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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
1. 궁예의 실정 |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로 칭하며 포악한 정치를 일삼아 민심을 잃음 → 신하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 | ||
2. 왕건의 통치 | 고려 건국(918): 연호를 천수,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김 후백제 공격(공산 전투), 신라에는 화친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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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의 투항(935) |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 격파 →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신라 멸망) | ||
4. 후삼국 통일(936) |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후백제에서 내분 발생 →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 → 후삼국 통일(936) |
1. 공산 전투(927)
-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의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해 출전하였다. 그러나 대구 팔공산 근처에서 후백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때 후백제군에게 포위된 왕건을 대신하여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2. 고창 전투(930)
- 공산 전투에서 승리한 견훤은 교통의 요충지였던 고창(안동)을 포위하여 공격하면서 왕건과 다시 맞붙게 되었고, 이 전투에서 8,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왕건에 크게 패하였다. 그 결과 왕건은 경상도 일대에서 견훤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 또한,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속 의사를 밝히면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통일의 의의
1. 실질적인 민족 통일의 완성
- 삼국 출신뿐만 아니라 발해 유민까지 흡수
2. 새로운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 마련
-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 융합
3. 정치 참여 세력의 확대
- 지방 호족 및 새로운 지식인 계층의 참여
태조 왕건의 정책
호족 통합 정책 | 회유: 혼인 정책, 성씨·관직·토지를 하사함 견제: 사심관 제도, 기인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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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통합 정책 | 발해 유민 흡수, 옛 삼국 및 발해 출신들도 지배층으로 포섭 | ||
북진 정책 | 고구려 계승 표방(국호를 고려라 함), 서경 중시, 거란 적대 → 청천강 ~ 영흥만까지 영토 확대 | ||
민생 안정 정책 | 세금 감면, 가난으로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풀어줌, 다양한 사상 존중 | ||
정책 방향 제시 | "정계", "계백료서"(관료들의 올바른 품행을 강조), 훈요 10조(후대 왕에게 통치 방향 제시) |
▶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일부)
-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불교를 장려할 것
-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 것
- 절은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 것
- 중국의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특히 거란의 언어와 풍습은 본받지 말 것
- 서경을 중요시 할 것
- 관리들의 녹봉을 함부로 가감하지 말고, 농민들의 부담을 가볍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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