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안동본(간송본)과 상주본
1940년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되어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책이다.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제작 원리 내용(해례)이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다.
애초에 많이 인쇄하지도 않았던지 조선 시대부터 이미 해례본은 희귀했는데, 그 유명한 "훈몽자회"를 쓴 최세진 역시 해례본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인용만 했으며, 이덕무가 쓴 백과사전 "청장관전서"에도 '세속에 전하기를 세종이 변소에서 문살을 보다 깨닫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2] 이런 저런 어중이 떠중이식 설이 나돌던 와중에 해례본이 발견되며 한글이 계통적으로 독립적인 동시에 당시 최고 수준의 언어학, 음성학적 지식과 철학적인 이론이 한글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인해 한글 창제의 원리에 대해 많은 것들이 확인되고 알려지긴 했는데, 사실 그 내용이 꽤 어려워서 아직도 대해 학자들 사이에 한글 원리에 대한 해석에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자음 글자의 경우 혀나 입술 같은 발성 기관을 본따 만들었다고 쓰여있지만 모음 글자의 경우 성리학 이론과 관련된 천, 지, 인을 가져와서 만들고 조합한 것이라 서술되어 있어서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이 책에는 한글 창제 원리의 소개 외에도 훈민정음이 정확히 언제 반포됐는지도 표기가 돼 있어서 10월 9일이 한글날로 지정될 수 있도록 하는 근거가 됐다.
2019년 현재 알려져 있는 판본은 안동본(간송본)과 상주본 단 둘뿐이다. 소재가 알려져 있는 것은 안동본(간송본)뿐이나 안동본(간송본)을 통해 영인본이 제작되어 연구에는 문제가 없다.
해례본
해례본은 한문으로 쓰여 있다. 흔히 말하는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문이고,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한다. 당대의 문자 언어는 한문이었고, 새로 만든 문자를 설명하는 문자 언어가 한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초로 발견된 《훈민정음》은 맨 앞 부분 두 장이 고의적으로 찢긴 상태였다. 찢긴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 책을 감추기 위해서 표지를 뜯어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 발견된 《훈민정음》의 종이 뒷면에는 한 선비가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십구사략언해》가 있었는데,[4] 이 내용 역시 초반부가 등장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책을 필사할 때 처음부터 쓴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지를 뜯어낼 때 이 필사 내용 역시 같이 뜯겨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십구사략언해》는 내용상 약 18세기 후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니, 결국 책 표지를 뜯어낸 것은 18세기 이후라는 얘기가 된다.
초간본, 즉 원본으로 여겨지는 해례본이자, 최초로 발견된 해례본이다. 1940년대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후 간송 전형필이 입수하여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보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었다. 그런 까닭에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이름보단 '《훈민정음》 원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상주에서 두 번째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는 구별을 위해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 안동본 또는 소유자의 호를 따서 간송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은 이 판본 역시 세종대왕 생전에 나온 것으로 보긴 힘들다. 책에 수록된 '세종'이라는 묘호는 세종 사후에 붙여진 것이기 때문[5] 즉, 해례본에 수록된 내용 자체는 세종대왕이 만든 것이 확실하나 대왕 생전에는 어디까지나 그 내용을 대신들 앞에서 반포만 한 것이고, 지금과 같이 책으로 활자판본을 만들어 편찬, 보급한 것은 세종 사후인 것이다. 그래도 현재 남아있는 판본 중에서 간행 시기가 가장 이른 판본이고 내용상 원본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어학계에서는 이를 원본이라 하지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정확하게 부른다.
상주본의 경우 도굴꾼 서 씨가 1999년 안동 광흥사의 대웅전 나한상 토불들을 부수고 훔친 복장유물이라는 증언을 하였고 2013년 말에 실제로 안동 광흥사에서 조선 세조 시기에 복장한 다수의 관찬 언해본 서적이 발견되면서 이 당시 편찬된 것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데, 간송본 또한 그 판본이 완전히 똑같고 같은 안동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상주본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 복장했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상주본
오랜 세월 해례본은 단 한 권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왔지만, 2008년 7월에 경북 상주에서 간송미술관의 간본과 동일한 판본이 발견되었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에 사는 고서 수집가인 배익기가 집 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발견하였다며 이를 안동MBC에 제보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지를 따서 이를 상주본이라 부른다.
상주본은 《훈민정음》 안동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 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는 안동본보다 좋고 안동본에는 없는 당시 연구자의 주석이 있다.[8] 때문에 발견 초에는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였으나 현재는 안동본과 내용이 같기에 학술적으로는 의미가 없어보인다. 발견 초 전문가와 기사를 통해 가치가 1조가 된다는 얘기가 나왔으며 이를 근거로 현 소유자인 백익기가 10분의 1인 천억 원에 국가에 팔겠다고 주장하였다.
훈민정음 상주본, 후하게 쳐도 3억 전문가는 "문화재의 가치와 실제 거래가는 차이가 있다. 상주본은 (배씨에게 줄) 성금을 모아서 받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라며 "간송 전형필 같은 독지가가 있어도 그 사람도 안 살 거다. 배씨도 (30만 원 주고 궤짝으로 산 책더미 중에 한 권이므로 대략으로 치면) 3만 원을 주고 샀는데 왜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문화재청도 상주본에 집착할 이유가 없는데, 왜 그런지 알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그는 상주본의 화폐가치를 묻는 말에 "중소도시의 아파트 한 채 값이면 후하게 쳐준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1억~최대 3억 원 정도다. (보존 상태가) 완전하다고 해도 10억 원을 넘어가기 힘들다"고 제시했다. 지난 2015년 경북 상주 소재 배씨의 집에 불이 나면서 상주본도 일부 훼손이 된 사진이 공개됐다. 이에 대해선 "불에 탄 것은 괜찮다"며 "여백 부분이기 때문에 그 연대 종이로 복원이 다 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같은 판목으로 인쇄된 것으로 전문가가 감정한 간송본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해선 "간송본은 최고고 완벽하고 현존하는 최고가"라며 "학술적, 예술적 가치도 높다. 하지만 진품도 복사(영인본 제작)가 되면 참고품이 되는 경향이 있다. 몇십 억도 안된다. 10억 원은 넘어간다. 하지만 좋은 걸 갖고 있어도 거래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10억도 많아, 국민 세금으로 살 만한 것 아냐" 익명을 원한 또다른 문화재 전문가(국립박물관 관장·문화재 관련 박사)는 "고서적은 내용이 중요한 건데, 그 내용을 우리가 다 알고 연구가 돼 있다"면서 "그림은 단 한 점밖에 없지만 책은 인쇄하거나 필사를 한 거다. 두 권밖에 없으니까 문화재적 의미는 높지만 간송본과 같은 목판으로 찍었고, 내용도 같고, 양자가 큰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이 전문가는 "10억도 많은 금액"이라며 "국민 세금으로 살 만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특히 그는 "공식 거래된 고서적 평균가를 보면 고서적·고문서 자체가 가격이 올라가는 것들이 별로 없다"면서 "문화재는 가격 평가가 어렵다는 의미에서 1조라고 한 거고, 실거래가는 십 억 원도 안된다. 게다가 상주본은 현재 장물이고 국가소유로 최종 판결이 났으니 아무도 구입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실제로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대표 김달진)가 기자에게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훈민정음> 필사본이 K옥션에서 500만 원에 낙찰됐다. <훈민정음> 언해본(<월인석보> 권1~2에 딸려 있는 것)은 지난 2017년에 필사본이 서울옥션에서 155만 원에 거래됐다. 지난 2015년에 <월인석보> 권9~10이 7억 3000만 원에, 2018년 <월인석보> 권20이 3억 5000만 원에 거래된 것이 눈에 띄지만 이후로 고서적류는 거의 '유찰'되고 있다. 앞서의 고서적 전문가는 "요즘은 거래량이 거의 없다"면서 "물건은 있어도 구매자가 없다. 몇백 만 원 이상 물건은 1년에 몇 건 거래가 없다"고 귀띔했다. 익명을 원한 한 국어사학자(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상주본이 간송본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일부의 주장에 의문을 표했다. 그는 복사본이긴 하지만 학술회의에서 상주본을 직접 본 학자다. 또 지난 2008년 안동 MBC에서 촬영한 상주본 전체 영상을 보기도 했다. "상주본이 앞쪽에 지질이나 여러 가지로 봤을 때 간송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원래 최초에 어떤 문헌이 나오면 서지학자에게 보내서 가치를 떠본다. 가치가 좋다고 하면 시장에 내놓는다. 당시 상주본 감정에 참여했던 전문가(대학 교수) 중에 1억~2억 원 사이로 평가한 분도 있었다. 상주본이 만약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간송본의 가치가 절하되는 게 아니다. 언론이 크게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너무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상주본이 유일본이라서 부르는 게 값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지질이나 여러 면에서 연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한편 상주본은 지난 2008년 7월 세상에 처음 나왔다. 고서적 수집상인 배씨가 "집을 수리하다 발견했다"면서 상주본을 안동MBC에 공개했다. 이후 골동품상 조아무개씨가 "배씨가 상주본을 내 가게에서 훔쳤다"고 주장하며 배씨를 상대로 형사고소 및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배씨는 상주본이 조씨의 가게에서 한 궤짝에 30만 원을 주고 산 책뭉치 속에 들어 있었다고 주장한 반면, 조씨는 배씨가 책을 사가면서 주변 궤짝 위에 놓여있던 상주본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검찰수사와 형사재판 중에 상주본이 원래 안동 광흥사 소유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상주본은 나한상의 복장(腹藏) 유물(불상 배 속에 넣어두는 유물)이었으나 1999년 도난당했다고 알려졌다. 문화재 도굴꾼 서아무개씨는 법정에 출석해 "광흥사의 복장유물을 훔쳐 조씨에게 500만 원을 받고 팔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서씨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문화재청도 원소유자가 광흥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불상 속에 불경이 아닌 <훈민정음>이 들어 있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1946년에 광흥사에 불이 났을 때 훈민정음 판본이 소실된 걸로 봐서 가능성이 없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1년 6월 대법원은 상주본의 소유권이 조씨에게 있다고 판결했다. 다음해 5월, 조씨는 상주본의 실물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에 기증식을 하고 사망했다. 그러나 같은해 9월, 배씨는 절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판단이 엇갈린 것이다. 지난 2017년 배씨는 문화재청의 강제집행을 막아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그러나 지난 11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며 상주본의 소유권이 국가에 있다고 최종 판결했다. 그러나 앞선 소송은 강제집행 취소 소송이었을 뿐 배씨 입장에선 '소유권 무효확인' 소송을 해볼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재청과 배씨 사이의 줄다리기에 해법은 있을까. 앞서의 고서적 전문가는 해법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문화재청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화재법에 의해서 소장자로 하여금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게 해서 국보·보물·지방·근대 문화재 등 합당한 문화재로 지정해 주면 된다. 소장자가 관리할 능력이 없으면 위탁 혹은 영구·무상·유상 임대 등을 받거나 처분을 원하면 국가에서 사준다거나 해야 한다. 무조건 귀한 것을 모두 국가 소유로 하려는 문화재청의 태도가 잘못된 것이다. 처음에 1조 원이라고 문화재청이 발표한 것도 경솔했다. (검찰수사 과정에서) 원래 주인이 안동 광흥사로 판명됐다. 문화재청이 그 절에 돌려줘야 한다. 도난분실품은 시효가 없다. 도난된 문화재로 의심되면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 사망한 골동품상 조씨는 '장물취득죄'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가에 기증한 측면이 있다. 장물이기 때문에 배씨에게 30만 원을 돌려 주고 상주본은 원주인인 광흥사에 돌려줘야 한다. 그런 절차없이 문화재청이 조씨에게 기증하라고 했던 것이 잘못이다." 다만 그는 "배씨는 선의의 제삼자이므로 다툼의 소지가 있다"며 "선의취득이므로 소유권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애초에 법원이 배씨의 '선의취득'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판례나 업계의 일반적인 인식을 거스르는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골동품가게에 가면 책이 천정까지 쌓여 있다. 원래 한 보따리씩 수십 만원 어치를 산다"며 "민법에 의하면 전문직업인의 착오는 인정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책이라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두지 않는다. 매매가 성립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문화재청이 상주본의 원 소유자가 광흥사라는 검찰수사 결과나 도굴꾼 서씨의 증언을 무시한 것도 잘못이라고 봤다. 결과적으로 애초에 도난품으로 의심되는 문화재를 문화재청이 원소유자를 찾아주기보다 국가 소유로 한 것부터 단추가 잘못 꿰졌다는 것이다. 앞서의 박물관장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지인들이 배씨를 만나서 얘길 해보면 패소를 하다 보니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다"면서 "판로는 없고 국가에선 절대 사줄 수 없다고 하고, 훼손은 심해지고, 압수수색은 들어온다고 하는 상황이다. 기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게 제일 낫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