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사 결정(無意思決定)은 정책의제선정 이전단계(pre-politics)에서부터 존재하는 권력작용과 그 영향력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현존하는 세력판도나 이해관계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주제, 기득층의 실리추구에 방해가 될 잠재력을 가진 이슈가 부상하는 것을 미연에 막으려는 권력작용을 일컬어 무의사 결정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신엘리트론자들(neo-elitists)에 의해 개발된 이 개념은 체제내 엘리트집단이 싫어하는 이슈가 의제의 장에 등장하기 어려운 이유를 해석하고 있다. P. Bachrach와 M. Baratz는 E. Schattschneider가 1950년대에 제안한 ‘편견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이라는 개념을 이용, 주제의 성격에 따라 어떤 이슈는 허용하고 또 다른 이슈는 사장(死藏,un-issueness)시켜 버리려 하는 소위 권력의 양면성(two-faces of power)을 설명한다. 엘리트의 이익에 안전한 문제는 의제의 장에 쉽게 등장시키는데(organized in) 반해 아무리 중요한 주제라 하더라도 껄끄러운 문제는 진입을 거절하는(organized out)관행이야말로 제한적 민주주의(limited democracy)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특정한 집단(계층)의 편익향상이나 지존질서유지를 저해하는 주장이나 아이디어의 성장을 막으려는 체계적이고도 의도적인 권력작용을 말한다. 이와 같은 무의사 결정은 관찰하기는 쉽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으로서 검증해야 할 주요연구대상이라는 것이다.
존재형태
중앙정치권에서는 고위 행정관료, 이익집단의 리더, 그리고 정치엘리트들이 연합하여 소위 철의 삼각정부(iron-triangle government, 또는 sub-government)를 구축하고 그들의 공동이익과 기존질서를 저해(또는 개선)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를 선별하는 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또한 지역사회 유지나 토호세력이 서로 연합하여 그들 입장에 도전이 될법한 의제를 억눌러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아예 고사시켜 버리는 행위 등도 관측된다. 이와 같은 권력작용은 각 정책영역별 또는 정부부처별 의제설정과정에서도 개별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무의사 결정이 도래하는 이유와 존재형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특정한 주장이 대두되지 못하게 하거나, 문제의 제기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관련 이론이나 근거자료와 정보를 사전에 차단시키려는 시도가 있다. 부담스러운 문제를 제기할 잠재력이 있는 집단에게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논거나 근거도 제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포함된 행위이다.
둘째로 어떤 집단이 개혁적인 아이디어나 견해를 제기하려 하지만 현 체제 내에 그러한 시도를 반대하는 힘이 막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존제도나 정책기저에 순응해 버리는 상황도 있다. 특정 정책을 제안하고자 하는 주체세력이 이를 반대하는 측이 쌓아놓은 장벽을 의식하고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기대하는 바대로 결실을 얻어내는데 드는 기회비용과 희생이 너무 크고, 또 현존 세력판도를 고려할 때 결실 가능성도 매우 낮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막후에는 반대집단(opposition groups)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사회 전반에 주요문제로 이미 퍼져있는 체제의제나 공중의제(systemic agenda or public agenda)가 공식의제나 정부의제(institutional or governmental agenda)로 바뀌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 쟁점이 되는 주요이슈라 할지라도 권력엘리트나 지역사회의 토호집단이 공식적으로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갈등양상이다. 권력엘리트의 반대에 부딪혀 주장이나 의견을 의제의 장에 근접시키는 데 실패한 개인이나 집단은 체제 저항적 혹은 폭력적 참여수단을 선택하기도 한다.
의제설정단계를 거쳐 정책결정과정에서도 어떤 정책사업이 구체화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집단적 막후 활동으로 긴장 상태가 조성되기도 한다. Cobb과 Elder의 주장에 의하면 체제에 내재하는 타성(system's inertia)은 강력하게 현상유지(status quo)를 선호하게 마련이며 법적,제도적 장치도 그러한 방향으로 고안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지배적인 구도를 뒤흔드는 주장이 부상(또는 선택)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정책과정에서 배제 당한 소외집단은 대응전략으로 선동적인 대중적 저항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사회적인 불안정을 야기하기도 한다.
발전배경 및 이론정향
엘리트론자들(elitists)은 민주주의의 다수결 및 평등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회의 권력구조가 계층화(stratified)되어 있고, 정보자원과 참여수단 등이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슈는 다수시민의 선택이라기 보다 오히려 소수엘리트집단의 의도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엘리트론자들의 시각을 비판한 다원론자들(pluralists)은 사회의 권력이란 여러 세력(집단)간에 다원적이고도 다면적으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권력이 서열화 되어있어 엘리트들만의 입장이 주로 반영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권력을 실제 행사하는 행위와 다만 그러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현상이기 때문에 연구자는 정책과정에서 행사가 되고 있는 영향력과 권력행태를 밝혀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수정 엘리트론(neo-elitism) 또는 무의사 결정론자들은 이러한 다원론적 인식과 방법론을 재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즉, Bachrach와 Baratz는 R. Dahl을 포함한 다원론자들이 의제의 장에 이미 진입한 의제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대안결정에 미치는 상대적인 영향력을 분석하는데 분주하다고 비꼰다. 쉽게 관측되는 권력행사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의제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아예 등장조차 못하게 하는 막후 권력작용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권력을 소유한 집단의 행위가 제대로 관찰되지 않는다 하여 소유만 하고있는(행사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연구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것은 방법상의 큰 오류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슈진입을 제한하거나 거부하는 권력작용도 확인하고 측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책결정과정에서도 다원론자들은 집단별 의중대로 사업내용이 형성되게 하려는 영향력만을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논리로 볼 때, 진입된 의제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결정되지 못하도록 힘쓰는 엘리트집단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도 반드시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사 결정부분이 분석되면 의제의 장에 도달하지 못한 문제가 실제로는 매우 중요하고 이해관계가 첨예한 이슈일 수 있다는 점을 밝힐 수 있다. 또한 정책결정과정에서 각 집단이 그들의 입장을 반영시키기 위해 행사하는 권력작용의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차원의 영향력(그들 입장에 반하는 대안을 사장시키려는 시도)도 진단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평가와 전망
무의사 결정론은 Schattschneider가 ‘제한적인 정치참여’(limited political participation)현상을 설명한 이래 Bachrach와 Baratz가 ‘권력의 양면성’을 논의함으로써 활성화된다. 그 이후 Cobb과 Elder가 이러한 관점들을 활용하여 의제설정과정에서의 무의사 결정 현상을 설명하면서 정책학 분야에서 주요한 개념이 되었다. 무의사 결정은 의제의 장에 등장여부가 이슈의 중요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오히려 왜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이슈화되지 못하는지를 설명하는 권력구조 및 영향력의 존재형태를 밝히는 논거가 되고 있다. 특히 정책 소외집단이 저항적 참여방안을 채택하는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무의사 결정현상이 정권불안정과 체제생존에 어떻게 관련 되는지도 해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의사 결정론은 정책연구에 있어 적실성과 처방성, 그리고 방법론적 과학성을 제고하는데 기여하는 분석의 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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