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회의주의(科學的懷疑主義, scientific skepticism)는 실증적 연구와 재현성을 바탕으로 증거가 불충분한 주장의 진실성에 대해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 혹은 반증하려는 과학적 태도를 말한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실재에 대한 경험적 조사가 진리를 이끌어낸다고 보며, 과학적 방법은 이러한 목적에 가장 알맞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실증 가능성과 반증 가능성에 기반하여 주장을 평가하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일회적인 증거에 의한 주장을 수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회의주의자들은 종종 미심쩍거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학에 모순된다고 간주되는 주장에 비판을 집중한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아 프리오리한 기반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주장이 자동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초자연적이거나 이례적인 현상은 비판적으로 실험되어야 하며, 비범한 주장은 그것이 정당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지기 전에 그 주장을 지지하는 비범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이론은 반증 가능성, 오컴의 면도날 등과 같은 많은 범주로 평가된다. 회의주의는 일반적으로 과학적 방법의 일부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실험의 결과는 독립적으로 되풀이 될 수 있다고 보일 때까지 인정되지 않는다.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등 회의주의 운동의 몇몇 주도자는 신무신론과 연관되어 있다. |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
빈센트 디시어Vincent Dethier는 멋진 소책자 《파리의 이모저모To Know a Fly》의 서문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과학자로 자라는지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개미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개미를 밟으면 비가 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리의 다리나 날개를 뜯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는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라면서 그런 행동을 그만두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 버릇을 못 고치는 아이들은 나쁜 길로 빠지거나 아니면 생물학자가 된다.”
아이들이 어떻게 회의주의자로 자라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어린 시절에 아이들은 지식광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하지만 회의적인 태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회의와 미혹의 차이를 배우지 못한다. 이를 깨닫는 아이들은 나쁜 길로 빠지거나 아니면 본격적인 회의주의자가 된다.
제임스 랜디James Randi도 그렇게 자란 회의주의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초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조사 위원회Committee for the Scientific Investigation of Claims of the Paranormal, CSICOP’의 창립자 및 회원들도 마찬가지다. 그 단체를 전신으로 하는 회의적 조사 위원회Committee for Skeptical Inquiry의 잡지 《스켑티컬 인콰이어러Skeptical Inquirer》는 본지와 그 밖의 유사 출판물들이 회의주의를 추구하면서 따라야 할 기준을 세워왔다. 여기서 회의주의skepticism란 무슨 뜻일까? 이 단어는 거기 실린 무거운 짐 때문에 다루기가 만만찮다. 이 단어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의미가 다르다. (우리는 본 잡지명과 단체명으로 수많은 이름을 고려해보았지만, 뜻을 명확히 하기만 하면 스켑틱skeptic이라는 단어가 가장 유용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합리적 회의주의 협회Institute for Rational Skepticism’도 고려해보았지만, 우리가 IRS(국세청)로 알려질까 봐 그것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 기관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이미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회의주의의 의미와 한계
회의주의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사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고의 회의주의 역사가 리처드 포프킨Richard Popkin은 “회의주의는 기원전 3세기 소크라테스의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라는 말에서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 플라톤 학당에서 정립되었다.” 고 말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회의주의를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나는 ‘회의주의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의주의자는 특정 신념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첫 번째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회의주의자’의 관용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회의주의자: 고대 그리스의 피론Pyrrho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참된 지식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 또는 어떤 명제든 그것의 참됨을 확신하기에 충분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태도는 무익하고 비생산적이라서 (자신의 존재마저 의심하며 헤매는 몇몇 궤변가를 제외하면) 아무도 이런 태도를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회의주의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회의주의자라는 단어에 대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나오는 두 번째 관용적 의미는 좀 더 생산적이다. “특정 연구 분야에서 지식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타당한지 의심하는 사람. 특정 문제나 진술에 관해 의심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
회의주의자와 회의주의라는 말의 역사는 흥미로우면서 대체로 재미도 있다. 예컨대 1672년에 출간된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7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여기서 그는 피론주의Pyrrhonisme 혹은 회의주의, 즉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취하는 입장을 검토한다.” 그렇게 비난하는 것도 틀리진 않다. 가장 열성적인 회의주의자들은 회의주의가 자신의 소중한 신념을 침해하지 않을 때까지만 회의주의를 즐긴다. 그것이 침해당할 경우, 그의 회의적인 태도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최근에 나는 회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한 신사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그는 우리 학회를 후원하고 싶어 하며, 무엇이든 의심하는 우리의 회의주의에 동의했다. 단, 건강을 회복시키고 병세를 완화하는 비타민의 효능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그는 내가 그 분야에 대해 회의적인 글이나 기사를 쓰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유인즉 그 분야는 이제 과학적으로 유효성이 입증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비타민 요법 쪽 일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하고 내가 묻자, “왜 아니겠어요!” 하고 그는 대답했다.
우리가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으로 의기양양할 때 다른 사람의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기는 쉽고 또 재미있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신념에 의문이 제기될 때 편견 없이 귀를 기울이려면 엄청난 인내력과 자아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순수한 회의주의에는 더 심각한 결점이 하나 있다. 극단적으로 갈 경우, 이 입장은 그 자체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이런 예문이 나와 있다. “모든 회의주의에는 긍정적인 태도가 깃들어 있다. 회의주의적 논변에 인류의 모든 지식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전적인 확신 같은 것 말이다.” 회의주의 그 자체는 지식을 긍정하고 있다. 따라서 회의주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면 회의주의 자체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에 회의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회의주의에도 회의적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마치 붕괴하는 아원자 입자처럼, 순수한 회의주의는 우리의 지적 안개상자의 관측 스크린 너머에서 저절로 허물어진다.
회의주의만으로는 진보를 가져올 수 없다. 불합리한 것을 거부하기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회의주의에는 합리적인 것, 즉 정말 진보를 가져오는 뭔가가 뒤따라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공산주의에 회의적이면서도 그 체제의 합리적 대안을 내놓지 않는 반공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뭔가에 반대하는 운동은 순수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런 운동은 성공할 가망이 전혀 없다. 우리는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싸워야지, 해악을 거부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칼 세이건Carl Sagan은 1987년 CSICOP 연례 회의에서 직업적인 회의주의자들에게 비슷한 충고를 했다. “여러분은 여러분만큼 사물을 명료하게 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모두 비웃는 사고 습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합리적 회의주의자
회의주의자들이 특정 신념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다는 두 번째 통념은 회의주의와 과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회의주의자와 과학자들이 꼭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은 아니다(그들도 사람인 만큼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어떤 신념에 마음을 열고 있었지만, 증거가 그 신념을 뒷받침하지 못했기에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우주에는 과학자들이 증거에 기반해 연구할 수 있는 적절한 수수께끼들이 이미 충분히 존재하므로, ‘보이지 않는’ 혹은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를 고찰하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것은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 회의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당신은 우주의 알려지지 않은 힘에 대해 그냥 마음을 닫고 있군요.”라고 말하면, 회의주의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우주의 알려진 힘을 이해하려고 여전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회의적이란 말을 ‘합리적’이라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유용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주 흔히 쓰이는 이 단어 역시 관용적 의미와 역사를 살펴보면 유익할 것이다. ‘합리적rational’이란 단어는 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다. “추리력을 갖춘, 이유?이성을 갖춘.” 6 그리고 ‘이유reason’는 이렇게 나와 있다. “어떤 행위를 옹호 또는 비판하거나 어떤 주장, 생각, 믿음을 입증 또는 반증하는 데 논거로 사용되는, 어떤 사실에 대한 진술.” 사전을 뒤져 단어의 난해한 관용적 의미와 역사를 끄집어내는 일이 다소 현학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단어의 원래 의미와 현재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유익하다. 그 둘은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으며, 또 저마다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대화하다 보면 서로 의미가 엇갈릴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의 회의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맹신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기 신념과 이념에 관한 한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또 한 가지 기억해둬야 할 것은 사전에 나온 설명이 정의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전에는 관용적 의미가 나온다. 청자가 화자를, 독자가 필자를 이해하려면, 주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정의해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회의주의자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두 번째 관용적 의미다. “특정 연구 분야에서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사람.” 그리고 ‘합리적’이란 이런 의미다. “어떤 행위를 옹호 또는 비판하거나, 어떤 주장?생각?믿음을 입증 또는 반증하는 데 논거로 사용된, 어떤 사실에 대한 진술.” 하지만 이런 의미에는 중요한 요소 한 가지, 즉 이성과 합리성의 목적이 빠져 있다. 사고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인과관계를 이해하고 우주, 세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합리성은 가장 믿을 만한 사고 수단이다. 따라서 합리적 회의주의자는 ‘특정 지식에 대한 주장을 입증 또는 반증하는 사실 진술을 인과관계의 이해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요구함으로써 그 주장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방법을 이용해야 할까? 회의적 방법만 취하면 소크라테스의 결론, 즉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답은 한 단어로는 과학, 두 단어로는 과학적 방법이다.
과학과 합리적 회의주의자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여기서 과학이라는 단어의 관용적 의미와 역사를 살펴보기엔 너무 오래 걸릴 것이다. 명확성을 위해, 이 글에서 나는 과학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쓸 것이다. 입증이나 반증에 모두 열려 있는 시험 가능한 지식 체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과거나 현재에 관찰되거나 추론된 현상을 기술하고 해석하고자 고안된 일련의 인지 행동 방법.
과학은 특정한 사고 및 행위 방식으로, 이는 직간접적으로 지각된(관찰하거나 추론한) 정보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다. 여기서 ‘과거나 현재’는 역사 과학과 실험 과학 둘 다를 가리킨다. 인지 방법으로는 직관, 추측, 발상, 가설, 이론, 패러다임 등이 있고, 행동 방법으로는 배경 조사, 자료 수집, 자료 정리, 동료와의 협력과 의사소통, 실험, 연구 결과 비교, 통계 분석, 논문 작성, 학술 발표, 출판 등이 있다. 과학적 방법에 대한 정의는 이보다 논란의 여지가 많아 종사자들 간에 합의를 볼 가능성이 더 적다. 사실 과학철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피터 메더워 경Sir Peter Medawar은 이 문제에 대한 더 예리하고 재미있는 의견 중 하나를 내놓았다.
“과학자에게 과학적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라. 그러면 그 사람은 아마 즉시 정색을 하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릴 것이다. 정색을 한 까닭은 어떤 의견이라도 밝혀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눈알을 굴리는 까닭은 밝힐 의견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숨길지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방법에 대한 문헌은 상당히 많이 있지만, 저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과학자들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무얼 하는 것과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합리적 회의주의자가 미심쩍은 주장에 적용하는 방법론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다음 네 단계 과정이 바로 ‘과학적 방법’이라 불릴 만한 가장 간단한 방식에 해당할 듯하다.
귀납: 현재의 데이터에서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어 가설을 만드는 일.
연역: 그 가설을 기초로 하여 특수한 예측을 이끌어 내는 일.
관찰: 자연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설들이 지시하는 관찰: 바에 따라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
검증: 더 많은 관찰을 토대로 초기 가설이 타당한지 예측을 시험하는 일.
물론 과학이 이 정도로 엄격하진 않다. 의식적으로 이 단계들을 하나하나 밟아가는 과학자는 없다. 과학은 ‘관찰하기, 결론 이끌어 내기, 예측하기, 추가적인 증거에 비추어 예측 확인하기’가 끊임없이 상호 작용을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과학철학자들이 말하는 ‘가설 연역적 방법’의 핵심에 해당한다. 가설 연역법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a-가설 제시하기, b-그 가설을 ‘초기 조건’에 대한 진술과 결합시키기, c-그 두 가지로부터 예측 도출하기, d?그 예측이 실제와 맞는지의 여부 확인하기.”
관찰은 가설 연역적 과정의 구체적인 살을 이루는 것으로, 예측의 타당성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자 역할을 한다. 아서 스탠리 에딩턴 경Sir Arthur Stanley Eddington은 이렇게 말했다. “과학적 결론의 진위를 판명하는 데 있어, 관찰은 대법원에 해당한다.” 과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반화를 할 수 있다.
가설: 일련의 관찰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시험 가능한 진술.
이론: 일련의 관찰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히 입증된 시험 가능한 이론:진술
사실: 잠정적 합의를 제안해도 합당할 만큼 입증된 자료나 결론.
이론은 ‘구성물construct’, 또는 ‘일련의 관찰 결과를 설명할 수 있지만 시험 불가능한 진술’과 반대될 것이다. 지구상의 생물을 관찰한 결과는 신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진화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진술은 구성물이고, 후자의 진술은 이론이다. 생물학자들은 대부분 진화를 사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목표는 객관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비주의를 지양하고자 한다.
객관성: 결론의 근거를 외적 검증에 두는 것.
신비주의: 결론의 근거를 외적 검증이 결여된 개인적 통찰에 두는 것.
개인적 통찰에서 출발해도 잘못될 것은 없다. 훌륭한 과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중요한 아이디어를 통찰과 직관 같은 정의하기 힘든 무언가의 도움으로 얻었다고 말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는 말라리아를 앓던 중에 자연선택이라는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다’고 했다. 티머시 페리스Timothy Ferris는 아인슈타인을 ‘위대한 직관적 과학 예술가’라고 불렀다. 하지만 통찰적, 직관적 아이디어는 외적 검증을 받기 전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리처드 하디슨Richard Hardison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비주의적 ‘진리’는 그 본성상 엄연히 개인적인 이치일 수밖에 없으며, 외적 검증이 전혀 불가능하다. 각각의 신비적 진리들은 저마다 동등한 진리주장을 가진다. 찻잎 점이든 점성술이든 불교든, 관련 증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각각은 동등하게 옳은 주장이거나 동등하게 그른 주장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 믿음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믿음의 정확성을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신비주의자는 역설적인 입장에 처해 있다. 그가 자기 의견을 뒷받침할 외적 근거를 찾고자 한다면 외적 논증에 의거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신비주의를 부정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에게는 외적 검증이 정의상 불가능하다.”
과학은 우리를 합리주의Rationalism로 인도한다. 합리주의는 논리와 증거를 기초로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어떻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까? 이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통해서 얻은 논리적인 결론이다.
1. 달에 드리워진 지구의 그림자가 둥글다.
2. 떠나가는 배에서 마지막으로 보이는 부분이 돛대다.
3. 지평선이 굽어 있다.
4. 우주에서 찍은 지구 사진.
과학은 또한 우리가 교조주의Dogmatism에 빠지지 않게 돕는다. 교조주의는 논리와 증거보다는 권위에 근거해서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교조주의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다음에 근거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
1.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2.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3.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4.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
교조적 결론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한다. 그 권위자들은 그런 결론을 어떻게 얻었는가? 과학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수단을 사용했는가?
회의주의와 경솔한 믿음 사이의 본질적 긴장
과학과 과학적 방법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오류 가능성에는 자기 교정이라는 과학의 최대 강점이 숨어 있다. 정직한 실수든 부정직한 실수든, 사기 행위를 알고 저지르든 모르고 저지르든 간에, 결국 그런 오류는 외적 검증에 의해 과학계에서 퇴출될 것이다. 저온 핵융합의 대실패는 과학계에서 신속하게 오류를 적발해낸 고전적인 사례다.
자기 교정이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에, 과학계에는 리처드 파인만이 말하는 “일종의 철저한 정직성, 즉 정직해지려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일컫는 과학적 사고 원칙”이 있다. 파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실험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실험에서 제대로 이루어진 듯 보이는 부분뿐 아니라 그 실험을 무효화시킬 만한 것들도 모두 보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원인들로도 당신의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도 보고해야 한다.”
그런 내재적 메커니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신중한 과학자와 합리적 회의주의자들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문제와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난제를 극복하고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데 기념비적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토머스 쿤Thomas Kuhn이 말하는 과학의 ‘본질적 긴장’, 즉 기존의 생각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태도와 새로운 생각을 기꺼이 탐구하고 수용하려는 태도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균형을 잘 유지한 과학자의 훌륭한 예다. 그런 미묘한 균형은 과학의 역사에서 패러다임 전환이란 개념 전체의 기반을 이룬다. 과학계에서 충분히 많은 사람(특히 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자진해 오래된 통설을 버리고 급진적(이었던) 새 이론을 지지할 때, 오로지 그럴 때에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과학의 변화에 대한 이러한 일반화에서는 보통 패러다임을 일종의 체계로 다루지만, 우리는 패러다임이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인식 틀임을 알아야 한다. 프랭크 설로웨이Frank Sulloway는 다윈이 과학의 역사에서 적정 균형점을 찾아낸 몇 안 되는 거인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 그의 세 가지 지적?성격적 특징을 든다. “첫째, 다윈은 타인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하긴 했지만, 기꺼이 권위에 도전하고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았다.” 둘째, “다윈은 또 학자로서는 특이하게도 부정적 증거를 대단히 중요시하며 거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예컨대 다윈은 ‘이론의 난점’에 대한 장을 《종의 기원》에 포함시켰는데, 그 결과 다윈의 반대자들은 다윈이 아직 직면하지 않았거나 다루지 않은 문제를 제기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셋째는 다윈이 “과학계의 공유 자원을 이용하고 다른 과학자들에게 자기 프로젝트에 공동 연구자로 참여해달라고 요청할 줄 알았다.”는 점이었다. 다윈이 쓴 편지는 현존하는 것만 해도 16,000통이 넘는데, 그런 편지에는 대개 과학적 문제에 대한 긴 논의와 일련의 질의응답이 들어 있다. 다윈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항상 배웠으며, 독창적인 학설을 세울 만큼 자신 있으면서도, 자신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겸손했다.
네 번째 자질로 언급할 만한 것은 다윈이 적당히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인데, 설로웨이에 따르면 그런 태도는 “자기 이론의 과대평가를 막는” 데 도움이 되는 “소중한 자질”이다. 다윈의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를 보면 이와 관련해 배울 점이 많다. 다윈은 “일부 영리한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는 재빠른 이해력이나 기지”가 자신에게 없다고 고백한다. 그런 부족한 점 때문에 그는 “비판에 서툴러서, 어떤 논문이나 책을 처음 읽어보면 보통 감탄하기만 하다가 한참 심사숙고한 후에야 약점을 알아차리게 된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다윈 비평가들은 다윈을 공격하기 위해 그런 구절들을 선별적으로 인용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가 지닌 이점을 보지 못했지만, 다윈은 이것이 나중에 후회될 만한 실수를 방지해주는 이점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배울 가치가 충분한 교훈을 담고 있다. 설로웨이가 보기에 다윈의 특별한 점은 자기 내면의 본질적 긴장을 해소하는 능력이었다. 설로웨이는 이렇게 말한다. “대개 과학 공동체에는 전통과 변화 사이의 본질적 긴장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선호하는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순적 특징들이 한 개인의 내면에서 그토록 성공적으로 결합되는 경우는 과학의 역사에서 비교적 드문 일이다.” 칼 세이건은 ‘회의주의의 짐The Burden of Skepticism’에 대한 CSICOP 강연에서 회의주의와 경솔한 믿음 간의 본질적 긴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상충하는 두 필수 요소 간의 정교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즉 우리가 얻은 모든 가설을 극히 회의적인 태도로 철저히 검토하는 동시에 새로운 아이디어에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회의적이기만 하다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새로운 것을 절대 배우지 못하겠죠. 당신은 난센스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확신하는 괴팍한 노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물론 당신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만약 당신이 잘 속는다고 할 만큼 개방적이며 회의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유용한 아이디어와 무용한 아이디어를 구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아이디어의 타당성이 동등하다면, 제가 보기에, 어떤 아이디어에도 타당성이 전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당신은 길을 잃게 됩니다.”
어쩌면 합리적 회의주의와 과학적 방법은 우리가 순수한 회의주의와 경솔한 믿음 사이의 위험한 해협을 항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의 도구
과학은 인류가 인과관계를 이해하려고 고안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방법은 우리가 자연세계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현상들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인간의 특성 가운데 정말 보편적이라고 여길 만한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류의 생존, 구체적으로는 개개인이 더 큰 행복을 달성하는 것이 거의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 목표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학, 합리성, 합리적 회의주의의 상호 관계를 살펴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의 생존과 개개인의 더 큰 행복이 과학적, 합리적, 회의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까지 말해도 될지 모른다.
인간은 인과관계를 인지하는 능력을 타고나는 듯하다. 갓 태어났을 때 우리는 문화적 경험이 전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알고 있다. 보는 법, 듣는 법, 음식을 소화하는 법, 시야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눈으로 좇는 법, 물체가 다가올 때 눈을 깜박이는 법, 선반같이 높은 곳에 놓였을 때 불안해하는 법, 유해 식품에 대한 미각 혐오를 키우는 법 등등. 또 우리는 포식자와 자연재해, 독성 물질 등 온갖 위험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조상들이 진화시킨 형질도 물려받았다.우리는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성공한 조상들의 후손이다.
우리 뇌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듯한 사건들을 종합하고 주의가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천연 기계 장치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원시 인류가 커다란 포유류 사체를 자르기 위해 돌을 깎고 갈고 다듬어 날카로운 도구로 만드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혹은 부싯돌을 치면 불을 지필 수 있는 불꽃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를 환경에 맞추기보다는 환경을 우리에 맞추게 했던 발명품들 ? 바퀴, 지렛대, 활과 화살, 쟁기 등 ? 로 시작된 인류 문명은 오랜 역사를 거쳐 현대 과학 기술 세계에 이르렀다. 이 선언문의 첫머리를 장식한 빈센트 디시어는 과학의 보상을 논하면서 돈, 안전, 명예 등의 뻔한 보상뿐 아니라 초월적 보상도 언급한다. “세계로 나아갈 권리, 인류의 한 사람이라는 소속감, 정치적인 장벽, 이념, 종교, 언어를 초월하는 느낌.”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뒤로 제치고 “더 고귀하고 미묘한” 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에 들어 있는 자연스러운 호기심이다.
“인간을 다른 모든 동물들(인간도 분명 동물이다)과 구별 짓는 특징 중 하나는 앎 그 자체에 대한 욕구다. 호기심이 강한 동물도 많이 있지만, 그 동물들의 호기심은 적응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앎의 욕구에 굶주려 있다. 그리고 앎의 능력을 부여받은 수많은 사람에게는 지식에 대한 의무가 있다. 제아무리 하찮다 해도, 진보와 안녕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해도, 모든 앎은 전체로서의 앎의 일부이다. 과학자는 바로 그런 세계에 참여한다. 파리를 아는 것은 웅대한 전체 지식의 일부를 공유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도전이자 즐거움이다.”
아이들은 본래 주위 환경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 꼬치꼬치 캐묻고 파고들길 좋아한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보면 사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세상이 왜 지금 이대로인지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바로 과학의 전부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나는 사로잡혔다. 어렸을 적에 굉장한 선물을 받아본 사람이 늘 그런 선물을 다시 기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언제나 그 놀라운 것을 찾고 있다. 언젠가는 그것을 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번 찾아내지는 못하겠지만, 가끔씩은 찾아낼 것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아이들이 가진 것 중에서, 세상을 탐험하고, 즐기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도구가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인 수준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죽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많든 적든 이성을 사용하고 생각을 한다. 이성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 합리적 회의주의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만족의 원인을 이해하므로 더 큰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에인 랜드Ayn Rand는 대표작 《아틀라스Atlas Shrugged》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지식을 얻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으며, 이성은 지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이다. …… 인간의 기본 생존 수단은 정신이다. 인간은 생명은 타고나지만, 생존은 타고나지 않는다. 육체는 타고나지만, 육체를 유지하는 법은 타고나지 않는다. 정신은 타고나지만, 정신의 내용은 타고나지 않는다. 살아남으려면 인간은 행동해야 하고, 행동하기에 앞서 자기 행동의 본질과 목적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음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음식을 얻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목적과 그 달성 수단에 대한 지식 없이는 도랑을 파지도 사이클로트론을 만들지도 못한다. 살아남으려면 인간은 생각해야 한다.”
300여 년 전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회의주의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지성사에서 가장 철저한 회의적 반성으로 꼽히는 일을 한 후, 자신이 이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진화는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인간은 규칙을 찾고 원인을 추론하며, 천성적으로 이 세계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찾도록 진화했다. 이런 일에서 가장 뛰어난 인간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겼다. 우리가 바로 그 자손들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말을 바꿔 표현하고자 한다.
“Sum Ergo Cogito.”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