후계문제를 해결한, 아우구스투스는 AD 14년 8월 19일 이탈리아 남부의 놀라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둔다. 로마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신격화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
티베리우스는 동명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카이사르파의 일원으로 이두스 마르티이(3월의 이두스) 사건 이후 안토니우스 형제측을 지지한 ‘옛 카이사르파 내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파’에 속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법무관 임기 종료 직전부터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고,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카푸아 반란에 동참한 이유로, 그의 가족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몰락한 이후 삼두파의 결성, 옛 카이사르파 내 화합으로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겨우 로마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어머니 리비아에게 반하였기 때문에 이혼하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결국 리비아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혼 후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나중에 태어난 동생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같이 아버지에게 남겨졌으나 티베리우스의 나이가 9살일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황궁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친우이자 충직한 부하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게도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다. 티베리우스는 22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군단 사령관이 되어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에서 상실했던 로마의 기지 일부를 되찾아 오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또한 아드리아 해안의 일리리쿰 속주에서 판노니아 족을 격파하고 판노니아 속주를 점령해내었고 파르티아 제국과 외교교섭도 맡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으며 완충지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AD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로마군이 게르만족 일파인 케루스키 족에게 점령당하는 참패를 당하자 티베리우스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여러 차례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전적과 달리 티베리우스에게 개인적인 불행이 잇달아 찾아왔다. 우선 게르만족 공략을 맡았던 동생 드루수스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낙점하고 그들의 후견인으로 아그리파를 선택하여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결혼시켰으나 아그리파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티베리우스를 율리아와 결혼시키고자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아그리파의 딸과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하여 그녀의 아들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후견인 노릇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모두가 요절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는 기회를 얻었지만 이번에는 친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이해야 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다음 후계자로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의 게르마니쿠스를 삼도록 한 것이었다.
비록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혈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에 마지막까지도 망설였으나 티베리우스는 유능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통치체제를 유지하며 국경지대를 정비하는 한편 지나친 사치와 향락을 억제하고 긴축재정을 펼쳐 재정을 풍부하게 했다. 하지만 황제가 주최하는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켰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인기는 잃었다. 더욱이 AD 26년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에게 통치를 일임하고 카프리 섬에 은둔하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폐쇄적이지만 유능한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에서의 염증으로 은둔중에도 전반적인 통치는 원거리 파발로 잘 처리하였다.(후세에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각종 시설물과 도로등에 새겨진 글로 근대에 오면서 점점 고평가되고 있다) 다만, 로마 원로원과 수도 로마의 시민들은 통치자가 자신들의 곁에 없는 것을 매우 매우 싫어하였다. 비록 수도에서 세야누스의 전횡이 심해지자 AD 31년 세베루스를 처형하여 혼란을 정리하였지만 여전히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 통치를 하였고 더욱이 말년엔 의심병 때문에 고발에 의한 고문과 처형이 연이어 벌어지는 공포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폭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단, 주타겟은 원로원 의원들로 그들과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다 후반부에는 최악이었다)
AD 37년 티베리우스가 병사하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의 아들 가이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가이우스는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지어준 '칼리굴라'('꼬마장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였는데 70대의 노쇠한 티베리우스 말년의 공포정치에 지친 로마시민들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칼리굴라에게 열광하였다. (본인은 칼리굴라라는 애칭을 싫어하였다) 하지만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술에 의하면, 이런 공포분위기는 계속 되었고 불행하게도 가이우스는 목숨을 건진 대신 오랜 시간동안 티베리우스에게 제왕교육을 받은 탓에 그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가이우스는 단독세습 직후 티베리우스가 중지시킨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 집행과 각종 행정결정을 재개시켰다. 이때 그는 본인과 황실의 이름으로 전차경기와 검투사 시합을 매일 같이 열고 축제를 베풀며 ‘빵과 서커스’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8개여월 만에 심한 고열로 쓰려졌고,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중병 회복 후 정신병 증세를 보인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은 온전히 믿을 수 없는 황색언론인 탓에 무조건 신뢰하긴 어렵고, 오늘날 연구자들은 이때부터 가이우스의 노골적인 황제 권력강화와 그 전제화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38년부터 41년까지의 기간동안 가이우스는 개인우상화, 임페라토르와 프린켑스의 권력을 통한 숙청 등을 통해 원로원과 대립했고, 그 과정에서 황제는 조폐발행권 장악, 곡물수송에 대한 새로운 권력 획득, 사법과 재판 권한 신설 등을 이 시기에 장악하는데 이 조치들은 41년 이후에도 황제들이 계속 장악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이우스의 행동은 원로원, 로마 내 최상위 기사계급과 부자들에게 정신질환 내지 변덕스러운 독재로 해석됐고, 황제의 생활 역시 화려하고 방종한 면이 있어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와 다를게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이우스를 노린 암살 시도는 39년 후반부터 현직 집정관 두명 등이 가담하는 등의 사건을 시작으로 수차례 벌어졌고, 서기 41년 1월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가 부하 20여명과 함께 황제를 암살하면서 가이우스의 변덕스럽고 노골적인 전제권력화 시도는 4년만에 끝난다.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은 시대)
가이우스 칼리굴라 암살은 요세푸스의 증언과 디오의 간접적 증언처럼 암살범들의 개인비리를 감추기 위해 벌인 일이자, 원로원 내 공화주의자와 암살범들의 공모로 발생한 급박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암살자들은 미리 강금한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혈육까지 죽이려고 했는데, 이는 암살자 중 일부가 마음을 바꿔 그를 살려준 뒤 근위대 병영으로 데리고 가면서 그들의 계획은 꼬이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처럼 현직 집정관은 황제 개인금고와 황실재산을 원로원 국고로 모조리 빼돌린 뒤, 원로원을 카파톨리오 신전에서 개회해 카이사르 가문 멸문과 후속조치를 주제로 연다. 이렇게 가이우스가 암살되고 원로원이 그 즉시 공화정으로의 회귀를 노린 상황에서, 신전 안에서는 기원전 29년 다시 공화정체가 회복되었는데 왜 다시 하냐는 반론이 쏟아지고 현직 법무관 베스파시아누스를 위시한 황제파 젊은 원로원 의원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한 현직 프린켑스의 죽음에 당장 복수를 결의해라", "명백한 번역이자 공화정체에 대한 도전이다. 암살범들을 처벌하고 가이우스의 원수를 갚자"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때 가이우스 황제의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한 암살범 20명 외의 근위대 지휘관들은 카이레아, 루푸스 등을 병영 도착 즉시 체포한다. 그리고 클레멘스 등은 9개 대대 병력과 함께 그 즉시 황제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면서, 가이우스의 암살범들을 반역법과 가족법으로 기소해 유죄선고 후 처형시커나 자결케했다. 이어 황제파 원로원 인사들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고문단 등이 병영에 집결해 "암살자들 뒤에 있는 것이 확실한 원로원을 다 쓸어버리자"고 건의한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런 상황에서 갑론을박을 펼치며 내분만 벌어지고 있었고, 근위대에 사람을 보내 일방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즉위 직후 병사 1인당 충성보너스 지급을 약속하고 즉시 하사한 상황에서 씨알도 먹힐 명령이 아니었고, 이 사건 후 수도경비대, 소방대까지 죄다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어 같은 날 클라우디우스는 무장근위대를 대동해 원로원을 찾아가, 조카가 억울하게 죽은 상황에서 더 이상 그의 명예를 더렵히지 말 것을 예의있게 경고한 뒤 그들을 존중하겠다며 최후통첩을 날린다. 이 사건들은 가이우스 칼리굴라 피살 후 24시간도 안 되어 벌어진 타임라인이었다. 따라서 41년 유피테르 신전에서 기획된 공화정 재건 선언은 일찌감치 무산되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남자혈육 중 유일하게 남은 남자황족으로,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신체적 장애 문제로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제위계승후보에서 밀린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가진 훌륭한 인품과 비상한 머리를 알아보고 역사학과 문학, 지리, 행정, 의학, 과학 등 각분야의 인재들을 스승으로 삼게 해 군경력이 불가능한 현실에서도 로마황족으로 살아남도록 훈련시켰다. 따라서 조카 가이우스 칼리굴라 시대에야 정치경력을 시작하게 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의 예상과 달리, 즉위 과정부터 놀라움을 안겼다. 실제 클라우디우스의 정치적 능력과 행정적 판단력은 놀라울 정도 뛰어났고, 이는 황제 암살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 속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서기41년 1월 암살 정국과 정세는 금세 안정을 찾게 된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 보호국들이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고 갈리아 북부와 벨기카 일대를 위협한 드루이드교 문제를 계기로 남부 브리타니아가 정복된다. 내부적으로는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로마 제국의 관료조직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특히 전임자 가이우스 시대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이탈리아 경제 발전과 사회안정책은 꼼꼼하고 착실한 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 궤도에 오른다. 그러면서 그는 이탈리아 내 기사계급과 갈리아, 히스파니아 속주 출신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내려 2세기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구축할 토대를 만든다. 타키투스가 수록한 연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정복당한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정책 때문에 라케다이몬(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결국 쇠퇴한 것이 증명되지 않았던가? 그와 달리 우리 창건자 로물루스는 창칼을 맞대었던 민족을 바로 그 날 당일에 로마인으로 귀화시켰을 정도로 현명했다'면서 원로원 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갈리아인의 원로원 입성을 추진했다고 한다.
AD 54년 클라우디우스는 저녁식사 후 급사하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사위, 양자, 외종손 네로(아헤노바르부스)가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주도의 궁중쿠데타로 즉위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이자 소 아그리피나(아내)의 친아들을 즉위시키기위한 암살로 추정된다) 네로는 즉위 초기 선정을 펼쳤고 속주들이 원만하게 통치되고 있었으며 파르티아 제국과도 50년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등 로마 제국 자체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네로 내각은 소년황제를 주무른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권력남용과 친모자지간인 황제와 모후의 대립으로 궁중음모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재위 초에는 소 아그리파나와 그 측근 팔라스의 음모 아래, 네로의 친고모 대 도미티아 레피다와 친척 유니우스 실라누스 부자가 반역과 근친상간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됐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사춘기의 네로는 여자문제로 어머니와 대립하더니, 친모자지간 간에 권력투쟁으로 확전된다. 그리고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네로를 궁중쿠데타로 옹립한 세네카와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가 끼어 든다. 이때 세네카와 부루스는 네로에게 자신의 취미에 매몰되고 그 직위의 정당성이 당연하다고 조언을 들었는데 이는 미숙한 청소년 네로가 일찍부터 괴상한 악행과 상상을 넘어선 사치를 벌이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그래서 그 평이 갈리기 시작한다.
따라서 네로를 둘러싼 궁중암투 속에서 피바람이 분다. 네로의 손에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로 네로의 처남이자 양형제지간인 브리타니쿠스(AD 55년),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AD 56년), 네로의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AD 62년)가 모두 살해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친족들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외에는 모두 네로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고종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까지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 씌운 뒤 그를 갈리아로 추방시켰다가 암살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전 로마인에게 비난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네로는 쾌활하고 빵과 서커스를 적당한 시기에 제공할 줄 알았던 황제인데다, 크게 실정을 하지 않아 보인 탓에 부도덕함과 잔인함 외에는 비난거리가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D 64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게 된다. 그는 적절하게 대화재 진압과 로마 화재복구에 힘을 쏟았지만, 실언을 하는 등 행동을 하면서 이전의 부도덕한 행동과 얽혀 방화범으로 의심받게 된다. 그런데 네로는 이때 로마 대화재 원인을 그리스도교인들의 방화로 뒤집어 씌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고, 황금 궁전을 짓겠다고 발표하는 등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일을 계속 진행시켰다. 이어서 그는 피소 사건 등을 일으키는가하면 근친상간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처형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등까지 피소사건 연장선에 묶어 극소수 남은 황실일가를 반역죄로 처형시키면서 제 손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핏줄을 끊어버린다. 따라서 그는 로마인들에게 “그 미덕까지 짓밞은 부도덕한 인간”으로 지탄받게 된다.
하지만 네로는 피소 사건 이후, 흉흉한 민심 속에서 도리어 그리스 순회공연을 떠났고, 그리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즉흥적으로 속주행정을 바꾸는 실정을 터트린다. 또 지나친 사치로 병사들의 월급까지 지급을 제때 못하고 속주세를 올리는 등 민심을 악화시키는 일을 계속 터뜨린다. 이 와중 그는 소아시아로 여행을 계획하고 출발하는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네로는 도리어 제대로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망높은 명장 코르불로를 의심해 그를 자살권유로 자살케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네로에게 지쳐있던 군대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다.
결국 네로는 AD 68년 코르불로 숙청 사건을 계기로 터진 근위대가 반란과 갈리아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 주도의 네로 탄핵 연설 등으로 몰락의 늪에 빠진다. 그리고 이때 빈덱스, 오토 등이 히스파니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를 비롯한 각지의 총독들을 포섭해 들고 일어났고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농간을 벌여 티겔리누스를 실각시키고 네로를 배신한다. 이어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데, 로마 사회 전체에서 완전히 고립된 네로는 자신의 실정으로 벌어진 내전의 와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으로 이어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단절되고 만다.
네 황제의 해의 혼란과 플라비우스 왕조의 등장
네 황제의 해의 혼란
네로가 죽은 이후 반란을 일으켰던 갈바가 AD 68년 6월 8일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애당초 갈바는 모두의 기대와 달리 젊은 시절의 총명함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경직되고, 비타협적이었으며 잇딴 실책을 벌였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곧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특히 라인강에 주둔 중이던 게르마니아 군단은 AD 69년 1월 2일 자신의 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일찌감치 갈바와 대립하였다. 이는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갈바는 원로원에게 네로에게 받은 선물 금액을 임의로 책정해 이를 모조리 뱉어내라고 명하고, 측근들과 애인들을 요직에 앉혀 부정부패까지 기승을 부렸다. 또 피소 사건의 피해자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양자로 삼는 등 계속 정치적으로 무덤을 팠다. 이런 탓에 그는 신망을 완전히 잃었고 같은 해 1월 15일 쿠데타가 발생하여 오토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렇게 하여 갈바는 네 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AD 69년의 혼란 속에 사망한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이후 오토가 황제가 되었으나 비텔리우스 때문에 그의 지위는 매우 불안하였다. 하지만 그는 네로 시대의 관료들을 복귀시켜 행정공백을 최소화시키고, 비텔리우스 측에 사절을 보내 내전을 최대한 막아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오토와 비텔리우스 측은 결국 맞붙었고, 오토 역시 3개월 뒤 비텔리우스군에 패했다. 이때 그는 패전의 책임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 자살했다. 그렇게 오토는 AD 69년에 죽은 두번째 황제가 되었다.
오토를 운좋게 이긴 비텔리우스는 단독황제가 되었으나, 애당초 그는 레누스(라인강) 일대 사령관에 있던 사정 탓에 운좋게 제위에 오른 지극히 무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전황을 방치했고, 7개여월동안 연이은 환락생활로 9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액을 날릴 정도로 부패했다. 또 그는 국가의 적으로 공인된 네로를 존경한다며, 그의 명예회복까지 시도한 탓에 로마인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AD 69년 한 해 동안 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4명이나 등장하는 대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과 유대전쟁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
베스파시아누스는 세금 징수원이었던 에퀴테스 계급의 아버지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사비니 리에티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문 출신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했고, 가이우스(칼리굴라) 아래에서 추천을 받아 AD 39년 30세의 나이에 40년도 법무관을 지냈다. 하지만 법무관 임기가 끝난 직후, 그를 추천한 칼리굴라가 암살됐고 클라우디우스가 뒤를 이었다. 이 시기 암살정국에서 그는 공화정 복구를 놓고 토론 중인 원로원에게 암살된 칼리굴라의 정식장례와 암살범 처벌을 주장했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 장악 후 공화정 복귀를 무산시켰고, 이 사건 이후 황실 내 해방노예 나르키수스, 카이니스의 추천을 받아 친황제파로 계속 승승장구했다. 그래서 그는 법무관 임기 종료 후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시절인 AD 43년 브리타니아에서 20개가 넘는 도시를 점령하는 뛰어난 전공을 세우면서 개선식을 치르고 그 공으로 BC 51년에는 집정관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급사했고 소 아그리피나, 세네카, 부루스는 그 틈을 노려 유언장을 무시하고 네로를 단독즉위로 옹립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한동안 아무런 직책을 얻지 못했지만 AD 63년 경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임명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AD 66년 유대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토벌해야 하는 시리아의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갑자기 병사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의 임무를 맡아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상태였다.
유대 전쟁의 발발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유대인의 나라인 유다 왕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도중에 정복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처음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나 BC 168년부터 BC 164년까지 이어진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운동이 성공하면서 독립에 성공했다. 마카베오 가문은 마타티아스와 그의 셋째 아들인 유다가 차례로 죽자 마타티아스의 막내 아들인 시몬이 유대인 저항운동을 이어받았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내부 권력다툼의 혼란을 이용하여 유대 왕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제사장이자 왕이 되어 하스모니안 왕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쇠는 얼마가지 못했고 BC 63년 경 동방원정 중인 로마의 그라니우스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이후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내전이 시작되자 카이사르를 지원한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왕위에 복권되어 비록 로마의 속국 지위로 유다 왕국을 재건하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이후 로마의 유력가가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BC 42년 이두매(에돔) 출신의 헤로데 1세를 유다 왕국의 속왕으로 임명하면서 헤로데 왕조가 시작되게 되었다. 다시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내전이 벌어졌으나 헤로데 1세는 안토니우스가 몰락한 이후에도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그 지위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다만 헤로데 1세가 죽고 나자 유다 왕국을 삼분하여 차지한 세 아들인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빌립보 1세는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AD 6년 가장 많은 영토를 물려받은 헤로데 아르켈라오스가 폐위되자 유다 왕국이 로마 속주로 잠시 편입되었고 AD 41년 헤로데 1세의 손자인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 뒤 나머지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데 빌립보 1세의 영토를 모두 넘겨받으며 유다 왕국을 잠시 재건하였지만 AD 44년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사망하자 왕위가 그 아들에게 이어지지 못하고 유다 왕국은 로마의 시리아 속주의 지배를 직접 받게 되었다. 하지만 유다 왕국이 로마 속주로 편입된 뒤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로마 속주 총독에 의해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고 이교도인 로마인이 유다 왕국의 대제사장을 지명하는 것에 많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네로 황제 시절인 AD 66년 카이사레아 지역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분쟁이 발생하였으나 로마 주둔군이 제대로 중재해내지 못했고 오히려 유대의 로마 속주 행정관인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유대 신전의 금고를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결국 분노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의 로마 주둔군과 플로루스가 임명한 대제사장까지 모두 학살당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시리아의 속주 총독인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안티오키아에 주둔 중이던 로마 제12군단과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로 작은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던 아그리파 2세의 군대를 이끌고 갔으나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하였다. 더욱이 갈루스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되돌아 온 후 갑자기 병사하면서 예루살렘 반란의 진압이 어려워지자 네로 황제는 경험이 많고 노련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3개 군단을 이끌고 유대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거병
베스파시아누스는 동명의 아들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유대반란 진압에 나섰다. 장남 티투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자랐는데, 네로에게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될때 함께 정신을 잃었던 과거가 있었다. 그렇지만 티투스는 네로에게 찍히지 않아, 성인이 된 이후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복무하면서 많은 군무 경험을 쌓았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AD 67년 봄에 불과 몇 주 만에 갈릴리를 장악하고 AD 68년이 되자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 왕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AD 68년 6월 네로가 죽자 전투를 중단하고 로마의 정황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새로운 황제 갈바를 인정하고 티투스를 축하사절로 보냈지만 티투스는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인 AD 69년 1월 갈바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로마에서 오토와 비텔리우스 사이의 내전이 벌어지자 베스타시아누스 자신도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조용히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AD 69년 4월 오토가 패배하여 죽고 비텔리우스가 즉위하였으나 거듭된 실정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AD 69년 7월 베스타시아누스가 마침내 거병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거병에 대해 함께 유대 전쟁을 치르던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의 로마 군단은 물론 시리아와 이집트에 주둔 중이던 로마 군단도 지지를 선언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군사적 전공을 위해 유대 전쟁을 재개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이후 아들인 티투스에게 유대 전쟁의 지휘권을 일임하고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은 로마의 주요 곡물 수입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여 로마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자신을 따르기로 한 시리아의 속주 총독인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를 발칸반도의 디라키움(지금의 알바니아 두러스)에 파견하여 그곳의 함대를 손에 넣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AD 69년 8월에 도나우 강에 주둔 중인 5개 군단까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지지를 선언하고 도나우 강 군단장 중 하나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비텔리우스의 라인강 군단을 물리치고 12월 20일 로마에 입성했다. 비텔리우스는 퇴위를 간청했으나 결국 살해당하며 AD 69년에 죽은 마지막 황제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베스파시아스가 황제가 되면서 로마는 AD 69년 한 해동안 황제가 4명이나 교체되는 진통 끝에 겨우 혼란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플라비우스 왕조
69년 네로 몰락을 시작으로 벌어진 네황제의 해를 정리한 것은, 당시 유대전쟁을 이끌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부자였다. 창건자 베스파시아누스, 장남 티투스와 차남 도미티아누스까지 고작 플라비우스 왕조의 치세는 30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 원수정은 69년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 플라비우스 왕조 치세 아래에서 애매모호한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의 지위를 직위계승법을 통해 명확히 하고, 시민권과 속주민들의 참정권 보장 등 제국 정치와 행정체계를 상당한 수준의 세계국가로 바꿨다. 이런 이유로 이 세습왕조는 위기의 원수정 체제를 재창조하고 팍스 로마나를 사실상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AD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으나 신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그대로 알렉산드리아에 머문 채 디라키움의 무키아누스를 로마로 파견하였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대 반란을 빠르게 진압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을 신속히 함락하도록 하였고 티투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여 5달의 포위전 끝에 AD 70년 9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유대 반란은 최후의 항전을 벌인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는 AD 73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만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함락된 예루살렘은 신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며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대 전쟁 동안 사망한 유대인이 무려 1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유대 전쟁이 마무리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비로소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AD 70년 10월 로마에 입성하고 로마 황제로서의 직무를 시작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AD 69년 12월 21일 원로원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황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와 같은 특권을 부여받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권에 관한 법률'을 원로원에게 제정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공식적인 호칭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로 사용하였고 그 아들인 티투스도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아 후계자임을 천명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 황제답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로마의 귀족 뿐만 아니라 갈리아,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에게도 개방하였고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네로가 탕진한 국고를 보충하도록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명한 콜로세움 경기장을 로마에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티투스의 짧은 치세와 도미티아누스 시대
AD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사망하자 예정대로 그의 아들인 티투스가 다음 황제가 되었다. 티투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유대 전쟁을 마무리했을 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했고, 아버지가 황제가 된 이후에는 근위대의 지휘를 맡아 아버지의 권력강화에 앞장섰다. 이런 이유로 그는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이미지가 냉혹하고 비열하다고 알려졌다. 그러다가 AD 79년 황제로 즉위했다. 티투스는 태생부터 유쾌하고,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람인데다 워낙 유능하고 공정했다. 따라서 황제가 된 뒤, 이런 그의 본 모습을 알게 된 원로원과 민중들은 티투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티투스의 치세는 문자 그대로 그와 로마 모두에게 끔찍했다. AD 79년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부유한 캄파니아 일대가 큰 피해를 입어, 폼페이 시가 땅 속으로 매몰되었다. 이어 이듬해에는 로마 대화재가 일어났으며 AD 81년에는 로마에 페스트까지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모두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다, 황제가 선정을 베푸는 상황에서 예기치 못하게 터진 일이라 고생이 컸다. 더구나 티투스는 평소의 불규칙한 생활로, 밤낮 바뀐 사생활로 유명했기에 2년 내내 터진 자연재해와 전염병 퇴치로 인한 과로는 건강한 티투스의 명을 단축시켰다. 따라서 그는 AD 81년 불과 재위 2년 만에 사망했다. 티투스 사후, 그 뒤는 동생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가 물려받았다.
티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의 제9대 황제로 즉위한 도미티아누스는 허영심이 많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재위시절 형인 티투스와 똑같은 호민관 특권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었다. 이 때문에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나 형이 재위 2년만에 사망하는 행운 속에 로마 황제가 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통치 면에 있어서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보여줬는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대신 로마 원로원을 약화시키기 위해 로마 속주 총독을 원로원 의원이 아닌 에퀴테스에게 맡도록 변경하였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브리타니아에 대해서는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까지 군대를 진군시켰고 AD 85년 도나우강 건너편의 다키아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이를 직접 격퇴하였다. 그러나 AD 88년 다키아족이 2번째로 침공해오자 로마 1개군단이 괴멸되고 군단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어려움을 겪은 끝에 AD 89년 막대한 금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다키아족 왕 데케발루스와 겨우 강화를 맺으면서 그 위상이 많이 실추되고 말았다.
도미티아누스는 상당히 엄격했고, 법집행의 공평함을 공공영역에서의 최대 가치로 여겼다. 따라서 로마 공화정기부터 쉽게 해소되지 않던 불법, 편법들과 부정부패가 과거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시대가 연상되듯 상당수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평민과 군인들은 도미티아누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스스로를 절대시하고, 대놓고 원로원을 무시해 이는 황제와 원로원 간의 대립각을 심화시켰다. 그렇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도미누스(주인님) 등으로 부르게 하고 예법을 만들어 형식상 공화국인 로마 제국의 주권자인 원로원을 계속 자극한다고 비난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험악해지는 가운데, 도미티아누스는 고발자 제도를 활용해 공포정치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AD 89년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이었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은 하(下)게르마니아 속주의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처형하였고 원로원 의원들도 종종 반역죄로 고발해 사람들을 고문하고 잔혹한 심문기법까지 만들어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설상가상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적인 가정사도 복잡하여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겐 청렴을 강요하고 엄격함만 요구했다. 결국 AD 96년 도미티아누스는 황궁에서 암살됐다. 야사에 따르면, 황후 도미티아에게 포섭된 노예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고 전해지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공포정치에 신음하던 로마 원로원은 기뻐하며 도미티아누스을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이어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 오래된 귀족 출신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렇게 프린키파투스(원수정)을 확고히하고 팍스로미나의 문을 연 플라비우스 왕조는 3대 만에 단절되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5현제의 번영, 팍스로마나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후 백여년 동안 로마를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로마 제정 최전성기로 불린, 오현제 또는 팍스로마나 기간동안 존속했다. 총 일곱황제로 구성된 이 왕조는 양자입양을 통한 방법으로 다섯 황제가 연이어 통치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오현제 시대가 로마 최전성기를 이룬 예로 흔히 거론된다. 그러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실질적 창건자 트라야누스와 그 누이의 혈연들이 양자입양과 상호 근친혼을 통해 제위를 이었던 부분에서, 이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과거부터 늘 찬양을 받았지만, 현대 이후 연구들에서 드러나듯 여러 문제들이 생긴 시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이 왕조의 치세기를 종종 도금에 가까운 번영기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이는 콤모두스만의 잘못이 아닌 부분으로 지적받고 있다.
네르바 시대
네르바는 공화정 이래 유명한 원로원 명문귀족 집안 출신으로, 그 집안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번영을 누렸다. 그의 조부는 티베리우스의 친구이자 최측근이었고, 아버지는 가이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신임을 받았다. 또 여동생은 오토의 형수이기도 했다. 그는 네로 몰락 이후 네 황제의 해 당시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해 플라비우스 왕조 창건에 큰 공을 세웠고 티투스, 도미티아누스를 도왔던 고령의 원로원 의원이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이후,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가 됐다. 하지만 즉위 당시 66세의 고령인데다 병중이었기 때문에 통치기간이 2년에 불과하여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원로원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도미티아누스의 공포정치의 잔재를 일소하면서 로마 제국을 쇄신했고, 옛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스타일의 원수정 통치 방법을 부활시켜 이를 확립했다.
즉위 후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투옥되었던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국외로 추방된 사람들은 사면하여 귀국을 요청하였으며 몰수된 재산도 반환하였다. 그러나 네르바는 군부의 지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군부의 지지를 받을 만한 인물을 물색하여 게르만 속주의 한 지방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네르바의 통치기간이 2년으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네르바의 가장 큰 업적을 자신의 후계자로 트라야누스를 지명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트라야누스 시대
트라야누스는 히스파니아의 로마 속주 바이티카에서 태어났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전쟁을 벌이던 시절 그의 군단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인연으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랐고 이후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의 총독까지 지냈다.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던 당시에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었고 군부 내에서 명망이 높았다. 이 덕분에 트라야누스는 AD 96년 네르바의 양자가 되어 차기 황제로 지명받았고 AD 98년 1월 1일부터는 네르바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AD 98년 1월 27일 네르바가 사망하면서 로마 속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후 트라야누스는 전임 네르바와 마찬가지로 원로원과의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및 농촌 회복정책을 추진하면서 내정을 정비하였다.
트라야누스의 제일 가는 업적은 로마 제정 성립 이후 한동안 중단되었던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넓혔다는 것이었다. 트라야누스의 첫번째 정복사업은 다키아 전쟁이었다. 다키아는 현재의 루마니아 영토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티소 강과 헝가리, 도나우 강,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다키아는 일찍부터 다키아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도미티아누스 시절에는 다키아 군에게 패배하여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평화조약을 맺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트라야누스는 AD 101년 3월에 로마 군단을 이끌고 제1차 다키아 원정을 감행하여 이듬해까지 전투를 벌여 다키아 군을 격파하고 다키아의 왕인 데케발루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AD 105년 데케발루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AD 106년 제2차 다키아 원정을 떠나 다키아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데케발루스는 도망쳤으나 결국 자살하고 말았고 다키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점령하던 AD 107년 나바타이 왕국(지금이 요르단 서부)의 국왕이 죽자 로마 제국으로 병합하여 속주 아라비아로 삼았다. 그리고 AD 114년에는 오랫동안 동방에서 로마 제국에 맞서고 있던 파르티아 제국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여 17개 군단, 약 8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를 오가며 양국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였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가 세운 아르메니아 왕을 내쫓고 AD 114년 말까지 아르메니아 전역을 장악하여 아르메니아 속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파르티아 제국의 북부로 진입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들을 함락하였고 AD 116년에는 세 방면으로 부대를 나눠 진군하여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일시적으로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이은 파르티아의 반격과 이집트 및 유대인의 반란 때문에 퇴각해야만 했고 로마 귀환 도중에 트라야누스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결국 트라야누스는 진중에서 병사하였고 자신의 후계자로, 오촌조카이며 사실상 양자였던 시리아 속주 총독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를 지명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
하드리아누스는 비록 이탈리아 혈통이고 현직 원로원 의원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문은 포에니 전쟁 후 이탈리아에서 히스파니아 속주에 정착한 속주 가문출신이다. 트라야누스의 오촌 조카이기도 했던 하드리아누스는 공직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경험하였고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시절에는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서 후방 병참을 담당하고 있었다. AD 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하였고 이틀 뒤 트라야누스는 사망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우선 트라야누스에 의해 정복된 2개의 지역에 대한 정비에 나서 여전히 파르티아 제국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로마로 귀국하는 길에 다키아 속주에 들러 통치체제를 재편성한 후 이듬해 7월에야 로마로 돌아왔다.
재임시절 속주인 유대교 반란, 브리타니아 반란, 북아프리카 반란 등을 겪었지만 이를 모두 진압하고 속주 통치를 안정화시켰다. 또한 더이상의 팽창정책을 포기하고 대신에 국경선 안정화에 매진하여 로마 제국의 속주들을 순행하며 정비에 나섰다. 브리타니아에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구축하여 지금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선을 만들었고 게르마니아의 방벽도 강화하여 라인강과 도나우강 국경을 정비했다. 파르티아 제국과는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아르마니아를 보호국으로 만들어 완충지대로 삼았다. 이렇게 제국의 통치기반을 정비한 하드리아누스는 AD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양자로 삼아 뒤를 맡기고 사망하였다.
따라서 말년까지 두번에 걸쳐 속주 순행에 나서며 속주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속주 통치제도 정비에도 힘썼고, 내정개혁에 치중한 점은 고대부터 높게 평가받았다. 하지만 현재는 일부 결정들이 로마 제국 내 이탈리아와 서방속주들이 동방속주들에 비해 경제, 사회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게 한 문제, 원로원의 무력화, 군사방어체제의 한계 노출 같은 걸로 비판 받기도 한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 안좋은 점이 부각되며 조금씩 비판 받는다고는 하지만, 현재도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평가는 좋은편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안토니누스는 친가가 갈리아 혈통이나 외가는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사람이다.
부계 가문은 본래 갈리아에서 유래한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을 지낸 신흥 가문이다. 반면 외가는 그 시작이 공화정 말로 거슬러 가야 될 정도로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로 외할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유력 이탈리아 세습 귀족이었고 당대 사람 모두에게 성실하고 청렴한 도덕인으로 불린 대정치가 중 한명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안토니누스는 아주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사별 직후 재혼해, 친가를 떠나 유아기부터 외조부 밑에서 친아들로 자랐다. 따라서 성인이 된 직후, 대를 이어야 할 외가를 정식으로 이어받았고, 성향과 본인 스스로도 친가보다는 외가 사람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유년기에 이탈리아 노빌레스 가 중 부와 권력을 모두 쥔 안토니누스 가문을 이은 후계자가 됐다. 외조부는 외손자의 아버지이자 멘토였는데, 훌륭한 인격자였고 매우 부유한 사람이고 타고난 귀족임에도 솔직함, 검소함, 언행일치된 삶을 중요시하고 이를 죽을 때까지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조부의 유언과 친가의 재산까지 이어받아 약관의 나이에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청년이 됐을 때, 안토니누스는 매우 검소하고 고결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이런 성장 배경은 안토니누스는 부계 뿌리만 갈리아 혈통인 전형적인 2세기 이탈리아 세습 귀족 중 한명이 되고, 일찍부터 여러 명망가에서 그를 사위 후보로 점찍은 이유가 됐다.
장모는 트라야누스 누나의 외손녀로 하드리아누스 아내 비비아 사비나의 여동생이고, 아내는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조카 대 파우스티나였다. 이런 인척 배경에 더해 장인은 당시 하드리아누스와 동서지간이며 복심인 대정치가 안니우스 베루스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입양되기 전부터, 친척이 거의 없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에겐 사실상 가까운 남자인척 중 한명이었다.
안토니누스는 청년 시절부터 관대하고 온건하며 인자한 성품과 매우 도덕적이고 성실한 인품으로 가족, 동료, 상관과 부관, 집안 클리엔테스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까칠하고 엄격한 하드리아누스 역시 안토니누스를 좋아해,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아시아 속주 총독, 집정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잠시 은퇴를 고려했다가 황제의 이탈리아 행정장관 임명으로 계속 공직생활을 했는데,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서 후계자인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가 요절하자, 하드리아누스와 긴급 면담을 거쳐 황제의 양자가 되고 그 후계자로 선포됐다. AD 138년 7월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하고 안토니누스가 황제로 즉위했고 원로원은 경건한 자라는 뜻의 '피우스(Pius)'라는 존칭을 부여하였다.
안토니누스는 평생 속주 순행으로 보낸 전임 하드리아누스와 달리 거의 대부분 로마를 떠나지 않고 통치했다. 그가 평온하게 통치한 이유는 재위기간 내내 침공이 없고, 그가 개인적 야망과 군공에 대한 열망으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도 있으나, 이런 이유보다 이 황제의 통치가 이렇게 흘러간 이유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때 벌어진 방만한 흑자경영에 따른 국고 정상화와 이탈리아, 서방경제 침체 완화 노력을 이유로 한 내정 안정화 조치에 황제가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토니누스의 성실하고 건실한 내치로, 로마 제국은 번영을 이어갔다. 안토니누스는 속주의 부담을 줄이며 재정을 건전하게 하였고 사회정책도 추진하여 그리스도교 박해를 금지시켰으며 대지진으로 파괴된 그리스와 소아시아, 로도스의 도시들을 재건시켰다. 또한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방벽을 구축하여 국경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현실안주적인 통치방법은 종종 3세기의 위기 원인으로 지목되어 비판받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로 벌어진 문무행정 이분화, 군경력자가 아닌 인사들의 행정 기용, 치안판사 제도 개혁에 따른 지나친 효율성 강화 조치 등을 손보는 등의 노력을 했다. 하여 그가 방만하게 현실 안주만 했다면 팍스 로마나는 그 후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즉위 직후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안토니누스는 본래 하드리아누스에게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 처조카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훗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양자인 아일리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일찌감치 양자로 입양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막내딸 소 파우스티나를 하드리아누스의 양손자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시키기로 하고, 처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이 케이오니아와 약혼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즉위 후 그는 후계구도는 바꾸지 않고 배필만 바꿔, 연령대가 비슷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고 처조카, 양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죽기 전 자연스레 권력을 이양하고 잠자듯 서거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염두에 두었던 또다른 후계자 후보였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안토니누스의 양자로 들어갔고, AD 161년 3월 안토니누스가 죽기 전 단독황제로 제위를 잇게 됐다. 하지만 그는 원로원에서 자신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도 함께 제위를 이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그는 동생 베루스와 함께 로마 제정 최초의 공동황제가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 시절에는 평화로웠던 이전 황제들의 시대와 달리 변방에 외적 침입이 잦아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AD 161년 파르티아 제국이 침공하여 로마의 1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아르메니아 왕국까지 점령하였다. AD 163년 마르쿠스의 동생, 공동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동방의 남은 군단을 이끌고 출정하여 파르티아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탈환하였고 AD 165년에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 국경선 안쪽까지 진격하여 파르티아 제국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개선식 후 파르티아 일대에서 유행한 역병이 번졌고, 이는 안토니누스 역병이라고 불리며 3세기까지 로마를 괴롭혔다.
동방에서 벌어진 혼란을 수습한 이후에도 수해 등으로 로마는 재해에 시달렸고, 전염병까지 돌던 상황에서 다뉴브 강 유역의 게르만족들이 본국이탈리아까지 쳐들어온 뒤 북부 최대 항구도시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이 사건은 마리우스 시대 이후 벌어진 로마 건국 후 최대 위기였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원로원을 소집해 자신과 동생을 아퀼레이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로마 내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 뒤 이들을 검투사들과 로마군으로 합류시켜 아퀼레이아로 진군했다. 다행히 두 황제는 게르만족들을 격퇴시켰지만, 아쿠릴레이아에는 다시 역병이 창궐했고, 설상가상 회군 중 공동황제 루키우스베루스가 AD 169년 과로로 쓰러져 젊은 나이에 급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169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단독황제가 됐는데, 동생 사후 온전히 모든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던 중, 다시 게르만족들이 국경을 넘어 로마 국경 일대 속주들을 유린했다. 그래서 황제는 AD 170년 다키아 속주로부터 대규모 군단을 북상시켜 게르만족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게 하였으나 오히려 총사령관이 전사하고 로마군 2만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게르만족에 의해 국경 방어선이 위협받자 4개 군단을 더 창설시켰고 AD 172년부터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벌였으나 도나우강 건너에서 근위대가 대패하고 근위대장이 전사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AD 173년부터는 각개격파로 작전을 바꿨고 결국 AD 174년 강화를 맺었다. AD 178년부터 다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시작하여 게르만의 여러 부족을 몰아붙이기도 하였으나 도나우 강 진중에서 병을 얻어 AD 180년 사망하였다.
콤모두스와 팍스 로마나의 종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콤모두스가 단독황제가 되었다. 그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중도에 그만두고 로마로 귀환했다. 하지만 AD 182년 그의 큰누이 루킬라가 지극히 질투와 권력욕 탓에 원로원 의원들과 공모하여 벌인 암살미수사건이 발각되면서 스물을 갓 넘긴 황제는 이 일로 충격을 받고 의심, 과대망상, 불안증세에 시달리게 된다.
루킬라의 콜로세움 암살미수사건 이후, 상당수 원로원 의원을 처형됐고 콤모두스는 근위대장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현실도피를 하며 유흥에 빠져 지낸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매관매직, 부정부패가 일상화되고 나라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브리타니아에서는 이런 행태에 못 견딘 병사들이 대표단을 꾸려 이에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또 콤모두스는 두 번의 암살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후 검투사 경기에 광적으로 빠져들고 이는 중독증세로 발전하더니, 이 증세는 또 다른 두 차례의 암살 미수 사건과 클레안데르 몰락 사건이 벌어지면서 극도의 정신분열 증세로 심화되기에 이른다.
AD 190년 로마의 반을 태워버린 대화재가 일어나자, 콤모두스는 재건된 로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콤모두스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오랜 암살 위험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불사신 헤라클레스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로마의 헤라클레스'를 자처했다. 그래서 콤모두스는 직접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처럼 싸우기도 하였다. 콤모두스의 기행은 급기야 AD 193년 1월 1일 검투사 복장으로 집정관직에 취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극에 달했고, 이 시기에 이르러 황제를 보필하던 매형 폼페이아누스는 반포기 상태로 일시적으로 은퇴하게 된다. 결국 집정관에 취임하기 직전인 AD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었고 로마 원로원은 즉각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세베루스 왕조 치하의 짧은 안정
현대 이전까지는 고대 기록을 기준으로 한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으로 대표되는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창건자 외에는 주목받지 못한 세습왕조였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세베루스 왕조는 단순한 군사전제정 내지 선군정치를 통한 잔혹하고 전제적인 통치 아래의 질서 등으로 표현되거나, 3세기 군인황제 시대 이전의 일시적 평화기 정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르러 3세기 군인황제시대가 연구되고, 렙티스 마그나를 비롯해 그리스, 터키 일대에서의 유적, 비문, 유물 연구 등을 통해 세베루스 왕조는 재평가되고, 이 시대의 연구를 통해 과거 무결점 수준으로 찬양받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모순 등이 밝혀지게 됐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 치하 아래에서 로마 내부 문제 해결이 제시된 부분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훌륭한 행정가, 법률가, 군사령관답게 콤모두스 치하 아래에서 방치된 로마 제국의 문제를 해결했고, 로마는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다시 안정을 누린다. 그러나 왕조의 치세는 짧았고, 창건자 이후 연이어 어린 황제들이 즉위하면서 로마를 안정기로 이끈 세베루스 왕조는 어이없게 무너지게 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콤모두스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 등에게 갑자기 암살되면서 다시 위기가 시작된다. 라이투스가 이끈 프라이토리아니는 전직집정관으로 군부의 신임을 받던 장군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를 지지하며 그를 황제로 내정했고, 로마 원로원은 이를 통과시킨다. 하지만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내의 황족들이 건재하고, 일방적으로 황제 암살자들이 주도한 새 황제 옹립은 공석이 된 황제 자리를 두고 내전이 시작되는 배경을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새 황제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 체제 아래에서 방치된 국가 문제 해결과 비대해진 프라이토리아니 개혁을 시도하다가, 재위 3개월만에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 자리를 경매 방식으로 내걸어, 경쟁을 유도해 제위를 팔아치운다. 이때 제위를 움켜쥔 인물이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인데, 그는 페르티낙스의 동료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 아래에서 충신이자 장군으로 명성을 떨쳤던 인사였다.
율리아누스는 페르티낙스와 비교해, 확실히 유능했지만 제위를 돈을 주고 산 까닭에 민심을 잃었다. 따라서 그는 라이투스가 모반을 일으킨 혐의로 처형했음에도, "돈으로 제위를 샀다"는 이유로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반발하여 각자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면서 로마 제국은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판노니아군 사령관 세베루스였는데, 그는 먼저 공동 황제 즉위를 조건으로 브리타니아의 알비누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로 진군한다. 이에 원로원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살해했는데, 로마에 들어온 세베루스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기존의 프라이토리아니를 강제해산시키고 판노니아 출신 병사들을 새로운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으로 완전히 교체한다. 이후 세베루스는 원로원에게 살해당한 율리아누스의 시신을 정중히 유족에게 넘겨 정식장례를 치르게 하면서, 스스로 페르티낙스의 후계자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AD 194년 이수스 전투에서 시리아의 니게르를 대파한 후 마지막으로 AD 197년 2월 리옹 전투에서 알비누스마저 격파하고 단독황제가 되어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하였다.
단독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니게르, 알비누스를 지지하면서 자신을 제거하려고 한 로마 원로원을 손보며, 원로원 내 불안요소를 제거했다. 그러면서 그는 원로원을 인위적으로 개편했다. 표면상 그의 조치는 잔혹했고 그 과정에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같이 억울하게 자결을 명받은 안토니누스 왕조 황족들도 있어 '푸닉술라'라는 악명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억울하게 사형판결을 받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유족들에게는 보복하지 않았고, 재산도 압류하지 않는 등 일정부분 상식선에서 국가를 안정화시키는데 노력했다. 이때 세베루스는 옛 알비누스파 의원들의 재산을 압류해 이를 기반으로 국가재정을 안정화시킨다. 이에 따라 그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하고, 황제 자문 및 관료층으로 실무에 능한 기사계급 관료들을 키우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군단의 숫자를 30개로 늘리고 이들에 대한 봉급을 인상하면서 재정이 부족해지자 그동안 면세 특권을 누리던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걷었다. 또한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콤모두스를 신원복구하면서, 스스로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계를 자처해 정치적 선언으로 양자입적을 선언한다. 물론 이 방법은 진짜 안토니누스 가문에 입적된 조치는 아니었다.
그는 부자세습 형태를 정례화하여 로마 내전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자신의 장남 카라칼라를 일찌감치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황제권을 공고히 하였다. 세베루스는 AD 197년 동방 속주를 침공한 파르티아 제국을 공격하여 AD 199년 티그리스 강 근처에서 파르티아군을 물리치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AD 210년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 전역을 재패하고자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였다가 AD 211년 2월 에보라쿰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카라칼라 시대
카라칼라의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였지만,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스스로 안토니누스 가문를 자처하면서 이름을 개명했다. 따라서 카라칼라의 공식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였다. 하지만 그는 세베루스 안토니누스라는 이름보다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 달린 망토를 개량한 새로운 형태의 망토에서 따온 '카라칼라'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아버지의 최후 라이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대결 당시, 카이사르에 임명되었고 일찍부터 공동황제였다. 그런데 어머니 율리아 돔나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의 연년생 동복동생 게타에게도 공동황제 자리를 내렸다. 따라서 카라칼라와 게타는 세베루스 생전부터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됐는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하게 악화됐다. 따라서 세베루스가 요크에서 사망한 이후, 카라칼라와 게타는 칼레도니아인들과 휴전 교섭을 맺고 로마로 귀환한 이후 권력암투를 시작했다.
카라칼라와 게타의 대립은 황궁과 원로원, 법정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계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두 형제는 로마 제국을 둘로 갈라 나눌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어머니 돔나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는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죽이기 위해 암살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 여러 번의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하자 카라칼라는 본인이 직접 게타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동생 게타를 어머니의 방으로 유인한다. 따라서 AD 212년 2월, 게타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형의 손에 살해당한다. 이때 카라칼라는 "동생이 날 죽이려고 했다"며 자신의 패륜적 행위를 정당화하고, 원로원과 군대를 찾아간 다음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그렇지만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게타가 형 카라칼라보다 확실히 인격적이고 지지가 강했기 때문에, 카라칼라는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충성 보너스를 지급해 그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이후, 카라칼라는 옛 안토니누스 황족들을 포함해, 원로원 의원들과 장군, 관료, 해방노예, 인기 전차기수와 검투사 스타, 철학자와 시인 등 수천명을 재판없이 모조리 살해하고 동생 게타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추락하게 된다.
이에 카라칼라는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대목욕장을 건설하고 병사들의 급료를 인상하였으나 이로 인한 재정부족이 발생했다. 따라서 그는 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어 주조하기도 하였다. 카라칼라가 한 정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AD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속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안토니우스 칙령'이었다. 이제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로마의 모든 속주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카라칼라는 군사적 재능, 업적과 행정가적 자질이 평균 이상으로 뛰어났다. 하지만 그 성격이 잔인하고 독불장군인 까닭에 이런 장점은 업적에 비해 부각되지 못했다. 또 그는 본래부터 허영심이 많았고 스스로를 마케도니아의 전설적인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여겨 로마를 비우고 군인황제로 활약했다. 이런 이유로, 로마를 위협하던 레누스와 다누비우스 일대의 게르만족들은 수십년간 로마를 공격하지 못했고 동방 역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말년까지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AD 212년 게르만족에 대한 원정 당시 무분별하게 동맹부족까지 학살한 행동은 지나칠 정도로 그의 잔혹함을 돋보이게 했다. 또 AD 215년 파르티아 원정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중단한 이후, 소아시아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을 처형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을 학살한 행동은, 서방과 동방 일대의 로마인들에게 잔인함과 허영심만 더 부각시켜 인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군사적 업적과 재능은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게 했고, 그가 취한 군제 개편 및 방어선 정비 등은 후기 로마제국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AD 216년 카라칼라는 재차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다. 이때 그는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고, 동방 여행 당시 사소한 이유로 부하들을 혹독하게 다룬 행동 등은 카라칼라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결국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백인대장에 의해 AD 217년 암살되었다.
마크리누스는 소원대로 황제가 되었지만 카라칼라가 벌인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고 볼모로 잡고 있던 파르티아 왕의 어머니와 그 때까지 손에 넣은 모든 전리품을 반환하는 불리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결국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가 음모를 꾸며 자신의 외손자인 14세의 엘레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서자로 둔갑시켜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결국 시리아의 군단까지 엘라가발루스의 편에 서자 마크리누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향해 도망쳤으나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엘라가발루스 및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시대와 시리아 여제들
엘라가발루스의 본명은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였지만 어머니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가문이 대대로 태양신 바알을 섬기던 엘라 가발이라는 제사장 가문이었기 때문에 엘라가발루스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해졌다. 엘라가발루스는 외할머니의 음모 덕분에 카라칼라의 서자로 꾸며져 마크리누스를 죽이고 동방 출신으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인에게 바알 신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면서 로마인들의 공분을 샀다. 또한 경박하고 장난이 지나쳐 거미집을 수집하고 각종 동물들로 마차를 끌게 하는 가 하면 손님들에게 유리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음식에 거미를 넣거나 말똥을 섞기도 하였다.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이 계속되자 율리아 마이사가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하여 사촌 동생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삼게 만들었지만 곧 변심하여 알렉산데르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근위대가 AD 222년 폭동을 일으켜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를 살해하게 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새롭게 즉위했지만 그의 나이도 14세에 불과했지만 유명한 법학자인 울피아누스를 등용하고 로마 원로원과의 관계도 개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율리아 마마이아가 울피아누스를 실각시키면서 내정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부상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AD 226년에 처들어오면서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병사들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지만 군사적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패배하였다. 하지만 AD 234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레만니족이 라인강을 건너 처들어 오자 개선식을 거행할 욕심에 알레만니족을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였고 그 사실이 발각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근위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과 3세기의 위기의 시작
이렇게 하여 5대에 걸친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졌고 이후 로마 제국은 AD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위에 오를 때까지 내부적으로 로마 군단이 황제를 마음대로 폐립하며 약 50년간 무려 18명의 황제(공동통치자까지 포함하면 26명)가 교체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특히 군인 황제 시대로 불리는 이때 로마황제 중에 천수를 누린 사람이 2명 뿐일 정도로 혼란이 극심하였다.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도 동방에 새롭게 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압박과 북방에서 날로 증가하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그동안 왕위다툼의 혼란을 겪던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동방의 강국으로 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로마의 동방 속주를 끊임없이 위협하였고 북방의 게르만족은 비록 통일된 정치체계는 없었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부족해진 식량을 찾아 로마 제국이 라인강 중류에서 도나우강 상류까지 연결하여 만든 방벽인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를 쉴새없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 로마는 계속된 어려움 속에서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많은 면이 이전과 달라지게 된다.
3세기의 위기
군인 황제 시대의 개막
본래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로마 황제는 법적으로 확실한 지위가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호민관 특권을 교묘히 뒤섞어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의 계승 방법이 명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혈통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아우구스투스를 이은 티베리우스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였고 오현제 시대에도 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양자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황제 계승이 이어진 것처럼 반드시 전임 황제의 혈통일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네로와 콤모두스, 카라칼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혈통에만 의존할 경우 폭군이 등장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네로나 콤모두스가 죽은 이후 혈통이 단절되자 그때마다 로마 원로원이 로마 황제를 지명하였지만 결국은 로마 군단장끼리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베스파시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각각 자신의 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하였는데 이로서 로마 군단의 지지를 받은 로마 군단장이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되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AD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되고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이제 차기 로마 황제로 라인강에 주둔한 로마 군단병들은 신병훈련책임자였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추대되는 일이 벌어졌다. 막시미누스는 군단장도 아닌 일개 대대장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연히 속주 총독 경험도 없었고 로마 원로원 의원도 아닌 상태에서 로마 황제로 선출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막시미누스 본인 스스로 로마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원로원을 위협하여 승인을 받아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로마 군단병 사이에서 신망을 얻어서 얼떨결에 로마 황제로 추대된 경우였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이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이로서 로마 황제를 지목하는 권한이 이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군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3세기부터 북쪽에서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게르만족이, 동쪽에서는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린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를 막아낼 수 있는 군사적인 능력이 로마 황제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이 되면서 전투에서 승리한 전공만 있으면 곧바로 황제 지위를 찬탈하는 군인황제시대의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이름에 붙은 트라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로마 군단의 병사로 입대하였다. 당시는 아직 카라칼라의 '안토니우스 칙령'이 공포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속주민은 로마 군단에 보조병으로 입대하여 20년간 복무하는 것이 로마 시민권을 얻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도 그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기골이 장대했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눈에 띄어 근위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절에는 라인강의 로마군단에서 신병훈련 책임을 맡은 대대장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던 중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병사들 사이에서 많은 신망을 얻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살해되자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했지만 탐탐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로마군 최정예 서방 병력의 지지를 받는데다, 원로원은 세베루스 왕조 치하 아래에서 나날이 약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도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대대로 트라키아 출신인데다 이민족의 혼혈일지도 모르는 애매한 혈통, 그것도 본인 대에 와서야 보조병으로 복무해 로마시민권을 딴 로마황제였다. 쉽게 말해, 안토니누스 칙령 이전부터 로마인이었어도 변방 태생의 이민족인지 반이민족이 국적취득 후 황제가 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로마 원로원은 쿠데타로 옹립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반(半)야만인이라고 대놓고 얘기했다. 또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일개 대대장 출신에, 그것도 신병 훈련 교관에 불과한데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승진한 여타 다른 하급장교 출신들과 비교해도 교양이 상당히 부족했다. 그래서 모국어 라틴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막시미누스는 누구보다 교양있고 로마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즉위 후에도 수도 로마에 가기보다는 라인강에 머물며 게르만족 격퇴에만 몰두했다. 어쨌든 병사들의 신망이 좋고 용맹도 뛰어난 만큼 재위 3년 동안은 계속해서 승전보를 수도 로마에 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3년 동안 국경에서 성공적으로 게르만족를 격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로마 원로원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이유는 막시미누스가 계속 승리한 것이 시샘난 이유가 아닌, 막시미누스 때문에 군자금으로 세금을 뜯어가고 올라오는 승전보고서도 상관이 명령하는 어조로 통보하는 일방통행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르마니아 전쟁 중 부교설치 과정에서 원로원 의원 일부가 참여한 막시미누스 암살 시도 사건이 벌어지는데, 막시미누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 강하게 대응한다. 또 그는 외적과의 전쟁에 많은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사회복지기금으로 사용될 예산과 무상배급품까지 군자금으로 유용하도록 명한다. 따라서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부유한 북아프리카 지방, 아시아 속주 등 동방 일대에서는 가혹한 세금징수와 약탈에 가까운 수탈에 못 이겨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폭발직전까지 치솟는다.
그러던 중 AD 238년 3월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과 같은 이름의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가 현지 올리브, 밀, 무화과 등을 재배한 대농장 지주들에게 황제로 추대된다.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오늘날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의 고르디움에서 기원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클리엔테스 후손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시대때 원로원에 편입된 매우 부유한 신흥 귀족가문이었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총독은 7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애당초 제위에 욕심이 있어 미리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빛 망토와 장신구 등을 준비한 뒤 카르타고로 들어간다. 이어 그는 황제 추대 직후 그 사실을 로마 원로원에게 통보했다. 또 그는 비밀리에 원로원에 사람을 보내 여러 인사들과 접촉 후 자신이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이를 정당화시켜달라고 로비까지 벌인다. 이 결과,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승인요구서가 로마 원로원에서 낭독되었을 때 원로원 의원들은 대항마로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인정하고 황제로 그대로 승인해준다. 그들이 바로 로마 원로원이 내세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대항마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다. 아울러 원로원은 이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진중에서 전쟁 중 졸지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버림받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분노하여 즉각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향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 서둘러 로마로 돌아와 방어에 나서도록 하였지만, 이 계획은 처음부터 꼬이게 된다. 왜냐하면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인정해줬음에도, 이들 부자의 요구와 달리 자신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누미디아 속주의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면직처리하지 않고 그에게 권고만 취하며 "새 황제들이 당신을 면직처리해달라고 하니, 일단 복귀해달라"고 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로원의 판단과 달리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와 카펠리아누스는 총독이 되기 전부터 사적으로 서로 앙숙지간인데다, 북아프리카로 건너온 이후 재판과 행정실무 처리과정에서 이견을 보여 무척 사이가 나빴다. 따라서 카펠리아누스는 원로원의 권고를 수용하지 않고 반발해, 현직 총독으로서 즉각 대응한다. 이때 누미디아 속주의 로마군은 카펠리아누스의 지휘 아래 AD 238년 4월 아프리카 속주의 카르타고를 공격한다. 이에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카르타고 내 경비병력까지 긁어 모아 북아프리카 일대 로마 최정예 병력과 맞선다. 하지만 이 싸움은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가진 야전사령관 능력과 잘 훈련된 로마군을 상대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투 중 그대로 전사했고, 카르타고 시는 누미디아 로마군에게 금세 함락된다. 그리고 이때 아들의 전사 소식과 카펠리아누스의 단호한 입장을 전달받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체포 직전 자살해버린다. 이렇게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어이없게 몰락하자, 로마 원로원은 상당히 당혹해한다. 다행히 카펠리아누스는 이후 막시미누스 쪽에 붙지 않고 그만 뒀기 때문에 더 큰 소란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국경 근처까지 내려온 상태였고,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황제로 승인해준 터라 화해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오래된 명문귀족들로 집정관 경력이 풍부하고, 군대 경험과 행정실무 경력을 두루 거친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한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일가 지자들의 폭동과 협박에 못이겨,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린 외손자를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린다.
로마 원로원의 이러한 선택은 고육지책이었지만 의외로 큰 효과를 발휘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로마 원로원을 응징하고자 호기롭게 이탈리아 본토로 들어왔지만 이미 그는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최악이었다. 또 막시미누스는 로마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국가의 적인터라 이탈리아 도시들은 남녀노소 힘을 모아 완강하게 저항했다. 따라서 전투가 몇 달 동안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 병사들도 부대 내 식량이 떨어지고 같은 동포들까지 자신들을 원수 취급하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배신한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로마 황제는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죽음 이외에는 그만둘 방법이 없었고 결국 막시미아누스 트라쿠스는 후계자인 아들과 함께 AD 238년 5월 자신을 추대한 병사들 손에 살해돼 인근에 진을 펼친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에게 그 머리가 전달된다.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필리부스 아라부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살해당하면서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이제는 로마의 공동 황제인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두고 로마 원로원이 두 개의 파벌로 나뉜채 정쟁에만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때 발비누스는 자신처럼 오래된 명문가 출신임에도 훨씬 많은 공을 세운 푸피에누스 막시무스를 시기했고, 막시무스 역시 자신이 아퀼레이아에서 싸울 동안 치안 유지는커녕 혼란만 가중시킨 발비누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로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개입된 것으로 강하게 추측되는 음모 아래 프라이토리아니가 황궁으로 쳐들어가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둘다 납치하여 살해한다. AD 238년 한 해동안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이어 막시무스와 발비누스까지 살해당하는 혼란이 발생한 끝에 이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황제가 될 당시 13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가 대리 통치하였고 고르디아누스 3세 내각은 티메시테우스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같은 동방 출신들이 장악한 섭정 통치방법으로 운영된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 티메시테우스는 자신의 딸을 소년황제와 결혼시켰고, 여러 정적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키운다. 다행히 권신 티메시테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큰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이 시기부터 제국 안에서 자연재해가 터지고 고트족이 다시 침범하는 일 등이 연이어 터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AD 242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1세가 동방 속주를 다시 공격한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사위인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함께 동방으로 향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파한다. 이후 로마군은 그대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진격하는데, 티메시테우스가 갑자기 사망한다. 따라서 로마군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역습을 허용해야 했고 후원자를 잃어버린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생전부터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제해온 또 다른 인사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근위대장 자리를 내준다. 그러나 이 임명 후에도 로마군은 온전히 고르디아누스 3세를 지지하지 않았고, 황제는 AD 244년 페르시아군과 교전 중 살해(전사)된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의문스러운 과정 속에서 죽자, 동방에 있던 원정군 병사들과 프라이토리아니는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이름 중 아라부스는 아랍 출신이라는 뜻으로 시리아의 베두인 부족 출신인 아랍인이었다. 필리푸스는 유럽인이 아닌 아랍인 중에도 로마 황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필리푸스도 통치자로서는 무능하지도 유능하지도 않은 편이었으나 정치력은 나름 있어 로마 원로원과 가급적이면 충돌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고 이를 통해 황제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AD 249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이 도나우강 방어선을 넘어서 침공해오자 이를 격퇴하는 전공을 세운 데키우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로마 황제가 되었고 이에 절망한 필리푸스는 자살하고 말았다.
데키우스와 갈루스
데키우스는 집정관을 역임한 후 로마 원로원 의원을 지냈고 필리푸스 아라부스에 의해 도나우강의 모이시아를 방어하는 군단장으로 임명받아 고트족을 방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데키우스는 원로원 의원 출신이라는 점과 고트족을 물리친 전공을 통해서 데키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군단병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로마 황제 후보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AD 249년 무능한 필리푸스 황제를 대신한 로마 황제로 추대되어 베로나 근처에서 필리푸스의 군대를 물리친 후 로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데키우스는 황제가 된 직후인 AD 250년 1월에 내린 포고령을 통해서 모든 로마 시민들은 로마신을 경배하고 신성한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인들이 반발하자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탄압에 나섰다. 그러나 고트족이 다시 도나우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범해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탄압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고트족을 토벌하러 나서야 했다. 데키우스는 만일 사태를 대비하여 성년이 된 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그 중 둘째 아들인 호스틸리아누스를 수도 로마에 남긴 채 큰 아들인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출정하였다. 그러나 데키우스의 예상이 불행히도 적중하면서 AD 251년 흑해 연안의 도브루자 늪지대에서 벌어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가 큰 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데키우스는 로마 역사상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한꺼번에 사망하면서 호스틸리아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지만 고트족을 막아내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로마 군단은 모이시아 속주 총독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공동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갈루스는 로마 황제가 되자 고트족과 대결하기 보다는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며 강화를 추진했고 자신의 후임 모이시아 속주 총독으로 아이밀리아누스를 임명한 뒤에 서둘러 수도 로마로 되돌아 가 버렸다. 더욱이 호스틸리아누스가 얼마 뒤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에 갈루스는 아무런 전투없이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는 행운을 얻었고 자신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트족은 갈루스와 강화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AD 253년 대규모로 도나우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처들어왔기 때문에 모이시아 속주의 로마 군단병들이 자신의 지휘관인 아이밀리아누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해 버렸다.
발레리아누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갈루스는 라인강 상류의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인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발레리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가 뒤늦게 도착한 뒤 아이밀리아누스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레리아누스는 세베루스 알렉산드르 재위 시절 집정관을 지냈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절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서 고르디아누스의 반란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또한 갈루스에 의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이 되면서 로마 군단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에 이은 두번째로 이상적인 로마 황제 후보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63세의 나이에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의 중단된 그리스도교 박해정책을 이어받아 카르타고 주교와 로마 주교를 처형하였다.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될 무렵 로마 제국은 북쪽의 고트족이 대거 침입하여 발칸 반도를 유린하였고 동방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도 다시 로마의 동방 속주를 노리기 시작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는 넓은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아들인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후 제국의 서부지역 통치를 위임하고 그 자신은 동부지역 통치에 전념한 채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비록 초반에는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어 갔지만 AD 260년 초 갑자기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샤푸르 1세의 회담 제의에 소수의 호위병력만 이끌고 갔다가 포로로 붙잡혀 버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게 하여 발레리아누스는 포로로 붙잡힌 로마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어 버렸다.
갈리에누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로부터 공동 황제로 임명된 후 라인강을 넘어오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라마니족을 방어하고 판노니아의 잉게누우스, 일리리쿰의 레갈리아누스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던 중 발레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여전히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방어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포로로 붙잡힌 아버지를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하였다. 그러나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계속된 공격에 서쪽의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방어선과 동쪽의 유프라테스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 갈리에누스 혼자서 로마 제국의 모든 국경을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이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비판받는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우선 갈리에누스는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을 토벌하지 않고 자신을 대신하여 로마 국경을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로마 제국을 사실상 분할해 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먼저 갈리에누스는 판노니아와 일리리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게르마니아의 두 속주 총독로 임명한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가 전리품 분배 문제로 갈리아 총독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사로니누스와 다투던 중 살해해 버리고 말았는데 그 와중에 갈리에누스의 아들도 죽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포스투무스는 현재의 독일 트리어에 해당하는 아우구스타 트레비로품에 수도를 정하고 갈리아 제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 제도를 그대로 준용하고 군단병의 지지를 받아야만 황제가 될 수 있는 등 로마 제국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작은 로마 제국에 지나지 않았다. 갈리에누스도 처음에는 갈리아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았고 어차피 포스투무스가 라인강의 방어를 계속 맡아준다면 그 지위가 속주 총독이던 황제이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갈리아 제국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 주기로 결정했다.
비슷한 시기에 동방 속주에서도 발레리아누스의 장군이었던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두 아들 소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를 황제로 옹립하자 시리아 팔미라의 귀족인 셉티미우스 오데나투스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마크리아누스를 토벌한 후 시리아 일대를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데나투스는 여전히 갈리에누스를 로마 황제로서 대우하였고 갈리에누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데나투스를 로마의 속왕으로 임명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 속주를 제외한 나머지 동방 속주의 방어를 일임했다. 비록 오데나투스는 AD 260년부터 AD 267년까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으나 AD 267년 승리 축하연에서 큰 아들과 함께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오데나투스의 후처였던 제노비아가 암살범을 죽인 뒤 자신의 어린 아들인 와발라트를 남편의 후계자로 앉히며 실권을 장악하였고 갈리에누스도 이를 인정해야 했지만 제노비아는 남편과 달리 로마의 속왕으로 만족하지 않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까지 공격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은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이 분리되고 말았다.
다음으로 갈리에누스는 국경에 주둔한 로마 군단만으로는 기병 위주의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버거워지자 마찬가지로 기병 위주로 편성한 상설예비대를 편성하여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시켰다. 이 예비대는 기동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기병의 비율을 이전에 비해 3배이상 높였고 무어인 경장 기마 투창병과 달마티아 외인 기병 부대, 강력한 복합궁을 사용하는 오리엔트 궁수 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 쐐기꼴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 등 다양한 병종이 혼합하였다.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에 파르티아식 중장기병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카라칼라 황제 시절에는 기병대를 이용한 기동타격대 개념이 등장한 것에서 발전하여 이제는 아예 로마 군단의 중심병과를 전통적인 중장보병이 아니라 게르만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같은 기병 위주로 변경한 것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실리주의자인 갈리에누스는 기병대장을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던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전통을 깨고 전문 군인을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비록 제정 이후 로마 황제에 대한 자문기관으로 실권을 모두 빼앗긴 로마 원로원이었으나 문민 행정과 군사를 두루 경험한 사람만이 로마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얻을 수 있어 로마 원로원은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인재양성기관을 역할을 하였으나 이제는 그 기능마저도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로마 군단의 중심병과가 중장보병에서 기병으로 변경되면서 지금까지 황제의 후보자 대부분이 군단장이었던 것과 달리 갈리에누스 이후에는 황제 후보자가 기병대장으로 변경되어진다.
마지막으로 갈리에누스는 알라미니족이 라인강을 넘어오자 이를 격퇴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라인강 주변의 국경지역을 내주는 대신에 다른 게르만족을 막아내도록 하였다. 이는 게르만족에게 게르만족의 방어를 맡긴 것으로 로마 제국 스스로 국방의 자주성을 일부 포기했다는 점에서 후대 역사가에게 큰 혹평을 받았고 당대에도 로마 군단 내부에서 갈리에누스가 게르만족 애첩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어쨌든 라인강 방어 임무에서 벗어난 갈리에누스는 도나우강 방향으로 군대를 집중하여 잉겔누우스와 레갈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게르만족을 도나우강 바깥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동분서주하던 갈리에누스였지만, 그의 단독통치기는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갈리에누스는 아버지를 빼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 빈축을 샀고, 이는 제국 여기저기에서 반란, 독립 움직임으로 확산된 원인이 됐다. 결국 제국은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이라는 3갈래로 쪼개졌다. 허나 갈리에누스는 제국 통합을 추진하면서도, 자신과 본인 가문, 극소수의 권세가 만을 위해 로마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책을 잇달아 펼치고 편가르기를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다. 그는 총독들의 반란을 막겠다며 로마 원로원 의원을 로마 군단에서 배제했다. 이어 계속된 국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 게르만족에게 국경수비의 일부를 부탁했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휘하의 직업군인 출신 장군, 기병대장들까지 불만을 품었고, 이는 갈리에누스 치세 후반부터 반란과 토벌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AD 268년 팔미라 제국의 제노비아가 이집트까지 점령하자 갈리에누스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 영지이자 이탈리아가 수입하는 밀의 3분의 1 이상을 공급하던 주요 곡창지대였다. 때문에 이를 상실한 것은 갈리에누스의 가장 큰 실책이 되었고, 그나마 그를 따르던 일리리아 출신 기병대장들까지 갈리에누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여전히 자신과 아들들의 승계 작업에 집중하고, 본인 외가와 처가 같은 극소수 가문들에게 권력을 밀어줬다. 이는 원로원 의원들과 갈리에누스에게 소외된 본인의 친척들, 그를 따르던 일리리아 장교 집단이 합심해 갈리에누스를 없애겠다고 마음먹은 원인이 됐다. 따라서 아우레올루스가 총대를 매고 밀라노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리에누스는 그 반란을 거의 진압했음에도 로마 군단의 지지를 잃어버린 채 살해당했다. 갈리에누스를 제거한 진압군은 그 후임 황제로 기병대장이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추대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이름에 붙은 고티쿠스는 고트족 출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워서 얻은 칭호였다.
갈리에누스가 살해됐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로마 원로원은 명령을 내려 갈리에누스의 막내아들과 아내를 처형하고, 갈리에누스 외가와 처가 식구들도 살해했다. 이때 갈리에누스의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가 억울하게 함께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소 발레리아누스의 친모와 소 발레리아누스의 유가족들에 대한 보복을 금지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갈리에누스가 추진한 개혁 중 문제가 많은 부분을 되돌리거나 손보면서, 원로원과 협력해 무너져가는 제국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트족이 침공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포로가 된 고트족 남자 중 젊고 건장하면 로마 군단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무장 해제 후 황폐화된 모이시아 속주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전임자인 갈리에누스가 단순히 알리마니족에게 라인강의 방어를 일임한 것과 달리 어디까지나 로마의 통제를 받는 범위내에서 정착을 허락한 것으로 정착할 토지를 얻은 고트족은 더이상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땅을 지키려고 자발적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정책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자신은 재위 1년 반만에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아우렐리아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갑자기 병사하자 로마 원로원은 그의 동생인 퀸틸루스를 황제로 지명하였지만 로마 군단이 이를 거부하고 기병대장인 아우렐리아누스를 자신의 황제로 추대했다. 결국 퀸틸루스는 자결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군사적 재능이 출중한 인물로 갈리에누스의 기병예비대를 더욱 강화시켜 사산 왕조 페르시아식 중장기병과 팔미라 제국식 궁기병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국경을 넘어오자 이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약탈후 되돌아가면서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총반격을 가하는 전술로 대승을 거뒀다. 비록 초반에는 로마 제국 국경 내부에서의 약탈을 그대로 방관하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약탈한 재물과 사람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진 반달족의 약점을 노렸기 때문에 전멸에 가까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방어전술은 국경에서 게르만족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공격해오면 최대한 안쪽으로 끌어들인 후 해당 속주가 개별적로 방어하는 동안 로마 황제는 기병예비대를 이끌고 게르만족이 후퇴하는 길목을 차단하여 포위섬멸하는 종심방어전술로 변경되었다.
게르만족을 격퇴시킨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을 당장은 적대하지 않는 갈리아 제국을 잠시 놔둔 채 동쪽의 팔미라 제국을 두번째 목표로 삼았다. 팔미라 제국은 사실상 통치하던 제노비아는 뛰어난 미인이자 남성을 능가하는 여걸로서 로마 제국의 내부혼란을 틈타 단기간에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AD 271년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제국 원정을 시작하자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비잔티움을 함락당했고 이어서 벌어진 시리아의 에메사 전투에서도 패배한 채 제노비아의 아들이자 팔미라 제국의 명목상 통치자인 바발라투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제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 속주들이 로마 제국으로 다시 전향했고 팔미라가 이중 삼중으로 포위당하자 위기에 몰린 제노비아가 낙타를 타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도망치려 했지만 로마 기병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제노비아가 로마로 후송되었고 아우렐리아누스도 철군하기 시작하자 팔미라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아우렐리아누스는 되돌아와 팔미라 반란을 진압하고 철저히 약탈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AD 273년 팔미라 제국은 멸망하여 다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제노비아는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벌일 때 끌려다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여인이었기 때문에 처형 만은 면하여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팔미라 제국이 무너지자 이제 자연스럽게 아우렐리아누스의 다음 목표는 갈리아 제국이 되었다. 당시 갈리아 제국은 건국자인 포스투무스가 AD 268년 살해된 후 히스파니아가 로마 제국으로 되돌아갔고 이후 즉위한 마리우스와 빅토리누스도 계속해서 살해당하는 혼란 끝에 당시에는 테트리쿠스가 황제가 되어 있었다. AD 274년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으로 처들어갔고 샬롱전투를 벌이게 되자 갈리아 제국의 테트리쿠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협상을 벌여 갈리아 제국을 넘기는 대신에 신변을 보장받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결국 테트리쿠스가 투항하자 갈리아 제국군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이렇게 하여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까지 통합하여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테트리쿠스는 당초 약속에 따라 루키니아 총독으로 임명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위 후 단기간에 게르만족을 누르고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기면서 스스로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 세계 재건자)'라고 부르게 하였다. 또한 그동안 로마는 국경에서 외적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수도 로마에는 아무런 성벽을 세우지 않았지만 게르만족이 로마 국경 안쪽까지 침범해오는 상황에서 수도 로마의 방어력을 강화시키고자 새로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세우게 하였다. 이 밖에 아우렐리아누스 자신이 시리아의 태양신 종교인 '미트라교'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미트라 신전을 세웠다. 이렇게 내정까지 정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에게 황제가 포로로 붙잡히는 치욕을 안겨 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였다. AD 275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으나 어이없게도 갑자기 부패했던 비서가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일설에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자신들을 처형할 것이라는 노예비서 에로스의 거짓말을 믿은 장교단이 암살했다고 한다.
프로부스
아우렐리아누스는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사상 초유의 사건 이후 벌어진 혼란과 갈리에누스 암살로 벌어진 국가적 위기를 모두 극복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잔혹한 단점으로 어이없게 암살됐다. 이렇게 아우렐리아누스가 측근 에로스의 농간으로 암살되자, 로마 제국은 무려 5개월간이나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된 끝에 75세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가 황제로 선택되었다. 타키투스는 로마의 유명한 역사가인 푸블리우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후손은 아니지만, 어쨌든 경험이 풍부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당시 원로원 안에서 군부와 소통이 가능한 원로였다. 따라서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아무도 황제 자리를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황제로 추대됐다. 그럼에도 타키투스의 제위는 불안해, 그는 처자식이 있음에도 전 재산을 기부했다. 타키투스는 즉위 이듬해 시리아로 향했지만 도중에 죽는다. 노환이라는 말도 있고 암살이라는 이야기가 모두 있는데, 이렇게 타키투스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타키투스의 이부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로리아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로마 군단은 이를 거부하면서,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직후부터 타의에 의해 차기황제로 추앙받는 장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하였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 생전부터 당시 황제였던 아우렐리아누스와 군공과 명성에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한 실력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넓은 제국 안에서 모든 적과 싸워 승리한 명장이었고,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제국을 멸망시킨 뒤 동방 일대 치안 안정과 행정 재건 책임을 위해 동방 속주 통치권을 받은 상태였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그 재능과 업적은 비슷했음에도, 교양있고 겸손한데다 정치력과 통치력은 한 수 위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그는 순수 군인 출신임에도 플로리아누스를 추대한 원로원에게도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원로원과 사이가 상당히 좋았는데 실제 통치 방식 역시 전형적인 로마 황제라서 원로원과 일반 민중들을 존중했다.
하지만 프로부스는 단독황제가 된 이후, 갈리아와 벨기카를 유린한 프랑크족을 격퇴해야만 했고, 서방 일대를 시작으로 도나우 강과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일대까지 돌아다니며 외적을 격파해야만 했다. 이때 프로부스는 민생안정과 경제재건을 위해, 퇴역병과 현역병사들을 공사현장에 투입시키고 밭을 일구게 했다. 또 그는 포로로 잡힌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등을 로마군에 징집하거나 그들을 황무지에 살도록 하면서, 로마인들의 세금부담을 줄인다. 따라서 그는 원로원, 로마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로마 제국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프로부스의 이런 통치 방법은 마구잡이로 모든 공사현장에 투입된 일부병사들에게 불만이었고 그들 중 일부는 이런 황제의 결정에 불만을 표했다. 따라서 프로부스는 AD 282년 여름, 페르시아 원정길 도중 고향인 시르미움 근교의 늪지대 매립 공사 감독 도중 일부 병사들이 일으킨 폭동에 휩쓸려 어이없게 암살되고 만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오랜만에 등장한 훌륭한 황제 프로부스가 어이없게 암살된 직후, 정신을 차린 로마 군 병사들은 크게 후회했고, 애당초 암살에 관여하지 않은 근위대장 카루스는 암살범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게 하며 혼란을 수습한다. 로마 복귀와 페르시아 원정 지속 여부가 논의되는 와중, 로마군은 시리미움에서 원로원 의원이자 근위대장인 카루스를 후임 황제로 추대한다. 이때 카루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강행하기로 결정내렸고, 자신의 즉위 사실을 원로원에게 일방 통보한다. 이어 그는 두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한 뒤 카리누스는 수도 로마로 보내 제국의 서방 방위를 맡기고 그 자신은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제국의 동방 방위를 담당하기로 했다. 그리고 도나우강을 넘어 온 게르만족을 격퇴한 뒤 AD 283년부터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했다. 이 원정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유프라테스강의 셀레우키아를 함락시키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티그리스강의 크테시폰마저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카루스가 갑자기 벼락에 맞아 즉사하는 사고사를 당했다. 이제 공동 황제이자 카루스의 둘째 아들인 누메리아누스가 원정군을 수습하여 귀환하기 시작하였으나 AD 284년 갑자기 암살된 채 발견되었다. 누메리아누스의 호위 장교인 디아클레스는 유일하게 황제 알현이 허용되었던 누메리아누스의 장인인 아페르를 암살범으로 지목하여 체포하였고 이제 카루스의 장남으로 제국의 서방 방위를 맡았던 카리누스가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지만 동방의 로마 군단은 카리누스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디아클레스를 다음 황제로 추대하였다.
황제로 추대된 디아클레스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식인 디아클레티아누스로 바꾸고 카리누스와 대결을 벌이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카리누스 역시 디아클레누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간의 내전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게르만족과의 전투경험이 풍부한 카리누스는 강력한 힘을 보유하여 AD 285년 베네치아의 총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비누스 율리아누스가 황제를 참칭하자 이를 즉각 토벌한 후 모아시아에서 디아클레티아누스의 로마 동방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자기 카리누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장교가 카리누스를 암살해 버리는 바람에 내전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이후 카리누스를 잃어버린 로마 서방군은 디아클레티아누스를 자신의 황제로 인정했다. 그리고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자 전제 군주정과 사두정치를 도입하며 로마 군단에 의해 황제가 좌지우지되었던 군인황제의 혼란을 비로소 종식시키게 된다.
4세기, 제국의 변화
로마 제국의 전제정과 동서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정치
전제군주정 개혁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내내 지속된 로마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작업에 나섰다. 우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그 때까지도 남아있던 공화정 시대의 잔재들을 일소하고 '프린켑스(제1시민)'라는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던 로마 황제 자리를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와 비슷한 형태로 바꾸었다. 명칭부터 '도미누스(Dominus; 지배자)'라고 변경하고 페르시아식 궁중예법을 도입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 아닌 본격적인 '전제군주정(Dominatus; 도미나투스)'이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형식상 남아있던 로마 원로원의 권한을 모두 박탈하였는데 이미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로마 원로원은 황제의 칙령을 법령으로 공포하기 위한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전락했고 군무에서도 배제되었기 때문에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로마 원로원의 입법 기능을 모두 배제해버렸다. 민회의 권한도 박탈되어 이제 황제의 칙령은 민회의 승인도 받지 않아도 곧바로 법률적인 효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보좌하기 위한 관료 조직도 더 세분화되고 더 늘어나는 대신에 집정관을 비롯한 모든 관료를 민회의 승인 없이도 황제가 임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하나의 로마 원로원의 권한인 원로원령 속주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도 박탈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 속주는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는 '황제령 속주'와 로마 원로원이 총독을 임명하는 '원로원령 속주'로 나뉘었는데 황제령 속주 총독은 '황제 대리인(Legatus Augusti pro praetore)'라고 부르고 원로원령 속주 총독은 공화정 시절 그대로 '전직 집정관(Proconsul)'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였다. 그러나 이제 원로원령 속주까지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도록 변경하였고 속주 총독이 너무 막강한 권한을 지녀 반란의 온상이 되어버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속주를 좀더 세분화하여 그 권한을 축소시켰다. 또한 민정(문민 행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민정은 전문 관료에게 맡기고 대신에 몇 개의 속주를 묶어서 '관구(Diocese)'를 신설하고 이를 담당할 '비카리우스(vicarius; 대리인)'이라는 민정 지방관을 만들어냈다.
군사조직도 개편하여 속주 총독의 군정 기능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본래 몇 개의 군단을 지휘하는 군사령관의 호칭이었던 '둑스(dux)'를 하향조정하여 각 속주별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의 호칭으로 변경하였다. 다만 둑스를 총괄하는 '코메스 둑스(comes dux)'를 두었는데 이는 직책이라기 보다는 최선임 둑스에 대한 호칭으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로마 군단이 대부분 국경에 배치되어 예비병력은 황제의 근위대 이외에는 별달리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군단을 중앙 기동예비대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와 국경 주둔병인 리미타네이(limitanei)로 구분하여 충분한 예비 병력도 확보하였다. 또한 황제의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은 비카리우스와 코메스 둑스의 상위 지위로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면서 오늘날의 총리와 같이 그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관료와 군사령관의 숫자가 증가하고 군대도 증강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세제 개편도 단행하여 크게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jugum)'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capitatio)'로 구분하고 과세를 위한 평가는 5년 단위로 이루어지도록 했다. 모든 세금은 실질적인 소득과 무관하게 부과하였고 중앙 정부가 총괄하여 징수하기로 하였다. 일견 가혹해보이는 세제 개편이었지만 3세기의 위기 시절에 마구잡이로 부과하던 모두 특별세를 폐지하였고 그동안 면세 혜택을 누리던 이탈리아에도 과세하는 등 나름대로 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또한 국가 재정수입을 일정하게 만들면서 재정지출의 안정화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박해
그리스도교는 초기부터 로마 제국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하여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네로(재위 AD 42년 ~ AD 54년)는 로마 대화재로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그리스도교도에게 방화범 혐의를 뒤집어 씌어 학살하였고 도미티아누스(재위 AD 81년 ~ AD 96년)는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하면서 그리스도교를 국가 전복죄로 취급했다. 또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AD 193년 ~ AD 211년)는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막는 엄격한 법을 제정하여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격렬한 박해를 실시하였다. 군인황제시대에도 데키우스(재위 AD 249년 ~ AD 251년)와 발레리아누스(재위 AD 253년 ~ AD 260년)가 각각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이어졌지만 재위기간이 짧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최후이자 최대의 큰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AD 284년 ~ AD 305년) 시절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전제 군주정을 도입하면서 페르시아식 궁정 예법을 도입하였고 전통적인 로마의 다신교 숭배 사상을 부활시키며 스스로를 신격화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 내에 퍼지고 있던 그리스도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고 당연히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신으로 섬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부하였고 이것이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AD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공식적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금지시켰고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그리스도교의 모임을 불허하였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만연해 있던 동방 속주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를 보내 철저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AD 304년에는 고발이 없어도 그리스도교인을 체포하고 고문할 수 있도록 하여 철저하게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다.
로마 최초의 분할통치 사두정치
디아클레티아누스가 전제군주정과 함께 도입한 또 하나의 개혁은 '사두정치(Tetrarchia; 테트라키아)'이다. 디아클레아누스는 점점 늘어가는 외적의 침입 때문에 로마 제국의 국경이 곳곳에서 뚫리는 상황 속에서 로마 황제 혼자서 방대한 로마 제국 전체를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이 '정제(Augustus)'로서 로마 제국 동방의 통치를 담당하는 대신에 유능한 장군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하여 로마 제국 서방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비록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가 모두 자신의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국경을 나누어 방어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후계자를 미리 지명하여 유사시를 대비한 임시체제였던 반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아예 상설 제도로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분할 통치가 어느 정도 효율성이 증명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AD 286년 아예 막시미아누스를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킨 후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갈레리우스)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각각의 '부제(Caesar)'로 임명하여 동서로 나뉜 제국의 방위를 다시 4분할하는 '사두정치(Tetrarchia; 테트라키아)'를 성립시켰다. 다만 사두정치는 어디까지나 효과적인 국경선 방위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 제국까지 분할한 생각이 없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를 '세니오르 아우구스투스(Senior Augustus)'로 부르게 하고 막시미아누스를 '유니오르 아우구스투스(junior Augustus)'로 부르게 하며 그 우위를 분명히 구분한 채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직접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정제 및 부제 4명이 통치하는 '관할구역(Praetorian prefecture)'으로 나뉘었고 세부현황은 다음과 같다.
① 디오클레티아누스(동방 정제)
- 주둔지 :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디아
- 통치지역 : 오리엔스 관할구역(트라키아 관구, 아시아 관구, 폰투스 관구), 이집트 황제 직할령
② 갈레리우스(동방 부제)
- 주둔지 : 도나우 강의 시르미움
- 통치지역 : 일리리아 관할구역(판노니아 관구, 모이시아 관구, 트라키아 관구)
③ 막시미아누스(서방 정제)
- 주둔지 : 이탈리아의 메디올라눔
- 통치지역 : 이탈리아 관할구역(이탈리아 관구, 아프리카 관구, 히스파니아 관구)
④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서방 부제)
- 주둔지 : 갈리아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통치지역 : 갈리아 관할구역(갈리아 관구, 비에넨시스 관구, 브리타니아 관구)
제2차 사두정치
사두정치가 등장하면서 이제 로마는 1명의 황제에게 의존하면서 발생하는 느린 의사결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신속한 국경방어와 내란 토벌이 가능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의도대로 사두정치가 실행된 이후 로마 제국의 국경선이 안정화되었기 때문에 그 효율성은 인정받았으나 4명의 군통수권자가 존재하여 내분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단점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생존하는 동안은 그의 권위가 다른 3명보다 높았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없이 유지되었으나 그가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를 잘 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AD 305년 5월 돌연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은퇴를 선언하였다.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나란히 정제로 승격시킴으로써 1명의 정제 자리를 두고 벌어질 내전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제는 각각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막시미누스 다이아)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세베루스)가 선정되었다. 이로서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었다.
제2차 사두정치 체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제2차 사두정치 체제의 한계는 무엇보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누스)가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는 점이었다. 결국 AD 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브리타니아 원정 도중에 병사하자 원정군 병사들은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정제가 죽은 경우에는 부제가 정제로 승격하는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정제 승계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동방의 정제 갈레리우스가 중재를 나서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는 대신에 서방의 정제로 세베루스를 인정하게 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부제가 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 영토를 승계하자 이번에는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불만을 터트렸고 이를 기회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로마 원로원이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목적에 AD 306년 10월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서방의 정제 세베루스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반역이었기 때문에 AD 307년 2월 군사행동을 개시하였으나 은퇴하였던 막센티우스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가 아들을 위해서 정계에 복귀하여 세베루스의 군대를 격퇴하고 세베루스를 살해하였다. 결국 상황 정리를 위해서 전임 황제 신분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그리고 현재의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가 모여 회합을 가졌으나 막센티우스의 기대와 달리 서방의 정제로 플라비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리키니우스)가 선임되었다. 그러자 막센티우스가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마저 내쫓고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하였고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몸을 의탁하는 처지가 되었다. 막시미아누스는 AD 310년 콘스탄티누스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쿠데타를 계획하였다가 예상보다 빨리 되돌아 온 콘스탄티누스에게 축출되어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서방의 정제로 임명되었으나 막센티누스에 의해 밀려나고 말았던 리키니우스는 갈레니우스에 의해 일리리쿰, 트라키아, 판노니아 속주의 지배를 맡게 되었다가 AD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동방의 정제가 되어 그의 속주를 모두 이어받았다. 그러나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동방 속주에서 사실상 정제와 같이 행동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모두 정제로 자칭하며 4분할되었다. 그 세부적인 세력 현황은 다음과 같다.
① 콘스탄티누스
- 주둔지 : 갈리아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통치지역 : 갈리아 관구, 히스파니아 관구, 브리타니아 관구
② 막센티우스
- 주둔지 : 이탈리아의 로마
- 통치지역 : 이탈리아 관구, 아프리카 관구
③ 리키니우스
- 주둔지 : 도나우강의 시르미움
- 통치지역 : 판노니아 관구, 모이시아 관구, 트라키아 관구
④ 막시미누스 다이아
- 주둔지 : 아나톨리아 반도의 안티오키아
- 통치지역 : 오리엔스 관구, 아시아 관구, 폰투스 관구, 이집트 관구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방 황제 등극
로마 제국의 서방은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세력으로 분할된 상태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적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서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은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AD 311년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어 막센티우스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얻은 후 AD 312년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막센티우스의 병력 총 10만명에 비해 병력 숫자는 적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로마 제국의 최전선 중 하나인 라인강을 지키던 정예병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북부의 요충지인 토리노와 베로나를 점령한 뒤 살인과 약탈, 방화 등을 금지시키면서 민심까지 얻었다. 결국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이 별다른 전투없이 항복하기 시작했고 이에 막센티우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서면서 10월 28일 로마 북부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콘스탄티누스의 꿈 속에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 문자인 '라바룸'('카이'(Χ)와 '로'(Ρ)를 겹친 모양(☧))이 나타났고 "이 표시로 이기리라"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전투가 시작되자 막센티우스는 테베레 강변에 배수진을 펼쳤지만 전투경험이 풍부한 콘스탄티누스군의 공격에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막센티우스는 로마로 후퇴하여 농성전을 펼치기로 결심하였으나 밀비우스 다리는 대병력이 한꺼번에 퇴각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수많은 말과 병사들이 다리에서 떨어졌고 막센티우스도 강물에 떨어져 익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강물에서 막센티우스를 건져낸 뒤 그의 목을 잘라 장대에 걸고 로마로 입성하였다. 본래 로마시민과 원로원은 막센티우스를 지지했었지만 이제는 서둘러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고 로마인끼리의 내전에서는 축조된 적이 없는 개선문을 세우기로 결의까지 하였다. 이로서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되어 로마 제국 서방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재통합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를 밀라노에서 만나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시키고 여러 가지 현안을 논의한 후 로마 제국에 만연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내용이 포함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통치를 좌우하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AD 313년 3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리키니우스가 통치하는 속주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리키니우스의 반격에 패배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리키니우스 역시 로마 제국 동방 지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두 명에 의해 양분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의 동맹도 얼마가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와의 사소한 분쟁이 발생하자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처들어가면서 AD 314년 10월 8일 카발라에 전투가 벌어졌다. 리키리우스의 병력이 3만5천명으로 숫자면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보다 많았으나 전투는 하루종일 접전으로 흘러갔고 결국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직접 이끈 기병대의 돌격이 결정타가 되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리키니우스는 2만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퇴각하였고 본거지인 시르미움을 버리고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속주로 도망쳤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를 뒤쫓아 발칸 반도에 들어가면서 마르디아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카발라에 전투보다 더 접전이 되었으나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하면서 리키니우스는 아시아 속주로 도망쳤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일단 리키니우스와 휴전을 맺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맏아들 크리스푸스와 함께 라인강과 도나우강 건너편의 게르만족과 전투에 전념하며 7년을 보냈다. 그 사이 리키니우스는 군대를 재건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AD 324년 7월 3일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다시한번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병력(130,000명)이 리키니우스의 병력(165,000명)보다 열세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바다에서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크리스푸스가 리키니우스의 해군에게 승리를 거뒀다.
패배한 리키니우스가 또다시 아시아 속주로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시아 속주까지 뒤쫓아 가면서 9월 18일 소아시아의 칼케돈 근처에서 크리소폴리스 전투를 벌여 다시 한번 승리를 거뒀다. 리키니우스는 니코메디아로 도망쳤으나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항복하였으나 테살로니카에 감금된 후 이듬해 반란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유일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발칸 반도의 비잔티움을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새로운 로마(Nova Roma)'라고 명명하면서 이후 1,00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에 그의 이름을 붙여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로 개명된다.
체제 개혁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에서는 속주의 민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총독을 군정 업무에서 배제시켰으나 속주에 따라서는 여전히 총독이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더욱 철저하게 구분하였다. 이는 황제 근위대장(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도 예외는 아니어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근위대의 군정 기능을 박탈하고 오로지 민정에만 치중하도록 그 기능을 변경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의 민정은 '《속주 총독》-《관구 대리인(비카리우스)》-《근위대장》-《정제/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조직 체계가 구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군사개혁에도 착수하여 근위대장의 군정 기능을 배제시키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오랜 전통의 황제 근위대를 폐지하였다. 또한 로마군을 국경을 수비하는 하급 부대인 리미타네이(Limitanei)와 관구(Diocese)에 기반을 둔 상급부대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로 구분하여 리미타네이가 국경을 수비하는 동안 코미타텐세스가 요격하는 종심방어전술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근위대장의 군정 기능을 대신할 새로운 직책인 '마기스테르(magister; 군사령관)'를 신설하였다. 이제 군사 조직에 있어서도 "《둑스(군단장)》-《코메스 둑스》-《마기스테르(군사령관)》-《정제/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지휘체계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기스테르는 보병과 기병으로 나뉘어 각각 '마기스테르 페디툼(magister peditum; 보병대장)'과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기병장관)'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교 공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정책은 AD 309년까지 이어졌지만 그리스도교의 확산은 피할 수 없었고 AD 305년 로마 동방의 정제가 된 갈레리우스가 AD 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칙령을 완화시키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로마 서방의 정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협의하여 AD 313년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장려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비록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장려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그리스도교도 다른 모든 종교와 평등한 입장에서 포교할 수 있는 권리만 부여한 것이었으나 그동안 박해만 받아 온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특혜를 얻은 것과 동일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내전을 통해 로마를 재통일한 후인 AD 325년에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삼위일체설을 정통교리로 인정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성립시켰다. 최종적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면서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로마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로부터 '대제'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죽음과 로마 재분할
AD 326년 갑자기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맏아들 크리스푸스를 자신의 후처이자 크리스푸스의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고문 끝에 처형하였고 파우스타 역시 목욕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살해당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파우스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를 지명했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후계자 중 첫째인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담당하게 되었고 둘째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아시아와 이집트를 맡게 되었으며, 막내인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재통합된 로마 제국은 그의 사후 다시 셋으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3형제가 공동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을 삼분할하였으나 AD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콘스탄스의 영토를 노리고 처들어갔다가 전사하였고 AD 350년에는 콘스탄스가 내부의 마그넨티우스 반란에 살해당하면서 콘스탄티우스 2세가 로마 제국의 단독황제가 되었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또다른 동생인 갈루스를 부제로 삼아 제국 동방을 맡긴 뒤 병력을 이끌고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어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갈루스를 반역죄 혐의로 처형하였으나 제국 동방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 기미가 감지되자 마지막 남은 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로마 제국의 서방을 맡겼다. AD 360년 율리아누스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면서 내전의 위기가 다시 찾아왔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 역시 AD 363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 도중 전사하였고 병사들에 의해 요비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창건한 콘스탄티누스 왕조도 79년만에 단절되고 새로운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시작과 고트족의 침략
AD 363년 율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도중에 전사하고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마저 AD 364년 급사하자 새로운 황제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일개 병사로 시작해 군사령관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요비아누스가 죽자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계속된 서쪽의 게르만족 침입과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동생인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를 맡기는 대신에 자신은 서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주로 갈리아의 루테시아에 머물며 알레마니족을 격파하였고 브리타니아에 침공한 픽트족과 스코트족을 상대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인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를 파견했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데 그는 바로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였다.
AD 367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아들 그라티아누스의 제위계승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9살의 나이에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그리고 AD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자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판노니아의 로마 군단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또 다른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4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황제로 추대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자신의 공동황제로 인정하고 어머니 유스티나의 후견하에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을 통치하도록 한 후 자신은 라인강을 넘어오는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위해 주로 갈리아에 머물며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등 나머지 서방 영토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제국의 동부 지역은 숙부인 발렌스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다시 3분할 되었다. 하지만 발렌스는 고트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로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최종 분할 통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선출에 황제가 간섭할 순 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총대주교 선출과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선출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황제는 평신도인 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도 어디까지나 황제의 신하라는 묘한 관계였고, 그러다 보니 황제와 교회 사이의 충돌도 상당히 잦았다. 이것은 결국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던 동서 교회가 완벽히 분리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후대에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제국 서부와 제국 동부는 서로를 각기 다른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갈라진 바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 이후에도 이러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자리잡힌 바 없으며, 모든 포고령은 항시 동서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또 동서 로마 양대 궁정은 선임 황제인 쪽이 반대편에게 강력한 내정 간섭을 할 권리가 있었다. 게다가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 이전에는 오히려 선임 황제를 배출하는 쪽이 주로 서로마 쪽이었다. 다만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의 두 황제가 주체적인 의사로 정책을 결정하는 제대로 된 황제가 아니어서 국정을 무시했거나 집중할 수 없었고, 동서 양쪽의 실력자들이 스틸리코 외에는 모두 제국보다는 자기 세력과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했던 경우가 많아서 동서 로마 양쪽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마 제국
기원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중 한명이 로마 제국을 분할하여 서쪽의 땅을 통치하면서 최종적으로 서쪽 제국 즉, 서로마 제국이라는 단어로 굳어져 오늘 날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 별개의 국가가 아닌 그저 편의상으로 로마 제국 내에 서쪽을 다스리는 황제의 구역을 서로마 제국, 동쪽을 다스리는 황제의 구역을 동로마 제국으로 나누어 부르게 된 것에 기초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 제국의 서쪽은 395년부터 476년까지 80여년 동안 존속했다. 서쪽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동방으로 수도 천도로 인해 수도권이 동방으로 날아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군대를 가지고 동쪽 제국보다 더 넓은 국경을 방위해야만 했다. 지도자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두 제국이 다 같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수도 천도로 인해 국력이 건실했던 동쪽 제국은 지도자가 무능해도 버틸 수 있었으나 서쪽은 버티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476년 서쪽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점령당하여 고대는 막을 내리고 동쪽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1,000년 동안 중세가 지속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서쪽 제국이 점령당한 뒤 그 자리에는 여러 게르만 국가들이 세워져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된다.
대부분 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476년 게르만족의 서쪽 제국 점령 이전까지의 역사를 가리키지만 로마의 멸망을 5세기로 보는 것은 15세기까지 존속한 동쪽 제국을 배제한 것이고 고대 로마만을 로마 제국이라고 할 수 없다. 애초에 동서로마는 서로 구분될 수 없는 실체이며 동서로마가 서로 별개의 국가였던 것도 아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으로 동서로마가 최종적으로 분할되었다고 하지만, 동서로마의 존재는 로마 특유의 다중황제체제 그 이상으로 보기 힘드며 실제로도 동서로마식의 분할통치가 이뤄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로마 제국의 분할통치체제를 현대 정치의 개념에 비유해본다면 지방자치가 아주 강조되어 동격의 지방정부 중 어느 한쪽이 그때그때 황제의 지위에 따라 상위 정부 노릇을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 중앙정부의 권한을 분할해 가지고 있는 체제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르게 보면, 이원집정부제와 같이 각 정부기구가 서로의 영역을 분할하여 견제-협력만 할 뿐 직접적으로 통제하지는 않는데, 이 영역의 분할이 입법, 사법, 행정과 같은 업무 영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통치 지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별개의 나라라 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방정부는 분명히 같은 나라에 속하는 지방정부였다는 것. 여기서 '상위 중앙정부'노릇은 물론 선임 황제가 있는 정부 쪽이 했다.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한다.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를 시작으로 볼 때도 있고, 서로마 제국과 같이 395년 동서 분할을 시작으로 볼 때도 있다. 시작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없는데,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와 시대 구분이 편의상 임의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술한 바와 같이 330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 395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 등 다양한 시각이 공존한다. 또 이런 동로마의 성립 시점에 관한 논쟁과는 별개로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전성기를 맞아 남·서유럽의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까지 수복하였다. 하지만 사산 왕조와의 기나긴 전쟁과 이슬람의 도래 등으로 쇠퇴하고 만다. 이후 여러 현제들의 노력으로 두번이나 제국에 닥친 위기를 극복해내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유럽인들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정복당했으며,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후 1453년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멸망했다. 곧바로 휘청거린 서로마 제국과는 달리, 최종 분할 이후 무려 1,058년간 존속하였다.
제3의 로마
구주(歐洲)에서 황제라고 부른 것은 라마(羅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일이만(日耳曼)과 오지리(奧地利)는 라마의 옛 땅으로서 황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덕국(德國)은 일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의관과 문물은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칭호를 정한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일이만과 오지리가 라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1897년) 9월 26일
로마 제국이 476년 서부를 상실한 이후 '과연 누가 로마 제국을 계승한 나라인가?'에 대해 제기된 주장들이다. 지중해 지역을 천 년 넘게 지배한 로마 제국의 이름값은 서로마 제국이 상실되고 남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해 가는 와중에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서 흥기한 세력들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가면서도 로마 제국이라는 지중해 세계의 지배권에 대한 정통성을 확보하고 싶어했다. 자기네들의 주장만 늘어놓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병림픽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 싸움이었다.
원래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시작된 이론으로 중세 유럽을 지배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전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단 하나의 제국이 존재해야 했다. 다니엘서로 대표되는 "4마리의 짐승" 예언에 의하면 지상에는 4개의 거대 제국이 차례로 존재하며 이는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 제국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온 유럽 세계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마지막이어야 했고, 그 제국이 멸망하면 바로 찾아올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 제국은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즉, 새로운 정통성의 제국이 나타나는 것은 교리상 용납 불가하므로 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을 입증해야 했다. 이러한 개념을 이론화 한 것이 "Translatio imperii(제권 이전, 제국 전이)"이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제3의 로마'는 로마 제국에 대한 국가적 계승성을 부정하는 개념에 더 가깝다. 소중화사상이 명나라나 청나라가 중화제국임을 부정하는 주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레오 3세가 카롤루스 대제를 서로마 황제로 추대한 것도 이런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완전히 무시했으나, 이후 카롤루스 대제가 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힘겨워하는 동로마 황제 미하일 1세로부터 811년 제위를 인정받으면서 유럽의 황제 자리는 공적으로 둘이 되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단지 황제일 뿐이며,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명실상부히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계승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오스만 제국과 모스크바 대공국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 역시 로마 황제(Kayser-i Rûm)를 칭하며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당대 대공이었던 이반 3세가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이 팔라이올로기나와 혼인한 명분을 앞세워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노바 로마)에 이어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자칭하였다.
번외로 나폴레옹에 의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 이은 세 번째 제국을 주장한 사례들이 있는데 프랑스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당된다.
동로마 제위 계승
마지막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죽은 후, 그 마지막 혈통이었던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는 황제 직위를 프랑스의 샤를 8세, 스페인의 이사벨 1세&페르난도 2세 부부왕 등에게 팔았으나 정작 프랑스나 스페인 왕들은 이 칭호를 거의 쓰지 않았다.
동로마 정통 제위
니케아 이외의 동로마 잔존국(비정통)
자칭 제국(비정통)
동로마 제국(니케아 제국 포함)[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모레아 전제군주국
(1479년 이피로스의 멸망으로 계승 종결)
불가리아 제국(제1제국, 제2제국, 제3제국)
라틴 제국
세르비아 제국
오스만 제국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
(오스만 공화 혁명과 러시아 공산 혁명, 불가리아 공산화로 계승 종결)
동로마 제국에 위치해 있던 그리스인들은 19세기까지 스스로를 로마인이란 뜻으로 로메이(Ρωμαίοι)라고 불렀다. 오히려 현대 그리스어로 자신들을 부르는 '엘리네스'(Ελληνές)는 중세 시대에는 이교를 믿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쓰였다.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 튀르키예인들은 그리스인들을 '로마인'이란 뜻으로 룸(Rûm)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이 용법은 남아 있어서 튀르키예 국적을 갖고 있고 튀르키예 내에서 거주하며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은 룸라르(Rumlar), 튀르키예 내에 거주하며 이슬람을 믿는 그리스인은 기리틀리(Giritli), 그리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은 유난(Yunan)이라고 칭한다.
불가리아
역사상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한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칭제한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칸 보리스 1세의 개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보리스는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과 종교적 통합이라는 2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는데, 밀라노 칙령 이래 로마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세속 군주 가운데 서열 1위였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형식상으로나마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전까지 대등한 관계였던 동로마 황제를 비록 명분일 뿐이지만 불가리아 칸보다 상위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불가리아인들의 저항 때문에 기독교화 정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저항의 중심에 선 인물은 바로 보리스의 첫째 아들 블라디미르였다. 블라디미르는 보리스의 재위 기간 중에는 기독교화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자신에게 양위하자 본색을 드러내고 반기독교 정책을 펴며 이교도 국가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보리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장남을 폐위하고 동로마식(?)으로 눈을 뽑아버린(...) 후, 주교였던 3남을 환속시켜 즉위하도록 했으니 그가 바로 시메온 1세였다.
블라디미르의 폐위와 시메온 1세의 즉위는 불가리아의 기독교화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시메온 1세에게 한 가지 과제를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라는 명분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했던 것처럼, 로마인의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었고, 913년에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면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의 칭제는 기독교 세계의 성직자 서열 1위였던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은 카롤루스의 칭제보다도 명분이 떨어졌기에, 그는 동로마의 어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황제의 장인으로서 공동 황제가 됨으로써 진짜 로마인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섭정단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니콜라오스와 밀약을 맺음으로써 실현되는 듯했으나, 니콜라오스가 쿠데타로 실각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러자 시메온 1세는 또다시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동로마 해군 제독 출신의 로마노스 레카피노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 되어 공동황제 로마노스 1세로 즉위한 뒤에는 더더욱 그 야망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시메온 1세는 무력으로 로마노스 1세를 축출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인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끌어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로마노스 1세가 파티마 왕조의 사신을 회유하면서 실행하지 못했고, 더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시메온 1세는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것을 포기하고, 로마노스 1세의 제위를 인정하는 대신, 로마노스 1세는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은 묵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시메온 1세은 비록 진짜 로마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황제 칭호를 인정받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는 목표는 달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유일한 불가리아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시메온 1세가 이룩한 전성기는 동로마의 혼란기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기에, 시메온 1세 사후 동로마가 중흥을 이루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1014년의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불가리아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클레이디온에서 차르, '사무일'을 제압한 일명 '불가록토노스' 바실리오스 2세는 여유롭게 불가리아를 천천히 말려죽이면서 1018년에 불가리아 제1제국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했다.
이후 불가리아는 100년 이상 동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동로마는 보편 제국답게 불가리아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같은 로마인으로 대했으나, 불가리아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차르를 자칭한 인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란은 동로마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동로마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마누일 1세가 사망한 후 즉위한 황제들이 실정을 거듭하자 기회가 찾아왔다.
1185년에 막대한 세금과 부역에 반발하며 차르를 칭하고 봉기한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 형제는 진압에 나선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100년 이상 지속된 동로마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쟁취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을 건국했다.
1331년부터 1371년까지 재위하며 불가리아 제2제국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끈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의 시대에, 불가리아의 수도 터르노보는 그 화려함을 인정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이후 이반 알렉산더르도 터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여기게 되었는데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로마인이 인정해 주었으므로,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말은 곧 '제3의 로마'가 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을 계승했노라고 자처한 인물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가리아 제2제국은 무너졌다. 이반 알렉산더르가 첫 번째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가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황후로 맞아들인 것에 반발하여 독립 왕국을 세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반 알렉산더르의 뒤를 이어 정통 황제로 즉위한 이반 시슈만은 즉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데다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강력한 지방 귀족이 도브루자 공국이라는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 형 이반 스라치미르는 이반 시슈만을 돕기는커녕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매일반이었고, 결국 3분된 불가리아 제2제국은 서서히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이후, 1393년에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터르노보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 러시아로 망명한 불가리아 성직자들이 이 개념을 소개하여 러시아도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불가리아는 거의 50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878년에 불가리아 공국이 수립되어 부분적인 독립을 승인받았고, 1908년에 불가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불가리아를 왕국이라고 칭하고 불가리아의 군주를 왕이라고 불렀으나, 불가리아인들 스스로는 그들의 군주를 차르라고 부르면서 불가리아 제2제국의 계승을 표방했다. 그러나 불가리아 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동맹국 편에 섰다 패전해서 군비 제한을 받게 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추축국 편에 참전했다가 패전하는 등 동맹을 계속 잘못 고른 끝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마지막 차르가 폐위됨으로써, 건국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말았다.
라틴 제국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킴으로써 동로마를 일시적으로 멸망시키고 수립한 라틴 제국도 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이었다. 여기서 로마니아는 동로마 제국의 별명으로 로마인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다.
그런데 라틴 제국은 여기에 언급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건국된 지 1년 만인 1205년에 초대 황제 보두앵 1세가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황제 피에르가 동로마 유민들이 건국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굴욕이 계속되었다. 보두앵의 뒤를 이은 앙리가 탁월한 명군이었고 앙리 사후에도 섭정으로 군림했던 욜랑드와 장 드 브리엔이 유능했기에 버틴 것이지 이 셋이 아니었다면 더 빨리 멸망했을지도 모를 국가였던 것이다. 결국 라틴 제국은 장 드 브리엔 사후 4차 십자군의 물주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의존하며 간신히 연명하다가, 건국 60주년도 되기 전인 1261년에 동로마 유민들의 나라인 니케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이 부활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직접 라틴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진 않았으므로, 본 문서에서 논하는 국가적 차원의 로마 계승 의식과는 무관하다.
세르비아
중세 세르비아도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했는데, 세르비아는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력을 크게 키운 왕 스테판 우로시 4세가 1346년에 황제를 칭했다. 그냥 단순히 '세르비아 황제'라면 별문제가 아니었겠지만, 그 칭호가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였기에 세르비아는 제3의 로마를 칭한 나라가 되었다. 실제로 그는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려고도 했지만, 세르비아와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은 피하려던 베네치아의 반대로 백지화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 제국은 1355년에 뒤를 이은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아직 어렸던데다가 무능했기에 1371년에 그가 죽으면서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세르비아의 지방 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세르비아 공국을 창건하고 그 아들인 스테판 라자레비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나름 번영을 누리지만, 그 다음 대인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죽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됐다.
오스만 제국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 역시 로마 황제(Kayser-i Rûm)를 칭하며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는 두 가지였는데, 먼저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이 줄곧 보아온 쪽은 서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당연히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라 부르며, 프랑크인들이 보내온 사자가 그리스의 왕 따위 운운하지 못하게 했다. 이슬람권 입장에서도 동로마는 예언자 무함마드 시절부터 지목해 온 종교적 차원에서 언젠간 정복해야 할 거대한 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제도적, 과학적 측면에선 또 스승뻘인 문명이기도 했기에 적이었던 동로마의 '로마'로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건 본인들에게도 용납할 수 없었다. 즉 '로마 제국의 수도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수도로 정한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이었다.
또한 모스크바처럼 이스탄불 역시 로마와 같이 7개의 언덕이 있다. 각각 톱카프 궁전 인근의 사라이부르누 언덕, 누스오스마니예 사원 부근의 쳄베를리타쉬 언덕, 이스탄불 대학교 인근 베야지트 언덕, 테오도시우스 성벽 부근 파티흐 언덕, 성요르고스 성당 근처 야브즈 셀림 언덕, 마흐리마흐 술탄 사원 부근의 에디르네카프 언덕, 이스탄불 대학교 의과대학 부근 코자무스타파파샤 언덕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이스탄불'로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일단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0세기 아랍의 기록에 이미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도시로', 또는 '그 도시에'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이스 틴 폴린(εις την Πόλιν)' 에서 유래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전에도 이미 튀르크인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었다. 오늘날처럼 이스탄불이 공식 명칭이 된 것은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인 1930년의 일이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에 가장 널리 보이는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을 오스만어로 발음한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Kostantiniyye) 이며, 이 밖에도 이스탄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스탐불', '스탐볼',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인 '이슬람볼' 등이 쓰였다. 18세기 이후 오스만인들 스스로가 프랑스어로 표기한 이스탄불 지명을 보면 Constantinople(콩스탕티노플) 혹은 Stambul(스탕뷜)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한성이 서울로 자주 불렸음에도 공식명칭은 한성이었듯이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공식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었고, 이스탄불은 비공식 애칭 정도일 뿐이었다.
두 번째 근거는, 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따져 보면 사실 먼 친척이라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2대째 군주인 오르한은 1346년에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의 딸과 결혼한 일이 있는데, 오르한이 자신의 조상인 만큼 동로마 황녀도 자신의 조상이고. 즉 동로마 제국 황실은 자신의 친척이라는 주장이다.
오스만에서는 아시윽파샤자데(Âşıkpaşazâde), 기독교 측에서는 동로마 망명 역사가였던 테오도로스 스판두니스(Θεόδωρος Σπαντουνὴς)를 비롯한 15세기부터 전해오는 역사서들은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 북서쪽 비티니아 지방 일대에서 활동하던 네 명의 베이가 연합하면서 세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네 명 중 한 명이 바로 지도자 격이자 이후 오스만 황가의 시조가 된 오스만 가지(Osman gazi)이고, 다른 한 명은 투라한 베이(Turahan bey), 나머지 두 명은 미하일 코세스 베이(Mikhael Kosses bey)와 에브레노스 베이(Evrenos bey)라고 전하는데, 미하일 코세스나 에브레노스 모두 그리스어로 된 기독교식 이름이다.
건국 전승 자체가 이러할 만큼 오스만 제국은 성립 바로 전만 해도 동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 중 하나였던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통혼과 개종을 통해 수많은 동로마인들을 흡수하여 계승 의식을 주장했다. 그 와중에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상당히 유연하게 이루어졌고, 심지어 렘노스 섬의 영주들을 필두로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 동로마계 영주들은 15세기 말까지도 개종을 하지 않고 파디샤에게 그 지위와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받으며 버틸 만큼 최대한 마찰 없이 동로마 제국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흡수하였다.
오스만 제국 내의 동로마 세력 역시 오스만 제국을 동로마 제국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는 오스만 왕가의 기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첫번째 설은 오스만 1세의 할아버지인 쉴레이만 샤가 콤니노스 왕조의 후예라는 것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조카인 요안니스 콤니노스가 소아시아 원정 중 음해를 당해 셀주크 제국으로 망명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인 카메르가 후일에 쉴레이만 샤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오스만 왕가가 동로마 제국의 미천한 농민의 후예라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 모두 신빙성은 없지만 첫번째 설은 동로마 귀족 출신들 사이에서 퍼진 내용이고, 두번째 설은 동로마 평민 출신의 예니체리 사이에서 퍼진 내용이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의 유민들 역시 오스만 왕가의 기원을 동로마 제국에서 찾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연구는 이곳에 소개되어 있다. 링크에 소개된 연구들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오스만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체제를 대부분 흡수하여 운영하였고, 오스만 제국의 속국들도 오스만 제국을 로마로, 오스만 황제를 로마 카이사르로, 튀르크어를 로마 튀르크어라고 불렀다. 오스만의 지배층은 로마를 자신들의 문화로 인식하였고 튀르크를 비하하는 용어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스만 동쪽을 타타르로, 그들의 서쪽에 있는 자신들을 로마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오스만 제국의 일방적인 인식이 아니었다. 모굴한국이나 히바 한국 등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주로 룸(Ruhm / Rum)으로 칭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내부에서는 오스만을 로마의 연속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을 요약하자면 이미 과거 로마의 왕조들은 다른 이민족 황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황실은 또 다른 로마의 이민족 왕조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오스만 파디샤들은 외교문서에 로마 황제로서 서명하였고, 또한 오스만의 파디샤들은 즉위식때 로마를 정복하여 로마 제국을 통일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그저 고대 로마가 다신교를 믿다가 이후 기독교화된 것처럼 이번에는 이슬람교화 됐다는 것이다.
반면 서유럽인들은 대체로 오스만을 로마 제국의 후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오스만같은 이교도 국가는 기독교 국가인 로마의 정통성을 계승할 수 없었다. 다만 그리스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보았는데, 당장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 제국 내 反가톨릭 성향의 중심인물이었던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Γεννάδιος Σχολάριος)를 임명한 일이었으며 원래 로마인의 황제가 주는 은십자가까지 손수 장만해서 제공했다.
또한 메흐메드 2세 이후의 파디샤들이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로 “로마의 카이사르(카이세리 룸)”라는 칭호(당연히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유래한 말이다)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 비석 등에는 “카이사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또한 “카이사르”는 하나의 문장 안에서 고대 이란의 왕을 가리키는 말인 “키스라(Kisrā)”와 대구로 쓰일 때가 많았는데, 이를 보았을 때 “카이사르”는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동서 바다의 왕을 겸할 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의 좁은 식견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을 나라로 적극 평가하는 문서 역시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배층이나 문인에게 오스만 제국이란 아바스 왕조에서 시작된 무슬림 왕조와 오구즈 칸에게서 시작된 튀르크계 왕조를 계승하는 존재였을 뿐, 거기에 로마 제국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카이사르는 칸이나 파디샤보다 사용 빈도가 훨씬 더 낮았다.
≪오스만 제국≫ - 오가사와라 히로유키
그러나 위의 오가사와라의 주장처럼 오스만 제국이 로마 계승성을 표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스만에서 로마에서 유래한 칭호를 과시용으로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로마 계승 의식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스만 시절에도 오스만의 황제는 임페라토르나 바실레우스를 칭하는 게 아니라 이슬람의 칭호인 술탄과 튀르크 고유의 칭호인 ‘칸’을 칭하다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파디샤를 차용해 사용했다. 오스만 황실 입장에서 '로마인의 황제'는 '이슬람의 칼리파', '튀르크족의 대칸' 같이 필요에 따라 시기적절하게 꺼내서 과시할 수 있는 여러 칭호 '중 하나'에 더 가까웠고,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기록은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행정 및 문화 엘리트에 편입된 옛 동로마 유민들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저런 현상은 오스만뿐만 아니라 동로마 유민들이 살았던 모든 나라에게서 나온 현상이다. 당장 오스만 이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라틴 제국에서조차 저런 현상이 나타난다. 망국의 생존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새 나라의 군주를 칭송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만과 다른 나라들은 큰 차이가 있다.
첫 번째로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는 동로마 유민들이 선택권이 있었지만 오스만의 경우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스만 치하의 세계총대주교들만 해도 파디샤에게 밉보이면 세계총대주교로 남을 수 없었고 때문에 오스만 황제와 적극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좋든 싫든 필수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동로마 황제에게까지 파문을 선언하던 세계총대주교가 파디샤에게 칭송하고 충성하기만 했다면 당시의 교회적 관점에서 그것은 그리스 정교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지를 말해주었을 뿐이다. 사실 오스만 내에서 공식적으로 파디샤를 칭송하던 세계총대주교들조차도 대개 뒤에서는 선을 긋거나 우회적으로 돌려깠다. 다른 정교회 국가들에 세계총대주교가 파견한 인사들이 기독교인들이 왜 이교도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느냐는 물음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충성하는거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벌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식의 논리였다는 점을 보면 이게 진실에 더 가깝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이후 공산화, 독재정권이 들어선 슬라브권, 동유럽권 정교회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교회들이 자국의 공산당, 독재자를 인정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에 그 이상의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될 말이다.
두 번째는 오스만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동로마의 정치/경제/사회구조를 파괴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그 자체도 파괴했고, 로마의 중요한 정체성인 기독교(정교회)에 대해서도 세계총대주교청을 어용교회로 만들어 지배했다. 그런 오스만을 동로마 유민들이 가톨릭이나 다른 정교회 국가들보다 정말 진심으로 호의적으로 여겼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 예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에도 기독교인 엘리트층이 지속적으로 가톨릭이나 다른 나라의 정교회(주로 러시아)와 교류하면서 오스만 밖으로 이주하면서 그리스인 디아스포라를 만들었고 다른 국가의 동로마 유민들은 하나같이 오스만을 비난했다.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수백 년 전의 일 가지고도 라틴인들에게 부정적인 여론이 었는데, 오스만의 정복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호의적인 감정을 품었다면 그거야 말로 이상한 일이다.
정리하자면 동로마 유민들은 오스만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고 때문에 이것을 오스만의 관점에서만 서술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다. 대부분의 동로마인들이 자신들이 피정복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이익과 위험 앞에서 표면적으로 파디샤를 군주로 인정했지만 동로마와 오스만의 국가적 계승성이나 정체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도 메흐메트 2세에게 은십자를 바쳤지만 그 이후에도 우회적으로 무슬림들을 비난했고 오스만에 맞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한 동로마인들을 순교자로 칭송했다. 후술한 예루살렘 총대주교 안테모스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같은 사건으로 오스만 내의 기독교인들의 지위가 악화되고 파디샤의 명으로 고위 성직자들이 체포되어 처형 위험까지 가는걸 경험한 인물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적극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파디샤를 찬양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보라, 자비로운 주님께서 어찌 우리 교회의 진실하고도 온전함을 보존하셨는지; 그는 무無에서부터 강력한 오스만 가문의 제국을 불러일으켜서 이들이 정교회 신앙에서 멀어져가던 로마인의 제국을 대체하게 하셨으며, 이 새로운 제국을 다른 제국들 위에 올리시며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란 걸 천명하셨노라.
≪교부들에게 호소≫, 18세기 후반의 예루살렘 총대주교 안테모스
(피리 레이스 제독의 항해서를 인용하며) 언젠가는 로마 땅에서 일어난 정복자가 마그레브 전체를 지배하며 세우타를 정복하고 수피들의 교당을 번영시킬 날이 오리라... 피리 레이스가 1526년 항해서를 술레이만 대제에게 헌상했을 때 그는 그가 헌정한 주군이 다스리는 땅을 '로마땅 (Diyar-i Rum)'이라 불렀다... (중략) 16세기 오스만 항해사들이 그들의 주군에게 충성을 표할 때, 이들은 대부분 파디샤를 '로마의 지배자'라고 불렀지, '오스만 가문 (Al-i Osman)'이라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들이 충성을 서약한 대상은 대체적으로 그들의 주군이 다스리는 땅에 대한 것이었지, 가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Isom-Verhaaren, C. 2014. "Was there Room in Rum for Corsairs?: Who was an Ottoman in the Naval Forces of the Ottoman Empire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Osmanli Arastirmalari-the Journal of Ottoman Studies (44)≫
"술탄에게 가까운 지배층(askeri)는 출신 밀레트를 불문하고 일반 신민(reaya)과 정체성 차원에서 구분짓기를 원했으며, 여기서 택한 건 '로마인'이란 정체성이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로마인 (Rum)'이란 단어가 가졌던 의미와 중요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사용하는 정교회 밀레트로서 '로마인'과 무슬림들도 표방한 '로마인'으로서의 차이이다. 전자는 정교회를 믿는 하나의 피지배 집단이었지만, 후자는 오스만 궁정에서 활동하는 관료, 시인, 예술가들이 선호한 사회문화적 정체성이었다. 두번째는 제국 내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표방하는 '루멜리아'로서의 중요성이었다.... (중략) 제국의 심장이 뛰는 땅은 루멜리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뿐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의미는 제국 자체의 국격과 술탄들의 지위 자체를 높여주는 선언으로서 '로마의 황제 (kayzer-i Rum)'이란 칭호가 가지는 중요성이었다.
ERGUL, F. ASLI. "The Ottoman Identity: Turkish, Muslim or Rum?" Middle Eastern Studies 48, no. 4 (2012)
현대의 튀르키예 공화국은 튀르키예의 로마 계승성을 부정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과 단절하고 근대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계승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통한 국가 수립 및 통합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문서를 참고할 것.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은 로마 제국보다도 오스만 제국과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다만 공화국 시대에도 문화적으로는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계승성을 인정하기도 했고, 튀르키예 관광청 같은 정부기관의 홍보서적이나 학술서적에서도 이에 대한 담론들을 다루기는 한다.
러시아
근현대에 보여준 강대국의 면모로 동로마계 후계제국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례. 구글에 '제3의 로마'를 검색하면 러시아를 말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러시아의 이반 3세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Третий Рим)'로 부르며 동로마 제국을 계승했다 주장했다. 당대의 러시아가 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다고 주장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 이반 3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결혼 전에는 조이 팔레올로기나)가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이었다.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공작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이었는데, 그 딸이 소피아였다.
사실 이 결혼은 교황 바오로 2세가 제안하여 이루어졌다. 당시 토마스와 그 가족은 1460년에 모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함에 따라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교황으로서는 러시아에 가톨릭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최종적으로는 동서 교회의 일치를 노린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역효과가 났던 셈이다.
이반 3세가 내세운 또 다른 주장은 종교가 같다는 것이었는데, 러시아의 국교인 동방 정교회는 키예프 공국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재위: 980~1015)가 동로마 황제의 누이를 대공비(妃)로 맞이하며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대주교좌가 총대주교좌로 위상이 격상되고, 동로마 제국과 여러 동유럽 정교회 왕국들이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해 멸망하거나 상하관계에 놓이면서 러시아는 독립성을 지켜 동방 정교회 세계에서 유일하게 건재한 곳이 되었다.
이 외에도 로마가 일곱 언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모스크바도 일곱 언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근거 중 하나로 썼으며, 근거로 실질적으로 활용되진 않았지만 러시아 역시 동로마 멸망 후 동로마의 유민들을 흡수-보호하였다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
이반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칭하며 동로마 제국의 관직명이나 궁정 의례 등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차르라는 칭호를 러시아 군주의 칭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들인 이반 4세가 처음으로 차르라는 칭호를 썼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반 3세는 국내적으로만 차르라는 칭호를 썼을 뿐 그것을 대외적으로도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걸 대외적으로도 공식화한 사람이 이반 4세다.
이후 표트르 1세의 대에 이르러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동방 교회 총대주교들의 인정을 받음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방식으로 동로마의 왕관이 러시아 차르의 머리 위에 올라가게 된다. 종교적 중립성을 띄고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이 가톨릭에 의한 서로마의 계승자라면, 이쪽은 정교회에 의한 동로마의 계승자가 되는 셈이다. 물론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동로마 황제 주장을 처음에는 대놓고 무시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국력을 차츰차츰 키워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파리를 점령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굳이 강대국과 척을 질 필요가 없는데다가, 어차피 러시아가 주장하는 동로마의 종교적/정치적 계승은 서로마 중심의 서유럽과는 무관하므로 외교 문서에도 꼬박꼬박 황제라고 써주면서 대충 황제 대접을 해주었다.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여섯 차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 주장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그리스 계획을 표방하여 새로이 정복한 옛 크림 칸국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오데사, 헤르손,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등 그리스식 이름을 붙였다. 또한 이교도의 폭정 하에 신음하는 발칸반도의 정교회 신자들의 해방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복이라는 명분으로 6번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러시아군은 그리스, 불가리아 같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던 정교회 지역의 지지를 받으면서 최종목표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가까운 지점까지 진군했다. 마지막 전쟁인 6차전(1877~1878)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서쪽으로 불과 16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가 너무 강해져 밸런스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서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인해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로마 영토 회복은 결국 무산되었다. 이후 혁명으로 전복될 때까지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옛 로마 제국 영토였던 지역은 동로마 제국에서 변방지역인 크림반도 남부 일대, 조지아, 아르메니아 지역에 불과했다.
러시아 혁명 후 적백내전이 터지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밀린 백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제4의 로마로 선포하기도 했다.만주족, 옛 고구려인도 모두 로마의 일부다! 그러나 별로 오래가지는 않았고 몇 달 만에 백군이 패배하며 제4의 로마는 무너졌다.
결국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가 된다는 러시아인의 태고의 꿈은 실패로 끝났다. 중세와 그 이후 17세기에 벌어진 기독교 세계의 대분열은 결국 모스크바에 있는 차르들의 나라는 로마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을 못박았다. 그러나 세기말적인 형태든, 혁명적인 형태든 간에 러시아인들이 품고 있던 세계 구원의 메세지는 근대에 들어와서 대단히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제3의 로마 대신 3차 인터내셔널이 모스크바가 주도하는 세계 질서의 중심이 되었고, 제3의 로마 이념의 많은 부분이 이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3차 인터내셔널 또한 일종의 거룩한 종교 제국이고, 그 근원은 비록 세속화되었다 한들 정교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제3차 인터내셔널은 이름과 달리 국제적인 기관이 아니라 러시아 민족 고유의 체제였던 것이다.
니콜라이 베르다예프, 제정 러시아 말기~소련 초기 러시아 문필가, 사상가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운 소련은 로마 계승을 주장하지 않았고 쌍두독수리 문장도 낫과 망치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암암리에 러시아인들의 계승 의식 자체는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재미있는 점은 막상 로마 계승을 주장하지 않았던 소련 시절이 러시아 역사에서 유일하게 정치, 문화적으로 로마 제국에 가장 가까운,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으로 세계적인 패권을 행사하던 시절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이 공산권의 맹주국으로서 가졌던 정치적인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으로도 소련식 공산주의 문화가 지구 절반에 퍼져 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소련이 대전기에 핀란드를 넘보고 발트 3국과 몰도바를 병합한 명분이 제정 러시아 시절의 영토 수복이었으니 은연 중에 러시아 제국에 대한 계승 의식이 있었으며 이는 로마 계승 의식과 이어진다고도 유추할 수 있다.
오늘날 러시아 연방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자처하지 않는 것처럼 로마를 자처하진 않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쓰던 쌍두독수리 문장을 부활시키는 등 소련 시절보다는 로마와의 연관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서로마 제위 계승
서로마 정통 제위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이후는 동로마 제위와 궤를 같이함)
자칭 제국(비정통)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제1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계승 종결)
프랑스 제국(제1제국, 제2제국)
독일 제국(제2제국)
나치 독일(제3제국)(황제국 아님)
동로마 제국
의외로,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킨 자로부터 황제의 권한을 이양받아 서로마의 정통 제위를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로마 분열기에도 한쪽의 황제가 공석이면 다른 쪽의 황제가 다음 황제를 정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이러한 퍼포먼스가 없더라도 서로마 제국위는 자연스럽게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다.
다만 이런 논리에는 약간의 결함이 있는 것이, 정작 제노는 오도아케르의 서로마 지역 지배를 인정한 바도 없었고 오히려 죽을 때까지 4년동안 서로마 황제임을 자부한 율리우스 네포스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토 재정복 사업을 통해 서로마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한 시기가 있었으며, 라벤나에 서로마의 본토였던 이탈리아를 담당하는 총독부를 설치하고 지배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으로 인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동로마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8세기에는 라벤나 총독부까지 함락되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이 남부로 축소되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 남부는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지만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인해 위태로워졌고, 11세기에는 이슬람 대신 노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다. 그리고 1071년에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해 동로마의 마지막 이탈리아 영토인 바리가 함락되었고, 이후 동로마는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 남이탈리아 탈환 시도를 하긴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상 파괴 운동 등으로 교황과 마찰을 빚자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줌으로 인해 서로마 제위가 이중계승되게 되며 이와 관련된 문제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간의 갈등이 빚어진다. 교황 측의 근거인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는 이후 위조문서임이 드러났기에 이는 사실상 교황에 의해 서로마 제국위가 새로 만들어 버린 셈인데, 문제는 황제위를 만든 교황은 동서 대분열 전까진 동로마 제국 라벤나 총독부에 성직자 임명 등을 보고하는 등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동서 대분열을 통해 동로마와 로마市의 종속 관계가 끊어지면서 동로마와 교황의 종속 관계도 끊어지게 된다.
신성 로마 제국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웃나라들에 비해 중앙집권화가 매우 뒤떨어진 황제의 권위는 땅바닥을 뚫을 정도로 추락하고, 각 제후국들이 선제후 못지않은 자주적인 외교권과 주권을 가지며 제국의 역할이 유명무실화되자 볼테르를 비롯해서 후대인들에게 반쯤 조롱이 되어버린 감도 있지만, 그래도 로마市를 포함한 당대 서방인들에게는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서유럽의 로마로 대접받은 건 엄연한 사실이다. 자세한 건 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서 참조.
프랑스 제국
아이러니하게도 신성 로마 제국을 무너트린 나폴레옹의 제국이 프랑크 왕국 시절의 신성 로마 제국위 계승으로 정당화되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후예가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셈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프랑스 제국을 프랑크 왕국의 후계국이라고 자처했으므로 억지로나마 서로마 제국 계열로 분류할 수도 있다.
혁명 프랑스를 토대로 한 막강한 국력으로 유럽을 평정했기에, 힘으로 주변국을 찍어누르고 제국의 칭호를 얻은 국가라 할 수 있다.
서유럽에선 이전에도 제국을 칭할 법한 강대국들이 많았지만, 프랑크 왕국 이후로 한 국가가 유럽으로 인지되던 지역의 거의 전부를 완전히 압도했던 적이 없어서 함부로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가톨릭의 공인을 받은 독일 제후들이 있긴 하지만, 이는 상당히 예외적인 자리였다. 나폴레옹 이전의 프랑스 왕국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자리를 노렸으나, 그 때마다 독일 제후들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견제를 받아서 실패했다.
그런데 혁명기 프랑스는 독보적으로 강했고 혼자서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힘으로라도 제압할 수 있었기에 황제 칭호를 교황에게 강요하여 가져온 것이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황제 칭호를 칭하는 근거가 지정학적인 과거 프랑크 왕국의 위치에 프랑스가 있다는 점과 순전히 '압도적인 군사력' 뿐이고, 혈통이나 정치체계 계승을 통해 갖춰지는 정통성도 없었기 때문에 위에서도 언급했듯 주변국들이 참칭이라고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나폴레옹의 칭제방식이 가장 로마적이라는 점이다. 로마의 황제가 되기 위해선 강력한 군사력과 시민의 지지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국민투표라는 시민의 지지와 강력한 군부의 지지를 등에 업어 황제에 등극한 것이다. 이는 군주의 칭호에서도 드러나는데 나폴레옹의 공식 칭호는 프랑스인의 황제(영어로는 Emperor of the French)로 이는 로마인의 황제란 칭호에 모티브를 얻었을 확률이 높다.
물론 나폴레옹 시대 이후 로마 제국의 후예를 함부로 자칭하는 분위기는 수그러들었지만,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편법으로 황제를 자처하는 식민 제국 국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서 '황제 인플레 현상'이 19세기 이후에 벌어지게 된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뒤 인도 제국을 수립해서 대영 '제국'을 자처한게 좋은 예이다.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선거에서 선제후들의 투표로 선출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1452년 프리드리히 3세의 대관식 이후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제국의 해체까지 줄곧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라인강 서쪽의 제국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계속 합스부르크 가문에 투표를 해오던 성직 선제후국들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합병되었고, 남은 세속 선제후들도 프랑스 편을 들기 시작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재위 계승이 위태로워졌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선포는 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프란츠 2세는, 1804년 신성 로마 제국과는 별개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아우르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다. 따라서 프란츠 2세는 2년간 신성 로마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하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오스트리아 황제 재위만이 남았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지만 남은 독일어권 국가들을 규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1815년의 빈 회의 이후에 결성된 독일 국가들의 회의기구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 되어 독일 통일을 주도하려 했으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했다. 그 후 대타협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개편한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했고, 군주제 폐지와 영토 상실을 겪으며 군주정이 사라진다.
여담으로 의외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동로마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이 모계로나마 섞여 있긴 하다. 바로 몬페라토 후국을 계승했기 때문인데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의 딸 비올란테가 이리니라는 이름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후 이리니의 남동생으로 몬페라토 후작이 된 조반니 1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버려 남계 후손이 없어지자 몬페라토 후작위는 안드로니코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돌아갔고, 그 후 몬페라토 후국은 약 200년간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다. 1533년, 몬페라토의 팔레올로고스 가문도 남계 후손이 끊겨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9세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는 만토바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곤차가와 혼인하여 몬페라토 후작위는 곤차가 가문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후 페데리코 곤차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는 로렌 공작 앙리 2세와 혼인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프랑수아즈는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증조모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아주 미약하게나마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동로마 황실과의 혼인으로 동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오스만의 사례에서 볼 때 오스트리아도 나름의 명분을 주장할 여지는 있기는 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이를 내세운 적은 없었다.
독일 제국
1871년에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지역을 통일한 독일 제국은, '카이저' 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주장들과는 달리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가톨릭 군주가 통치했던 서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독일 황제는 개신교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가였던 호엔촐레른 가문만 두고 보면 개신교 가문이었음에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신분을 가진, 신성 로마 제국의 7선제후 중 하나였다. 즉, 원칙상으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자격이 충분했기 때문에 종교가 개신교도더라도 아예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들이 가장 크게 비판 받은 건 아무리 프로이센 왕국에게 군사적으로 털렸다지만, 최소한 독일계 가톨릭 국가들의 맹주 노릇은 하던 오스트리아를 빼놓은 통일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독일 제국 성립 이후에도 제국 내의 국민들 사이에는 소독일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독일주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훗날 나치 독일은 강력한 대독일주의를 발판삼아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열렬한 호응 하에 안슐루스(대독일 통일)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독일의 엄청난 흑역사로 남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다시 갈라졌고 그와 함께 지금까지도 안슐루스의 원인인 대독일주의는 외세에 의해 금지되었다.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은 독일 민족국가의 적통임을 주장하며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 독일 제국을 제2제국, 자신들을 제3제국이라고 주장하였다.
안슐루스를 통해 오스트리아와 하나가 되면서 독일계 양대 국가를 통일하였기 때문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황제도 없고, 총통이던 히틀러는 종교관이 의심을 받으나 가톨릭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으며, 나치 독일의 패악질로 인해 깔끔하게 묻혔다. 게다가 당시 나치는 독일 민족국가의 적통임을 주장하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토이부르크 전투의 승리를 찬양하고 로마화되지 않은 게르만인들을 찬양한 인물이 히틀러인 만큼 히틀러가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의 주장
한편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본토였다는 것과 오스만 제국과 유사하게 로마를 수도로 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먼저 이탈리아 통일 당시의 운동가인 주세페 마치니의 구호 가운데 '황제들의 로마 다음에 교황들의 로마가 있었고, 이제 인민들의 로마가 올 것이다' 라는 것이 있고, 마치니는 이 구호를 내걸고 공화제로서의 이탈리아 통일을 주장하고 튀니지를 식민지화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이탈리아가 지중해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이탈리아 왕국도 공식적으로 제3의 로마라고 자칭은 하지않았지만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는 의식이 강했던 만큼 정복활동을 벌여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리비아를 식민지로 두었고(이탈리아 제국) 이를 통해 로마제국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러했다. 다만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려다가 굴욕을 당하기도 했고,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었음에도 영토를 얼마얻지못해 정국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기 때문에 당대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에 비하면 로마제국 흉내를 내려고는 하지만 실제 국력은 그에 못미치는 2류 열강 취급이기는 했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것을 차용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제3의 로마(Terza Roma)' 라고 했는데, 황제의 로마와 교황의 로마 다음에 파시스트 로마가 도래했다고 연설한 것. 그리고 역시 마치니의 주장을 빌려와 영토 확장을 부르짖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했다.
한편 로마 공화국의 정체성을 계승했으며, 이 유지를 자국이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공화정 로마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저서에서 알 수 있듯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제국으로서 로마가 아닌 공화국 로마의 가치를 지향했던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은 상당히 유서 깊으며 영향력 있는 지식인 세력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이나 14세기 로마 민중 봉기의 지도자였던 콜라 디 렌초처럼 혈통, 권위, 국력, 지정학적 요소 등으로 연속성을 주장했던 위의 군주국들과는 다른 의미로 로마의 공화주의와 시민 중심의 정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현 이탈리아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하지 않고 있으나 위에 나왔듯이 민간 대중 사이에서의 로마에 대한 계승성과 자부심은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 현 로마시 시민의 경우 그 성향이 두드러진다.
그리스의 주장
19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스스로를 동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발칸반도 남쪽 끝부분의 영토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인'이 살고 있는 지방 모두를 우리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를 '대그리스주의'. 또는 당시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을 따라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 위대한 이상)'라고 한다. 문제는 '그리스인'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역사적, 인종적으로 그리스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잡았다는 것.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그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존재하는 아나톨리아 해안은 물론이며 그리스인이 숨어살던 카파도키아 고원과 그리스계 폰투스인이 사는 폰투스까지 모조리 정복해야 한다. 즉 발칸 반도 남단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해야 하는 셈. 바로 아래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튀르키예 대국민회의와 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를 탈취하려 했던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이것은 튀르키예 민족으로서는 지극히 곤란한 것이었는데, 대그리스주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멀리는 트레비존드와 안티오키아까지 점령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튀르키예인의 거주지역과 완전히 겹치는 것이었다. 그리스 왕국의 첫번째 국왕인 오톤이 메갈리 이데아를 실천하겠다고 크림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배하고 결국 퇴위하면서 꿈이 되는가 싶었지만 요르요스 1세가 정세를 잘 활용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하나하나씩 얻어가면서 꿈이 실현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있어서 1897년에 크레타섬에 반란이 일어나는 김에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역공을 당해 그간 얻었던 영토를의 일부를 다시 뱉고 막대한 배상금을 오스만 제국에게 내주는 등 등 순조로운 영토확장이 진행되었던것은 아니었고, 1900년대 들어서 침체되었다. 하지만 1912년~13년도에 두차레에 걸쳐 치러진 발칸전쟁에서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를 상대로 이기면서 크레타 섬과 남트라키아, 테살로니카 일대를 얻었고, 거기에 더해 1차 세계대전에서 그리스가 승전국이 되고 오스만 제국이 패전국이 되어 해체되면서 메갈리 이데아가 완전히 실천되는듯 싶었다.
하지만 추가적인 영토확장 시도는 오스만 제국의 잔당을 모아서 반격한 아타튀르크에 의해서 분쇄 되었고 신생 튀르키예와의 협상을 통해서 인구교환을 통해서 아나톨리아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한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당시 영국군이 주둔중이라는 특성상 점령에 실패하여 새 로마를 점령하는 것 또한 실패하였다.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 비잔티움 제국)'나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동로마 제국)' 같은 표현이 쓰인다.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후술하지만 로마와 연관이 되는 동로마 제국조차도 잘 안 쓰이고, 그냥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해놓은 걸 볼 수 있다. 위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이란 말은 그냥 '로마 제국' 정도의 뜻이라서 현대 그리스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그냥 '로마 제국'으로 칭해 버리면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2세기 중반(BC 146년)[에서,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하는 1830년까지 무려 2천 년 가까이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으로 보일 수 있다.그게 사실인 게 함정. 현대 그리스의 공식 입장은 대체로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계승성을 강조한다. 이는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화된 국가라기보다는 다민족 제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최근 학계 연구 성과와는 대치되는 주장이다.
현대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로마성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오스만 제국의 다문화적인 모습은 부정하는 현대 튀르키예인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그리스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계승 의식은 이탈리아의 고대 로마에 대한 인식과도 대조할 수 있다. 이탈리아도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후예로 여기고 이탈리아가 로마가 시작한 장소임을 강조하며 로마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타성을 가지고 고대 로마에 근대 이탈리아의 민족 의식을 적용해서 로마를 이탈리아만의 민족 국가로 여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가장 큰 접점을 가지고 있는, 동로마 제국으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고대 로마는 가장 전형적인 보편제국의 예시이다. 비록 이탈리아가 '로마의 장녀'란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깊은 연관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를 이탈리아만의 민족 국가로 보기엔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과 그리스의 관계는 고대 로마와 이탈리아의 관계보다 더 복잡하다. 공화정기나 제정 초기까지의 그리스 본토나, 넓게 보아 아나톨리아 서부와 마케도니아 등을 포함하는 에게 해 연안의 확실한 그리스권은 로마 본국 이탈리아의 라틴인이라는 외세 내지는 외래종족의 통치를 받았던 점이 확실하지만, 가장 많이 땡겨잡으면 카라칼라의 212년 시민권 확산 이후, 내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80년대 사두정치 및 '수도와 궁정을 로마 시와 이탈리아 밖에도 둘 수 있다는 개념'의 첫 도입 이후, 혹은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완성 이후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동로마 중후기에는 (비단 4차 십자군에 의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다종족적 제국이라기보다는 점점 민족국가에 가까워졌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 10세기부터는 기록에 '로마인'이 마치 '아르메니아인'처럼 종족개념으로 나오기 시작하며, 11세기 후반의 저작물 중 하나에는 영어로 번역하면 'a Roman by birth', 즉 '출생에 의한 로마인'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근현대적 의미의 국적 개념이 없던 중세 시절, 저 구절은 종족적인 의미의 로마인, 즉 '로마족'(Roman ethnicity)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이러다가 그리스인들이 로마라는 이름에서 탈피한 것의 효시는 그리스 독립전쟁이라고 한다. 그리스가 독립한 과정이 처음에는 자력으로 독립하려다가 오스만으로부터 반독립 상태였던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가 보낸 군대에게 거의 진압되었다가 결국 서유럽의 힘을 빌려서 독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서유럽계 왕족을 왕으로 세워야 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지만 로마라는 국호로 독립하기에는 서유럽과 가톨릭 교회를 자극할 우려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오스만의 수도였으며 로마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오스만의 충실한 어용이 되었기 때문에, 차마 로마라는 국호를 쓰기 어려웠다. 영어 위키백과 Roman people(로마인)에도 로마인(Romioi)이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보다는 여전히 오스만 치하에 있는 이들을 더 연상케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스만 치하에서 게으른 노예로 있던 로마인과 대립되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용감한 자유의 투사인 그리스인(Hellene) 상이 형성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물론 그리스인들이 자국(민)에 대해서 로마(인)이라고 부르는 용례는, 한국인들이 서울을 한양, 조선을 한국이나 삼한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돌려부르거나 혹은 문학적인 용도로 쓰이는 옛 이름으로는 여전히 간혹 쓰인다고 한다.
루마니아의 주장
루마니아는 România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의 땅을 뜻한다. 동로마 제국의 여러 국호 중 하나이며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에 사용된 명칭인 로마니아와 일맥상통하는 명칭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루마니아는 국호에서부터 대놓고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는 나라인데, 그 근거는 루마니아인이 고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에 속하고, 루마니아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 계승 의식은 루마니아 국가에서도 나타나는데, 아직도 이 핏줄 속에 흐르는 로마인의 피를이나 전투의 승리자가 된 트라야누스의 이름이 있음을이라는 가사가 대표적이다.
한편 루마니아는 로마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로마에게 정복당한 선주민들의 나라인 다키아 역시 계승했음을 주장하고, 로마군에 저항하다가 자결한 다키아의 마지막 왕 데케발루스를 민족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금의 루마니아의 정체성은 아우렐리아누스가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면서 남겨진 로마 정체성을 가진 다키아 사람들이 현 루마니아 지역에 남아서 만들어진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둘의 계승성을 주장한다 하여도 심하게 모순되지는 않는다. 이런 나라들은 유럽에 무수히 많고, 아랫동네인 불가리아에서 트라키아인(즉 로마인), 남슬라브족, 불가르족을 자신들의 3대 조상으로 여기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특이 사례 1- 미국
미국은 로마 제국 계승과 전혀 무관한 근대의 신생국이고, 미국 스스로도 대내외적으로 로마 계승을 주장한 적이 없다. 국장과 같은 상징물이나 표어 등이 로마의 그것과 조금 비슷한 부분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단순한 모방 및 변형에 불과하며 진지하게 로마의 정통성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 위상과 성격 면에서 미국과 로마의 유사성을 진지하게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 요소를 미국의 정치 체계가 근대식으로 계승하였음은 물론이고 다민족-다인종 사회를 기반으로 한 보편제국이라는 성격을 똑같이 가지고 있으며, 압도적인 국력을 통해 이룩한 미국 중심의 1극 패권 체제인 '팍스 아메리카나'는 로마 제국의 그것인 '팍스 로마나'와 사실상 같다. 그리고 로마는 지중해를 평정하여 지중해 무역 질서에 안정을 가져왔고, 미국은 세계 바다를 지배하면서 세계 무역 질서에 안정을 가져왔다는 점도 유사하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미국을 '21세기의 로마'로 표현하는 사례가 많다. 즉 위에 언급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다른 국가들이 통치 및 외교상 이념이자 정통성이라는 명분의 성격이라면, 미국은 그 실질적인 위치와 위상 면에서 로마와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미국이 로마라고 하는 것은 진지하게 후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로마에 비유하는 것이다. 로마 제국을 공식적으로 계승한 적도 로마 제국을 인식한 적도 없는 미국이 정작 로마 제국 멸망 이래 로마 제국과 가장 유사한 나라라는 점은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특이 사례 2- 유럽연합
유럽연합 역시 통합의 기원은 로마 제국의 역사성과 무관하며, 유럽연합 스스로도 대내외적으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적이 없다. 허나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다시 유럽이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면서, 유럽연합이 장차 새로운 로마 제국의 형태를 띌 수 있다는 진지한 분석들이 많았다. 유로화가 등장하고 유럽의 통합 과정과 그 효과가 특출나게 나타났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자주 나왔던 분석이다.
그러나 그리스 경제위기를 필두로 한 유로화 사태, 출범 당시 EU보다 GDP가 적었던 미국에게 역전당한 것,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무엇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인 브렉시트를 거치며 유럽연합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 회의감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유럽연합과 로마의 비교는 수그러들고 있다.
한편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매우 커지면서 유럽연합이 독일의 '제4제국'이 되어가고 있다는 다른 방향의 주장도 있다. 본래는 소설가와 음모론자들이나 하던 주장이었으나 이후 반 EU 성향의 극우 정치인들도 이 표현을 사용하며 독일의 영향력을 비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