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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1811년, 순조, 홍경래, 우군칙, 평안도, 서북민 차별

Jobs9 2021. 4. 1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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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다.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移秧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借耕地)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부농이 성장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영세빈농·전호(佃戶)가 되었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 시기 농민층 분해는 다수의 소농민들을 중세사회의 특징인 토지에 대한 긴박을 해체시켜 임노동자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농·서민지주로 양극 분해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상공업은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專業化)가 이루어지고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私商人)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개성상인이나 의주상인들은 대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구조에도 부(富)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의 증가와 평민·천민의 감소, 몰락양반의 다수 존재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동요되었다.

내용

사회·경제적 변화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특히, 정치적으로 치열했던 17, 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노론에 의한 안동 김씨 척족의 일당 전제가 성립됨으로써 삼정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 특권 상인과 지방 사상인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더욱이 평안도 지방은 대청무역(對淸貿易)이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더욱 활발해져서 송상(松商)·만상(灣商) 가운데는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1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견직물업·유기(鍮器) 등 수공업 생산과 담배 등 상품작물의 재배, 금·은의 수요 급증으로 인한 광산 개발이 활발하였다.

그에 따라 양반지주·상인층에 의한 고리대업의 성행으로 소농민의 몰락도 심화되었다. 반면 일부 농민층은 부를 축적해 향촌의 향무층(鄕武層)으로 진출했으며, 빈농·유민들이 잠채광업(潛採鑛業)에 몰려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이 난은 10여 년 간 준비되었던 조직적 반란이었다. 여기에는 홍경래·우군칙·김사용(金士用)·김창시(金昌始) 등으로 대표되는 몰락양반·유랑지식인들의 『정감록(鄭鑑錄)』 등에 의한 이념 제공이 있었다.

그리고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새로이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요호(饒戶)·부민(富民) 등 부농·서민지주층과 사상인층의 물력(物力) 및 조직력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역노(驛奴)출신으로 대청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산의 부호 이희저(李禧著)의 집이 있는 다복동(多福洞)을 거점으로 삼고, 각지의 부호·부상대고(富商大賈)들과 연계를 맺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노동자·빈농·유민 등을 급가고용(給價雇用)해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다.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특히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즉 이 때의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風憲) 등 향임(鄕任)과 별장(別將)·천총·파총·별무사(別武士) 등 무임(武任)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납전승향(納錢陞鄕)주 01)한 계층이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전세가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주력부대가 지닌 취약성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비록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으로 대표되는 봉건 지배층에 대한 공동의 이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부인 부농·상인층과 일반 병졸을 구성하는 소농·빈농·유민·임노동자층이 가지는 상호 대립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하층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 대해 격문의 내용에서는 단지 서북인의 차별대우,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정진인(鄭眞人)의 출현 등만을 언급할 뿐 정작 소농·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를 대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휘부가 점령 지역에서 이임(里任)·면임(面任) 등에게 병졸들을 징발하도록 한 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京軍)·향군(鄕軍)·민병(民兵)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이러한 강인한 저항은 곧 주력부대의 구성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정주성의 농민군은 이전의 급가고용이나 소극적 참여자가 아니라 주로 박천·가산 일대의 소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관군의 초토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퇴각해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밖의 농민들의 협조와 또 지휘부에서도 부민(富民)에 대한 가혹한 징발을 통해 평등한 분배를 제공한 때문이었다.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남정(男丁) 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난에서 부농과는 달리 소극적인 구실만을 담당했던 광범한 소농·빈민층은 이후 임술민란(壬戌民亂)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또, 이 난에서는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가 구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평안도 지방이 주요 무대였지만 동시에 도성(都城)에서 소론 박종일(朴鍾一)을 중심으로 중인·서얼층이 연계해 정권 탈취를 계획한 것이라든지, 기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층의 산발적인 소요는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 난에 대한 평가는 6·25 이전에는 오다(小田省吾) 등에 의해 당쟁사적 관점에서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라든가, 이를 이용한 홍경래 개인의 정권 탈취 기도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체성 비판의 일환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자본주의 맹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달라졌다. 즉 그 주도층의 성격을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경영형부농, 서민지주, 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지식인 등이 광산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농민전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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