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금요일 어식, 청어
성경에는 유독 물고기가 많이 등장한다.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대표적이다. 이와 유사한 기적은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15장에서도 소개되는데 떡 7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Ravenna)의 6세기경 그려진 최후의 만찬 모자이크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식탁 중심에 새겨져 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자들 앞에서 육신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보이고 먹은 음식 또한 생선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육식에 반해 물고기는 기독교의 중요 식문화로 자리 잡아 빈번히 언급됐다.
그렇다면 어째서 물고기가 기독교 식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일까. 두 가지의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적 관습에 따라 ‘육류’가 탐욕을 자극하는 ‘뜨거운 고기’로 규정되면서 엄격히 금기시 한 데에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행해졌던 사순절은 기독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 40일 동안은 예수의 고난을 함께한다는 의미로 저녁 식사를 제외하고 단식을 해야 했다.
이러한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탐욕을 상징하는 ‘뜨거운 피’를 육식은 자연스레 터부시 됐고 심지어는 육식을 엄격히 금지했던 금요일에 육식을 행할 경우 처형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물고기는 육류와 달리 차가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금지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식문화는 종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시대적·환경적 요인 또한 중요했다. 육류 소비는 제한적이었고 곡류와 과일은 사시사철 구하기 쉬운 식재료가 아니었다. 물론 여건에 따라 농작물을 키우기 힘든 환경도 있었다. 이에 반해 어류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손쉬운 편해 속했다. 그중에서도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물고기는 다름 아닌 대구와 청어였다. 대구와 청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지의 식탁 위에 올랐다.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염장법과 같은 저장 방식이 발달하기도 했고 워낙 대량 포획이 가능한 어종이었던 터라 주식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했다. 특히 대구의 경우 질병과 추위에 강한 다산성 어종인데다 버릴 부위가 없을 정도로 이용 가치가 뛰어난 점도 한몫했다.
기독교 금요일 어식, 청어, 네덜란드의 부흥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37만 명의 유대인 중 많은 사람이 종교의 자유가 있고, 영국에서 추방당한 동족들이 사는 플랑드르 지방으로 몰려들었다. 지금의 벨기에 북부 지역이다. 유대인들은 부르게 항구에 정착해 보석 장사와 무역을 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무렵 불운이 닥쳤다. 강의 수로가 침전물로 막히면서 부르게는 항구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유대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앤트워프 항구로 옮겨 짧은 시간 내에 다시 부흥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용병들의 반란으로 1576년 6000명의 시민이 살해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로써 그들은 플랑드르 시대를 마감하고 척박한 네덜란드 저지대의 환경에 맞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유대인들은 호수와 바다를 메우는 간척 사업을 하는 한편 암스테르담을 무역항으로 개발했다.
유대인, 막강한 한자동맹 물리치고 상권 장악
네덜란드 저지대는 바다보다 4m 이상 낮은 소금기가 많은 늪지로 농사짓기 어려워 먹을 것이 귀했다. 오죽하면 함께 모여 식사를 해도 자신의 먹을거리를 스스로 책임지는 ‘더치 페이(Dutch pay)’가 발달했겠는가. 그 무렵 네덜란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청어 잡이에 나섰다. 네덜란드 인구 100만 명 중 30만 명이나 청어 잡이에 종사했던 걸 보면, 청어는 그야말로 네덜란드 전 국민의 밥줄이었다. 그들은 청어를 소금에 절여 절임 청어를 만들어 팔았다. 절임 청어를 만드는 데 소금은 너무나 중요했다. 당시 소금은 북부 독일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암염을 공급받았다.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란 중세 독일 북부와 발트해 연안 도시들에서 결성된 상업동맹이다.
이런 환경에서 유대인들은 절임 청어에 쓰이는 소금에 주목했다. 그들은 암염 대신 자기들이 살았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값싸고 질 좋은 천일염을 수입하여 독일산 암염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유대인과의 소금 유통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의 주도권은 여기서 끝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이로써 유대인은 소금의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 체제를 이루어 소금 상권을 장악한 뒤 자연스레 절임 청어 산업도 주도했다. 그들은 청어를 처리하는 데도 ‘분업과 표준화’를 도입해 숙련공은 1시간에 2000마리의 청어 내장을 발라낼 수 있었다. 절임 청어 생산량은 획기적으로 늘었고, 유대인 상인들은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유대인들은 1년 이상 보관이 가능한 절임 청어를 해군과 상선들에 정기 공급하는 한편 전 유럽에 판매했다.
운송비 경쟁력으로 세계 해운업계 평정
청어 잡이와 포경 산업이 호황을 누리다 보니 고기잡이배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는 자연스레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져 네덜란드 선박 수는 2000척이 넘었다. 대부분이 70~100톤의 청어 잡이 어선이었고 일부가 대형 상선과 포경선이었다. 조선업이 발전하다 보니 고기잡이 배뿐 아니라 화물선 제작 능력이 좋아졌다. 16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선박은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 빨리 달릴 수 있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기초로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 무렵 발트해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통행세 부과 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당시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하여 대부분 배는 양옆으로 많은 대포를 장착하고 다녔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굵은 목재를 써서 갑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예 대포를 없애거나 최소한의 대포만 설치하여 무장을 최소화했다. 대신 가벼운 나무로 화물 칸을 배불뚝이로 만들고 갑판은 좁게 만들어, 제작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은 양옆은 통통하고 둥글지만, 갑판은 매우 좁았다. 대포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가벼워 해적선으로부터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그 무렵 화물선 제작에 유대인의 지혜가 더해졌다. 2~3개의 대형 마스트에 큰 돛들을 달았다. 마스트 높이는 당시 선박 중 가장 높았는데 이는 빠른 속도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이나 풍속이 바뀌면 재빨리 돛들의 방향과 높낮이를 조절해 줄 선원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돛대에 최초로 ‘복합 도르래’를 설치하여 선원 수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영국의 동급 선박 승선 인원이 30명이라면, 유대인들이 만든 배는 10명으로 운항할 수 있었다.
이 배를 ‘플류트(Fluyt)선’이라 불렀다. 갑판이 좁고 긴 대신 선창이 넓어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배불뚝이 저중심 설계라 출발과 정지가 쉽고 폭풍우 같은 악천후에도 잘 견뎠다. 선박 건조비도 싸게 먹혔다. 표준화로 건조 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라 발트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플류트선은 2번 왕복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화물 운송비를 경쟁국 대비 3분의 1까지 낮추어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후반에 이미 북방 무역의 70%를 장악했다. 어선 2000척 이외의 상선 숫자도 나머지 전 유럽의 상선 수보다도 많은 1800척이나 되었다.
자본주의 싹이 피어나다
그 무렵 네덜란드 선주들은 동양을 향한 원양 항해에 나섰다. 이런 회사들이 몇 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이 문제였다. 스페인, 영국 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의회가 나서서 하나의 회사로 합병을 유도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당시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각자의 투자로 충당했다. 약 645만 길더, 곧 금 64톤이 모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이렇게 주식회사라는 형태를 통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일컫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 뒤 해운업의 발전은 네덜란드를 물류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물류산업 발달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를 중계무역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 무역업의 발전은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과 보험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싹들이 네덜란드에서 피어났다.
그 무렵 네덜란드가 세계 물류의 중심이자 중계무역 기지이다 보니 유통되는 화폐의 종류만 수백 가지가 넘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태어난 게 화폐 통일을 목적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중앙은행 모태 격인 암스테르담은행이었다. 1609년 상인들이 만든 민간은행이었지만 시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고, 600길더 이상의 거래는 금화나 은화가 아닌 길더화 은행권을 사용하도록 의무화하여 화폐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증권거래소’가 1611년 세워졌다.
이렇게 자본주의 씨앗인 ‘주식회사, 중앙은행의 모태, 증권거래소’가 차례로 네덜란드에서 탄생했다. 이후 암스테르담은행은 유동성이 풍부해지자 신용 대출을 선보이고, 2~3%대 저금리 대출을 시행해 해외 투자가 싹틀 환경을 구축했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는 해외 투자를 주도해 세계 무역 네트워크를 완성하고 자본주의 중심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1776년에 펴낸 ‘국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는 영토도 작고 인구도 적지만 영국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다. 네덜란드 정부는 연 2%에 돈을 빌릴 수 있다. 신용 좋은 민간인도 3%면 차입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청어가 조선업과 해운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중상주의를 활짝 꽃피워 자본주의의 씨앗들을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