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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 매입, 토머스 제퍼슨의 재선, 애런 버의 음모 사건

Jobs 9 2021. 5. 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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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 매입

 

한편 미시시피 강을 둘러싼 지역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애나(Louisiana)'로 불렸으나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AD 1754년 ~ AD 1763년)을 거치면서 미시시피 강의 동쪽은 영국 식민지가, 서쪽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이 독립하자 미시시피 강의 동쪽은 미국의 소유가 되었고 미시시피 강의 서부 지역은 AD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Coup of 18 Brumaire)'로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과 AD 1800년 '산 일데폰소 조약(Treaty of San Ildefonso)'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AD 1801년 카리브 해의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밍그(지금의 아이티)에서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끄는 흑인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군대를 파견하면서 생도밍그의 통치권을 되찾은 후 미시시피 강의 하구인 뉴올리언스에 투입하여 북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까지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투생 루베르튀르의 뒤를 이은 장 자크 드살린이 재차 반란을 일으켰고 풍토병까지 창궐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군이 전멸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생도밍그는 프랑스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내전의 혼란을 거치며 지금의 아이티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리고 미국도 프랑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토머스 제퍼슨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미시시피 강의 주요 무역항인 뉴올리언스를 구매할 의사를 가지며 전권 대사인 제임스 먼로를 파견하여 프랑스 공사인 로버트 리빙스턴과 함께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4만 평방 마일(1십만 평방 킬로미터)에 대해 1천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제시하였다. 하지만 생도밍그 파견군이 전멸하자 이제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장차 있을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 루이지애나가 캐나다에 주둔한 영국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고 군비도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예 미시시피 강 서부의 루이지애나 지역 전부를 매각하겠다며 1천 5백만 달러를 요구했다.

 

비록 루이지애나의 매입은 제임스 먼로와 로버트 리빙스턴은 물론이고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 조차도 연방 의회의 승인을 얻지 않았기 때문에 권한 밖의 일이었지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제임스 먼로와 로버트 리빙스턴은 AD 1803년 4월 30일 매매 조약을 체결한 후 귀국하였고 토머스 제퍼슨의 추인을 받았다. 비록 미국 내에서 헌법 상 부여된 대통령의 권한으로 루이지애나 구입을 결정하는 것이 가능한 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지만 반(反) 연방주의자인 토머스 제퍼슨은 평소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헌법 해석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영토의 2배가 넘는 루이지애나의 무궁한 잠재력을 깨닫고 이를 승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이 직접 의회 설득에 나서면서 AD 1803년 10월 20일 상원으로부터 24 대 7로 조약에 대한 비준을 받아내면서 모든 논란을 잠재웠다.

 

사실 프랑스로부터 구입한 당시에는 루이지애나의 경계선이 불분명했지만 나중에 정확한 측량에 의해서 무려 827,987 평방 마일(2,144,480 평방 킬로미터)에 달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총 매입 금액이 1,500만 달러였기 때문에 사실상 1평방 킬로미터 당 단돈 7달러만 지급하고 구매한 셈이 되었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이 1,125만 달러를 우선 지급하고 프랑스 정부가 루이지애나 주민에게 지고 있던 부채 375만 달러를 미국 정부가 인계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잔금을 천천히 지급하면서 이자를 포함한 최종 지급액은 2,726만 7,622달러가 된다.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

 

미국은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덕분에 영토가 크게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서부 개척의 발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은 AD 1804년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의 탐험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미주리 강 북서쪽을 따라 북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질러 서쪽의 컬럼비아 강까지 연결되는 경로를 탐사하며 태평양에 다다른 후 AD 1806년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Lewis and Clark Expedition)'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각종 동식물과 천연 자원을 조사하고 원주민과의 거래로 강과 호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들의 탐험 정보를 바탕으로 향후 새롭게 발견한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게 된다.

 

미국 대통령 선거 제도의 개편과 토머스 제퍼슨의 재선 성공

한편 미국 대통령 선거가 대통령과 부통령을 동시에 선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A 179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령인 존 애덤스와 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각기 다른 정당에서 선출되는 문제점을 낳았다. 또한 AD 180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같은 당의 토머스 제퍼슨과 애런 버가 동률을 기록하여 하원에게 대통령 선출 권한이 넘어가고 선거도 여러 번 치뤄야 하는 어려움이 발생했다. 이에 AD 1803년 12월 12일 '수정 헌법 제12조(Amendment XII)'가 발의되고 이듬해 9월 27일 각 주의 비준이 모두 완료되어 AD 1804년 말의 대통령 선거부터는 선거인단이 2표를 행사하되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기 선출하도록 수정되었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 중 과반수 득표자가 없는 경우 당초 규정보다 완화되어 하원이 상위 득표자 3명 중에서 1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부통령도 후보 중 과반수 득표자가 없는 경우 상원이 상위 득표자 2명 중 1명을 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부통령인 애런 버는 AD 1800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의 훼방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로도 사사건건 시비가 붙던 중 애런 버가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비록 알렉산더 해밀턴은 그의 아들이 결투로 사망했기 때문에 결투를 원하지 않았으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투를 받아들이면서 AD 1804년 7월 결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양 측이 서로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동시에 당겼으나 애런 버의 총알이 먼저 발사되면서 알렉산더 해밀턴이 치명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하였다.

 

비록 토머스 제퍼슨은 알렉산더 해밀턴을 정적으로 여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견해의 차이일 뿐 개인적인 원한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토머스 제퍼슨은 애런 버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를 차기 부통령 후보에서 제외시켰다. 다만 연방당으로서도 존 애덤스와 존 제이가 은퇴한 상황에서 남은 인물 중 가장 명망이 높았던 알렉산더 해밀턴까지 잃었기 때문에 재선에 도전하는 토머스 제퍼슨에게 맞설 만한 대통령 후보를 내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당의 대통령 후보인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에게 162대 14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애런 버 대신에 부통령 후보가 되었던 뉴욕 주지사 출신의 조지 클린턴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애런 버의 음모 사건

 

한편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매입한 루이지애나에는 이미 프랑스인과 스페인인, 멕시코인, 아메리카 원주민이 뒤엉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어떻게 통치할 지가 문제가 되었다. AD 1804년 토머스 제퍼슨이 백인들이 많이 살던 미시시피 강의 하구 지역 중 북위 33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누면서 남쪽 지역은 '올리언스 준주(Orleans Territory)'로 지정되었고 북쪽 지역은 '루이지애나 지구(District of Louisiana)'가 되었다가 이듬해 '루이지애나 준주(Louisiana Territory)'로 바뀌었다. 그리고 AD 1812년 올리언스 준주가 미국의 18번째 주인 '루이지애나 주(State of Louisiana)'로 승격될 때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루이지애나 준주가 '미주리 준주(Missouri Territory)'로 개명하면서 오늘날의 '미주리 주(State of Louisiana)'가 유래하게 된다. 다만 준주는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곳 주민들은 미국 연방 의회에 대표자를 파견하지 못한 채 세금만 납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애런 버가 부통령 후보도 되지 못한 데 이어서 뉴욕 주지자 선거에서도 낙선하자 크게 실망하여 루이지애나 준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민병대를 조직했고 자신의 친구이자 루이지애나 준주의 주지사로 임명받은 제임스 윌킨슨와 모의하여 스페인의 식민지인 멕시코를 공격하여 독립 정부를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임스 윌킨슨이 배신하여 음모를 토머스 제퍼슨에게 밀고하였고 이에 토머스 제퍼슨이 계엄령을 선포한 후 연방군을 동원하여 애런 버를 체포하였다. 하지만 애런 버가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 대법원장인 존 마셜을 비롯한 대법관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영국과의 마찰 및 통상금지법

 

한편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AD 1804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하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을 연달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AD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영국 해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무력 정벌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나폴레옹 1세는 AD 1806년 '대륙봉쇄령(Continental System)'을 실시하며 프랑스 및 동맹국은 물론 이듬해에는 중립국까지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시켰다. 이에 맞서서 영국도 우세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유럽 대륙의 주요 항구에 대한 해상 봉쇄에 나섰다. 그러면서 탈영병을 수색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미국 선박을 수색하고 심지어는 미국인 선원도 영국 태생인 경우 강제로 징집하여 영국 해군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AD 1807년 6월 22일 미국의 버지니아 주의 노퍽 해안에서 영국 전함 HMS 레오포드 호(HMS Leopard)가 탈영병을 찾는다며 미국의 프리깃 함인 USS 체사피크 호를 나포하는 '체사피크 레오퍼드 사건(Chesapeake–Leopard Affair)'이 벌어졌다. 그리고 체사피크 호의 선원 중 4명이 끌려가 탈영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그 중 1명은 교수형을 당하였다. 다만 나머지 3명은 처형은 면했지만 미국 시민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태형 선고를 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자국의 해안 근처까지 미국 선박이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무력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체사피크 레오퍼드 사건에 대해 토머스 제퍼슨도 분노했으나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경제적인 보복으로 응징하는 방법을 제안하며 AD 1807년 12월 22일 '통상금지법(Embargo Act of 1807)'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의 목적은 미국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무역을 금지시켜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미국의 중립을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괴로운 것은 미국인들었고 캐나다 해안이나 먼 바다에게 포경선과 사략선을 이용한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통상금지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을 최소한으로 하자는 토머스 제퍼슨의 평소 신념과도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이 따랐다. 결국 통상금지법은 토머스 제퍼슨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 종료 직전인 1809년 3월 1일에 폐지되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3선 도전 포기와 제임스 매디슨의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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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808년말 토머스 제퍼슨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의 종료도 다가오면서 그가 원한다면 3선 도전도 가능했지만 조지 워싱턴의 선례를 본받아 그대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대신에 토머스 제퍼슨은 새로운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그동안 신뢰했던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을 지지해 주었다. 한편 민주공화당 내에서 그동안 토머스 제퍼슨이 연방주의자들의 주장을 일부 동조하며 초심을 잃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AD 1806년 존 랜돌프가 그들을 이끌고 '구(舊) 공화주의자(Old Republicans)' 혹은 '제3당(Tertium Quids)'이라고 불리는 민주공화당의 새로운 파벌을 형성하며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에게 대항하고자 했다. 그리고 존 랜돌프 세력은 전(前) 영국 공사인 제임스 먼로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고 나섰다.

 

민주공화당이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경선을 실시하자 토머스 제퍼슨 정부의 부통령이었던 조지 클린턴까지 포함하여 총 3명의 후보자가 나섰다. 그러나 워낙 토머스 제퍼슨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제임스 매디슨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동시에 나섰던 조지 클린턴은 다시 한번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연방당에서는 다시 한번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부통령 후보는 루퍼스 킹이 되었으나 모두 민주공화당 후보에게 맥없이 패배하였다. 이렇게 하여 AD 1809년 3월 4일 제임스 매디슨이 미국의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새로운 미국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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