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주크 제국
살주크국
دولت سلجوقیان
Dawlat-i Saljūqiān
1037년 ~ 1157년 / 1194년
멸망 이후
가즈니 왕조
룸 술탄국
부와이 왕조
호라즘 왕조
위치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아나톨리아
수도
니샤푸르 (1037~1043)
레이 (1043~1051)
이스파한 (1051~1118)
하마단 / 메르브 (1118~1194)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술탄
주요 술탄
알프 아르슬란
말리크 샤
언어
페르시아어 (정부, 공용어)
오구즈어 (왕족, 군대)5
아랍어 (종교계)
종교
수니파(하나피파)
면적
3,900,000km² (1080년 경)
10세기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진출해 11세기 수니파 이슬람 세계를 통일했으나 얼마 못 가 12세기에 멸망한 제국이다.
지배 계급은 튀르크계 부족이었지만 정치 체제는 페르시아식을 지향했으며, 궁정과 관료의 언어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다.
셀주크 제국의 등장으로 중동 이슬람 세계는 오랜만에 다시 통일되었으나, 그리 길지 못했다. 다만 셀주크 방계 가문이나 휘하의 공국들은 몽골 침공기까지 열심히 제국의 후계 자리를 두고 투쟁을 벌였다.
셀주크란 명칭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부족인 오구즈족에 속한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과거에는 주로 '셀주크 튀르크'라는 명칭으로 불렀지만, 요즘 들어서는 대부분 셀주크 왕조나 셀주크 제국이라 부른다. 후대의 여러 방계 셀주크 국가들, 특히 룸 셀주크와 구분하기 위해 통일 제국 시기를 대셀주크(Great Seljuks)라고도 부른다.
아나톨리아 반도, 즉 현재의 튀르키예 지방에 튀르크인이 세력을 굳히기 시작한 것도 이 셀주크 제국 때의 일이었다.
역사가 알 아시르에 의하면 셀주크 베이의 부친 두카크는 튀르크계 오구즈 야브구국의 장군이었다고 한다. 일부 아랍 문헌들은 그가 셀주크 왕조가 이슬람화되는 과정에서의 최초의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하여튼 두카크 사후 그의 아들 셀주크가 등장하여 오구즈족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으나, 오우즈족의 야브구(왕)와 싸우고 나서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지금의 크즐오르다에 정착했다. 대충 이 시기는 960년대로 예측되며, 역사가들은 셀주크 가문이 이때 즈음해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이즈음 트란스옥시아나는 사만 왕조와 카라한 왕조가 지역의 패권을 두고 서로 힘 겨루기를 하는 상황이었고, 본래의 고향에서는 오구조 동포들이 킵차크(쿠만)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셀주크인들은 이렇듯 강대한 세력들 사이에서 실익을 추구하여 지지 세력을 자주 갈아탔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만 왕조의 편을 들어 카라한 왕조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몰아내고, 그 보답으로 사만 왕조로부터 그 땅에 정착할 권리를 보장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셀주크는 일족이 이곳에 정착하는 도중에 본래의 정착지인 크즐오르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셀주크가 죽은 뒤에 그 세력은 중앙아시아적인 관습에 따라 그의 아들들에게 각각 분할되었다. 이 아들들의 이름이 미카일, 이스라일, 무사, 유누스인데, 참고로 말하자면 이 이름들은 《성경》에 나오는 미카엘, 이스라엘, 모세, 요나에서 따온 이름들이었다.
어쨋든 이들 중에 역사에 이름을 진하게 남긴 것은 미카일과 이스라일이었다. 미카일의 아들이 투으룰 베이와 차그리 베이로, 훗날 대 셀주크라 불릴 셀주크 제국을 세웠다. 이스라일은 그 본인이 아르슬란 야브구(사자왕)라는 호칭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 후손들은 룸 술탄국이라 불리는 국가를 소아시아 반도에 건국했다.
셀주크의 아들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 가담해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을 간략히 적자면, 사만 왕조는 결국 카라한 왕조에 의해 호라산에서 쫓겨났다. 이때 사만 왕조는 가즈나 왕조을 호라산으로 불러들였고, 이후 호라산에는 가즈나 세력과 카라한 세력이 맞붙어 전쟁을 치렀다. 이 틈을 타 셀주크인들은 호라산에 침입하여, 승기를 잡고 있었던 가즈나 세력을 단다나칸 전투에서 무찌르고 그들을 가즈나로 밀어내 버렸다.
여기서 미카일의 아들인 투으룰은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고, 그 동생 차그리는 호라산을, 그 외 친척들도 각지에 았는 영지를 얻었다. 그들은 각각 완전히 독립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면서도 가문의 수장인 투으룰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금요 예배의 설교에서 자신들의 이름보다 투으룰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 이는 당시의 부와이 왕조나 후대의 몽골 제국과 유사한 가족 경영이었다.
이라크 정복
한편 이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투으룰은 아바스 칼리파 알 카임과 와지르(재상) 이븐 알 무슬리마의 초청으로 바그다드 진군을 결심했다. 1055년, 성지 순례를 행한 뒤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후제스탄을 거쳐 이라크에 진입한 투으룰은 돌연 북상하여 그해 12월 18일, (당시는 라마단이기도 했다.) 수니파 주민들의 환영과 함께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했다. 쉬아파 부와이 왕조의 장군 알 바사시리는 라흐바로 도주했고,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에게 복속했다.
파티마 왕조의 지원과 이라크의 베두인 족장 두바이스 및 일단의 튀르크 부대와 연대한 알 바사시리는 1057년 초엽 이라크로 진군하여, 신자르에서 쿠탈미쉬 휘하의 셀주크군을 격파한 뒤 모술에 입성했다. 다만 며칠 뒤 반격에 나선 투으룰은 그들을 격퇴하고 신자르를 초토화시켰다. 라흐바로 돌아온 알 바사시리는 1058년 초엽, 찬탈을 노리던 투으룰의 동생 이브라힘 이날과 동맹하여, 후자로부터 모술을 넘겨받았다.(다만 시타델은 넉 달 동안의 포위 끝에야 항복했다.) 다만 이번에도 투으룰은 누사이빈으로 향하며 모술을 되찾았고, 알 바사시리는 다마스쿠스까지 물러났다.
한편 이브라힘 이날은 이란 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투으룰은 이라크의 병력 대부분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 기회를 포착한 알 바사시리는 1058년 말엽 시리아 사막을 횡단하여, 빠르게 히트와 안바르를 점령한 뒤, 12월 27일 600명의 맘루크-튀르크 기병대와 함께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 다음 금요일인 1059년 1월 1일, 바그다드 서부에선 쉬아 아잔이 울려퍼졌다. 1주일 후인 1월 8일, 티그리스 강을 건넌 알 바사시리는 바그다드 동부 역시 장악했고, 대사원에선 쉬아파 파티마 칼리파의 이름으로 '쿠트바'가 진행되었다. 이후 시가전을 거쳐 1월 19일 하사니 궁전이 점령되었고, 칼리파 알 카임은 서쪽으로 150km 떨어진 하디싸에 연금되었다. 10일 후 이슬람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희생제)때, 알 바사시리는 파티마 왕조의 깃발을 휘날리며 대사원 밖에서 축하연을 열었고, 2월 16일에는 와지르 이븐 알 무슬리마를 조리돌림한 뒤 처형했다.
알 바사시리는 와시트와 바스라까지 점령하며 이라크 남부를 장악했다. 다만 그의 후제스탄 공격은 격퇴되었고, 그 총독인 하자라스프 이븐 반키르는 두바이스를 통해 연공 납부를 대가로 휴전을 청했으나 알 바사시리가 쿠트바와 화폐 주조에 있어 파티마 칼리파를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반발했다. 다만 7월에 이브라힘 이날을 격파한 투으룰이 후제스탄에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알 바사시리는 그와 휴전하고 와시트로 회군했다.(9월 12일) 한편 이란을 평정한 투으룰은 알 바사시리에게 아바스 칼리파 알 카임을 복귀시키고, 그의 이름으로 쿠트바와 화폐 주조를 진행한다면 바그다드의 지배권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동맹인 쿠라이쉬의 설득에도 알 바사시리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투으룰이 진군하자 1059년 12월 14일 바드다드를 버리고 도주했다. 이듬해 1월 4일, 알 카임은 바그다드로 돌아왔고, 이로써 파티마 왕조의 이라크 지배는 마흔 번의 금요 예배 이후 종식되었다.
쿠파로 향한 알 바사시리는 셀주크 기병대의 추격을 받자, 동맹인 두바이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근교 사키 알 푸라트에서 정면 대결에 나섰다가 패배하고 전사했다. (1060년 1월 15일) 먼저 그의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셀주크의 와지르 알 쿤두리의 수하가 낙마한 알 바사시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의 수급은 바그다드에 전시되었고, 이로써 다섯 해 동안의 혼란 끝에 셀주크 제국의 이라크 지배가 확립될 수 있었다.
전성기
제1대 술탄, 투으룰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의 아들인 쉴레이만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그의 형제인 알프 아르슬란(용감한 사자)과 아르슬란 야브구(이스라일)의 아들이었던 쿠탈므시는 이에 불복했다. 여기서 결국 알프 아르슬란이 협상에 의해 술탄직을 승계하게 되었고, 1064년에는 쿠탈므시를 격파했다. 이를 통해 알프 아르슬란은 삼촌인 투으룰을 뛰어넘는 권력을 얻게 되었다.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휘하의 튀르크멘 지도자들이 이란의 영지를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국, 특히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으로 침입하는 것을 장려했다. 그러는 한편, 그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전쟁을 개시했다. 이에 위협을 받은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디오예니스)는 군대를 이끌고 만지케르트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프 아르슬란은 군대를 물려 북쪽으로 향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은 궤멸당했고, 황제는 생포되었다. 알프 아르슬란은 포로가 된 황제와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 주었으나, 황제는 제국에서 되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후 알프 아르슬란은 트란스옥시아나의 말 안 듣는 카라한 왕조에 대한 원정을 나섰으나, 여기서 한 포로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생전에 재상 니잠 알 물크를 불러 후계자로 3대 술탄이 되는' 말리크 샤'를 지목하고 죽었다.
이렇게 알프 아르슬란이 허무하게 사망하자 그의 형제들이 앞다투어 반란을 일으켰다. 말리크 샤는 먼저 군대를 무른 뒤 이란으로 가서 그들을 토벌했다. 그리고 다시 트란스옥시아나로 돌아와 카라한 왕조의 지방 수령들을 연이어 제압했다. 그러면서 동생 투투쉬 1세를 시리아로, 또 다른 동생 무슬림을 이라크로 보내 지방의 튀르크멘 지도자들을 물리쳤다. 이즈음 말리크 샤에게 패배한 쿠탈미쉬의 아들 쉴레이만이 아나톨리아로 달아나 니케아에서 룸 술탄국을 세우고 말리크 샤와 적대했다.
그는 잇달아서 전쟁을 치르었는데, 이는 대부분 지방의 튀르크멘 영주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끝내 튀르크멘 지도자 대부분을 복속시켰고, 그 제국의 가장 큰 영토를 장악했다.
분열
12세기 셀주크 제국의 분열
3대 술탄 말리크샤의 치세는 셀주크 제국에 있어 황금기인 동시에, 몰락의 씨앗이 심어진 시기였다. 그의 치세 동안 칼리파였던 압바스 왕조와 셀주크 왕가의 사이가 멀어졌고, 치세 말에는 후계 문제로 튀르크인들과 페르시아 관료계의 사이가 멀어졌다. 이 절정은 1092년에 술탄이 칼리프를 폐위시킨 것이였다. 그리고 술탄과 그의 재상은 바그다드로 향했는데, 재상은 가는 도중에 암살당했고12, 그에 따르듯 말리크 샤 역시 죽었다13.
말리크 샤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들 중 성인은 없었다. 그의 장자인 베르키야루크는 겨우 12살이었다. 이때 그의 아내인 테르켄 하툰이 자신의 아들인 마흐무드 1세(당시 4살)를 4대 술탄으로 즉위시켰다. 페르시아 관료층은 이에 반발해 말리크 샤의 장자인 베르키야루크 술탄으로 선언했고, 말리크 샤의 형제인 투투시는 반란을 일으켰다.
격렬한 내전 끝에 베르키야루크은 5대 단독 술탄이 되었다(1097년). 하지만 그 권력이 완전하지는 않아서, 각지에 친척들이 지방 정권을 세우는 것을 용인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무함마드 타파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각지의 총독들이 호응했던 데다, 본래의 지지기반이던 관료계층도 그에게서 돌아섰다. 베르키야루크은 여기에 투쟁을 벌여 많은 성과를 보았으나, 결국 병마로 인해 무함마드와 제국을 나누기로 합의했다(1104년). 그는 이듬해에 결핵으로 인해 죽었고, 그의 술탄위는 아들인 6대 술탄, 말리크샤 2세에 넘어갔으나 곧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가 술탄위를 탈취했다.
부활?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는 우선 총독들을 전부 물갈이하고, 캅카스의 조지아를 토벌했다. 이후 시리아로 들어가 십자군을 응징하려 하였으나, 그 지방의 영주들의 불협조로 인해 도리어 패퇴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무함마드는 "내가 여길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고 다짐했고, 후손들까지 평생을 지켰다.
1117년에 그는 이란 각지에서 준동하는 하산 사바흐 무리를 소탕하였다. 1118년에 그는 병사하고, 8대 술탄위는 그의 아들 마흐무드 2세(당시 13살)에게 넘어갔으나, 그의 동생 아흐마드 산자르가 반란을 일으켜 9대 술탄위를 차지했다(1119년).
9대 술탄, 산자르는 "마지막 셀주크"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그 이름에 걸맞은 능력을 치세 내내 보여주었다. 우선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제국의 국경을 계속해서 침범하던 가즈니 왕조와 카라한 칸국을 제압하여 다시 복속시켰으며, 바그다드에서 슬슬 반기를 들려하는 칼리프들도 응징하였다. 또한 메르브를 수도로 삼아 문예와 학문을 다시 부흥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역사가들은 산자르가 그의 아버지의 제국을 복구했다고 믿었다.
몰락
산자르의 치세에 들어와 중국 화북(華北) 지방에서 등장한 새로운 패자 금나라에 의해 쫓겨났던 요나라 유민들이 이주 끝에 중앙아시아에 대규모로 눌러 앉았다. 그 이름은 카라 키타이(이란식 발음. 거란어로는 카라 키탄). 이들은 산자르의 하수인이자 조카였던 서카라한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 2세를 공격하여 그를 호라산으로 쫓아냈다. 이에 산자르는 서카라한 왕조와 연합해 군대를 이끌고 트란스옥시아나로 향했으나, 카트완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소식이 퍼지자 호라즘 총독(후일 호라즘 샤) 아트시즈가 반란을 일으켜 호라산을 약탈했다. 하지만 산자르가 돌아 온다는 소문을 듣고 냅다 도망쳤다. 이후 12년 동안 산자르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온 힘을 다했고, 대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1152년, 산자르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반발한 오구즈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별 것 아니라 평가한 산자르는 총독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술탄이 직접 나섰다. 모두가 산자르의 승리를 확신했고, 오구즈인들도 그랬다. 오우즈인들은 술탄에 사신을 보내 복종의 뜻을 표했지만, 조건이 마음에 안 든 산자르는 거절했다. 결국 두 군대는 격돌했다.
여기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산자르 휘하의 지휘관들이 그를 배신한 것이다. 버림받은 산자르는 오구즈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오우즈인들은 당황했지만, 곧 호라산에 쳐들어갔다. 그들은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땅을 유린했다. 산자르는 이 광경을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3년 뒤인 1156년, 산자르는 겨우 빠져나와 수도인 메르브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세력을 일으켜보려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 1157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제국과 함께. 야사에 따르면, 오우즈인들에 의해 유린 당한 메르브를 본 뒤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산자르 사후 셀주크 술탄이 통치하는 영토. 하마단 등 페르시아 서부 일대로 쪼그라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산자르가 죽은 뒤에도 이라크 지역과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셀주크 가에 의한 통치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허울 뿐인 지배자였고, 실제로는 아타베그들이 정치를 주도했다. 그들은 1194년에 결국 셀주크 지방 총독들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혼란기를 끝낸 것이 나중에 등장한 호라즘 왕조였다.
여담으로 먼나라 이웃나라, Why? 이슬람 편 같은 적지 않는 국내 학습만화에선 셀주크의 몰락이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깨졌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물론 룸 셀주크가 몽골의 별동대에게 개박살나고 이후 일 칸국의 속국이 되긴 했으나, 몽골이 서쪽으로 나아올 당시에 이미 셀주크는 내부 분열/십자군 전쟁의 여파/서요와의 전쟁에서 패배/지배하던 국가들의 독립(아바스 왕조, 아르메니아)으로 인해 이미 과거의 영광을 모두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왜 호라즘 왕조를 무시하고 셀주크가 몽골에게 무너졌다는 식의 서술을 하였는지 심히 의문이다.
군대
초기 셀주크 제국은 계획된 군사적 정복보다는 가족과 가축을 동반한 대규모 유목민 이주에 의존하였으며, 마찬가지로 그들은 소수의 전문적인 군대가 아니라 거의 모든 성인 남성들이 의무적으로 군인이 되는 형태였다.
셀주크 제국의 재상(비지르vizier)인 니잠 알 물크(Nizam al-Mulk)에 따르면 말릭 샤 1세(Malik-Shah I)의 통치 무렵 술탄은 투르크멘, 맘루크, 상비군, 보병, 술탄의 개인 경비대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렸다. 니잠 알 물크는 또한 말릭 샤 1세의 병력을 4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이를 7만 명으로 줄이는 비용 절감 계획(Taj al-Mulk가 시행)에 종종 반대했다.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제국이 투르크멘 부족에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셀주크 국가가 수립된 후 투르크멘인들은 계속해서 아나톨리아에서 셀주크 확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말릭 샤 1세의 통치 뒤로는 국가의 Jibali 지역, 특히 Rayy, Hamadhan 및 Hulwan의 전통적인 축에서 투르크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투르크멘인들은 관리하기가 어려웠고 규율 없는 약탈에 취약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가축을 목초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셀주크 제국을 구성하는 많은 지역은 생태학적으로 유목민 군대를 지원하기에 부적합했다. 투르크멘인의 한계는 아랍 학자인 Sibt ibn al-Jawzi에 의해 잘 설명되어 있다.
"술탄 투그릴 1세(Tughril I)은 병사들에게 자신을 준비하고 파견하여 그들의 천막, 어린이, 가족을 이라크로 데려오고 그와 함께 시리아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이 땅은 황폐하고 먹을 것도 없고 자금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말을 타고 무한정 머무를 수 없다. 우리 가족과 말과 짐승이 왔지만 우리가 도태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우리 가족을 방문해야 하므로 그들에게 돌아가 우리에게 할당 된 장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다.'라고 말했다."
투르크멘인들의 귀환 주장으로 인해 장기간의 원정은 중단되어야 했고, 투르크멘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정복 일정을 잡아야 했다. 투르크멘인들의 단기적 필요로 인해 장기 군사 계획은 달성할 수 없었다.
유목민 투르크멘 군대의 대안은 유목민 출신 노예들로 구성된 전문 군대인 맘루크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투르크계이며 종종 유목민 출신이지만, 더 이상 유목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초지에 대해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이전에 맘루크는 후기 아바스 왕조, 사만 왕조 및 가즈니 왕조의 군대를 구성했다. 사실, 가즈니 왕조는 그 자체로 맘루크의 기원이었다.
맘루크 모집 과정은 이슬람 역사의 다른 시기부터 잘 알려져 있지만 셀주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맘루크의 주요 출처는 아마도 대초원으로의 진출이었을 것이다. 습격에 대한 대안은 상인과 무하마드 1세 타파르(Muhammad I Tapar) 사이의 노예 분쟁에서 알 수 있듯이 노예 무역상과 다양한 상인에게서 구입하는 것이었다.
셀주크 술탄
1대 술탄: 토그릴 베그(투그룰 베이) (1038년 - 1063년)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 (1063년 - 1072년)
3대 술탄: 말리크샤 1세 (1072년 - 1092년)
4대 술탄: 마흐무드 1세 (1092년 - 1094년)
5대 술탄: 바르키야루크 (1094년 - 1105년): 제1차 십자군 원정
6대 술탄: 말리크샤 2세 (1105년)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 (1105년 - 1118년)
8대 술탄: 마흐무드 2세 (1118년)
9대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 (1119년 - 1157년)
10. 방계 왕조와 계승 국가들
방계 왕조
하마단 셀주크
케르만 셀주크
시리아 셀주크
룸 술탄국
계승 국가
살구르 아타베그 정권
일데니즈 아타베그 정권
보리 아타베그 정권
장기 왕조
아르투크 왕조
우카일 왕조
호라즘 왕조
오스만 제국
카라만 왕조를 비롯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투르크계 공국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