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고전문학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Jobs9 2021. 4. 2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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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平原王) 때에 이름을 온달이라고 하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는 괴상했으나 속마음은 밝아 홀어머니를 걸식으로 봉양하며 살고 있었다. 그 때의 평강왕의 딸로서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몹시 울어, 부왕이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농담을 하곤 하였다. 시집갈 나이 28세가가 되어 부왕이 귀족인 상부 고씨 집에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부왕의 평소 말대로 온달에게 가겠다고 우겼다. 부왕은 노하여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자 공주는 그 길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공주는 자기가 궁궐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패물로 의식을 해결하고, 왕실의 병약한 말을 사오게 하여 잘 먹이고 온달에게 무예와 학문을 닦게 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수렵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온달이 실력을 발휘하여 이 소식이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중국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무찌르니, 사위로 인정받아 그에게 대형(大兄)의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다음 왕 때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生死)가 결정되었으니 한을 풀라 하니 관이 움직여 비로소 장사를 지냈다.

 역사적 인물 온달은 590년 전사했는데 민간에서 이를 설화화하여 전승시켰다. 그것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듯한데, 이 글의 원문은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신 민중들의 애국심, 충성심, 무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미천한 출신인 주인공이 시련을 겪은 후 숭고한 인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잘 드러나 있다. 백제의 ‘무왕설화'도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출전】<삼국사기> 권 45 열전 제 5 


  온달(溫達: ? ~590)
 고구려 평원왕(일명 평강왕) 때의 무신. 어린 시절에 집안이 가난하여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거리를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 한다. 용모가 파리하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로부터 ‘바보온달’이라 불렸다. 그런데 어린 시절 울기를 잘하여 바보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던 평강왕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의 결합을 고집하다 쫓겨난 평강공주를 처로 맞아들이면서 가세가 펴지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君臣) 및 5부의 병사 등이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을 하여 이때의 노획물로 천신과 산천신에게 제사하는 국가적인 대제전이 있었다. 온달은 여기에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하여 뛰어난 사냥솜씨를 발휘하여 왕의 감탄을 샀다. 그 뒤 북주(北周) 무제(武帝)군의 요동지방 침입 때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 격퇴에 대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大兄)이라는 관위를 받음으로써 점차 고구려 지배세력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이 있자 그는 자원하여 참전하였으나 아단성(지금의 아차산성)전투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함. 


  해설
 (온달설화)는 평민의 신분으로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마에 오르고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설화이며 역사상 실전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설화라고 할 수 있다. 영웅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처럼 온달의 죽음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바보온달로 구전되는 인물전설은 강화도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주로 전승되며, 갈등구조상 동일유형으로 파악되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은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다. 주제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여성 자체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취와 아버지의 인정에 의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삼국사기>열전의 온달조는 민간전승을 통해서 형성된 설화가 편찬자에 의하여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전되는 <바보온달설화>는 문헌에서 전하는 것과 거의 같으나, 공주가 온달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고소설 <온달전>의 줄거리도 이와 같으나 문학적 형상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열전에서보다 민중의식이 한층 두드러져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참고(한문원문)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𣈑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 以至於此乎? 惟我息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可共乎?”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時後周武帝出師, 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寵榮尤渥, 威權日盛. 及陽岡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割我漢北之地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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