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umn Song
Dante Gabriel Rossetti
Know'st thou not at the fall of the leaf
How the heart feels a languid grief
Laid on it for a covering,
And how sleep seems a goodly thing
In Autumn at the fall of the leaf?
And how the swift beat of the brain
Falters because it is in vain,
In Autumn at the fall of the leaf
Knowest thou not? and how the chief
Of joys seems—not to suffer pain?
Know'st thou not at the fall of the leaf
How the soul feels like a dried sheaf
Bound up at length for harvesting,
And how death seems a comely thing
In Autumn at the fall of the leaf?
Analysis (ai): This poem is a meditation on autumn and the human condition. The speaker describes the sense of grief and loss that comes with the passing of the season, as well as the beauty and acceptance that can be found in death. The poem's use of simple, direct language and its focus on the natural world are characteristic of the Pre-Raphaelite movement. The poem's themes of mortality and melancholy are also consistent with the work of other Pre-Raphaelite poets, such as Christina Rossetti and William Morris.
넌 알지 못하느냐, 낙엽 떨어짐에,
얼마나 가슴이 나른한 슬픔을 느끼는지
그 위로 떨어지는 낙엽에 덮여,
그리고 얼마나 잠이 편안하다고 느껴지는지
낙엽 떨어지는 가을엔?
넌 알지 못하느냐, 빠르게 고동치는 두뇌가
얼마나 비틀거리는지, 왜냐하면 부질없기 때문에,
낙엽 떨어지는 가을엔?
그리고 가장 큰 기쁨은 - 얼마나
고통 없음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지?
넌 알지 못하느냐, 낙엽 떨어짐에,
얼마나 영혼이 잘 말린 곡식 단처럼 느끼는지
수확하기 위해 단단히 묶어 놓은,
그리고 얼마나 죽음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지
낙엽 떨어지는 가을엔?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82)는 영국의 시인, 화가이다. 잘 알려진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오빠이다.
그는 1848년 윌리엄 홀먼 헌트, 존 에버렛 밀레이와 함께 "라파엘 전파 형제회" (Pre-Raphaelite Brotherhood)를 결성하였다.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s)로 불리는 이 문예 사조는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고전적 우아한 화풍을 추종하는 매너리즘을 배격하고, 라파엘로의 화풍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개혁 운동이다.
로제티의 그림은 유럽의 상징주의에 영향을 미쳤으며, 심미주의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시는 낙엽 떨어지는 늦가을에 느끼는 시인의 슬픔과 우울한 심경을 적고 있다. 가을 낙엽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부닥쳐야 하는 죽음을 상징한다.
낙엽을 보면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거부하려고 애써는 것이 부질없다고 시인은 깨닫고 있다.
그보다는 마치 수확하기 위해 잘 묶어 놓은 볏단처럼, 자신의 삶을 잘 마무리하여, 죽음을 맞으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러면 죽음조차 '아름답게' (a comely thing) 느껴질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시는 3개 연으로 되어 있다.
각 연은 '넌 알지 못하느냐' (Know'st thou not)라고 묻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낙엽 떨어지는 가을엔' (In autumn at the fall of the leaf)이 각 연에서 마치 후렴구처럼 반복되고 있다.
첫째 연에서,
시인은 묻는다.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
가슴 위로 떨어지는 낙엽에 덮여, 가슴이 느끼는 '나른한 슬픔' (languid grief)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잠이 '편안한, 좋은 것' (a goodly thing)으로 느껴지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낙엽은 다가오는 죽음을 암시한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시인은 '무기력한 슬픔' (languid grief)을 느끼고 있다.
다만 죽음을 헛되이 피하려고 하는 대신, '편안한 잠'처럼 '좋은 것' (a goodly thing)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둘째 연에서,
시인은 묻는다.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
'빠르게 고동치는 두뇌가 비틀거리는 것'
(the swift beat of the brain falters)
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활발한 두뇌가 '비틀거리고 주춤거리는' (falters) 것은 삶의 한창때가 지나고 죽음이 다가옴을 상징한다.
늙음과 궁극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는 것은 '부질없다' (in vain)라고 하였다.
시인은 삶의 짧음과 덧없음에 체념하고 있다. 동시에 우울하다. 젊을 때는 삶이 항상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이제는,
'가장 큰 기쁨은 - 단지 아픔을 겪지 않는 것 - 처럼 보인다.'
(the chief of joys seems - not to suffer pain)
라고 소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셋째 연에서,
시인은 묻는다.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 영혼은 마치
'수확하기 위해 단단히 묶어 놓은 잘 말린 곡식 단처럼'
(like a dried sheaf bound up at length for harvesting)
느끼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시인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체념에서 나아가, 주어진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살아왔다고 평가하는 긍정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죽음에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인간 영혼의 강인함과 고귀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시인에게는, 죽음조차도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죽음은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낙엽 떨어지는 가을엔?'
(And how death seems a comely thing In Autumn at the fall of the lea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