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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추리온(Centurion), 로만 브리튼, 로마의 브리타니아 지배, 로마 9군단

Jobs 9 2021. 11. 6.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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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Severus)와 함께, 돈으로 황제직을 산 디디우스에게 불복했던 장군은, 알비누스(Albinus)와 니게르(Niger)다. 이들은 모두 코모두스가 로마에서 환락적 생활에 몰두할 때, 그를 대신해서 게르만족들과 싸움에서 큰 공적을 쌓아와서 이 당시에 각기 일리리아(Illyria)와 브리튼(Britain)과 시리아(Syria)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사후 제국을 나누어 가졌다. 세베루스가 가장 먼저 로마로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있었던 판노니아 달마티아가 바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왕조를 연 세베루스가 자신의 지배를 굳히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세력을 제거해야만 했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로 사후에도 비슷한 상태가 있었지만 내전은 불과 1년 정도에 끝이 났다면 두 사람의 제거는 197년에야 끝이 났다.

특히 브리튼에 관해서는 이 시기에 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는데 군단 내지 북쪽의 원주민들의 반란상태가 꽤 꾸준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모두스 생존 시에 있던 군단의 이상한 반란 기도에 대해서는 물론 문헌 자료의 결핍으로 아직까지 완전한 해명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알비누스가 세베루스에 의해 진압된 후, 세베루스가생애의 마지막을 브리튼 원정에서 보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에서 분쟁이 재발했다. 디오(Dion Cassius)는 코모두스 시절에 다키아 등 일리리아 전선에서 전쟁이 있었지만 가장 큰 싸움은 로마의 장군 한 명이 전사한 브리톤(Briton)인들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디오의 이 설명은 소략해서 잘 이해되지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하드리아누스 장성인지 안토니누스 장성인지는 모르지만 북쪽의 브리톤인들이 큰 반란을 일으켜 로마 장군이 전사하게 되어 울피우스 마르켈루스(Ulpius Marcellus)란 장군을 보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했다. 이 때는 페렌니스(Perennis)가 프라에토리안(Pretorian) 장관으로 사실상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였는데 군대의 불만이 그를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브리타니아에서는 군사들이 프리스쿠스(Priscus)란 황제 대리인을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가 거부하자 다시 병사들 중에 1500명의 창병(槍兵)을 뽑아 이탈리아로 보내 페렌니스가 반역해 아들을 추대하려 한다고 황제에게 충고했다. 로마 근처까지 오도록 아무에게도 제지받지 않았으며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페렌니스는 가족들까지 몰살하게 했다. 

디오는 페렌니스가 부정축재를 행하고 반란을 도모했다는 설과는 반대되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이 이후 다음 황제가 되는 페르티낙스(Pertinax)가 부임하게 되면서 브리타니아의 반란의 기운이 가라앉았다고 디오가 서술하고 있지만, <황제역사(Historia Augusta)>를 보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잠잠해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그가 도착한 후 병사들의 어떠한 반란도 방지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이 황제로 만들기를 원했고 페르티낙스 자신이 선호할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페르티낙스는 선망이란 나쁜 성질을 얻게 되는데, 안티스티우스 부루스(Antistius Burrus)와 아리우스 안토니누스(Arrius Antoninus)가 왕좌를 열망하고 있다는 혐의를 코도두스 앞에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는 브리튼(Britain)에서 그 자신에 대한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그중에 큰 위험에 직면했다. 군단(legion)의 반란 중에 거의 죽을 뻔했고 실제로 살해된 자들 중에 남겨졌다. 이 반란을 페르티낙스는 아주 엄하게 처벌했다.>

디오의 말을 따르자면 이들의 반란 통에 죄없는 페렌니스가 살해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고 페르티낙스조차도 황제가 되어 주지 않는다고 심한 곤욕을 치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사가들 마다 증언이 엇갈려서 정확한 해명은 불가능하다. 이쯤에서 로마의 브리타니아 지배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이를 통해서도 앞의 일들이 온전히 해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로마 제국의 정복 과정을 담은 지도
AD 43년(클라우디우스)
AD 43~47(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AD 47~52(오스톨리우스)
AD 52~57(디우스 가일루스)
AD 57(쿠인투스 베라누스)
AD 58~60(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AD 69~71(베르티우스 롤라누스)
AD 71~73(페르틸리우스 코르알리스)
AD 73~77(율리우스 프론티누스)
AD 77~84(아그리콜라)

 

<초기 브리튼에서 로마의 군사 행동과 거점들>


브리타니아는 로마인들에게 알려진 가장 큰 섬이었다. 최초의 정복 시도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중에 있었다. 이 전쟁 중에 베네티(Veneti)족의 반란을 브리튼인들이 도왔다는 원정의 한 이유처럼, 브리튼 인들이 영국 해협을 통해 갈리아와 교류가 많았던 것이 이 당시의 상황이었으며, 이런 관계는 아마도 훗날의 앵글로-색슨의 침입처럼 거의 지속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로마 통치기에도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5년과 54년 두 차례 섬으로 쳐들어 갔다. 당시 브리튼은 여러 수많은 왕들이 할 거하고 있었으며 여기서도 카이사르는 로마의 전통적인 정책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일부의 왕과는 제휴하고 일부는 정복하는 형태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 후 일단 철수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해협의 건너편인 콜체스터 주변은 주로 이곳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왕이 되는 경우가 잦았는데 아우구스투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코미우스(Commius)의 경우도 건너가 아트레바테스(Atrebates) 족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브리튼의 여러 왕실에서 밀려난 왕족들이 로마에 와서 탄원하는 경우도 잦았고 이것이 로마의 침공의 명분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때에는 영국 침입은 없었지만, 그가 로마를 비우고 갈리아에 있을 때 브리튼 정복의 소문이 퍼졌었다고 한다. 카투벨라우니(Catuvellauni)족이 영토를 확장해 근거지를 콜체스터로 옮기고부터 로마와 접촉하게 되는데 이때 그 왕족이 귀순해와 칼리굴라 황제가 브리튼 정복을 고려하지만 일찍 제위에서 내려오는 통에 실현되지 않고 본격적인 정복은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때문에 그의 아들이 처음으로 브리타니쿠스(Britanicus)가 된다. 서기 43년 정벌을 시작해서 남쪽 지방을 장악해 속주화를 시작하고 로마의 식민시(colony)를 설치한다. 속주화 중에도 여전히 할거하는 왕이 있는데 이들 중에 몇몇은 여전히 물론 충성하는 조건하에 로마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고 타키투스는 말하고 있다.  이 군사기지가 콜체스터에서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로마 지배가 확장하게 된다. 원주민이 순순히 복종만 한 것은 아니고 61년에 부티카의 반란과 같은 위험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베스파니아 조 시대에 아그리콜라가 뛰어난 전략으로 섬 북쪽의 칼레도니아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섬 전체를 통제하게 된다. 타키투스에 관해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게르만 전선에서 그곳의 부족들과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일부 제휴하는 일과 그로 인해 보조병들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은 알겠는데 게르만에서 모집한 모조병들을 이 브리타니아 전선에까지 데려와서 활용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음과 같은 그 시대 벌어졌던 일에 대한 것이다.

<아그리콜라(Agricola)는 사원, 법원, 거소를 짓는데 개인적 격려와 공적인 원조를 주었으며 활동력을 칭찬하고 게으름을 나무랐다. 이렇게 영예로운 경쟁심이 강요를 대신했다. 그는 족장의 아들에게 마찬가지로 후한 교육을 제공했고 브리톤(Briton)들이 자연적 힘을 갈리아인들의 산업보다 선호함을 보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말을 업신여기던 그들은 유창함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역시 우리 식의 옷 입는 경향이 선호되고 토가가 유행했다. 한걸음 한걸음 악덕(vice)의 모든 것들 욕실, 욕조, 우아한 연회장들에 이끌렸다. 이 무지한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문명화(civilization)라 불렀지만 단지 사실 노예화의 일부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이후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로마화가 이루어진다. 122년에 하드리아누스가 이곳을 방문하게 되고 이어 앞으로 격렬한 토착인들의 저항을 예고하듯 두개의 장성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의 성벽들이 쳐지게 된다. 그리고 이 장성은 아그리콜라가 행했던 정복에서는 후퇴된 즉 칼레도니아를 포기한 정책을 반영한다. 그 후 코모두스 시기와 같은 군대의 반란과 불복종에 휩싸인 데다가 알비누스와 같이 독자적으로 황제를 선언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알비누스는 세베루스와 결전을 벌이고자 갈리아로 가게 되어 일시 이곳에 군사적인 공백이 생긴다. 다시 이곳에 반란이 일어나서 세베루스가 이곳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원정 중에 사망한다. 이 세베루스 왕조 중에 브리타니아 속주가 두 개로 나뉘게 되고 런던과 요크가 각기 수도가 된다고 한다.

 

 

닐 마셜 감독의 ‘센추리온(Centurion)’은 로마의 최강 전투부대 제9군단이 전원 실종된 역사적 미스터리를 기존 문헌을 토대로 복원하고, 그 위에 영화적 상상력을 불어넣어 만든 팩션 영화다.

서기 117년. 로마 제9군단은 지금의 스코틀랜드 지역에 살던 난공불락의 픽트족과 전투 끝에 크게 패하고 부대를 이끌던 장군 비릴루스는 포로로 잡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전사들은 장군을 구하기 위해 검투사 출신의 퀀투스(마이클 패스벤더)를 따라 다시 한번 적진에 뛰어든다. 하지만 장군 구출작전은 실패하고 로마군 최후의 전사들은 픽트족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굶주린 늑대처럼 퀀투스와 로마군의 뒤를 쫓는 에테인(올가 쿠릴렌코)은 로마군에게 가족을 잃고 복수심으로 불타는 픽트족 최고의 여전사. 귄투스가 이끄는 로마 전사들은 여전사 에테인이 중심에 선 픽트족과 죽어야만 끝나는 마지막 전투를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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