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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 還元主義, Reductionism, 방법론적 일원론, 환원주의적 계층구조

Jobs9 2024. 3. 29.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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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 還元主義, Reductionism

 

어떤 높은 단계의 개념을 더 낮은 단계의 요소로 분할하여 정의하는 철학적 흐름. 보통 르네 데카르트를 시초로 본다.

현대에는 주로 윤리학, 미학 등 일견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과학 가운데서도 화학이나 생물학보다 '근본적인' 과학인 물리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 보기엔 더 근본적으로 보이는 수학이 아니라 물리학인 이유는 수학은 인간 지성에 기초해 구성된 체계로서 물리를 이해하는 도구일 뿐 수학이 세상을 직접 설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물리는 화학을 직접 설명 가능하지만 수학은 물리를 직접 설명하지는 못한다. 비유하자면 수학이 연필과 지우개로 환원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어떤 이론물리학자들은 세상이 수로만 설명될 수 있으며, 오히려 물리가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여기서 더 나아가 수학도 논리학으로, 철학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보통 물리학까지 환원된다는 점은 대체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이상은 견해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적어도 수학, 논리학, 철학을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우로 봐줄 만한 가치는 있다.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환원주의는 논리 실증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에서 지나가듯 언급되는 "방법론적 일원론" 역시 환원주의와 접점을 갖는다.

한편, 맨 위의 사진에서와 같이 'A가 응용C에 불과하고 B 또한 응용C에 불과하므로 C는 A보다 우월하다.'와 같은 논증은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매개념부주연의 오류에 해당한다. 추가로 '응용 ~'이라는 어구를 '~보다 뒤떨어진다'는 의미로 은밀하게 재정의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우 당연히 적절한 환원주의적 논증이라고 할 수 없으며, 건전한 환원주의자라면 특정 학문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보다는 그 근본이 되는 학문을 통해 해당 학문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환원주의적 계층구조


일단 어떻게든 더 높은 단계와 더 낮은 단계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식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계층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회학은 조금 복잡한 심리학일 뿐이다. (혹은 사회학은 심리학의 응용일 뿐이다.)
심리학은 조금 복잡한 생물학일 뿐이다. (혹은 심리학은 생물학의 응용일 뿐이다.)
생물학은 조금 복잡한 화학일 뿐이다. (혹은 생물학은 화학의 응용일 뿐이다.)
화학은 조금 복잡한 물리학일 뿐이다. (혹은 화학은 물리학의 응용일 뿐이다.)


물리학은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다. 수학은 단순히 물리를 나타내고 계산하기 위한 언어일 뿐이다. 그러나 폭 넓게 바라보아 우주(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한, 물리학 역시 수학의 법칙을 따르는 조금 복잡한 학문일 뿐이라고 하면...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수학이 다시 환원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논리학이나 철학으로 환원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중 철학 쪽은 너무 포괄적인 분류라 논의하기 애매하다. 게다가 논리학과 철학 모두 결국 인간의 뇌 구조에서 나온 것이므로 논리학과 철학이 심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에 의하면 다시 심리학, 뇌과학, 생리학, 생물학, 화학을 거쳐 물리학으로 환원되는 순환논법이 되기도 한다(...) 


각종 사회과학
▼ (환원) ▼
심리학(특히 사회심리학)
▼ (환원) ▼
신경과학, 뇌과학
▼ (환원) ▼
생리학
▼ (환원) ▼
생물학 (특히 분자생물학)
▼ (환원) ▼
생화학
▼ (환원) ▼
화학 (특히 유기화학)
▼ (환원) ▼
물리화학
▼ (환원) ▼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
▼ (환원) ▼
수학(특히 대수기하학과 군론의 대칭군)

아무튼 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모든 사회과학은 심리학으로 환원되고, 심리학은 다시 생물학, 특히 신경생리학으로 환원될 것이며, 생물학은 세포의 단위로, 다시 분자의 단위로 환원되고, 나중에는 생화학을 거쳐서 종국에는 가장 미시적인 입자 수준의 물리학으로 환원되어 설명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이 환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각 학문들 사이의 계층구조이다.

주의할 것은 모든 환원론에서 저렇게 일직선처럼 환원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응용
이렇다 보니 수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다뿐이지 '좀 더 복잡한 물리학'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소리. 실제로 각 분야별로 공부를 하다 보면 서로간의 영역이 많이 겹치고 언어도 나름 비슷하고, 학제 간 협력도 활발히 일어나기 때문에 과격하다고 투덜거릴 수는 있어도 아주 부정할 수만도 없는 게 현실. 실제로도 현대 생물학의 발전은 델브뤽을 비롯한 몇몇 물리학자들이 바이러스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에 상당부분 빚지고 있다.

이와 같은 환원주의의 특성 때문에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이자 수리물리학자이며 동시에 대중적인 유신론적 진화론자인 J.폴킹혼 경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 문장에 대해 수긍할 수 있다면 자신이 환원주의자라고 생각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인간이란 단지 무수히 많은 쿼크와 글루온, 전자 등이 모여 있는 집합체일 뿐이다." 

여기서 "단지 ~일 뿐이다 (nothing but ∼ )" 화법(더 자연스럽게 번역하자면 ~에 불과하다)에 주목하라. 이것은 환원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환원주의자들은 다른 식자들에게 약간의 위트를 넣어서 "nothing-buttery" 라고 불리기도 한다. 매사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결국 그것도 단지 ∼ 일 뿐이지요." 라고 말을 끝맺기 때문.

철학계의 대표적인 환원주의자로는 논리실증주의의 대표 인물 중 하나인 루돌프 카르납이 있다. 그 외에도 일명 통합과학(unity of science) 운동을 펼치면서 물리학의 이름 아래 모든 과학을 포섭하려 했던 인물인 오토 노이라트 또한 환원주의자에 포함된다. 

과학계의 대표적인 환원주의자로는 노벨상 수상자인 프랜시스 크릭(1916~2004)이 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생물학의 궁극적 목적은 사실상 모든 생물학을 물리학과 화학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 이라고 한다. 다른 네임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역시 환원주의에 우호적이며, 생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G.에델만(1929~2014)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마음의 기초를 이루는 물리적 물질은 전혀 특별하지 않으며, 약간의 금속과 함께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유황, 인과 같은 화학원소들뿐" 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사랑 역시 그저 옥시토신(oxytocin)을 바탕으로 한 신경세포들 간의 의사소통에 불과하다는, 지극히 환원주의적인 설명이 가능해진다.

환원주의는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마치 "부분과 전체 논쟁" 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사회 명목론 또는 사회 유기체설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전체는 단지 부분의 합에 불과하다" 와 같은 논변과도 멀지 않아 보이기 때문. 즉 숲은 나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숲은 단지 나무들의 집합일 뿐이다. 물론 바로 이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복잡계 이론인데, 환원주의에 대한 반박들 중에도 복잡계 이론의 창발(emergence)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 이 때문에 결합의 오류와도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대중매체에서는 셸든 쿠퍼가 대표적인 환원주의자... 아니, 물리학 우월주의자로, 물리학 외의 모든 학문들을 업신여기거나 내지는 지적 활동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사회과학은 대부분 엉터리" 라고 발언하는가 하면, "감히 공학 따위가 과학(science)이라는 이름을 받을 수 있다고?" 라고 하면서 씩씩거리기도 했다. 한 번은 "똑똑하지 않은 사람과 연애를 한 적이 있느냐" 는 질문에 "프랑스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과 한 적은 있다" 고 대답할 정도. 

해당 매체에 나오듯 실제로 물리학자들 중 상당수는 그러한 성향이 상당히 심하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볼프강 파울리가 결혼 1년만에 이혼한 아내가 화학자와 결혼하자 "투우사에게 갔더라도 이해를 하겠는데, 화학자라니..."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삼엽충 연구의 대가인 리처드 포티도 자신의 한 저서에서 "물리학자들은 생물학을 우표수집 정도로 취급한다."고 쓴 적이 있다. 실제 사례로도 K-Pg 대멸종을 일으킨 원인인 운석충돌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는 저 주장을 펼쳤던 루이스 알바레즈가 생물학자가 아닌 핵물리학자 출신이었던 탓도 있다. 기존 이론이었던 동일과정설을 뒤집는 이론이라 생물학계에서도 가뜩이나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론이었는데 여기에 더해 루이스 알바레즈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사실 변경지대의 과학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화학과 생물학은 과학으로 인정받은 역사가 300년이 되지 않았다. 라부아지에나 존 돌턴이 화학의 틀을 잡기 까지 심하면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나오기 전까지 화학은 박물학 취급을 받았으며, 생물은 수학적 해석능력이 떨어져서 하디-바인베르크 법칙 같은 간단한 수학적 유도조차 하지 못했었다. 이 때문에 아직도 물리학은 화학을 응용 물리학으로 보거나 화학은 생물학을 응용 화학으로 보거나 생물학은 심리학이나 사회과학을 응용생물학으로 보는 풍토가 남아 있다. 

 


유물론과의 관계
환원주의 자체는 유물론이나 물리주의, 즉 "세상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함축하지 않는다. 다른 형태의 환원주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환원주의의 시초라고 언급된 데카르트는 물질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2원론자였으며, 조지 버클리처럼 모든 것이 관념으로 환원된다고 본 관념적 환원주의자도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 환원주의자는 대부분 물리적 환원주의자이며, 물리적 환원주의는 물리주의를 함축한다. 그렇기에 환원주의자 상당수는 무신론자다.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형태의 "환원" 개념은 일반적으로 대략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특수 과학A의 개념 a는 기초 과학B의 개념 b로 환원된다. iff a가 들어간 특수 과학A의 법칙은 (A를 포함하지 않고) b가 들어간 기초 과학B의 법칙으로 분석·번역될 수 있다. 

이를테면 위 도식에 의거하여 일상적 개념인 "온도"는 기초 과학인 물리학의 개념인 "분자들의 평균 운동 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다. 하지만 화학이나 생물학 등과 달리 이런 '물리적 환원'이 성공하지 않는 사례가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만약 이런 사례가 합당하다면 물리적 환원주의는 반례에 봉착한다. 

 

수리철학
첫 번째 후보는 수학이다. 왜냐면 수학에서 다루는 대수 구조, 함수, 수, 도형, 집합 등은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학적 대상들이 양성자, 중성자, 쿼크 같은 미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시공간 속에 있는 것들도 아니고 중력, 전자기력 같은 힘의 작용도 받지 않는다. 단적으로 리만 가설의 참 여부를 밝혀내는 건 수학적 증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뿐, 그 어떤 물리학적 실험으로도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런데 이처럼 굳이 물리학의 지식이 없더라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곧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가 있다고 하는 것과 별차이가 없다. 따라서 위에서 한 말들이 옳다면 수학은 곧 물리적 환원주의에 대한 반례가 된다. 한편으론 오히려 반대로 물리학이 수학적으로 환원된다고 믿는 물리학자들도 존재한다. 특히 이론 물리학자들이 그런 경향이 있으며, 수학적 우주 가설을 제창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탐구하는 대표적인 학제는 수리철학이다. 예를 들어 수학적 유명론자인 뉴욕 대학교의 철학 교수 하트리 필드(Hartry Field)는 고전역학이 '수', '함수' 같은 수학적 대상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음을 보인 바 있다. 만약 이런 기획이 성공한다면 수학은 물리적 환원주의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심리철학
두 번째 후보는 심리학이다. 고통, 믿음, 지능 같은 심리학적 개념들이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철학적 주장의 근거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같은 유사과학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런 입장은 '신경과학 등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같은 입장과 양립불가능한건 아니다. 문제는 심리학의 범위가 보다 일반적이라는데 있다. 

심리학에서 대개 고통이나 믿음 같은 심리적 상태를 오직 인간만이 갖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고래, 문어를 비롯한 다른 많은 고등 인지 동물도 이런 심리적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인공지능이나 고지능 외계인이 발견된다면 이들 또한 '믿음', '지능' 같은 심리적 상태를 띨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심리적 상태를 갖춘다고 여겨지는 이들 생물(혹은 무생물)의 물리화학적 구조가 반드시 같다고 볼 근거는 희박하다. 이를테면 인간과 문어가 거쳐온 진화 과정은 상당히 다르다. 더불어 SF에 나오는 것처럼 규소로 된 고지능 생명체가 만약 있다고 할 경우, 이는 명백히 탄소로 이루어진 인간의 신경 작용과는 전혀 다른 물리적 토대를 띠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에게 '믿음', '지능' 같은 심리적 상태를 귀속시킬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물리화학적 구조는 제각기 다르다. 이런 시나리오를 두고 흔히 "복수 실현(multiple realization)"이라고 부른다. 

이런 복수 실현 논변이 옳다면 심리 법칙의 물리적 환원은 힘들어진다. 이를테면 심리학적 개념인 '지능'만 하더라도 물리적 환원을 하려고 친다면 아주 지저분한 형식화 밖에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x는 지능을 갖는다 iff. (x는 a1개의 글루온, b1개 쿼크 ...가 c1한 패턴에 따라 배열된 것의 부분 d1이 상태 ~를 띠는 것이다) or (x는 a2개의 글루온, b2개 쿼크 ...가 c2한 패턴에 따라 배열된 것의 부분 d2가 상태 ~를 띠는 것이다) ... (x는 an개의 글루온, bn개 쿼크 ...가 cn한 패턴에 따라 배열된 것의 부분 dn이 상태 ~를 띠는 것이다) ... 

즉 위 형식화를 따르면 '지능' 같은 심리적 현상은 물리적으로는 전혀 상관없는 여러 현상들을 그저 얼기설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지능'이라는 심리학적 현상은 이런 물리적 상이성과 상관없이 추상적이며 체계적으로 탐구될 수 있는 것 같다. 단적으로 튜링 테스트는 그 응답자가 인간인지, 문어인지, 규소기반 생명체인지 상관없이 적용된다. 즉 심리적 현상을 따지는데 물리적 구조는 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인지주의를 비롯한 지배적인 심리학적 기조에서는 이처럼 심리 현상의 수리적 구조에 관심을 둘 뿐, 그 물리적 근거가 무엇인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를테면 힐러리 퍼트남은 심리 상태가 확률론적 오토마타로 분석될 수 있다고 보며, 그 오토마타가 어떤 물리적 성질을 띠는지는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진단한다.

그 외에 비주류설로 로저 펜로즈의 조화 객관환원 이론 또한 뇌 활동이 양자역학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며, 생물학 및 물리학으로 단순하게 환원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변경지대의 과학으로서 주류설로 편입되지 못하고 주류 학계에서 매우 논란이 많다.

만약 위와 같은 분석이 옳다면 심리학은 물리학으로 환원된다고 볼 근거가 희박하며, 곧 물리적 환원주의는 난점에 봉착한다.

수반(supervenience) 개념은 1970년대 이후 강한 형태의 물리적 환원주의를 포기하면서도 여전히 물리주의를 견지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관심을 받게 된 개념이다.

 

 

상대주의와의 관계
환원론자들은 상대주의에도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도덕 이론, 인문학, 더 나아가 선과 악 그 자체도 환원 가능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비록 그 결과물이 엄청나게 복잡한 상호작용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강경한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환원론자들은 진화생물학(진화심리학)이나 표준 모형 같은 본질적인 물리법칙을 거론하며 절대주의를 비판한다. 사실 문화상대주의 이론만 봐도 굳이 환원주의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편적 수단' 혹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구실'로서 절대적인 도덕 법칙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대주의를 지지하기도 한다.

 

환원주의 장점과 단
지나친 환원주의는 대게 비판받지만, 환원주의 그 자체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개념이다. 환원주의는 비단 학문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많은 생물학적, 물리학적 업적은 환원주의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생물의 구조, 원자, 분자의 발견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환원주의가 만능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세상은 환원하기만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으로 크게 봐야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뇌를 환원해서 뉴런을 비롯한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뉴런과 시냅스를 더 분자단위로 분리한다고 해서 뇌의 원리를 알 수 없다. 이 외의 장점과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환원주의의 가치에 대한 통념과 반론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다."
"I can calculate the movement of the stars, but not the madness of men."
- 아이작 뉴턴이 극단적 환원론의 위험성을 주식시장에서 몸소 겪고서 말한 경험담

환원주의에 대한 흔한 비판은 환원주의가 예술, 역사, 이념 등 복잡한 활동들을 환원시키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아래는 흔한 예시들.


음악은 단지 한 종류의 공기의 떨림에 불과하다.
모나리자는 단지 그 화학적 구성이 알려진 페인트 조각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단지 흰 종이의 섬유 위에 붙어 있는 검은 잉크의 반점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비판은 오류다. 예술작품, 인간의 역사적 활동, 사상, 이념, 소통 등이 가지는 가치는 그것의 화학적 구성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그림을 아무리 잘 표절한들, 사람들이 그 그림이 표절작임을 알면, 그 표절작에는 원본과 같은 (역사적, 인문학적) 가치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예술로서의 모나리자를 제대로 환원하려면 역사와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두뇌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어떻게 신경 활동을 유발하여 그림의 구성과 터치를 만들어 내었는가의 문제와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의 두뇌에서 어떤 인지과정을 거쳐 이러한 예술적 감흥을 받게 되는 가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나아가 환원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심리적 / 신경적 과정을 다시 분자 활동으로 환원해야 할 것이다. 

이런 비판들은 환원주의에 대한 수많은 논의를 단출하게 만들었다. 공리주의 테마에서 트롤리 문제만 주구장창 주워삼기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환원주의적 전통은 이런 극단적인 사례에 논파될 만큼 만만하지는 않다.

 

대표적 비판론자들
대표적인 환원주의 비판론자들로서 몇 명을 꼽아 보자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반박한 생리학자로 유명해진 D.노블(1936~)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생명의 음악》에서 시스템 이론적인 접근을 시도하며, 이에 곁들여서 환원주의적 생물학의 이해를 논박한 바 있다. 또한 물리학자 P.W.앤더슨(1923~2020) 역시 이미 "모든 것을 단순한 근본적 법칙들로 환원시키는 힘은 그런 법칙들로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겠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환원주의에 대해 긍정적 입장이다. 

한편 진화심리학자이자 성심리학자인 길리언 브라운은 진화생물학자 케빈 랠런드와 함께 진화론의 적용영역을 총망라하는 《센스 앤 넌센스》 라는 책을 썼는데, 사회과학의 각종 영역들에서 생물학적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려는 경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까댔다. 즉 사회과학의 여러 문제들을 무작정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사회생물학자들은 진화론에 열광한 나머지, 잠시 멈춰서서 문제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발전시키거나, 사회과학 문헌을 읽거나, 대안이 될 만한 설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문제에서 저 문제로 즉흥적으로 옮겨 다니며 피상적인 이야기만 지어내기 일쑤였다... (중략) ...즉, 사회생물학에는 모름지기 '모든 유형의 사회는 가능하며, 하위 집단 간의 모든 행동 차이는 제거될 수 있다' 고 가정하는 출발점, 즉 귀무 가설(null hypothesis)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회생물학자들이 가설검증 기준을 좀 더 까다롭게 유지했다면, 진화론적 설명이 남용될 여지는 줄어들었을 것이다..." 
- 《센스 앤 넌센스》, p.146

한편 장대익 교수가 네이버에 추천하기도 한 서적인 《DNA 독트린》에서, 저자 리처드 르원틴은 주의 깊게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개인적인 공격성과 국가의 공격성을 혼동하는 것은, 개인이 남에게 따귀를 맞았을 때 느끼는 급격한 호르몬 분지와 전쟁의 원인인 자연자원, 교역 통로, 농산물 가격, 노동력의 가용성 등을 통제하기 위한 국가의 정치적 의제를 혼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개인들의 실수가 사회를 좌지우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인간 본성 내용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 《DNA 독트린》, p.167

노벨화학상 수상자 로알드 호프만도 환원주의 비판자이다. 그의 대표적 서적인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에서는 한 목차 전체를 환원주의자들의 논리, 그리고 그 논리의 문제점과 환원주의적 행태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서술하고있다. 

그외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저서《과정과 실재》에,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란 개념으로 환원주의를 비판한다. 러셀과 함께 수학을 논리로 환원하려던 작업의 실패를 몸소 겪은 만큼, 환원주의에 회의적이다. 







환원주의 vs 전일주의

부분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부분의 합으로만 설명할 수도 없다

 환원주의

손가락을 보라. 자세히 보면 지문이 보인다. 육안으로는 여기까지다. 현미경으로 보면 이제 울퉁불퉁한 피부표면이 보일 텐데, 여기저기 이상하게 생긴 벌레들도 있을 거다. 좀 더 확대해보면 세포가 보인다. 사회가 인간들의 모임이듯 우리 몸은 세포들의 모임이다. 더 확대해보면 세포를 이루는 소기관들이 보인다. 세포핵, 소포체, 미토콘드리아 같은 거 말이다. 이 정도까지 확대하려면 비싼 전자현미경이 필요하다. 세포핵 내부를 보면 당신의 유전정보가 담긴 DNA가 보인다. 절반은 아버지, 절반은 어머니에게서 온 거다. DNA는 공 모양으로 뭉쳐있지만 이것을 펴서 확대하면 탄소, 산소 같은 원자들이 보인다. 손가락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100억배 정도 확대해야 한다. 

 이제 원자를 확대해보면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가 보이고, 원자핵을 확대해보면 양성자와 중성자가 보이고, 이들을 더 확대하면 쿼크가 보일 거다. 이쯤 되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처럼 세상은 보다 작은 것들의 모임으로 되어 있다. 물리학자는 모든 물질을 이루는 궁극의 단위와 이들을 기술하는 법칙을 찾으려 한다. 

쿼크를 이해하면 이들이 모인 원자핵을 이해할 수 있고, 원자핵과 전자를 이해하면 원자를 이해할 수 있고, 원자를 이해하면 DNA를 이해할 수 있고, DNA를 이해하면 단백질을 이해할 수 있고, 단백질로 이루어진 세포소기관을 이해하면 세포를 이해할 수 있고, 세포를 이해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을 이해하면 사회를 이해할 수 있고…. 이쯤 되면 당신은 내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대상을 쪼개어 부분으로 나눈 다음, 이들로부터 전체를 이해하려는 방법을 ‘환원주의’라고 한다. 

환원주의는 물리학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원자와 분자가 그 예다. 산업혁명은 증기기관과 함께 시작되었다. 증기기관을 설명하는 열역학은 ‘기체분자’라는 개념에서 탄생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분자들이 날아다니며 피스톤을 두들기는 것이 압력이다. 온도가 높아지면 기체분자의 속력이 빨라진다. 이들이 피스톤을 밀어서 증기기관이 움직인다. 증기기관이야말로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규모로 대체한 첫 사례다. 아무튼 증기기관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기체분자들의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체분자는 원자로 구성된다. 19세기 화학자들은 원자를 더 이상 쪼개어질 수 없는 물질의 최소단위라고 정의했지만, 20세기가 시작되자 원자에 세부구조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원자의 세부구조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이 완성되자 원자들이 왜 그런 화학적 특성을 갖는지 이해된다. 수소는 왜 폭발하는지, 다이아몬드는 왜 단단한지 알게 된 것이다. 아마 이때가 환원주의의 황금기였으리라. 여기서 화학은 양자역학의 응용에 불과하다는 환원주의적 발언이 나오게 된다.

알코올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기화합물의 하나다. 동의하지 못하겠다면 맥주 없는 금요일을 생각해보시라. 술에 들어있는 알코올은 효모라는 세균이 설탕을 분해할 때 부산물로 나온다. 산소 없이 에너지를 만드는 이 과정을 발효라 부르는데, 루이 파스퇴르가 발견했다. 인간의 경우 산소를 이용하여 음식에 들어있는 포도당을 분해한다. 우리가 숨을 쉬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 파스퇴르는 발효가 단순한 화학반응이 아니라 생명의 고유한 현상이라며, 여기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것을 생기론(生氣論)이라 한다. 화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생명의 고유한 현상이 있다는 생각이다. 

파스퇴르가 죽은 후 에두아르트 부흐너(1907년 노벨 화학상 수상)는 발효가 화학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효모를 갈아서 즙을 내어 완전히 분해시킨 후에도 발효가 일어남을 보인 것이다. 발효는 생명의 고유한 작용이 아니라 효소들이 일으키는 화학반응에 불과하며 효모는 일종의 화학공장이었던 것이다. 이 발견으로 생기론은 종말을 맞았으며, 생명을 환원주의로 설명하는 시각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환원주의는 현대과학의 첨단무기였다. 


많은 것은 다르다

1972년 사이언스지에는 ‘More is different(많은 것은 다르다)’라는 필립 앤더슨(197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에세이가 실렸다.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물리학은 여러 세부 분야로 나뉘어 있으며, 분야가 다르면 서로 소통이 쉽지 않다. 입자물리는 물질을 이루는 궁극의 근원을 탐색하는 분야로, 20세기 주류 물리학이 걸어온 길을 대표한다. 자연을 보는 시각이 환원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응집물리는 수없이 많은 원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고체를 탐구하는 분야로, 여기서는 많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래 ‘고체물리’라 불리던 분야였는데, 고체로 분류하기 애매한 대상도 다루기 때문에 지금은 응집물리라고 한다. 

앤더슨의 비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환원주의적 관점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는 거다. 환원주의는 이렇게 주장한다. 원자물리는 입자물리의 응용에 불과하고, 화학은 원자물리에 불과하고, 생물학은 화학에 불과하고, 인간은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만약 입자에서 원자, 화학, 생명, 인간으로 층위(層位)가 높아짐에 따라 이전 층위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법칙이 출현한다면, 환원주의처럼 단순히 말하기는 힘들 거다. 

우리 몸은 원자로 되어 있다. 성인의 경우 원자 수는 대략 7,000,000,000,000,000,000,000,000,000개다. 세어보지 마시라. ‘0’이 27개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주로 탄소, 수소, 산소, 질소의 네 종류다. 양자역학은 이들 원자를 완벽하게 기술한다. 하지만 아무리 원자 각각을 들여다본들 소화불량이 무엇인지 알아낼 방법은 없다. 원자들이 모여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이 되고, 이들이 모여 세포가 되고, 세포들이 모여 위장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물론 나의 위장(胃腸)은 원자로 되어 있으며, 이 원자들은 양자역학에 따라 운동한다. 더 나아가 원자는 쿼크와 전자로 되어 있으며, 이들의 운동은 입자물리학이 설명한다. 하지만 입자물리나 양자역학에서 위장을 바로 설명할 수는 없다. 원자가 많으면 뭔가 달라진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예 많은 것을 다루는 물리 분야가 따로 있다. 바로 통계물리다. 통계물리는 앞서 이야기한 기체분자의 운동을 설명하는 열역학에서 탄생했다. 기체는 원자나 분자들이 날아다니는 상태다. 기체 상태에서는 물이나 철이 비슷해 보인다. 텅 빈 공간을 조그마한 입자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자세히 보면 하나는 물 분자고, 다른 하나는 철 원자일 뿐이다. 하지만 온도를 20도 정도로 낮추면 전혀 다른 ‘것’이 생겨난다. 하나는 물이라는 액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철이라는 고체가 된다. 이처럼 기체가 액체나 고체로 되어 상(相)이 바뀌는 현상을 상전이(相轉移)라 부른다. 철 기체로부터 철 고체의 특성을 유추해낼 수 있을까? 

물체를 던지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있다. 물체의 궤적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구 위에서 이 궤적은 이차함수라는 도형으로 주어지며, 이 도형을 그려서 미래의 위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수능에 문제로 나오는 거다. 하지만 중간에 궤적이 갑자기 끊어지면 어떨까? 어려운 말로 불연속점이 생긴 것인데, 이 경우에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할까? 통계물리학에 따르면 상전이가 일어나는 순간 물리량들은 무한히 커지거나 불연속이 된다. 즉 상전이 전후를 연속적으로 연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체로부터 고체의 특성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전이가 일어날 때 무언가 새로운 특성이 돌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성요소에서 없던 성질이 전체구조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창발(創發)’이라 부른다. 

창발의 예를 보기는 쉽다. 당신 주위를 둘러보라. 수많은 자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자동차가 움직이고 커피가 끓고 있다. 인간행동, 사회현상도 모두 여기 포함시킬 수 있다. 이것들 가운데 원자로부터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창발이라 보면 된다. 


환원 대 창발

환원주의에 대립되는 말로 ‘전일주의(holism)’가 있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창발은 전일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래서 창발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환원 대 창발 논쟁은 잊을 만하면 나타난다. 1987년 미국에서는 초전도 초대형 충돌기(SSC)를 놓고 두 진영(?)이 충돌했다. SSC는 수십억달러의 건설비용이 필요한 입자가속기로, 입자물리 분야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앤더슨은 SSC 의회 예산청문회에 참석하여 이런 증언을 했다. 응집물리에 충분한 연구비가 지원되고 있지 않으며, SSC로 얻게 될 입자물리의 결과는 생명과학에 있어 DNA의 구조를 밝힌 일보다 더 근본적이지 않다. 

SSC와 같이 엄청난 비용이 드는 장치를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깔린 논리는 이렇다. 이런 장비로 알아낼 기본입자에 대한 이론이야말로 과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지식이라는 것이다. 환원주의자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다. 결국 모든 것은 기본입자의 운동으로 환원될 터다. 하지만 앤더슨의 주장은 입자물리가 응집물리나 생명과학보다 더 근본적이지 않다는 거다. 창발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스티븐 와인버그(197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는 그의 책 <최종이론의 꿈>에서 앤더슨을 비판한다. DNA 이야기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DNA가 생물학의 근본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에 있어서의 환원주의다. 동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는 생명에 대한 모든 지식을 DNA에 대한 연구로 환원하려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맞서 싸우지 않았는가. 창발주의자 앤더슨은 응집물리 수준에서만 창발주의자다. 아마도 앤더슨은 응집물리의 중요한 모형이나 이론들이 재료공학과 화학의 수많은 물질의 특성에 비해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와인버그는 전형적인 환원론자다. 물론 그는 반환원주의자들이 자신의 환원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니까 적절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와인버그에 따르면 앤더슨이 말한 DNA 이야기에도 일리는 있다. DNA가 모든 생명과학에 근본적이라기보다 DNA 자체가 모든 생명 자체에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많은 이들이 환원 대 창발 논쟁에 혼란스러워한다. 부분으로 쪼개서 이해해야 하나, 전체를 그대로 두고 이해해야 하나. 필자의 생각에 이 논쟁은 ‘본성 대 양육’ 논쟁과 비슷하다. 사람의 성격이나 지능이 유전자와 양육 중 어느 것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느냐는 과학논쟁이다. 일란성 쌍둥이가 어릴 때 고아가 되어 각각 다른 가정에 입양된 경우 성인이 된 이들의 행동을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다. 한동안 엄청난 논쟁이 있었지만 최근의 결론은 50 대 50이란다. 환원 대 창발 논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는 양자역학으로 설명된다. 원자가 모이면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같은 고분자가 된다. 적혈구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사용하기는 힘들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크다. 하지만 적혈구 헤모글로빈의 헴에 있는 철 원자가 산소와 결합하는 것은 양자역학이 설명한다. 이렇게 적혈구 수준의 이해에서도 원자수준의 환원적 설명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적혈구와 다른 수많은 고분자들이 모여 만들어낸 인간을 이해하는 데 원자의 이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전혀 다른 법칙이 필요하다. 하지만 11번 염색체상의 헤모글로빈 염기서열 중 단 하나가 잘못되면 그 사람은 겸형 적혈구 빈혈증에 걸린다. 원자 몇 개의 실수다. 이 문단에 일부러 ‘하지만’을 3번이나 썼다.  

현대과학의 역사는 환원주의의 위력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몰랐던 진실을 환원주의가 찾아냈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0.00000000000000000000043㎞의 쿼크에서 440,000,000,000,000,000,000,000㎞의 우주까지 층위가 있다. 각 층위들은 자신만의 언어와 법칙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접한 위아래 층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물리학을 배울 이유가 없다. 환원주의의 힘이다. 창발은 많으면 다르다고, 층위가 다르면 새로운 법칙이 나타난다고 말해준다. 양극단에 서있지 않다면 이 두 입장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지만 부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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