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영시, Poem, English poetry

Bavarian Gentians, David Herbert Lawrence, 바바리아 용담꽃, 로렌스

Jobs9 2024. 11. 9.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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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varian Gentians


Not every man has gentians in his house
in Soft September, at slow, Sad Michaelmas.

Bavarian gentians, big and dark, only dark
darkening the daytime torchlike with the smoking blueness of Pluto's
     gloom,
ribbed and torchlike, with their blaze of darkness spread blue
down flattening into points, flattened under the sweep of white day
torch-flower of the blue-smoking darkness, Pluto's dark-blue daze,
black lamps from the halls of Dis, burning dark blue,
giving off darkness, blue darkness, as Demeter's pale lamps give off
     light,
lead me then, lead me the way.

Reach me a gentian, give me a torch
let me guide myself with the blue, forked torch of this flower
down the darker and darker stairs, where blue is darkened on blueness.
even where Persephone goes, just now, from the frosted September
to the sightless realm where darkness was awake upon the dark
and Persephone herself is but a voice
or a darkness invisible enfolded in the deeper dark
of the arms Plutonic, and pierced with the passion of dense gloom,
among the splendor of torches of darkness, shedding darkness on the
     lost bride and groom.

 

 

 

 

 

"Bavarian Gentians" by D.H. Lawrence evokes a sense of mystery and descent into the underworld. Its dark imagery, symbolized by the gentians' "Pluto's glooms" and "blue-smoking darkness," contrasts sharply with the vibrant colors of September. The poem's focus on darkness and the descent into the realm of Persephone aligns with other Lawrence works that explore themes of death and rebirth, such as "Snake" and "Piano." In the context of the time period, the poem reflects the modernist fascination with the subconscious and the interplay between the physical and spiritual worlds. 


 

 


바바리아 용담꽃


모두가 자기집에 용담꽃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온화한 9월에, 느리고, 슬픈 미카엘제 때에.
바바리아 용담꽃, 크고 검고, 단지 검기만 한
플루토의 암흑의 연기나는 푸름으로 횃불같은 낮을 어둡게 하고,

줄무니졌고 횃불같아서, 어둠의 그 불꽃으로 푸른색을
아래로 평평하게 펼쳐 점으로, 백주의 세력 하에,
푸른 연기나는 어둠의 횃불꽃, 플루토의 암청색 눈부심,
디스의 강당의 검은 등불들로 평평하게 퍼진다, 암청색으로 불탄다,
어둠을, 푸른 어둠을 발산한다, 데메테르의 창백한 등불들이 빛을 발산하듯,

그러니 나를 인도해주오, 길을 인도해주오.

내게 용담꽃을 한 송이 집어주시오, 내게 횃불을 하나 주시오
나로 하여금 스스로 길을 가도록 해주시오, 이 꽃의 푸른, 갈라진 횃불로
점점 더 어두워지는 층계 아래로, 그곳은 푸른색이 푸름 위에 어둠을 더하는 곳
그곳은 페르세포네가, 지금 막, 서리 내린 9월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으로 간 곳, 그곳은 암흑이 어둠 위에 깨어 있고

페르세포네 자신이 단지 목소리로 남아 있거나
잃어버린 신부와 그녀의 신랑에게 암흑을 흘리는 암흑의 횃불의 광휘 속에서
플루토의 양팔의 보다 깊은 어둠에 싸이고
농밀한 어둠의 정열에 녹아, 보이지 않게 된 암흑인 곳.

 

 

 

로렌스의 시는 대체로 평이한 문체로 되어 있으나 이 작품은 예외적으로 난해한 편에 속한다. 이 작품은 그가 폐병으로 죽기 1년 전인 1929년 미카엘 축제(9월 29일)에 썼다. 로런스 자신은 이 때 죽음이 시시각각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용담꽃은 흔히 푸른색이다. 이 점을 알고 있어야 이 작품에 나오는 색채의 이미저리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세계의 인물들이 아니라 모두 고대 희랍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및 그와 관련된 신들이다. 이 점을 알고 있어야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정확을 기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용담꽃의 푸른 빛을 통하여 죽음의 세계를 보고 그 세계를 찬미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어두운 색과 푸른 색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어둠과 검은 색, 푸른 색은 모두 죽음을 상징하는 빛깔들로 그려지고 있다. 로런스는 이런 음울하고 암담한 색깔들을 오히려 밝고 찬란하게 묘사함으로써 죽음의 세계를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세계로 그리지 않고 오히려 밝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지니는 세계로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로런스가 자신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데 대하여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체념적으로 이를 수용하며 일종의 종교적인 차원(로런스는 기존의 기독교나 여타 종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작가 소개에서 설명했듯이 현실의 육체적인 삶과 육체의 재생을 믿고 있었다)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작품 제목에 사용된 "바바리아"(Bavaria)는 그가 이 작품을 쓸 무렵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 남부 지방의 이름이므로, 이 작품의 제목의 의미는 그 지방의 용담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카엘 축제는 대천사 미카엘(Michael)을 기념하는 교회의 축제일인데 이 날이 이 작품과 어떤 특별한 관련은 없는 듯하다. 단지 그 축제가 9월에 있으므로 사용한 듯하다. 9월은 일반적으로 추수의 계절이지만 추수의 의미는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있던 것들이 생을 그치고 결과로써 남기는 것들을 모으는 뜻을 갖게 된다. 따라서 한 생명이 끝나고 죽음의 계절이 가까와진다는 의미에서 9월이라는 말 대신에 미카엘 축제라는 말을 쓰고 거기에 "슬픈"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은 한편으로는 빨리 다가오는 것이며, 이를 체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더디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느리고 슬픈 미카엘제"에 라고 쓴 것이다. 바바리아 용담꽃은 크고 어두운 색깔이어서 죽음의 신의 등불이 되기에 적합하다. "플루토"(Pluto)는 하계의 왕이다. 용담꽃의 푸름이 "횃불처럼 대낮을 어둡게 한다"라는 말은 모순형용법이다. 횃불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횃불이 빛을 어둡게 한다는 것은 비정상적이고 모순되는 말이다. 그러나 고요한 연못에 개구리 한 마리가 풀쩍 뛰어들면 그 정적이 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횃불은 그 어둠을 더욱 어둡게 보이도록 하는 것처럼 환한 대낮에 한떨기 어두운 색의 용담꽃은 한 낮의 밝음을 강조하고 역으로 그 어둠의 빛을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지금 정원에 피어 있는 한 떨기 용담꽃은 횃불처럼 푸른 빛을 발산하고 있지만 로런스는 그 어둠의 횃불을 둘러싸고 있는 빛과 대비되어 어둠의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횃불의 비유를 사용한 것은 줄기 끝에 달린 꽃의 모양이 횃불과 닮았다는 점과 주위의 어둠(빛)을 밝게(어둡게)한다는 점에서 직유가 성립되며, 특히 횃불은 어둠을 밝혀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자가 지금 이 횃불에 인도되어 죽음의 세계로 가기를 염원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바바리아 용담꽃은 다시 램프에 비유되는데, 램프는 횃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또한 램프는 그 다음의 말들과 어울려 죽음의 세계를 어떤 신비감이 감도는 세계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램프는 디스(Dis), 데메테르(Demeter), 또 페르세포네(Persephone)에 속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다. 디스는 희랍신화의 플루토(Pluto)에 해당되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하계의 왕이다. 데메테르는 농경과 수확의 여신으로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이다. 신화에 따르면 페르세포네가 에나(Enna)의 목장에서 꽃을 따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하계의 왕 플루토에게 납치되어 그의 왕비가 된다. 납치된 딸을 찾아다니다 슬픔에 잠겨있는 데메테르를 제우스신이 동정하여 페르세포네로 하여금 지상에서 1년의 3분의 2를 살고 하계에서 1년의 3분의 1을 플루토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봄이면 그녀는 하계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가을까지 살다가 겨울이면 하계에서 플루토와 산다. 이제 겨울을 맞아 페르세포네가 하계에서 살기 위하여 어두운 층계를 더듬어 내려가듯이 로런스도 인생의 겨울 즉 죽음을 맞아 바바리아 용담꽃을 길을 밝혀주는 램프로 삼고 하계로의 여행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 어두운 하계에는 오직 암흑만이 있으므로 아무런 형체도 눈에 보일 수 없다. 페르세포네 자신도 다만 목소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페르세포네와 플루토가 신부와 신랑이 되어 짙게 포옹하고 있다는 사실은 로런스가 죽음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신비로운 새로운 삶의 세계로 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로런스의 사상은 생명주의, 원시복귀사상이며, 윤회와 유사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육체 자체의 재생을 믿었던 것이다. 자신의 육체가 하루하루 쇠약해지고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그로서는 죽음을 마치 페르세포네가 겨울을 맞아 하계로 잠시 내려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싶었으리라. 봄이 되면 페르세포네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듯이 자신도 하계에 잠시 내려갔다가 육체의 부활을 맞으리라고 굳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소생이 없었던 그로서는 죽음을 거부하고 이겨내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리와 어조 또 행의 길이에 있어서 질질 끌며 길게 늘어짐으로써 죽음으로 서서히 이끌려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법상의 특이한 점은 행의 길이가 대체로 상당히 길고, 전통적인 작시법에 다르면 각행의 첫글자는 대문자로 되어야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서 현대시의 한가지 특징인 실험정신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마치 산문문장을 적당한 길이의 행으로 나누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기법상의 특징 및 리듬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푸른 색채의 이미저리가 어울려 이 작품은 죽음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소망스럽고신비로운세계로보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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