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두정치
삼두정치(三頭政治, Triumvirate)는 로마 공화국에서 제정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3인 집권 체제를 지칭한다. 과두제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다.
1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국가기구나 법제가 아니었으며 그냥 세 사람 사이에 집정관을 돌려막는 협정에 불과했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에 집정관으로 당선되었고, 이후로는 갈리아 키살피나+갈리아 트란살피나+일리리아 3개의 속주 총독으로 갈리아 원정을 10년간 지휘하였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에 공동 집정관을 지냈으며 폼페이우스는 제해권을 전담하고, 크라수스는 동부지역 속주 총독을 지냈다.
2차 삼두정치는 형식적으로는 3인 위원회로 집정관을 나눴지만 실질적으로는 호민관과 원로원의 업무까지 대부분 실행했기 때문에, 사실상 견제 불가능한 최고 통수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두정치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창설 의도와 작동 방식은 전혀 다르다. 사두정치는 제정 사회가 이미 실현된 상태에서 권력을 다시 분할하여 군인 황제 시대 같은 참사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 삼두정치는 원로원과의 갈등을 적절히 봉합하고 종국엔 원로원을 몰아낸 뒤 권력을 성공적으로 집중시켰지만, 사두정치는 의도는 좋았을지언정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제1차 삼두정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제2차 삼두정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총 2차에 걸친 삼두정치 체제가 있었는데, 결성 시점에 무게감이 상대적으로 처졌지만 최후의 승자가 된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비교적 짧은 역사의 평민 유력가 출신으로 명성 높은 장군이었지만 결국 패배한 폼페이우스와 안토니우스, 공화정 명문 귀족 출신이고 상대적으로 초반에 탈락한 크라수스와 레피두스가 비슷하다고 자주 비교된다.
1~2차 삼두정치 모두 형태와 결과가 비슷하기 때문에 구성 인물들의 능력이나 성격, 사건 진행 과정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세한 진행 과정과 인물들은 서로 다른 측면이 많다. 대표적으로 1차 삼두정치는 원로원과 대립했을지언정 비공식 연합으로 남았고 원로원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던 반면 2차 삼두정치는 결성 직후 원로원을 숙청해버린 후 공식 직함을 가진 위원회로 활동했다. 이는 1차와 2차 삼두의 이름값과 상황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인데 1차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는 다들 로마의 거물급 정치가라서 원로원이라 해도 이들과 직접 맞설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2차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절대적 1인자 카이사르의 부하 중 주요 인물일 뿐이었으며 당장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키케로 등 공화주의자 세력이 원로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이를 숙청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1차 삼두정치는 초반에는 폼페이우스만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2차 삼두정치 때는 셋 다 자신의 사병이 있었다. 그리고 1차 삼두정치는 크라수스가 죽을 때까지 셋 다 로마 최고 유력자 지위를 잃지 않았고 비교적 신참인 카이사르가 앙숙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지만, 2차 삼두정치는 보노니아 협정을 주선했던 레피두스가 필리피 전투를 기점으로 권력 구도에서 사실상 밀려나면서 일찌감치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의 양자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1차 삼두정치는 폼페이우스에 비해서 세력이나 명성이 모자라던 카이사르에게 그의 후원자 격이었던 크라수스가 더해져 결성되었지만, 카이사르는 집정관 선출 이후 갈리아에서의 군공으로 크라수스를 금방 추월했고 폼페이우스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크라수스는 결성 당시 본인은 물론이고 당시 로마인들 대다수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의 중요인물로 여겼지만, 점차 곁다리로 밀려났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한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다 자멸했다. 이들의 관계가 결렬된 건 크라수스가 사망하면서 셋이 서로를 견제하던 구도가 1 대 1로 변질된 한편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사망으로 두 사람 사이의 인척 관계가 끊어지고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 견제를 위해 원로원파와 접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2차 삼두정치는 결성 당시는 레피두스가 주도권을 잡았지만 고작 1년 뒤인 필리피 전투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부하나 마찬가지로 전락하였다. 레피두스는 처음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보다 강력한 세력이었고 다른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해 삼두체제 성립을 주도했으며 출범 직후에도 갈리아 지역 노른자위 땅을 차지한 안토니우스와 비슷한 세력에 자신에게 분배된 시칠리아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지배하에 있었던 옥타비아누스보단 훨씬 강력했다. 그러나 군대를 이끌고 브루투스, 카시우스 세력과 싸우는 대신 본토 방위를 맡은 것이 패착이 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단을 전부 빼앗겨 실권을 잃었다. 페루시아 내전에서는 로마 방어를 맡았다가 쫓겨나 옥타비아누스에게 도망치는 등 굴욕을 당하다가 군단 몇 개를 받아 아프리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최고 권력을 노릴 만한 위치에서는 일찌감치 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필리피 이후로 삼두정치는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립 구도였고 거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레피두스를 끼워넣은 것에 불과했다. 레피두스는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토벌에 적극적으로 참전, 승리했지만 직후 팽당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영역인 아프리카에 더해 자신에게 약속되었던 시칠리아를 요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당당히 레피두스의 캠프로 가서 레피두스 눈 앞에서 레피두스의 부하에게 직접 배반을 권유하여 부하들이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 가버린 것이다.
삼두가 각자 군대를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카이사르 파였고 이들이 가진 군대도 본질적으로는 카이사르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의 부하들을 회유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카이사르파의 헤게모니를 옥타비아누스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일개 부하였던 데다 이미 권력 투쟁에서 한참 밀려났던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받은 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데 더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세력을 일소하고 서방의 지배권을 확고히 한 상태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회유하자 금세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로마사에서는 이처럼 잠시간 지나갔지만, 이후 근대의 사회학자 몽테스키외는 이 현상을 잘 관찰하여 삼권분립을 체계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