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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9 2025. 1. 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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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선구자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한 이래 19세기를 황금 시대(Golden Age), 20세기를 은의 시대(Silver Age)로 칭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미하일 레르몬토프,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니콜라이 레스코프, 안톤 체호프, 막심 고리키, 이반 부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미하일 불가코프, 미하일 조셴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미하일 숄로호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은 러시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작가들이다. 열거된 문인들은 대부분 소설가인데 사실 러시아 산문보다는 시야말로 러시아 문학의 정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당히 유명하다. 알렉산드르 블로크, 오시프 만델시탐, 빅토르 흘레브니코프,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마리나 츠베타예바, 안나 아흐마토바, 조지프 브로드스키 등 현대 문학사에 발자취를 남긴 시인들을 많이 배출해냈다. 미래주의 문학이 러시아에서 출발한 건 덤. 이처럼 러시아가 세계 문학사에서 남긴 자취는 정말 크다. 

놀라운 건 이마저도 이오시프 스탈린때문에 정말 꺾이고 또 깎인 뒤 남은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 악명 높은 스탈린마저 러시아 문학의 유구한 전통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었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한때 시인이기도 했던 그가 미친 악영향이 심히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보리스 필냐크와 이삭 바벨은 처형당했다. 유리 올레샤와 안나 아흐마토바는 강제로 붓을 꺾어야 했고,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자신 또한 그 뒤를 따를까 두려워하여 자살했다. 오시프 만델시탐은 유배당했다가 결국 대숙청에 휘말려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다닐 하름스는 아사했으며, 예브게니 자먀틴은 망명지에서 객사했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아들을 볼모로 창작 활동이 꺾여버렸고 미하일 조셴코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어 생계 곤란을 겪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미하일 불가코프는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이들 또한 스탈린의 눈치를 지속적으로 봐야 했다. 그의 탄압은 개별 문학가에 그치지 않았다. 이디시어 문학은 철저한 숙청의 결과 뿌리 채로 뽑혀나갔고, 본인의 모국어이기도 했던 조지아어 문학은 스탈린 사후 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 상흔을 복구하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앞에서 열거된 작가들이 러시아 문단에 등단했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러시아는 조국전쟁, 데카브리스트의 난, 크림전쟁, 농노해방령, 산업혁명, 피의 일요일 사건,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대숙청, 독소전쟁 등 정말 다양하고 처절한 사회적 혼란과 격변을 겪었고, 이는 작가들에게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했다. 

일찍부터 해외문학을 번역해온 일본에선 메이지 시대의 작가들이 러시아 문학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에 기가 죽어 공로병(恐露病)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 작가들이 러시아 문학에 가지고 있던 공로병 증상을 비판한 적도 있다. 러시아 문학은 일본 근대문학은 물론이고 현대(19세기~20세기) 한국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러시아 소설들이 많이 알려졌다. 현대 한국 작가들 중엔 시인 겸 소설가 이장욱이 러시아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읽다 보면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꽤나 맞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인지 러시아 고전문학은 현대에도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다만 이시절에 나온 세계적인 수준의 작가들은 기이하게도 20세기 후반부터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국제 도서전에서도 여러차례 지적된 상황.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나 스탈린 사후 해빙기에 활발히 활동한 아나톨리 리바코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블라디미르 두딘체프, 유리 트리포노프, 칭기스 아이트마토프, 발렌틴 라스푸틴, 아나톨리 김을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오죽하면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가 대문호 배출을 위해서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자는 개드립을 칠 지경.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 번역이 활발해지는 시기는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북방외교라는 표어 아래 공산권 유화정책을 취했던 노태우 정권 부터다. 1990년에 닥터 지바고의 최초 러시아어 완역본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는 등 과거 중역으로 접해온 대작들이 원어로 번역되고 중앙일보사에서 중국현대문학전집과 함께 기획한 소련동구현대문학 전집을 통해 은의 시대와 해빙기에 활동한 주옥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을 즐겁게 했다. 노문학 번역붐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는데 이때 번역되었다가 절판되고 재간되지 못한 작가, 작품들도 상당히 많다. 특히 솔제니친을 제외한 해빙기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렇다.

2020년대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하면 보통 19~20세기 초반 태생 작가들의 근대 문학과 드미트리 글루홉스키의 메트로 시리즈, 세르게이 루키야넨코의 위치 시리즈 같은 현대 SF/판타지 소설을 떠올린다. 소련 해체 이후에 등장한 빅토르 펠레빈,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타티야나 톨스타야, 보리스 아쿠닌, 이리나 제네쥐끼나 같은 작가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문학에서 다음 같은 사건도 있었다. 영국에선 식료품점에서 어제한 축구 얘기하다 주먹싸움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에선 식료품점에서 칸트 사상 논쟁을 하다가 총을 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철학에 대한 토론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편이다.  

 

 

 

 

 

 

 

 

 

<러시아 문학과 사상: 푸시킨·고골·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체호프>란 책은 러시아만의 독특한 고유의 역사와 정치, 사회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19세기 러시아 근대문학과 문화 및 예술에 대한 이해와 러시아인의 정체성 탐구 등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는 저서다. 먼저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 후, 러시아 근대문학의 대문호들의 작품세계와 사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고대 러시아 문학은 동슬라브족(러시아 민족, 우크라이나 민족, 벨라루스 민족)에게 문자 문학이 생기기 오래전의 전설, 민담, 속담, 설화 등 다양한 구비문학적인 소재들이 10세기경 출현한 키릴문자(현재 러시아어 알파벳)로 표현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1237년 바투의 몽골군의 침략으로 그 이듬해 모스크바가 점령당해 약 24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고, 1861년까지 농노제도를 유지했으며,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 황제 정부가 무너지기 전까지 동양식 전제주의 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리고 르네상스 단계를 거치지도 못했고, 서구에 비해 상당히 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의 별명 1672~1725년, 재위: 1682~1725년)의 서구화 정책으로 인해 문화와 예술, 과학 기술, 관습과 종교 등 거의 전 영역에서 그 이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크게 변화됨과 동시에 비약적인 수준의 진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편, 러시아 문학자와 사상가들은 서구의 문화와 사상 등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러시아만의 특수한 독자적 발전 방향을 추구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1840년대에 벌어진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간의 치열한 논쟁이 이에 해당한다. 19세기 초 ‘러시아 시의 황금기 최고 시인’이자 ‘러시아 국민 시인’으로 불리는 푸시킨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러시아는 그 지리적 위치, 정치적 상태 등으로 유럽을 재판하는 법정이며, 러시아인은 유럽의 비판자다.”  

이 책에 소개되는 러시아 대문호들(푸시킨1799~1837, 고골1809~1852, 투르게네프1818~1883, 도스토옙스키1821~1881, 톨스토이1828~1910, 체호프1860~1904)은 각 작가의 작품 속에서 훌륭한 러시아 여성의 형상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푸시킨의 운문 형식의 산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티야나, 톨스토이의 장편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카레니나 등이 그러한 형상이다.  


러시아 문학 비평 및 철학과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게르첸이 말했듯이, 러시아 문학은 어떤 정치적 자유조차 없던 민중의 분노를 전달하고, 러시아 지성인(인텔리겐차)의 양심의 외침을 전달하는 연단으로서 그 역할과 사명을 감당했다. 이처럼 러시아 문학은 민중의 열악한 삶의 상태와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는 길이자 도구로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푸시킨을 비롯한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와 같은 19세기의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은 그 당시 서구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러시아 사회를 개선하고, 인간과 인권을 중시하는 휴머니즘과 이에 토대가 되는 인문 정신 및 사회사상의 탐구 등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그들은 국민적 의의를 지닌 중대한 문제를 국민(민중)의 편에서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참고로 이 책은 19세기 러시아 전제주의 체제하의 민중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여기서 ‘국민’이란 ‘민중’을 의미함.)   

19세기 러시아는 전제주의 제도와 농노제도(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해방령으로 농노제가 폐지됨) 등 여러 영역에서 후진적인 정치·경제 체제 등 비민주적인 사회 환경에 있었다. 이처럼 열악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1세기라는 매우 짧은 기간에 서구 문학을 앞지를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러시아 민중성의 최고 표현자’, ‘다양한 문학 장르의 천재 작가’ 등으로 불리는 푸시킨이 낸 ‘비판적 사실주의의 길’을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대문호들은 따라가면서, 그리고 그 길을 더 단단히 다져가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통해 사실주의 문학을 번영하게 했다.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과 더불어 진행된 러시아 근대문학은 18세기 초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 등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이르러 러시아만의 고유한 특징을 지닌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즉, 서구(유럽)의 관점에서 러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전성기는 19세기였다. 따라서 19세기 러시아 근대문학의 대문호들(푸시킨,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은 셰익스피어, 괴테, 세르반테스 등에 비견되는 작가들이다.  

러시아 최고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인 푸시킨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18세기에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았던 에티오피아의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기의 몸속에 에티오피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데 대해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에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했으며, 러시아 민간 전래 문학에 관해서도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12살 되던 해인 1811년 6년제 귀족자제 교육기관인 리체이에 입학했다. 천재 시인 푸시킨은 이 학교에 다니면서 120여 편의 시를 썼다. 리체이를 졸업한 후 외무성 관리로서 잠시 근무하던 중 진보적 문학 서클인 ‘녹색 램프’에 가입해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 무렵 진보적인 시 <자유>, <차다예프에게>, <마을>을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남러시아로 유형을 당했다.  

그는 캅카스(코카서스)에서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바이런 풍의 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키시네프(키시나우)에서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 - <캅카스(코카서스)의 포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도둑 형제> 등 - 을 발표했고, 운문 형식의 산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과 <집시들>을 집필하던 중 1825년에 데카브리스트 난이 발생하지만, 격리된 신분이어서 이 난에 참여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는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난을 평정한 후 푸시킨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그의 작품을 직접 검열하고 감독하였다. 푸시킨은 1830년 가을 볼디노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작품집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등 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1828년 겨울 모스크바에서 만난 16세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미모에 반해, 그 이듬해 봄에 청혼했으나 그녀의 부모로부터 거절당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청혼하여 결국 1831년에 2월에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해 가을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살던 중 1833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하고, 그해 여름에 볼디노를 방문해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청동 기마상> 등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그의 아내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남편의 문학적 재능이나 지적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니콜라이 1세와 자기의 아내와의 염문설이 떠도는 중에 그는 황제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푸시킨은 1836년에 고골의 도움을 받아 문학잡지 『동시대인』을 발행하고, 이 잡지에 <대위의 딸>을 연재했다. 자기의 아내와 황제와의 염문설에 이어 네덜란드 대사의 양아들이자 프랑스인 청년 장교 단테스와의 염문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 푸시킨은 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단테스와 결투하여 치명상을 입은 그는 1837년 1월 7일에 사망했다. 황제 정부는 국민들의 조문시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밤중에 그의 관을 미하일롭스코예 부근의 스뱌토고르스크 수도원으로 옮겨 비밀리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명령했다.  

푸시킨은 1812년 조국 전쟁(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의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민족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사상(민중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했으며,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내용의 풍부 등의 측면에서 그를 따를 러시아 시인은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고골은 산문 분야에서 푸시킨의 직접적 후계자다. 그는 이 시인에 대한 회상록에서 “푸시킨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난 무엇 하나 고찰해 낼 수도 없었고,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희곡 <검찰관>과 장편 <죽은 혼>의 주제도 푸시킨으로부터 얻은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고 고골이 푸시킨의 모방자는 아니었다. 고골 스스로 ‘눈물 속의 미소’라고 이름을 붙인 풍자는 숭고한 이상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가 아니라, 추악한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려는 독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푸시킨이 아름답고 시적인 면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 데 비해, 고골은 생활 속에서 추악하고, 천박하며,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예리하게 주목해, 이를 확대해서 묘사했다. 고골 작품의 의의는 국민의 이익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부정의 색채로 묘사해,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과 이상을 향한 동경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1840년대 ‘자연(학)파 시대’ 또는 ‘고골 시대’를 연 작가다.  

고골은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지주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신학교를 졸업했으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영지 관리, 연극 등 예술에 재능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매우 감상적이고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지나친 미신적 믿음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러한 어머니로부터 종교적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죄를 범하면 반드시 사후 심판받게 되며, 죄인은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고골은 고향 네진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3년간 내무성 관리로 근무하면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인 주콥스키 및 푸시킨과 친교를 맺어, 그들에게서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푸시킨은 고골의 문학적 재능과 작가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를 격려해 주었고, <검찰관>과 <죽은 혼>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대한 모티프를 제공하고 조언해 주었다. 고골은 러시아 현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추악하고 천박하며 우스꽝스러운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확대 재생산해 그가 ‘눈물 속의 미소’라고 말한 당대의 사회 현실에 대한 신랄하고 씁쓸한 미소가 깃든 유머러스한 작품을 창조했다. 또한, 어둡고 비극적 색채를 띠는 그의 작품들은 가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쓴웃음을 반영한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와 함께 세계문학 사상 최고의 작가, 철학자, 심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다. 그는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 병원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 병원의 의사였는데, 그리 넉넉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상냥하고, 교양과 품위가 있었으며, 러시아 정교 신도로서 신앙심이 두터웠고, 시와 소설을 즐겨 읽었다. 도스토옙스키가 16살 때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약 2년 뒤 은퇴 후 툴라 현에 내려가 영지를 경영하던 중 비명횡사했는데, 농노들에게 원한을 사서 참살 당했다고 한다. 이 비극적 사건은 그에게 강한 충격을 주어 평생 그의 뇌리에 남아 그의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을 집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는 공병학교를 졸업한 후 장교로 임관되었다가 곧 퇴직하고, 창작에 열중하여,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써서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했다. 그는 도박 빚 등으로 인한 가난한 삶과 간질과 신경증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또한,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 집행 직전 알렉산드르 2세의 특사로 형 집행이 정지돼,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유형 생활을 했다. 이처럼 독특하고 비극적인 삶의 체험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시대에 따라 도스토옙스키를 “휴머니즘의 설교자”, “가난한 사람들과 학대받고 모욕당하는 사람을 노래하는 시인”, “병적이고 잔인한 재능의 소유자”, “비극 소설의 창조자”,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탁월한 정신병리학자”, “위대한 종교 사상가” 등 다양하게 평가한다. 그는 1880년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을 완성한 후 그 이듬해에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운명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 종교, 자유, 사회, 민족 문제 등과 연관된 사상을 표현한 ‘사상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인도주의적 성격, 극단적 성격, 비극적 대립, 죄의 문제, 궁극적 죄로서의 무신론 문제를 다룬 ‘비극 소설’로도 불리며, ‘형이상학 소설’로도 불린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미학적 특징은 작가 자기의 다양한 체험으로 인한 매우 복잡하고도 상징적인 철학 체계로 구축돼 있고, 각 등장인물의 사상이 ‘다성적(多聲的)’ 체계로 구성돼 있다.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의 남쪽 약 200km에 위치한 야스나야 폴랴나의 명문 백작 가문 출생이다. 3살 때 어머니가, 10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17살 때인 1844년 카잔 대학 동양학부 아라비아 튀르크(터키)어 과에 입학했다가, 흥미가 없어 그 이듬해에 법학과로 전과했다. 그는 공부에 싫증을 느껴 필수 과목인 역사 강의에 자주 결석해서 근신 처분을 받아 징벌실에 감금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프랑스 계몽사상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25살 때 카프카스(코카서스) 포병연대 소위보로 입대해, 군 복무 중 자전적 3부작 소설 - <유년 시대>, <소년 시대>, <청년 시대> - 을 썼다. 그는 1855년 당시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장교로 근무했고, 문단과 사교계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또한, 그는 거기서 술과 도박에 빠지기도 하고, 집시 여인들과 방탕하게 생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곧 도시 생활에 염증과 회의를 느껴, 제대한 뒤 고향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로 갔다. 톨스토이는 1857년 1월 폴란드, 프랑스, 스위스 등을 여행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문명사회의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체험했다. 그는 서구에서 귀국 후 학교 건립, 교과서 저술 등을 통해 농민 교육과 계몽 활동을 하면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 역사와 민족 문제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관심을 소재로 삼아 장편 <전쟁과 평화>과 같은 작품을 썼다. 또한, 그는 장편 <안나 카레니나>에서 연애, 결혼, 종교, 그리고 가정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1879년 러시아 정교회 탈퇴를 선언했으며, 자기의 과거와 삶. 그리고 문학을 부정하는 <참회록>을 썼다. 그는 무정부주의와 무저항 정신에 입각한 ‘톨스토이주의’를 몸소 실천했으며, 기독교적 계율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성자의 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이로 인해 그는 결국, 1901년 2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톨스토이는 자기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려 했으나, 아내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가출했다. 그는 1910년 11월 7일 아스타포보 역에서 82세의 나이로 객사하여,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혔다.  

체호프는 남러시아의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농노 출신의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아버지로서 자식들을 가혹하게 길렀고, 식료잡화점을 경영하다가 파산해서, 모스크바로 야반도주했다. 체호프는 유머 잡지에 투고해 돈을 벌어 모스크바대 의학부를 1884년 졸업한 후 모스크바 근교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얻은 체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1880년대 초는 러시아 문학의 전환기로서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톨스토이를 계승할 우수한 신진작가를 기대하던 시기였다. 인생을 자연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해서 이를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주변의 현실과 인간의 삶을 다양한 관점에서 철저히 관찰하고 조사 분석해서 모순으로 가득 찬 러시아 현실을 묘사했다. 또한, 그는 기존의 전통적 장르들을 패러디해 작품을 썼다. 그는 시베리아를 거쳐 1890년 사할린에 도착해서 사할린 섬의 강제수용소 상황을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할린섬』을 썼다. 

체호프는 1880년대에 톨스토이로부터 철학적 영향을 받았지만, 사할린 여행 이후부터 톨스토이주의와 그의 사상에서 벗어나 이를 비판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891년에 발생한 기아로 고통당하는 농민들을 구제하는 대규모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892년에는 콜레라가 창궐하자 무료 진료 활동을 했다. 그는 폐결핵 병을 치료하기 위해 1899년 멜리호보에서 얄타로 이사했고, 1904년에 건강이 악화하자 아내와 함께 독일로 가서 요양 치료를 하다가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20세기 러시아문학



■ 러시아 문학사 이해의 두 시점: 1917년과 1991년

“러시아 문학은 오직 1917년의 시점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루카치) 적어도 우리가 인류가 살아온 꼴로서의 역사에 어떤 (초)이성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특정한 준거적 시점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러시아 문학사의 전개과정을 바라보고자 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인데, 이때 분명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은 아주 분명한 준거적 시점이면서 무게중심이 되어준다. 즉 그것은 러시아 문학사란 구조의 중심이자 ‘초월적 기의’이다. 하지만, 1989년 동구권 붕괴에 이은 1991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해체는 1917년이란 시점이 갖는 초월적 기의로서 지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단지 과거에 유효했던 한 가지 시점일 뿐이지 않은가? 즉 그것은 역사서술의 준거적 시점으로서의 유효성을 이젠 상실하지 않았는가? 1917년의 시점이 평가적 시점이라면, 1991년의 시점은 재평가적 시점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가치전도와 재평가/재서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평가와 서술이 어느 정도 유효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1917년과 1991년은 러시아 문학사 서술에 있어서 짝패이다. 

러시아 문학사가 두 겹의 시선, 두 가지 시점에 의해서 서술된다고 할 때(시차적 관점!),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다중 시점에 의한 입체파 회화이다. 입체파 회화의 입체성은 서로 대립/모순/길항하는 시점들이 동시에 노출될 때 얻어진다. 그래서 그것은 단일한 시점 혹은 가치체계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정신분열증적인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의 분열증은 징후적이며 긍정적이다. 그것은 두 가지 상반된 가치체계의 작용/억압을 증거한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며, 그러한 가치체계의 대립을 새로운 의미생산의 기제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소비에트 문학에서 이러한 징후성/긍정성을 가장 분명하고도 풍부하게 드러낸 시기는 1920년대이다. G. 베이트슨의 용어를 빌면, 1920년대는 이중구속적(double bind)인 시기이다. 1920년대의 문학예술에 대한 당정책을 집약하고 있는 1925년의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따르면, (1)문학에 있어서의 주도권은 노동계급에 복속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2)당은 문학의 영역에서 다양한 그룹과 조류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해야 한다. 이 두 모순적인 요구 속에서 20년대 문학의 다양성과 입체성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는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 준비되던 과도기였고, 이행기였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장 많이 닮아 있기도 하다.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체계는 <질서A(코스모스)-무질서(카오스)-질서B(코스모스)…>의 순환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체계를 유지?진화해 나간다. 이 점은 사회체계와 그 하위체계인 문학예술체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는 그 체계진화 모델을 조금 변형시켜 보기로 한다. 즉 모든 체계는 <질서A(코스모스)-파국(카오스)-이행(카오스모스)-질서B(코스모스)…>의 과정을 통해서 진화한다. 물론 이행에는 어떤 파국으로의 이행과 또다른 질서로의 이행, 두 가지가 가능하지만, 파국으로의 이행은 새로운 질서로의 이행과 비교할 때 부차적이다. 어떤 질서가 파국을 맞는 것은 아무런 준비 없이도 가능하지만, 새로운 질서는 반드시 일정한 과도적 준비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도식을 1917년 혁명에도 적용해 보자. 1917년은 분명 낡은 전제권력이 파국을 맞은 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비에트가 바로 국가권력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후에 벌어진 내전이 그 방증이다. 때문에 1917년부터 내전이 종식되는 1921년까지를 우리는 카오스적 단계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전의 종식이 곧바로 사회주의 러시아의 안정된 정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17년 혁명 이후 전시공산주의하에서 농업기반이 붕괴되어감에 따라 레닌이 ‘자본주의로의 전략적 후퇴’라고 부른 신경제정책(NEP)이 불가피하게 실시되는바, 경제적으론 바로 이 NEP기(1921-1928)가 카오스모스적 이행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닌 사후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이 농업집산화와 본격적인 중공업화를 통해서 국가사회주의 건설에 나서는 1929년 이후를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체계에 있어서 새로운 질서의 단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체계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행기 문학은 달리 카오스모스적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문학적 카오스모스의 두 유형

1920년대 문학은 두 시인의 죽음으로 열리고 닫힌다. 1921년은 내전이 종식된 해이면서 동시에 혁명의 모호한 예언자였던 A. 블록(1880-1921)이 죽은 해이고, 1930년은 ‘혁명의 목청’을 자임했던 V. 마야코프스키(1893-1930)가 권총자살한 해이다. 그리고 두 죽음 사이에 ‘농민시인’ S. 예세닌(1895-1925)의 죽음이 간주곡으로 끼여 있다. 블록의 죽음은 1921년이지만, 그는 죽기 오래전부터 이미 죽은 인간으로 존재했다. 블록의 죽음에 부쳐서 마야코프스키는 이렇게 쓴다: “알렉산드르 블록의 작푸은 시적인 한 시대 전체, 바로 얼마 전에 지나간 과거의 한 시대 전체를 의미한다.” 블록은 자신의 시들은 통해서 한 시대의 종말을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예감을 노래한 전형적인 카오스모스의 시인이다. 그리고 포에마 <열둘>(1918)은 그의 카오스모스 시학의 정점이라 평가될 수 있다. 

<열둘>에 나타난 다성성과 카니발적 특성에 대해서는, 그것이 블록 자신의 미학적 세계인식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이미 지적돼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영화적 특징, 보다 구체적으로 몽타주적 특징은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영화의 고유한 언어로서 몽타주 이론/기술이 러시아 아방가르드 감독들에 의해 개발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파형과 변형이, 폐지된 현실의 파편들을 하나의 새로운 모델로 구성해내어야 할 새로운 역사의 몽타주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요컨대 몽타주는 사회적 카오스모스에 대응하는 문학적 카오스모스의 유력한 기법이자 방법론이며, 블록의 <열둘>은 그러한 시적 몽타주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12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열둘>의 각 장면들은 눈보라 치는 겨울밤의 도심거리를 훑어 내려가는 카메라적 시선에 의해 포착되는데, 멜로드라마적인 구성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의미있는 ‘전체’를 구성하지 않으며 다만 인접성에 의해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맨마지막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비록 12란 숫자에 의해 암시되고는 있지만, 돌발적이고 묵시록적이다. 

...그렇게단호한걸음걸이로그들이간다-
뒤에는- 굶주린개
앞에는- 피에젖은깃발,
논보라에가려보이지도않고,
총알에도다치지않으며,
눈보라속을부드러운걸음으로
진주같이흩날리는눈발처럼,
흰장미환관을쓴-
앞에는- 예수그리스도(?:9)

여기서 ‘피묻은 깃발’과 계열체적 관계에 놓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적위군 지도자의 은유가 될 수 있는가는 불확정적이다. ‘피묻은 깃발’이 ‘붉은 깃발’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트로츠키에 의하면, “블록의 불안스러운 혼돈 상태는 주로 두 가지 방향, 즉 신비적인 것과 혁명적인 것으로 끌렸다.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도 끝까지 나가지 못했다.” 즉 블록은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경계에서 단호하게 걸어가는 (야만적이면서 동시에 신성한) 역사의 움직임은 포착하지만, 그것을 의미화하지는 못한다(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12사도 이미지를 통해서 시인은 혁명에다 기독교 신학을 덧씌우고자 하지만, ‘흰 장미 화관’이란 상징이 드러내듯이 그것은 보편적인 상징코드에 근거하기보다는 개인적 상징코드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즉 거기엔 보편적/일반적 성격이 결여돼 있다). 그 무능력이 곧 시인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인식론적 은유에 도달하지 못하는 시인에게 죽음은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블록이 낡은 질서로부터 찢겨져 나간 조각(몽타주)들을 이어붙이는 데 다소 소극적이었다면, 마야코프스키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 일에 나선다. 그것이 바로 1917년 혁명에 대한 최초의 소비에트 문학적 대응이라고 할 만한 <미스테리야 부프>(1918)이다. 이 작품에서 마야코프스키는 <열둘>의 적위군들처럼 단호한 걸음걸이로 전진하는 ‘불순한 사람들’의 형상화를 통해서 혁명의 대의를 드라마화한다. <미스테리야 부프>의 제목 그대로 마야코프스키는 미스테리와 부프, 두 가지 문학적 형식을 통해서(그는 부르주아(순수한 사람들)를 부프화하고 프롤레타리아(불순한 사람들)를 미스테리화한다) 러시아 혁명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아의 방주를 비롯하여 성서적 모티브와 슈제트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블록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새로운 현실을 형상화할 수 있는 문학적 코드의 부재와 연관되는 문제인데, 중요한 차이점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2막에 등장하는 ‘미래에서 온 인간’이다. 마야코프스키 자신이 직접 연기하기도 했던 이 배역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패러디이다. 

눈보라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블록의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르게 마야코프스키의 그리스도는 새로운 산상수훈을 통해 천상의 왕국이 아닌 지상의 왕국을 설파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의미부여는 임시방편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제2판의 경우도 그랬지만) ‘혁명의 길’이란 형식은 남겨두고 모든 풍경(내용)들은 당대적인, 당면적인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현실과의 환유적 관계에 놓여 있는 이 드라마는 결코 자족적인 미적 완결체가 아니다. 때문에 인식론적 은유에 미치지 못한다. 이 점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어떠한 산들을 또 다시 폭파해야 하는지를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예견할 수는 없다”고 한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모든 장애를 극복하면서 목청껏 소리 지르고 지옥으로, 천국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전진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길이란 형식은 자연스레 인식론적 환유와 연결된다. 

마야코프스키에게서 환유적 욕망은 공간의 확장이란 형식으로 자주 표출되는데, <미스테리야 부프>의 6막은 가장 대표적이다. 6막의 결말에 이르러서 배우와 연출가, 관객의 구별/장애는 극복되는 모두가 한 무대위로 올라가 합창하는 장면은 무대라는 공간이 전세계로 확장되어가는 형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인터내셔널리즘의 연극적 번역이기도 하다(트로츠키는 󰡔문학과 혁명󰡕의 한 장을 미래파에 할애하면서 마야코프스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는 마야코프스키의 혁명적 개인주의가 갖는 보헤미안적 성격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영구혁명론은 마야코프스키의 인터내셔널리즘과 상통한다. 그래서 이들의 문학적, 정치적 운명이 서로 닮은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불순한 사람들(노래한다)
(...)
압제의박해는먼지처럼날아갔고,
격멸되고파괴었다. 하여오늘
코뮨- 이야기가실화가되었다.
모든이에게코뮨의문은활짝열려있다.
전세계여, 노래하라!
우리승리의노래를.
인터내셔널과더불어

인류는 깨어났도다.

이러한 마야코프스키의 인터내셔널리즘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한 기획이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우리’라고 말하지만, 그 ‘우리’는 마야코프스키의 ‘나 자신’과 자주 불협화음을 빚곤 했다. 그는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자아 중심적 성향을 보여준다. 그에게서 ‘우리’라는 공적인 요구와 ‘나’의 사적인 욕망이 어떻게 충돌하는가는 그의 문학적 유언이라고 불리는 작품 <목청을 다하여>(1930)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의 핵심이라고 말해지는 다음 대목을 보자. 

1.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이기고/ 올라탔다
2. 내 자신의 노래의/ 목구멍에.
3. 귀 기울이시오/ 후손 동무들,
4. 선동가, 소리꾼 주모자에게.

이 대목의 1행에서 “나는 스스로를 이겼다”라는 진술을 “시인이 인간을 압도하는 과정이 정점에 이르렀음”으로 해석하고, 2행에서 “나는 내 노래의 목구멍에 올라탔다”란 진술을 (1)시인은 시의 목구멍을 압살했다, 즉 시인은 시를 살해했다, (2)시는 시인의 목구멍을 압살했다, 즉 시는 시인을 살해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메타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앞 시구들과 같이 읽어보면, 의미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 역시/ 선전 선동시는/ 진저리가 난다.
나 역시/ 당신들에게/ 로맨스를 바칠 수 있었다.
그게 벌이도 좋고/ 기분도 좋지 않았겠는가.

요컨대, 마야코프스키 자신은 로맨스 시도 충분히 쓸 능력이 있고, 그게 여러모로 자신에겐 도움이 되지만, 그런 개인적인 이해타산을 이겨내고 진저리나는 선전 선동시를 써왔다는 것이다. “내 노래의 목구멍에 올라탔다”는 구절은 바로 뒤의 “선동가의 소리, 소리꾼의 오침을 들으시오”라는 구절과 연결된다. 즉 보통의 선전 선동대들이 말잔등에 올라 소리를 질러대는 것처럼, ‘나’는 내 ‘노래의 목구멍’에 올라타 소리를 질러댔다는 뜻이 된다. 목청을 다하여 부르는 선전선동시는 감미로운 로맨스와는 다르다. 그리고 여기에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자기분열이 있다.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장의 구조

1920년대가 일종의 이행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정치적으론 스탈린이 레닌의 사망(1924) 이후의 권력투쟁을 거쳐 당기구를 장악하고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란 교리를 공식화한다. 이것은 “유토피아적 인터내셔널리즘에서 현실적인 내셔널리즘으로의 변화를 예고하는 서곡”(마르크 슬로님)이었다. 또 경제적으론 내전 이후의 경제적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 레닌이 ‘자본주의로의 전략적 후퇴’라고 부른 신경제정책(NEP; 1921-1928)이 시행되다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준비된다. 즉 제1차 5개년계획(1928-1932)이 추진되고, 중공업화와 농업집산화를 통해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거대한 산업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예컨대 돼지가 하마로 구조적 유형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NEP 시기에 허용되었던 문학?예술 분야에서의 창작과 비판의 자유는 차츰 위축되고 검열은 강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스탈린주의라는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의해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대체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보리스 그로이스). 이러한 변모/대체의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로울 뿐 아니라, 이후 소비에트 문학의 향방을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한다. 

문학장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 장(Champ)이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자신만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소세계를 지칭한다. 이 소세계는 대세계처럼 사회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법칙이다. 이 소세계는 대세계의 제약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강한 부분적 자율성을 보유한다. 부르디외가 분석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학장에서 이러한 투쟁의 자본은 문학적 인정과 경제적 이익이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체제의 문학장에서 (인정)투쟁의 규칙은 정치적/제도적 인정(타율성)과 미학적 인정(자율성)이 될 것이다. 이때의 규칙은 문학의 정치적 타율성/종속성을 주장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관계로 표시될 수 있다. 

<정치적 인정>
 
S1(문학은 타율적이다)br>
non-S2(문학은 자율적이지 않다)

<미학적 인정>
 
S2(문학은 자율적이다)br>
non-S1(문학은 타율적이지 않다)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이라는 특수한 문학장에서 이들 네 항목은 보다 구체적인 명칭을 부여받을 수 있다. 즉 S1은 목적문학 혹은 이념문학(SR)을, S2는 망명문학을, non-S2는 동반자문학을, 끝으로 non-S1은 생-문학 혹은 부조리문학(카니발리즘)을 뜻하게 된다. 이념문학은 정치현실에의 복무를 주장하는 문학이다(“정치적으로 옳은 것이 문학적으로도 옳다”). 때문에 그것은 자기 이념의 정당성에 대해 확신하는 단의성(monosemy)의 신화를 구축하고자 한다(루카치의 문학론). 이와 모순/적대관계에 놓이는 것이 모든 의미의 분산 혹은 해체를 조장하는 불온한 문학으로서의 생-문학이다(“문학적으로 옳은 것이 정치적으로도 옳다”). 생-문학에서 삶과 문학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삶-문학의 비분리성은 이념-문학의 비분리성과 짝패이다. 부조리 문학의 넌센스와 카니발리즘의 다의성의 근거는 바로 이념이 아닌 삶이고, 삶의 육체성이다(바흐친의 문학론). 

망명문학은 정치와 분리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문학이다(형식주의 문학론). 이 분리주의 미학은 부르주아 미학 이데올로기의 근간이기도 한데, 그것은 정치와 문학뿐만 아니라 삶과 문학 또한 분리/구별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생-문학과 차이난다(“문학은 문학이고 정치는 정치다”). 러시아문학의 경우 이러한 문학관의 첫머리에 오는 이로 푸슈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적이기보다는 르네상스적인”(베르쟈예프) 푸슈킨은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 최초의 망명작가이며, 러시아 국민문학의 형성과 문학장의 발생은 푸슈킨의 문학적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끝으로, 트로츠키가 이름붙인 동반자문학은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참여(앙가주망)문학을 뜻한다(사르트르의 문학론). 이 계열의 문학은 문학의 상대적 자율성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을 닮지만, 적극적인 정치적 발언과 참여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의 분리주의 노선과 모순/적대되며 이념문학과 나란하다(“문학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장의 이러한 입체적 위상공간은 30년대의 본격적인 스탈린주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다단계 문학적 숙청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S1(공식문학)과 S2(비공식문학)짝으로만 접혀져서 축소/평면화된다. 그것이 일시적으로나마 다시 입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해빙 이후 60년대 문학에서이며,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특징지워지는 90년대 이후의 문학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인정>의 축이 <경제적 이익>의 축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인다. 

 

 

 

20세기 러시아문학의 작가들

러시아의 체호프 연구자 수히흐 교수가 <20세기의 책 20권: 러시아의 정전>(2004)에서 꼽은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고전’ 20권의 목록을 따라가면서 20세기 러시아문학의 대표 작가들과 대표작을 일람해본다. 

(1)안톤 체홉의 <벚꽃동산>(1903). 체홉 전공자답게 체홉의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을 제일 처음으로 꼽았다. 그리고 <벚꽃동산>은 20권 가운데 유일하게 드라마 작품이기도 하다. 나머지 19권의 작품들은 전부 장편소설이거나 단편소설집들이다(그러니까 이 ‘20권’에 시는 빠져 있다). 사실, <벚꽃동산>은 20세기를 시작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19세기를 마감하는 작품이다(정확하게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다). 물론 <벚꽃동산>은 우리말로도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으며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라예프스카야(=귀족계급)의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그걸 고작 벚나무동산으로 간주하는 로파힌(=상인계급)에게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동산을 별장지로 개발하고자 하며, 4막의 배음(背音)으로 이 벚나무들을 찍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참고로, 작가 체호프는 객관적인 관찰자였지만 인간 체호프는 ‘아름다움’의 예찬자였다. 

(2)막심 고리키의 <어머니>(1906-1907). 물론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한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대학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서는 빠져나간 듯하지만,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평가 또한 예전에 못 미치지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유효하다. 하지만, 이때 ‘고전’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란 의미가 아니라, ‘시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란 뜻이어야 한다(때문에 <어머니>는 1980년대 우리의 대학가에서 필독서였다. 대학가 축제 때면 <파업전야> 같은 영화를 보는 게 당시의 ‘문화’였고). 한 시대와 운명을 같이하는 작품이 ‘고전’이란 이름에 값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개인적으론, 어떤 작품에 들어맞는 시대/시점이 있는 것이지 시대를 넘어선 작품이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작품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것이 아닌 이상. 그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베스트로 꼽는 작품들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러한 당대성을 감안하지 않고 지금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너무 ‘도식적’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그러니까 <어머니>는 ‘도식적’이었던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며, 우리의 80년대는 ‘도식적인’ 시대였다). 

(3)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1911-1913). 나보코프가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세계 3대 소설에 꼽기도 했던 작품이다(이어서 나보코프가 꼽는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산문작가로서 벨르이는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록과 함께 러시아 상징주의의 최대 작가이며, <페테르부르크>는 그의 대표작이다(더불어 그는 고골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서를 갖고 있다). 푸슈킨의 서사시 <청동기마상>에서 시작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문학적/문화적 신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거쳐서 완결되는 작품이 또한 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이다. 벨르이의 소설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건 <은빛 비둘기>(제3문학사)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지만,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을 듯하다. 

(4)예브게니 자먀찐(1884-1937)의 <우리들>(1920). ‘자먀친’(혹은 ‘자먀틴’)으로도 읽히는 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흔히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의 원조(元祖)가 되는 ‘안티-유토피아’ 소설로 알려져 있다(이 작품을 <멋진 신세계>와 나란히 묶은 러시아어본도 있다). 내전의 와중이던 1920년에 이미 혁명의 불행한 종국을 예견하고 있는 이 작품은 29세기 단일제국이란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유토피아, 즉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세계의 극단을 예시해 보인다. 같은 러시아문학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상호텍스트적으로 읽히는 작품(‘수정궁’ 비판과 ‘2*2=4’란 테마). 자먀친은 다른 단편들과 함께 에세이들도 남기고 있지만(단편 두어 편이 우리말로 더 번역돼 있다), 역시나 기억되는 건 <우리들>의 작가로서이다. 

(5)이삭 바벨(1894-1940)의 <기병대>(1923-1925). 바벨은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오뎃사(영화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도시) 출신의 유태계 작가로서 <기병대>는 내전(1918-1920) 시기를 다룬 연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다(이 연작의 화자가 내전에 참전한 유태계 지식인이다). 우리말로는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으며, 조만간 그의 선집이 다시 나오는 걸로 안다. 참고로,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에는 버먼의 이삭 바벨론(서평)이 포함돼 있다. 동향의 작가 유리 올레샤(1899-1960)의 <질투>는 <마호가니>(열린책들, 2005)에 실려 있다.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작업하기도 했으며(<베진초원>의 시나리오를 썼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영화화하기에 적당한 테마와 문체를 갖고 있다. 다른 연작 <오데사 이야기>의 경우(‘오데사 마피아 이야기’쯤 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나리오도 따로 썼던 것 같다. 그의 문학세계는 2권짜리 전집에 다 수록될 만큼 간명하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좀 두꺼운 한 권에 다 정리되는 자먀친, 그리고 같은 오데사 출신의 유리 올레샤가 있다). 우리말 선집이 출간된다면, 좀더 자세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6)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의 <궤멸>(1925-1926). 역시 내전 시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바벨의 <기병대>처럼 좀 삐딱한 시각의 작품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선정자인 수히흐 교수가 아마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궤멸>을 꼽은 듯하다. 지금은 줄거리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궤멸>(예문출판사, 1988)은 아주 오래 전에 우리말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지금은 당연히 품절된 책이다. 작가 파제예프는 역시나 스탈린 시대에 숙청당한 바벨과는 달리 소위 ‘메인 스트림’에 속해 있던 작가이며, 작가동맹의 의장인가 부의장을 역임한 문학권력자였다. 

(7)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의 <체벤구르>(1926-1929). 요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연출가 레프 도진의 레퍼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도 재발견된 작가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이다(그러니까 러시아에서도 소개/해금된 건 내가 알기에 80년대 중반 이후이다). 그렇게 재발견된 작가로 미하일 불가코프와 비교되기도 하는 플라토노프이지만, <체벤구르>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만큼 폭넓게 읽히는 것 같지는 않다(출판되는 걸 보아도 그렇고, 공연되는 걸 보아도 그렇다). 다음은 연극의 한 장면. 

<체벤구르>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이 작가의 몇몇 단편들은 우리말로도 번역 소개돼 있는바 참조해 볼 수 있다(책세상에서 단편집 <귀향>이 나와 있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포투단강>이란 단편. 철도노동자 출신의 플라토노프는 사회주의 이념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오히려 소비에트 권력층에 부담을 주었던 작가였으며(스탈린이 싫어했다던가), 한편으론 작품의 매우 형이상학적인/유토피아적인 주제들 때문에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도 불린다. 그의 <코틀로반>(<구덩이>)를 강의에서 읽는다. 

(8)미하일 조셴코(1894-1958)의 <감상적인 이야기들>(1923-1930). ‘조셴코’ 혹은 ‘조시첸코’로 표기될 수 있는데,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단편모음집 이름이고, 장편소설(roman)을 쓰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굳이 어떤 한 작품을 거명하기는 어렵다. 플라토노프가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조셴코는 ‘20세기의 고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정말로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며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정식화하자면, <조셴코=고골+체홉>이다(이 세 작가를 ‘사소한 것들의 시학’으로 묶어서 다룬 연구서도 있다). 국내에 ‘조시첸꼬’란 이름으로 <부실한 컨테이너>와 <되찾은 젊음>, 두 권이 번역돼 있다. 

9)블라지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재능>(1937-1938). <재능> 혹은 <선물>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시절은 마감하는 장편소설이다(러시아어 ‘다르Dar’는 ‘재능’이란 뜻과 ‘선물’이란 뜻 모두를 갖고 있다. Gift란 영어 단어가 그렇듯이). 주인공이 시인으로서 성장해가는 자기발견적 이야기이면서 나보코프가 러시아문학의 전통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끝으로 나보코프는 ‘러시아어 시절’을 마감하고 영어로 언어를 바꿔서 작품을 쓴다. 그렇게 처음 쓴 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된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이다(원제는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 나보코프에 대해서는 작품을 읽지 않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여기선 간단히 줄이도록 한다. 

(10)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의 <고요한 돈강>(1925-1940). 요즘은 대학에서의 러시아문학사 전공강의에서도 빠지는 수가 많지만(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교되기도 하는 대하장편소설이다(당연히 영화화됐고, 얼마 전에도 이곳 TV에서 시리즈로 나왔다). 나는 학부에서 20세기 문학사 강의를 들을 때 읽었는데, 우리말로는 7권으로 번역돼 나와 있었다(러시아어로는 보통 2권). 지금은 품절이지만. 한 권짜리 만화로도 나와 있었고(기말고사 시험문제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쓰는 것이었는데, 그때 만화를 본 게 도움이 되었다). 수히흐 교수는 <고요한 돈강>을 다룬 장의 제목을 ‘카자크 햄릿의 오딧세이’라고 붙였는데,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그 햄릿의 이름은 물론 주인공 그레고리이다. <고요한 돈강>을 정말로 그가 썼는지에 대한 의혹들도 그래서 나왔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반 부닌과 파스테르나크에 이은 노벨문학상(1965) 수상자이다('파스테르나크 노벨상 파동' 때 러시아내에서는 파스테르나크가 '국민작가' 숄로호프보다 먼저 노벨상 수상자로 지명됐다는 사실에 분개한 이들도 많았다). 

(11)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의 <거장과 마르가리타>(1928-1940). 드디어 불가코프! 그의 작품집은 어디서나 눈에 띄고, 또 희곡들은 거의 끊이지 않고 공연되기 때문에 과연 이 작가가 스탈린 시절 이후 오랫동안 탄압 받고 금지됐던 작가였던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생전에 발표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어쨌든 <불가코프 백과사전>까지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사전과 같이 나올 정도의 지명도를 그는 갖고 있고, 또 누리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권력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의 모델로 삼았었지만(그는 <몰리에르의 생애>란 전기도 썼고, 몰리에르가 등장하는 드라마 작품 <위선자들의 밀교>도 썼다), 그가 뒤늦게 누리는 영광은 몰리에르에 뒤지지 않는 듯하다. 우리말로 번역된 불가코프도 제법 적지 않다. 혁명을 풍자한 <개의 심장>, <운명의 알> 등의 중편들에서 <백위군> 같은 소설, 그리고 <극장>, <위선자들의 밀교>, <조야의 아파트> 같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투르빈가의 나날들> 같은 대표 희곡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출간예정이라는 소문은 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네 종이 번역됐다. 

(12)이반 부닌(1870-1953)의 <어두운 가로수길>(1937-1945). 러시아에서는 얼마전에 이반 부닌의 새 전기가 출간됐는데,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1933) 수상자 부닌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능한 시인/작가의 한 사람이다. 부닌은 그가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인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양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데,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부닌은 지극히 ‘동양적’이다(특히 불교적이다). 러시아나 서구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의 문학이 우리에겐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나의 도식적인 이해에 의하면, 부닌은 체호프, 고리키와 함께 ‘거대한 작가’ 톨스토이의 문학적 계승자의 한 사람인데, 체호프가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그리고 고리키가 민중성을 이어받았다면 부닌은 그의 종교성을 계승하고 있다. 내 기억에 <어두운 가로수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으며(<비밀의 나무>란 제목으로 나왔던가), 기타 그의 단편들(<사랑의 문법>으로 번역돼 있다)과 <마을> 같은 중편들도 번역돼 있다(그의 단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이며, <일사병>이란 단편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견주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자전적 대표작 <아르세니예프의 생애>도 두 종이 번역됐다. 

(13)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1910-1971)의 <바실리 테르킨>(1942-1945). 드디어 내가 처음 듣는 작품이 나왔다. 사실 트바르도프스키란 이름을 내가 기억하는 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1962년에 잡지 <노브이 미르>에 실을 수 있도록 한 편집장 트바르도프스키로서이다. 그가 솔제니친에 맞먹을 만한 작가였다는 건 모르던 사실이다. 제목으로 봐선 바실리 테르킨의 일대기를 다룬 듯싶은 서사시로 부제는 '어느 병사에 관한 책'이고, 조국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 한다. 

(14)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45-1955).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1956년에 이 작품을 해외에서 먼저 출간하고, 이어서 1958년에 (다소간 정치적인 선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다소간 은둔적인 성격에 걸맞지 않은 문학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그는 스톡홀름에 가는 걸 포기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1960년에 사망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이 작품 때문에 그는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재촉한 것이다. 지바고 때문에!(‘지바고’는 러시아어 ‘삶’의 고어(古語) 형용사형이다) <닥터 지바고>는 1988년쯤에야 해금되며(그 이전에는 그의 초기 시들만이 출판될 수 있었다) 우리말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외에, <나의 누이, 나의 삶>이란 번역시집(그의 시들은 상당히 난해하지만, 좀 이해하면 재미있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고 옮겨진 그의 자전적 기록 정도(마야코프스키와의 교우와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라라의 모델이었던 올가 이빈스카야의 회고록 정도. 

(15)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 )의 <수용소 군도>(1958-1968). <수용소군도>가 출간된 건 1972년 겨울 파리에서였고, 이 때문에 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소비에트로부터 망명을 강요받게 된다(그에겐 강제출국 당하거나 망명하거나의 선택이 있었다). 흐루시초프 시대의 해빙 분위기를 타고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했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출간될 수 있었지만, 1970년대는 이미 (해빙은 물 건너 간) 브레즈네프의 시대였고, 이 새로운 시대는 자신의 조국을 ‘거대한 수용소’라고 고발하는 작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수용소군도>는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책이 출간된 프랑스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는데, 과거 소련을 지지했던 좌파 지식인들에게 결정타를 안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해야 했다. 물론 솔제니친이 망명지로 안착했던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의 시골마을이었으며, 거기서도 그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연설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곧 여론의 관심밖에 놓이게 된다(흔한 오해와는 다르게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이다. 다만 그의 공산주의는 ‘종교적 공산주의’일 따름. “현대인은 신을 잊었다!”는 게 그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군도>를 비롯하여 아주 많다. <암병동>과 <제1권>, <붉은 수레바퀴>(이 대작도 나오다 만 것 같다)까지가 그의 주요 장편들이라고 한다면, <마트료나의 집> 등과 같은 초기 단편들도 여럿 번역돼 있고, <사슴과 라게리의 여인>(‘라게리’는 ‘수용소’란 뜻이다) 같은 희곡작품도 번역돼 있다(오늘 헌책코너에서 산 그의 희곡집에는 안 들어 있는 걸로 봐서, 그는 희곡작품도 꽤 여럿 쓴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에세이집까지. 

(16)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1954-1973). 샬라모프는 이름만 들어본 작가인데, 이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지는 몰랐다. ‘콜리마’는 소비에트 시절 가장 '악명 높았던' 수용소가 있었던 지명이고(그러니까 아마도 시베리아 어디일 것이다), ‘콜리마 이야기’는 콜리마를 배경으로 한 연작이다. 웬만한 작품집에 들어가 있는 <콜리마 이야기>가 다 ‘선집’인 걸로 봐서 이 연작으로 작가가 얼마나 많은 걸 썼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사실, 샬라모프 자신이 15년간(1937-1951) 거기에서 유형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그는 그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꼬박 20년이다!) 자신의 유형생활을 되새김질하는 이야기들을 쓴 것이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예의상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샬라모프에 대한 논문들이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으므로 번역본들도 곧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7)안드레이 비토프(1937- )의 <푸슈킨의 집>(1964-1971, 1978…) 최근에 비토프의 2권짜리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물론 장편 <푸슈킨의 집>은 제외한 것이다(원제인 ‘푸슈킨스키 돔’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문학연구소로 보통 ‘푸슈킨연구소’라고 부른다. 거기엔 푸슈킨의 데드마스크가 많은 육필 원고와 함께 보존돼 있다고 한다). <푸슈킨의 집>은 작가가 계속 버전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정된 연도를 아직 표시할 수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나마 작년인가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된 것인데, 현재까지는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다. 푸슈킨의 문학적 유산으로서의 러시아문학 전체가 이 소설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이거나 잠재적 인자들이다. 실제로 비토프는 나름대로의 푸슈킨 ‘연구자’이기도 하며, 푸슈킨에 관한 두 권의 책, ‘1825년의 푸슈킨’, ‘1836년의 푸슈킨’을 편집하기도 했다(1825년은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난 해이며, 1836년은 푸슈킨의 생애 마지막해이다. 그는 1837년 1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18)바실리 슉쉰(1929-1974)의 <성격들>(1973). 짐작에 <성격들>은 특정한 작품이 아니라 슉쉰의 문학을 총괄하는 작품집인 듯하다. 또 그래야 말이 된다. 그의 문학은 그의 삶 전체로 웅변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검게 탄 얼굴에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농부 같은 (한 성격 할 것 같은) 인상의 슉쉰은 70년대 초반 소비에트 문화계의 ‘간판’이었다(우리 작가로는 딱 황석영 같은 타입이다. 황석영이 영화감독도 겸했다면). 그는 영화계에서도 유명인사였는데(감독으로도 유명하다), 1973년에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과 연출까지 맡은 영화 <칼리나 크라스나야>(사전적 의미로는 ‘빨간 까마귀밥나무’란 뜻이다)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수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건 그만큼 슉쉰이 러시아 나로드(민중)의 정서에 가장 잘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수히흐 교수의 장제목은 “한 영혼이 아프다”. 

‘작가-예언자’란 평까지 듣는 슉쉰은 러시아의 영혼이면서 한 시대의 영혼이었던 것. 한국에서 슉쉰은 몇 편의 단편이 소개돼 있는 게 전부이다. 스첸카 라진의 농민반란을 소설화한 <나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러 왔노라> 같은 대표적 장편소설은 한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을 듯하므로, 한번 기다려봄 직하다. 참고로, 슉쉰을 추모하는 기고문에서 한 작가는 러시아문학에서 다섯 명의 위대한 작가를 꼽았는데, “푸슈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슉쉰”이 그 다섯 명이다. 

(19)발렌친 라스푸친(1937- )의 <마쪼라의 이별>(1976)과 (20)유리 트리포노프(1925-1981)의 <노인>(1978)은 한꺼번에 언급하기로 한다. 브레즈네프 시대인 1970년대 러시아문학의 대표적인 경향은 ‘농촌문학’과 (도시의) ‘일상문학’이었는데, 라스푸친과 트리포노프는 각각 이 두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지명도에 있어서는 라스푸친이 한 수 위인데(제정 말기의 괴승 라스푸친과 성이 같지만 무관하다고 한다), 러시아의 중학교(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들이 다수 수록돼 있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라스푸친>이란 책도 나올 정도이다. <마쪼라의 이별>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소련동구문학전집>), 댐건설로 수몰 예정인 한 농촌마을 사람들의 얘기이다. 라스푸친은 농촌문학에 심리적, 철학적 깊이를 부여한 걸로 평가되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유사한 ‘지킴 신앙’ 등이 다뤄지기 때문에, 비교적 친숙하게 읽힌다. 라스푸친의 작품으로는 <마쪼라의 이별> 외에도, <마리아를 위하여>(원제는 ‘마리아를 위한 돈’), <마지막 기한>,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트리포노프의 작품으론 <긴 이별>, <또 다른 삶> 등이 번역돼 있다(<소련동구문학전집>에 실려 있다). <교환>(경희대출판부, 2005)가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19세기의 러시아 문학  개쩌는 퍼온글   
2015. 3. 21. 9:30
복사https://blog.naver.com/pdw9024/220306533638

 

19세기의 러시아 문학 (1)

 

 

 

러시아 문학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세계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는 그야말로 시의, 소설의 '황금시대'였다.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우리에게도 이미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되어 버린 걸출한 작가들이 많이 배출된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 문학을 배태한 문학 외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자.

 

1812년 조국전쟁(나폴레옹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를 한 이후, 믿었던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25)는 반동정치를 폈다. 이에 대해 조국전쟁의 승리 속에서 애국심과 민족 정신을 고취시킨 근위 청년 장교들이 주축을 이루어 전제정치에 반대하며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비밀결사가 조직되었고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반란'(1825)이라고 불리우는 혁명운동이 알렉산드르 1세에 뒤이은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고,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가 또 다시 19세기 전반 러시아 사회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귀족 출신 인텔리겐차를 중심으로 농노제와 전제 정치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전제 정치와 농노제에 대한 저항과 크림 전쟁의 실패로 러시아에서는 마침내 1862년 농노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명목상의 농노해방이었다. 그에 대한 실망과 환멸로 개혁 지향적인 귀족들 대신 혁명 지향적인 잡계급 출신인들이 소위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운동'라는 혁명운동(나로드니키가 게르첸이 창설한 러시아 농민 사회주의 이론을 근거로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성을 부정하고 농민혁명을 통하여 농촌 공동체와 협동조합의 기초 위에 사회주의를 실현시키고자 한 운동)을 주동하게 되었다.

 

혁명사업에 민중의 힘을 얻지 못한 인민주의자들은 1870년대 말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분열과 갈등 속에서 혁명은 실패하게 되고 러시아는 다시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농노 제도가 붕괴된 러시아는 자본주의로 발전되어 갔고 노동자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간의 갈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이러한 러시아 사회적 토양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

 

19세기 초에 발생한 러시아 낭만주의는, 조국전쟁의 승리에 따른 미래에 대한 밝은 기대감이 알렉산드르 1세의 반동정치에 의해 좌절되고 그에 대해 서구의 자유 사상에 물든 청년 작가들이 환멸과 배신을 느낀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의 실패가 가져온 미래의 러시아에 대한 비관주의 또한 러시아 낭만주의의 특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러시아 낭만주의는 현실 타개의 경향을 지닌 '시민적' 혹은 '적극적' 낭만주의와 현실도피의 경향을 지닌 '개인주의적' 혹은 '소극적' 낭만주의의 두 방향으로 흐른다. 적극적 낭만주의자로는 를례예프, 큐헬베케르, 초기의 푸슈킨, 레르몬토프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시 속에서 자유에의 갈망, 현실의 농노제와 전제 정치에 대한 항의, 조국애를 표현했다. 이에 반해 쥬코프스키와 바튜슈코프 등은 소극적 낭만주의자에 속하는 시인으로 현실에 대해 절망하고 불신하며 인간의 내면에서 이상을 찾으려고 했다. '지상의 삶의 고통과 상실한 것들의 비밀'을 노래한 쥬코프스키는 현실과 거리가 먼 과거와 이상 세계를 꿈꾸기를 즐기던 시인이었다.

 

부조리하고 답답한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과 이상 사회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담고 있는 러시아 낭만주의 정신은 이미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의 정신의 싹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러시아 낭만주의는 자연스럽게 사실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푸슈킨(1799-1837)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까무잡잡한 피부, 두툼한 입술... 전혀 러시아인 같지 않은 외모에 온전한 러시아인의 삶을 살았던 천재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 38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그가 남기고 간 자취는 200년을 지나고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 오늘날까지 추앙 받고 있는 그는 감상주의 및 낭만주의의 문학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러시아 사실주의와 근대 민족 문학을 창출한 작가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그때까지 러시아 문학에서 도외시되던 구어와 평민어를 창작에 사용함으로써 이 언어를 하나의 문학어로 인정받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찬사를 받는다.

 

푸슈킨은 자신의 시 속에서 평이하고 간결하면서도 투명한 시어로 인간의 다양한 내적 경험과 인생을 노래했다. 사랑(<난 그대를 사랑했소>, <케른 부인에게>), 젊음과 우정(<차르스코예 셀로의 추억>), 자유 사상(<자유>, <시골, 차다예프에게>)>, 자연(<카프카즈>), 인생(<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인생의 짐마차>), 시인(<시인>, <예언자>,(시인에게>) 등 다양한 시적 테마는 서정시, 송시, 친구와의 서간문, 엘레지, 연애시 등 다양한 형태의 장르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그의 시에 반영된 세계는, 때론 어두운 목소리를 깔지만 주로 밝은 음조로 울려 퍼진다. 푸슈킨은 시 속에서 극도의 개인적인 감정의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내면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조화롭게 자신의 이상을 찾아간다.

 

<자유>, <차다예프에게>, <시골> 등 소위 저항시와 농노제를 고발하는 경향의 시를 썼다는 이유로 겪게 된 푸슈킨의 남부 유형, 그 시절에 쓰여진 낭만주의적 경향의 '남부 서사시' (『카프카즈의 포로』,『도적 형제』,『바흐치사라이의 분수』,『집시들』)에서 주인공들은 사회, 타문화, 자기 자신과의 갈등 속에서 소외되고,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 채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자유>, <차다예프에게>, <시골> 등 소위 저항시와 농노제를 고발하는 경향의 시를 썼다는 이유로 겪게 된 푸슈킨의 남부 유형, 그 시절에 쓰여진 낭만주의적 경향의 '남부 서사시' (『카프카즈의 포로』,『도적 형제』,『바흐치사라이의 분수』,『집시들』)에서 주인공들은 사회, 타문화, 자기 자신과의 갈등 속에서 소외되고,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 채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운문 형식으로 쓰여진 그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1823년에 시작하여 8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러시아의 백과 사전'이라는 찬사를 받는 이 작품의 내용은 이러하다: 주인공 '오네긴'은 자신의 삶에서 특별한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주위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청년이다. 페테르부르그의 사교계 생활에 식상한 그는 시골 영지에서 이웃 영주의 딸인 여주인공 '타티야나'를 알게 된다. 그녀는 오네긴의 가면 뒤로 감춰진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결국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오네긴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시골 처녀의 사랑을 거절한다. 그후 타티야나는 모스크바로 떠나 노(老)장군과 결혼을 하게 된다. 한편 오네긴은 결투에서 '렌스키'라는 청년을 살해하게 된 후 오랜 편력 끝에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그는 상류사회의 귀부인이 된 타티야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녀는 과거를 회상시키며 그에게 훈계와 설교를 하며 거부한다.

 

오네긴은 주위 환경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며 살아간다. 자신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부딪혀 삶을 영위하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무력하고 부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오네긴의 형상은 러시아 문학의 특별한 유형인 '잉여인간'의 전형이 된다. 러시아 문학에서 계보를 이루고 있는 이 '잉여인간'이란 것은,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정열과 행동력도 없고 삶의 목적도 없이 무의미한 생활에 빠져 고통받는 그 당시 러시아의 교양있는 귀족 청년의 형상을 말하는 것이다. 오네긴의 형상과는 반대로 이 작품에서 푸슈킨은 타티야나를 통해 민중과 러시아 자연에 가까운, 정신적, 도덕적으로 충만한 러시아 여인상을 체현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은 이후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들이 문학적 형상을 만드는데 중요한 전형을 제시했다.

 

페테르부르그의 원로원 광장 끝에 놓여 있는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사상'은 푸슈킨의 서사시『청동기사』(1833)에 등장한다.


 

이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 속 배경으로 나오는 페테르부르그와 그와 관련된 표트르 대제의 정책을 잠시 살펴보자.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지리적 위치로만 보면 군항으로 적절한 그야말로 진흙탕 위에 페테르부르그 도시를 건설하도록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들은 식량 부족과 질병으로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인간의 뼈' 위에 건설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과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장엄하고 화려하게 탄생한 페테르부르그는 대홍수, 겨울의 강한 눈보라 등 자연의 보복을 끊임없이 받아야만 하는 도시로 남게되었다.

 

이러한 배경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젠 『청동기사』의 내용으로 돌아가보자: 주인공인 '예브게니'는 1824년 페테르부르그의 대홍수로 인해 '파라샤'라는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집을 잃게 된다.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미쳐서는 정처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까지 오게 된다. 그는 청동 황제가 자기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보고 욕을 한다. 그 순간 예브게니는 자신을 잡으려고 달려오는 기마상의 발자국 소리에 쫓겨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죽게 된다. 이 작품에서 표트르 대제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을 가차없이 휩쓸어버리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권력의 힘 앞에 사그라지는 힘없는 인간의 모습이 예브게니를 통해 나타난다. 이 작품의 저변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없는 문명은 결국 죽음과 파멸에 이르는 것이라는 작가의 경고가 깔려 있다.

 

18세기 초의 참칭자 가짜 드미트리의 제위등극을 소재로 삼은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1825), 푸가쵸프 반란을 소재로 다룬 소설『대위의 딸』(1833), 탐욕스런 인간의 파멸과 종말을 그린 단편『스페이드의 여왕』(1834) 등의 작품에서도 푸슈킨은 역사, 권력, 인간, 선과 악 등의 문제를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푸슈킨 작품에는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문제들이 균형 잡힌 원숙한 시선으로 비쳐졌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는 자유, 인간에 대한 사랑, 미래에 대한 믿음이 살아 숨쉬고 있다. 푸슈킨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과 안타까움을 토로한 레르몬토프의 시(<시인의 죽음>), 그것은 짧은 생애 동안 꿋꿋하게 인간의 진리와 선을 노래하다 떠난 시인을 위한 작은 선물이었을 것이다.

 

 

 

 

 

 

 

 

(2) 레르몬토프 (1814-1841)

 

"...내 위로는 영원히 잎을 피우는

울창한 참나무가 몸을 숙여 소리냈으면..."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는 부조리한 사회 현실, 그것에 대한 회의와 절망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인생과 도덕적, 철학적 문제에 깊이 사색하는 시인이다.

 

밝고 긍정적이며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으로 가득 찬 푸슈킨 작품과는 달리, 레르몬토프의 작품에는 주로 회의적이고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또한 푸슈킨이 시에서 절제된 표현과 양식을 추구한데 비해 레르몬토프는 감성, 열정에 치우쳐 자유로운 표현과 양식을 추구하였다.

 

레르몬토프의 시에서는 고독, 애수, 절망과 같은 모티프가 많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암울하고 감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한다(<돛단배>, <지루하고 서글퍼>, <나 홀로 거리를 나서는데> 등).

 

레르몬토프가 시인으로서 결정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은, 결투로 비명에 죽은 푸슈킨을 애도하는 한편 그 비극을 낳게 한 상류 사회의 부패와 타락성을 고발한 시 <시인의 죽음>(1837)이다. 그러나 레르몬토프는 이 시 때문에 니콜라이 2세의 노여움을 사 카프카즈로 추방된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그의 창작력은 더욱 왕성해져 자유에의 갈망에 찬 서정시를 속속 발표했다. 레르몬토프의 시는 창작 후반기로 갈수록 과장된 감정의 표현과 분출이 많이 자제되고,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시인은 시 속에서 같은 시대, 같은 사람들의 상념을 반영하고(<상념>),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사명감과 사회 문제와의 괴리감에서 오는 고통을 표현하기도 한다(<예언자>).

 

반항하는 정신의 형상으로서 악마는 창작 초기부터 레르몬토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장시 <악마>를 잠시 살펴보자. 여기에서 악마는 악의 화신으로서 신은 그에게 카프카즈 지방을 영원히 유랑하는 운명을 부여한다. 악마는 어느 날 '타마라'라는 여인의 약혼자를 죽이고 그녀를 유혹하며 사랑을 갈구한다. 타마라는 악마의 유혹에 사랑을 받아들이지만 악마의 입술이 닫는 순간 죽음을 맞게 된다. 천사가 그녀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고 악마는 그녀의 영혼을 잃고 다시 홀로 카프카즈 지방을 유랑하게 된다. 여기에서 악마는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열정과 냉담이 내면에 혼재하는 이미지, 그렇기에 비극적인 내면의 세계를 지닌다. 악마는 자신의 오만함으로 결국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고독하게 살아간다. 레르몬토프는 '오만한 정신'을 지닌 악마의 형상을 통해 시대의 모순, 불합리와 세대의 진보적인 인간이 지닌 비극적인 결말을 반영하고 있다.

 

레르몬토프는『우리 시대의 영웅』에서 '페초린'이라는 푸슈킨의 '오네긴'에 이어 또 하나의 잉여인간을 창출한다. 주인공의 심리에 대한 분석이 뛰어난 이 작품은 사실주의로의 길을 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푸슈킨과 레르몬토프가 러시아 사실주의의 초석을 마련했다면, 고골은 러시아 사실주의의 산문의 터를 닦고 19세기 후반의 산문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3) 고골 (1809-52)

 

"페테르부르그에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사라졌다.

마치 페테르부르그에는 그라는 인간이 있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이제 '고골의 시대'가 열렸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고골의 시대'라 불리는 산문시대의 상징적 존재인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은 낭만주의적 색채를 띤『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화』를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 이후 사실주의적 색채가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는 『외투』,『코』와 단편집『아라베스크』에 수록된 작품들은 (「네프스키 거리」,「초상화」, 「광인일기」)은 '페테르부르그 이야기'로 분리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그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그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도시의 비인간성과 냉혹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영향으로 서구적인 요소와 러시아적인 요소가 공존하게 된 두 얼굴의 도시 페테르부르그의 양면성, 즉 현란하고 세련된 풍요로운 모습과 그 밑에 숨겨진 조야함, 빈곤, 야만성의 대립양상은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무시한 채 아무렇게나 뒤얽혀 있는 세계로서 그의 작품들의 적절한 배경이 되고 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 모두는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극찬을 했던 작품 『외투』의 주인공인 하급관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어렵게 마련한 외투를 강도들에게 빼앗기고 크게 상심하여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무덤에서의 안식을 찾지 못하고 그는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와 밤마다 유령으로 나타난다. 고골은 이 작품에서 고통받는 소시민의 형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코』는 8등 문관 코발료프가 자신의 '코'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으로 고골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환상적이고 기괴하게 다룬다. 고골의 환상과 현실이 교차되는 작품 세계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고골의 희곡『검찰관』에서는 러시아 관료 체제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흘레스타코프라는 젊은 환락가는 도박으로 무일푼이 되자 하숙비가 밀린 채 지방 도시 여관에서 묵게 된다. 이 도시 관료들은 그가 암행 감찰관이라고 오해를 하고 그에게 온갖 뇌물을 바치고 아부를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가 감찰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는 모두가 악이고 부정으로 등장하고 있다. 고골은 지방 도시의 추악함과 러시아 관료 체제의 부패상을 풍자하면서 러시아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길 기대했다. 이러한 현실 비판적 경향은 그의 작품 『죽은 혼』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여기에서는 농노제와 지주들의 비인간성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고골이 새로운 문학의 단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러시아 문학(2)


 


사실주의 시대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에 뒤이어 대항하는 위치에서 일어난 문예 사조다. 사실주의의 문제는 현대의 문학에서도 많은 논쟁과 대립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사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인간을 둘러 싼 현실을 묘사하고 반영한다는 것이다. 사실주의자들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묘사하는 가는 시대에 따라, 문화적 토양에 따라 물론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 근본에는 항상 '현실의 반영'이라는 문제가 깔려 있었다.

 

러시아 사실주의의 시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러시아에서 사실주의가 확립된 시기로 보통 1840년대 후반기를 꼽는다.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들은 소재를 동시대 현실에서 찾고 그것을 작품 속에 정확하고 진지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독자로 하여금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비판하며 더 나은 이상향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암울하고 답답한 러시아 현실 속에서 긍정적 방향 제시를 위한 올바른 현실 인식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와의 복잡하고도 상호 대립적인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전면적인 삶의 모습을 포착하려고 하였다. 그들에게 삶의 총체적 이해는 중요한 문제였다. 1860년대를 전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시민적 평론가들인 체르느이셰프스키, 도브롤류보프, 피사례프 등은 문학의 공리적 성격과 사회적 비판 기능을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 츄체프, 페트는 순수 예술을 지향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는 사실주의의 조류가 지배적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는 복잡하게 얽힌 인간의 깊은 내면을 형상화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적, 정신적 생활을, 개인의 삶을 형성하고 규정짓는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켰다.

 

(1) 투르게네프(1818-1883)

 

"...루딘의 불행은 러시아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준 높은 내용, 아름다운 문체, 완벽한 예술 구조.... 이것은 투르게네프의 작품에 부쳐지는 찬사의 말이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는 역사적 사실과 사상에 민감한, 서구 사상에 상당히 귀를 열고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30년대 모스크바대학의 학생 서클에서 시작하여 1873-74년의 '브 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러시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농노에 대한 지주들의 횡포는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1847-51)에서 잘 나타나있다. 여기에서는 지주들의 비열한 생활과 러시아 농노제도의 참혹한 모습이 가차없이 폭로되고, 러시아 민중에 대한 사랑과 민중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의 중편 소설『루딘』(1856),『그 전야』(1860),『아버지와 아들』(1862),『연기』(1867), 『귀족의 둥지』(1869), 『처녀지』(1877)는 과도기적 러시아 사회에서 충돌하고 새로 형성 되어 가는 인간의 정신과 사상을 그려내고 있다.

 

『루딘』의 주인공인 '루딘'은 1840년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독일 관념철학의 영향하에서 자란 그는 이론가였지만, 그 이론을 실천할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로 '잉여인간'의 계보에 속한다. 이에 반해 여주인공 나탈리아는 루딘과 대조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교육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수행해낼 수 있는 인물이다.

 

다음에 나온 중편『그 전야』에서는 새로운 세대상인 '인싸로프'가 조국 불가리아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투사로 나타난다. 그는 귀족의 딸 엘레나와 사랑을 하게 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게 된다. 여기에서 투르게네프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더 폭넓은 행동을 하려는 엘레나의 형상을 통해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긍정적인 여인상을 발전시켰다.

 

또 다른 작품『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 세대, 구세대의 대척자로서 나오는 주인공 바자로프는 자연과학을 배우고 모든 기존의 도덕과 가치관을 거부하는 니힐리스트다. 그는 러시아 사회의 신속한 개혁을 위해서는 예술도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1860년대의 급진적 인텔리겐차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브 나로드 운동'은 중편소설『처녀지』에서 묘사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네쥬다노프' 또한 잉여인간의 유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70년대의 물결을 타고 농민을 계몽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허위에 찬 모습을 자각하고 고민하다가 실의에 빠져 권총 자살을 하게 된다. 그는 민중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과 동화될 수 없었던 비극적인 전형으로 나타난다.

 

이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모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의 전형이다. 투르게네프는 자신의 이러한 대표적 산문들을 통해 그 당시 주요한 사회적 문제들인, 니힐리즘의 문제, 잉여인간 논쟁, 인민주의자 운동 등을 예술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그의 작품이 그 당시 러시아의 '사회사상사'로 불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전반적으로 뚜르게네프의 작품에는 단편적이고 우연한 인간의 유형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연관 속에서 그 당시 러시아 지식인의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밑에는 작가의 섬세한 서정성이 흐르고 있다.

 

(2) 도스토예프스키(1821-81)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한 알로 남지만

만일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토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인간의 영혼의 심연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있게 파헤쳐 들어간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철학적, 종교적, 사회적 테마가 서로 얽히고 얽혀 녹아있기에 다양한 관점과 각도에서의 해석 없이 그 본질을 다 헤아리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가난, 유형, 도박, 간질병 등으로 순탄치 않은 삶을 걸어온 도스토예프스키.... 창작 초기에 그는 도시의 뒷골목과 지하실의 사람들, 가난한 학생, 하급 관리들, 학대받고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의 고뇌에 대해 자신의 작품의 지면을 할애한다. 『가난한 사람들』(1845),『백야』(1848)에서는 도시 빈민가 사람들의 심리, 그에 대한 작가의 동정과 연민이 잘 표현되어 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정신 세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을 치루게 된다. 농노제 폐지, 검열 제도 폐지, 재판 제도의 개혁 등 사회주의 이상을 러시아에 실현시키는 꿈을 꾸며 페트라쉐프스키가 주관하는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그는 정부의 탄압 과정에서 1849년에 체포되어 사형장까지 끌려가게 되었으나, 사행 집행의 바로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사형이 면제되고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유배생활은 그의 정신 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사회주의와 무신론을 버리고 종교에서 구원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불행과 원인은 인간의 내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자신의 내부에 숨어있는 악과 죄와 투쟁하여 도덕적 완성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인간 구원의 길은 궁극적으로 신에, 종교적 구원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이후 그의 걸출한 작품들 - 『죄와 벌』(1866),『백치』(1868),『악령』(1871-72),『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5)은 이러한 정신적 발로에서 나타난 세계였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젊은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외적으로는 필요한 돈을 구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자인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까지 살해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이다. 그는 인간을 일반적인 도덕률에 지배받는 평범한 사람과 나폴레옹처럼 법을 초월하여 영웅으로서 그 위에 군림하는 비범인으로 분리하고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시험해보고 싶어한다. 결국 그는 초인사상에 빠져 노파를 살해하게 되고 종교적 사랑의 화신인 소냐의 신앙심과 권유로 자수하고 구원의 길을 걷게 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의 다양한 내면적 갈등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며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을 믿고 따랐던 스메르자코프(이반의 아버지의 사생아)가 부친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정신 파탄을 일으킨다. 무신론자이며, 사색적인 주인공의 또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는 이반은 스스로의 부조리에 빠져 자기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알료샤는 그리스도적 형상으로 그려져 부조리한 인간 세계를 사랑으로 구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는 극단적이며 병적인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상으로 점철된 주인공은 자기 파멸을 맞게 된다. 그의 작품 세계에는 신앙과 무신론, 그리스도와 반그리스도, 선과 악, 고귀한 정신과 저속한 정신이 서로 공존, 대립하며 복잡하게 얽혀서 거대한 이념의 대립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3) 톨스토이(1828-191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인간의 복잡한 심리에 주목하고, 인생의 참된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고뇌했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세계 무대에서 러시아 문학의 굳건한 자리를 굳히는 데 공을 많이 세운 작가임에 틀림없다.

 

톨스토이는『유년 시절』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소년 시절』,『청년 시절』과 함께 톨스토이의 자전적 3부작을 이룬다. 이 작품들 속에서 톨스토이는 섬세한 디테일로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분석, 묘사한다.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이며 심리학자인가!'라고 플로베르를 외치게 만들었던 『전쟁과 평화』는 1805년부터 데카브리스트 반란 전야까지의 약 20년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방대한 스케일은 그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재로 다룬 영화에서도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역사적 사건들 하나 하나가 마치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또한 여기에서 톨스토이는 볼콘스키와 로스토프 양가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슬픔, 기쁨, 갈등 등 각자의 생활을 그려 가정 소설적인 성격도 가미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톨스토이는 무엇보다도 러시아 민중을 무서운 저력이 있는 근원적인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진정으로 작품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은 민중들이다. 톨스토이는 역사를 움직이는 주요 힘은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민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나 카레리나』는 가정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브론스키를 사랑하게 된 여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는 남편과 이혼한 후 브론스키와 살게 된다. 그러나 안나 카레니나는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의 불신과 자신의 도덕적 죄책감, 세상 사람들의 비난의 눈초리 등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을 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험담하는 세상 사람들을 경멸하면서도 그 사회와 단절하고 살 만큼 용감하고 대담하지 못했다. 작품에 기저에는 안나를 단죄하고 죽음으로 몰아 넣은 사교계 사람들은 실상 그럴 권리가 없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톨스토이는, 브론스키와 안나와의 대립 구도로 설정된 레빈과 키티의 시골에서의 결혼 생활을 통해 선을 보여주려고 했다. 톨스토이는 도시와 농촌, 문명과 자연이라는 이중구조 속에서 문명과 결부된 것은 위선이고 거짓이고, 자연과 결합된 것이 선이고 진실이라고 간주했다. 톨스토이는 생활의 최상의 의미는 자연과의 융합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저술한 후 톨스토이는 삶에 대한 허무감과 무의미에 빠져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정신적 고뇌를 겪는다. 그후 톨스토이는 『참회록』(1879-1880)에서 자신의 이전 생활의 모든 것을 부정했고 자신의 문학까지도 부정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농민의 무정부주의, 기독교적 인간애와 악에 대한 무저항 정신이 그의 중심 사상이 된다. 이러한 정신적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그의 후기 작품에는 교훈성, 사상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중편『이반 일리치의 죽음』(1884-86), 희곡『어둠의 힘』(1886), 『부활』(1889-99) 등>.

 

삶을, 예술을, 진리를 찾아 고뇌의 시간을 보냈던 톨스토이, 민중과 함께 하는 삶, 기독교적 삶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인간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이고, 예술이 무엇인지를 설파하고 있다.

 

(4) 체홉(1860-1904)



"우린 또 새 정원을 만들어요,

이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말예요..... "

 

톨스토이에 의해 '푸슈킨과 마찬가지로 그는 형식에 추진력을 주었다.' 라고 평가 받았던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가벼운 유머 단편들을 유머 잡지에 투고하면서 문필 활동을 체홉은 그 특유의 재치와 익살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말단 관리의 죽음』,『홀쭉이와 뚱뚱이』,『카멜레온』). '체혼테(필명 안토샤 체혼테) 시대'라 불리는 체홉의 창작의 전반기에는 무엇보다도 유머 소품들이 많이 있다.

 

1886년 이후 그는 인간들의 고독감과 실망감, 인간 관계에서 상호 의사 전달의 부재라는 테마로 더욱더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시기에는 가벼운 일회적 사건에서 사회적 내용의 슈제트가 증가하면서 유머는 사회풍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오느이치』에서는 습관적인 생활 속에서 정신적으로 점점 메말라가는 이오느이치의 인생 여정이, 『상자 속의 인간』에서는 외부 환경과 차단한 채 자기 세계 속에 침잠해 사는 벨리꼬프의 종말이 그려졌다.

 

체홉의 단편, 중편 작품들 속에서는 소시민들의 일상과 속물근성, 지식인의 고뇌의 한계,인생 무상 등의 문제들이 유머, 부드러운 풍자, 간결하고 섬세하고 객관적인 문체를 통해 드러난다.

 

체홉의 4대 희곡으로 꼽히는『갈매기』(1896),『바냐 외숙』(1898),『세 자매』(1900),『벚꽃동산』(1903)은 그에게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었다. 그의 희곡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단조롭고 정적이다. 체홉은 실제로 살아있는 현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하찮은 것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체홉의 희곡 작품에서 중요한 사건은 모두 무대 뒤에서 이루어져 극의 긴장감을 창출한다. 또한 인물들 간에 서로 연결되지 않는 대사는 그 들간의 고립과 의사 소통의 부재를 가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체홉은 자신의 희곡 작품을 통해 세기말의 혼란스런 분위기와 귀족들의 정신적 위기를 드러내었다. 체홉의 등장인물들은 당대 러시아 현실의 암울함을 느끼면서도 그 어딘가에 그들이 꿈꾸는 의미 있는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체홉은 인간의 비극적 현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과 발전을 객관적이고 절제된 표현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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