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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 막시프로체소, 막시 재판, 마피아 형사 재판

Jobs 9 2025. 5. 2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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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 팔코네

Giovanni Salvatore Augusto Falcone (1939~1992)

 

이탈리아의 검사이다. 톰마소 부셰타, 파올로 보르셀리노와 함께 막시 재판을 이끈 주역이나, 결국 마피아의 폭발물 테러로 숨졌다.

 

 

생애

 

팔코네는 1939년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조네 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이 곳은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당시 광범위한 폭격으로 파괴된 곳이었다. 그는 지역 화학공장 관리자 아르투로 팔코네와 루이사 벤티베그나의 아들이었다. 전통적인 교육 이후, 팔코네는 리보르노 해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961년 졸업하여 그는 변호사로 개업했는데 결국 치안 검사로 일한 후로부터 형법에 이끌렸다. 

 

체자레 테라노바 판사1가 살해당한 후 팔코네는 팔레르모의 검찰청사의 수사지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반 마피아 연합이 수사 과정에서 시칠리아 마피아에 대항하여 대규모 공판의 토대를 놓았다. 그러던 중 그들의 지도자가 살해되자 후임이 그 뒤를 이었다. 팔코네는 이 막시 재판이라 불리는 재판을 이끈 주역 중 하나였다. 

 

막시 재판에서 절친인 파올로 보르셀리노와의 콤비와 회유시킨 전직 마피아 조직원 톰마소 부셰타의 증언 덕분에 474명의 마피아 중 360명이 유죄 판결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탓에 복수심을 품은 루치아노 레지오의 후임 격인 살바토레 리이나가 사주한 괴한들2에 의해 1992년 5월 23일, 카파치 근교의 팔레르모 국제공항과 시를 잇는 고속도로 위에서 길에 심어놓은 대량의 폭탄으로 인해 자동차가 폭발하면서 아내와 보디가드들과 함께 사망하였다. 

 

 

 

1988년 뉴욕 남쪽 지구 검사들이 감비노 패밀리와 그 외 조직들 소탕 당시 루돌프 줄리아니와 일한 바 있다.

 

그와 함께 마피아 소탕에 힘을 쏟았던 절친한 동료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Emmanuele Borsellino) 역시 팔코네 사망 이후 불과 몇 개월 만에 마피아의 보복으로 인해 사망했다. 팔레르모 시에 위치한 국제공항이 이들의 이름을 따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으로 명명되어 있다.

 

벌거벗은 세계사 마피아 편에 출연한 이탈리아 패널 아드리아나의 아버지가 경찰이었는데 팔코네 검사의 보호 업무를 맡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아드리아나의 아버지에 따르면 팔코네 검사는 평소 자신이 언젠가 마피아에게 살해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한 번은 팔코네 검사의 집 앞에서 밤샘 경호를 하던 도중 새벽에 멀리서 총성이 들린 일이 있었다. 다행히 총성은 팔코네 검사와는 무관한 다른 사건이었지만, 총성이 들리는 순간 팔코네 검사의 방에 불이 켜졌다고 한다. 자신 관할이 아닌 일에 바로 일어날만큼 팔코네 검사가 자신의 신변에 대해 큰 경계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팔코네 검사 살인 사건은 일본 만화 건슬링거 걸에 등장하는 클로체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2002년부터 팔코네 검사가 암살된 날인 5월 23일을 법의 날(Giornata della Legalità)로 지정했다.

 

 

 

 

 

 

막시프로체소

 

이탈리아어

Maxiprocesso

영어

Maxi Trial

한국어

막시 재판(대재판)

 

 

막시프로체소(Maxiprocesso)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주 팔레르모에서 진행된 이탈리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마피아 형사 재판이다. 1986년 2월부터 1992년 1월까지 6년간 지속된 재판으로 총 474명의 마피아 조직원 중 338명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으며 총 2,665년의 형량이 내려졌다.

 

 

세기의 재판

 

이탈리아 남부는 마피아에 의한 사회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으나 이탈리아 남부의 특수성1에 의해 이러한 문제가 잘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0년대 ~ 1980년대 들어 제2차 마피아 전쟁이라고 불리는 마피아 조직간의 투쟁이 격화하면서 민간의 피해가 점점 심해졌고 어느 정도 마피아를 용인하고 살던 이탈리아인들도 마피아에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다.

 

팔코네(좌)와 보르셀리노(우) 검사

 

 

한편 반 마피아 전선의 선봉에서 활약하던 시칠리아의 치안검사팀 지오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와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는 마피아를 일망타진하기 위한 증거를 모으고 있었는데2, 이를 위해서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할 증인이 필요했다. 팔코네는 마피아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토마소 부셰타(Tommaso Buscetta)를 설득하여 그를 증인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고 부셰타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마피아 조직원 707명을 기소하면서 세기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 당시의 모습

 

 

마피아들의 위협을 막기 위해 재판은 중화기나 미사일 공격에도 끄떡없도록 특수 제작된 팔각형 모양의 벙커에서 진행되었으며 재판에 참여한 모든 관계자들은 카라비니에리의 보호 아래 벙커에서 숙식하면서 재판을 진행했다. 6년간 진행된 재판 끝에 총 19명의 마피아 간부에 대해 종신형이 내려졌으며 338명의 조직원에 대해 총 2,665년의 형량이 선고되었다.

 

 

재판 이후

 

그러나 부정부패가 심했던 이탈리아답게 이들 중에서 실제로 처벌받은 이들은 6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재판이 종결된 지 4개월이 지난 1992년 5월 23일 마피아의 폭탄 테러로 팔코네 검사가 사망한 데 이어 2개월 뒤 보르셀리노 검사도 비슷한 수법으로 마피아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두 검사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탈리아 정부의 무능함에 분노한 이탈리아 시민들은 연일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정부가 본격적인 마피아 척결에 나서면서 막나가던 마피아의 행태에도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이 재판을 기점으로 전통적으로 시칠리아를 기반으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코사 노스트라의 세력이 주춤하게 되었고 카모라, 은드랑게타 등 이탈리아 남부 본토 마피아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으며 정치권 내 마피아와 결탁한 이들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마니 풀리테(Mani pulite) 운동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막시 재판 이후 약 30년 만에 은드랑게타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재판이 이루어졌다. 수년 여에 걸친 은드랑게타 소탕 작전 '리나시타 스콧(Rinascita Scott)'의 결과로 검거된 200여 명의 은드랑게타 조직원들에 대해 총합 2,200년 형의 유죄 판결이 이루어졌으며, 5명의 수뇌부에 대해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시칠리아에서는 마피아 척결에 기여한 두 검사의 공적을 기려 팔레르모 국제공항의 이름을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으로 변경했으며 매년 이들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다.



1992년 7월 마피아의 폭탄 공격으로 부숴진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의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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