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20세기 영문학에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1951년에 발표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을 찾기 어렵다. 1960년 미국에서 한 교사가 교재로 지정했다가 해임당한 것을 시작으로, 이 책은 1980년대까지 미국의 많은 고등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됐다. 욕설, 성적 암시, 신성모독, 음주·흡연 묘사 등이 그 이유였다. 1980년 존 레논을 살해한 범인이 경찰이 올 때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책의 내용이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까지 일었다.
숱한 비판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베스트셀러다. 특히 주인공 ‘홀든 콜필드’와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이가 주요 애독자층이다.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라는 인물을 통해 속물과 순수함,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헤매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7세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다섯 과목 중 네 과목에서 낙제해 다니던 ‘펜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다. 홀든 콜필드는 청소년기 특유의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청소년은 어른과 아이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다. 몸은 어른과 엇비슷하게 컸지만 어른이 누리는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세상의 풍파를 맞기에는 아직 어리지만 어린아이처럼 뛰어놀지도 못한다. 꼼짝없이 학교에 앉아서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근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면서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실제로 작중에서 나타나는 홀든 콜필드의 행동에는 모순된 점이 많다. 홀든은 ‘빌어먹을’(goddamn), ‘저능아’(moron)같은 욕설을 밥 먹듯이 사용하면서도 초등학교 벽에 ‘씨발’(fuck you)이라는 낙서가 있자 아이들이 보면 어떡할까 걱정한다. 또 그는 “난 어쩌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색정광일지도 몰랐다”고 자평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부른 매춘부가 방으로 오자 성관계를 거부하고 우울함에 빠진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홀든이 일관되게 혐오하는 것은 ‘속물’이다. 그는 퇴학당한 후에도 방학 전까지 기숙사에 머물 수 있었지만, 속물 룸메이트와 싸운 뒤 학교를 뛰쳐나간다. 얄궂게도 홀든이 학교에서 탈출한 후 마주한 뉴욕의 거리는 끝도 보이지 않는 속물들의 바다였다. 홀든이 ‘가짜’(phony)라고 표현하는 전형적인 뉴욕 속물은 대략 이런 식이다. 그들은 펜시 고등학교와 같은 고급 사립학교에서 무리 지어 다니다가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해 거만한 목소리로 토론한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 높은 연봉을 받고 플란넬* 양복을 맞춰 입고 자신의 고급 자동차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여기서 말하는 속물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홀든이 지독한 속물로 묘사하는 바텐더에 대한 생각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정의를 엿볼 수 있다. 바텐더는 “유명 인사나 상류층이 아니면 말도 제대로 하지 않는 놈”이고, 상류층은 “자신이 굉장한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쓸데없는 안부나 묻는 사람들이다. 이를 통해 홀든이 생각하는 속물은 물질적 성공과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행동하는 인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작품이 발표됐던 1950년대 미국 자본주의 황금기에 사람들이 호황에 취한 채 물질적 축적에만 몰두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샐린저는 홀든의 입을 빌려 당시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이 속물이라는 점을 통렬히 지적하고 있다.
작중에서 속물의 대척점에는 순수함이 있다. 순수함은 아이들과 연결돼 나타난다. 홀든 콜필드는 속물 어른들을 대할 때 하염없이 냉소적이지만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우호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스케이트 끈을 묶지 못해 쩔쩔매는 아이를 친절하게 도와준 뒤, 고맙다는 말을 듣자 “아이들이 공손하고 상냥하게 대해주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며 흐뭇해한다.
특히 홀든의 여동생 피비는 순수함을 상징하는 아이로, 홀든이 순수함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뉴욕 거리를 헤맨 끝에 집에 숨어 들어간 그에게 피비는 “좋아하는 것을 한가지 말해보라”고 요구한다. 이에 홀든은 “호밀밭에서 재미있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답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주는 사람으로, 순수함을 지키려는 홀든의 열망을 함축한다. 뉴욕에서 방황한 끝에 홀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은 순수함이라는 명쾌한 답으로 끝나지 않는다. 홀든의 ‘순수함 추구’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청소년은 언제까지나 아이같이 순수할 수 없다. 어른이 돼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홀든은 이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소설 초반부에 그가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미래를 걱정하게 될 거야. 다만 그때가 되면 너무 늦었겠지”라는 말을 들으며 절망하는 장면이 이를 보여준다.
홀든은 미래에 대한 현실적 걱정과 순수함 추구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탈출을 꿈꾼다. 그는 여자친구 샐리에게 매사추세츠나 버몬트로 도피해 오두막집에서 단둘이 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샐리는 쌀쌀맞게 “우리는 사실상 어린아이일 뿐”이라며 “돈이 떨어지면 굶어죽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알려준다. 한편 홀든은 버스에 무임승차해 서부 어딘가로 도망가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사는 계획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도 몽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이런 비현실적인 도피가 아닌 현실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한다. 평소 어른들의 조언을 무시하던 홀든은 전에 친하게 지내던 교사인 앤톨리니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앤톨리니 선생님이 ‘교육을 더 받아야 한다’는 식의 조언을 하자 여느 때와 달리 선생님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한다. 하지만 앤톨리니 선생님에게 의지하려는 노력도 실패하고 만다. 잠든 자신의 머리(head)*를 만지고 있는 앤톨리니 선생님을 발견한 것이다. 홀든은 이런 행동에 성적 수치심을 느껴 앤톨리니 선생님의 집에서 황급히 도망친다.
결국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이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것으로 뚜렷한 해결책 없이 끝난다. 정신과 전문의는 학교에 가게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를 물어보지만, 홀든은 “실제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며 명확한 답변을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홀든 콜필드가 정신적 성장을 이뤄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은 실패한 성장소설이다. 일반적인 성장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성숙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홀든의 모습은 성숙과 거리가 멀다. 홀든은 성장에 실패했고, 아직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헤매고 있다.
역설적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은 ‘실패’한 성장소설이기 때문에 ‘성공’했다. 샐린저는 자신의 작품에서 특정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홀든 콜필드란 인물을 통해 청소년, 나아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을 대변한다. 반세기도 전에 발표된 작품이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홀든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