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의 첫 등장 시기와 아시아 진출 시기에 관한 지난 30년간의 정설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새롭게 발견되는 화석과 유전자를 이용한 연구결과들이 축적되면서다. 현생인류의 탄생 시점은 기존 2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앞당겨져 30만 년 전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 처음 발을 디딘 연대는 기존 6만 년 전에서 12만 년 전으로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 기원론’은 인류가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리베카 캔 하와이대 의대 교수(당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연구원)팀이 1987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이 시초로, 캔 교수는 현생인류 147명으로부터 모계로만 유전되는 핵 바깥의 DNA(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 해독해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이 연구는 인류학계에 큰 충격을 줬고, 후속 연구와 함께 지구 곳곳에 인류가 퍼진 경로를 세밀하게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에 따르면 인류는 약 6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했으며 가장 먼 지역에 해당하는 동아시아와 호주 대륙에는 4만~4만5000년 전에 도착했다.
이 정설에 먼저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은 고인류학자들이다. 이들은 아시아 땅에 6만 년 전보다 훨씬 이전에 현생인류가 퍼졌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최근 발견되고 있는 화석이다. 올해 8월 네이처에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약 7만3000년 전에 현생인류가 살았다는 호주 매쿼리대 연구팀의 화석 연구 결과가 실렸다. 2015년 10월에는 중국 남부 후난성의 한 동굴에서 연대가 8만~12만 년 전까지 올라가는 치아 화석이 수십 개 발굴됐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대만 해역에서는 연대가 최대 19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현생인류 조상의 턱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논쟁의 선봉에 서 있는 학자는 한국계 미국인 인류학자인 크리스토퍼 배 미국 하와이대 인류학과 교수다. 그는 “내가 직접 발굴하고 있는 중국 남부 광시성은 물론이고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6만 년보다 이른 시기에 살았던 화석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며 “인류의 아시아 진출 시기를 앞당길 근거가 충분히 축적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년 3월 포르투갈에서 학회를 열어 세계 학자들과 이 사실을 논의했고, 올해 12월 학술지 ‘현대인류학’ 특집호와 8일자 ‘사이언스’에 관련 내용을 발표했다. 배 교수는 지난주 부산에서 열린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후변화 및 인류이동’ 콘퍼런스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옛 기후를 연구하는 고기후학자들도 배 교수의 의견을 뒷받침하고 있다. 기후 모델링 기법으로 인류의 이주를 복원하는 연구로 작년 9월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한 악셀 티머만 IBS 기후물리연구단장은 “유전학자들은 6만~7만 년 전부터 현생인류의 이주가 시작됐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그 이전에 아프리카를 벗어났다가 나중에) 아프리카로 되돌아간 인구를 고려하지 않아 오해를 한 것”이라며 “12만 년 전에 이주가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유전학자들도 가세하고 있다. 작년 10월 네이처에 실린 게놈 해독 연구에서 미국 연구팀은 현생인류가 약 12만 년 전 이전에 아프리카를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2015년에는 학술지 ‘진화인류학’에 실린 논문 역시 인류의 확산을 연구한 기존 논문의 데이터를 재해석해, 현생인류가 서남아시아로 진출한 시기가 12만 년 전이라고 결론 내렸다. 여기에 올해 6월 말,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에서 발견된 31만 년 전 화석이 현생인류의 화석으로 새롭게 밝혀지면서 인류의 탄생 연대 자체도 10만 년 앞당겨졌다.