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제, 문순태
봉건적 신분 제도와 6·25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인해 빚어진 갈등을 ‘지리산’이라는 공간에서 화해로 이끌고 있으며 민족적 비극을 극복하려는 작가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 갈래:중편 소설, 전후 소설
* 성격:사실적, 기행적, 묘사적
* 배경
① 시간 - 6·25 전쟁부터 1980년대까지
② 공간 - 지리산
* 시점:1인칭 주인공 시점(안 이야기는 3인칭 시점)
* 주제:역사적 비극의 극복
* 출전:“현대 문학”(1981)
어휘 풀이
* 홀맺히지는:풀 수 없도록 단단히 옭아매지지는
* 매굿:음력 정월 초순에 풍물패가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돈 다음 집집마다 들어가 악귀를 쫓고 복을 비는 놀이
* 구성지게:천연스럽고 구수하며 멋지게
* 오달진: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알찬
* 털메기:굵고 거칠게 삼은 짚신
* 연유(緣由):사유
* 염병:‘장티푸스’를 속되게 일컫는 말
* 슬거운:마음이 너그럽고 제법 미더운
* 되작거려:생각을 이리저리 굴려
* 꼴머슴:땔나무나 꼴을 베는 어린 사내 종
이해와 감상
작품은 철쭉이 만발한 지리산을 배경으로 등장 인물의 가족사에 얽힌 비극적 삶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안과 바깥 이야기라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나’와 ‘박판돌’사이의 원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봉건적 신분 제도와 6·25 전쟁 등에 얽힌 한국사의 비극적 면모를 응축하여 담아 내고 있다. 6·25 때 아버지를 잃고 그 상처와 복수심을 품고 산 ‘나’나 노비였던 부모의 원한을 그대로 간직하고 산 ‘박판돌’은 모두 한국사의 비극적 면모를 현재 진행형으로 보여 주는 인물들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철쭉제’는 이러한 철쭉의 붉은색을 통해 피를 상기시키면서 대를 이어 쌓여 온 한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한과 원한을 푸는 민족적 화해와 용서의 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체 줄거리
[발단] 검사인 ‘나’는 6·25 전쟁 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다.
[전개] 고향에서 ‘나’는 비료 공장 사장이 되어 있는 박판돌과 함께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러 지리산에 오르기로 한다.
[위기] ‘나’는 지리산에 오르는 도중 박판돌의 저열함에 혐오를 느끼고 박 영감은 둘을 화해시키려 한다.
[절정] ‘나’는 아버지의 유골을 찾게 되고 도중에 사라졌던 박판돌이 나타나 노비였던 그의 어머니가 ‘나’의 조부에게 몸을 빼앗기고 그의 아버지가 ‘나’의 부친에 의해 엽총으로 살해되었음을 이야기한다.
[결말] ‘나’는 자신이 박판돌에게 복수할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입장임을 깨닫게 되고 다음 철쭉제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인물 소개
* '나' : 천신만고 끝에 검사가 된 ‘나’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박판돌’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박판돌의 가족과 ‘나’의 가족 사이에 얽힌 내막을 알게 된 후에는 오히려 가해자가 자신의 가족이었음을 알게 된다.
* 박판돌 : 노비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나’의 조상에게 한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 한으로 인해 6·25 전쟁 중에 ‘나’의 아버지를 살해하게 된다.
작품 연구
작품의 구성상 특징 - 액자식 구성
바깥 이야기가 현재 ‘나’와 ‘박판돌’에 의한 것이라면 안 이야기는 박판돌의 부모와 ‘나’의 조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바깥 이야기에서 ‘박판돌’은 가해자가 되지만 안 이야기에서 박판돌의 가족은 오히려 피해자가 된다. 이러한 처지의 역전이 이 소설의 구성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6·25 전쟁과 문학적 형상화 관계로 본 ‘철쭉제'
전쟁은 파괴를 통해 사회와 가치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사회의 기본 구조나 가치관의 붕괴와 변화를 일으킨다. ‘철쭉제’에서 6·25 전쟁도 사회적 혼란과 붕괴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즉 종이었던 박판돌이 인민군의 부역자가 되어 주인인‘나’의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작품 ‘철쭉제’에서 주목할 점은 살해와 원한, 복수라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극한의 행동과 감정을‘휴머니즘’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민군 부역자였던 박판돌의 집안 내력을 독자가 알 수 있게 함으로써 잔악무도한 살인자로 생각되었던 그를 인간적으로 동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휴머니즘적 시선은‘전쟁’이 주는 혼란과 붕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철쭉제 - ‘아비 찾기’의 여정
고향을 떠난 지 30년이 지나 검사가 되어 고향을 찾은‘나’는 부친을 살해한 박판돌을 앞세워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해 지리산을 등반한다. 이는 오래 전 박판돌이 자신의 부친의 유골을 찾기 위해 ‘나’의 부친을 앞세워 지리산에 올랐던 일과 흡사하다. 이렇듯‘나’와 박판돌이 집념을 가지고 ‘아비(유해) 찾기’에 나서는 것은 개인과 가족사의 훼손된 부분을 복원하고 채움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함인 것이다. '나’와 ‘박판돌’은 끝내 아비의 유해를 찾지 못했지만 가족사에 얽힌 진실을 주고받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품었던 원한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데에 진정한 ‘아비 찾기’의 의의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제목인 ‘철쭉제’의 상징적 의미
이 작품에서의 ‘철쭉제’는 단순한 작품의 배경이 아닌 주제와 관련된 두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철쭉’은 그 선명하고 붉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한’과 ‘증오’라는 극단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제’(祭 : 제사 제)라는 의미에서 억울하게 죽은 혼령과 그 혼령들의 후손이 갖고 있는 원한의 감정을 위로하고 달래는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있다. ‘나’가 지리산에서 철쭉제가 열리는 시점에 아버지의 유골을 찾는 것은 우연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작품 전체의 상징적 의미 또한 담고 있다.
작가 소개 - 문순태(文淳太, 1941~ )
소설가, 전남 담양 출생. 조선대 국문과 졸업. 1973년 “한국 문학” 신인상에 ‘백제의 미소’가 당선되어 등단. 토속적인 향수와 한을 주된 정조로 하여 우직하고 진실한 인간상을 주로 그려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작품으로는 ‘징소리’, ‘걸어서 하늘까지’, ‘타오르는 강’ 등이 있다.
철쭉제 - 문순태
읽기 전에>이 작품은 철쭉이 만발한 지리산을 배경으로 일제시대부터 6.25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른 2세대에 걸친 비극적 삶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분제와 전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어떻게 한 개인에게 비극적으로 작용하였는지 유의하여 읽어보자.
첫 날
햇빛 속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었더니 속이 메슥거렸다. 창자가 또아리져 뒤틀리며 왈칵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을 것만 같았다, 신경은 낚싯줄 드리운 것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으나 온몸이 허물리듯 졸음이 왔다.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뿜어 삼키는 순간, 일곱 가랑이 문어발 같은 햇살들이 목구멍 속 깊이까지 쩍쩍 달라붙었다.
산하는 지루할 정도로 두꺼운 초록빛의 장막이 여러 겹으로 둘러쳐 막혀 있고, 멀고 가까움이 없이 눈에 들어온 시야의 둘레 안은, 부스럼에 피고름을 빨아내려고 부항(附缸)을 붙인 뜸단지처럼 폭폭 삶아 대는 것이었다. 햇볕에 바삭바삭 들볶이고. 후끈거리는 지열에 생기 잃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데쳐놓은 산나물처럼 는지럭거렸다.
나는, 폐허가 된 마당의 쑥대밭 속을 서성거리며, 삼십 년 전. 우리 집 머슴이었던 박 판돌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나는 잠시도 마음을 가늠하지 못하고, 언제 집이 들어섰었느냐 싶게 돼지풀이며 쑥, 여뀌풀 따위의 잡초들이 시새워 무성한 봉당 위를 왔다갔다했다. 마음 저미고 몸 달아 있는 타는 기실 박 판돌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삼십 년 동안을 어금니 부드득 갈며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몽글리어 왔던가. 그런데도 막상 그를 만나게 되는 순간에 와서 앙갚음할 생각에 앞서 되려 두려운 마음으로 멸고 있는 자신의 나약함이 부끄러웠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꺽는다는 푼수로 불꽃처럼 치솟는 마음 꽁꽁 누르고 참고 견디어 온 지난 삼십 년 동안 매지매지 맺힌 한(恨)은 다 어디로 가라앉아 버렸는지, 그저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 마을에 참담함과 쓰렁쓰렁한 두러움이 앞선 것이었다.
폐허가 된 집터의 구석구석에 박 판돌의 음험한 얼굴이 유령처럼 쭈볏거리는 것 같았다, 와이셔츠의 단추 구멍만한 눈이며, 툭 불거진 광대뼈, 해해 웃을 때마다 삐딱하게 삐어져 나온 이빨들이 햇살처럼 강하게 뇌리를 찔러 왔다.
박 판돌이가 근자에 들어, 곤자소니에 발기름이 끼게 신수가 훤히 트였다는 소식을 듣고, 창자가 연축되면서 아픈 이급(裡急)함에도, 불기둥처럼 치솟는 마음을 삭이며,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건만, 맞닥뜨리는 이 마당에 와서 새삼스럽게 마음 켕기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어렸을 적의 살아남은 기억도 그렇거니와, 들어 알고 있는 바, 왁살스럽기가 미친 개 같고, 마름쇠도 삼킬 욕심꾸러기에 새벽 호랑이 중, 개 안 가린다는 푼수로 안하무인이 되어, 아무나 제 손아귀에 넣고 주물럭거리려고 한다는 박 판돌의 도도한 위세에 한풀 꺾여버렸단 말인가.
나는, 박 판돌이가 내 앞에 나타날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만큼이나 출세를 하여, 생사여탈을 쥐고 편다는 내가, 지금은 비록 구례의 지역 사회에서 제법 말자리께나 하며 떵떵거리고 산다지만, 한갓 옛날 머슴에 불과했던 그를 닦달함이 되려 모기한테 칼대는 것만큼이나 여들없게 생각되어지기도 했었는데, 이제 와서 그가 두려워진 것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똥은 말라도 구리고, 북은 칠수록 소리가 난다고 이제 와서 네 아부지 웬수 갚으면 멋할 긋이냐! 판돌이란 놈은 등치고 간 내먹을 놈이니께, 제 풀에 꺾이두록 냅둬라?"
문득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홀맺힌 원한 풀 수가 없겠다면서 그렇게 발싸심이던 어머니는, 막상 박 판돌이를 만나고 오겠다는 아들의 손목을 부여잡고 마음 돌려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던 거였다
나는 잡초들 사이로 더운 김이 훅훅 코를 덮쳐 오는 뒤꼍과, 와르르 담벽이 무너지고, 무너져 흩어진 돌무더기 틈새에 개똥참외 덩쿨이 얽혀 있는 안채 샘가를 왔다갔다하며 박 판돌을 기다렸다. 그가 나타날 시간이 거진 다 되어왔다.
나는 잡초들이 푸스스한 사랑채 집터 주춧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폐허가 된 마을을 둘러보았다. 눈부신 햇살 사이, 허물어진 돌담 너머로 쭝긋쭝긋 솟은 해바라기며 가벼운 바람에도 딱다그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접시감나무잎들을 쳐다보았다.
마을 앞 당산, 아름드리 좀팽나무만이 예나 다름없이 각시샘 쪽으로 길다랗게 그늘을 늘여뜨리고 있었다. 솔매 마을은 기둥뿌리 하나 남김없이 깡그리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전쟁의 상처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의 형장처럼 고즈넉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후끈후끈 마을을 쓸고 달려와서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까지도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솔매 마을은 이제 잿더미의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잡초들 속에 주춧돌과, 허물어진 돌담, 불에 그을린 집터의 나무들만이 앙상한 주검의 잔해처럼 바람과 햇살들 사이에서 삐걱거릴 뿐이었다.
살갗을 툭툭 쏘는 햇볕 속에 앉은 나는 회색 빛깔의 고향 산하를 휘휘 둘러보았다. 거꾸로 물구나무서서 꽂혀 오는 강한 햇살들 때문인지 눈시울이 찡해왔다. 나는 삼십 년 만에야 고향엘 찾아온 것이었다.
삐그덕 사랑채 대문을 걷어차고 아버지가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뒤에는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장구잽이와 연두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소리꾼들이 따랐다. 사랑놀이를 하러 오는 것이었다. 옥색 비단조끼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아버지는 기름기 좌르르한 하이칼라 머리를 비뚜룸하게 옆으로 가르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학처럼 겅중겅중 들어서는 것이었다. 헌칠하게 키가 큰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그랬다.
그 멋장이 아버지가 머슴 박 판돌이한테 붙잡혀 가는 모습도 보였다. 박 판돌은 끝이 날캄한 긴 대창을 아버지의 옆구리에 쿡쿡 들이대며 발로 아버지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박 판돌이와 같이 온 도리우찌를 삐딱하게 눌러쓴 왕방울 눈의 사내가, 끝이 Y자로 된 실팍한 작대기로 아버지의 허리를 걸치는 바람에 아버지는 헉 하고 숨을 토하며 두엄자리 옆에 꼬꾸라졌다. 안방에서 까르르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가 맨발로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고꾸라진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주저앉았다.
아버지가 개처럼 질질 끌려나간 사랑채 문간 옆 두엄자리의 감나무 가지에서 푸드득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감나무를 쳐다보았다. 사랑채 쪽으로 뻗은 가지들은 모두 불에 타서 검은 뼉다귀만 앙상한데, 담 너머 고샅의 두껍다리 쪽으로 뻗은 가지들만이 용케 살아 남아 손바닥만한 이파리들이 날을 듯이 날개를 쳤다.
나는 다시, 감나무 잎 사이 수많은 색깔로 꽂혀 내리는 햇살을 받으며 꿀참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찬 안산을 건너다보았다.
머슴 박 판돌이는 해마다 농사가 끝나면 보신탕을 해먹기 위해 사랑채 앞 감나무에 개를 매달아 잡았었다. 그는 지게끈으로 홀랑이를 만들어 개의 목에 걸어 두 가지가 사랑채의 담 밖으로 뻗어 Y자로 된 감나무에 매달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때 감나무에 매달린 개는 좀처럼 죽지 않고 오줌, 똥을 바글바글 쏟아내며 오랫동안 깽깽거렸다. 그 깽깽거리는 개의 울음은 안산 너덜겅을 쩌렁쩌렁 울려, 온통 솔매 마을을 발칵 뒤집곤 했었다. 개를 감나무에 매달아 죽일 때 박 판돌이의 눈은 흰자위가 가득하였다. 그 눈은 대창을 들이대며 아버지를 끌고 간 날 밤에도 그렇게 무서웠었다. 판돌이가 개를 감나무에 매달아 죽일 때마다 어린 나는 온종일 징징 울었으며, 밥을 굶고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그 머슴 박 판돌이가 지금은 구례읍에서 무슨 사료 공장의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앞 신작로에 뿌옇게 땅껍질을 벗기며 택시가 달려오고 있었다. 택시는 마을 앞 좀팽나무에서 멎은 듯싶더니 뺑뺑 클랙슨을 울렸다.
나는 정말이지, 박 판돌을 대하기가 두려웠다.
육이오가 터지자 박 판돌의 성질이 갑자기 왁살스러워졌었다. 그는 걸핏하면 지게를 팽개치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찍자를 부렸으며, 그런 그를 나무라는 아버지한테, 뱀의 혓바닥 날름거리듯 눈을 허옇게 까뒤집으며 달려들곤 했었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언제나 입주둥이 내밀고 뚱해 있는 그가, 갑자기 성난 사냥개처럼 캥캥거리며 아무나 물어뜯을 것같이 솔매 마을을 쓸고 다녔었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 두껍다리 쪽에 두 사람의 상반신이 우줄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큰 쪽이 정복을 한 지서주임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박 판돌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두 사람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올수록 가슴이 대장간에서 시우쇠 메질하듯 쿵과닥 쿵과닥 소리를 내며 뛰었다.
"영감님, 박 판돌 사장님 뫼시고 왔습니다."
지서 주임은 이제 마흔 살인 나를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코찡찡이인 그는 맹맹한 코맹녕이 소리를 내며 잡초가 푸스스한 마당을 가로질러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멎자 나는 천천히 하늘에서 시선을 내렸다. 박 판돌이가 토방 아래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는 이따금씩 옆 눈으로 힐끔힐끔 나를 훔쳐보며,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그의 힐끔거리는 시선에서 소름이 좍 훑어내리는 섬치근함을 느꼈다.
"나를 아시겠소?"
나는 앉은 채 박 판돌을 쏘아보며 물었다.
육십 줄에 앉은 박 판돌은 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알록달록 색깔과 무늬가 요란한 남방셔츠와 빳빳하게 주름을 세운 달걀색 바지에 횐 구두를 신고 있었다. 끝이 두리뭉실한 방석코에 가느다란 뱀눈을 내리깐 박 판돌은 몸서리가 쳐질 만큼 음험해 보였다. 깡동한 키에 툭 튀어나온 아랫배가 이만하면 나도 부러울 게 없다 싶은, 허파에 바람든 꼬락서니라니,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지게 다리목 두들기며, 아서라 세상사 쓸 것 없다 하고 육자배기나 흥얼거리던 박 판돌이가 이렇게 딴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사람팔자 시간 문제라고 하더니, 박 판돌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 나는 불현듯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했다,
"이봐요. 박 판돌씨, 나를 알아보겠소?"
나는 검사실에서 피의자를 다루듯 목줄을 빳빳하게 세우고 꽹과리 치는 소리로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알아 뫼시고 말고요. ,,,,,,진작 한번 찾아뵐려고 했으나,,,,,,"
박 판돌이가 이렇게 입을 열며 고개를 쳐들자, 나는 다시 햇살이 묶음으로 쏟아지는 하늘을 켜다보았다. 정말이지 마음이 딸려서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기가 싫었다. 박 판돌의 시선이 찔러 올 때마다 온몸을 확 훑어내리는 듯한 전율에 심신 가늠할 바를 몰라 했다.
"그래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요?"
나는 하늘을 쳐다본 채 허탈하게 물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숭얼숭얼 맺혔다. 박 판돌이도 땡볕에 서 있기가 무더운지 손바닥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쳤다.
"마님은 잘 계시나요?"
박 판돌은 비굴한 목소리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고향에 간다는 것을 한사코 말렸었다. 자식된 도리로 개죽음 당한 아버지 뼈라도 찾아서 편히 모셔야 하지 않겠냐며, 꿈꾸듯 오랜 동안 별러 온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나를 붙들고 늘어지며
"아야, 고향 고향 말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다와. 너는 고향이 징허도 않냐? 지발 고향 이약 그만해라 와. 한번 죽어 흙된 사람 이제사 뼉다구 편하게 묻어준들 죽은 니 아부지가 알아주겄냐? 그러고 그 개만도 못헌 판돌이 놈 만나서 멀 어쩌자는 그냐. 네 아부지 판돌이 놈이 끌고 가서 쥑엤다는 것 솔매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인듸, 인저 그 개만도 못헌 놈, 만나서 다리를 분지를 긋이냐, 칼로 배를 딸 긋이냐. 지난 일은 다 잊고 앞으로 살 일이나 걱정혀. 너 잘 되면 그기 다 판돌이 놈헌티는 뼈아픈 복수가 되는 거여. 네가 고등고시 합격혀서 검사가 되었다는 소식 듣고 간이 콩알만 히졌을 것이다. 아서, 고향 갈 생각을 말으라!"
어머니는 매지매지 가슴에 맺힌 한(恨)을 되씹으며 박 판돌이 놈, 박 판돌이 놈 하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양미간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 어머니 말에 나는 자신이 보잘것없이 되었다면 부끄러워서도 고향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이만큼이나 되어서 무엇이 두려워 수구초심(首邱初心)으로 동경해 온 귀향을 꺾을 수 있겠느냐고 승낙을 받는 데 진땀을 뺐다. 개죽음 당한 아버지 유골이 지리산 계곡에 비바람 맞으며 나뒹굴어, 구천에 정처 없이 떠돌음하는 혼백이라도 위로해 주어야 할 게 아니냐고 설득을 했다. 얼굴에 도깨비 가죽 둘러 쓴 박 판돌이가 제 발로 찾아와서 비대발괄 손이 발 되게 빌면 또 몰라도, 염불위괴로 조금도 자기의 죄 뉘우침 없음이 한결 괴악망측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런 박 판돌이가 뻔뻔스럽게 어머니 안부를 묻고 있으니, 당장 토방 아래로 뛰어내려 멱살을 댕댕하게 감아쥐고 귀싸대길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더위를 이기듯 꽁꽁 눌러 참았다.
"인편에 마님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그라고 되련님 고등고시 합격했을 적엔 이 고을에 오랜만에 지리산 정기 받은 큰 인물 났다고 질거워들 했었죠."
박 판돌은 옆에 서 있는 지서 주임의 동의를 구하려고 힐끗 그를 훔쳐보며 너름새를 떨었다.
"박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요. 신문에서 박 검사님 합격 소식을 알고 큰 잔치가 벌어진 듯했그만요."
나는 해발 일천이백삼십일 미터의 왕시루봉을 쳐다보았다. 갈매빛 산허리 외인 피서지에 한 가닥의 큰 산 그늘이 걸쳐 있었다. 어렸을 때 그렇게 올라가 보고 싶었던 왕시루봉이었다. 집터에서 지리산 상봉인 천왕봉은 보이지 않았다, 솔매 마을 안산은 옛보다 얕아 보였으나 왕시루봉만은 훨씬 높아 보였다. 나는 광주에서 승용차를 타고 호남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 덩치 큰 지리산이 차창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설 때마다 뿌듯하게 가슴 벅차 오름을 느꼈다. 설레임 때문에 눈을 꼭 감기도 했다. 삼십 년 만에야 폐허가 된 고향에 와 닿는 느낌은 참담함과, 소년처럼 심장이 훗듯하게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이 범벅되는 것이었다.
사랑채 마루 끝에 앉아 있으면 왕시루봉이 맞받이로 보였었다. 봄에는 물이 오른 산색이 한결 깨끗하였으며 여름에는 엷은 회색빛 안개에 덮이고, 가을엔 단풍이 물들어 울긋불긋 꼬까옷을 입었고, 겨울엔 하얗게 눈이 쌓인 변화를 보며 자랐다. 왕시루봉이 천왕봉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어린 나는 왕시루봉에 정이 더 붙었었다.
칠팔월이 되면 지리산 계곡은 철쭉꽃으로 빨갛게 물들여지곤 했었다. 머슴 판돌이는 산에서 철쭉꽃을 한아름씩 꺾어다 주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판돌이는 나를 도련님 도련님하며 끔찍이나 잘해 주었었다. 사랑채 접시 감나무에 개를 매달아 죽이는 그였지만, 그 무서운 생각은 잠깐이었고, 철쭉꽃을 한 아름씩 꺾어다 주는 판돌이가 고맙기만 했던 것이었다. 구월이 되어 철쭉꽃이 시들면 판돌이는 다시 단풍을 꺾어다 주었었다. 나는 판돌이가 꺾어다 준 철쭉이며 단풍들을 용머리를 올린 토담에 줄줄이 꽃아 놓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었다. 둥덩덩 딩당동 북치고 장고치며 사랑 놀음을 하려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 오는 예쁘게 차려입은 기생들도, 토담에 꽂힌 철쭉이나 단풍들을 보고 탄성을 올렸으며, 한번씩 나를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기도 했었다.
왕시루봉 산허리의 철쭉꽃은 지금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어렸을 때 같이 뛰놀던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온 가족이 풍지박산이 되어, 여수의 어디에선가 날품팔이를 하며 산다는 살짝곰보, 뒷집 강 대식이, 학교 갔다 오다가 지리산이 높다거니 한라산이 높다거니 괜한 입씨름으로 박이 터지게 싸움질을 하고, 박 판돌이한테 일러바칠 복수를 했던 비석거리 손 팔만이, 둘 이상만 만나면 씨름을 하자고 덤벼들어 슬금슬금 그를 피했던 째보 문 팽선이, 서방 각시놀음하면서 딱주 먹고 딱 엎져서 삐바추 먹고 X해서 아기 배 먹고 아기 배서 나리 먹고 낳아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걔 오빠한테 군밤을 먹었던 오 막례, 의붓아비 떡치는 데는 가도 친 아비 도끼질하는 데는 안 간다는 푼수로 매사에 잇속만 따진 수박등 염 칠복의 아들 염 주근이, 그 밖에로 앞집 오줌싸개 덕길이, 눈보 달례, 대만이, 막둥이...... 얼굴들이 선하게 떠올랐다.
"판돌씨, 우리 아버지는 어디 묻혔죠? 내가 듣기에는 지긋지긋한 김일성 대학으로 끌어갔다던데?"
김일성 대학은 지리산 천왕봉 아래 세석평전에 있었다. 신라 화랑도의 도장이었다고도 하는 세석평전은 질펀한 철쭉꽃밭이었다. 박 판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다.
"그날 밤 당신이 대창을 들이대며 끌고 가지 않았소?"
찌이 찌이 집터 어디선가 여치가 울었다. 감나무 이파리들이 딱따그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당신이 김일성 대학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던데, 왜 대답이 없소!"
"아닙니다요. 지가 어찌 어르신네를!"
"안 죽였다는 말이요?"
"천벌을 받습니다."
"당신이 끌고 가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그렇지만 지가 죽이진 않았습니다요."
"당신이 죽였다던데? 그때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있다구!"
"누굽니까요? 그 사람을 대셔요!"
박 판돌은 당황한 몸짓으로 완강하게 부인을 하였다.
"이봐요, 판돌씨. 난 지금 새삼스럽게 지난날 당신의 잘못을 따지려고 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를 찾아 편히 모시고 싶은 것뿐이오. 아버지가 묻힌 곳을 대주시오."
내 목소리는 잡초들만이 무성한 마당에 내려 깔린 햇살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 판돌을 솔매 마을까지 데리고 온 지서 주임은 마을 앞 팽나무 그늘에 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으나 나는 지서 주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버렸다. 사실 나는 아까부터 목이 말라, 각시 샘에 달려가 배가 쿨렁쿨렁하게 샘물을 퍼마시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다. 나는 벌써 두 시간 가까이 땡볕 속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묻힌 곳만 말하라니까!"
다시 한번 윽박지르며 재촉했다. 박 판돌은 무거운 들돌을 힘에 겨웁게 끙끙거리며 들어올리듯 천천히 고개를 세웠다.
"말하지 못하겠소?"
다그침에 박 판돌 사장은 후닥딱 눈꽁댕이를 말아 올리며 당황하게 나를 마주보았다.
"거기가 어디요?"
"말씀드리지요. 아,,,,,, 아버님은 세석평전에......"
"듣던 대로군. 당신은 아버지가 계신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죠?"
박 판돌은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서야 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불컥 일어섰다.
둘째 날
"삼십 년이 넘었는데 가친(家親) 유골이 제대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걱정이 되어 지관(地官)에게 물었다.
"글쎄, 관도 없이 가매장을 했다면,,,..."
지관도 그게 걱정이 되었는지 확실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내 생각에, 박 판돌을 앞세우고 아버지 유골이 묻힌 곳을 찾아낸다고 해도, 산사태에 떠밀려 가버렸거나 아니면 산짐승들에 해를 당하지나 않았을까 싶었다.
"삼십 년이 지났으니, 너무 오래 되었어,,,..."
지관은 이제야 아버지 유골을 찾겠다고 나선 내 불효를 은근히 나무람 하는 것 같았다.
일행은 새벽 일찍이 화엄사를 출발했다. 솔매 마을에서 천왕봉 밑 세석평전까지 가자면 화엄사를 경유하지 않고 산길로 문수리를 지나서 질마재를 넘어 임걸령에 이르는 길과, 외인 피서지가 있는 해발 일천이백삼십일 미터의 왕시루봉의 산허리를 타고 노고단에 닿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구례읍에 가서 장사(葬事)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할 것도 있고 해서 화엄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에 서둘러 출발한 것이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는 이십여 리 남짓 되는 거리여서 서둘러 출발하면 노고단에서 해돋이 무렵의 운해(雲海)를 구경할 수가 있다고들 했다
일행은 모두 여섯이었다. 나와 박 판돌 외에 지관과 인부 두 사람, 그밖에 여자가 하나 따랐다.
"아니 저 여자는 뭐요?"
박 판돌이가 읍에서 난데없이 입술에 고추장 바르고 눈에 거미줄을 친 웬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나서자, 나는 놀라는 표정으로 불쾌하게 물었다.
"전 철쭉제에 가요!"
스물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되바라진 그 여자가 불쑥 나서며 대답을 하였다.
"철쭉제?"
"구례에 온 지 삼 년이 됐는데두 아직 철쭉제 구경을 한 번도 못했걸랑요."
"우린 철쭉제 구경 가는 게 아닌데!"
나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모시러 가는 길에 여자를 데리고 간다는 것이 꺼림했기 때문이다.
"세석평전꺼정 가신대면서요? 철쭉제는 세석평전에서 열리걸랑요."
"도련님. 그냥 내버려 두시지요. 세석평전꺼정 가자면 어차피 사흘 밤을 산에서 지내야 헐 끈디, 우리 일행 밥이나 해달래죠 뭐,,,,,,,,,"
"그래요. 밥 짓는 건 제게 맡기세요."
그러나 나는 그 여자가 싫었다. 미스 현이라는 그녀는 입성이나 행동거지로 보아 가정집 여자가 아닌 어디 술집 접대부나 시골 다방 종업원 같아 보였다. 얼굴은 제법 반반하게 생겼으나 사람 됨됨이며 말하는 뽄새가 해반들하게 닳아진 여자였다.
"이것 봐요, 판돌씨. 저 여자를 돌려보내요!"
내가 큰소리로 다그치듯 다시 말하자.
"참, 무슨 인심이 이리 야박하답니까? 철쭉제 가는 길에 좀 따라 가자는데 이러시긴가요?"
하고 여자는 입 주둥아리를 비쭉거리며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도련님, 염려 마시라니께요. 세석평전꺼정 따라가겠다고 저 야단인데 아는 처지에 어떻게 뿌리치겠습니까."
나는 아무래도 여자와 함께 간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으나 박 판돌이가 한사코 극성이어서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아주고 말았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리산을 올랐다. 인부 두 사람은 텐트며 취사 도구, 삽, 괭이를 얹은 바지게를 지고 뒤따랐다.
읍에서 박 판돌이가 데리고 온 지관 박 영감은, 일단 세석평전에서 유골을 파 내려와 솔매 마을 근처에 자리를 잡아 이장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내 생각은 솔매 마을보다는 지리산 중에 아무 데나 웬만한 자리가 있으면 편하게 모시고 싶었다.
지관과 인부를 구한 일치며, 음식을 장만한 것까지 박 판돌이가 모두 주선을 했다. 오히려 이쪽에서 미안할 정도로 그는 이것저것 서두르며 큰마음을 쓰는 것이었다. 이럴 때 박 판돌은 옛날 우리 집 머슴 그대로 고분고분 잘했다. 그는 충직한 하인답게 미처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슬겁게 일을 처리하였다.
지관 박 영감이 맨 앞장을 섰고, 그 뒤로 늙수구레한 인부가 바지게를 지고 따랐으며. 색깔이 희부옇게 바랜 예비군복 차림의 젊은이가 바짝 뒤섰다. 나는 맨 뒤였다. 앞에는 박 판돌이와 미스 현이 손을 잡고 히히덕거리며 가파른 산허리를 오르고 있었는데, 나는 일부러 그들과 이십여 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화엄사 계곡을 내려다보곤 했다, 산허리를 오를수록 하늘과 맞닿는 듯한 노고단이 희번하게 트여오고, 계곡 아래는 더욱 짙은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환갑이 지난 지가 육 년이나 되었다는데도 지관 박 영감은 일행 중에서 제일 걸음이 빨랐다. 그의 말로 평생을 구례에서 살아오는 동안 노고단까지 오르내린 것은 헤아릴 수도 없고, 해발 일천구백십오 미터의 천왕봉까지엔 스물 두 차례나 올랐다고 했다. 그는 또 천왕봉에서 법계사를 거쳐 문장대, 칼바위로 뚫고 나가 곡점까지 가보았으며 젊었을 때는 쓰리봉, 치받목, 새재를 휘돌아 진주까지도 가보았다고 수탉처럼 두 어깨를 추스려 흔들며 자랑스레 말했다. 그러나 평생을 지리산에서 살았다는 박 영감도, 아직 못 가본 골짜기가 수없이 많다고 하였다.
"지리산이야말로 산 중의 산이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이 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오대악 중에서도 남한 제일의 장산(壯山)이야, 노고단에 올라 무한한 운해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만사가 한줌의 물거품같이 생각된다니께. 그 땜시 평생을 요르케 궁허게 사는가 모르겠지만, 변함없는 이 우람한 산에 비해 내 자신의 살고 죽음이 을매나 초라허게 뵈이는지,,,,,,,,,"
박 영감은 버릇처럼 싱긋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엔 조금도 미움과 욕심이 없어 보였다. 그에 비해 내 자신의 어기찬 욕심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굶주리며 신문팔이를 하면서도 이 갈아 응등물고 기필코 출세를 하고야 말겠다고 몸부림해 곤 자신이 아니었던가. 이 같은 출세욕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어연번듯하게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를 죽인 박 판돌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철석같이 굳은 결심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은 어머니의 똘똘 뭉쳐진 희망이기도 했다. 육이오가 터져 광주로 도망쳐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부러울 것 없이 갖게 살아온 어머니는 손에 공이가 박히도록 남의 밭일을 하고, 정수리에 머리칼이 닳아 몽그라지도록 임질을 하면서도 자식 뒷바라지를 해왔던 터이었다. 고생을 낙으로 알고, 품팔이며 도부 장사며, 닥치는 대로 짓밟히고 부대끼며 살아오면서도 우리 아들 대학만 졸업해 보아라 하는 끈끈한 희망을 약으로 삼키고 온갖 곤욕을 다 감내해 왔던 어머니였다.
계곡이 희번하게 밝아 왔다. 안개처럼 부연 발 밑 계곡 어둠 속에 섬진강 물굽이가 은어의 비늘처럼 희뜩거렸다. 그 희뜩거림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지리산을 통틀어 휘감고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듯싶었다.
눈썹바위에서 잠깐 쉬어 담배를 피운 일행은 해돋이를 구경하기 위해 서둘렀다. 코재에서부터는 정말 코가 땅에 닿을 만큼 길이 가파로왔다. 박 판돌이와 미스 현이 헉헉거리며 뒤처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박 판돌이의 등뒤를 바싹 따르고 있었다.
"힘드시쥬? 도련님."
박 판돌이가 뒤를 돌아다보며 헤실바실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박 판돌이가 말끝마다 도련님, 도련님, 하는 게 딱 질색이었다. 박 판돌이로서는 도련님이라고 불러 은근하게 옛날의 정을 일깨움으로써 환심을 사려고 하는, 의뭉스럽고 구린내 나는 수작이리라,,,,,,나는 그런 박 판돌의 날렵한 심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련님이고 뭐고 집어치우라고 내지르고 싶었지만, 박 판돌이가 겨냥한 대로, 주위 사람들 때문에 그러질 못하고 짓눌러 삼켰다.
나는 박 판돌의 알록달록한 남방셔츠의 등짝을 보고 산을 올라가면서, 문득 어렸을 때 그의 등에 업혀 다닌 기억들을 떠올렸다. 어린 나는 지리산이 온통 허연 눈덩이로 덮여 하늘이 거무스럼하게 보일 정도로 눈이 오는 날이면, 그의 등에 업혀 학교엘 가곤 했었다. 할미봉에 시제(時祭)를 모시러 갈 때나, 읍내 외가에 갈 때도 그의 등에 업혔었다. 그때 그의 등은 지리산 노고단만큼이나 널찍한 것 같았었으며, 쾨쾨하게 땀 냄새 나는 그의 튼튼하고 널찍한 등에 업힌 채 깜박깜박 잠이 들기도 했었다. 그의 등에 업혀 깡총깡총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엉덩방아에 맞춰 말처럼 투루루루 투루루 코를 불며 걸음을 멈추었다가 뛰곤 했었다. 한 번은 그의 등에 업혀 지리산 약수제에 갔다온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그날이 살랑살랑 바람부는 유월 인 것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그의 등에 업혀 오다가 큰 꽃뱀을 보았었다. 무등타기 놀이를 하며 어머니보다 훨씬 빨리 앞서 온 우리들은 칠의각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칠의각 옆, 물이 찌적찌적한 개울가 찔레나무 그늘에 꽃뱀 한 마리가 또아리져 구리 철사같이 날카로운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머슴 박판돌이한테 꽃뱀이 있다고 알려주자, 그는 뱀 눈을 희번득거리며 찔레나무 밑으로 기어가더니 Y자 모양의 나뭇가지로 대가리를 짚어 누르고, 알밤을 줍듯 두 손가락으로 꽃뱀을 집어 올리는 것이었다. 박 판돌이는 뱀의 모가지를 잡아 돌로 대가리를 찍더니 머리에서부터 솜씨있게 가죽을 확 벗겼다. 꽃뱀은 껍질이 홀랑 벗겨져서까지 시뻘건 알몸을 꾸물거렸었다. 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마른 솔잎을 모아 불을 피우고, 시뻘겋게 꾸물럭 거리는 꽃뱀을 지글지글 구워 먹었다. 그가 뱀을 구워 먹는 동안 어린 나는 칠의각 속에 들어가 아름드리 기둥을 붙들고 어머니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판돌이가 뱀을 먹는 것을 처음 본 나는 그가 더럽고 징그러워 곁에 가기도 싫었다. 어머니가 따라오기 전에 깨끗하게 뱀을 먹어치운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 나서 찌적찌적 고여 있는 개울물을 두 손으로 움켜 마셨다, 나는 판돌이가 등에 업히라는 것을 끝내 마다하고 어머니가 뒤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머니 손을 잡고 발목이 시큰하도록 집에까지 걸어왔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박 판돌이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다시는 그의 등에 업히지도 않았었다.
조금 전
"힘드시죠, 도련님"
하면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도, 나는 박 판돌의 시선에서 희득거리는 꽃뱀의 눈깔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 눈은 또 날캄한 대창을 들이대면서 아버지를 끌고 나가던 날 밤처럼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서운 박 판돌이의 눈은 내가 중학,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가슴에서 점점 더 뚜렷한 모습으로 살아 남았던 것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을 때도, 책을 읽을 때도, 그 무서운 눈깔은 바알간 광대버섯이나 더러는 이글거리는 태양과도 같이 반짝이면서 온몸을 쿡쿡 쑤셔 왔었다. 어쩌면 나와 어머니가 그날 밤 솔매 마을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자도 한꺼번에 그 무서운 눈에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끌려가던 날 밤, 모자는 솔매 마을에서 뛰쳐나와 읍내 외가에 숨어 있었다. 다음날 박 판돌이가 눈에 불을 쓰고 모자를 찾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외가에 숨어 있기도 위험할 것 같아서 밤길을 서둘러 광주로 떠났었다. 모자는 이틀 동안을 꼬박 걸어서 광주에 닿았었다. 그때 내 나이 열 살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른스럽게 고통을 잘 참고 먼 길을 걸었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주검을 비통해 할 때도, 어린 나는 울지 않고, 되fp 어머니를 위로해 주기까지 했었다.
"엄마, 울지 마. 후담에 커서 꼭 아버지 원수를 갚을게."
그때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한 말을 지금껏 잊지 않고 있다.
화엄사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져 오자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멎고 화엄사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종소리는 짙은 안개와 함께 가라앉은 새벽 공기를 흔들며 울려왔다. 그 청아한 금속성의 소리가 두 귀를 뚫고 산하에 퍼졌다 싸, 다시 온몸이 끈적거리도록 달라붙어 칭칭 감아 흔들었다. 여음이 길게 울려 퍼진 것은, 종신(鐘身)에 마초 섞은 꿀을 발랐기 때문이라던가. 견대(肩帶)가 연화문으로 장식되고, 유곽에 초화문 아로새긴 큰 범종(梵鐘)이 화엄(華嚴) 법계(法界)의 온갖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일깨우며 울렸다간 바람처럼 멎었다. 그 종소리와 함께 마지막 어둠이 안개처럼 걷혔다. 조금 후에 천은사, 연곡사에서도 동시에 종소리가 울려 퍼져, 깊이 잠든 지리산을 흔들어 깨우는 듯싶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종소리에 지리산은 서서히 눈을 비비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둠이 걷히면서 여기저기서 푸드득 새들이 날개를 치는가 하면 나뭇가지와 계곡이 숲 속에서 경쾌한 목소리로 우짖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없이 어둠에 묻혀 있던 거대한 자연이 비로소 소리 내어 눈을 뜨고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계곡 아래서 섬진강을 훑고 온 살랑살랑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면서 풀잎과 나뭇잎들이 일제히 부시럭거렸다.
"어서들 올라와. 이제 해가 솟아오르는구만!"
맨 먼저 노고단에 오른 박 영감이 주먹 나팔을 만들어 소리를 쪘다. 박 영감의 소리와 함께 동쪽 산허리에서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햇덩이가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순간 햇살이 나무에, 바다에, 풀잎에, 산산이 부서지면서, 하늘과 땅이 하나같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무도 풀잎들도 바위들까지 온통 붉었다. 붉게 물든 지리산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 싶었다. 그 엄숙하고도 경건한 순간에, 나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신비의 깨어남을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당화처럼 붉은 햇덩이가 천왕봉 위로 둥실 솟아오르자 사방에 붉은 빛깔들이 사라지면서, 운해가 펼쳐졌다. 간밤에 가벼운 빗방울이 들친 데다가 새벽부터 활짝 개인 탓으로, 보기 드문 장관을 이룬 것이라고 했다. 쏴쏴쏴, 운해에서는 마치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그 질펀한 구름바다 위로 산봉우리들은 조깨 껍질을 엎어놓은 것같이 봉긋봉긋하게 솟아 있었으며, 땅 위의 모든 것들은 운해 속 깊이 침잠해 버리고 말았다.
엎어놓은 조개껍질들 같은 산봉우리 중에서 무등산이 손에 잡힐 듯 가장 커 보였다. 쐬 쐬 쐬, 이상한 바람 소리를 내면서 운평선 위에 구름들이 무등산 쪽으로 밀려가 부딪칠 때에는 수많은 포말 같은 구름조각들이 튕겨, 산언저리에 해일처럼 출렁였다. 운해가 무등산에 부딪치는 순간 구경꾼들은 함성을 지르며 손뼉까지 쳤다,
노고단에서 보는 운해는 겨울보다 여름이 더 장관을 이루고, 밤에 빗방울이 들쳤다가 활짝 개인 아침이면 말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모두들 운해에 취해 있었다. 인부들까지도 지게를 받쳐두고 함성을 질렀다. 그 동안 운해를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는 지관 박 영감도 이런 장관은 드물었다면서 자못 경건한 얼굴이었다.
노고단에는 해돋이와 운해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등반객들이 몰려와 있었다. 화엄사에서 자고 새벽길을 서둘러 올라온 축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노고단에서 캠프를 치고 야영을 한 등산객들이었다. 더욱더 세석평전에서 지리산 철쭉제가 있기 때문에, 철쭉꽃밭 순례를 위해 많은 등산객들이 몰려 온 것이라고 했다.
운해가 걷히자 동양화의 피마준(披痲준) 같은 계곡들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고단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은 피아골 계곡, 문수리 계곡, 화엄사 계곡, 천은사 계곡, 삼성재에서 중동까지의 펑퍼짐한 계곡 등 여섯 개의 큰 계곡들이 치맛말을 묶어 놓은 듯했다.
일행은 노고단에서 아침을 지어먹기로 했다. 미스 현은 선도샘에서 물을 떠다 쌀을 씻고, 두 인부들은 땔감을 긁어모았다.
"이 지리산이 원래는 경상도 산이었는데 전라도로 유배를 당한 거래!"
박 영감이 아침밥을 먹으면서 말을 꺼냈다. 그는 혼자 걸을 때는 깊은 생각에 잠겨 구름 속을 날을 듯 훌쩍훌쩍 산을 오르다가도, 다른 사람만 같이 있으면 쉴새없이 이야기를 꺼내는 버릇이 있었다.
박 영감의 말로는, 지리산은 원래 경상도 산이었는데, 이태조가 왕이 되면서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에게 특사를 보내 의사를 물었던 바, 백두산 산신령에서부터 한라산 산신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태조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였으나, 지리산 산신령만이 반대를 한 연유로, 이태조가 노기 충천하여 전라도로 유배를 보내버린 것이라고 했다. 천왕봉 산봉우리가 비딱하게 외로 꼬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이태조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표시라고 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지리산 산신제(山神祭)를 화엄사 남악사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밥을 먹고 난 박 판돌이가 소변을 보러 가는 시늉을 하며 차일봉 쪽으로 내려가더니 얼마 후에 손에 뱀을 들고 나타났다. 살무사는 두 손가락에 목을 죄인 채 박 판돌의 손목을 칭칭 감고 혀를 널름거렸다.
"지리산에 와야 이런 좋은 괴기 맛을 볼 수 있다니께!"
박 판돌은 언젠가 내가 그의 등에 업혀 어머니를 따라 약수제에 갔다 오면서 꽃뱀을 잡아먹을 때처럼 솜씨 있게 껍질을 벗겼다. 그는 껍질을 홀랑 벗긴 살무사를 손에 감아쥐고 산장에 가서 판자 조각을 들고 와서는 손톱깎이만한 칼로, 뼈를 가려 여러 토막으로 잘랐다.
"암턴 양기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드만! 이 살무사 회만 한번 먹었다 허믄 그날 밤부터 양기가 분수 솟디끼 허니께!"
박 판돌은 뱀을 여러 토막으로 자른 판자 조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집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미스 현도 박 판돌이 곁으로 쪼르르 다가가서 억지로 빼앗다시피 하여 한 점을 얻어먹는 게 아닌가. 미스 현은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싱글싱글 웃어가며 아주 맛있게 씹어 먹고 나서 밥그릇들을 치우는 것이었다.
그의 뱀을 씹어 삼키는 입놀림이란, 연자방아 갈아 굴리듯, 맷돌 돌리듯, 소 되새김질 하듯 씹고 또 씹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입맛을 다시게 했다,
한가한 나무 그늘에 앉아 달콤하고 새콤한 가물치회 씹듯, 산골 다랑이 못자리 해놓고 막걸리 잔 기울이며 그 많은 가시를 함께 자근자근 이빨로 갈아 이기며 전어회 삼키듯, 제아무리 전어회가 맛있다 해도 은근하고 달콤하면서도 혀끝에 사르르 녹는 숭어회 입맛 다시듯, 양반회라고 일컫는 그 숭어회보다, 고소한 아나고회, 착착 달라붙는 낙지회, 쫄깃쫄깃 은어회, 고소롬한 피라미회, 새콤한 모래무지회, 무슨 회 무슨 회 해도 나긋나긋한 여자 감치듯, 혀끝에 달짝지근함이며 훗훗하게 달아오르는 창자가 곤두선 듯하는 뱀회를 씹어 삼키는 박 판돌의 입맛 다심에, 나도 그만 침을 흘리고 말았다.
"영감님도 뱀을 잡수신가요?"
내가 묻는 말에, 박 영감은 펄쩍 뛰었다.
"배암을 먹으면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몸보다 마음이 튼튼해야재. 몸만 건강허고 마음이 약해지면 아무 짝에도 쇠양 읍는 일이여."
노고단 선도샘에서 수통마다 샘물을 가득 채운 일행은, 햇살이 머리 위에서 꼿꼿하게 찔러 오는 더위 때문에 숫제 수통꼭지를 입에 대고 걸었다. 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출렁거려 산을 오르기가 불편하다는 박 영감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임걸령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통들을 깨끗이 비웠다. 온몸이 흠뻑 땀에 젖어 갈증이 더욱 심했다.
일행은 임걸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노루목이나 반야봉에서 야영을 하자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박 영감의 말로는 어두워질 때까지 반야봉에 도착하기가 힘들겠다면서 두 인부들을 자주 쉬게 했으나, 내가 앞장서서 일행을 잡아끌었다.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는 사 킬로미터가 넘는다. 말이 사 킬로미터지, 산길로 십릿길이니 숙련된 등반객들도 한나절 길이 빠듯한 거리였다.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의 사 킬로미터는 밋밋한 등성이 길이라 그렇게 힘들지 않았으나, 코재를 올라채는 길 이상으로 가파로운 산길도 있었다.
일행은 지치지 않고 짐승의 큰 등뼈를 타고 기어오르듯 지루한 산길을 헤쳐 나갔다.
노고단을 출발하면서부터 나와 박 판돌은 우연히 나란히 걷게 되었다. 나는 되도록이면 그와 나란히 걷지 않으려고 지싯지싯 걸음을 늦췄으나 그때마다 박 판돌이도 나를 따라 미미적거리는 것이었다.
"이봐요. 판돌씨!"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불렀다. 박 판돌은 턱을 앞으로 불쑥 내밀며 비굴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왜 우리 아버지를 끌고 갔었소! 아버지가 당신을 끔찍하게 생각해 주었는데도 말요. 하기야 머리털 검은 짐승은 남의 은공을 모른답니다만,,,,,,"
박 판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아무리 되씹어 생각을 해도 박 판돌이가 아버지를 죽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로는, 그해 정초에 박 판돌이가 건너마을 최 대길 씨 집으로 사경(私耕)을 더 많이 받기로 하고 머슴살이를 옮기려고 하는 것을 아버지가 의리 없는 놈이라고 나무란 것밖에는 틈이 생길 만한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머슴 박 판돌에게 의리 없는 놈이라고 나무란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원래 박 판돌은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장터 술집에서 부엌일을 하던 외팔이 부엌데기의 아들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시난고난 앓다가 죽어버리자, 우리 집에서 꼴머슴으로 데려다 키웠다고 하였다. 커갈수록 성질이 괴팍스럽기는 했으나, 찍자 부리는 일없이 일 하나는 슬겁게 잘 해, 우리 부모들은 후에 그를 장가까지 보내줄 생각이었다.
"우리 아버지를 죽일 만한 이유가 있었소?"
나는 나직하게 그러나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요. 지는 절대로 안 죽였습니다."
"하기야, 그때 아버지를 죽이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오늘날 당신이 공장 사장이 되지도 않았겠지만,,,,,"
“…….”
"그렇다고 죽일 것까지는 없었지 않소? 왜 하필이면 또 김일성 대학까지 끌고 가서 죽였단 말요!"
"아니라니까요."
육이오 당시 지리산에 괴뢰군 총사령부가 있었다. 사령부가 있는 그곳에 소위 김일성 대학을 만들어 지식 계급들이나 젊은이들을 끌어다가 공산주의 교육을 시켰던 것이었다. 이곳에서 발전을 일으켜 전깃불을 켰었다 하니, 당시 지리산 괴뢰군 총사령부의 규모나 시설이 얼마나 어머어마 했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도대체 왜 머나먼 세석평전까지 끌고 올라갔었소? "
나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물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여요."
"누가 시켰는데!"
"거야 뻔한 일이 아닙니까?"
나는 박 판돌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박 영감이 바짝 뒤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걸음을 멈추어 서버렸다.
"어머, 저 철쭉꽃들 좀 봐요!"
박 영감을 뒤따라오던 미스 현이 손으로 피아골 계곡 쪽의 산허리를 가리키며 일행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펑퍼짐한 산허리에 융단을 깔아 놓은 듯 붉은 철쭉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일행은 화엄사에서 그곳까지 오는 동안 가장 넓고 아름다운 철쭉꽃밭을 본 것이다. 반야봉을 넘어서 불어오는 살랑살랑한 바람에 꽃밭은 하나의 큰 묶음으로 일렁였다. 마치 짙은 크레용을 벅벅 칠해 놓은 것 같은 꽃밭은 점점 넓어져 온통 지리산을 가득 덮어버릴 듯싶었다. 그 붉은 빛깔에 반야봉 꼭대기에 걸린 하늘은 더욱 파래 보였고, 상큼한 꽃향기가 허파 속 깊숙이까지 찔러 왔다.
나는 꽃밭 쪽을 바라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꽃뱀들이 엉켜서 꾸물럭거리는 것 같애요."
미스 현이 박 영감을 앞서 뛰어가며 또 한번 큰소리로 말했다
"세석평전에 비하면 저건 아무 것도 아녀!"
박 영감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눈앞에 펼쳐진 철쭉꽃밭에서 아이들처럼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몸이 빨갛게 꽃물이 들도록 뒹굴고 싶었다. 어렸을 때, 머슴 박 판돌이가 한아름씩 철쭉꽃을 꺾어다 주면, 죽 담에 꽃아 두었다가 시들어버린 꽃잎을 손바닥에 으겨 발간 꽃물을 짜냈다.
그 꽃물을 얼굴에 찍어 바르면 한결 예뻐진 것 같아 고개를 내두르며 뛰어다니곤 했었다.
"한때 저 철쭉꽃나무까지도 일본에 수출을 했다는디 이러다간 지리산에 철쭉 꽃나무가 모두 없어질 판여!"
박 영감은 일부러 박 판돌 사장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박 판돌 사장이 오래 전에 지리산 철쭉꽃을 트럭까지 대고 뿌리째 뽑아 일본에 수출을 해서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박 판돌이가 지리산 철쭉꽃을 일본에 수출을 해서 재미를 보았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일행은 철쭉제에 참석하기 위해 세석평전으로 가는 등반객들과 자주 만났다. 그들은 몸도 마음도 건강해 보였다.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고 천왕봉을 바라보며 걷는 그들은 대지를 떠나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는 것같이 밝고 진지한 얼굴들이었다.
천왕봉에 걸린 하늘과, 질펀한 철쭉꽃밭, 초록 빛깔의 산들만이 보였다. 산아래 논과 밭, 마을들은 보이지 않았다. 먼 산들은 뿌연 안개 속에 가려 겹겹이 아득하게 출렁였다. 갈매빛 산들은 지루할 만큼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높이 올라갈수록 바람이 조용했다. 등반객들이 밥을 짓는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꼿꼿하게 하늘로 치솟았다.
소녀처럼 쫄랑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미스 현의 손엔 철쭉꽃이 한 묶음 쥐어 있었다. 철쭉꽃을 근 그녀의 얼굴은 되바라진 데가 없이 순수해 보였다. 그녀는 향기를 맡으려고 킁킁거리며 꽃묶음으로 얼굴을 가렸다,
"요즘엔 통 사향노루를 귀경헐 수가 없드구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러 볼 수가 있었는디 말여!"
박 영감은 미스 현이 꽃향기를 맡으려고 킁킁거리는 것을 보고 말했다. 숫놈을 부르는 암내가 백 리 밖까지 난다는 사향노루가 지리산에 살고 있다고 했다. 시베리아 쪽의 추운 지방에서만 사는 것으로 알려진 한대 동물인 사향노루가 지리산에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박 영감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믿지 않으려 드는 나에게 그가 보았다는 사향노루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까지 해주었다.
아버지는 추수가 끝나면 지리산으로 사냥을 나가곤 했었으며 그때마다 멧돼지나 노루를 잡아 왔었다, 어린 나는 사냥해 온 노루 고기를 먹는 것보다, 아버지한테서 포수들의 사냥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좋아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서당에서 책을 읽을 때처럼 상반신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사냥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아버지가 들려준 사냥 이야기들이란 주로 옛날 유명한 포수들이 지리산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아 온 내용이었는데, 큰 사냥을 갈 때는 총이 밤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운다던가, 깊은 산 속에서 만난 호랑이가 갑자기 이쁜 색씨로 둔갑을 해서 사냥꾼을 흘린다던가 하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간이 콩알만해져 오싹 움츠러들곤 했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남자란 담이 커야 큰일을 할 수 있다며 눈이 커서 겁이 많다는 아이들을 밉지 않게 나무라곤 했었다.
그 멋쟁이 아버지가 지리산 천왕봉 밑 세석평전에 묻혀 있다니, 지난 삼십 년간 가슴을 깊이 파고 겹겹으로 무덤처럼 묻어두었던 울적함이 한꺼번에 왈칵 솟구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묻힌 곳이 어디쯤일까 하고 짚어보았다. 바위 밑일까, 너덜겅일까, 양지바른 쪽일까, 응달일까, 물은 나지 않는 곳일까. 눈이 뒤집힌 박 판돌이가 아버지를 양지바른 좋은 땅에 묻었으리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햇살은 찔레나무 가시처럼 따가왔다. 하늘엔 구름 조각들이 휴지 조각처럼 널려 있었다.
군데군데에 자연사한 고사목들이 거대한 짐승처럼 횐 뼈를 드러내 놓은 채 쭝긋쭝긋 서 있었다. 전나무 원시림 속에 뿌리박고 죽은 고사목을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의 유골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유골도 지리산 고사목들처럼 비바람에 씻기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문득 나는 을씨년스러운 고사목들에서 신비한 영혼을 느낄 수다 있을 것 같았다. 그 고사목들의 밑둥에는 철쭉꽃들이 화사함을 흔들고 있는 것이었다. 눈앞에 잡힐 듯 성큼 다가서 있는 반야봉엔 한결 더 많은 고사목들이 희끗희끗 비춰 왔다. 신선들이 잔치를 벌이고 갔다는 자리. 지리산 제 이봉인 반야봉이 가까워질수록 두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일행은 반야봉의 낙조를 놓치지 않으려고, 뻑적지근한 다리를 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박 영감은, 반야봉에서 잔치를 한 신선들 중 태을(太乙)이라는 한 신선이 지금까지도 남아서 살고 있다는 전설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상봉인 천왕봉 대피소에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함씨라는 사람, 신선 같은 사람여. 대학꺼정 졸업하고도 처자식 떼어놓고 지리산에 미쳐, 하늘이 맞닿는 천왕봉에 혼자 살고 있단 말여."
박 영감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천왕봉에 올라가면 꼭 함씨라는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혼자 지리산 천왕봉 상상봉에 신선처럼 살고 있다니, 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올 봄에 만났을 때 하는 말이, 이제 겨우 쉰두 살인 그가 벌써 한 백 년쯤 산 기분이라는 거여. 그러면서, 죽어서도 지리산 상상봉에 묻히게 되면 천년을 더 살게 될 것이라며, 기어이 그곳에 묻히겠다더구만. 암튼 마음이 하늘 모양으루 툭 티인 사람이다니께! 마음이 그렇게 훤하게 트였으니 블써 백 년을 산 기분이겄재."
박 영감은 지치지도 않고 거쁜거쁜하게 걸음을 옮겼다. 미스 현과 박 판돌은 다리가 아프다면서 자꾸만 뒤처지기 시작했다. 인부들도 걸음이 늦어졌다. 해는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서두른 보람으로 반야봉에서 낙조를 구경할 수가 있었다. 반야봉의 낙조는 노고단의 해돋이와는 또 다른 장관을 이루었다. 대장간의 시우쇠처럼 벌겋게 달은 햇덩이가, 물빛 안개에 휩싸인 아스라한 먼 산에 매달리자. 하얗게 옷 벗은 고사목들이 어느새 무당 할미처럼 빨간 옷을 입었다.
발간 옷을 입은 고사목들은 쾌자 자락 나풀대는 무당처럼 보였다. 반야봉의 서쪽 뺨이 붉어지면서 피아골 쪽의 계곡에는 어느덧 어슴어슴 어둠이 내려 깔렸다. 해가 뚝 떨어지는 순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하늘도, 산도, 나무들도 어둠 속으로 한꺼번에 깊이깊이 묻혀버린 듯싶었다.
미스 현은 서둘러 밥을 짓고, 인부들은 일행이 야영할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반야봉 고사목 아래서 램프를 켜고 저녁을 먹은 일행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삭정이를 주워다 불을 피우고 빙 둘러앉았다. 밤이 되니 제법 싸늘했다. 모닥불에 둘러앉아서 박 판돌이가 준비해 온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소줏잔을 연거푸 비우던 나이 많은 인부 최씨가 갑자기 불컥 일어서더니 노래를 한가락 뽑겠다고 했다. 지금껏 말 한마디 없던 그가 노래를 하겠다는 소리에 일행은 멀뚱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았으며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지가 젊었을 적 장똘뱅이 시절에 배운 근데, 마, 요새는 듣지 못하는 장타령을 한 가락 뽑겠슈!"
곰센 영감이라고도 부르는 나이 많은 최씨는 캐액캐액 억지 기침을 하고 나서 전후 목을 흔들어 댔다. 이윽고, 목을 길게 빼어 외로 꼬아 턱을 불쑥 내밀고 삐딱하게 엉덩일 쳐들었다.
뜰울을 도라왔소 / 각설이라 먹서리라
등설이를 질머지고 / 뜰뜰모라 장타령
횐 오얏곳 옥과장 / 늘은버들 김제장
복창부수 화순장 / 시화연풍 낙안장
쑥고시 다 고산장 / 철철홀러 장수장
산도도회 금산장 / 일색춘항 남원장
십리오리 장성장 / 애고애고 곡성장
뉘리뉘리 똥육전 / 풀풀뛰는 생선전
울긋불긋 환하전 / 팟싹팟싹 담배전
얼걱덜걱 옹기전 / 딸각딸각 나막신전
최씨는 장타령을 하면서 온몸을 흔들어댔기 때문에, 끝나자마자 숨이 차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최씨의 장타령이 끝나자 미스 현도 부끄럼 없이 한 곡조 뽑아 늘였다.
어둠 속에서도 고사목들은 유난히 뚜렷한 모습으로 우쭐거리는 것 같았다. 모닥불 빛 사이로 비춰 보이는 그것들은 유령처럼 흔들거리는 것이었다. 지관 박 영감을 제하고 박 판돌이도 인부들도 미스 현도 불빛 속에서 유령처럼 흔들리는 고사목을 볼 때마다 싸늘한 주검을 느꼈다.
일행은 어둠 속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듯한 이상한 소리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나뭇잎 서걱이는 소리, 고사목이 삐걱이는 소리까지도.
나는 텐트 속 잠자리에 들어서도 긴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때로는 때걱, 와장짱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썩석썩석 짐승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지리산에 호랑이며, 곰, 늑대 같은 산짐승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해발 일천칠백오십일 미터의 첫 밤이 결코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같은 텐트에 든 박 판돌은 드러눕기가 바쁘게 짚불 스러지듯 쿨쿨 코를 골았다. 나는 박 판돌이와 같은 텐트에서 자고 싶지 않았으나, 미스 현 때문에 결국 그렇게 잠자리가 배당된 것이었다. 일행 여섯 사람은 A텐트 세 개에 두 사람씩 들었는데, 미스 현은 박 영감과 같이 자게 되었다. 미스 현이 어느 텐트에서 누구와 함께 들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약간 신경들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혼자 텐트를 독차지하고 자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미스 현은 풀쩍풀쩍 뛰면서 무서워서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여, 결국 박 영감과 같이 자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를 산송장 취급들을 하는 것 같구만. 짚 다발 한 뭇만 들 수 있는 힘이면 여자를 본다는디,,,,,, 머 늙은 말이 콩 마다헐까?"
박 영감은 미스 현과 함께 텐트 속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농담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일행은 박 영감의 인격을 믿는 터이라, 다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기야, 술집에서 되바라진 미스 현이 일행 중 어떤 남자들과 놀아난다 한들 그게 그렇게 문제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녀의 잠자리 때문에 신경들을 쌨다, 아닌 말로, 박 영감이 나이는 많다고 해도 지치지도 않고 산에 오르는 근력으로 보아서는 고양이한테 반찬단지 맡긴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아무러면 어떠랴 싶었던 것이다.
나는 텐트 속에 누워서 귀를 쭝긋거리며 하늘과 땅 사이의 온갖 소리들을 죄 듣고 있었다. 하늘에서 별이 반짝이는 소리까지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텐트 지붕에 달빛이 걸쳐 제법 희끄무레하게 밝아졌다.
나는 억지로라도 눈을 붙이려고 깍지 낀 팔을 목에 감아 귀를 막았다.
나는 혼자 낮고 판판한 산허리를 뛰어오르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무지개 빛 햇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등성이에 아버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둥당둥 사랑놀이를 할 때처럼 옥색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의연(毅然)한 모습으로 한 묶음 철쭉꽃을 들고 아들을 향해 손짓했다, 나는 허위허위 떡갈나무를 헤치며 산을 뛰어오르다가도 행여 아버지의 모습을 놓칠세라 시선을 팽팽하게 늘여 산등성이만을 꼬나보며 뛰었다. 그러나 자꾸만 뛰어올라가도 아버지가 서 있는 산등성이는 점점 더 아스라이 멀어지기만 했다. 갑자기 무지개 빛 햇살들이 뚝 끊기자 뭉클뭉클 두꺼운 먹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검은 구름이 아버지의 두루마기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쌩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나는 지치지 않고 온 몸이 흠뻑 땀에 젖은 채 숨을 헐떡이며 산을 올랐다. 구름이 스치는 아버지의 얼굴은 철쭉꽃처럼 붉게 보였다. 아버지하고 큰소리로 불러 보았으나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고 왼손을 팔랑개비처럼 흔들기만 했다.
잔솔밭을 지나자 너덜겅이 나왔다. 그 너덜겅 위에 아버지는 고사목과 함에 나란히 서 있었다. 다급해진 나는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너덜겅을 올라갔다. 너덜겅을 거진 다 기어 올라갔을 때, 앙당한 전나무 밑둥에서 갑자기 꽃뱀 한 마리가 치르륵 치르륵 혀를 날름거리며 기어 나왔다. 꽃뱀은 곧 네 발로 기어 올라가는 내 목에 감겨들 것만 같았다.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눈을 떠보니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사람의 눈이었다. 흰자위가 가득한 그 눈은 어둠 속에서 칼날처럼 싸늘하게 희뜩거렸다. 박 판돌이가 엉거주춤 앉아서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서릿발 치듯 싸늘하고, 송곳으로 쿡쿡 쑤시듯 온몸에 따가움과 섬뜩함과 몸서리침을 의식하며 전신의 근력이 뜨거운 물에 소금 녹듯 화 풀려, 천근만근 무거운 쇳덩이에 깔아 뭉김을 당하는 것 같았다. 정신도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흩어졌다. 나는 그의 무서운 눈초리에 박힘을 당한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 살려라는 소리, 너 이놈 냉큼 물러나 앉지 못 하겠느냐는 소리,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으며 가위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달싹할 수가 없어,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눈을 뜰 수조차 없어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까스로 실눈을 뜨고 그의 움직임을 어림할 뿐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영락없이 그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헤아림 하면서도 그냥 죽은 듯이 눈감고 누워 있을 따름이었다.
어슴푸레한 실눈 사이로 그의 상반신이 내게 무섭게 허물어져 내려오는 듯싶은 순간, 나는 비로소 벌떡 일어나 앉을 수가 있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 앉으면서 희뜩거리는 그의 눈에 오싹한 살기를 보았다. 깜짝 놀란 박 판돌이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일어섰다.
"술이 깨면서 잠도 깨는구만요. 술 한잔 더 안허시겄서요?"
박 판돌이는 엉거주춤 서서 어색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어둠 속에서 희뜩거리는 그의 눈빛만 찬찬히 보고 있었다. 그 눈은 조금 전 꿈에 보았던 꽃뱀의 혓바닥처럼 징그러웠는데 노고단에서 살무사를 잡아 판자 위에 토막을 내던 날이 파랗게 선 주머니칼을 생각케 했다.
박 판돌은 잠시 텐트 안에서 서성거리더니 어기적어기적 밖으로 기어나가 술병을 들고 들어와 혼자 앉아서 홀짝거렸다. 나는 도무지 잠을 이를 순가 없었다. 그가 무서웠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란 말입니다."
나는 박 판돌의 말에 후딱 고개를 들었다.
"죽고 사는 것이 백지 한 장 차이라 이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아무 대두도 하지 않았다.
"살고 싶다 생각하면 한없이 살고 싶은 거고, 살고 싶지 않다 하면, 그것 모양 간단헌 기 없습니다요."
나는 박 판돌의 말에 몸이 으스스하게 움츠러들었다. 박 판돌이가 어둠 속에서 혼자 술만 퍼마시고 있는 것을 공포에 눌린 시선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발리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전 꿈에서 놀라 눈을 떴을 때, 엉거주춤 허리를 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순간이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세 째 날
반야봉에 샘이 없어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침밥은 쌀을 씻지 않고 그냥 물만 부어서 익혀 먹었다.
지리산에서 두 번째 해돋이를 맞았다. 날씨 탓이었는지 운해는 노고단에서 구경했던 것보다 못하였다. 노고단에서처럼 운평선이 고르지 못한 것이다. 일행은 마치 구름 속을 걷고 있는 듯싶었다. 다음 숙영지를 벽소령으로 정하고, 아침 먹고 담배 한 대 피울 여유도 없이 어둑어둑해서 반야봉을 출발했다.
해가 솟아오르자, 산허리를 휘어감은 구름은 창가에 성에가 녹아내리듯 서서히 벗겨졌다. 일행은 거대한 생명체 위를 경건한 마음으로 걸었다. 그 경건한 마음에는 알 수 없는 공포 같은 것도 숨어 있었다.
지리산에는 모든 것들이 다 살아 있었다. 그 거대한 생명체 안에서 나무도 꽃들도, 바람까지도 숨을 쉬고 있었다. 때로는 하늘에서도 경건한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지금껏 사랑과 미움이 쾨쾨한 냄새를 피우며 썩고 있는 도시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에 대해 그저 무의미한 주검 같은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사무실의 창 밖으로 내어다 보이는 무등산도 한갓 무덤처럼 공허하게 생각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리산에 올라와서야 비로소, 산은 거대한 생명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꽃들도, 샘물도, 일출과 낙조 때 붉게 물드는 바위들까지도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그 거대한 생명체 앞에서 내 삶은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더욱이 그 무기력한 삶은 순간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산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다.
미스 현은 반야봉을 내려가면서까지 입술에 루우즈를 발랐다. 보아줄 사람들도 없는 산에 와서까지 입술에 고추장을 바르는 그 천덕스러움이 이상하게도 꽃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반야봉을 출발하편서 박 판돌이가 미스 현에게 농담조로 뚜벅 물었다.
"늙은 말이 콩 먹겠다고 덤벼들지 않던?"
"고건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일세!"
박 영감이 웃으면서 말했다.
"네년 얼굴 본께 수상쩍다?"
박 판돌이가 미스 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일행은 미스 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하고 귀를 종긋거렸다
"맘대로덜 생각해요!"
미스 현은 입을 뚱하게 내밀며 말했다.
"아매도 어젯밤 영감님 텐트에서 무신 일이 있었던 긋 같은디......"
박 판돌이 웃으면서 박 영감을 돌아다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주머니칼로 실팍한 전나무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끝을 날캄하게 깎으면서 걸었다. 그 칼은 번쩍번쩍 햇살들을 쪼개 날렸다, 그 끝이 날캄한 작대기를 만지작거리다가 허공을 향해 푹 찔렀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대창을 들이대며 아버지를 끌고 나가던 날 밤과도 같았다. 날캄한 작대기를 허공에 대고 푹 찌른 것처럼 그렇게 대창으로 아버지를 찔러 죽였을 것이었다.
박 판돌은 어젯밤의 일은 깨끗하게 잊은 듯 미스 현을 놀려대고 끝이 날캄한 작대기로 허공을 찌르면서 히죽히죽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서 나올 때 어머니가 몇 번이고 당부를 하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 어머니의 그 말을 들었을 때 가볍게 웃어넘기고 말았었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그 말이 그렇게 새삼스러워질 수가 없었다.
"바득바득 고향엘 가겠다니 헐 수 없겠구나. 너 그기 가서도 판돌이 놈 조심혀라. 산에 올라갈 때도 그놈 조심혀야 된다, 그 놈은 사람을 여럿 죽인 놈이니께 ! 사람을 한번 죽여 본다치면 또 죽이고 싶어지는 법이란다. 무엇하면 지서에서 순경이라도 데리고 같이 가거라."
나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정말 박 판돌을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는 예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때때로 무섭게 맞아 들어가는 수가 있다. 나는 그런 것을 여러 차례 경험을 했다. 어젯밤만 해도 그렇다. 처음 박 판돌이와 같은 텐트에 들게 되었을 때도 섬칫한 예감이 있었던 것이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박 판돌이와 나란히 걷지 않으려고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가 내 뒤에 바짝 붙어 따를 때마다, 나는 삼십 년 전 아버지처럼 박 판돌에게 끌려가고 있는 듯한 무서운 착각에 결박당하는 것이었다. 그가 뒤에서 그 날캄한 작대기로 나를 푹 찔러버릴 것만 같아 섬칫섬칫 혈관의 피돌기가 욱하고 곤두섰다. 거칠은 그의 발자국 소리는 내 심장을 계속해서 난타해 왔다. 뒤통수를 때리고 엉덩이를 걷어찰 것만 같은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등 뒤에 느낄 때마다 후닥딱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으며, 수통마개를 뽑아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하고 멈칫멈칫 그를 앞세워 보내곤 했다. 그런 내 나약함을 눈치채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좀처럼 내 앞에 서려 하지 않고 자꾸만 미미적거리며 뒤처졌다,
반야봉을 내려왔을 땐 벌써 해가 머리 위에 덩실 솟아 있었다. 물통은 점점 가벼워졌다. 어제 임걸령에서 채운 것으로 저녁과 아침밥을 지어먹었기 때문에 거진 바닥이 나 있었다. 햇살들이 뜨겁게 쏟아져 내리자 자꾸만 목이 탔다. 그러나 반야봉에서 연하천까지의 십이 킬로미터 지점 안에는 샘이 없기 때문에 물을 아껴 겨우 목을 축일 정도만 마셨다.
점심을 연하천에서 먹을 계획이었으나, 점심때까지 잘해야 토끼봉에 당도하게 될 것 같았다.
놈아 놈아 처남놈아
느그 누이 날 마다허고
치마폭 뜯어 바랑 짊어지고
순천 송광사 마다허고
구례 화엄사로
신중노릇을 갔구나아
어젯밤의 반야봉에서 장타령을 불러 일행을 웃겼던 곰센 양반이 갑자기 육자배기를 뽑았다. 최씨 곰센 영감은 가끔 흥이 나면 이렇게 노랫가락을 뽑아대곤 하는 것이었는데, 예비군복 차림의 젊은 인부는 화엄사에서 예까지 오는 동안 말 한 마디 없었다. 그는 묻는 말에만 대답을 했다. 박 영감의 말로는 그는 좀 정신이 모자란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별로 눈에 띄게 모자라 보이지는 않았다. 워낙 말수가 적고 붙임성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신이상자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반야봉에서 출발할 때, 박 영감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젊은 인부를 관찰해 보았던 것이다. 나이로 치면 나보다 열두서너 살 아래로 보였다.
일행이 반야봉에서 내려와 날나리봉 가까이 왔을 때, 한 떼의 등반객들과 만났다. 한 이십 명쯤 되어 보이는 그들 등반객들은 임걸령에서 자고 새벽에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얼마 뒤에 박 판돌은 큰 독사 한 마리를 잡아 가지고 왔다. 그는 칡넝쿨 껍질로 홀랑이를 만들어, 독사의 목을 걸어 작대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아 들고 휘파람을 불며 나타났다. 뱀은 작대기를 칭칭 감고 꾸물럭거렸다.
"박 검사 기분이 어쩌여!"
잠시 땀을 식히고 서 있던 박 영감이 물었다.
"좋습니다."
"산에 올라오면 마음이 투욱 티여 ! 산에서야 미운 사람이 없재!"
나는 박 영감의 말에 피식 웃었다. 기실 나는 세석평전이 가까워 올수록 박 판돌에 대한 증오감은 차돌처럼 반들거리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나는 박 판돌이가 XX사료공장 사장이 되기까지의 헌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한 그의 온갖 약점들을 들추어내려고 얼마나 끈질기게 파고들었는지 몰랐다. 대꼬챙이로 두엄자리 헤집듯 그의 과거를 까발릴 때마다, 박 판돌의 약점은 줄레줄레 따라나왔다. 공비토벌이 끝나자, 박 판돌은 지리산 벌목장에서 일을 했다. 그때야 뭐, 하다못해 소방서 차까지 동원해서 소위 후생 사업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지리산을 깡그리 벗겨먹던 시절이니까, 도벌(盜伐)이라는 말 자체도 없던 때였다. 그는 벌목장에서 인부 노릇만 하기가 억울하다는 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톱과 도끼를 들고 개업을 시작했다. 네것 내것 없이 마구 산을 벗겨먹는 세상인데, 주는 일당이나 받고 남의 일 해주기가 억울했던 것이었다,
산에 올라가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찍어 내리면 그게 바로 돈이 되었다. 낮이면 산에 올라가 아름드리 소나무를 찍어 내리고, 밤이면 읍에까지 지어 날랐다. 섬진강 변에 자리를 잡고 집덩이처럼 장작을 쌓아올려 본격적으로 나무 장사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장작은 쌓아 놓기가 바르게 후생 사업 하는 트럭들이 실어 갔다.
어수선한 육이오 뒤끝이 정리되자 나라에서는 뒤 늦게야 도벌을 단속했다. 그러나 말이 단속이지, 차떼기로 나무를 실어내는 관이라, 박 판돌이 나무 장사 하는 데는 아무런 계약도 없었다. 그는 한 오 년 동안 지리산에서 나무를 찍어내려 재미를 보았으며, 그 돈으로 버스 정류장 앞에 가게를 샀다. 색시를 얻어 술집을 냈다. 처음으로 버스가 다니기 시작할 무렵이라
술장사는 잘 되었다. 겉으로는 주조장 술을 갖다 파는 척했으나, 밀주를 빚어 팔았다. 밀주를 빚어 술장사가 잘될수록 그의 장사 수완은 놀랍도록 비약했다. 솔매 마을에서 머슴을 살면서 지게질이나 하던 그가, 육이오가 터진 후로 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언제나 사귐성 없이 뚱한 성격인 그가, 술장사를 하면서부터는 붙임성도 좋아졌고, 술 한 잔 들어가면 심장이 훗훗해선 곧잘 엄포를 쏘기도 했다. 육이오 때 사람을 죽인 뒤, 그의 간 덩어리가 커진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오 년 술장사를 해서 너끈하게 번 돈으로 여관을 샀다. 술집을 때려치우고 여관업에 손을 댔다. 국립 공원이 된 지리산을 찾아오는 도회지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면서 여관방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여관주인이 된 박 판돌은 읍에서 유지 행세를 했다. 아들놈이 다닌 국민학교의 기성회 이사가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군 농협의 참사 감투를 쓰게 되었다. 그는 명함을 찍어 주머니에 넣고 군이며 경찰서 출입을 하기 시작했다. 자유당에 입당까지 했으며, 국회의원 선거 때 자유당 후보를 적극 지지, 앞장을 서서 헐근거리며 뛰었다. 천성이 남의 일 맡아 하기를 좋아하던 그는, 선거운동 때, 자기 일 제쳐두고 열심히 뛰어준 것이었다. 그가 밀어준 후보가 당선이 되자, 지구당의 주요멤버가 되었다. 군 농협참사, XX국민학교 육성회 이사, 명함만 가지고는 군수나 경찰서장을 만나기가 약간은 저자세였던 박 판돌이가, 당의 주요 멤버가 되면서부터는, 큼큼 헛기침 토해가며 군수, 경찰서장실을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그의 명함이 다채로와졌다.
XX국민학교 육성회장, XX농협 참사, XX당 관리장, 지리산 국립 공원 개발촉진위원회 이사, 구례군 숙박협회장 등 그만하면 어연번듯한 유지가 된 것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이, 삼십 년 사이에 그는, 강산이 세 번 변할 정도가 아닌 정말 엄청나게 둔갑해버린 것이었다. 솔매 마을 사람들은 읍에서 그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농협 참사 자리에 있는 것을 기화로 농협 돈을 빼낼 궁리를 했다. 담당 주사를 하룻밤 푹 구워삶고 촌지(寸志)까지 집어넣어 준 그는, 육이오 후로 이미 폐답(廢畓)이 다 되어버린 솔매 마을의 주인 없는 땅을 저당 잡히고 거금을 대출 받았다. 저리(低利) 융자를 받은 그 돈으로 사부 이자 놀이를 했다. 농협에서 대출을 받은 돈으로 한참 성행한 서민 금융의 간판까지 달고 본격적인 고리 대금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고리 대금으로 재미를 본 그는 서민 금융의 간판을 떼고 다시 관공서에 자재(資材)납품을 시작했다. XX당 간부라는 명함 때문에 그의 납품은 수의 계약만으로도 탈이 없었다. 공사 하청까지 맡았다. 조그만 하수도 공사에서, 자갈을 까는 일, 청사 개축 등 하청 맡은 수입도 대단했다.
그렁저렁 그는 돈이 눈사람 굴리듯 불어났으며 일 년마다 한두 개씩의 직함도 늘어났다. 몇 년 전 그는 우연히 저녁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군수한테서 밤나무 묘목을 해보라는 귀띔을 받았다. 손해가 나면 군수 자신이 배상해 주겠다는 다짐까지 받은 박 판돌은 염려 푹 놓고 대규모로 밤나무 묘목 사업을 착수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실수 심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그의 밤나무 묘목은 몽땅 군에 납품이 되었다. 몇 달 사이에 엄청난 떼돈을 벌었다. 돈만 번 것이 아니고 표창까지 받았다. 그는 XX지도자대회에서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는 성공 사례를 발표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로 가축사료통장 건립의 우선 순위 티켓을 얻은 것이다, XX사료공장을 세우기 위해 그는 자기 자금의 일부를 군 농협에서 융자를 받았다. 역시 몇 년 전에 폐답이 되어버린 지번을 담보로 일반 대출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기는 했으나 시골에서 가축사료공장을 움직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애로가 뒤따랐다. 우선 미국에서 기침하면 일본선 재채기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감기를 앓게 된다는 푼수로, 미국의 잉여농산물 무상공급이 막히자, 지리산 밑 조그마한 사료공장에까지 타격이 왔다. 처음엔 우쭐대며 시작한 공장이 시원찮은 것 같아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더욱이 공장 안에서 나이 어린 여직공과의 스캔들도 있고 해서 문을 걸어 잠근 대신. 지리산 철쭉꽃 나무 수출을 시작한 것이 뜻밖에 횡재를 안겨다 주었다. 그는 차라리 사료 공장을 걷어치우고 본격적으로 철쭉꽃나무 수출을 한 것이었다.
나는 박 판돌의 과거를 하나하나 담배씨 까듯 들추어내서 철저하게 법망(法網)의 올가미를 씌울 생각을 했다. 빈틈없이 법조항을 끄집어 대입시켜 보면서 그의 형량을 헤아려 보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철저하게 보복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우선, 박 판돌이가 두 차례에 걸쳐 농협에서 일반 대출을 받으면서, 이미 인멸(湮滅)되어버린 논의 지번(地番)을 임의로 조작한 사문서(私文書)위조(僞造) 하나만 가지고도 최소한 이 년의 징역을 선고받을 수 있게 할 것 같았다.
또 하나는 그의 공장에서 일해 온 나이 어린 소녀를 능욕한 혐의였다.
지관 박 영감은 나와 박 판돌이 사이에 얽힌 복잡한 원한 관계를 알고, 또 아무래도 내가 박 판돌이에게 무슨 보복을 하지 않을까 싶어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때문에 박 영감은 내게 유별나게 의미심장한 말을 해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에 올라와 보면, 미움은 한갓 바람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여!"
박 영감은 팽괭한 시선으로 박 판돌의 뒤통수를 꼬느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허지만 ,사람이 평생을 산에서만 살 수는 없을 거 아닙니까? 영감님은 늘 산에서 사시니까 미움 같은 거야 한줌 바람같이 생각되어질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미움과 사랑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걸요!"
내 말에 박 영감은 대꾸를 못했다.
"영감님 같다면 법이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법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로 만원입니다."
"허긴 그렇겠지. 그러니께 나는 도회지에서는 단 하루도 못살끼라!"
박 영감은 혼잣말처럼 말하고 나서 훌쩍 일행을 앞질러 뛰어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다보며 걷는 나는 역시 박 영감은 지리산에서만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행은 오후 늦게야 연하천에 도착했다. 수통이 바닥나 두 시간 이상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심한 갈증으로 허덕이다가, 연하천에 도착해서야 배가 랭랭하도록 샘물을 .들이마셨다. 모두들 잔뜩 샘물을 퍼마신 다음, 옴쑥한 분지에 자리잡은 운봉 무덤에 앉아서 쉬었다. 다른 등산객들은 연하천에서 야영을 하기 위해 A텐트들을 치기에 바빴다.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조금 넘어 있었다. 일행은 데쳐 놓은 산나물처럼 흐물흐물 지쳐 있었다. 토끼봉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소녀처럼 깡충깡충 거리던 미스 현도 완전히 지쳐버렸는지, 샘물을 들이마신 후 운봉 무덤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녀는 철쭉 꽃다발마저도 팽개쳐 버렸다. 야영 계획 지점은, 연하천에서도 육 킬로미터나 남아 있는 벽소령. 유명한 형제바위와 영하굴은 삼각고지를 조금 지나서 있다. 일행이 지쳐 있기는 하지만 해가 질 때까지 세 시간 동안을 계속해서 강행군한다면 어두워지기 전에 그날 목표인 벽소령에 닿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저 여기서 자고 가겠어요!"
미스 현이 박 판돌에게 매달리는 시선을 하고 말했다. 박 판돌은 나를 보았다.
"어차피 세석평전꺼정 가자먼 하룻밤 더 야영을 혀야 할 테니께. 연하천에서 텐트를 치는게 좋겠구만!"
결국 박 영감의 말대로 연하천에 야영 텐트를 치기로 하자 여지껏 운봉 무덤에 두 발 쭉 뻗고 죽어가는 모습으로 누워 있던 미스 현은 스프링처럼 불컥 튀어 일어나 앉더니 저녁밥 준비를 했다.
장엄한 지리산의 정기를 모아
섬진강 푸른 정열 가슴에 안고
하늘 땅 호연의기 기르고 닦아
보람된 인생의 길 나도 가련다
야호-산울림 이 메아리치면
새희망 하늘 높이 퍼져나간다
야호 야호 지리산악회
한 떼의 등반객들이 깃발을 흔들고 연하천에 가까이 오면서 합창을 했다. 지리산을 지키는 연하반 등반대원들이 연하반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박 영감이 설명을 해주었다. 연하반 등반대원들이 연하천에 왔을 때, 그들은 박 영감과 일일이 알은 체를 했다. 박 영감도 젊었을 땐 연하반 등반대원이었다고 자랑삼아 말하면서 늙은이답지 않게 버릇처럼 어깨를 흔들어 댔다.
연하반 등반대원 이십여 명은 연하천에서 잠깐 쉬었다가 곧 출발했다. 철쭉제 행사 때문에 다른 등반대원들보다 먼저 세석평전에 도착하여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밤 열 시까지는 계속 강행군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암야행인 것이다.
연하반 등반대가 떠나자 곧 낙조가 깔려 오기 시작했다. 지리산의 낙조는 어디서 보든 한결같이 거인의 임종처럼 처절했다.
모두들 처절할이만큼 숙연한 낙조에 파묻혀, 저마다의 생각들을 조용히 굴리면서 잠깐 동안이나마, 인생의 무상함이며 하늘과 산의 거대한 품안에 안긴 가슴 뿌듯해 옴을 감개무량해하고 있는 순간에도, 박 판돌만은 담배씨만큼도 엄숙한 표정이 아닌 추잡스런 말씨로 미스 현을 놀려댔다.
나는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렇게 마음에 거슬릴 수가 없었다. 자기의 죄를 털끝만큼도 뉘우침 없이 뻔삔스럽기가 금관자(金貫子) 서슬에 큰 기침하는 망나니 같고, 제 발로 포도청에 가는 도둑 같고, 뒷집 짓고 앞집 뜯어내라 하는 놈 같아서, 고개 들어 얼굴을 바로 쳐다보기조차 싫었다.
내 마음이 더욱 휘어지고 꼬부라진 것은 그가 흘끔흘끔 곁눈질로 나를 흘겨보며 미스 현과 장난질을 할 때였다. 그는 아까부터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은 채 귓속말로 속닥거리며 히히덕거리는 것이었는데, 그가 미스 현의 귀에 대고 알아들을 수 없게 속닥거릴 때마다, 그들은 동시에 내 쪽을 힐끔힐끔 돌려보고 나서 깔깔대며 웃곤 했다.
박 판돌의 웃음은 장마철 돌담 무너지는 소리처럼 왁살스럽게 들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거침없이 뻔뻔스런 태도에 압도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사람 팔자 시간 문제요, 부귀(富貴)빈천(貧賤)이 물레바퀴 돌 듯한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한갓 머슴이었던 그에게 무시를 당한 것 같아서, 개미에 불알 물린 쓰렁쓰렁한 기분으로 참고 견뎌냈다. 아버지의 유골을 찾을 때까지는 목줄 뜨겁도록 끓어오르는 온갖 모욕도 참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날 밤 A텐트에 혼자 들었다. 박 판돌이가 어기적거리며 텐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판돌씨, 오늘 밤엔 혼자 자고 싶으니 다른 텐트로 가시죠."
하고 쫓아내어 버렸다. 박 판돌이 그 말에 기분이 상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박 판돌이는 두말없이 뒤틀린 얼굴을 하고 추적추적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산정의 밤에, 혼자 텐트 안에 드러누워 있자니 목줄을 조르는 듯한 무섬증과 야릇한 적막함이 는짓는짓 피어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텐트 맞은편에 남녀 대학생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빙 둘러앉아 기타를 튕기며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나 혼자만이 높은 산정에 뎅그렇게 누워서 깊은 땅속으로 잦아 들어가고 있는 듯한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밖에 나가서 소주를 몇 잔 털어 넣었지만 목구멍만 훗훗해 왔으며 취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들치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 술병을 찾으려고 텐트 밖으로 나갔을 때까지만 해도 하늘엔 유리구슬 같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빗방울이 들쳤다. 해발 일천오백 미터 이상의 지리산에서는 호랑이 장가가는 날처럼 쨍한 하늘이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와장창 무너져 내리며 빗방울이 쏟아진다고는 하지만, 이건 이만 저만한 변덕이 아닌 것이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듯싶었다. 처음엔 텐트에 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느린 진양조 가락의 장구 소리 같았는데 잠시 후에는 휘모리 가락의 꽹과리 소리로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비가 퍼붓자 모닥불을 피우고 놀던 대학생들도 후두득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비가 그쳐 얼쑹얼쑹 잠이 들려는데, 누구인가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 왔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떴을 때, 걷어올린 천막 사이로 별이 깜박 빛났다.
"누구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지르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저예요!"
처음엔 박 판돌이가 기어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얼마나 놀랬었는지 몰랐다. 여자 목소리에 팔딱거리던 심장이 착 가라앉았다.
"잠은 안 자고 웬일야?"
"여기서 자라고 해서요,,,,,,"
"뭐라고? 누가 그래?"
"박 사장님이요!"
그녀는 대답을 하고 나서 길게 하품을 쏟으며 내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 사람! 왜 하필이면,,,,,,"
나는 짜증스럽게 두런거렸다. 미스 현은 두런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 돌아누워서는 두 번째 하품을 쩝쩝 입맛까지 다시며 삼켰다. 옆에 바짝 다가서 누워 있는 그녀에게서 툭툭 쏘는 듯한 역한 화장냄새가 났다.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좀 깊이 들이마시면 비리척지근한 여자 냄새가 심장을 간지럽혀 왔다. 그녀는 깍지낀 두 팔로 목덜미를 끌어안고 세우면서 다리를 가슴팍에 바짝 오그린 채 옴쭉달싹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였다. 미스 현과 한 텐트 안에서 잠을 잤다면 일행들에게 오해를 받을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아버지 유해를 모시러 가는 처지에 그런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박 판돌이가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미스 현을 들여보낸 것인지도 모르지 않은가,
나는 여자에 대해서는 백지에 가까운 상식밖에 가지고 있질 못했다. 느지막이까지 고시 공부에 매달렸기 때문에 여자를 알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정을 잃은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로, 비교적 이른 편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순전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엉겁결에 당한 일이어서 별로 심각하지도 못했었다. 중학 3학년 때, 사십이 넘는 무당 과부한테 동정을 빼앗긴 것이었다. 그때 우리 모자는 무등산 밑 소태실이라는 옴딱지 같은 마을의 무당집 작은방 살이를 했었다. 무당의 꽹과리 소리에 신경이 갈가리 흩어져 공부하는 데 지장이 있으니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으나, 어머니는 한사코 말을 들어주지 않았었다. 우선 방 값을 안 내고 거저 사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당의 늙은 시어머니와, 갓 열 살 난 딸 하나로 식구가 단촐하여, 꽹과리 소리만 안 낸다면 절간처럼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담양 죽세품을 떼어 서울에다 까는 도부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서울 장사 나갔다 하면 열흘도 더 넘어야 돌아오곤 했었다. 나 혼자 죽식간에 끓여먹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여름이었던 것 같았다.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없을 만큼 휑한 살림이어서 언제나 방문을 훨쩍 열어놓고 잤었다. 그날 밤도 새벽 한 시까지 공부를 하고 곤하게 곯아떨어졌다. 잠결에 숨쉬기가 답답하여 눈을 떠보았더니 큰방 무당이 훌훌 옷을 벗은 알몸으로 내 배 위에 올라타 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내 팬티를 무릎 아래로 내려놓고 아직 끝이 벌어지지도 않은 나의 그것을 두 손으로 뿌리까지 뽑아버릴 듯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어린 마음에도 부끄럽기도 하고 무당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기도 하여 그냥 참고 있었다. 무당은 나의 놀라는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인가 숨가쁘게 무당굿 사설 외듯.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로 조잘거리는 것 같았으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서울에서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거의 매일 밤 무당에게 시달림을 당했었다. 뭐가 뭔지 몰랐던 나는 새끼 항문이 아르르 하고 무지근한 것을 느꼈을 뿐인데, 며칠 밤 시달리고 나니 코피가 펑펑 쏟아졌다. 어머니가 돌아오기가 무섭게 바득바득 어머니를 졸라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버렸다. 학교가 너무 멀다는 핑계로 학교 근처로 옮긴 것이었다.
혼외 여자 관계라면 딱 그때 무당과의 그 일뿐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학생 기족 카아드에 적어낸 것처럼, 취미가 고독(孤獨)인 거였다. 바둑, 장기, 화투, 당구는 고사하고 스포츠도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언제 익힐 틈이 없었다. 생활이 몰취미인 것과 같이, 됨됨이도 좋게 말해서 털 뽑아 제 구멍에 박을 정도로 꼰질꼰질한 편이고 나쁘게 말해서 분명히, 세상 모르게 삭막한 느낌이 드는 어딘가 덜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가끔 술자리를 같이한 동창녀석들이, 세상의 깊고 얕음을 그렇게 가재 물 짐작할 만큼도 몰라 가지고 어떻게 사람 마음속에 깊숙이 가려진 선과 악을 가려낼 수가 있겠느냐고 핀잔이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지금의 상태가 좋았다, 검사가 되려고 한 것은 비리를 밝혀내고 선과 악을 가려내는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박 판돌이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검사되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다만 박 판돌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런 복수심은 한여름 태양처럼, 대장간의 벌겋게 달은 시우쇠처럼 더욱 뜨겁게 이글거렸었다.
옆에 누워 있는 미스 현이 캑캑 가래를 삼키는 기침을 했다. 빗소리가 뚝 그치자 이내 달빛이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미스 현을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텐트 옆에서 멎었다. 미스 현이 누워 있는 쪽의 텐트 자락이 조금씩 걷어 올려졌다. 나직한 목소리로 미스 현을 부르고 있었다. 박 판돌이었다. 미스 현이 푸스스 일어나 힐끔 이쪽을 한번 돌아다보고 나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박 판돌이가 그녀를 밖으로 불러 내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개운찮은 기분이었다.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 와서 살짜기 불러내간 소위가 미웠다, 아마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꿍꿍이 수작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나간 쪽으로 다가가서 텐트 자락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박 판돌이와 미스 현은 고사목 아래 풀섶 위에 꽉 부둥켜 안고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얼싸안고 노닥거리는 것 같더니, 미스 현이 풀섶에 눕고 박 판돌이가 엉거주춤 텐트 쪽으로 엉덩이를 치켜들고 바지를 내린 다음, 여자를 덮쳤다. 달빛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뚜렷하게 보였다, 그들의 숨소리까지도 들려오는 듯싶었다. 나는 텐트 자락 사이로 시선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그들을 지켜보았다. 야릇한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 혈관의 움직임이 발동기 소리처럼 발라지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현듯 중학교 삼 학년 때 무당에게 덮침을 당했던 순간이 떠오르면서 그때의 어리둥절했던 감정이 이제서야 숨가쁘게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엔 무당이 무섭게 느껴졌었는데, 그 일이 며칠 밤째 계속되는 동안, 섬찌근한 무섬증이 가라앉으면서 발가락 끝이 간지러운 만큼의 야릇한 흥분 속에 들떠 있기도 했었던 것 같았었다. 그러나 그런 야릇한 흥분은 잠깐이었다. 낮에 그녀가 고깔을 쓰고 알록달록한 무당옷을 입고, 벌렁벌렁 춤을 추고, 꽹과리 두들기는 것을 보면 와삭 무섬증이 되살아나곤 했었다.
한 삼십 분쯤 지나서 미스 현이 살금살금 기어들어 왔다. 그녀가 텐트 안으로 들어설 때,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앉아서 살금살금 기어 들어오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자리에 누우려다 말고 희끄무레한 어둠 폭에서 돌부처처럼 앉아서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미스 현이 슬쩍 빠져나가서 박 판돌이와 관계를 하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던 내 눈에 쾌잣자락 너울거리는 무당이 보였다. 미스 현이 무당으로 보인 것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면서부터 무당한테 당했던 일이 온몸이 근질거리도록 억울하고 몸에 뱀에 물린 흉터가 있는 것처럼 꺼림칙하게 생각되어질 때마다 언젠가는 그 무당을 찾아가서 그때의 일을 보상받고 싶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음(訃音)에 접했을 땐 온몸이 가려워지는 구토증을 느꼈었다. 분했었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미스 현에게로 달려들어 와락 그녀의 어깨를 찍어 잡아 바로 눕혔다. 그녀는 놀란 토끼새끼처럼 두 어깨를 움츠렸다.
다짜고짜로 미스 현의 지퍼를 끌어내리고 즈봉을 벗겼다. 그리고는 조금 전 박 판돌이처럼 엉덩이를 치켜올려 바지를 무릎 아래로 내린 다음 그녀의 배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녀는 내가 하는 대로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처음부터 기분이 나빴던 것이었다. 다짜고짜로 그녀를 덮쳐 누른 그 순간, 창자 속의 내용물들이 발칵 쏟아질 것 같은 역한 감정이었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서 그 짓을 한다지만, 돌연한 나의 행위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일을 끝내고 고함을 질러 그녀를 텐트 밖으로 쫓아버린 다음에까지도 역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와 소주병 나팔을 불었다. 그렇게 기분 나쁜 순간은 일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후회막급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의 부끄러움에 마음 둘 바를 몰라 해 하였다.
불결한 몸과 마음으로 아버지를 대할 생각을 하니 천하에 없는 불효자식이 된 자신이 미울 따름이었다. 도깨비에 흘린 기분이었다. 그럴수록에 애시당초 그녀를 내 텐트에 집어넣었다가 나 보란 듯 끌고 나가 그 짓을 한 박 판돌이와, 비리척지근한 여자 냄새를 솔솔 피우며 나를 충동질한 미스 현에 대한 구역질하는 미움이 겹겹이 쌓였다. 평소에 어머니 외에는 여자에게서 인격이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했으려니와, 또 인격체로 대우를 해본 일도 없는 나로서는, 미스 현에게서 무척 추한 동물의 징그러움을 느꼈을 뿐이었으며. 그녀에 대한 순간적인 호기심은 그 징그러운 벌레를 발로 짓밟아 으껴 죽이는 살생의 쾌감을 맛보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밤에 보아도 낫자루, 낮에 보아도 밤나무라고, 그녀의 본색이 뚜렷하거늘, 지금껏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발가락의 티눈만큼도 안 여겨 온 내가 이 무슨 실수냐 싶어 천 번 만 번 발등을 찍고도 남을 만큼 후회를 한들 이미 엎지른 물인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 일로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가슴이 숯가마 타듯 했다.
네 째 날
날카로운 아침 햇살이 잠든 나무와 풀잎들을 들쑤셔 일깨을 무렵에야 눈을 뜬 나는 나무껍질처럼 꺼칠꺼칠해진 얼굴을 문지르며 텐트 밖으로 나갔다. 간밤에 밤새 뒤척이다가, 늦잠을 잤기 때문에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일행은, 아침을 먹기 위해 빙 둘러앉았다. 다른 등반대원들은 이미 연하천을 떠나버렸으며, 내가 자고 나온 것을 제외한 다른 두 사람의 텐트도 철거되어 있었다.
"고단하셨든 모양이구만. 해가 엉뎅이에 불을 질러서야 일어나신 걸 보니!"
지관 박 영감이 앉을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박 영감의 말에 심장이 후끈거리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새삼스럽게, 어젯밤 미스 현과의 일이 떠올라, 주걱으로 그릇에 밥을 퍼담고 있는 그녀를 힐끔 훔쳐보았다. 그녀는 해실해실 웃으며 밥그릇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어젯밤 일이 생각나자, 다시 구토증이 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세석평전에 늦게야 도착헐 것이니께, 서두를 것이 없어! 그래서 늦잠을 자도 깨우지 않은 기야! "
박 영감이 밥숟갈을 들며 하는 말이다. 하기야 박영감의 말마따나 어차피 세석평전에는 해질 무렵에야 도착할 것이므로, 밤에 유해를 파내지 않을 바에야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어젯밤의 행위에 대해 여러 사람들 앞에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은 부끄러움 때문에 마음 가늠할 바를 몰라했다. 얼핏 박 판돌을 바라보았더니 그는 언제나처럼 능글맞고 뻔뻔스러운 얼굴이었다.
간밤에 빗방울이 들이친 때문인지, 운해는 늦도록까지 두껍게 펼쳐져 있었다. 일행은 출발하기 전에 지리산에서 물맛이 가장 좋다는 연하천 샘물로 물통을 가득 채웠다.
연하천에서 너무 늦게 출발한 때문에 삼각 고지를 조금 지나자 정오가 되었다. 삼각 고지에서 잠깐 쉬어 담배 한 대 피우고 길을 재촉했다. 형제 바위를 뒤로 하고 연하굴을 지났다. 일행은 벽소령 벱실 샘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 느지막에 연하천을 출발했지만 점심때까지 육 킬로미터나 강행군을 한 탓으로, 벱실 샘에서 점심을 먹을 수가 있었다. 벱실 샘이 있는 벽소령은 경남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서 남쪽으로 일백오십 미터쯤 내려가면, 텐트를 치기 좋은 평평한 분지에 손바닥만한 샘이 있다. 처음 이 샘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잘해야 몇 모금 될 것 같지 않게 찌적찌적해 보이지만 자꾸만 퍼내도 그만그만한 물이 언제나 고여 있기 마련이다. 샘의 크기는 보잘 것 없으나 너댓 사람이 물을 퍼서 목욕을 할 만큼 자꾸만 솟는데, 결코 넘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벽소령에서 사 킬로미터쯤 가면 상덕평과 선비 샘이 있고, 다시 이곳에서 삼 킬로미터쯤 가면 목적지인 세석평전에 이른다. 세석평전에서 천왕봉까지는 십 킬로미터를 더 가야 한다. 지관 박 영감은 기왕 세석평전까지 온 길에, 천왕봉에 올라가서 신선 놀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함씨를 꼭 만나고 가야겠다면서, 내가 같이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향을 떠왔다.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에까지 올라갈지 어떨지는 일단 세석평전에 가서 아버지 유해를 찾은 다음에 결정해야 뒬 것 같기에, 확실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초탈한 빪을 이어가고 있는 신선 함씨를 만나고 싶기도 했다. 온갖 욕심, 미움, 다 잊고 탈진(脫盡) 습기(習氣)한 그의 삶을 가까이서 헤아려 보고 싶었다.
박 판돌은 미스 현과 같이 걸으면서, 이따금씩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 볼 때마다 그는 쿡쿡 웃었다. 그녀도 푸실푸실 따라 웃곤 했는데, 그 웃음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아서 신경에 거슬렸다. 어쩌면 미스 현이 어젯밤 나와의 관계를 박 판돌에게 죄 꼬여 바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더욱 마음 고정할 바 없이 신경이 날카로와졌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웃고 있을까. 마음이 답답해서 하늘을 보았다. 백자 파편들 같은 구름 조각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찢어진 걸레처럼 보였다. 고 걸레조각 같은 구름들은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벌써부터 닥쳐 올 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늘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누구하고 같이 잘까. 박 판돌이가 잠든 사이에 나를 죽이려고 하지나 않을까. 미스 현은 또 누구하고 그 짓을 하게 될까. 내 머리는 심란해졌다. 잡다한 생각들을 털어 버리려고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어댔으나. 두려운 생각들은 더욱 뚜렷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하룻밤만 넘겨라, 나는 땀에 젖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박 판돌이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박 판돌이가 또 힐끔 뒤를 돌아봤다. 용기를 내어 손짓으로 그를 부르자 곁으로 달려왔다.
"우리 아버지 말요!"
나는 일단 박 판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의 표정을 살폈는데, 순간 박 판돌이의 얼굴에는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가 얼핏 흘렀다.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어땠소?"
박 판돌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는 말미를 얻기 위해 궁색스럽게 캑캑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어땠소?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게 아뇨?"
"뭘요?"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순간 말요!"
나는 불쾌해서 신경질적으로 툭 쏘아붙였다.
"글쎄요."
"글쎄라니, 당신이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았지 않았소?"
"그래었지요."
"그때 어쨌냔 말요, 아버지가 숨을 거두실 때 마지막 남긴 이야기라든가."
"왜 말을 못하는 거요?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소? 왜 거 사람을 죽일 때, 상투적으로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묻지 않소? 그때 우리 아버진 무슨 말을 하셨느냐 이거요?"
"말씀이 계셨어요."
박 판돌은 억지로 그때의 실을 떠올리는 듯한 얼굴로 가느다랗게 실눈을 했다.
"무슨 말씀을요?"
"도련님헌티 꼭 전하라는 말씀이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었는데 ? "
"지리산 땜시 죽는다고요. 그러니께 도련님께서는 지리산에서 떠나시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지요."
어머니 말이, 아버지는 지리산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 아버진데, 지리산 때문에 죽으니 지리산에서 떠나라고 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늘 죽기 전에 천왕봉에 한번 올라가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었다고 했다, 육이오 전까지만 해도 지리산은 원시림이 하늘을 가려, 총을 가진 사냥꾼들도 천왕봉까지는 올라가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노인들 말이, 지리산 상봉인 천왕봉엔 하늘을 받치고 있는 둥근 기둥이 있으며, 때때로 하느님이 그곳에 내려와 노닐다가 가곤 한다고 했었다. 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그곳에 올라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하늘의 기둥이 받쳐 있는 천왕봉 가까이까지 끌려가서 억울하게 개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 개죽음의 길로 끌려가면서 평생을 그렇게도 올라가 보고 싶었던 천왕봉에 가까이 간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었을까.
아버지는 가보고 싶었던 천왕봉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을까, 나는 마치 삼십 년 전 주검의 길로 끌려갔던 아버지의 심정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듯 참담한 눈으로 갑사(甲紗) 치맛자락 같은 가볍고 엷은 구름조각이 걸려 있는 천왕봉 쪽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에 남기신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박 판돌을 바짝 따르며 불쑥 말했다.
"예?"
"그게 아니라요. 판돌씨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거 알고 있소."
"지가 왜 거짓말을?"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무슨 말을 남기신 줄 아시오?"
……"
"그건 억울하게 죽으니 꼭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겠죠. 쁘렇죠? "
박 판돌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판돌씨 ! "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박 판돌이가 섬찐 놀래 고개를 돌렸다.
"또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
"몇 번이고 다시 묻고 싶은 이야기지만, 왜 우리 아버지를 죽였소?"
"도련님도 참, 저는 절대로 안 죽였습니다."
"이러지 맙시다. "
"날벼락을 맞아 죽지요. 지가 어찌 어르신네를.……"
"허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
"왜 지 말을 안 믿습니까? 지는 안 죽였다니께요!"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님이 마지막 하신 말까지 다 알고 있지요?"
"그건 말입니다. 옆에서,,,,,,"
박 판돌은 말끝을 흐렸다,
"솔직하게 털어놓으시오."
"허허 참, 도련님도! 생사람 잡지 마십시요!"
그러면서 박 판돌은 미간을 찡등거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빨리들 안 오고 뭣혀!"
지관 박 영감이 억새풀이 중긋중긋 가린 펑퍼짐한 바위 등걸이에 앉아서 두 사람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쌌누, 원!"
두 사람 사이를 대강 눈치채고 있는 박 영감은, 처음 출발하던 날부터 그들의 행동에 유별나게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 날씨가 좋을지 모르겠군요 ! "
내가 박 영감에게 화제를 가꾸기 위해 물었다.
"좋다마다, 철쭉제 날에 날씨가 흐려본 적은 한 본도 없었으니께 빗방울이 들쳐도 잠깐이지."
박 영감은 바위 등걸에서 일어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왕봉에 살고 있다는 그 신선 말입니다."
내 말에 박 영감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높은 산꼭대기에서 혼자 살고 있답니까? "
"사람이 욕심만 없다면야 어이선들 혼자 못살까?"
"그래도 저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처자식을 버려두고 혼자만 신선처럼 산다는 거!"
"그 사람 말을 들어보면, 박 검사도 아마 산꼭대기서 혼자 살고 싶을 마음이 들 게야."
박 영감은 웃으면서 말했다. 누구를 대할 때이고 가슴 활짝 열어 젖히고, 조금도 거짓됨이 없이 시원스럽게 툭 터놓는 박 영감이 점점 좋아졌다. 처음 구례읍에서 인사를 나누었을 때, 그는 대뜸 아버지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면서 말을 놓겠다고 했었다.
"왜, 한번 만나보고 싶은가?"
"이해가 안 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쌕는 줄 모르는 함씨 같은 생각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 천국이 되겠지!"
"그렇다면 과학이고 문명이고 다 필요 없게 됩니다. 지금은 과학의 힘으로 인간이 달나라에 가는 세상 아닙니까."
"과학이고 문명이고 다 필요 없게 되면 그기 천국이야!"
"저, 영감님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겠군요. 우리는 각자에 주어진 멍에를 벗어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다, 귀찮다고 멍에를 벗고 천왕봉에 올라와서 산다면 세상은 전혀 의미가 없어집니다.……"
"나는 박작 검사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구먼!"
박 영감은 뒤를 돌아다보면서 또 한번 웃어 보였다.
태임 태임 청태임아
돈돈반만 나를 주라
다섯 잎은 비상을 사고
한 돈일랑 간장사서
기운차게나 달여서 먹고
천왕봉 높은 봉에
흔적 없이 죽어나감세
인부 최씨가 바지게를 받쳐놓고 풀섶 위에 앉아서 손으로 무릎까지 쳐가며 노랫가락을 뽑았다. 그는 노랫가락을 뽑다가 그들이 가까이 오자 어색하게 씩 웃었다.
"최씨 노랫가락 실력 알아줘야겠군요."
내가 최씨 옆에 앉으며 말했다. 박 영감도 따라 앉았다. 박 판돌이만이 왼손으로 뺌 꼬리를 잡아당기며 그냥 지나쳐 갔다.
"지 노랫가락 실력요? 한때는 알아주었습니다요. 장똘뱅이 시절에 배운 것들인디 인전 다 잊어뿌렀어요. 끼는 아마 안 가본 장 없을 낌니다. 그래도 그때가 질 좋았던 거 같여요."
그는 수통 마개를 뽑아 꿀꺽 물을 마시고 나서 손바닥으로 입언저리를 쓱 문질렀다.
"늙어서 이 고생이게. 아들이 없수?"
"자석놈 하나 있는 거 떡시루 엎어뿌렸구만유!"
"떡시루를 엎다뇨?……"
"자석 농사 망쳤다 이그죠. 자석 하나 있는 거, 계우 소학교 졸업허구, 집에서 한 오 년 아뭇소리 없이 처박혀 있드니 글씨. 못된 송아지 응덩이에 뿔 먼첨 난다고 소식도 없이 집을 뛰쳐나가삐렀다우!"
"소식이 없나요? "
."삼 년 전엔가, 서울 무신 철공소에서 메질을 헌다는 편지 한본 오고, 그 뒤는 뒈졌는지 살았는지!"
"배돌던 닭도 때가 되면 찾아 들어오는 벱여!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키드라고 그런 놈이 보잘 것 있는 기여!"
박 영감이 최씨를 위로하는 말을 해주었다.
"꼭 의붓애비한티 소 팔러 보낸 심정이다니께유!"
"염려 마세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돈 많이 벌어 돌아올 테니까요.……"
"내사 돈 많이 벌어 오는 거 바라지도 않어요. 묑이나 성해믄 그만이재."
"최씨 혹시 천왕봉에서 살고 싶은 생각 없어요."
내가 실실 웃으며 하는 말에 최씨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천왕봉에서요? 지가 왜 그기서 살아요?"
"집이고 처자식이고 다 잊어버리고 혼자 천왕봉에서 사시면 맘이 편하실 게 아닙니까?"
"그런 말씀 마셔요. 베린 자식이기는 하지만 우리 아들놈 기다리고 사는 재미가 으딘디요. 똥구먹 짝짝 찢어지게 가난허게는 살어도, 처자식을 버리다니요. 우리 같은 가난한 놈이라고 자식 사랑허는 정마저도 메말라 붙었간듸요? 다 그런대로 한 재미가 있답니다요."
최씨가 푸념처럼 말을 했다. 그는 내 말을 고깝게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영감님 들으셨죠?"
나는 박 영감을 보며 웃었다.
"어디 욕심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흔한 겐가!"
박 영감은 이렇게 말하면서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일행이 세석평전에 도착한 것은 뉘엿뉘엿 낙조가 물결쳐 오기 시작해서였다. 낙조가 자오록히 깔리자 이내 어둠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에. 세석평전 철쭉 꽃밭의 장관을 볼 수가 없었다. 일행은 낙조와 어둠이 철쭉꽃밭에서 피를 쏟으며 격전을 벌이듯 우쭐우쭐 쫓기고 밀려들어오는 것을 먼 발치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해발 일천육백팔십 미터의 두루 삼십 리다 되는 지리산 제일 공원지대 세석평전에 낙조가 퇴진하자 어둠만이 두껍고 단단하게 깔려 있었다. 여기저기 등반객들의 텐트에서 출렁이는 불빛들만이 별처럼 촘촘히 박혀 빛났다. 일행은 텐트 칠 곳을 찾았다. 화개 쪽으로 일 킬로미터쯤 더 내려가 음양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세석평전의 음양샘은 임걸샘, 벽골샘, 연하샘, 산◎샘과 더불어 지리산에서 이름난 샘이었다. 바위의 양쪽에서 음수(陰水)와 양수(陽水) 흘러 합한 샘물이라서 음양수라고도 부르며, 예로부터 아기를 못 낳은 부녀자들이나, 지리산 정기를 탄 큰 인물을 낳고자 하는 연인들이 이 샘물을 마시고, 샘 옆에 있는 석실(石室)에서 산신의 은혜를 입게 되면 소원성취 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봐 미스 현, 우리 음양수 한 잔씩 마시고 그 기분 살려서 떡이나 칠끄나? 지리산 정기타고 나오는 큰놈 하나 맹글게 말여!"
박 판돌이가 벌컥벌컥 샘물을 마시고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쓱 문지르며 하는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스 현도 두 손바닥으로 샘물을 움켜 홀짝홀짝 입에 털어 넣었다.
"미스 현아, 왜 대 말이 틀렸남? 기왕에 베린 몸, 자식 복이라도 탈라먼 나허고 한판 허는 기 어쩌겄나! "
박 판돌은 실실 웃으면서 미스 현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무래도 오늘밤 세석평전이 씨끄럽겠구먼, 여기 온 남자들이 모다 큰 자석 만들고 싶어헐 테니께 말여!"
박 영감도 서 농담을 했다.
"내가 왜 저것을 여그꺼정 다리고 왔간디요. 우리 도련님이 한사코 떠내불라는 것을 지가 뿌득뿌득 우겨서 쟈를 데리고 온 것은 다 생각이 있어서였죠!"
박 판돌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삵처럼 음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더욱 징그럽게 등골을 훑어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 어떤 자식을 맹글고 싶나?"
박 영감의 말에 박 판돌은
"우리 도련님 겉은 아들을요!"
하고 삵의 눈을 하고 나를 돌아다보았는데 그 눈빛의 희뜩거림이 송곳처럼 심장을 쿡 쑤셔 왔다, 텐트를 친 일행은 그날 밤에도 미스 현이 누구와 함께 잘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하였다.
"난 싫으이. 이르케 힘이 팔팔헌 나를 늙은이 취급헌 것부터가 싫다니까."
박 영감은 팔뚝을 걷어올리고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거야, 영감님이 오늘밤 실력을 한번 발휘해 보시면 될 것이 아닙니까?"
박 판돌이는 는질는질 웃으며 놀려댔다.
"암튼 나는 하룻밤 저 색시허고 같이 잤으니께 오늘밤에는 사양허겠어!"
"허어! 누구 자진해서 미스 현과 같이 잘 사람 있으면 직접 뭐라드라, 거 프로 뭔가,,,..."
"프로포지라구요!"
박 판돌이 어물어물하자 미스 현이 나섰다.
"그렇지, 누가 프로포즈를 해보시재 그래! 도련님 오늘밤 어떻습니까요?"
박 판돌의 말에 나는 심장까지 훗훗하게 달아오른 듯싶어 얼굴을 돌려 버렸다.
"가만히 두고 보니께 너무들 허시요!"
바윗등걸에 등을 기대고 삐억삐억 담배를 빨고 있던 곰센 영감 최씨가 볼멘 소리로 툴툴거렸다. 모두들 곰센 영감 쪽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 두 사람은 남자가 아니오?"
곰센 영감은 웃으면서 말했다.
"옳은 말이시. 같은 남자들끼리 너무했구먼!"
지관 박 영감이 인부들 편을 들어주었다. 지관의 말에 힘을 입었음인지,
"나야 늙었다 치더라도, 이 사람은 한창이 아니오?"
곰센 영감은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예비 군복의 등을 툭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듣자듣자허니께 너무들 하시네요. 내가 무슨 물건인가요.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면서 붙여주게? 저 오늘밤 혼자 자겠어요!"
결국 미스 현이 혼자 자겠다고 하여, 그날 밤의 잠자리 배정은 그것으로 끝난 셈이 되었다. 그녀는 피곤하다면서 먼저 텐트로 기어 들어갔다. 바람마저 잠들어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이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박 영감, 박 판돌, 이렇게 셋이서 한 텐트에 들었다.
얼핏 잠결에 미스 현의 텐트에서 여자 비명이 들렸다. 나 혼자만 들은 게 아니었다. 박 영감과 박 판돌이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가지 못해? 안 나가면 사람들을 부를 거야!"
밤을 쪘듯 쏘아대는 것은 분명 미스 현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텐트는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기침소리까지도 들릴 정도였다.
"아무 일 없을 테니 그냥 둡시다! "
박 판돌이가 엉거주춤 일어서는 것을 박 영감이 잡아 앉혔다.
"더러운 갈보 같은 년아!"
남자의 목소리도 또렷하게 들렸다. 컬컬하면서도 울림이 좋은 그 목소리는 예비군복의 젊은 인부가 분명했다.
"아니 저놈의 자식이?"
박 판돌이가 다시 일어서려 하자,
"그냥 두라니께! 그 젊은이도 남자가 아닌감?"
박 영감이 가로막아 일어서며 다시 주저앉혔다.
"그래 이 갈보 같은 년아, 양복장이 X에는 금티가 둘렀고, 우리겉이 지개꾼들 X에는 옴이랴도 올랐단 말이냐?"
"워매 워매! 병신 달밤에 육갑헌다더니 빨랑 안 나가?"
"못 나가긋다!"
"피잇-아무리 막된 년이지만 너 같은 무지렁이한테는 안줘!"
"왜 안줘!"
"내 자유여!"
"뭐 뭣이라고?"
두 사람이 한동안 티격태격 입씨름을 하는 것 같더니 예비군복이 미스 현을 덮치는지 땅이 쿵쿵거렸다.
"워매 워매, 이 손 안놔?"
미스 현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다시 박 판돌이가 벌떡 일어섰다.
"내버려 두고 잠이나 잡시다. 저 젊은이가, 말이 없이 꿍해 있더니 딴 생각이 있었던 게로구만! 박 사장 왜 그러고 서 있어?"
미스 현의 텐트에서는 이내 조용해졌다,
다 섯 째 날
"냉큼들 나와 봐! 나와서 구경들을 해요!"
나는 텐트 밖에서 박 영감이 큰소리로 일행들을 깨우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텐트가 온통 벌겋게 물이 든 것같이 아침 햇살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 텐트 밖으로 나가 보았다. 일행들은 박 영감의 깨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잠을 깬 듯 모두들 푸스스한 얼굴로 밖으로 나와서는 아침 햇살의 눈부심에 손바닥으로 눈썹 차양을 만들어 눈을 가렸다.
"허, 모두들 피곤했던 모양이구만! 여태껏 잠들을 자게!"
박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손으로 철쭉꽃밭을 가리켰다. 무지개 빛으로 찔러 오는 햇살 사이로 온통 산에 붉은 물을 뿌려 놓은 것 같은, 세석평전의 철쭉꽃밭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손으로 눈곱자기를 뜯어내며 꽃밭의 찬란함에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 끝까지 붉게 물들여져 있는 듯했다. 암,수 원앙이 어울려 비비꼬는 비단 금침이불 하나로 세석평전 삼십여 리를 덮어버린 것 같은 꽃밭은 불난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나는 지리산에서 아름답게 다져진 또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신비를 본 것이었다. 산에 대한 경외(敬畏)를 느끼는 한편, 모든 아름다움의 집약을 보았다.
"좋군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꽃밭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긴 밤을 내내 어둠 속에만 깊숙하게 파묻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지없이 안타까운 생각이었다.
"마음이 툭 티어 오는 거 같지 않어?"
박 영감이 물었다.
"암튼 좋아요!"
나는 꽃향기들을 냄새 맡기라도 하는 듯 코를 킁킁거리고 나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큼한 철쭉꽃 향기가 폐부의 깊숙이 쑤셔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철쭉제에 참가하기 위해 올라온 등반객들이 답교(踏橋)하듯 겅중거리며 꽃밭 위를 뛰어다녔다. 그들은 철쭉꽃 나무가 상하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다니는 것이었으나 내 눈에는 그들이 마구 꽃밭을 발로 짓이기는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하였다.
"이제 곧 철쭉제가 시작될 모양이야!"
박 영감이 턱으로 가리키는 철쭉꽃밭 한가운데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도 가볼까요?"
"그럼 가봐야지. 예까지 와서 철쭉제에 참례를 안 해서야 쓰남!"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꽃밭을 가로질렀다.
"꽃나무들이 상허지 않게 조심해요!"
나는 일행에 주의를 주는 것이었는데, 박 판돌만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마구 와작와작 꽃나무를 꺾어 미스 현에게 안겨 주었다.
"이 아름다운 꽃나무를 일본에 수출을 했다니 원!"
나는 꽃을 꺾는 박 판돌을 쏘아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꽃밭에 깔린 잔돌들을 모아 제단을 만들고, 그 제단 위에, 철쭉꽃잎을 보료처럼 푹신하게 깔아놓았다. 빨간 철쭉꽃 제단 위에 돼지머리며 마른 명태, 떡, 과일들을 차려놓고, 제관인 연하반 등반대장이 큰절을 하고, 풍년과 태평성대를 비는 고천문(告天文)을 읽었다. 제관이 고천문을 읽고 나자, 여럿이서 함께 또 너부죽이 큰절을 두 번 했다. 여럿이 하는 큰절이 끝나자, 차려놓았던 돼지 머리를 내리고 주위에 술을 뿌렸다. 박수가 쏟아지고 꽃잎들이 엉켜 붙은 돼지머리의 살을 싹둑싹둑 칼로 썰었다.
"매년 철쭉제마다 꽃나무들이 술을 먹으니까 이렇게 꽃들이 술에 취해 붉어진 모양이야!"
박 영감이 미스 현을 보며 말했다, 처음 미스 현이 지리산 철쭉꽃밭을 보고 마치 술에 취해 있는 것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런가 봅니다."
나는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박 영감의 딸을 긍정했다. 제사를 주관한 연하반 등반대원들이 박 영감과 박 판돌에게 술과 안주를 가져다주었다. 일행은 푸짐하게 술까지 얻어 마셨다.
"박 검사 얼굴이 철쭉꽃모냥 불그스레한걸!"
박 영감이 텐트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거짓말을 헐 줄 모르니까요."
"원래 황금은 사람 마음을 검게 맨들고, 술은 사람의 얼굴을 뻘겋게 허는 벱이지!"
"저는 딱 한잔만 마셔도 이렇게 얼굴이 붉어져요."
철쭉꽃밭을 가로질러 텐트까지 돌아오는 동안에도 나는 박 판돌이가 예까지 와서 행여 자취를 감추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매달리듯 바짝 따라붙어 있었다. 나는 일행이 세석평전에 도착하는 즉시 박 판돌에게 아버지가 묻힌 지점을 묻고 싶었으나, 서두르지 않는 것도 박 판돌이가 마지막에 와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기는 모른다고 딱 잡아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이쪽 철쭉꽃 색깔이 히블그레한 데 비해서 저쪽 등성이 아래는 왼통 피를 토해놓은 것 모냥 검붉은 이유를 아남? "
박 영감이 손으로 가리키는 등성이 아래 바람이 닿지 않은 분지처럼 옴쑥한 곳의 철쭉꽃은 유별나게도 붉어 보였다. 널따란 세석평전의 꽃밭 속에서도 그곳만은 꽃 색깔이 표가 나게 검붉었다. 박 영감의 표현대로 붉다 못해 피를 토해놓은 것 같았다.
"글쎄요. 다른 데보다는 유난히 꽃 색깔이 뻘겋군요!"
"그렇지, 표가 나지?"
"왜 그럴까요?"
"육이오때 저 움쑥한 곳에다 사람들을 무데기로 죽였다는 구만. 그래서 저곳의 철쭉꽃들이 유난히 붉다는 게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서버렸다. 나는 걸음을 멈춘 채 철쭉꽃 색깔이 표가 나게 시뻘겋게 보이는 등성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곳에서 사람들을 많이 죽였군요!"
나는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순간 나는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회수하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박 판돌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었다. 박판돌은 없었다. 저만큼 텐트 가까이 미스 현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박 판돌이를 향해 뛰어 갔다.
"왜 그래. 갑자기 어디를 뛰어가는 게야?"
박 영감이 큰소리로 묻는 것이었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철쭉꽃나무를 헤치며 헐근헐근 뛰어갔다.
철쭉제는 그렇게 간소하게 끝났다. 꽃밭 한가운데에 잔돌을 모아 제단을 만들어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풍년과 태평 성대를 비는 축문을 읽고, 꽃밭에 술을 뿌리고 차려놓은 음식을 안주 삼아 한잔씩 잦히고, 사진들을 찍고 하는 것으로 끝났다.
철쭉제가 끝나자, 철쭉제에 참례했던 등반객들은 서둘러 텐트들을 철거했다. 천왕봉에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아침에 일찍 철쭉제를 끝내고 천왕봉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세석평전에서 천왕봉까지는 십 킬로미터 남짓 되지만 줄곧 올라가는 코오스여서, 힘이 들기 마련이다. 세석평전에서 천왕봉까지 가는 동안, 장터목과 산회샘, 통천문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천왕봉에 올라간 등반객들은, 칠선계곡을 지나, 칠선동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조금 백 코오스 하여 산길로 하동바위, 백무동을 거쳐 마천까지 가거나, 쓰리봉, 치산목으로 해서 산청을 지나 함양으로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천왕봉서 되돌아서 오던 길로 화엄사에 돌아온다던가, 아니면 신흥, 화개를 통과하여 하동으로 빠지는 것이었다.
아침을 지어먹고 나니 세석평전에는 우리 일행만이 휑뎅그렁하게 남은 듯싶었다.
"자, 판돌씨!"
나는 박 판돌을 불렀다. 그는 반야봉에서부터 실팍한 작대기 끝에 매달아 가지고 다녔던 독사를 잡아먹다 말고, 내가 부르는 소리에 흠칠 놀래 돌아다보았다. 나는 그의 곁으로 갔다.
"자. 우리도 일을 시작해 봅시다. 판돌씨가 앞장을 서야죠."
나는 철쭉꽃밭처럼 발간 기운이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까부터 박 영감이 가리켜 준, 유난히 꽃빛깔들이 핏빛처럼 시뻘건 등성이 아래에 아버지가 묻혀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어금니를 응등 물며 참았던 것이었다.
"자, 모두들 갑시다."
내가 일행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자 두 인부와 박 영감이 투덕투덕 옷을 털며 일어섰다.
"미스 현은 천막을 지키고 여기 남아 있어요!"
미스 현은 주둥이를 내밀어 뿌루퉁한 얼굴로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판돌씨, 어서 가자니까요!"
다시 재촉하자, 박 판돌은 뱀 고기를 볼때기가 미어지도록 입안 가득히 넣고 워적워적 씹으면서 일어났다.
"판돌씨가 앞장서요!"
나의 목소리는 정그렁 쇠붙이 소리처럼 싸늘하고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그 목소리에 박 판돌이가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두 사람을 유심히 관찰해 오던 박 영감이 불쑥 박 판돌의 앞으로 나섰다.
"자아, 갑시다!"
결국, 박 영감이 앞장을 서고, 박 판돌이가 그 뒤를 어기적어기적 뱀고기를 씹는 표정으로 따랐다. 박 영감은 무턱대고 조금 전 철쭉꽃 빛깔이 표가 난 등성이 쪽으로, 꽃밭을 가로질러 갔다.
"영감님, 판돌씨에게 앞장서라고 하십쇼!"
그 말에 박 영감은 걸음을 멈춰 미미적 거렸으며, 그렇게 해서 결국 박 판돌이가 앞장을 서게 된 것이었다. 박 판돌은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고개를 전후좌우로 휘두르며 걸었다. 옛날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듯싶었다. 그는 철쭉 꽂나무를 발로 툭툭 차 헤치고 등성이 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다가는 후미진 바위등걸 옆에 섰다. 그는 계속 주위를 휘둘러보며 아버지가 묻힌 곳을 찾고 있는 것 같았으나 한눈에 짚어대지를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리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런 박 판돌의 행동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던 나는 행여 박 판돌이가 아버지가 묻힌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초조해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박 판돌을 앞세우고, 지리산에 올라가 아버지가 묻혀 있는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서 바짝바짝 피를 말려 오다시피한 삼십 년 동안의 집념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박 판돌은 후두둑 뛰어서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일행도 그를 따라 뛰어내려갔다. 그러나 박 판돌은 대성동으로 빠지는 계곡, 고사목들이 쭈빗쭈빗 서 있는 지점에서 턱을 세워 잠시 세석평전의 철쭉꽃밭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이봐요 판돌씨!"
초조한 나머지 박 판돌을 불렀을 때, 박 영감이 내 옆구리를 찔벅했다.
"내버려 둬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두는 기 좋아!"
박 영감의 말대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초조하고 불안한 생각에 목이 말랐다. 옆구리에서 수통을 따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자꾸만 물을 마셔도 초조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박 판돌은 철쭉꽃밭 쪽으로 다시 올라갔으며, 일행도 조심조심 그 뒤를 따랐다. 박 판돌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숭얼숭얼 포도 알처럼 맺혀 있었다, 그는 연신 손바닥으로 땀을 훔쳤다.
내가 고향으로 떠나오던 날,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물 머금은 목소리로 시시콜콜이 말을 늘어놓았었다, 지금 나는 박 판돌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버지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을 보고, 문득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 징헌 고향, 네가 바득바득 가겄다는디야 무슨 수로 붙들어 매긋냐마는, 기왕에 가거들랑, 너 지금껏 불효해 온 것 한꺼분에 효도헌다 굳은 맘묵고, 판돌이놈 닥달 잘 혀야쓴다. 와 그놈은 무서운 놈이니께, 섣불리 닥달했다가는 되려 네가 당헐끄다. 다시는 구례바닥에서 맥을 못쓰게시리 단단히 버릇을 고쳐서, 네 아부지 박 인동씨의 원한을 풀어주야 흔다."
어머니는 질금질금 눈물바람까지 하며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아주지를 않았었다. 그때 나는, 실은 어머니도 나 못지않게 고향엘 가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로는 그 징한 고향. 꿈에도 몸서리치는 지긋지긋한 고향 해쌓지만 되려 고향 노래를 불러대는 아들보다, 고향의 그리움이 더할 것이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는 잠시 물커진 눈을 감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눈시울이 펑 젖어 있곤 했었다.
"어머니도 함께 가실까요?"
손을 꼭 쥐고 놓아주지 않은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손을 놓으며,
"죽은 혼백이 되야서 네 아부지나 만나러 가야긋다."
하고 잠시 물 머금은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대문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다시 불러 세웠다.
"참, 너 네 아부지 알아보긋냐? 네 아부지 뼉다구를 알어 보긋냔 말이다."
나는 막상 어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잠시 망연(茫然)한 생각이 들어 멀뚱히 어머니를 보고만 있었다.
"네 아부지 유골을 찾거들랑 이빨부텀 봐야헌다. 너를 낳던 해에 기념으로 곡식 내어 네 아부지 앞니빨 두 개허고 애미것 두 개 금니를 혀 박었단다,"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들춰 금니 박은 어금니를 보이며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금이빨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나를 버쩍 들어올리고 지리산이 보이냐, 백암산이 보이냐 할 때마다, 활짝 웃는 아버지 입에서 반짝이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 품에 안긴 채 아버지의 입술을 까뒤집으며 노랗게 번쩍이는 금이빨을 손톱 끝으로 탕탕 두드려 보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박 영감이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나는 펀뜻 현실로 되돌아왔다. 박 판돌이가 철쭉꽃 색깔이 유별나게 뻘겋게 물든 등성이 아래, 분지처럼 움쑥 들어간 곳의 조그만 바위등걸 옆에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던 것이다. 그는 손바닥으로 땀을 훔쳐내어 이쪽을 돌아다보았다,
"찾아낸 거로군!"
박 영감이 나직이 말했다.
박 판돌은 나룻배만한 바위 등걸을 손으로 만져보고, 두 팔을 벌려 재어보고 보고, 위로 뛰어올라 여기저기를 쑤석여 보는 것 같더니, 덜퍽 바위에 앉아버렸다.
아버렸다,
"찾아냈어요?"
내가 뛰어가서 물었다. 박 판돌은 고개만 까닥거려 보였다. 순간 박 판돌을 덥썹 안아주고 싶도록 그가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퉁명스럽게
"어디요?"
하고 물었다. 박 판돌이가 바위에서 기어 내려와, 바위에서부터 천왕봉 쪽으로 정확하게 다섯 걸음을 걸어서 우뚝 서서는 빨간 철쭉 꽃나무를 때격 부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바위등걸에 기어 올라가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이리들 와요! 삽과 괭이를 들고 이리 와요!"
나는 박 판돌이가 부러뜨려 놓은 철쭉 꽃나무 옆에 서서 인부를 불렀다. 흥분해서 인부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고음으로 떨렸다.
지관 박 영감도 내 곁으로 와서는 철쭉꽃 나무뿌리의 떼도 입히지 않은 도돔한 푸석돌 더미를 발로 툭툭 차 보았다.
"자리가 괜찮구만 그랴!"
박 영감은 철쭉꽃 나무 뿌리의 도돔한 흙더미 위에 올라서서 대성동 골짜기 쪽을 내려다 보았다. 화개 쪽으로 내려다보면 희뜩희뜩 섬진강의 물굽이가 명주 베를 여러 필 펼쳐놓은 것처럼 눈부셨다.
"칠선봉을 뒤로하고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좌청룡 우백호가 정확하고 괜찮여! 대성동 골짜기 쪽에 툭 불거져 나온 저 바위들만 아니면 썩 좋은 자리야!"
박 영감이 산세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나는 철쭉나무를 뽑기 위해 힘껏 잡아당겼다. 가매장지(假埋葬地)를 팔려면, 도돔한 흙더미 위에 뿌리박은 너댓 그루의 철쭉을 뽑아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철쭉나무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어, 어, 이 양반아, 철쭉 뿌리가 을매라 길고 단단허다고, 그걸 그리 쉽게 뽑아 낼려고 그래! 철쭉나무는 그대로 두고 우선 주변부터 조심조심 흙을 들어내야재!"
박 영감은 쭈그려 앉으며, 가매장한 아랫부분을 괭죙이로 살살 긁어냈다. 흙더미가 벗겨지자 푸석푸석 색은 돌무더기가 나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박 영감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묻혀 있을 흙더미 위에 철쭉꽃들은 다른 꽃들보다 더 샛빨갛고 탐스러웠다. 조금 전 박 영감이 산세를 둘러보며 쌕 좋은 자리라는 이야기며, 또 다행히 아버지가 철쭉꽃밭에 묻혀 있다는 것에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자, 이 발로 조심조심 흙을 긁어내드라고!"
박 영감이 달걀 모양으로 선을 긋고 나서 인부들을 재촉했다,
나는 인부들의 괭이 끝이 달그락달그락 돌에 부딪치는 소리를 낼 때마다 온몸의 피가 멎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아버지의 뼈를 갉는 것같이 느껴왔다.
"이놈의 철쭉 뿌리 땜시 힘들어!"
최씨가 괭이로 철쭉 뿌리를 쪘어내며 말했다.
"아서 함부로 찍어대지 말어! 철쭉 뿌리가 바위도 뚫는다는디."
흙을 긁어내자 돌무더기가 깔려 있었으며, 철쭉 뿌리들이 낙지 발처럼 여러 갈래 비비꼬여, 돌무더기를 감고 돌았다. 그들은 철쭉 뿌리에 감긴 돌멩이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박 영감이 텐트 안에 가 있으라는 것을 듣지 않고 나는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박 영감의 말은, 비참한 아버지의 주검을 보면 마음만 아플 테니까, 차라리 안 보슨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으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말마따나 유해를 확인해 볼 필요도 있겠고, 또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 유해를 손으로 다루지 않는대서야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박 검산 저쪽 나무그늘에 쉬고 있으라니께 그랴!"
박 영감이 돌을 들어내며 말했다.
"저도 도와야겠어요!"
나는 박 영감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서 돌을 들어내는 일을 도와주었다.
박 영감이 앉아 있는 쪽에서 구두 두 짝이 나왔다. 그것이 분명 아버지의 구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아버지가 박 판돌에게 끌려가면서, 마루 위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신은 모습이 얼핏 스쳐갔다.
"저런,,,,,,……"
지관 박 영감은 썩어 문드러진 구두짝을 들어내다 말고, 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흙색이 되어 너덜너덜 썩어버린 바짓가랑이의 천 위에 가는 전선줄이 감겨 있었다. 아버지를 죽일 때 다리를 묶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러 겹으로 칭칭 동여맨 전선줄을 들어냈다. 전선줄을 들어내고, 너덜너덜 썩어 겨우 형태만 남은 바지의 천을 걷어 내자 색깔이 뿌연 뼈가 드러났다.
"참 신통허구만 ! 관도 없이 가매장을 했는디도 이렇게 뼈가 깨끗헐 수가 있담!"
지관 박 영감은 뼈 위의 흙을 조심스럽게 긁어내며 감탄을 하는 투로 말했다.
"여기가 보통 자리가 아닌가벼! 뼈가 왼통 흙빛으로 거무튀튀해 있을지 알었는디, 이르케 뿌옇고 묵신허니 말여."
그러나, 나는 박 영감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입에 침 바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 영감은 우선 유골의 주위를 깨끗하게 치우고 흙과 돌을 들어내도록 인부에게 시켰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흙과 돌멩이들을 들어내자 철쭉 뿌리가 여러 겹으로 유골을 칭칭 감고 있지 않겠는가. 거무튀튀한 철쭉 뿌리가 이리저리 꼬여가며 뿌연 유골을 전선줄로 동여매 놓은 듯 감겨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수없이 많은 뱀들이 뒤엉켜 있는 듯싶었다,
"허이. 이럴 수가!"
박 영감은 잠시 손을 멎고.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철쭉 뿌리들이 관 노릇을 해준 게로구만! 철쭉 뿌리가 아무리 길고 잘 엉킨다고 허지만 이럴 수가……"
뿌리들은 돌멩이들을 비껴 흙더미를 뚫고 유해를 꽉 끌어안듯 여러 겹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박 영감은 인부들을 시켜 철쭉 꽃잎들을 따서 땅에 깔게 하고, 보료처럼 깔아놓은 꽃더미 위에 다시 하얀 백지를 덮었다. 그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철쭉 뿌리들을 젖히고 뼈를 들어내는 것이었다. 철쭉 뿌리들이 뼈를 고스란히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유실이 없었다.
"자 먼첨 백지로 싸게!"
박 영감은 납염을 해놓은 것같이 거무칙칙한 두개골을 들어내게 안겨 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았다,
내 손 위에서 아버지의 표정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증말 다행헌 일이구먼! 즘생들의 해를 입지도 않고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말여!"
박 영감은 뼈를 들어내면서 몇 번이고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인부들은 박 영감이 들어 내놓은 뼈를 나무꼬챙이로 흙을 털고 다시 백지로 닦아냈다
전선줄은 팔에도 묶여 있었다. 양팔을 뒤로 해서 묶은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힐끗 박 판돌이가 앉아 있던 바위등걸 쪽을 돌아다보았다. 박 판돌은 거기에 없었다. 일어서서 휘휘 둘러보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나을 때의 어머니 말을 상기시키며, 아버지의 치아를 확인하기 위해 촉루를 들어 흙을 털어 냈다. 치틀에서 흙을 털어내다가 뉘리끼리한 반짝임을 보았다, 그 순간 살아있는 아버지를 대하는 듯한 울컥한 감정 때문에 목이 뜨거웠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땅이 좋고, 이 철쭉나무 덕택에 이만큼이나 편허게 계신 것은 참 여간 다행한 일이 아녀!"
박 영감은 내가 촉루를 들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철쭉 뿌리에 감긴 유골들을 모두 들어내어, 꼬챙이로 흙을 후벼 낸 다음, 라면 상자 바닥에 백지를 두껍게 깔고, 순서대로 차곡차곡 넣었다.
이 일을 다 끝내고 나서도 박 영감은 쭈그려 앉은 채 산세를 둘러보며, 지리산에서 이만한 자리를 찾기도 어렵다고 했다.
"철쭉 뿌리가 상하지 않게, 다시 흙을 메우게..... "
박 영감은 인부들에게 철쭉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하라고 몇 번이고 당부를 했다. 나는 얼마나 고마운 철쭉 나무였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애착 어린 눈으로 반짝이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춘부장께서 복이 있기 땜시 이런 좋은 곳에 묻힌 게여! 이 화려한 꽃밭 속에서, 섬진강 물굽이를 내려다보며 얼매나 흐뭇한 마음이었겠나!"
나는 박 영감의 말을 들으며, 인부들이 메워 놓은 철쭉 뿌리의 흙더미를 두 발로 꽁꽁 밟아주었다. 유난히 샛빨간 그 철쭉꽃잎들은 햇빛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텐트로 돌아와서 박 판돌을 찾았으나, 그곳에도 없었다. 미스 현에게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인부들을 시켜 세석평전을 뒤져보라고 했다. 그러나 끝내 박 판돌이를 찾아내지 못했다. 미리 산을 내려가 버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세석평전에서 노고단까지 내려가자면 하룻밤을 자야 하는데 텐트도 없이 그런 무모한 짓을 할 것 같지가 않았다. 먹을 것도, 텐트도 없이 산을 내려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왁살스럽고 왁살스럽게도 생의 집착이 강한 그가 죄책감 때문에 자살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모 없는 일인 것이다.
"혹시 가까운 대성동으로 내려간기 아닐까 몰라, 대성동 쪽으로 간다믄 해지기 안에 신흥이나 칠불암꺼정 닿을 수 있을 테니께!"
박 영감도 걱정을 했다.
언제까지나 박 판돌이를 찾고만 있을 수도 없는 터라 박 영감은 아버지의 유해를 어디에 안장하겠느냐고 물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일단 천왕봉까지 골라가 보는 것이 어떨까 싶구만. 올라가는 도중에 좋은 자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께 말여! 내가 통천문 부근에 봐둔 자리도 있고,,,,,,"
나도 박 영감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더욱이 아버지는 살아 생전 천왕봉 한번 올라가 보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죽은 유해나마 천왕봉에 모시고 올라가고 싶었다.
"일단 천왕봉까지 올라갑시다."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담은 라면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일어섰다.
아버지의 유해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음이 허무한 생각뿐이었다. 한 팔로 나를 끌어안던 육 척 장신의 그 아버지가 겨우 오른쪽 옆구리 안에 안기다니, 생각만 해도 마음 언짢은 것은 고자하고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천왕봉에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구름을 밟고 서 있는 듯한 허허로움에 온몸의 감각마저 마비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그 널찍한 등에 올라타고 엉덩방아를 찧고, 목에 두 발을 걸치고 무등타기를 해도 끄덕 안 했던 아버지였다. 두 손으로 손가락 하나를 꺾지 못해 끙끙거렸던 일이며 등덩등 등덩등 사랑 놀음을 할 때 솔대마을 앞 산이 울리도륵 장구를 치던 모습이며, 아버지 살아 생전 모습들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 힘세던 아버지가 라면상자 안에 초라하게 들어앉아 아들의 옆구리에 끼이다니, 나는 불현듯 인생의 허무함에, 지금껏 가슴 절절히 품어 왔던 온갖 욕망이며 원한들이 물거품처럼 흩어져버리는 듯싶었다.
박 영감은 몇 번이고, 좋은 자리에 묻혀 다행한 일이라며 위로하는 것이었으나 그런 그의 말은 귀에 머무르지 않았다.
"판돌이 그 자식!"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끼고 천왕봉에 올라가면서 이를 부드득 갈며, 박 판돌이에 대한 복수의 불길을 지폈다. 조금 전 아버지의 팔다리에 묶인 전선줄을 들어내면서도 박 판돌이에 대해 치솟은 감정에 부르르 손이 떨리기까지 했었다.
"신선 놀음 하는 함씨가 지금 있을까요?"
나는, 파란 하늘을 쑤셔대는 듯 우쭐우쭐 출렁여 보이는 천왕봉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죽지 않았다면 아직 있겄재.……"
"그 사람, 죽을 때까지 혼자 천왕봉에서 살겠대요?"
"그럴게야.……"
"혼자 저 높은 산정에서 죽기란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외롭긴? 사자라는 짐승은 일부러 근처의 가장 높은 산정으로 올라가 죽믄다는디,,,,,, 되려 천당에 가기도 가찹고 좋것재!"
박 영감도 나를 따라 천왕봉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문득, 천왕봉에 살고 있다는 함씨 때문에, 오히려 지리산에 대한 생명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함씨가 죽으면 누가 또 올라와서 살까요?"
하고 뚜벅 물었다.
"글쎄, 함씨 자신이 죽어서도 한 천 년쯤 살 거라고 했으니께, 당분간은 죽는 것이 아니것재!"
"죽어서 오래 살기가 더 어려운 일이죠."
"그 사람 블써 자기가 묻힐 자리를 봐두고 틈만 있으면 그곳에 가서 번듯허게 누워 본다누먼! 그 사람 말이, 자기가 죽을 성부르먼 미리 가서 누워 숨을 거두겄다는 기야. 허기사, 그를 묻어 줄 사람도 없재만 말여!"
산정이 온통 화산이 솟은 그 순간처럼 벌겋게 낙조가 터질 무렵, 일행은 천왕봉에 올라섰다. 일행은 산정에 오르자, 그 자리에 선 채 몸을 돌려 가며 빨갛게 물든 하늘의 끝을 휘둘러 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옆구리에 낀 채 심장이 뻐근함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면서 아버지, 여기가 바로 지리산 상상봉인 천왕봉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생전 그리시던 천왕봉에 오셨습니다. 하고,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볼 게 있어."
박 영감은, 나를 끌고 산꼭대기의 바위로 갔다. 바위에 큰 글씨로 天柱라고 씌어 있었다. 그곳이 바로 하늘을 떠받는 기둥이라는 것이었다. 그 바로 밑에 천왕상을 모시는 암자가 하나 있었다.
하늘에 온 기분이었다.
발바닥에 야릇한 현기증을 느낄 만큼 마음이 용 떠오른 듯싶었다. 미리 산상에 올라온 등산객도 엄청난 자연을 딛고 서는 경외로움에 말 한 마디. 발걸음의 옮김까지도 자못 숙연해 있었다, 모두가 엄숙한 얼굴들로 빨갛게 물든 하늘의 끝을 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큰 소리로 그 엄숙을 깨뜨리지 않았다.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온몸에 습기가 확 빠지면서 육신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벼워졌다. 조용조용 소리가 안 나게 텐트를 쳤다.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으로 목을 추스려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는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여기 올라올 때마다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야, 예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그런 기분 아무도 모를 게야!"
박 영감은 풀섶에 주저앉으며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도 발갛게 낙조가 깔려 있었다.
"전 아버님 덕택에 좋은 구경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나는 옆구리의 라면상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증말 그렇게 생각허나?"
박 영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거대한 생명의 처절한 운명(殞命)을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낙조가 꺼져 가는 하늘을 보았다. 낙조가 가라앉자 순식간에 끈끈한 어둠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산을 덮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자연의 깨어남과 죽음 앞에서 갑자기 현기증 나는 외로움에 파묻혀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참, 그 신선 같다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박 영감에게 묻자, 박 영감은 그때 마치 혼몽한 꿈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추스리며 풀섶에서 일어섰다.
"이쪽이야 ! "
박 영감을 따라, 아버지 유해를 꼭 낀 채 낙조와 어둠이 범벅된 속을 걸었다. 박 영감은 대피소를 향해 말없이 산정을 가로질렀다
나는 어둠 속에서 함 길만씨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처럼 키가 훤칠하게 큰 사람이었다. 지관 빡 영감은 나를 함씨에게 인사 소개만 시켜주고, 천왕상을 모셔놓은 암자에 갔다 오겠다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함씨에게 이것 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램프 불에 비춰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온통 수염뿐이었는데 두 눈이 램프불의 불빛보다 더 밝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는 산에 사는 사람답지 않게 숭굴숭굴해 보였다. 인사를 하자 그는 대뜸
"죄 지은 사람은 이 산에 아무도 없을 텐데요! 검사님!"
하고, 유난히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웃으면서 좀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함씨의 첫마디가 농담인 것을 알고,
"전 죄지은 사람을 잡으러 온 게 아니고, 천왕봉에 살고 있다는 신선의 얼굴을 보러 왔지요."
하고 역시 농담조로 달했다.
두 사람은 대피소 앞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함씨는 내가 물어보기 전에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내가 한 마디 말을 던지면, 그는 어눌한 말투로 물어보는 말의 다섯 배나 되게 길고 재미있게 대답해 주었다.
"첨엔 나를 빨갱이로 색안경을 쓰고 봅디다. 미친 사람이 아니면 빨갱이임에 틀림없다는 그런 눈으로 말입니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와서 사느냐, 무섭지가 않느냐, 언제까지 살 테냐, 만난 사람마다 똑같은 말들을 물어봅니다만 나는 그때마다 딱 한마디로 대답을 하지요."
함씨는, 왜 여기서 혼자 사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어두를 꺼냈다.
"내가 여기, 해발 일천구백십오 미터 천왕봉에 와서 살고 있는 건, 여기선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겁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 틈에서 살기란 서로 짓밟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모함하는 싸움의 계속인데, 전 싸워 이길 자신이 없는 게죠. 싸워서 아무도 이길 자신이 없어요. 집사람 아들놈한테까지 이길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하고도 싸울 필요가 없는 이 곳에 와서 싸우지 않고도 이렇게 건강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무섭지도 않아요. 나를 해칠 것이 없으니까요."
그는 점착력 있게 보이는 골짜기의 어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끈끈한 어둠의 점액들이 하늘까지 튕겨 올라 시커멓게 먹칠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함씨를 따라 어둠 속을 쑤셔 보았다. 옆구리에 아직도 아버지의 유해가 든 라면상자가 들려 있었는데, 함씨는 그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묻지 않았다.
"아까 검사님을 소개해 준 그 박 영감이 가끔 찾아와 주시죠. 그분이 나를 과장해서 소개들을 한답니다. 나는 이제 세상에 내려가서는 단 하루도 못살 것만 같아요. 내가 이 산꼭대기에 와서 살게 된 지가 벌써 십 년째 되었습니다만, 그 동안 딱 두 차례 집에 갔다가 겨우 하룻밤 자고 되짚어 올라와 버리곤 했답니다. 작년 여름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놈이 올라와서 집으로 내려가자고 졸라대는 것을 호통을 쳐서 쫓아버렸지요. 한때는 국회의원에 출마도 해 본 적이 있는 허세 부리기 좋아하고, 협잡도 해보고, 정치가가 되고 싶은 야망도 가져보곤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죄다 부질없는 일이었죠. 정말 바늘구멍으로 하늘 보기로, 그렇게 꽉 막힌 인생이었답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도중 그에게 담배를 권했지만 거절했다.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지런히 세운 무릎 위에 아버지의 유해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끈끈한 어둠 속으로 투투 연기를 뿜어냈다.
"지금까지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도 더 깨끗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사실 나는 아주 무기력한 얼간이랍니다. 제 몸 하나 외에는 아무도 다스릴 수 없으니까요. 누구인가 이곳에 올라와서 나와 같이 있게 된다면 나는 곧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될지도 모를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 살면서 혼자밖에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이죠."
그는 처음 만난 내게 긴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자꾸만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괜히 가슴에 꽉 차 오르는 암울한 생각들로 머리가 혼몽해진 것이었다. 괜히 그를 만났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신출내기 검사인 나로서는 세상을 다 알고 살아가는 것 같은 함씨의 이야기가 그렇게 큰 부담으로 안겨 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일어서서 텐트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암자에 내려간 박 영감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중학교 때 늙은 도덕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처럼 입맛이 떫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켕기는 그런 기분이었다.
"욕심을 부린다거나, 누구를 미워한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한동안 어둠 속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듯 들여다보고 있던 함씨는 다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한세상, 백년을 다 살아도 삼만육천오백 일밖에 안됩니다. 그 짧은 동안을, 짓밟고, 모함하고, 미워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함씨는 어둠 속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내게는 너무 의문이 많은 것 같단 말요."
함씨는 버릇처럼 웅크리고 두 무릎 사이에 손을 넣어 싹싹 손바닥을 비비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장 높은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내 몸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같이 가장 무기력하고, 내 생각은 가장 밑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 같단 말씀입니다. 나는 가끔 이 많은 의문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하늘을 향해 물어보곤 합니다. 밤에 아무도 없는 산상에서 검은 하늘을 향해 많은 의문들을 풀기 위해 물어봅니다. 때때로 하늘은 내게 대답을 해줍니다, 그러나 자세히 헤아려 보면 그 많은 의문의 대답은 내 마음속에서 울려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내가 묻는 말에 내 양심이 대답을 해주더군요. 욕심을 버리고 두려워 마라, 너는 곧 한줌 흙이며 바람이요, 구름인 것이다. 나는 이런 대답을 듣고 나서는 다시 하늘을 향해 물어본 다음에는 조용히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면 바람과 구름과 나무들이 대답을 해주기도 합니다. "
그는 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섰을 때 암자에 배려갔던 박 영감이 올라왔다. 나는 박 영감과 함께 텐트에 돌아왔다. 텐트에 돌아와 보니 박 판돌이가 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혼몽해진 머릿속에는 바람 소리만이 가득 들어왔다. 옆에서 박 영감이 무슨 말인가 걸어 왔지만, 나는 담배연기만을 숭숭 내뿜고 있었다. 혼몽해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텐트를 걷어 올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밖은 나의 머릿속보다 더 어둡고 치밀하게 섬유직물처럼 꽉 짜여져 있었다.
송곳 하나 박을 틈도 없이 단단한 어둠 속을 쑤셔본 나는 문득, 잠시 죽었던 아버지가 지리산에서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어둠에 묻힌 나무와 바위, 섬진강 쪽에서 등성이를 훑고 올라온 깔깔한 밤바람까지도, 아버지 생명의 일부로 뻐근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려서 어머니와 함께 광주로 도망쳐 나갈 때 그렇게 무섭게만 생각되어졌던 지리산이 오히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 어둠의 단단함이며, 덩치큼의 모두가 아버지의 육신으로만 여겨지면서 갑자기 하늘에 대고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함씨 말마따나, 무슨 말이고 물어보기만 하면, 하늘은 곧 친절하게 대답을 해줄 것만 같았다.
나는 해발 일천구백십오 미터의 지리산 정상 어둠 속에, 머리를 깡그리 쥐어뜯기고 난 기분으로 앉아서, 덩치 크고 의연한 지리산에 비해 자신은 한갓 연못이나 개천에 떠 사는 소금쟁이거나, 산짐승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산거머리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둠의 점액질이 끈끈해질수록 자신의 존재가 더욱 먼지처럼 작아지는 듯싶었다.
나는 문득, 이 세상의 온갖 밝은 빛을 모두 빨아 마셔 버렸다가, 다시 추운 겨울날의 입김처럼 어둠을 토해 내고 .그런가 하면 또 어둠을 빨아들였다가 밝은 빛을 토해내는, 마치 사람이 숨쉬듯 밝음과 어둠을 어김없이 번갈아 발타들였다가 토해내곤 하는, 지리산보다 몇 천 배 몇 만 배 덩치 큰 존재에 대해서 경외로움을 느꼈다.
"세석평전에서 그냥 내려가 버릴려다가, 꼭 전해드릴 말이 있어서 뒤따라 올라왔구만요."
어느 사이엔가 박 판돌이가 내 옆에 바짝 쪼그리고 앉으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게 할 말이 있소?"
나는 계곡에 넘치는 어둠을 내려다보며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어르신께서,,,,,, 세석평전에서 저한테 마지막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요”
"아버지가 판돌씨에게요? "
나는 어둠 속에서 서서히 시선을 회수하며 고개를 돌리며 물총 쏘듯 다급하게 물었다.
"차마 이런 말씀은 안 헐려고 했습니다마는, 갑자기 생각이 달라져서 산에 올라와보니께 마음이 강해지는구만요."
나는 박 판돌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야 그가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고백하려나 보구나 하고 낚싯바늘처럼 휘움하게 갈고리진 마음을 바짝 조였다.
"어르신께서 저한테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허셨어요."
판돌이의 그 같은 말에 나는 벌떡 일어서서, 발길로 걷어찰 기세로 어둠을 뚫고 무섭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시방 한 말은 죄다 참말입니다요. 지리산 산신령한테 맹세합니다요. 그때 어르신은 눈물을 흘리시고 저한테 용서를 빌면서 살려달라고 허셨어요."
나는 순간 판돌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멱살을 잡힌 박 판돌은 숨쉬기가 답답한지 캑캑 여우기침을 연신 토해낼 뿐, 내가 하는 대로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를 죽이고 싶었다.
"어르신께서 왜 하찮은 머슴 놈한테 용서해달라고 빌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
박 판돌은 멱살을 잡힌 채 꺽꺽 목소리를 꺾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의 말에 나는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의식했다. 나는 그의 멱살을 놓고 말했다.
"검사님은 춘부장님의 뼈를 찾았으니 다행이겠습니다만, 이놈은 아직 제 아버지 뼈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요."
그는 목의 힘살을 푸느라 손으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면서 푸념처럼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나는 약간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기실 나는 씀벅씀벅 내배앝은 그의 말에 두려움과 호기심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웬숫놈에 족보 때문이었지요."
"족보라니?"
"제 아버님이 못난 탓에,,,,,, 되련님, 혹시 우리 아버님 이야기 못 들으셨겠지요? 마님께서 제 부모님 이야기 안허시든가요?"
나는 그의 물음에 잠자코 있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박 판돌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 들은 바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던 거였다.
"말씀을 안 허셨겠지요. 아마 말씀을 허셨다면 되련님이 고향에 안 오셨을지도 모르지요."
나는 점점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마치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어둠의 점액질이 콧구멍을 타고 목 속에 들어와. 허파와 염통, 창자를 확 채우고 있는 듯하여 답답했다, 혈관 속에도 붉은 피 대신 어둠만이 가득 들어 있어 어둠돌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되련님 댁 종이었답니다. 늙어서 죽게 될 때가 가까워 져서야 늙마에 낳은 어린 아들 하나를 달고 두 늙은이가 종 문서를 받아 쫓겨나듯 풀려났더랍니다. 할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어린 아들한테, 종 문서를 내주면서 다시 솔매 마을 박 참봉댁으로 들어가라고 했답니다. 되련님 할아버님이 바로 박 참봉 어른이셨지요."
"이 보쇼. 한껏 종에서 풀려났는데, 종 문서를 자식한테 주면서 다시 들어가라고 하다니?"
나는 박 판돌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은 점을 발견하고 그렇게 따지듯 말했다.
"그러니께, 족보 때문이었다니께요. 할아버지는 어린 아들한테 종 문서를 주면서, 천한 사람이 종문서만 갖고 있으면 뭘 허느냐는 것이었답니다. 면천을 하려면 종문서보다 족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답니다. 족보가 없는 사람은 뿌리 없는 나무나 같아서 면천을 할 수가 없으니, 박 참봉댁에 들어가서 종 문서를 돌려주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서라도 족보에 이름 석자를 올려주도록 하라는 것이었답니다요."
"아니, 이보슈 천한 종의 자식을 우리 박씨 족보에 올려요?"
나는 갑자기 창자가 뒤틀려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가까운 혈족으로야 올릴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때는 근거 없이 떠돌아 댕기는 사람이 돈을 듬뿍 주고 족보에 이름을 올린 경우가 많았답니다.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하는 일인데 안 될 일이 있었겠어요 ? 할아버지 유언대로, 할머니마저 죽고 홀홀단신이 된 제 아버님은 종 문서를 갖고 되련님 댁으로 찾아가서, 참봉 어른을 뵙고, 늙어죽을 때까지 머슴을 살아 줄테니 먼 혈족으로 족보에 이름 석 자만 올려 달라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는데 참봉어른이 어린 것을 기특하게 보셨는지 선뜻 승낙을 해주셨답니다."
"그래서 판돌씨 아버지가 우리 집안 족보에 올랐다 이거요?"
"아니지요. 족보에 올랐다면야 모든 일이 이렇게 홀맺히지는 않았지요."
그러면서 박 판돌은 처음으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나는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의 한숨을 들었다.
박 판돌은 맷돌질하듯 끙끙 한숨을 삼키며 그의 아버지의 긴 이야기를 계속했다.
판돌이 아버지 박쇠는 박 참봉이 그를 족보에 을려 준다는 말만을 찰떡같이 믿고 뼈가 휘도록 죽을 둥 살 둥 일을 하였다. 그는 고단한 줄을 몰랐다. 하루 하루가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그는 산에 나무를 하러갈 때는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나서, 나뭇짐을 묶는 지게에 달린 긴 띠꾸리로 빈 지게가 움직이지 못하게 지게와 몸을 칭칭 감아 조이고는 빙글빙글 돌고 막대기로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초군가를 목청껏 뽑았다. 그는 마을에서 어른들이 매굿을 칠 때처럼 장구잽이 흉내를 냈다. 그의 꿈은 족보에 그의 이름 석 자가 오르는 것과, 커서 농악대의 이름난 설장구잽이가 되는 것이었다. 장구채 대신 소나무 막대기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휘모리가락으로 빙글빙글 돌고 나면 지리산에 칼바람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땀벌창이가 되어 추운 것도 잊었다.
박쇠가 컬컬하게 목소리가 변하고 쫑긋쫑긋 불거웃이 돋아날 무렵, 그보다 두 살 위인 박 참봉의 아들이 지리산으로 사냥을 가면서 그를 데리고 다녔다.
박 참봉의 아들은 참봉인 그의 아버지를 닮아 키도 크고 콧대도 왕시루봉처럼 높았으며, 젊은 나이에 불질을 잘하여 포수로 이름이 나있었으며, 지리산으로 사냥을 가지 않을 때는 사랑방에 인근의 소리꾼들을 불러다 북 장고 뚱땅거리며 사랑 놀이를 하였다.
박쇠는 그의 불질보다 장구치는 솜씨를 늘 부러워하였기 때문에, 그가 사냥질을 가자고 하였을 때도 그를 따라다니며 불질을 배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박쇠는 되려 그에게서 장구잽이 놀이를 배우고 싶었다.
그들은 가까운 피아골이나 더 깊숙한 벽소령 골짜기까지 사냥을 나가곤 하였는데 보통 한천 나가면 사나흘이나 길면 대엿새 만에야 돌아오곤 하였다
지리산이 온통 허옇게 눈이 덮일 때는 읍에 사는 유명한 곰 사냥꾼인 강 포수를 따라가기도 하였다. 강 포수를 따라서 곰 사냥을 나갈 때는, 곰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게 온몸을 횐 무명천으로 감아 두 눈만 뽀곰히 내놓고 눈 속을 헤매기도 하였다.
박쇠의 나이 스물 여섯 살이 되던 해 늦봄, 지리산 골짜기마다 철쭉이며. 자귀나무꽃, 휜작살나무꽃, 분홍색 산작약꽃이 덩이덩이 어우러져 필 무렵, 박 참봉은 그를 열아홉 살의 부엌데기 넙순이한테 장가를 보내주었다.
박쇠와 같이 피붙이가 없는 넙순이는 양푼처럼 얼굴이 넙데데하고, 키도 깡통한데다가 허리통이 절구통처럼 투박했지만 마음 씀씀이는 윤기가 자르르한 명주실처럼 자상하고 고왔다.
장가든 그해 정월에 박 참봉네 마당에서 매굿을 칠 때, 박쇠가 자진해서 처음으로 장구잽이가 되었는데, 겅중거리며 덩그덩덩그덩 어찌나 구성지게 잘 쪘던지 솔매 마을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고, 아낙들은 오줌을 질금거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박쇠의 장구치는 솜씨가 솔매골 안에서는 제일 낫다고들 수군거렸다고 하였다.
장구잽이로 솔매 마을에서 이름을 날린 데다가, 장가들어 떡두꺼비 같은 아들까지 얻게 되자 덩치 큰 지리산을 두 팔로 뻐근하게 안고 일어서고 싶은 오달진 마음에, 세상에서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아버지 말대로 그의 이름이 족보에만 오르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사랑채 두엄자리 옆의 살구꽃이 터질 무렵 참봉 아들은 사나흘 계획으로 멧돼지 사냥을 가자고 하였다. 박쇠는 장가를 들고 아들까지 얻은 뒤부터는 단 하루도 집을 비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상전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는지라 벌레를 씹는 심정으로 나흘 동안 그들이 먹을 식량이며 취사 도구들, 덮고 잘 가벼운 이불을 짊어지고 참봉 아들의 뒤를 따랐다.
그는 참봉 아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하늘을 봐도 산천을 둘러봐도 찔레나무 꽃 같은 아들놈 얼굴이 눈앞에 선하게 밟혀 와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느지거니 아침을 먹고 집에서 나온 그들은 연곡사에서 첫날밤을 묵을 생각으로 피아골 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연곡사 골짜기 첫들머리에 거뭇거뭇 산그늘이 웃풀거리는, 석양이 가까와서야 촹촹촹 맑은 물이 넉넉하게 흐르는 계곡에서 솥을 걸고 점심 겸 저녁을 지어먹었다. 그런데, 참봉 아들의 숟갈이 때걱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 사냥길 떠나는 아침에 치맛자락만 보아도 재수에 옴 붙었다 하고 돌아서 버리는 판에, 사냥터에서 밥을 먹다가 숟가락이 동강났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동강난 숟가락을 툭 내던지며 박쇠를 향해 괜히 욕을 퍼부은 참봉 아들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고 다그쳤다.
박쇠는 마치 자기 때문에 숟갈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제대로 쳐들지도 못하고 짐을 챙겨, 팩팩 성깔을 돋우는 참봉 아들을 따라 수걱수걱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솔매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삼월 보름날이라,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박쇠는 달빛이 옥양목처럼 깔린 솔매 마을 고샅으로 들어오면서, 참봉 아들의 숟가락이 부러진 것이 열 번이라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필시 지리산 산신령께서 그가 집에 두고 온 처자식을 간절하게 기리는 것을 헤아림하고, 그런 그를 가상히 여겨 참봉 아들의 숟가락을 부러뜨린 것이 틀림없으리라 믿었다.
박쇠는 마누라를 놀라게 해주려고 담을 넘어가 대문을 딴 뒤, 소리 안 나게 살금살금 행랑채 문간방으로 다가갔다. 지게를 받쳐두고, 휘영청 밝은 달빛이 비스듬히 비쳐 내리는 방문을 조용히 잡아당겼다. 방문이 열리자 흰 수국 꽃다발 같은 달빛이 한 묶음 방 안으로 던져지면서, 마누라 넙순이 외에 또 한 사람의 덩치 큰 모습이 도끼날처럼 무섭게 가슴에 찍혀왔다.
남자였다. 박쇠가 성난 부사리처럼 우루루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한 덩이가 되어있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박쇠의 눈에 번갯불이 튀기면서 욱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넙순이는 달달 떨면서 엉겁결에 풀어 헤쳐진 말기끈을 뚤뚤 감았고, 사내는 다급하게 고의춤을 끌어 올렸다.
박쇠는 방문밖에 받쳐둔 지게에서 낫을 찾아 들고 다시 방으로 뛰어들어 으흐흥 지리산의 새벽 호랑이처럼 울부짖었다. 이미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낫을 휘두르다가 사내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낫은 바들바들 떨며 순식간에 사내를 가로막아 선 넙순이의 팔에 맞았다. 낫에 찍힌 팔이 떨어져나가면서 싯뻘건 피가 달빛을 적셨다. 넙순이가 까르르 비명을 질렀으며 넙순이 뒤에 몸을 숨긴 사내는 후두둑 방에서 뛰쳐나갔다. 박쇠는 낫을 든 채 넋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채에서 참봉 아들 내외와, 오랫동안 식객노릇을 하고 있는 참봉 아들의 사촌 처남뻘이 되는 조 서방이 행랑채로 등불을 밝혀들고 뛰어나왔다. 그들은 등불로 방안을 비춰보며 겁에 질려 주춤거렸다, 박쇠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위인 조 서방이 뛰어 들어와 옷을 찢어 넙순이의 상처에 지혈을 시키느라고 잘라진 팔 위를 묶고, 그때까지도 우두커니 달빛이 도배질하듯 비스듬히 깔린 벽을 향해 서 있는 박쇠의 손에서 낫을 빼앗았다.
넙눈이의 오른팔이 팔꿈치 아래로 잘려버렸다, 조 서방은 박쇠한테서 낫을 빼앗아 두엄자리 쪽으로 던져버린 뒤, 된장을 가져오게 하여 넙순이의 상처에 발랐다.
박쇠는 다듬잇돌이 놓여 있는 웃목을 향해 바위처럼 앉아서, 날이 훤하게 밝아올 매까지 말 한 마디 없었다.
넙순이는 새벽녘에야 정신이 깨어났다. 그녀는 상처의 아픔도 잊고, 풀풀풀 봇물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고 울면서, 벽을 향해 돌아앉아 있는 남편에게 그녀가 그 동안 숨겨온 일들을 울음 속에 섞어 속시원히 까발렸다. 그녀는 상처의 아픔보다 남편을 숨겨온 아픔을 더 참을 수 없는 듯 말을 할 때마다 힘주어 꽁꽁 말끝을 짓이겼다.
넙순이를 덮친 것은 박 참봉이었다. 참봉은 그녀가 박쇠한테 시집을 오기 전부터 여러 차례 그녀의 몸을 범했었다고 하였다. 넙순이가 박쇠와 혼인을 한 뒤, 박쇠가 참봉 아들을 따라 사냥을 떠나 집을 비우게 될 때마다 박 참봉은 밤이면 어김없이 행랑채 문간방에 숨어들어오곤 하였단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라도 박 참봉의 올가미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그까짓 족보 없으면 못살게 뭐냐면서 한사코 참봉댁에서 나가 지리산 속에서 화전이라도 일구며 살자고 남편을 졸라 왔었다고 하였다. 넙순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박쇠는,
"사람이 목구멍에 묵을 것만 넘기고 살면 짐생과 다를 것이 뭣이여. 푸나무도 다 뿌리가 있는 벱인듸 항차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와서 근본을 못 찾으면 사나 마나여. 나는 어쪄든지 참봉 어른 눈에 쏙 들어갖고 내 이름 석 자가 버젓하게 족보에 오르게 헐 거여. 그래야만 내가 세상에 생겨난 보람을 허는 거여."
하면서 밉지 않게 마누라를 나무라곤 하였다.
넙순이가 울면서 토해낸 피맺힌 이야기를 듣고 난 박쇠는 여전히 벽을 향해 돌아앉은 채 두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우드득 우드득 쥐어뜯으며 소리 안 나게 끙끙대고 울부짖던 것이었다.
날이 밝자 그는 넙순이의 잘라진 손을 헌 옷에 둘둘 말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는 왕시루봉이 마주 보이는 솔매 마을 뒤, 각씨 바위 옆에 넙순이의 잘라진 손을 묻고 돌아와, 방안에 붙박혀 이를 갈며 끙끙 앓았다. 밤이 되자 박쇠는 낫을 허리춤에 낀 채 박 참봉이 기거하는 사랑채 큰 마루 앞을 배 돌며, 박 참봉이 나타나기만을 여수고 있었다. 그는 족보고 뭐로 죽고만 싶었다.
이튿날 아침, 앓고 누워 있는 넙순이 옆에서 맷돌질하듯 이를 갈고 있는 박쇠를 조 서방이 데리고 나갔다. 조 서방은 박쇠를 박 참봉이 기거하는 큰 사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큰사랑에는 박 참봉이 언제나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를 본 박쇠의 손에 힘이 불끈 솟으면서 목구멍이 꽉 메어 왔다.
조 서방이 쇠말뚝처럼 서 있는 박쇠를 박 참봉 앞에 앉도록 하였다. 박쇠가 사냥질할 때 설맞은 멧돼지한테 접근하듯 목에 힘을 주고 두 눈을 부릅뜨며 참봉 앞에 앉자, 참봉이 문갑의 빼래랍에서 먹 글씨가 씌여 있는 부엌에서 칼질을 할 때 받치는 도마 토막만한 종이 두 장을 꺼내 박쇠 앞에 내밀었는데, 한 장은 누렇게 색깔이 바래고 회치회치 닳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옥양목처럼 깨끗한 것이었다. 박쇠는 얼추 두 장의 종이를 보고 누렇게 바랜 종이는 바로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내준 종 문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나는 네 애비 종문서고, 또 하나는 족보에 오를 너와 네 아들놈의 이름이니라."
박 참봉은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것처럼 발그레한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을 슬며시 머금어 보이며 말했다
"이 사람아, 족보에 올릴 자네 부자 이름이라고 허시잖는가!"
옆에 있던 조 서방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벅거리며 대신 횐 종이를 집어 쑥떡 뭉쳐놓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박쇠 앞에 들이댔다.
"자네 이름이 쇠철자에 소리성이니 박 철성이고, 자네 아들놈이 판단할 판자에 돌돌이니 박 판돌일세."
조 서방의 말에 박쇠는 떨리는 손으로 그들 부자의 이름이 씌여 있는 백지를 받아들고 눈을 껌뻑거리며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는,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눈에서 닭의 똥 같은 눈물이 백지의 먹 글씨 위에 뚝뚝 떨어지자, 그는 눈물 때문에 글씨에 어롱이 생길까봐, 때묻은 소맷자락으로 종이에 묻은 눈물을 꾹꾹 찍어냈다.
"올 가을에 맨드는 대동보에 실릴 네 부자 이름이니라. 처음엔 네놈만 올릴려다가 네 아들놈까지 올려주기로 작정했으니 그리 알어라. 자, 종 문서하고 이름 지은 것허고 갖고 가거라. 이것으로 우리덜 지난 일들은 잊어뿔자. "
그러면서 박 참봉은 넙순이를 읍내 의원한테 데리고 다니며 치료를 하라고 돈까지 주었다.
박쇠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조 서방이 다그치는 대로 종문서와 그들 부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 넙순이 치료비를 받아들고 몇 번이나 허리를 굽적거리며 큰사랑에서 나왔다.
박쇠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행랑채 넙순이가 앓아 누워 있는 그들 방에 돌아와서도 방바닥에 그들 부자 이름을 적은 종이와 아버지의 종 문서를 펴놓고 가슴에 오랫동안 홀맺힌 한을 풀듯 쿠루루루 쿠루루 한숨까지 섞으며 온몸을 쥐어짜듯 울고 또 울었다.
그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너덜너덜한 천정을 쳐다보고 누워서 찔레 꽃 같은 얼굴로 벙싯벙싯 배냇질을 하고 있는 아들놈을 가깝게 들여다보면서.
"이눔아. 네 에미 덕분에 네눔까지 애비허고 나란히 족보에 오르게 되었어! 애비 이름은 박철성이고 네눔 이름은 박판돌이여! 박판돌 이놈아!"
하고 말하다가는 다시 얼굴을 돌리고 어깨를 심하게 출렁이며 울었다.
넙순이도 함께 울었다.
"아가, 아부지 말 들었쟈. 네놈 이름이 박 판돌이란다. 아가, 네 눔 이름 석 자 얻을라고 이 에미 간장이 을매나 매지매지 녹았는지 아남!"
그러면서 넙순이는 떵한 왼손으로 갓난아기 판돌이의 조막만한 손을 으스러지도록 꼭 쥐었다.
이튿날부터 박쇠는 넙순이를 구례읍내 의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낫에 잘린 팔을 치료했다.
이틀째 의원한테 갔다오면서, 그녀는 의원한테는 그만 다니고, 남은 돈으로 검정 고무신이나 한 켤레 사 신으라고 하였다가 남편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소갈머리 없는 여편네야. 여편네 팔아서 고무신을 사 신어? 내가 사랑놀이를 하는 한량도 아닌디 고무신은 무슨 얼어죽을 고무신! 나헌테는 털메기가 편혀, 맨발로 댕겨도 좋으니께 이녁 팔이나 낫았으면 쓰겠어!"
박쇠의 그 말에 넙순이는
"그래도 이 세상에 참봉어르신만한 분이 없어유. 참봉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우리 팔자에 의원 출입이라니 말이나 되유 ! "
하면서 시울이 크렁하게 젖은 얼굴로 남편을 보았다. 박쇠는 잠자코 지리산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넙순이의 뭉뚝하게 잘린 팔의 상처가 간질간질 아물기 시작할 무렵, 박 참봉 아들은 또 사냥을 가자고 하였다.
사냥을 떠나던 날 새벽 박쇠는 넙순이한테, 늘 품속에 넣고 다니던 아버지의 종 문서와, 족보에 오를 부자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어주며
"가을에 족보를 만든다니께, 그때꺼정만 죽은드끼 참드라고! 족보에 이름만 오르면 이 집에서 나가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서, 화전이나 붙이고 살 작정이니께."
하고 말했다.
그러나, 날으는 뱀이 산다는 벽소령 깊은 골짜기로 참봉 아들을 따라 멧돼지 사냥을 나간 박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사냥을 떠난 나흘만에 참봉 아들 혼자만이 죄지은 사람처럼 온몸에 물기가 확 빠져버린 걸음걸이로 돌아왔다. 박 참봉의 아들의 이야기로는 박쇠가 설맞은 멧돼지한테 덤벼들었다가 멱통을 물려 죽었다고 하면서, 자기도 박쇠를 구하려고 했다가 하마터면 저 세상 사람이 될 번하였다고,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듯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던 것이었다.
참봉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박쇠 아내는 처음에 벼락맞은 사람처럼 얼굴이 참나무 숯 색깔로 변하면서 까무라치더니,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는 울지도 않고. 죽은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아오겠으니 변을 당한 곳까지 안내를 해달라면서 성한 왼팔로 참봉 아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어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참봉 아들은 그런 박쇠 아내의 요구를 거절했다. 처음엔 자기가 죽은 박쇠의 시신을 잘 수습하여 묻어 주었다고 했다가, 박쇠 아내가, 그렇다면 남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하자, 참봉 아들은 어물어물하고 말았으며, 박쇠 아내가 땅바닥에 굼벵이처럼 데굴데굴 구르며 떼를 쓰듯 해서야, 그는 또 길은 자기도 박쇠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 했노라면서 어물어물 해버렸다.
박쇠 아내는 참봉 아들한테, 그렇다면 설맞은 멧돼지를 만난 곳이 벽소령 골짜기 어디쯤이 되느냐고 다시 울면서 물었다. 참봉 아들 말로는, 처음에 그들이 멧돼지를 만난 곳은 벽소령 골짜기 첫들머리 숯막 아래였었는데, 불질을 하여 설맞은 멧돼지가 숯막 위 참나무 숲으로 도망치기에 신령 바위 근처까지 뒤쫓아갔으나, 설맞은 멧돼지도 뒤쫓던 박쇠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
참봉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박쇠 아내는 두렁치마에 모숨이 굵은 털메기를 끄집고 성한 왼팔 휘저으며 그 길로 벽소령 골짜기로 남편을 찾아가겠다고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해 짧은 겨울의 저녁나절 산 그림자가 거뭇거뭇 왕시루봉 허리를 감고 있어, 동구 밖 바람 모퉁이를 돌아가기도 전에 해가 뚝 떨어질 듯싶은 어스름에, 혼자서 외팔 휘저으며 지리산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을 본 솔매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붙들어 잡았다.
마을 사람들한테 제지를 당한 그녀는 다시 질척질척 눈 녹은 고샅에 퍽신하게 발을 뻗고 주저앉아 안산 너덜겅이 쪄렁쪄렁 울리도록 울어버리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그녀의 자라나온 불쌍한 신세를 손금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는 솔매 마을 사람들은 애간장을 갈퀴질해대는 듯한 서러운 울음소리에, 그들 모두가 목구멍 속에 불잉걸을 묻은 듯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다음날 새벽에 모두들 벽소령 골짜기로 함께 가주겠다고 어렵사리 설득을 시켜서야 그녀의 발길을 돌려세우게 하였다.
약속대로 이튿날 새벽에 솔매 마을 장정 다섯 사람이 엽총 대신 창과 낫들을 들고 마을을 떠났다. 참봉 아들은 끝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함께 가주지 않았으며, 여자의 몸으로 지리산 깊숙이 따라올 수 없으니 마을 장정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달라고 한사코 붙잡았는데도, 박쇠 아낙이 자기는 죽어도 좋다고 기를 쓰고 앞장을 섰다.
그들은 나흘 동안이나 징을 치면서 벽소령 골짜기를 이잡듯 뒤졌으나 끝내 박쇠의 시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체는 고사하고, 그의 털메기 한 짝, 그가 짊어지고 따라다녔던 취사도구며 이불뙈기 한 조각 눈에 띄지 않았다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한 박쇠의 아낙은 눈알이 철쭉꽃처럼 빨긋빨긋 충혈이 되어, 자기 남편은 참봉 아들이 죽여서 감춰 놓았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미친듯 울부짖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자기는 시집을 오기 전부터 참봉의 노리개가 되어 온 것을 큰소리로 외쳐대고, 자기 오른팔이 낫에 잘린 연유까지도 숨김없이 까발렸다.
결국 박쇠 아낙은 솔매 마을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되었으며, 박 참봉 집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시아버지의 종문서와 족보에 오를 남편과 자식의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만을 품속에 넣고 갓난아기 판돌이를 왼손으로 들쳐업고 박 참봉 집에서 쫓겨 나오면서도, 그녀는 가슴속 깊숙한 곳에 응어리지고 홀맺힌 한을 풀듯, 박 참봉과 참봉 아들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욕을 퍼부어 댔다. 두려움 없이 퍼부어 댄 욕은 울부짖음으로 변했고, 울부짖음은 다시 자신의 뼈를 깎는 듯한 처절한 울음,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호곡으로 변했다.
박 참봉 집에서 쫓겨난 박쇠 아낙은 거렁뱅이 신세가 되어 지리산 밑 여러 마을을 떠돌음 하였다, 그녀는 행여 남편의 뼈라도 찾을까봐 지리산을 떠나지 못하고 산 속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목줄을 지탱하고 살았다.
그녀는 지리산 산골마을을 오 년 동안이나 떠돌음 하다가, 판돌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봄에야 구례읍으로 나와, 그들 모자를 불쌍하게 생각한 사람 좋은 주막의 과부 도움으로 부엌데기 노릇을 하며 빌붙어 살게 되었다.
판돌이가 열한 살 되던 해 여름, 박쇠 아낙은 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죽기 전 그녀는 나이에 비해 몸집도 크고 마음이 슬거운 아들 판돌이를 옆에 앉혀 놓고, 그녀가 간직해 온 판돌이 할아버지의 종문서와 족보에 오를 부자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를 내주며 그녀가 당해 온 한 맺힌 이야기들을 실꾸러미를 풀듯 숨가쁘게 토해냈다.
그녀는 죽으면서 열한 살 난 아들한테, 참봉 아들이 죽여서 지리산 어디엔가 버려두었을 아버지의 유골을 기필코 찾아내야 한다고 당부를 하였다.
어머니를 지리산 자락에 묻고 난 판돌이는 엉겅퀴며, 톱풀꽃, 버들금불초꽃들이 어우러진 섬진강 둑에 온종일 앉아서, 어머니가 남긴 유언들을 되작거려 머리와 가슴속에 깊숙이 접어 감추었다.
그 길로 판돌이는 어머니한테 받은 할아버지의 종문서와, 족보에 올려주기로 했다는 그들 부자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만을 품고 솔매 마을 박 참봉 집으로 찾아갔다. 박 참봉은 죽고 없었으며 그의 아들이 사랑채에서 북 장고 뚱땅거리며 세상 좋게 살고 있었다.
판돌이는 자신이 박쇠의 아들이라는 것을 숨기고, 꼴머슴으로라도 붙어살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박 판돌이는 박 참봉댁의 머슴이 된 거였다.
긴 이야기를 끝낸 판돌이는 무겁게 머리를 들어올려 동굴의 천장처럼 칙칙하게 내려앉아 있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 하나 돋아나지 않은 어둡고 답답한 하늘이었다.
긴 이야기를 토해낸 판돌이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둠에 묻힌 먼 하늘을 바라보기조차 부끄러워 자꾸만 고개가 무겁게 내려앉은 나도 마음이 별 없는 하늘처럼 숨가쁘게 답답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산상(山上)의 밤보다 더 무겁고 답답한 침묵이 늪처럼 찐득하게 괴었다,
"우리 아버지한테 당신이 박쇠 아들이라는 건 언제 밝혔소?"
나는 바윗덩어리처럼 무겁게 나를 찌누르고 있는 판돌이를 마치 박쇠처럼 생각하면서 우울하게 물었다.
"어디 기회가 있어야죠. 또, 같이 살다보니께 마음이 약해집디다. 사실 지는 도련님댁 머슴이었재만, 두 어른들 도움도 많이 받고 자랐거든요. 그라고 도련님 식구들과 오래 한솥밥 묵고 살다보니께 정도 붙고 해서....., 지난 일들을 잊어버릴까 허는 생각도 납디다. 또 어르신께서 우리 아버지를 쥑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판돌이는 잠시 말을 멎고 머리를 무겁게 떨구었다가 천천히 들어올렸다.
"육이오가 터지고 세상이 뒤집히니께, 지 마음도 세상과 함께 뒤집힙디다요. 좌우당간에 어르신헌테 한번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드만요. 그래서 그 어른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지요. 어르신한테 지가 오래오래 품속에 간직해 왔던, 지 조부님 종 문서허고, 도련님 조부님이 지어주셨다는 우리 부자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이면서, 지 신분을 밝혔어요. 그러고 우리 아버지를 어디서 쥑였느냐고 성질을 냈어요. 사실 그때 저는 어르신네께서 거짓말로라도 지 아버지를 절대 쥑이지 않았다고 말하기를 맘속으로 얼마나 바랬는지 몰라요. 그란디,,,,,,그란디 말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지가 그렇게 바랬던 것과는 달리 우리 아버지를 세석평전에서 엽총으로 쏴 쥑였다고 쉽게 고백을 허시고 말았어요. 아버지가 언젠가는 낫으로 어르신의 아버지를 찍어 죽일 것만 같았고,,,,,, 또 지 부자가 도련님댁 족보에 오르는 것이 싫어서 멧돼지 사냥을 나와 세석평전까지 끌고 가서 쏴 쥑였다고 허드만요. 어르신은 그러면서 보잘것없는 지한테 용서를 빌었어요. 지는 그런 어르신이 싫었든 거지요. 차라리 그때 나헌티 불호령을 치셨더라면 지 마음이 약해져서,,,,,,"
"그래서 판돌씨도 우리 아버지를 세석평전까지 끌고 와서,,,,,,"
"어르신께서 지 아버지를 쥑인 곳을 알고 있다고 해서,,,,,, 지도 어머니 유언대로 울 아버지 뼈라도 찾을까 허고,,,,,,"
"그래, 찾았나요?"
나는 판돌이가 그의 아버지 유골을 찾았기를 바라면서 물었다.
"워디가요. 세석평전을 다 뒤져봤재만 철늦은 철쭉꽃만 휘너후러져서 ------허갸, 족보에도 못 오른 아버진데 무덤은 남겨서 뭘 허겠어요? 차라리 잘됐지요 머. 물론 저도 아직 족보가 없습니다만. 그까짓 족보 있으면 어쩌고 없으면 어쩝니까. 지 아버지는 족보에 이름 석 자 올릴 욕심으로 죽을 때꺼정 껑껑댔지만, 지는 족보 대신 돈을 갖기루 작정했지요. 족보가 없는 대신 돈이라도 몽땅 벌자 허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그래서 돈을 좀 모았지요. 이제는 백만 원만 주고도 지가 박씨 문중에서 문벌 좋은 집안을 탈탈 골라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겄습니다만,,,,,,. 그까짓 족보 있으면 뭘 해요? 주민등록증 하나면 얼마든지 출세를 허는 세상인의. 지는 족본 대신에 아직도 우리 조부님 종 문서허고 도련님 조부님이 박 판돌이라고 지어 주신 지 부자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를 소중히 간직허고 있구만요. 으쩌면 족보보다는 그거이 더 귀한 것일지도 모르재요."
판돌이의 이야기를 듣고 난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바로 판돌이 당신이었구만요 하고 물으려다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을 어둡고 답답한 침묵의 깊은 늪 속에 빠진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갑자기 큰바람이 산정을 횝쓸면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바람이 휘몰아치자 판돌이는 으스스 몸을 털며 텐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나는 그와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비바람 때문에 그를 붙잡지 못했다.
바람이 드세어지고 빗방울도 굵어졌다. 하늘과 맞닿은 산정에서, 어둠에 묻힌 채 비바람을 맞고 있다니, 자신이 한갓 엽록소가 빠져 삐들삐들 말라 비틀어진 떡갈나무 잎이거나, 높은 안의 나무에 붙어서 진을 빨아먹고 사는, 다리가 발간 비단사슴벌레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드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면 낯선 어느 골짜기엔가로 가볍게 날려가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약해진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칼날 같은 번갯불이 어둠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지리산을 허물어버리기라도 할 듯 우르르 쾅 뇌성이 울렸다.
휘익 - 비바람이 몰아치자 몽뚱이가 낙엽처럼 가볍게 어둠이 꽉 찬 허공으로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휘몰아친 비바람이 마치 아버지의 엽총에 맞아 죽어 지리산에서 떠돌음하고 있는 박쇠의 혼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원한에 찬 박쇠의 혼이 우드득 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나를 골짜기 후미진 곳에 뙈기치듯 메어칠 것만 같았다.
겁에 질린 나는 텐트 쪽으로 가보았으나 비바람이 텐트까지 걷어가 버렸다. 나는 아버지의 유골을 옆구리에 끼고 대피소로 뛰어갔다. 일행들이 대피소에 와 있었다. 저녁도 굶은 채 대피소에 신꼴박듯 처박혀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철쭉제에 참례했다가 비바람을 만나 찾아든 등반객들이 자꾸 몰려들어 대피소는 발을 들여 넣을 틈도 없었다.
이따금 박 영감이 내게 말을 건네면서 큰 목소리로 박 검사 박 검사하고 불렀는데, 그때마다 대피소에 가득 처박힌 등반객들이 부러움도 존경도 아닌 평범한 눈으로 나를 가볍게 흘려보았다. 나는 박 영감한테 제발 그 검사라는 말 좀 떼라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기실은 박 영감한테 그런 말을 하기조차도 내 자신이 부끄러워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노루잠을 자다가 얼핏얼핏 잠에 빠지면서 갈피를 잡을 수도 없는 많은 꿈을 꾸었지만 하나도 머리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한 가지 많은 꿈의 조각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모습과, 꿈속에서 박쇠일지도 모른 헙수룩한 사람의 얼굴이 여러 차례 뒤바뀌어 나타난 것이었다. 꿈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박쇠의 얼굴로 바뀌고, 박쇠의 얼굴이 다시 아버지의 얼굴로 영화의 필름처럼 여러 차례 겹쳤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나는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손발이 나른했다. 대피소 안의 희미한 램프 등 불빛 속으로 세운 무릎 위에 고개를 꿍겨박은 채 잠들어 있는 박 판돌을 훔쳐보기조차 부끄러웠다.
나는 마치 무거운 쇠망치로 계속해서 뒤통수를 얻어맞고 있는 기분으로 아침이 밝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박 판돌의 말마따나 판돌이의 부자가 당한 내력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러 고향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결코 아버지의 유골을 조금도 주체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들의 역사는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 속에 묻어두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나는 지리산 골짜기에 떠돌음하는 박쇠의 원혼과, 그런 아버지의 원혼을 달랠 길 없어 괴로워하는 박 판돌이한테 죽은 아버지 대신 용서를 빌고 싶었다.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언제 비바람이 휘몰아쳤냐는 듯 하늘과 산정이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은 부우옇게 진한 우유 빛으로 밝아 오기 시작했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가 뭉얼뭉얼 산을 덮었다. 처음에 나는 구름이 산 위에 내려와 덮인 것으로 잘못 알았다.
날이 밝긴 했으나 허리까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짙은 안개 때문에 산을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일행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꼼짝 못하고 안개에 갇혀 있었다.
동편에 해가 솟아오르자 순식간에 지리산이 허물을 벗듯 안개가 걷혔다. 안개가 걷힌 뒤의 산은 비질을 하고 물걸레로 닦아놓은 것처럼 투명하고 깨끗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안개가 끼고, 해가 떠오르자 수채화처럼 깨끗해진 하룻밤 사이의 변화에, 마치 지리산 상상봉에서 봄, 여름, 가을, 겨을 사 계절을 다 맛본 듯한 느낌이었다.
안개가 걷히고 산이 유리구슬 속처럼 깨끗해지자 일행은 멀리 출렁여 보이는 세석평전의 철쭉꽃밭 물결을 내려다보면서, 천왕봉을 내려왔다.
천왕봉을 내려오면서야 일행은 미스 현과 예비군복의 젊은 인부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리고 보니 미스 현과 예비군복 차림의 인부는 어젯밤 대피소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내가 그 말을 박 영감한테 했더니
"엊그제꺼정만 해도 서로 고양이 쥐보듯 허드니 어느 사이에 배가 맞어 버렸나 보구만. 산이란 그래서 좋은 거여. 어제의 미움이 오늘은 사랑으로 변허니 안 좋은감? 젊은 남녀가 잠시 자취를 감춘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니 내버려두고 먼저 내려가드라고 잉! 안개에 길을 잃지만 안했음사 걱정 없을꺼여!"
하면서 박 영감은 큰소리로 말하고 웃었다. 그는 통천문 부근에 좋은 자리가 있을 듯싶으니 한 번 보고 가자고 하였으나, 내가 그럴 필요 없다고 하여 곧장 세석평전으로 내려갔다.
세석평전 철쭉꽃밭에 내려와 전날에 유골을 파냈던 바로 그 자리에 봉긋하게 봉분을 만들어 아버지 유해를 안장(安葬)했다.
봉긋한 아버지의 무덤 위에 철쭉꽃 그늘이 우쭐거렸다.
"저 꽃들이 아버님의 모습같이 느껴지는군요."
내 말에 박 영감도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이면서,
"이름난 한량이었던 어르신은 죽어서도 저렇게 멋들어지는구먼!"
하고 푸실하게 웃어 보였다.
"내년 철쭉제에도 꼭 오겠습니다."
"그래야재. 내년 철쭉제에 와서 어르신을 뵙고 가야재!"
멀리서 보는 아버지의 무덤은 탐스러운 철쭉꽃 묶음이었다.
"지도 후담에 죽으면 세석평전 철쭉꽃밭에 묻히고 싶구먼요!"
지금껏 말이 없던 박 판돌이의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둑어둑해서야 대성동 골짜기를 타고 신흥에 도착한 일행은 화개를 거쳐 구례읍까지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탈 수가 있었다,
나는 쌍계사 입구 용강에서 내렸다. 마음이 착잡한 나는 쌍계사에서 하룻밤 쉬면서 이것 저것 생각들을 정리한 다음 화개에 나가서 광주 가는 직행버스를 탈 요량이었던 것이다.
"판돌씨, 내년 철쭉제 때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아버지 대신 제가 사과하지요."
나는 버스가 용강에서 멎자 박 판돌의 코 앞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박 판돌은 엉겹결에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서도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박 영감을 돌아다보았다. 그때 박 영감은 방앗공이처럼 커다랗게 고개를 끄떡였다. 박 판돌과 악수를 끝낸 나는 세석평전 아버지의 새 무덤 옆에서 꺾어 들고 온 철쭉꽃 한 가지를 그에게 주고, 여차장에게 떼밀리다시피 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철쭉꽃을 받아든 박 판돌이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무심히 손을 들어 바람처럼 저었다,
쌍계사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그 종소리의 긴 여운에 희끄무레한 밝음이 밀려가고, 그 위로 어둠이 내리 깔렸다.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멀뚱하게 서서 손을 흔들던 나는, 뒤로 돌아서서 두 팔을 벌리고 어둠 속에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지리산을 가슴 안으로 힘껏 끌어안았다, 덩치 큰 지리산이 가슴 뻐근하게 와 안기면서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탈해겼다.
▷『한국문학』(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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