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헨리 소로
David Henry Thoreau
1817년 7월 12일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사망
1862년 5월 6일 (향년 44세)
미국
미국 출신의 철학자, 시인, 수필가. 랠프 월도 에머슨과 함께 초월주의와 생태주의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훗날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법정 스님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미국-멕시코 전쟁에 반대해 인두세 납부를 하지 않았다가 감옥에 투옥된 적이 있다. 월든호에 머물며 글을 썼다.
저서(책)
소로는 생전에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의 일주일>과 <월든>이 바로 그것이다. 사후에 <메인 숲>, <케이프코드>, <캐나다의 양키>가 출판되었다.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의 일주일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 (1849)
<월든 Walden; or, Life in the Woods> (1854)
<메인 숲 The Maine Woods> (1864)
<케이프코드 Cape Cod> (1865)
<캐나다의 양키 A Yankee in Canada> (1866)
에세이
이 밖에도 많은 에세이가 있다. 소로는 생전에 수많은 단편 에세이를 저술해서 잡지와 신문에 기고했다.
<걸어서 와추셋산까지 A Walk to Wachusett> (1842)
<매사추세츠의 자연사 Natural History of Massachusetts> (1842)
<겨울 산책 A Winter Walk> (1843)
<시민 불복종 Civil Disobedience> (1849)
<매사추세츠의 노예제도 Slavery in Massachusetts> (1854)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A Plea for Captain John Brown> (1859)
<숲속 나무들의 이어짐 The Succession of Forest Trees> (1860)
<걷기 Walking> (1862)
<가을의 빛깔들 Autumnal Tints> (1862)
<야생 사과 Wild Apples> (1862)
<원칙 없는 삶 Life Without Principle> (1863)
시
대부분은 1840~1844년 초월주의 잡지 《다이얼》에 실린 시이다.
기도 Prayer
달 The Moon
연기 Smoke
양심 Conscience
에올리안 하프로부터의 소문 Rumors from an Aeolian Harp
아래로 닻을 내린 구름 Low-Anchored Cloud
그런 순수한 증오를 계속해서 지탱하라 Let such pure hate still underprop
내면의 아침 The Inward Morning
여름비 The Summer Rain
그런 게 인생 Sic Vita
내 인생은 시였다 My Life Has Been the Poem
우정 Friendship
나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다 I Knew a Man by Sight
세상 위의 비문 Epitaph on the World
정말로 정말로 말할 수 없다 Indeed, Indeed, I Cannot Tell
추수의 손이 지난 들판에서 On Fields O'er Which the Reaper's Hand has Passed
어떤 땅에게 기도하라 Pray to What Earth
아래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그들 They Who Prepare my Evening Meal Below
나에게 철도란 무엇인가? What's the Railroad to Me?
이 힘든 삶의 순환 속에서 Within the Circuit of This Plodding Life
영감 Inspiration
서신 및 일기
에머슨 - 소로 편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일기 (1906)
생태주의
자연과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당시 산업혁명 직후 아메리카 드림등 노동과 성공에만 관심을 쏟던 세태와 달리 직접 숲에서 집을 만들고 혼자서 자립해서 살았다. 사실 이건 초월주의 사상적 동지이자 동갑인 윌리엄 엘러리 채닝 2세의 조언을 따른 것인데, 채닝 2세는 소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직접 숲에서 집을 만들고 혼자서 자립하는 것"을 조언한 인물이다. 소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채닝 2세는 소로에게 "이 땅에서 내가 한때 '브리어스'라고 불렀던 이 들판 외에는 너를 위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차라리 그 위로 나가서 오두막을 짓고, 거기서 네 자신을 산 채로 집어삼키는 거대한 과정을 시작해. 그 외에는 다른 대안도, 다른 희망도 보이지 않아."라고 말했다. 이후 소로는 채닝의 조언에 따라 숲의 집에 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초월주의를 따르는 사상적 동지들 외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았지만, 20세기 후반에 와서 계속된 노동과 반복을 비판한 <월든>이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실천적 초월주의자인 소로는 미국적 삶의 주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실험적 삶을 산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대 생활양식의 비판 근거를 미국적 이념에서 찾았기에 그는 미국적 특성이 강한 작가라고도 여겨진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사로잡힌 근대적인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비판한 그는 내면의 풍요로움, 검소한 삶, 자급자족의 삶을 강조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중시하고 전쟁과 노예제도를 비롯한 물질문명과 인간의 이기와 탐욕을 싫어하고 반대하며 옳지 못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선 불법적일지라도 간접, 소극적으로라도 반대, 저항하고 맞설 것을 주장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장한 생태주의자였다.
그렇긴 한데, 1844년 4월 30일 경 피시 차우더 수프를 만들던 중 콩코드의 숲 330 에이커(약 1.3km²)나 되는 면적을 태워먹은 적이 있다. 이렇게 한동안 우즈 버너(Woods Burner), 즉 숲을 태워먹은 자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이때의 일과 관련된 우즈 버너라는 책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소로의 자연 속 거주지는 그의 후견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사유지였다. 소로는 에머슨의 호의로 임대료를 내지 않고 해당 부지를 무료로 이용한 것이다. 에머슨은 미국 내 이름난 강연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사교계의 스타였고,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 덕분에 처음부터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이후 재산이 줄어들자 그는 각종 강연회를 통해 거액의 재산을 다시 회복하기도 한다.
그가 소로에게 특혜를 준 것은 문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 때문이었다. 에머슨은 본인, 마거릿 풀러, 소로 등과 함께 초월주의 동호회(Transcendental Club)을 만들어, 동양적이고 이상적인 문학 작품을 다수 발간한 바 있다(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에머슨은 소로에게도 자연인용 부지를 빌려주고 그에게 문학적 기대를 품은 것이다. 이후 에머슨과 소로는 관계가 틀어지고 (소로는 후견인인 에머슨에 대해 악담을 한 바 있다) 소로는 점점 기인처럼 변해갔으며, 소로 역시도 생전에는 문학적 명성을 얻지 못하였다. 소로가 겨울철 나무의 나이테 개수를 세던 중 폐렴에 걸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둘은 극적으로 화해한다. 다시 말해, 소로의 자연 친화적인 삶조차도 에머슨이 재력과 사유지로 그를 지원해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1845년 월든 호수에 가기 직전까지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님 집에서 보냈다고 한다).
실제 소로는 오랜 기간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최소한의 생활비만으로 살아가야 했기에, 단독이었다면 월든에서의 자급자족이 어려웠을 것이다. 시민 불복종과 관련해서도, 인두세를 미납해 투옥된 소로는 이모가 미납된 세액을 대납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소로가 당시 인정받지 못한 이유 중에는 이런 점도 한 몫 했다. 물론 그의 기본적인 사상 - 즉 세속적 성공에 매몰되는 삶을 경고한 점은 높이 살만 하다.
명언
새로운 옷을 요구하는 산업을 조심해라. (I say, beware of all enterprises that require new clothes.)
잔물결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으리. (He who hears the rippling of rivers in these degenerate days will not utterly despair.)
이 시대의 문제점은, 목적의 개선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수단의 개선만 끊임없이 이루어 진다는데 있다.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낸 도구의 도구가 되었다.
사랑에 의한 상처는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치유된다.
...사회적 지위나 성별에 관계없이 인생이란 용기를 보여주어야 하는 전쟁터이다. 비애는 겁쟁이의 몫일 뿐이다. 인생은 병상에서 죽든 들판의 텐트 속에서 죽든 하등 차이가 없는 공정한 경기이다. 그 둘 사이에 차별을 두려는 어리석은 행위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절망하는 것은 비겁하고 패배적인 행위다. 인간은 실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서 태어난다.
- 1853년 3월 21일, 소로의 일기
찰스 다윈과 동시대 인물이다. 찰스 다윈의 1839년 책 <비글호 항해기>를 다 읽었으며, 소로의 일기 1851년 7월 23일에서 "...다윈 같은 이들은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과학자들의 비결일까요?"라고 말했다. 이후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 1년 후인 1860년 신년맞이 저녁 파티에서 <종의 기원>에 대해 노예제 폐지론자 Franklin Sanborn, 아동복지 개혁가 Charles Loring Brace, 그리고 초월주의자 Bronson Alcott 등과 대화하다가 알게 되었고, 흥미를 느껴서 지역 도서관에 가서 <종의 기원> 책 사본을 구했다 한다. <종의 기원>을 다 읽은 후 소로는 자신의 사상인 초월주의를 토대로 해서 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는데, 다음과 같다.
“Though I do not believe that a plant will spring up where no seed has been, I have great faith in a seed... There is a wondrousness in a natural world that is blindly self-directing, driven by struggle and contingency, authored by itself."
"저는 씨가 없던 곳에 싹이 날 줄은 믿지 않지만 씨에 대해서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자기 주도적이고, 투쟁과 우연에 의해 주도되고, 저절로 저작되는 자연 세계에는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은 후 소로의 결론
랠프 월도 에머슨의 제자였으며, 루이자 메이 올컷의 스승이기도 하다. 초월주의의 가르침은 에머슨에서 시작된 이후, 소로로 이어지며, 이후 올컷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