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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 벨기에, 콩고, 고무, 손목 절단, 학정

Jobs9 2024. 10. 3.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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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


벨기에 제2대 국왕
Léopold II

1835년 4월 9일
벨기에 브뤼셀
1865년 12월 17일 ~ 1909년 12월 17일
콩고 독립국의 주권자
1885년 7월 1일 ~ 1908년 11월 15일

벨기에의 제2대 국왕. 콩고 식민지에서의 악명 높은 범죄 행위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자가 인간이라면 난 예수 그리스도다.
크리스티안 10세의 비난.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와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필리프 1세의 딸 오를레앙의 루이즈 마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인 루이 필리프가 생후 1년 만에 사망해서 차남이지만 사실상 장남 취급을 받게 되었는데 지리 과목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성적이 별로였다. 

덕분에 어머니 루이즈 마리는 아들이 죽을 것을 걱정하여 건강을 최대한 생각하여 그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면서 키웠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 레오폴드 1세도 아들에게 "만나려면 알현 신청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고 레오폴드 1세 스스로도 아들에게 말을 전할 때 시종을 통해서 전달했다. 

어머니 루이즈 마리는 원래 몸이 허약한 데다 아들의 죽음에 슬픔을 느껴서인지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1850년에 사망했다. 당시 그는 15살이었는데 그는 어머니와 형이 이렇듯 일찍 죽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서 건강에 집착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살에는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리에트와 결혼했는데 아이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자 레오폴드의 사촌 형인 앨버트 공에게서 성교육을 받았다.

한 세대 전이었다면 지위 있는 남성이 정부를 두는 것은 (일각에서 오해되듯 없으면 도리어 나쁜 놈 취급을 받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너도 나도 하는 것으로 선만 안 넘으면 아무 흠도 되지 않는 것으로서 용납될 법한 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홉스봄이 자본의 시대라고 부른 이 시대는 이미 청교도적 부르주아 윤리가 헤게모니를 가져오는 시점이었다.

어쨌든 그는 1855년에 벨기에 상원의원이 되었는데 특히 벨기에의 무역을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국회 상원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이 때부터 "벨기에의 식민지를 만들고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54년부터 1865년까지 광범위한 해외여행을 했는데 인도와 중국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지중해의 해안과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30세 무렵에 아버지 레오폴드 1세가 1865년 12월 10일에 사망하면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벨기에 왕위에 올랐고 12월 17일 취임 선서를 했다. 

 

 

콩고 독립국 수립

그의 시대는 제국주의의 절정기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의 대다수 서방 국가들이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대였다.

허나 당시 그의 콩고 독립국에서는 고무 생산을 위한 행해진 유럽인 관리관들이 저지른 원주민 학대 행위는 두고두고 논란을 일으킨다. 

그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식민지를 보유하는 것만이 강대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에 비해 후발주자인 벨기에는 아직 마땅히 해외 식민지가 없었고 그는 어떻게든 식민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벨기에는 경제력이 괜찮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식민지 구입을 시도했다. 사실 여기까지였다면 당대에 흔했던 전형적인 제국주의자 군주의 행보였다. 

그는 벨기에 정부에서 돈을 지원받아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구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신들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내줄 터가 없었던 스페인 측이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왜냐하면 필리핀은 스페인이 동남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유일한 식민지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할 때 사용하는 매우 중요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그는 식민지를 얻기 위해 많은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국왕으로 즉위했던 때는 서구 열강의 세계 식민지 쪼개먹기가 절정에 이르던 때라 후발주자였던 벨기에가 건드려 볼 만한 식민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계획이 차질을 빚던 와중에 당대엔 미개척지였던 콩고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1876년 그는 "아프리카에 벨기에의 근거지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때까지도 콩고의 지배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는 외무부의 아우구스테 램버몬트 남작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서 "아프리카에서 뭔가 일을 해보고 싶네. 다른 나라의 개척자들이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네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도 나서서 평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으로 시행하여야 하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이자 목표일세."라며 콩고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1876년 그는 아프리카를 연구하고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브뤼셀에서 지리학 회담을 개최했다. 물론 그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진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위장했다. "여러분들을 브뤼셀로 초대한 것은 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애초부터 전혀 없습니다. 제 나라 벨기에는 자그마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나라이며, 저에게 많은 면에서 만족을 안겨주는 나라입니다."라고 이야기하자 많은 참가자들이 레오폴드에게 매혹되었고 그들은 그를 아프리카에 인도주의적인 행동을 취할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1876년 9월 14일 브뤼셀에서의 지리학 회담 이후 그는 40여 명의 벨기에인 실업가, 군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콩고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표면적인 목적은 "미개척지의 탐험과 더불어 고통 받는 흑인을 돕는다"는 인도주의였지만 당연히 실제 목적은 콩고 지역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아프리카라는 엄청난 케이크를 얻을 수 있는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고 적었다. 그는 당대의 유명 미국인 탐험가였던 헨리 모턴 스탠리를 보내 콩고 지역을 탐사하도록 했는데 그는 이 탐사를 "아프리카 흑인을 돕기 위한 박애주의와 학문적 탐사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이 거짓말이 얼마나 그럴듯했는지 그에게 기부금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여러 국가들을 구워삶았다.

그는 자신의 콩고 지배를 강대국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미국에 로비를 했는데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콩고에 흑인을 위한 나라가 생기면 귀찮은 미국 흑인들이 다 그쪽으로 건너가서 살겠지?"라는 생각을 해서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일부 미국 흑인들도 "미국에 계속 있어봐야 백인 밑에서 개고생할 뿐이다"라는 생각에 찬성했다. 이에 미국 정부도 "미국인들이 콩고에서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 수 있도록 보장하고, 콩고에서는 미국 상품에 면세 혜택을 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때 콩고의 부족장이 사인했던 조약문 하나를 미국 정부에 보냈는데 이 문서에 "콩고 협회가 모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한다"는 조항을 빼서 미국 정부도 속아넘어갔다.

그렇게 미국 정부는 세계에서 최초로 콩고 독립국을 승인했으며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 다른 강대국들도 설득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는 전술한 바와 같이 "모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한다."는 조항을 빼서 그 권모술수의 달인이라고 불리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마저 속였다.

그는 자신을 콩고의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문명화를 하려는 모범적인 이미지로 포장했고 결국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콩고의 실질적 지배권을 확립받을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때 그가 얼마나 선전과 거짓말을 얼마나 잘 써먹었는지 그가 콩고의 지배권을 갖게 되자 각 나라의 대표자들이 그라면 콩고와 흑인들에게 잘해줄 거라고 착각해서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에서 뛰면서 기립박수를 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잔혹한 학정

 

제 몫의 고무를 채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딸의 잘린 손과 발을 바라보는 아버지. 딸의 나이는 불과 5살이였다. (1904년)



하루당 고무 채취량을 충당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벨기에인 감독관은 그 남자(은살라)의 딸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딸아이의 이름은 보알리였고, 그녀는 5살이었다. 그리고선 그 아이를 죽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의 아내도 죽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충분히 잔인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확실히 일을 끝마치기 위해... 아이와 엄마의 시신을 먹었다. 그리고서는 은살라에게 토큰을 던져줬는데, 그가 세상 모든 것보다 더욱 사랑했던 그의 딸이 차고 있던, 한때는 살아있었던 그녀의 몸뚱이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그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노예 생활로 인해 반쯤은 이미 파괴되었겠으나, 이 일이 그의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 남자가 벌인 일이다. 수천 마일이 넘는 곳에 사는 한 남자, 더 이상 거머쥘 부조차도 없는 남자가, 본인의 영달을 위해 이 땅이 자기 것이라 선포하고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선포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레오폴드는 이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 남자와 여자들이, 같은 인류 형제자매이며 유럽 왕족을 빚어 만든 하느님의 같은 손으로 빚어 만들어졌다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Judy Pollard Smith(2014), 《Don’t Call Me Lady: The Journey of Lady Alice Seeley Harris》中 발췌 번역. 이 전기는 앨리스 실리 해리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녀는 콩고에 파견된 영국인 선교사로 그녀가 찍은 사진들과 그녀가 적은 술회담은 콩고 독립국에서 벌어지는 참사를 낱낱이 고발했다.

 


열강들에게서 콩고의 지배권을 인정 받은 그는 자신의 개인 사유지인 콩고 독립국을 창립하고 헨리 스탠리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제안을 했다. 스탠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그의 지원으로 벨기에의 은행과 합작하여 1878년 '콩고회사'라는 사설 회사를 만들어서 아프리카 진출에 착수했다. 스탠리는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전 콩고 지방을 돌면서 원주민 추장에게 구슬이나 옷감 등을 선물하고 자신이 가지고 간 종이 위에 그 종족의 표시를 그리거나 X표를 찍게 했다. 

대부분의 족장들은 이전에 글로 된 문서를 본 일조차 거의 없었다. 콩고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호의의 표시로 찍어준 종이는 훗날 콩고를 침략하는 전면 위임장이 되었다. 콩고 사람들은 "벨기에 사람들이 우리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저러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들이 서명한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상속권과 계승권을 협회에 양도하고, 영토에 대한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중략)... 영토의 어느 지역에서든 당 협회가 시행하는 작업, 원정사업에 언제라도 노동력이나 기타 수단을 지원한다. 이 나라를 관통하는 모든 도로와 수로의 통행료 징수권, 모든 수렵, 어업, 광산, 삼림개발권은 당 협회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이 종이에는 땅뿐만 아니라 노동력까지 제공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는데 그 계약은 맨해튼을 양도한 미국의 인디언들의 조약보다 훨씬 더 악질적이었다. 스탠리의 속임수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를 넘겨받은 그는 500명의 원주민 추장들에게 권리를 넘겨받은 증서를 갖고 있다며 벨기에의 75배 넓이에 달하는 콩고를 자신의 지배하에 놓는 데 성공했다.

그가 세운 콩고 독립국은 벨기에 정부 소유의 식민지가 아니라 그의 개인 사유지가 되었는데 이유가 참 가관이었던 것이 당시 벨기에 의회에서 식민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절대왕정이 아니라 총리가 통치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기 때문에 군주가 정치에 참여하려면 회의에서 내각에 요구를 해야 했는데 벨기에 정부는 식민지 건설을 거절하고 왕실에서 개인 사유지로 건설하라고 주장했다. 콩고는 그가 죽기 직전에 국가에 소유권을 반납하고 나서 벨기에령이 되었다. 벨기에 정부는 왕이 뭐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물론 국민들도 애초에 관심이 없었지만 알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폴드 2세 혼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콩고 개발에 재산을 쏟아부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벨기에 정부에 손을 벌렸는데 그가 사망할 때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벨기에 정부의 돈을 받게 된다. 그는 콩고 독립국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처음에는 콩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국왕처럼 보였다.

1889년에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했던 산들과 정글을 통과하는 근대식 철도를 깔았고 1889년부터 1890년까지 그는 브뤼셀에서 노예무역을 없애기 위한 반(反) 노예 회의를 열었는데 "아프리카 북부의 무슬림들이 노예를 사고 판다."고 비난하면서 영국 시민단체인 원주민 보호협회의 명예회장에 임명되었고 수도 브뤼셀을 반 노예제도 회의장으로 제공해서 인심을 얻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다른 제국의 권력자들이 참가했고 그는 그들에게 다양한 지역 곳곳에 요새를 세울 것을 제안했는데 "그러면 아랍 노예상인들의 급습을 방지할 수도 있고, 요새를 대륙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운반차들의 거처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콩고에서 이런 노예상인들을 몰아내려면 군대를 쉽게 움직이게 철도 등을 깔아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니 콩고에서 수입세를 받겠다."고 제안하자 참가국들이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1891년 그는 법을 제정하고 1892년 상아와 고무 무역을 독점해 버렸다. 곧이어 우방이-우엘레(Ubangi-Uele) 강 근처와 숲 속 주변에 살고 있던 콩고인들을 강제로 추방했는데 고무나무를 수집하고 상아를 위해 코끼리를 사냥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원주민들은 고무나무 수집과 코끼리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우엘레 마을에서의 모든 무역이 금지되었다. 콩고 원주민들의 생계를 망가뜨리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원주민들은 이미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단 콩고 독립국의 최초의 칙령을 요약하면 콩고에 있는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몰수 선언이나 다름없는 소리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나오는 수익의 절반 이상이 그의 개인 재산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장식품으로 수요가 높은 상아를 주 수입원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원주민들을 시켜 코끼리를 사냥해 상아를 수출하였으나 예상 외로 수입이 변변찮자 새로운 수입원을 찾았는데 그 대상은 바로 고무였다. 때마침 세계에서는 고무 붐이 일어나고 있었고 콩고에는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는 고무나무가 국토에 절반 정도나 있었다. 

후술할 내용의 이해를 위해 여기서 왜 고무 붐이 일어났는지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콜롬버스도 서인도 제도에서 고무를 보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고무의 활용 방법을 잘 몰랐다. 18세기 들어서야 고무가 연필 자국을 지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1823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매킨토시가 천에 고무를 입혀서 방수포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1839년에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가 우연히 유황을 고무와 조금 섞으면 고무가 차가울 때 잘 굳어지지 않고 뜨거울 때에도 끈적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혁신적인 발견으로 고무장화나 비옷의 문제점이 해결되었으며 드디어 고무의 대중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1890년 영국의 존 던롭에 의해 공기를 채운 고무 타이어를 이용한 자전거가 발명되자 전 유럽에 자전거 열풍이 불어닥쳤다. 이를 시작으로 단 몇 년 만에 고무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무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해서 타이어뿐만 아니라 호스와 튜브는 물론 전기 와이어 등의 절연 장비의 주 재료로 쓸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폭발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있던 자동차 산업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고무의 수요량이 급증했는데 기존의 고무 생산량은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서 고무 원자재의 품귀 현상이 발생했고 고무 가격은 1890년대 내내 천정부지로 급등했다. 

이에 그는 원주민을 몽땅 투입해서 고무 생산에 콩고의 전 역량을 집중하고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물론 상아를 비롯한 다른 특산품을 착취하는 것도 여전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원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외부에서는 콩고가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893년 250t도 되지 않았던 콩고 독립국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 6000t으로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원주민을 시켜서 플랜테이션 산업을 시키고 결과물을 값싸게 착취하는 것은 그나마 폭정 선에서 머물렀겠지만 이 작자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고무는 응고된 수액으로 일명 '눈물 흘리는 나무'에서 채취되는데 콩고에서 눈물 흘리는 나무는 란돌피아(Landolphia owariensis) 종으로 이 종은 라텍스가 빠르게 응고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는 칼로 줄기를 발라서 라텍스가 손이나 팔에 흐르게 해서 빠르게 굳게 한 뒤 벗겨내는 것이었는데 이 때 작업자의 털도 같이 빠져 버리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고무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로 마을 인근의 넝쿨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동이 나 버렸기 때문에 콩고 원주민들은 열대우림의 넓은 지역으로 나가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보호장비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 원주민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등이나 다리, 팔 등이 부러지는 상황이 속출했다. 게다가 연중 열대성 폭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무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습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고무 채취는 아무리 힘이 좋은 사람들도 기피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원주민들이 고무 생산을 기피하자 그는 고무를 확보하기 위해서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온갖 방법들을 동원했다. 고무 채취 작업은 '검은 용병'이라 하는 주변국 출신 원주민 군인들을 이용하여 이를 강제했는데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흑인 마을에 들어가면 곧바로 여자들을 잡아 감금한 후 가족에게 이를 알렸고 가족들이 이를 풀어 달라고 하면 협상을 했는데 그 조건은 "고무를 가져와야 여자를 풀어준다"는 것이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고무 채취를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강간 후 살해당했다. 남자들이 정해진 양의 고무를 가져왔다고 해서 그대로 풀어준 것도 아니었으며 여자 1명당 염소 2마리를 추가로 주어야 석방될 수 있었다. 

원주민들에게 개인별로 생산 할당량을 지정하고 이를 맞추지 못한 자들은 손을 절단하는 극악무도한 정책을 펼쳤다. 게다가 할당량을 못 채운 사람을 한 번은 손만 자르고 살려주었지만 두 번째는 아예 한쪽 팔을 잘라 버리고 거기에 세 번째까지 채우지 못하면 목을 잘랐다. 콩고의 벨기에 관리들은 열심히 일한다는 증거로 잘린 팔이 가득한 바구니를 내세우고 다녔고 벨기에 군인들은 지급 받은 총알이 낭비되거나 사냥 혹은 반란에 사용되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보통은 이것을 시신의 오른손으로 증명했는데 간혹 군인들이 총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인간들을 빗맞히기라도 하면 아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잘라서 바쳤다고 한다. 1896년에 독일에서 발행된 신문에 의하면 지방 행정관이 단 하루에 잘린 손 1,308개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 따위였다 보니 콩고의 원주민들 사이에선 "백인들의 통조림은 흑인의 팔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할당량은 한 사람이 죽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주변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이양되었다. 자신의 몫도 채우기 힘들 판에 남의 몫까지 뒤집어쓴 자들은 남아날 겨를이 없으니 결국 전부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처형당한 자의 할당량은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아무튼 이러한 만행은 벨기에 왕국에는 안 알려졌다고 하는데, 콩고가 철저히 왕의 소유물이다 보니 벨기에 정부와 국민들은 왕이 벌이는 일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한 사람들이 벨기에 사람들이며, 후술하듯 외국인들도 눈치챌 정도로 대규모 참상이라 국제적으로 소문 다 났는데 과연 몰랐을지는 의문스럽다. 그리고 레오폴드 2세의 사기에 속아 넘어간 외국에는 분명하게 알려졌다. 먼저 대영제국 런던에 있는 식민성에 벨기에가 얼마나 잔인하게 아프리카인들을 학대했는지 자세한 기록들과 보고서가 전해졌는데 대충 요약하면 "채찍질, 고문, 강제 노동, 볼모로 잡아놓기, 쇠사슬에 묶어 감금하기, 강간, 학살 등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하다 보니 할당량을 위해 주민들끼리 돌을 들고 서로 싸우는 일은 매우 빈번하게 벌어졌으며 나중에는 아예 연좌제 방식으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 전체의 주민을 싸그리 다 죽여 버리는 방법까지 사용했다. 이러한 정책에 콩고 민중들이 반항하면 군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최신식 현대 병기로 무장한 벨기에군에게 원시적인 무장을 갖춘 콩고 원주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벨기에 정부에서 가끔 "콩고 독립국의 재정 상황을 좀 알아보자"며 자료를 요구하면 역분식회계로 주작질을 한 후에 수익을 축소한 자료를 제출했고 국채도 마구 발행했는데 이 국채의 상환 기간이 99년이라 최소한 자기가 살아 있을 때에는 걱정이 없다 보니 이렇게 모은 돈으로 각종 건물이나 기념물을 지어댔다고 한다. 하는 걸 보면 알겠지만 벨기에 왕국이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관심도 없던 진짜배기 폭군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막대한 부를 쌓게 되자 세계의 창부들을 끌어들였다는 이야기가 전 유럽에 퍼지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1885년 영국에서 열린 법정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알려졌다. 영국 여성 인력의 대륙 유출을 억제하는 단계에서 고급 '매음굴'을 고발해서 재판이 열렸는데 그 업소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젊은 여자들을 꾸준히 공급받는 조건으로 1달에 800파운드를 지불했으며 여자들 중 일부는 10 ~ 15세 가량의 소녀였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은 학자들이 현재 돈으로 환산한 결과 약 11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그의 재산은 여러 곳에 숨겨져 있었는데 그의 사후 두 딸이 유산을 달라고 벨기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콩고에서 모은 재산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자식인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벨기에 정부는 그가 숨겨두었던 대부분의 재산을 찾아내서 국고에 귀속시켰다.

일부 시각을 따르면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수법은 벨기에가 개입하기 이전부터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권에서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관습이었고, 이러한 행위는 현지의 하위 관리자인 흑인들이 자체적으로 행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콩고 전역에 상주하고 있는 벨기에군은 숫자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내치를 위해서는 좋든 싫든 현지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허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러한 야만적인 풍습을 막으려고 했거나 하다못해 묵인하는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옹호받을 여지가 있으나 오히려 이용하다 못해 더욱 조장하였기 때문에 크게 비판받아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애초에 이러한 처벌 방식이 관습적으로 있었다 하더라도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처럼 막 나가는 수준으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의 이러한 유혈낭자한 압제 정책은 다른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배하던 여러 아프리카 나라로 퍼져나가 이 나라들이 독립한 뒤 내전에서 반군들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그대로 잘 써먹었는데 이러한 야만적인 방식이 공포감을 확산시키는 것도 있었고 "손이 없으면 서명도 못하고 도장도 못 찍으니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식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채취해야 할 목록에 다이아몬드와 희토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잔악행위로 인하여 많은 콩고인이 할당량 미달을 명목으로 처형당했다. 다만 당시에 정확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1924년 이전의 통계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의 콩고에서 학살 당한 콩고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추정에 따라서 적게는 수만 ~ 수십만, 많게는 백만에서 수백만 단위에 달하는 콩고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 수면병과 같은 아랍 노예 상인들이 퍼뜨린 전염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다수 포함된 수치다.

천만 이상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당대의 추정치 중 하나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아무리 콩고가 세계에서 11번째로 넓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수렵 / 채집 위주의 부족 체제였다가 15세기에나 콩고 왕국이 등장하고 제대로 된 대규모 농업의 역사는 더욱 늦어 영역 대부분이 미개간 정글이었는데 산업혁명으로 인한 식량 생산 폭증의 도움도 없이 이미 3000만의 인구 대국이었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콩고의 인구를 추산할 수 있는 명확한 사료 등이 없지만 짧은 농경의 역사, 미개간지가 대부분인 상황, 열대우림기후 등을 생각해 봤을 때 콩고의 인구수는 3000만은 커녕 1000만조차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만약 그가 식민지인들에게 그냥 생산품을 수탈하고 안 하면 그냥 감옥에 가두거나 어느 정도 불이익을 주는 적당히 악랄한 선에서 끝났다면 세실 로즈 급의 골수 제국주의자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악랄한 놈이지만 적어도 대학살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애초에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던 만큼 적어도 동급의 유럽 국가들에게는 욕 안 먹었을 테고.
"백인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몇 명의 원주민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면서 원주민을 총으로 후려갈기며 '고무를 더 가져와라.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고 위협했다. 공포에 질린 원주민들은 휴대할 식량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고무나무 숲으로 가려면 왕복 2주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병사들이 왔다. '뭐야,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어?' 하며 몇몇 원주민을 처자식 앞에서 사살했다. 가족들은 울부짖으면서 사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음식을 갖고 있지 않다.' 고 항의하자, 병사들은 '그냥 떠나라.' 고 호통을 쳤다. 불쌍한 원주민들은 모닥불을 피울 부싯돌 하나 없이 맨손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정글로 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밤의 추위로 죽어갔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총살 당했다." 
영국의 선교사 스크리워너가 전한 참상.


"예상가(Esanga, 콩고 강의 남쪽)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무 바구니 50개 대신 바구니 49개를 가져온 예상가 마을 사람들은 감금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파수병들이 그들을 찾아왔다고 했다. 예상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이 잔인하게 살해 당한 끔찍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친척들이 자신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총살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숲 속에서 남자들이 고무를 캐내는 동안, 파수병들은 그들의 아내를 유린하고 잔인하게 다뤘으며 고문하기도 했다. 그들이 직접 겪은 고통들을 헤아려보면 그들이 백인 남성들을 바라보는 견해가 부정적이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 선교사들은 가끔 주님을 통한 구원이 이들에게는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콩고에서는 카카오에 대한 생산도 이루어졌는데 백인 관리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카카오를 재배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고 사실상 공짜로 카카오를 무더기로 쓸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콩고는 국토 전체가 초콜릿을 재배하기 가장 적합한 땅이었기 때문에 포라스테로나 크리올로 같은 품종 재배에 유리해 카카오 농장을 닥치는 대로 만들었고 당연히 원주민들에겐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은 채 카카오 열매를 무더기로 쓸어갔다. 현재 스위스 못지않게 유럽에서 초콜릿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고디바나 길리안, 노이하우스로 대표되는 벨기에의 초콜릿 가공 산업은 그의 카카오 수탈을 기반으로 발전했다는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  

물론 이런 학정에 대항하여 흑인 군인으로 복무하던 바테텔라(Batetela)족이 1895~1899년까지 군사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몇몇 원주민 국가들은 식민지의 권위를 반대하며 저항했으나 모두 벨기에에게 진압당했다. 

뿐만 아니라 콩고 자유국에서는 흑인들만 노역에 처해진 것은 아니었다. 540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콩고의 철도 공사를 위해 투입되었는데 그들 중 300명이 죽거나 자리를 떠났으며, 카리브해 사람들과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사람들도 철도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철도 사고, 휴식처 부족, 채찍질, 굶주림 및 질병으로 인해 건설 첫 2년 동안 3,6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만행에 가담한 흑인 부역자

 

적도의 악마, 레옹 피에베즈
레옹 아실 피에베즈(Léon Achille Fievez, 1855~1939)는 1893년부터 1895년까지 에카퇴르(Équateur) 지구의 위원을 역임했는데 콩고 자유국의 유럽인 관리 중 가장 악명 높은 인물로 꼽힌다.

한 가톨릭 신부는 흑인으로부터 들은 피에베즈의 만행을 이렇게 언급했다.
그는 들판에 죽어 있는 시체들로부터 손을 잘라 오게 했다. 군인들은 양동이에 담아온 손의 숫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중략)... 고무를 내놓지 않겠다는 마을은 완전히 싹쓸이 당했다. 나는 젊은 시절 피에베즈의 부하가 원주민 10명을 잡아다가 그물 안에 집어넣고 무거운 돌을 매달아 강물에 던지는 것을 보았다. ...(중략)... 우리는 그 자의 이름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다.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사주하여 그들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이거나 강간하게 했다. 

1894년 피에베즈는 한 군인에게 자신이 필요한 물자들을 얻기 위해 저지른 행동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시범은 한 번만 보여주면 충분했다. 흑인 100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의 말대로 물자를 갖고 왔다.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다. 내가 100명을 죽였지만 그렇게 해서 500명을 살린 것이다."

참고로 피에베즈는 포르스 퓌블리크의 집행관들과 흑인 군인들을 동원해 원주민들로부터 강제로 식량을 징발하고 농작물을 파괴하여 기근을 일으킨 것은 물론 식량이나 고무를 제공할 의사가 없거나 제공할 수 없는 마을과 논밭을 약탈하고 불태우게 했으며 식민당국에 저항한 콩고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했던 인물로 얼마나 잔혹했는지 별명이 적도의 악마였을 정도였다. 1894년 후반에만 정확히 162개의 마을이 그의 군대에 의해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수천 명의 콩고인이 강제 노동자로 사용되기 위해 살해되거나 체포되었을 정도였다. 특히 그가 부임한 첫 4개월 동안 572명의 콩고인이 죽었으며 1894년 11월 18일에는 '국가 재산 설치'를 위해 단 하루 만에 무려 956명의 콩고인을 학살하고 2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의 악행이 콩고에서 일하는 영국인,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발각되어 영국 외무부, 미국 하원에 전달되면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자 그의 행동이 역효과를 낳을 것을 두려워한 식민 당국은 1896년 피에베스의 위원직 갱신을 포기하고 그를 벨기에로 돌아오게 했지만 레오폴드 2세는 피에베스의 후임으로 피에베스의 충실한 부하였던 사람을 임명하면서 통치는 별반 나아지지 않았고 콩고 자유국의 외무부 사무총장 에드몬트 판에이트벨더(Edmond van Eetvelde, 1852~1925)에게 "피에베즈를 에카퇴르 지역 위원 으로 재임명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그의 행위는 다른 곳에서 유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1897년 피에베즈는 우방기(Ubangi) 지역의 위원으로써 콩고에 복귀했지만 1899년에 남성 2명을 처형하고 남성 1명을 치명적으로 폭행했으며 여성 여러 명을 여러 차례 폭행한 혐의로 자유주 법원으로부터 제재를 받아 콩고 자유국이 콩고인을 강제 노동자로 고용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허울뿐인) 법적 판례를 확립했다. 그러나 피에베스 자신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1900년에 벨기에로 돌아와 1910년 벨기에군 제9전열 연대의 소령까지 올랐다. 이후 그의 행보는 1939년 5월 27일 84세까지 천수를 누렸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게 없다. 

 


이러한 극악무도한 행위가 계속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했고 실제로 몇 번의 폭로가 있기도 했다. 한 번은 조지 윌리엄스라는 군인 출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레오폴드 2세를 만났는데 레오폴드 2세에게 "콩고에 돈을 많이 투자했으니, 당신은 그 대가로 흑인들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레오폴드 2세는 "나는 불쌍한 흑인들을 위한 백인으로서 의무감 때문에 그랬다. 투자한 돈을 회수할 생각도 없다" 라고 대답할 정도로 자신의 악행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윌리엄스는 감동 먹고 먼저 같은 흑인 기술자 40명을 콩고에 파견해 주기로 결정했지만 기술자들을 보내기 전에 먼저 가보자는 생각에 콩고에 가 봤더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윌리엄스는 레오폴드 2세와 미국 대통령에게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에 대해서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레오폴드 2세는 윌리엄스가 자신이 미군의 대령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꼬투리 잡아서 "저놈은 사기꾼이에요"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와중에 윌리엄스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학대 행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일단 덮였다.  

그러나 콩고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대하는 잔인한 벨기에의 만행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며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독립국 군인들이 원주민들의 집과 소유물들을 약탈한 증거들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마침 아주 큰 범위를 찍을 수 있는 평판 카메라가 발명되었기 때문에 평판 카메라를 통해 찍힌 콩고의 각종 사진들이 미국과 유럽의 뉴스를 조금씩 타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점점 명확하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으며 특히 당시 영국에서 가장 명성 있는 더 타임즈가 큰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기도 했다. 헨리 몰튼 스탠리는 레오폴드 2세에게 "영국에서 떠돌고 있는 그 끔찍한 이야기들로 인해 당신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했으며 "우리 영국인들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오." 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레오폴드는 "만약 콩고에서 그런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뿌리 뽑아야 합니다."라며 자기는 몰랐지만 책임자로서 반성하겠다는 가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헨리 스탠리는 콩고 독립국 서기관 에트몬트 판에이트벨더(Edmond van Eetvelde) 남작에게 "만약 앞으로도 학대가 지속된다면 콩고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던 중 콩고를 오가는 화물을 독점하는 엘더 데스터라는 회사의 직원인 모렐(E. D. Morel)이라는 사람이 화물을 운반하다가 회사의 무역 기록과 콩고 독립국의 무역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콩고에서의 이익을 가로채고 있으며 원주민들은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했고 그 결과로 이익을 빼돌리는 사람이 레오폴드 2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레오폴드 2세를 압박했다. 심지어 레오폴드 2세가 몇몇 문서들을 없애 버리라는 지시를 내린 공문서도 보여주고 구체적으로 살해 당한 원주민들의 명단까지 발표했다. 그는 이전까지의 다른 폭로자들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결국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기자가 되었다. 

사실 모렐도 인종차별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고 흑인을 열등한 자라고 여겼지만 이 사건 때문에 제국주의를 혐오하게 되어 사회주의와 반전 운동의 길을 걸었고 훗날 영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평생 콩고 사건을 해명하며 사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이렇게 계속 일이 커지자 영국인 여성 선교사 앨리스 셀리 해리슨(Alice Seely Harrison)이 사진을 찍어 '콩고 개혁 협회'에 사진을 제공했고 기사를 내면서 콩고에서 벌어진 잔혹한 일들이 세상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해리슨 여사는 콩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렐을 위해서 자기 월급보다도 더 많은 액수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고 모렐은 이를 바탕으로 콩고개혁협회를 설립했다. 이에 마크 트웨인과 아서 코난 도일 등의 유명인사들과 영국의 귀족 및 국회의원 등이 합류하며 콩고에서 벌어진 잔혹상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70년 전 인류애적인 동기에서 노예 무역을 폐지한 유럽의 양심이 오늘날 콩고 독립국을 묵인하고 있음은 누가 뭐라 해도 놀라운 일입니다. 도덕의 질서라고 하는 시계추가 몇 시간쯤 늦어진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조지프 콘래드가 1903년 12월에 로저 캐즈먼트에게 보낸 편지 中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콩고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고서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고 영국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1909년에 발표한《콩고의 범죄(Crime of Congo)》에서 "레오폴드가 식민지인 콩고에서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다. 폴란드계 영국인 작가 조지프 콘래드도 자신이 레오폴드의 회사 소속 선장으로 콩고 강에서 배를 몰았던 경험을《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이라는 이름의 소설로 출판하여 비판에 가담했다. 

애덤 호크실드(Adam Hochschild)의 1998년 작품《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에서는 "레오폴드가 개인 식민지 콩고 독립국에 가한 가혹한 노예 노역을 통한 무자비한 수탈과 살육으로, 1880 ~ 1920년 사이에 인구의 약 절반인 천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서술했으며 이러한 잔학한 식민 지배에 저항했던 인권 운동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영국의 소식은 독일에까지 퍼지게 되었고, 쾰른 지역 신문 쾰니셰 자이퉁(Die kölnische Zeitung)을 통해 보고되었는데 이 보고서에서 독립국 보호령인 술탄 제미오의 사령관 아킬레 파이베즈(Achille Fievez)는 1,308번의 수족 절단으로 기소되었다.

당시 콩고 독립국에서 터진 원주민 학대 행위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닫자 원주민 보호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 위원회의 임무는 눈에 띄는 모든 잔악 행위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레오폴드 2세의 연막 작전에 불과했다. 레오폴드는 이미 위원회가 성공적으로 맡은 일을 실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원회 소속이었던 선교사들은 서로 수백 km만큼 떨어져 있어야 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서로가 만나서 연락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위원회의 권한은 대단히 제한적이어서 위원회의 업무 자체가 정보를 은폐하려는 고위 관리들에 관한 잔악 행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이었음에도 위원회는 관리들의 잔악 행위를 조사하거나 협조하게 만들 만큼의 권한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원회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위원회의 활동에도 콩고 주민들에 대한 학대 행위는 끊임 없이 진행되었다. 정말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갔던 모양이다. 



결국 1903년 영국 정부는 콩고에 대한 공식 조사를 위해 영국 영사관 로저 캐즈먼트를 파견하였다. 비록 사진과 문서 증거물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래도 정리가 잘 되지 않은 파편적인 자료들인 데다 민간인 중심의 폭로와 항의였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여론들은 회의적인 시선이 담겨 있었으며 특히 많은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캐즈먼트는 현지에서 끔찍한 내용의 탄원서들을 발견했는데 "나무에 손을 댄 채 총 끝으로 손을 계속 두들겨 맞았다"는 젊은 청년의 탄원서도 있었고 다른 마을에서는 "3명의 어린 아이들, 한 청년과 한 노파의 오른쪽 손 목이 잘려나갔다"고 쓰여 있었다. 캐즈먼트는 계속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나는 대륙 내에 있는 2개의 큰 마을을 방문했다. 나는 마을 인구의 반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몇몇 그룹의 난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왜 그들의 지역에서 도망쳤는지를 묻자 그들은 계속 하소연했다. 그들은 정부 군인들에 의해 잔인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우며 고향에는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고 했다. 일정량의 고무를 갖다 바치지 않으면 군인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군인들에 의해 죽지 않더라도 아사하거나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일을 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캐즈먼트는 콩고의 좀 더 깊숙한 곳까지 조사하려고 했지만 그가 콩고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인 1903년 11월경 영국으로 돌아가 외무부에 자신의 보고서를 올렸는데 이미 충분히 들을 만큼 들었고 볼 만큼 봤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크로머 백작 에버린 바링(Evelyn Baring)은 캐즈먼트와 약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크로머 백작 역시 콩고 독립국을 1903년 방문한 적이 있었고 1905년에는 영국 조직 위원회 소속으로 다시 한 번 콩고를 방문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먼저 영국에서 노예를 해방시킨 윌리엄 윌버포스의 증손자도 모렐의 콩고 해방 운동을 지지해주었다. 물론 모렐도 영국의 식민지배는 지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것은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싫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렐은 영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를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도 열렸고 콩고의 실태에 대한 사진전도 열렸으며 손이 잘린 콩고인들의 모습이 영국 국민들에게 그대로 드러났다.
 
물론 레오폴드 2세도 그냥 물러서지는 않아서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에게 돈을 뿌려대서 자신을 지지하는 보도를 내보내도록 요구하며 여론을 바꿔 보려고 시도했지만 콩고에서 상아 무역을 하던 아일랜드 상인이 콩고에 주둔하는 벨기에군에 의해서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과 처형된 아일랜드인의 사업 기반인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지배하던 독일에서 들고 일어났다. 백인도 재판 없이 처형하는데 흑인들을 어떻게 대우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궁지에 몰린 레오폴드 2세는 여론 조작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레오폴드 2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각국의 언론들, 특히 돈을 받은 언론들은 레오폴드 2세가 좋은 인간이라며 기사를 썼지만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던 레오폴드 2세의 변호사가 미국 허스트의 뉴욕 아메리칸지에 레오폴드 2세가 미국에서 뇌물을 뿌려대면서 로비질을 한 것을 폭로해 버렸고 언론사들은 로비를 받은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레오폴드 2세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에 미국과 영국 같은 국가들이 벨기에 정부에게 콩고를 사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결국 벨기에 왕국 정부는 레오폴드 2세에게서 콩고를 사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벨기에 정부는 콩고 지배를 마땅찮게 여겨서 콩고가 레오폴드 2세의 단독 지배령이라 그 오만 가지 만행이 벌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년과 죽음
물론 과장된 소문도 있으나 콩고에서 잔혹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소름 끼치도록 야만적인 일들이 콩고에서 자행되었다는 증거들은 넘쳐 흐를 정도로 많았으며 콩고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혹사당하고 유럽인 관리관들에게 자신들의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당시 국회에 보고된 보고서에 따르면 1885년 콩고 독립국이 출범한 이후 콩고의 인구는 3,000만에서 900만 명으로 70% 감소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로써 그가 수년간 주장한 인도주의적 관계와 문명화의 목적이 드러났고 콩고 독립국에서 자행된 잔인한 학살과 학대에 대한 기소가 준비되었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하며 자신을 향한 비난이 전 세계적으로 급격하게 퍼져나가는 이유를 영국의 계략이라고 믿었는데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질투심 때문에 콩고 독립국과 자신의 인생과 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이런 모든 일들을 계획했다는 괴상한 생각을 가졌다. 특히 1903년 캐즈먼트가 콩고로 파견된 것을 보고 자신에 대한 비판이 영국의 음모라는 생각이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사실 이 소리도 망언에 불과한데 정작 영국보다는 덴마크 왕국의 프레데리크 8세,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레오폴드 2세를 야멸차게 비난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평생 동안 노예제를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에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군주들보다 명분도 확실했다. 

그 때까지 벨기에 정부는 콩고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콩고에서 벌어진 착취와 학대가 너무나도 끔찍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벨기에 정부도 이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콩고를 벨기에로 합병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국회는 이 방법을 채택했다. 정부는 레오폴드가 그냥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그의 콩고 자유국을 빼앗아 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906년 국회에서 콩고를 완전히 합병시키기 위해서 우선 콩고 합병에 대한 합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노발대발하며 "콩고에 관한 나의 권력은 절대로 분산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콩고는 나의 노력의 산물이다. 콩고의 적들이 합병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권을 바꾸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방해하고 자신들이 그 이익을 챙겨 부자가 되려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라고 공표했으며 벨기에 국회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어느 정도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막 나가는 방식을 선택했고,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는 국회와 정부의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는 폭군 또는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에 대한 민심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국회는 4개월 후 비슷한 논의를 시작했고 그와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런데 1906년 12월 13일 그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벨기에와 콩고의 합병을 지지하며 합병이 성사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입장 변경은 "곧 미국이 콩고 일에 관여할 것"이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미국의 입장을 중요시해서 자신의 인도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니엘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과 같은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초청했고 콩고 독립국 중남부에 있는 카사이 강 입구에 10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개발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사업에 투자를 유치했다. 

그는 이런 개발로 콩고의 외국 회사들이 부를 축적하게 되면 외국 회사들, 특히 미국 회사들에 투자한 자신이 콩고의 통화 공급량을 통제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지만 만약에 미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의 편을 들어 주게 될 경우 이 개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콩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영국과 독일은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고 미국인들마저 콩고에서의 잔악 행위로 결국 그에게 등을 돌렸다. 

이런 지루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906년 12월 14일 벨기에 총리인 스메트 더 나이여르 남작 파울 요제프는 벨기에와 콩고가 합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아직도 콩고의 지배자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지만 1908년 10월 18일 권리 양도 협정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으면서 그의 환상은 깨졌으며 콩고는 마침내 그의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1908년 콩고 독립국을 벨기에 정부 소유로 맡기고 물러났다. 문제는 회계 자료도 안 내놓고 이미 많은 돈을 애인 카롤린에게 주거나 공사하는 데 써 버려서 벨기에 정부는 1908년 콩고 독립국의 빚까지 부담하면서 인수했고 이로 인해 벨기에에서도 엄청나게 평가가 나빠졌다는 점이다.

이후 콩고민주공화국 쪽의 상황은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벨기에 정부 소유가 되어도 사람들의 고통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왜냐하면 벨기에 왕국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원주민들을 강제노동시켜서 고무를 얻어냈고 콩고 독립국의 관리들도 전부 그 밑에 있다가 벨기에 정부 소속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만 한 번도 콩고에 가 보지 않은 그와는 달리 새로 왕위에 오른 알베르 1세는 콩고도 방문하고 손이 잘린 사람들도 직접 만나서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약속은 어쨌건 실천되긴 했다. 노동과 착취는 여전했지만 손목 절단도 사라지고 강제노동 대신 임금을 지급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광산을 개발하면서 조금 나아졌을 뿐 다시 가족을 인질로 잡고 노동을 시키는 것이 반복되었고 손은 안 자르지만 채찍으로 두들겨 갈기는 것은 여전했다고 한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르완다 - 부룬디 지역을 할양받으면서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통치하는 바람애 벨기에는 후의 르완다 내전과 부룬디 내전의 원흉 중 하나로 꼽힌다.

《땡땡의 모험》작가인 에르제가 땡땡의 모험 시리즈 중에서 우익 사상에 빠져들었던 젊은 시절에 그린 <콩고에 간 땡땡>이 이 시절에 그린 작품이었다. 당대 벨기에 정부의 행태나 강제노동을 묘사하지 않은 채 "원주민들을 문명화 교육을 시키며 코뿔소 등 야생동물도 잡는다."는 식의 내용으로 그렸다. 후일 작가 자신의 성향이 바뀌고 나서부터는 이 작품을 흑역사로 여기기 시작하여 인종차별주의적인 색채를 빼는 방식으로 수정했기는 했지만 원 작품 자체의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 보니 현재도 준 흑역사급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벨기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힘 있는 국가가 되어 있었지만 콩고인들을 물론이고 벨기에 정부와 국민, 전 세계적인 여론, 그의 친구와 벨기에의 모든 정부 관료들은 그를 혐오했고 아내와 3명의 딸 가운데 2명에게서도 외면받았다. 다만 그의 정부인 블랑슈 들라크루아(Blanche Delacroix)라는 여인만이 그의 편이었다. 그녀는 그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는 두 아들의 출생에 기뻐했지만 벨기에 국민의 다수를 차지했던 가톨릭 신자들은 교리상 남녀의 불륜 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불륜 행각은 자국민들에게까지도 엄청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불륜으로 인해 그는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자국민들에게도 외면받았고 특히 가족과 친척에게도 버림받게 되었다.

1909년 12월 초에는 창자까지 막히는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고 그 어떠한 치료법이나 약도 효과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쿠린 신부를 불러서 자신의 정부 블랑슈 들라크루아와 결혼했는데 그녀에게 드 본 남작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려주었으며 많은 재산을 카롤린에게 물려주고 며칠 후에 사망했다. 블랑슈는 그의 임종을 지켰고 그가 죽자 대성통곡을 했으나 한 사람이 그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는 그녀를 끌어내 버렸다. 웃긴 사실은 블랑슈는 그가 사망한 지 1년만에 재혼했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그냥 내팽개치고 살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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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의 장례식

죽기 1달 전 그는 자신의 장례식을 조촐하게 치르도록 당부했는데 화려한 장식이나 추모 행렬 등이 없이 간단하게 장례식이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의 장례식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할 때 큰 규모로 거행했다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무슨 사태가 벌어질 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라한 장례식은 죽은 왕에 대한 모욕으로 보일 수 있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은 조카 알베르와 정부가 끝까지 그를 잔인하게 대우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요구는 묵살되고 화려한 장례식이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가 사망한 후 그를 브뤼셀에 있는 궁궐에 이틀 동안 머물게 하고 나서 그의 지위에 어울리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결국 본인의 예상대로 본인을 실은 관의 행렬이 지나갈 때 국민들로부터 온갖 야유와 쌍욕세례를 받는 등 엄청난 경멸을 받고 땅에 묻히면서 그의 서사는 마무리되었다.

후대의 평가
당시 콩고 독립국에서 퍼진 전염병과 유럽인 관리관들의 학대로 상당한 인구감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와 연루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국인들에게 그의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다.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인식을 바탕으로 유럽 밖에서 일어나는 식민지 수탈은 대체로 묵인해 주던 것이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정보가 원래 외부로 잘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은 그의 선전으로 인해 그을 정말 콩고에서 인도주의적인 정책을 하고 있는 국왕으로 믿고 있었다. 게다가 콩고가 자신의 사유지였음에도 자신의 돈으로 건물을 지어주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기도 했기 때문에 벨기에 사람들은 그를 대단히 좋아했다. 즉슨 그는 자국에서 '인도적이고 국민에게 뭔가 베풀어주는 선정한 군주'인 척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 콩고에서의 실상이 국제사회에 드러난 후부터는 자국인들도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내뱉으며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돌려주지 않으려고 별의별 추태를 다 부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의회를 무시하는 독재자 같은 인간'으로 찍혀서 의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경멸당하게 되었다.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식민지를 만들고 원주민을 수탈한 이유가 자국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당대의 기준으로만큼은 옹호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콩고 수탈은 순전히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는 결론적으로 콩고는 물론 자국인 벨기에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만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타국은 물론이고 자국에서의 여론도 나빠지고 말았다. 거기다 식민지배 전에는 여자를 밝혀 창녀를 정부로 삼아 자신의 가정을 내팽개치고 왕비가 죽자마자 그녀와 결혼해서 아들을 2명이나 낳은 부도덕한 인물이었다는 과거사까지 다 뽀록났으니 대중의 평판은 더욱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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