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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백일규 선생

Jobs9 2020. 9. 22.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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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백일규(1880년 3월 11일~1962년 5월 31일)선생을 2010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12월 한달 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에는 선생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입단증서 등 관련자료 16점이 전시된다.

선생은 1880년 3월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부친 백린(白麟)과 모친 송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스무 살 때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동학접주로도 활동했다. 평안도와 함경도 등 각지를 여행하던 선생은 미주이민을 결심하고 1905년 6월 진남포를 출발해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에와 사탕수수 농장으로 배치된 선생은 고된 노동 중에서도 한인친목단체인 ‘에와친목회’에 가입해 윤병구, 강영소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방책을 논의했다.

1년여 동안 하와이에 머물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선생은 문양목의 후원으로 대동보국회 중앙회장 겸 ‘대동공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ㆍ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선생은 ‘7인전권위원회’를 구성해 두 의사의 재판을 후원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의거의 정당성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1908년 가을 네브라스카주로 이주해 2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해 1912년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했다. 이 기간 동안 박용만이 설립한 사관양성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의 간부로 활동하며 장기적인 독립투쟁을 위한 군인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1913년 7월에 신한민보사 주필로 활동하다 1915년 1월 주필직을 사임한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의 명문대학인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동시에 흥사단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중앙총회 대의원, 버클리 한인학생양성소 설립위원을 역임하는 등 미주 한인사회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다.

미주 한인사회는 3ㆍ1운동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위해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 도산 안창호를 대신해 하와이와 멕시코 지역의 독립운동 사령탑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919년 3월부터는 ‘신한민보’에 ‘한국경제사’를 연재했는데, 이는 국내외 최초의 한국경제사 연구이자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한 연구였다.

선생은 1926년 이후 1933년까지 8년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과 신한민보사 사장 겸 주필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참여해 조선의용대의 재정지원을 위해 앞장섰다. 이후 기관지 ‘독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항일언론 활동과 한인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로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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