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고려

고려 사회구조, 귀족사회, 문벌귀족, 권문세족

Jobs 9 2022. 5. 1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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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회구조

1. 고려 전기 사회 운영의 원리

   (1) 귀족사회의 확립 고려 초 평민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성과 본관을 갖는 새로운 친족공동체가 형성

        ① 양인 농민 : 공민권 행사

        ② 호적을 보완하여 신분 계층별 등록부를 따로 작성

            - 종실을 대상으로 한 종적

            - 군반씨족을 대상으로 한 군적

           - 수공업자를 대상으로 한 백공안독

           -  노비를 등록한 천적

   (2) 호부층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정치적으로 비호해줌

        농민에 대해서는 그들을 토지에 고착시킴으로써 유망을 막고 공민으로 확보하였다.

   (3) 본관제(사회 운영의 원리)

       ① 배경 

           -  고려 태조는 나말 여초의 사회변동 때, 지역사회에서 지배체제에 저항하고 자위조직을 운영하면서 상 ∙ 하의 세력관계가 형성되고, 골품제도를 청산하면서 신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신분제도를 확립하고 일정한 지역에 일정한 씨족을 정착시켜 효과적인 지방통치와 농민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필요에서  본관제도가 나오게 되었다.

       ② 성격

           - 사회 편제방식으로의 군현제 영역과 부곡제 영역의 계서제 지배로 국가적인 수취질서를 성립시키는 데 근본 목적이 있음

           - 고려 초기 성립할 당시에는 사회 편제방식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는데, 후대에는 성관의 기능만 남으면서 부계 성씨 혈연을 확인하고 문벌을 가리는 수단이 되었다.

       ③ 결과 

           - 오래 전부터 써오던 성씨가 있으면 이를 토성이라 하여 정식으로 인정해줌

           - 그들이 사는 고장을 본관으로 정함

           - 고려 초기에서 중기에 귀족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성이 보급되는 동시에 본관제도가 정착

           - 고려 전기 백성은 국가에 의해 공인되는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본관으로 설정된 지역 밖으로 이동하여 거주하지 못함 

 

2. 문벌귀족

   (1) 유형 

        - 지방호족, 개국공신, 신라의 6두품 , 향리

        - 공로, 과거를 통해 중앙 문신관료로 진출

        - 이후 문신끼리 상호 혼인을 통해 문벌귀족을 형성

  (2) 성격

       - 재추를 거의 독점

       - 대체로 3대에 걸쳐 5품 이상의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중앙집권체제 확립 이후로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의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부류들로서, 서로 비슷한 부류끼리 중첩적인 혼인을 맺고 그 지위를 계속 세습해 갔다.

       - 전통적인 권위에 비하여 실질적인 정치권력이 많은 것은 아님

   (3) 특징

       ① 관리로서의 진출이 사실상 보장

       ② 반개방적인 문벌귀족을 형성 

           - 문벌귀족은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적 전통을 지닌 향리집단에까지 지배세력에의 참여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층에까지 개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개방적 성격이다.

       ③ 완만한 변동 

           - 하위의 지배층에서도 소수나마 재추 등의 고관이 배출되었으며 극소수는 문벌층과 통혼하며 문벌층으로 상승해가는 경우도 있었다.

             문벌층에서도 소수의 성씨별 인물들의 상승과 몰락에 따라 새로운 성씨가 더 나타나기도 하고 기존의 성씨가 빠지기도 하는 변동이 완만하게 계속되었다.

           - 이는 능력과 실력을 위주로 하는 과거제가 중시되었으며 한림원이나 춘추관 등의 관직에는 과거출신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음직을 받은 자중에도 다시 과거를 보는 자가 있었다.

           - 중류층에서 귀족으로의 신분 상승 : 지방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신진관료가 됨으로써 어렵게 귀족의 대열에 들 수가 있었다.

           - 귀족에서 중류층으로 하강 : 중앙 귀족에서 낙향하여 향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④ 가문과 문벌을 중시하는 계급내혼

       - 폐쇄적이고, 상호 중첩된 혼인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최고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왕실과 혼인을 열망하였다.

       - 대대로 중앙 고관을 내던 문벌층은 왕실을 포함하여 하나의 계급내혼 단위를 이루어 하위계층과 혼인을 꺼렸다.

   ⑤ 중앙관직을 차지하는 귀족은 모두 개경에 거주하는 개경인이었다 

       -  과거나 이직을 통하여 양반이 된 향리들은 대체로 거주지를 개성 또는 근기지방으로 옮겼다.

       - 그러나 이들이 거주지를 중앙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항상 본관지를 밝히게 되어 있었다.

       - 신라의 귀족은 모두 왕경인이었기 때문에 본관지를 밝힐 필요가 없었지만, 고려의 양반은 출신지가 각각 다른 이성귀족들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원래 출신지를 본관이라 하여 자기들 가문을 다른 가문과 구별하였다. 그러므로 이 본관은 그들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⑥ 귀향죄는 하나의 형벌로 인식되었다

       -  양반들이 본관지로 쫓겨간다는 것은 정계에서 밀려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있어서 귀향은 하나의 형벌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귀족사회에서는 문벌을 중시하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었다.

 

문벌귀족과 권문세족 비교

구분 문벌귀족 권문세족
성립  폐쇄적 사회개혁으로
 ->보수화되면서 형성
100여 년 간의 무신정권과 원을 배경으로 편성된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으로 출신성분은 다양하고 현실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문벌귀족처럼 가문을 통한 족벌적인 세력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재능에 따라 출세하고, 국가로부터 특별한 특권을 부여받지 않은 점은 상대적 진보성을 지니고 있다.
출신  호족, 개국공신
 6두품, 향리
전기의 문신가문
무신정권기 무신가문, 능문능리의 신관인(사대부)
주로 원을 배경 : 몽고어 역인, 응방, 환관,
원공주 겁령구, 삼별초, 일본원정에 무공자,
원왕실과 혼인, 원으로부터 만호의 직책
관직진출  과거, 음서 음서, 과거
가문강화 상호 중첩된 혼인 종적인 가족관계, 횡적인 혼인관계
충선왕의 즉위교서 - 재상지종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
경제  과전, 공음전 산천 경계의 대농장이며 재경 부재지주로서
지방의 농장에 장사를 마련하였고,
장두를 파견하였다.
관리 - 가신, 노비
경작 - 전호, 노비
 --> 면세, 면역의 특권
권력행사 제도와 가문 자체의 권위 를 통해서 귀족적 특권을 누렸다 현실적인 관직인 도평의사사와 정방을 장악하여 정치권력을 행사하였다.

 

 

4. 권문세족

   (1) 권문세족의 의미 

         -  권문은 정치권력을 행사한 특정한 개인이나 가문을 지칭하였고, 세족은 특정 가계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계층으로 무신난 이후 변화된 정치 ∙ 사회적 여건아래서 성장하기 시작하여 14세기 초에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으로 정착하였다

         -  대외적으로는 친원적 색채를 유지하여 현실 추구의 입장을 취하였다.

         -  경제적으로는 사적인 대토지 소유자인 농장주였으며, 사상적인 면에서는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2) 구성 : 네 갈래로 구성

       ① 문신귀족 : 경원 이씨, 해주 최씨, 파평 윤씨, 정안 임씨, 철원 최씨

       ② 무인 : 우봉 최씨(최충헌), 언양 김씨(김취려)

       ③ 능문능리의 신관인 : 여흥(황려) 민씨(민영모), 황천 조씨(조영인, 조충)

       ④ 새로운 대원 관계의 전개 속에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가문

           -  역인 출신으로 입신한 평양 조씨(조인규), 대원관계와 관련하여 무공을 세워 큰 세력을 이룩한 안동 김씨(김방경)

   (3) 특징

        -  문학적 도는 유학적 소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한 까닭에 자기네의 지위를 이어 나가기 위한 입사 방법으로 과거보다는 음서제를 많이 이용하면서 과거(비록 권력과 부정이 많았지만)에도 적극 적응하여 자손들이 계속하여 고위직에 오름으로써 가문의 위세를 더해 갔다.

        -  뿐만 아니라 왕실 내지는 자기들 상호간에 중첩되는 혼인을 맺어 혈연의 범위를 한정시켜 가면서 가문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던 이들은 본질적으로 귀족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 왕권이 약화되어 있는 가운데 도평의사사라는 합좌기관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였으므로 귀족적이면서도 문벌 귀족보다는 관료적 성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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