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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원성왕계 왕위 계승전 촉발, 지방호족 성장 촉진

Jobs9 2021. 12. 1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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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헌덕왕 14년(822)]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고 하였다. 무진(武珍)⋅완산(完山)⋅청주(菁州)⋅사벌(沙伐)의 네 주 도독과 국원경(國原京)⋅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과 여러 군현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몸을 빠져 나와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주(漢山州)⋅우두주(牛頭州)⋅삽량주(歃良州)와 패강진(浿江鎭)⋅북원경(北原京) 등은 헌창의 반역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에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왕경(王京)으로 도망해 와 그 일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級飡)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太守)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 마침내 장수 여덟 명을 뽑아 왕도(王都)를 여덟 방면에서 지키게 한 다음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迊湌) 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 제륭(悌凌) 등이 그 뒤를 따랐으며, 이찬(伊飡)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 그리고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이 3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角干)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花郎)이 각기 종군할 것을 청하여 명기는 낭도(郎徒)의 무리와 함께 황산(黃山)으로 나아가고,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 

이에 헌창이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적병을 만나 이를 공격해 이겼고, 위공과 제륭은 장웅의 군사와 합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쳐서 이기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균정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군과 싸워 이를 멸하였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熊津)에 이르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여러 군사가 성을 에워싸고 열흘 동안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화(禍)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이 머리를 베어 몸과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종족(宗族)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무리를 무릇 239명이나 죽였으며, 그 백성을 풀어 주었다. 그런 다음 싸움의 공을 논하여 벼슬과 상을 차등 있게 주었는데, 아찬 녹진(祿眞)에게는 대아찬의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적군에 가까이 있었으나 반란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7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4년 춘3월

德王十四年]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䢖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牛頭⋅歃良⋅浿江⋅北原等, 先知憲昌逆謀, 舉兵自守.

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湌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 告之. 王即授崔雄位級湌, 速含郡太守, 令忠位級湌. 遂差貟將八人, 守王都八方, 然後出師. 一吉湌張雄先發, 迊湌衛恭⋅波珍湌悌凌繼之, 伊湌均貞⋅迊湌雄元⋅大阿湌祐徴等掌三軍徂征. 角干忠恭⋅迊湌允膺守蚊火關門. 明基⋅安樂二郞各請從軍. 明基與徒衆赴黄山, 安樂赴施彌知鎮.

於是憲昌遣其將, 據要路以待.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衛恭⋅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 滅之.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憲昌僅以身免, 入城固守. 諸軍圍攻浹旬, 城將䧟, 憲昌知不免, 自死, 從者斷首與身各藏.

及城䧟得其身於古塚, 誅之, 戮宗族黨與凢二百三十九人, 縦其民. 後論㓛爵賞有差, 阿湌禄眞授位大阿湌, 辭不受. 以歃良州屈自郡近賊不汙於亂, 復七年.

『三國史記』卷10, 「新羅本紀」10 憲德王 14年 春3

해설 :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신라는 계속적인 기근과 초적(草賊)의 등장 등으로 말미암아 민심이 매우 흉흉한 상태였다. 김헌창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가 내세운 대외적인 명분은 37년 전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원성왕이 즉위한 것은 위법이었다는 것이었다. 즉, 원성왕 즉위의 비합법성을 내세워 당시의 원성왕계 신라 왕실을 부정하고, 과거 김주원을 지지했던 귀족 세력의 힘을 모으고자 하였다. 그 결과 김헌창의 난은 전국을 휩쓰는 일대의 내란으로 전개되었다. 

김헌창은 신라 조정에 대항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면서 반란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3년 뒤인 825년(헌덕왕 17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 ?~825)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되면서, 두 차례에 걸친 김헌창 부자의 반란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두 차례에 걸친 김헌창 부자의 반란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커서, 이 반란은 이후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 계승전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지방에서 호족 세력의 성장을 촉진하는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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